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의식이랄까, 버릇과도 같았다. 밤새 묻은 꿈의 잔재를 땀과 함께 털어내는 것처럼 쿠로오는 오늘은 먼저 가, 켄마. 라고 말하며 가방을 매고 뛰었고, 쿠로오의 버릇을 아는 켄마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하철로 혼자 등교를 했다.
오전 일곱시도 되지 않은 등굣길은 살짝 어두웠고,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은 모두 예상보다 추운 날씨가 당황스러운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걸었다.
낮이면 여름인가 싶을 정도로 공기가 훈훈해지지만 아침공기는 아직 눈동자를 시리게 만들 정도로 찼다. 쌀쌀함을 꾹 참고 오분쯤 달리면 열이 올라 입김이 허옇게 자국을 남긴다. 이마에 땀에 작게 배어나오다가 아직은 차가운 공기에 금새 식어버렸다.
교문이 보일 정도까지 오자 슬슬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 몇몇은 쿠로오를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평소라면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 그였지만 쿠로오는 표정을 무섭게 굳히고는 발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 뒷모습이 제법 사나워 손을 흔든 아이들은 머쓱하게 뒷목을 슬며 어, 못 봤나보다. 하고는 손을 내린다.
사실 쿠로오의 생김를 표현하자면 잘생겼다거나 단정하다기보다 날카롭거나 험상궂다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거기에 큰 키에 건장한 체구까지 더해져 본인도 그걸 아는지 늘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곤 했지만 무섭게 집중할때의 그의 얼굴은, 그러니까 그의 절친한 친구의 말을 빌자면
‘진짜, 진짜 험악하게 생겼다고오!’
그 순간 펑! 하고 쿠로오의 안면과 충돌한 배구공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나며 체육관 안의 이목이 몽땅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헐....”
“쿠, 쿠로상!?”
“허억! 괜찮아여!?”
막 체육관 문을 열고 발을 디딘 순간 포탄처럼 쏘아진 배구공이 쿠로오의 이마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방금 디딘 발이 공중에 붕 뜨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두세걸음 물러난 쿠로오가 뒤로 젖혀진 고개를 확 앞으로 돌렸을 때 리에프가 딸꾹, 하고 횡경막의 경련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작은 손이 쿠로오의 티셔츠 자락을 잡아당겼다.
“쿠로, 괜찮아?”
“어? 아아.. 켄마. 안 괜찮아. 골이 울려.”
다행인 것은 안면에 정통으로 충돌했다면 코뼈가 내려앉았을 스파이크가 이마만 치고 튕겨나갔다는 걸까. 코치님은 쿠로오의 이마와 뒷목을 몇번 만져보고는 아침 연습에서 쫓아냈다. 양호실부터 들러 필요하다면 1교시까지 쉬라는 의미였다.
“머리는 위험한데다, 무방비 상태에서 목이 충격을 받았어. 저녁 연습도 상태 봐서 참가해라.”
“쿠로 선배! 정말 죄송해요..!!”
리시브도 안되는 주제에 보쿠토처럼 크로스를 쳐보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나선 리에프가 범인이었다. 미안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연신 사과하는 리에프에게 괜찮다며 손짓하고는 쿠로오는 뒷목을 주무르며 양호실로 향했다.
방금 전엔 머리만 띵 한것 같았는데 코치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뒷목이 욱씬거렸다. 덕분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배구공에 거하게 얻어맞고 나니 꿈을 꾼 뒤로 찝찝했던 기분이 조금 가신 것 같다. 잊을 만 하면 욱씬거리는 이마도 한몫 했다.
“쿠로오 상 웃지 않으니 박력있다..”
“화 났을까여..?”
한편, 쿠로오가 퇴장한 뒤 체육관은 금새 수군수군하는 소리로 메워졌다.
리에프는 초조한 얼굴로 손가락을 꿈지럭댔고, 다른 부원들은 말없이 그의 등과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차분히 가로저었다.
“으으..! 켄마 선배!! 살려주세여!”
“괜찮아.. 쿠로가 기분이 나쁜 건.”
“으아아! 역시 기분 나빴겠죠! 그렇게 큰소리가 났는데에에!!! 야쿠 선배!”
“시끄러워!”
기분 나쁜 꿈을 꿔서 그런거니까.
뒷말을 본의 아니게 생략하게 된 켄마의 샐쭉한 눈초리가 리에프의 부산한 등에 머물렀다.
뭐.. 괜찮나.. 말하기 귀찮고.
“일주일동안 스파이크 금지야! 얌전히 리시브 연습이나 하라고!”
“에엑..!”
쿠로오 테츠로는 가끔 보쿠토 코타로와 섹스하는 꿈을 꾼다.
“목은 괜찮니? 혹시 모르니까 한시간정도만 찜질을 하자.”
“저야 고맙죠.”
양호실로 간 쿠로오는 배구공 무늬가 선명하게 찍힌 이마에 냉팩을 붙이고 뒷목에는 핫팩을 대고 침대에 엎드렸다.
낯선 시트와 베개에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모포는 얇았지만 양호실 안의 공기는 지나치게 훈훈했고 엎드린 상태로 뒷목에 뜨끈한걸 대고 있으니 절로 눈이 감겼다.
양호선생님은 교무실로 가는 김에 선생님들에게 제 상태를 얘기해주겠다 했고, 덕분에 그는 걱정 없이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지잉 하고 휴대폰이 울려 주섬주섬 꺼내들자 제대로 양호실에 갔느냐는 켄마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켄마는 쿠로오가 어떤 꿈을 꾸는지, 그리고 그 꿈을 꾼 날에 기분이 얼마나 다운되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쿠로오는 피식 웃으며 걱정 말라는 답장을 보냈다.
아. 정말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은데. 스파이크에 머리통 한번 얻어맞고 기분전환이 된다면 다음 번에도 리에프에게 스파이크를 쳐달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아직은 그 녀석, 스파이크가 서투니까.. 보쿠토의 스파이크에 얻어맞는다면 진짜로 목에 깁스를 차게 될 지도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게 보쿠토 쪽으로 생각이 기울자 쿠로오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려 천장을 올려다보였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도 휴대폰이 울린다.
[헤이, 오늘 저녁 연습 있어? 오늘 서포터 사러 가는데 같이 나갈래?? 저녁 쏠께!!!]
켄마에게도 말하지 않은 징크스는 사실 하나 더 있었다.
그 꿈을 꾼 날엔, 이상하게 보쿠토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 꿈을 언제적부터 꾸게 되었는지는 사실 확실하지 않다.
보쿠토를 처음 본 것은 1학년 춘고 예선에서 슬쩍 스쳐지나갔을 때가 처음, 제대로 통성명을 한 것은 그해 여름 네 학교의 공통 여름 합숙때였다.
그러니 아마 1학년 여름 이후일 것이다. 언제 꾼 꿈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뒤로 뜨거운 성기가 밀려들어올 때 코타로- 하고 헐떡이던 기억은 난다.
처음 꿈을 꾼 날, 침대를 박차고 젖은 속옷을 세면대에 문질러 빨면서 그는 영혼이 탈주했다는 감각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할 수 있었다. 16년 인생 최대의 위기이자 쇼크였다.
남자가 꿈에 나왔다고!? 그런데 내가 깔렸어! 심지어 나보다 키도 작은 녀석인데!? 게다가 난 왜, 왜 싸버린 건데!?
꿈의 시작은 설마 그런 식으로 잠에서 깨버릴 줄은 예상도 못할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여름 신젠 고교의 제 3체육관, 우연히 자율연습을 하던 녀석을 발견해 함께 스파이크와 블록 연습을 했던, 실제 있었던 것이 꿈이 나타난다는 지극히 평범한 흐름이었다.
비록 꿈의 마지막은 비품실 매트리스에서 발가벗겨진 채 뒷구멍이 무자비하게 쑤셔지는 것으로 끝날다고 할지라도.
쿠로오는 잠에서 깬 뒤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부인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주 잠깐 동안.
남자랑 섹스하는 꿈을 꾸다니 그럴 리 없어!
라고 생각한 지 십분쯤 뒤에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아닐지도..? 정도로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한번정도는 부정했었다.
아니, 한발 양보해서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치자. 중학교 무렵 그것을 어느정도 눈치채고 인터넷으로 관련 자료를 찾아본 적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하지만 호기심에 찾아본 영상은 생각보다 야하거나 섹시하지 않았고, 남자와 여자가 행위하는 영상만큼이나 놀랍고 약간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배우가 서양인들이라 그랬을까? 어쨌든 쿠로오는 그 뒤로 딱히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지 않았다. 다행히 그에겐 배구라는 아주 좋은 취미가 있었고 사람이 기절할 정도로 피곤하면 딱히 야한 생각도 별로 안 들었다.
어쨌든 쿠로오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겨우 얼굴하고 이름 정도만 아는, 그저 연습 몇번 어울려 한 적이 있는, 아니 사실 조금 친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절친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녀석이 꿈에 나온다는 것은 생각치도 못해본 일이었다.
차라리 그 녀석, 보쿠토 코타로를 보며 가슴이라도 한번 두근거렸으면 이게 바로 첫사랑인가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쿠로오가 꿈을 꾼 뒤 우연히 길거리에서 보쿠토를 만났을 땐, 놀라울 정도로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호탕하고 큰 목소리와 거리낌 없는 말투에 그저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하며 같이 배구 이야기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주먹으로 치며 낄낄거렸다.
쿠로오가 꿈에 나오는 보쿠토와 실제로 그가 만나고 이야기하는 보쿠토를 애써 타인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그가 꿈을 세번정도 더 꾸는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