마피아 보쿠토 x 갬블러 쿠로오
※ 조직폭력배의 묘사는 상상에 기반한 것으로 폭력 등이 상당부분 미화될 수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계약서상에 명시된 기간은 1년이었다. 쿠로오는 지나치게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카아시의 생각은 달랐다. 하루 종일 고작 포커놀음 따위에 시간을 보낼 순 없지 않나.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수업시간은 열흘에 한 두 번이나 시간이 될까, 거기에 머리 쓰는걸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니 일단 시간은 많을수록 좋았다.
하지만 고작 1년간의 보수라기에 아카아시가 제시한 금액은 그 쿠로오조차도 눈이 동그래질 정도의 거금이었다.
그 금액에 마음이 혹한 것도 잠시, 쿠로오는 더더욱 긴장한 얼굴로 침을 무겁게 꿀꺽 내리삼켰다.
‘이정도 금액을 제시했다는 건.. 딴마음 먹을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네.’
쿠로오의 시선이 금액에 못박혀있자 아카아시는 눈썹을 슥 들어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그리고.. 이유가 어찌되었던 보스를 가르쳤던 분을 그냥 도시에 놔둘 순 없습니다.”
“네?”
“일단 사제관계를 맺었으니, 그 연이 부모와 같지 않겠습니까.”
“부모..요?”
‘흑사회가 중국 본토쪽의 세력이긴 했는데.’
후쿠로우다니라는 이름을 들어보면 그보단 섬나라의 야쿠자가 떠오르지만 말이다. 갑자기 고루한 말을 꺼내기 시작해 쿠로오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어올렸다.
“일단 함부로 대할 수도 없을 뿐더러 만약에 불편한 일이라도 생기면.. 남들 보기 좋지가 않죠.”
말꼬리를 흐리며 입술을 들어올리는 표정에 쿠로오는 아, 하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일단 명목상이라 해도 부엉이회의 헤드를 가르쳤던 스승이다. 상대편 조직에 납치당하기라도 하면 부엉이회는 그 인질놀이를 무시할 수 없다. 인질을 무시했다간 사제간의 연도 무시하는 무뢰배라는 치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총과 칼이 난무하는 무법지대라 해도 그것을 휘두르려면 최소한의 명분이 필요하며, 그 명분을 저버린다면 나머지 네개의 세력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까.
“..해서 교육이 끝나면 미안하지만 이사를 가 주셔야겠습니다.”
“네?”
“어디든 좋아요. 미국, 캐나다, 서유럽.. 원한다면 남아공도. 여권과 시민권도 준비해드리죠.”
아카아시의 말은, 일 다 했으면 눈앞에서 꺼져달란 소리와 다름이 없었으나 쿠로오는 홀린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지막 조건이야말로 쿠로오가 그토록 원하고 있던 것이었으니까.
그런 쿠로오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카아시는 씩 웃으며 계약서를 마저 작성했다. 쿠로오는 총 세장의 계약서를 작성하였고 한부는 쿠로오 본인이, 한 부는 아카아시가 그리고 나머지 한부는 공증을 받아 변호사 사무실에 보관될 예정이라고 했다. 어쨌든 일처리 하나만큼은 확실한 곳이었다.
난생 처음 만져보는 묵직한 만년필의 무게에 쿠로오는 손목이 주죽이 든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펜에, 난생 처음 해보는 본인의 서명까지. 멋들어진 싸인 대신 본인의 이름을 어설프게 써놓은 쿠로오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계약서를 묘한 얼굴로 품 안에 집어넣었다.
일 년.
일 년만 바짝 엎드리면 드디어 이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부엉이회의 이인자를 눈앞에 두고서도 이게 꿈이 아니길 바라다니.’
바로 몇시간 전의 쿠로오로써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변화였다.
두 장의 계약서를 챙긴 아카아시는 밤이 늦었으니 변호사를 부르는건 내일로 하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결에 함께 일어선 쿠로오는 그럼 가시죠, 하는 말에 드디어 집에 보내주는구나! 하고 환하게 반색했다.
“그럼, 보스를 만나뵈러 가시죠.”
아카아시의 말만 아니었어도 그 미소가 일초는 더 갔을 것이다.
쿠로오는 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숨을 헐떡이며 말을 더듬거렸다.
“제, 제가 보스를, 보스를요?”
“내일부터 가르쳐야 할 학생이니까요. 오늘은 늦었으니 인사만 하고 수업은 내일부터 진행하죠.”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반응에 일말의 신경도 쏟지 않으며 문을 열고 먼저 걷기 시작했다. 주인 없는 방에 혼자 남아있을 수 없는 쿠로오가 아카아시의 뒤를 따라 걷자 문 밖에 서 있던 두명의 덩치 큰 남자가 쿠로오의 퇴로를 막듯 함께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긴장으로 새하얗게 변한 안색의 쿠로오를 구원한 것은 다름아닌 그 보스였다. 분명 그, 문 앞까지 가긴 했는데- 뭣 때문인지 방문은 열리지 않았고, 심기가 불편해진 아카아시가 방 안으로 들어가보더니 한층 인상이 구겨진 채 다시 나왔다.
쿠로오가 그 이유를 추측하기엔 문 틈에서 새어나온 남녀의 신음소리 때문인 것 같았다. 하기야, 자기 같아도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는데 상사라는 작자가 침대에서 여자랑 놀아나느라 일처리 확인도 안해주면 상당히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았다..
“..인사는 내일로 미루죠.”
“하하, 전 언제든 괜찮습니다. 그럼 전 이만 집으로..”
“아무래도 당신이 본채에 머무르는 건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어려울 것 같아 별채를 준비했습니다. 지금쯤 방 준비는 다 되어있을 테니 머무르는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예?”
집으로 보내달라니까 왠 별채? 그러나 아카아시는 쿠로오가 입을 열 틈을 주지 않고 툭 내뱉었다.
“설마 집에서 출퇴근을 하실 생각은 아니었겠죠.”
그럴 생각 만반이었다.
“아니, 저.. 그래도 일단 갈아입을 옷이나 교재같은 걸 좀 챙겨야 하는데..”
“짐은 모두 옮겨져있을 겁니다. 필요한 건 사용인에게 말하면 왠만하면 구해다 줄 테니, 어려워하지 말고 말 하세요. 오늘부터 당신도 식객으로 머물게 될 테니.”
“......”
고작 포커 선생을 경호하기 위해 주요인력을 뺄 수는 없다는 뜻은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쿠로오가 계약서를 쓰는 그 짧은 시간 쿠로오의 집에서 짐을 다 가져올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단 왕복 거리만도 한시간이 훌쩍 넘는다.
그렇다면 쿠로오가 집을 떠나 도박장으로 나선 순간부터 쿠로오의 집에 침입해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짐을 옮기기 시작했을거란 이야기가 된다.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려는 입매를 꾹 참아 누르며 하하,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거절할거란 선택지를 준비해두지 않았군.’
승낙한다면 잘 된 일이고, 거절하더라도 쿠로오가 집으로 다시 돌아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버린 아카아시 대신 쿠로오를 여기로 데려왔던 남자가 쿠로오를 안내해주었다.
1층 현관으로 나가 오른편 정원에 난 사잇길로 십분쯤 걸으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벽돌 위로 아이비가 벽을 뒤덮은 꽤 고풍스러운 건물이 나타났다.
쿠로오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은 건물로 보였다. 물론 이미 먼저 온 손님들이 있을 가능성은 제로가 아니었지만.
사자 모양의 청동 손잡이를 잡고 문을 당겨 열자 어둑한 1층이 모습을 보였다. 남자는 전등을 켜는 대신 가지고 온 손전등으로 주변을 밝히며 앞서 걸었다.
쿠로오는 다른 이들보다 밤눈이 밝은 편이었고, 남자의 뒤를 따르던 쿠로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1층을 살폈다.
겉보기에도 넓어보인다 싶더니, 일반적인 방의 용도가 아닌 듯 1층은 벽하나 없이 훤히 뚫려 있었고 흰 천이 덮인 가구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저건 빌리아드 테이블인가?’
프로답게 쿠로오는 흰 천 아래 잠들어있을 것들을 한번에 알아차릴수 있었다. 저 끝엔 4구당구대와 마작 테이블이 있었고 오른쪽엔 둥근 모양의 포커 테이블이 놓여 있다. 대충 알아볼 수 있는 것만 이 정도인걸 보아하니 이 건물의 1층은 쁘띠 카지노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이쪽이다.”
쿠로오가 잠시 발걸음을 늦춘 사이 멀찍이 멀어진 남자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쿠로오를 불렀다.
평범한 은색의 엘레베이터가 아니라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고딕한 느낌의 검은색 철창 승강기였다. 내구성이 상당히 약해보였는데, 쿠로오의 염려와 달리 낡은 것은 외견 뿐인지 승강기는 아주 스무스하게 둘을 3층으로 올려주었다.
3층의 복도는 1층과는 아주 딴판인 분위기였다. 비슷한 것을 찾자면 호텔의 숙박층정도 될까, 똑같은 모양의 문을 여럿 지나 쿠로오는 복도 제일 끝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어섰다. 남자가 거기까지 쿠로오를 안내했기 때문이다.
“여기다. 내일 아침 사용인이 깨우러 올거다.”
남자는 너무 친절하지도 무례하지도 않게 툭 내뱉으며 자리를 떴다. 고작 다우트 스트릿에 사는 삼류 카드꾼 대접치곤 과했던 터라, 쿠로오는 들어가십쇼, 하고 있는 힘껏 예의를 차렸다.
“휘유~”
문 옆에서 방의 전등을 찾은 쿠로오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곳을 보고 호텔이라 생각한 게 완전히 틀린 건 아닌지 방 안은 꽤 그럴싸하게 꾸며져 있었다.
사람 둘이 자도 여유로울법한 큼직한 침대 하며 32인치 벽걸이 TV와 푹신해보이는 이인용 소파, 작달막한 행운목 화분, 반대편엔 작은 바가 있는 모던한 느낌의 부엌에.. 방 옆에 딸린 문을 열어보면 네 발이 달린 흰 욕조가 있는 욕실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 오백미리 생수 한병을 꺼내 시원하게 들이킨 쿠로오는 약간 압도당한 눈으로 방 안을 천천히 흩어보았다.
“대단한데..”
정말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머물러보지 못한 호화스런 방이었다.
천천히 다가가 침대 위에 손을 얹으면 흰 이불이 약간 단단하면서도 푹신하게 푸욱 잠겨들었다. 그 방 한가운데 불협화음처럼 툭 튀어나온 쿠로오의 짐이 아니었더라면 쿠로오는 방을 잘못 배정했나보다 하고 복도에서 밤을 샜을 것이다.
“여기서 일년을 보낸단 말이지.”
꿈만 같았다. 부디 일 년 사이 꿈의 장르가 고어 스릴러 호러로 변하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짐을 정리할까 싶었지만 쿠로오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아무런 뒷배도 없는 자신에게 이런 방이라니? 내일 당장이라도 다른 쪽방으로 쫓겨날지도 모르므로 짐은 이대로 두는게 나을 것 같았다.
대신 쿠로오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시작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욕실이라 물줄기는 세찼고 뜨거운 물도 아주 잘 나왔다. 원래 살던 집은 뜨거운 물만 틀면 수압이 소변처럼 쪼그라들었었는데.
비치된 향긋한 비누로 온몸을 닦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쿠로오는 머리카락도 제대로 말리지 않은 채 푹신푹신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베개가 좀 높은가 싶었는데 고개를 누르자 그대로 느릿하게 내려앉아 딱 좋을 때 쯔음 멈추었다.
아주, 아주 완벽한 잠자리였다.
바로 내일 부엉이회의 보스를 만나게 된다는 부담감마저 잠시 잊을 정도로 편안했다.
블랙라군의 로아나프라같은 가상의 무법도시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0^)9
(그러나 도시 이야기는 거의 안내올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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