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꿈치 안쪽의 접히는 부분을 알콜솜으로 문지르며 검사실을 나섰다.
피를 뽑아가다니, 설마 내 생체정보를 이용해 클론이라도 만들 셈인가 정부는. 물론 내가 레일건 정도 된다면야 모를까, 일개 외톨이들을 대량생산 해봤자 ‘집단’ 이 아니라 대량의 외톨이들만 생성될 뿐이니 쓸모라곤 없을 테지. 그래서 그런 걱정에 대해선 아예 염려를 하지 않고 있긴 하지만.
“히키가야. 검사는 다 끝났어?”
“켁.”
뭐야, 갑자기.
외톨이들은 갑작스럽게 이름을 불리는 거에 예민하다고. 왜냐하면 이름을 불릴 일이 별로 없으니까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 주눅들기 쉽거든. 주로 히키코모리 군이라던가 히키카에루 등으로 불리곤 했었으니 말이지..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한.. 아니 그보다 내 이름 제대로 알고 있었잖아!? 역시 이녀석도 그건가. 그녀석 이름은 알지만 부르기 싫은걸(웃음) 이런 건가. 가슴아픈 과거에 절로 표정이 어두워지자 하야마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와아. 다가오지 마 제발. 안전 거리를 지켜달라고.
하야마가 갑자기 이름을 부른 탓에 떨어뜨린 알콜솜을 주워 휴지통에 집어넣자 거리낌 없는 얼굴을 한 하야마 하야토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아. 응. 같이 돌아갈까 하고. 버스 타고 가지?”
내가 여자였으면 가져온 자전거따위 머릿속에서 지우고 응.. 이라고 수줍게 대답하며 단둘이 버스 데이트를 즐겼을 것만 같은 달콤한 목소리였다. 뭐야 무서워. 키크고 잘생기고 성적까지 좋은데 성격에 목소리까지 좋다니. 이런 스테이터스 배분으로 괜찮아? 괜찮은 거냐고.
일단 말없이 로비를 향해 걷자 하야마가 자신 바로 옆에 붙어 따라오기 시작했다. 자연히 주변의 시선도 이쪽으로 몰려든다. 와아 빌어먹을. 단지 이 리얼충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 데미지를 입는 기분이잖아.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지 서서히 팔다리가 쑤셔오기까지 하는 것 같다. 이정도의 정신력이라면 곧 생각만으로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 정도는 껌이겠는걸. 비로소 정신이 육체를 능가한다는 건가.
자동문이 열리자 바깥에서 뜨거운 바람이 느껴졌다. 바다가 인접한 탓에 끈적하고 습기찬 공기가 볼을 매만지는데 정말 이대로 쓰러져버리고 싶은 마음 뿐이다.
시간은 오후 세시 가량, 하루 중 제일 기온이 높을 때다. 후후. 태양은 정오에 가장 가까운데 왜 기온은 세시에 높냐고? 왜냐면 정오에 흡수한 열기를 콘크리트가 세시쯤 미친 듯이 뿜어내기 때문이지. 타이어가 녹아버릴 것만 같은 열기에 거의 한시간동안 자전거를 끌고 갈 생각을 하니 현기증부터 나기 시작한다. 누구 말마따나 확 버스를 이용해버릴까 싶은 마음도 잠깐 들었다니까.
“하야마. 넌 버스 타고 간댔지?”
“아, 응.”
“난 자전거 가지고 왔거든. 내일 보자.”
깔끔하게 말을 마치고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주륜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더할 나위 없는 거절의 기술이다.
뭐어. 어차피 하야마 저 녀석도 우연히 같은 반 아이를 만난 탓에 아무말 없이 돌아오기는 민망했을 테니까. 괜히 거기서 어영부영 친한 척을 했다간 버스 안에서 죽음보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게 분명하다. 누가 그딴 무간지옥에 갖힐 줄 알고. 차라리 이 뜨거운 콘크리트의 지옥에 뼈를 묻어주겠어.
자물쇠를 풀고 자전거 핸들을 잡아 끌기 시작하는데 어느새 하야마가 기척도 없이 내 뒤에 서 있었다. 화들짝 놀라며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하야마를 쳐다보는데 하야마가 억울한 듯 외쳤다.
“같이 가자고 했잖아. 자전거를 가지고 왔으면 이야기 해 주지 그랬어.”
평소의 어른스러운 모습과 달리 약간 삐진듯한 표정에 내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라고 말할 때가 아니지. 하. 이 자식 진심이냐. 리얼충 주제에 갭모에라니..
“아니 뭐. 버스 타고 간다며.”
“자전거.. 같이 타고 가면 되잖아?”
우와. 아무렇지도 않게 셔틀로 임명받았다.
날 때부터 명령하는 쪽이라 이건가. 이건 대체 무슨 패기냐. 패왕색? 아니면 리얼충색 패기?
어쨌든 하야마의 명령에 오래 끓인 된장국처럼 잔뜩 쫄아붙은 나는 말없이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대기했다. 이 자전거의 뒷자석에 코마치 외의 다른 사람을 앉히게 될 줄은..
미안하다 코마치. 50포인트정도 감점된다고 해도 묵묵히 받아들이겠어.
하지만 내 태도에 하야마는 묘한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히키가야, 나 꽤 무거운걸. 차라리 내가 운전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뭐? 네가 왜? 이건 내 자전거잖아.”
외톨이의 습성 하나 더. 자신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걸 꺼려한다. 왜냐하면 높은 확률로 없어지거나, 망가지거나 해서 돌아오니까.
“그치만 오르막길 꽤 길지 않아? 거기서 페달 밟으려면 꽤 힘들..”
나는 즉시 안장에서 엉덩이를 떼어냈다. 하마터면 잊을 뻔 했다. 쫄쫄이를 입은 채 자전거 위에서 헐떡이는 걸로 인생의 쾌감을 찾는 녀석들이나 찾을 법한 오르막길이 있었지. 올때는 내리막길을 쭉 내려오면 되지만 돌아가는 길엔 늘 자전거를 끌고 걸어올라갔었다.
하야마가 묘하게 웃으며 자전거에 앉고, 그 뒤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 곳에서 앞사람의 등을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앞사람의 등이 이렇게 넓어 보이는게 정상인가? 그렇다면 코마치도 늘 오빠의 넓은 등을 보며 든든함을 느껴 왔던 것일까.
“꽉 잡아, 히키가야.”
어? 하고 멍하니 반문하는데 급발진하는 자전거 탓에 무의식적으로 하야마의 허리를 끌어안다시피했다. 뭐, 뭐야 이거! 나 모르는 새 누가 내 자전거에 로켓포라도 달아둔거 아냐!? 낡은 자전거의 체인이 끼릭끼릭 비명을 지르며 환호하고 있었다. 마치 이 늙은 몸이 이렇게 빨리 달릴수도 있다니! 하고 놀라는 것 같군. 뭐. 나도 놀랐다. 뺨에 와닿는 바람이 평소와 전혀 다르다.
센티넬의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는 익히 들었지만, 이정도인줄은 몰랐으니까.
“대단하다..”
“하핫, 그래?”
혼잣말로 중얼거린 내 말을 하야마가 캐치했는지 넉살 좋게 받아쳐왔다.
이 스피드로 자전거를 몰고 있으면서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니, 정말 장난 아니구나. 문득 이런 인간과 필드에서 함께 뛰며 득점을 겨루는 상대편 축구팀이 불쌍해졌다.
“편하겠네. 이 스피드라면 등교도 5분만에 가능할지도.”
“편.. 하달까.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교차로의 신호등의 불이 바뀌길 기다리는 사이 하야마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센티넬의 50% 이상이 스트레스 과민으로 사망해.”
“그야 뭐..”
유명한 연구결과다. 굵고 짧게 간다고 해야하나. 각인자를 찾지 못한 센티넬들의 최후는 보통 몹시 괴롭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거야 제대로 된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 이야기고, 너처럼 인기있는 녀석 같은 경우는 보통 해당되지 않는다고.
“넌 그럴 걱정 없을 꺼 아냐. 주변에 가이드도 잔뜩 있고.”
“아니 난..”
교차로의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뀌며 하야마의 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무슨 말을 하려던건지는 모르지만 말을 삼키기로 작정한 듯, 하야마가 말없이 자전거를 몰았으므로 난 그냥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만 눈으로 흩었다.
두사람을 태운 자전거가 매끄럽게 운동장을 가로질러 주륜장으로 들어갔다. 어이. 뭐야, 왜 학교에 오는 건데. 이제 내 남은 스케쥴은 귀가뿐이라고.
“아, 난 이제부터 동아리 활동이 있어서. 히키가야군도 동아리 있지 않아?”
지금 내 동아리 활동까지 신경써준거냐. 정말 눈물나는 배려심이다. 이자식 왜 이렇게까지 성격이 좋은 거지? 이정도면 거의 병 아냐?
“동아리에 사정은 설명했어. 이제 난 집에 갈 거야.”
하야마가 자전거에서 내리고 나자 냉큼 안장에 엉덩이를 붙였다. 정기검진날에도 동아리 활동을 빼먹지 않다니, 그때도 느낀 거지만 유키노시타가 천재+노력이라는 느낌이라면 하야마 이 녀석은 노력+수재라는 느낌이다. 앞과 뒤가 뭐가 다르냐고 묻는 녀석들은 창의력 제로의 이과계 인간임이 틀림없다.
“그럼 난 간..”
“잠깐만.”
하야마의 손이 강하게 내 손목을 잡아왔다. 예상치 못한 악력에 몸이 쭉 딸려나가다시피 해서 상체가 앞으로 홱 쏠렸다. 짜증나는 눈빛으로 하야마를 홱 노려보자 당황한 얼굴로 손을 놓았다.
“아니, 그.. 히키가야 너.. 혹시.”
“왜.”
하야마는 뭔가 복잡한 얼굴로 몇초간 더 어물대다가 아무것도 아냐. 라며 주먹을 꽉 쥔다. 순간 너무 놀라서 어깨를 흠칫 떨 뻔 했다. 주먹 쥐지 마. 눈살 찌푸리지 말라고. 스쿨 카스트의 최하위에 위치한 녀석들은 괜히 윗 계급의 행동 하나하나에 과민반응하기 마련이라고. 딱히 저 큼직한 주먹에 얻어맞는 줄로만 알았던게 아냐. 으, 음습한 괴롭힘은 당했어도 직접적인 폭력은 별로 당해본 적이 없으니까, 흐, 흥! 착각하지 말아줘!
하야마가 결국 별 말 없이 인사를 고했으므로 나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귀가했다.
집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찜통의 절정같은 느낌이라, 찹쌀떡처럼 흐늘흐늘해져버린 것 같았다. 코마치의 상큼함에 치유받고 싶어어.. 물론 집에서 날 반긴건 내 정신을 맑게 해주는 코마치표 커피가 아니라 더위에 짜증이 날데로 난 카군 뿐이었다.
정말이지 고양이의 모피는 여름에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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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나에게 그런 표정을 지어보여도 소용 없다, 히키가야. 센티넬-가이드 매칭은 일개 교사의 권한이 아니니까.”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 뜬금없는 전개는 대체 뭐냐고.
제발 뭔가 말해달라는 내 필사적인 얼굴을, 히라즈카 선생님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것으로 간단히 무시했다. 가까스로 고개를 떨궈 아래를 내려보자 빳빳한 종이가 너울대며 자기주장을 한다.
“그보다.. 대체 왜 하야마죠.”
간단히 말해, 국가의 횡포다. 대체 무슨 권리로 센티넬 - 하야마와 가이드 ? 히키가야로 미션을 내리는 건데. ‘헐. 그 히키 뭐시기라는 그 음침한 녀석? 하야마가 불쌍해~ 그녀석 확 자살해버리면 좋을 텐데~’ 라는 말을 정면으로 들으면 이번엔 진짜 울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뭐야. 너 몰랐나?”
“예?”
“하야마는 너무 강력한 센티넬이라, 왠만한 가이드엔 금방 내성이 생겨버려. 아마 제일 오래 팀을 맺은 것도 석달정도가 끝이었다고 들었다.”
“예에?”
“뭐. 빛이 밝은 만큼 그림자도 짙다는 거지. 아무튼 그것 때문에 하야마는 전교에 거의 모든 가이드하고 팀을 맺었었거든.”
우와아. 이쯤 되면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디의 아방궁이냐. 하야마라는 술탄을 둔 할렘도 아니고.. 그렇게 따지면 나는 술탄의 자비에 하룻밤 은혜를 입은 외톨이 후궁 28 정도인가. 스스로 생각해낸 비유에 구역질이 날 정도다. 하하.
히라즈카 선생님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이곳이 교무실임을 상기했는지 필터 끝만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아마 너에게도 내성이 생기면 하야마는 다른 학교의 가이드에게까지 손을 뻗칠지도 모르지.”
“묘한 단어 선정이네요. 하야마가 좋아서 가이드를 한번씩 맛보고 내팽개치는게 아니잖아요.”
“네녀석의 단어가 훨씬 미묘하다만.. 아무튼 너의 존재감만큼이나 흐릿한 가이드 자질이라도 일단 가이드. 네가 좋든 싫든 하야마와 팀을 맺어야 해.”
나는 천천히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그러고보니 어제 묘한 말을 했었지. 센티넬의 얼마가 스트레스로 사망한다- 고. 그 음색에 담긴 감정을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가이드라서겠지. 센티넬의 감정에 예민한 가이드니만큼 그게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소리가 아니라 무심코 튀어나온 깊은 속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꿔 말하면 그 상냥한 성품의 센티넬이 늘 자신이 스트레스로 미치거나 죽는다는걸 염두에 두고 생활하고 있었단 말이다. 이쯤 되면 그 자제력에 인간적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인데?
그런 상냥한 하야마는 대체 얼마나 예민하길래 온 학교의 가이드들을 건드려 놓고서도 모자라서 내게까지 껄떡댄다는 말인가.
“아마 내일 모레 출발인가?”
“네.. 뭐.”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에겐 동아리를 쉬게 된다고 직접 말하도록. 아마 순순히 믿어주진 않을 테지만.”
“뭡니까. 저 인간적으로 신용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뭐? 네가? 착각은 자유라지만 방금 그 말은 좀 심하구나.”
“선생님이 훨씬 심하거든요..”
교무실에서 나와 교실로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 점심시간을 끝내고 5교시의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걸음을 서둘렀을 테지만 교사와 상담이라는 면죄부도 있겠다, 나는 느긋하게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점심시간에 하야마가 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와 팀을 짜는 것에 대해 이야기라도 꺼내면 받게 될 그 눈길들은 내 여린 하트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겠지. 수라장을 헤쳐 온걸로 따지자면 이미 흉터 투성이에 굳은살까지 배긴 내 하트겠지만... 아무리 단단한 굳은살이라도 칼로 찌르면 피가 난다고. 적어도 수업시간 중간에 들어간다면 그런 사태를 막을 수 있겠지.
“죄송합니다. 면담이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도록.”
뒷문을 열고 작게 인사하고 슬쩍 자리에 앉았다. 무심코 하야마쪽을 힐끔 쳐다보는데 마치 처음부터 날 쳐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순간 부정맥이 올 정도로 놀랐으나 가까스로 평정을 가장하고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끝나지 않기를 바란 국사 수업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곧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돈다. 나는 분위기를 살피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좋아. 아무도 내게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이대로 쉬는 시간동안 옥상에라도 가 있을까 하는 내 팔목을 강한 힘이 가로챘다.
“히키가야.”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하야마 하야토가 내 팔목을 잡고 놔주질 않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
라고 묻더니 이쪽의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팔목을 움켜쥔 채 걸음을 옮긴다. 의문형으로 말하면 명령형으로 알아듣는건 리얼충들의 법칙이냐. 네가 시건방진 아가씨 컨셉의 로리소녀가 아니면 용납될 수 없는 컨셉이거든?
“무슨 일인데?”
공교롭게도 하야마가 도착한 곳도 옥상이었다. 옥상 자물쇠가 고장난 상태라는거,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히키가야. 가이드.. 맞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에 그 병원에 가 있다는 건 센티넬 아니면 가이드 정도일 테니까. 하야마의 물음도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단 다시한번 확인한다는 뉘앙스가 더 강했다.
“부탁이 있는데.. 괜찮을까?”
부탁이란게 혹시 그건가? 역시나 싶지만.. 나는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의아한 듯 종이를 본 하야마는 내가 내민 종이를 받고 당혹스러워했다. 놀란 표정이 아닌걸 보니 이렇게 될 걸 대략 알고 있었나 보다.
“놀라지 않네.”
“아니, 난.. 히키가야가 이 학교 마지막으로 남은 가이드란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되지 않을까 했었어. 그래서 미리 양해를 구하려고 했던 건데.”
“뭐, 이런 식으로 팀업되는 시스템이라면 굳이 네가 나한테 양해를 얻지 않아도 되잖아?”
말이 학교지 내가 받은 명령서는 군인의 것이나 다름없다. 내 말에 하야마는 무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보는 내 쪽이 오히려 송구해지는 표정이다. 어디까지 예의바른 놈이냐. 이건.
“하지만 히키가야, 이미 팀을 이룬 센티넬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하야마가 민망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뭐? 무슨 엄한 소리야. 내 스스로 할 말은 아니지만 난 그렇게 인기있는 가이드가 아니다.
찌푸린 내 표정을 보고 하야마가 당황하자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내뱉었다.
“난 팀을 이룬 센티넬 없어.”
“뭐?”
“새삼스럽게.. 그리고 정식으로 미션에 나가는것도 처음이니까 나야말로 양해를 구해야겠다.”
“정말? 하지만 히키가야 너..”
뭔가 물어보려던 하야마는 내 표정을 보곤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렸다. 남이 했더라면 답답하고 우유부단해 보였을 것을, 하야마가 하니 대체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파급력이 엄청나다. 이게 바로 초 리얼충 스킬인가.
“미션을 이틀 뒤지?”
“응.”
“그럼 오늘부터 하교 같이 하면 되겠다. 히키가야 동아리 있지?”
“있는데, 잠깐. 하교?”
하야마가 무어라 더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수업종이 울려 우린 서둘러 교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교 시간이 되어서야 난 하야마가 하려던 말이 뭔지 알게 되었다.
“왜?”
“왜냐니.. 원래 이런 거잖아.”
센티넬이 가이드를 만나 심신이 안정된다고 해도, 무슨 기계도 아니고 한순간에 뚝딱 상태가 호전되는건 아니다. 아니 그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론적으로 알던 사실을 직접 생활에 적용하려니 적응이 안되고 있었다.
미션을 이틀 앞둔 오늘부터, 하야마는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최대한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 같았다.
등하교 시간은 물론이고, 수업시간에마저 자리를 바꾸는게 용인된다.
남들이 자리 바꾸고 하는것에 무관심해서 미처 몰랐었다. 내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어디에 앉는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냐.
“오늘도 자전거 가져왔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하야마가 웃으며 주륜장으로 앞장섰다.
딱 한번 본 내 자전거를 잊지 않았는지 수대의 자전거 사이에서 내 자전거를 찾아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핸들을 쥔다.
웃으며 날 돌아보는 폼이 누가 보면 자전거 주인인줄 알겠다.
난 머릿속으로는 하야마의 말을 이해했지만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들어 몇 발자국 뒤에서 그런 하야마를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어느 쪽이야?”
아무리 센티넬이라도, 아니 아무리 리얼충이라도 그렇지, 남에게 너무 거리낌이 없는 거 아닌가? 아직 난 하야마와의 거리를 좁힐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쪽에서 마구잡이로 내 방 안을 침범하는 것 같잖아.
언짢은 표정을 느꼈는지 하야마가 자전거에서 손을 떼고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뒤로 흠칫 물러날만큼 거부감이 들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하야마의 표정이 몹시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같은 반의 존재감 없는 남학생을 보는 표정이 아니라 흡사 울기 직전의 다섯 살박이 여자애를 보는 듯한... 젠장 왜 이따위 비유밖에 떠오르는 게 없는 거지.
“히키가야..?”
“...너 동아리 활동 있지 않았던가?”
“그거라면 아까 점심때 말해뒀어. 너야말로 동아리는?”
“오늘은 쉬는 날이야.”
후.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 자전거로 다가갔다. 하야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내 배타적인 기색을 느낀게 분명하다. 하야마는 센티넬이니까.
나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 빌어먹을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이정도는 양보해 주지.
자전거의 뒷자석에 앉은 나는 몇발자국 떨어진 상태의 하야마에게 툭 던졌다.
“집에 안 데려다 줘?”
하야마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자전거 앞좌석에 걸터앉았다.
“꽉 잡아.”
“알겠으니까 가기나 해.”
학교의 리얼충 하야마가 모는 자전거 뒷자리에 타게 될 날이 다 오다니. 교내의 여학생들이 눈에 불을 키고 원하는 포지션이 아니었던가. 물론 며칠이면 이것도 끝이겠지만.
‘하야마는 너무 강력한 센티넬이라, 왠만한 가이드엔 금방 내성이 생겨버려.’
내 가이드로써의 자질은 형편 없다고 국가기관의 검사를 통해 밝혀진 바 있으니 하야마의 가이드 노릇을 하는 것도 길어봤자 일주일이겠지. 어쩌면 임무 중에 쫓겨나게 될지도 모른다.
몸이 어느정도 자전거의 속도에 익숙해져 나는 어깨에 힘을 조금 풀었다.
“하야마.”
“응?”
타이밍 좋게도 교차로의 신호등 때문에 자전거가 멈춰섰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우리처럼 신호를 기다리는 아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한건지 하야마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고, 나는 무심코 내뱉을 뻔한 질문을 주워삼켰다.
하야마 너는 괜찮은거냐, 고.
괜찮을 리가 없겠지. 나와는 여러 모로 껄끄러운 사이이고. 착한 아이인 하야마는 나라에서 정해주는 가이드를 거부할 리가 없지. 여러모로 마음이 해이해진 모양이다.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할 뻔 한걸 보면 말이다.
“...아냐, 신호 바뀌었다.”
자전거는 쏜살같이 달렸다. 물리적으로 따지자면 컵라면에 물을 붓고 딱 먹기 좋을만한 시간이 흘렀다고나 할까, 상대성 이론으로 따지자면 아침 등교와 하교 사이의 시간만큼의 시간이 흘렀다고나 할까.. 두 발 두 다리 멀쩡한 주제에 말없이 하야마의 허리를 잡고 자전거 뒷자석에 있자니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하야마를 알아보고 나를 의아한 듯 쳐다보는게 마음에 안 들었다. 쳇. 내 여린 신경에 손상이 간다고.
하야마는 능숙하게 우리 집 앞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자전거의 핸들을 건네받고 하야마를 배웅하려는데 떠날 기색 없이 가만히 서서 이쪽을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발이 저려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히키가야.”
하야마가 악수하듯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 라고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내 오른손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젠장. 외톨이는 이런 식의 형식을 갖춘 인사에 자동반사적으로 대응하는 습성이 있다는걸 간파할 줄이야. 악수하듯 내 오른손을 맞잡은 하야마는 위아래로 팔을 흔드는 대신 손아귀에 힘을 주고 내 손을 꾹 잡았다.
“좀 더.. 괜찮아?”
“뭐가?”
이제 슬슬 손은 놔줬으면 하는데.. 한여름에 남자와 손을 잡아서 땀이 차다니 최악이다. 하지만 하야마는 내 반응따위 아랑곳 하지 않고 맞잡은 손을 살짝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뒤 다른 팔로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크허억!?”
하야마의 단단한 가슴에 폭 껴안긴 순간 두근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을 리가 있냐! 땀내 나는 남자의 가슴이라니, 게다가 코에 닿은게 근육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다 돋는다. 뱃속에서 끌어올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하야마를 거세게 밀쳐내자 그는 순순히 뒤로 밀려나갔다. 아니지, 하야마는 뿌리 박힌 고목처럼 단단히 서 있었고 오히려 내가 튕겨나간 느낌이었다. 내 엉덩이에 부딪힌 자전거를 보면 확실하다..
“히키가야, 내가 공격이라도 한 것같은 비명이잖아.”
“그 말 그대로다. 내 데이터가 오염될 것 같은 정신공격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냐, 너.”
“꿍꿍이라니..”
하야마가 곤란한 듯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나는 그 사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낡은 자전거를 나와 하야마 사이의 장애물로 배치하는 것에 성공했다. 뭐냐 저거, 바이러스형.. 아니 리얼충형 완전체 디지몬이냐, 대체 다음에 무슨 짓을 하려는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바로 등 뒤가 현관이라는 것이 엄청난 안도로 다가왔다.
“센티넬-가이드 미션이 처음이라 그래서 잘 모를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직접 설명하려니 조금 민망하네.”
고개를 갸웃, 왼쪽으로 살짝 까닥이며 말을 꺼낸 하야마는 조금 쑥쓰러운 표정이었지만 당당했다. 미소녀만이 용서되는 제스처인줄 알았는데, 빌어먹게도 미남에게도 통용되는 것이었나.
“사흘 뒤 미션을 위해 계속 행동을 같이한다는건 설명 했었지?”
“아아. 이해했다.”
“그것의 연장선이야.”
“미안, 무슨 뜻이냐?”
“가이드와의 스킨십만큼-”
“어라? 오빠!”
드, 들었다. 스킨십이란 말을 들어버렸다고! 더 이상은 무리. 하야마 네가 딱히 싫어서가 아니라 생리학적으로 무리다. 마침 나이스 타이밍으로 현관에서 나온 코마치가 여신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어라? 하야마 씨 맞으시죠?”
“으응.. 안녕?”
“왠일이세요? 설마 오빠의 친구라거나? 꺄아! 팥밥 지어야 겠다!”
“코마치. 그럴 일은 없다. 그리고 팥밥은 그럴 때 먹는게 아냐.”
코마치의 등장으로 자연스레 대화는 끊기고, 나는 집에 들어가려는 제스처를 취한 것만으로 이어질 하야마의 대화를 원천차단했다. 정말 잘했다 코마치. 사랑스러운 여동생 기준으로 이번 건 정말 포인트 높았다.
다행히 하야마는 여동생이 듣는 앞에서 가이드가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하기는 꺼려졌는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내일 봐, 히키가야.”
“아아.”
“내일 일곱시면 될까?”
“너 늘 그렇게 일찍 다니는 거냐?”
“아니, 네 시간에 맞춘 건데.”
“..그럼 일곱시 십오분으로.”
마지막까지 예의바른 말투를 사용한 하야마는 신사답게 웃으며 온 길을 되돌아갔다. 단지 하야마와 나의 대화를 들은 코마치가 부들부들 떨며, 볼을 부풀리고 있는 게 무서웠다. 설마 이 상황에서 부후후훗 하고 웃어대는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정말 파이트클럽급의 소름끼치는 반전이다. 허나 코마치는 잔뜩 해맑은 얼굴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오빠 축하해! 제대로 된 첫 남자친구를 사귀었구나!”
“뭐냐. 그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문장은.”
나는 자전거를 대문 안쪽에 기대어두고 현관쪽으로 들어왔다. 코마치는 뭐가 그리 신나는건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하치만적으로 포인트는 높다만, 의미불명이라 좀 꺼림칙한데?
“유이 언니랑 유키노시타 언니 덕분일까? 저 오빠, 4월 합숙 때 봤던 그 오빠지?”
“아아. 하야마 말이냐.”
“으응- 맞아. 하야마 하야토라는 이름이었어.”
“친구 같은거 아냐.”
아, 내 동생이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상냥한 녀석이다. 물론 그게 오해라는 점은 미리 말해줘야겠다. 아무리 코마치라도 그 녀석과 내가 친구라는 꺼림칙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참을 수가 없다. 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쏙 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그냥 좀 불운한 센티넬일 뿐이지.”
“에...? 잠깐, 오빠?”
코마치의 목소리는 닫힌 욕실 문 밖에서 잠깐 울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얼른 주문한 역내청 11권이 왔으면 좋겠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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