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손을 들어 이마를 한번 쓱 훔쳤다. 머리를 세워 시원하게 드러낸 이마엔 벌써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때는 봄, 아직 초여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날씨였지만 번쩍번쩍 빛나는 은색의 판금갑옷을 갖춰입고 건틀렛과 망토까지 차려입은 모습으로는 확실히 더울 만한 날씨였다.
흰색과 검은색의 모발을 한껏 세워 올린 남자는 손에 들고 보던 양피지를 둘둘 말아 허리춤에 찬 가죽가방에 집어넣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슬슬 마을이 나와야 하는데..
“오오!”
울창한 숲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만 빙 돌던 남자는 이내 사람 여럿이 다닐만한 길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여기가 그 마을이구나!”
“파아-! 이거 물이 정말 시원하군!”
“어이구, 기사님이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로..”
마을에 들어선 남자는 마을 주민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과 허리에 멋드러지게 찬 장검, 그리고 윤이 나는 망토는 남자의 신분이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왕국 근위기사단의 제 2기사단장인 보쿠토 코타로는 잔뜩 주눅든 마을 촌장에게 시원하게 웃어보였다.
“하하, 그야 자네들이 영주님에게 탄원서를 올렸지 않나!”
“예? 예, 물론 그랬습죠!”
“근위기사단들은 몇년에 한번씩 무사수행을 가야 해. 마침 이쪽 지역으로 왕국민을 도우러 온 김에 영주님의 부탁을 받고 내가 온거야. 대체 이 평화로운 마을에 대체 무슨 고민이 있지?”
그 말에 촌장집에 모여있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상에! 왕궁의 기사님이 직접 오시다니! 촌장댁의 낡은 창틀 밖에서 기사님을 훔쳐보던 악동들은 잔뜩 신나서 전쟁놀이를 하기 위해 나무막대기를 주웠고 기사님의 훤칠한 생김에 마을 처녀들의 가슴에 봄바람이 불었다.
“듣자 하니 사악한 마법사가 있다지?”
“예, 저기 숲 안쪽으로 성이 보이십니까?”
“호오..”
보쿠토는 촌장의 굽은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짙은 수해 너머로 뾰족한 성의 지붕이 튀어나와 있었다. 숲 한가운데에 지어졌다 생각되어지지 못할 정도로 크고 웅장해보이는 성이었다.
“저기엔 무서운 마법사가 살고 있습죠.. 그동안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다만은..”
그러나 몇달 전부터 숲속에서 검은 큰 짐승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때마침 마을의 몇 없는 가축들이 야생동물에게 습격을 당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달 전에는 밤마다 짐승 우는 소리가 들리고 불을 뿜으니 마을 사람들이 무서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사흘 밤을 꼬박 걸어가 영주에게 탄원을 넣었다.
“다행히 요즘은 밤중에 우레가 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말입니다.. 종종 닭이나 병아리들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요.”
“그렇군!”
보쿠토는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차림 음식 중에서 제일 가까이 있던 빵을 크게 이로 베어물었다. 평소 먹던 부드러운 빵과는 달리 거친 식감에 목넘김도 좋지 않았지만 시장이 반찬이었다. 염소젖으로 만은 퀴퀴한 치즈와 빵으로 대충 배를 채운 보쿠토는 촌장이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들고 숲에 난 길로 떠났다.
“아이구, 미치겠네. 자고 내일 떠나라고 할 때 그러마 할껄 그랬나.”
그리고 현재 보쿠토는 숲 한가운데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가죽 물통의 마개를 따고 있었다. 마을에서 봤을때는 상당히 가까운 성인줄 알았는데, 굽이굽이 난 숲길을 가서 그런지 아직도 성은 멀기만 했다. 밤중에 숲을 걸을 기술도 용기도 없으니 이곳에서 밤을 지내야 하는데 보쿠토는 아무런 도구도 없었다.
아무리 왕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라 해도 자는 동안 산짐승의 습격을 받으면 위험한 것이라, 보쿠토는 슬슬 본격적으로 밤을 지샐곳을 알아보야야 했다.
“가진 건 부싯돌 정도인가..”
급한대로 나뭇가지와 손수건을 이용해 횃불을 만들었다. 적당한 바위나 굴이라도 좀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숲길을 이탈할 수 없으니 길을 따라 죽 걷는다. 수도와 달리 이 울창한 숲은 아직 해가 채 지기도 전인데도 벌써부터 짙은 음영을 드리웠고, 밤을 사는 짐승들의 활발해진 소리가 조용한 숲 사이에 나직하게 울렸다.
“이거 조금 위험한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지만 횃불에 미친 기사의 눈동자는 금색으로 번뜩이며 주위를 날카롭게 흩었다.
사람의 눈동자는 야행성 동물에 비해 안광이 강하지 않다고 하는데, 남자를 보면 꼭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밤의 숲이 무섭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그는 곧 숲 안에서 작은 불빛을 발견하고 어..? 하며 눈을 깜빡깜빡 움직였다.
“헤이헤이헤이! 이봐!”
숲길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었다. 보쿠토는 무성히 자란 덤불을 제치고 성큼성큼 걸었다. 곧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공터와 함께 작은 나무 오두막이 나타났다. 작은 불빛은 바로 그 집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혹시 사람 있나!? 잠깐 나 좀 도와줘!”
보쿠토가 주먹으로 나무문을 막 두드리기 전에, 먼저 문이 끼익 열렸다. 보쿠토는 횃불을 들지 않은 손을 어정쩡하게 올리고 집 안에서 나온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런 시골 촌구석 숲 속의 오두막에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멀끔한 남자였다. 키는 보쿠토와 비슷하거나 조금 큰 것 같았지만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닌지 피부는 흰 편이었고 조금 마른 편이었다.
입고 있는 검은 옷은 시골에서 흔히 입는 아마색이나 갈색의 저렴한 천이 아닌지 약간 광택이 나고 있었다. 남자는 서늘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이 마치 자신을 비난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구?”
남자의 저음은 깜짝 놀랄 정도로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보쿠토는 살짝 열린 문 틈으로 반만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다 퍼뜩 대답했다.
“숲에서 맨몸으로 밤을 새게 되었거든! 헛간이라도 괜찮으니 좀 빌려줄 수 있어? 사례는 할 테니까.”
“흐음.. 들어와.”
보쿠토는 들고 있던 횃불을 바닥에 비벼 끄고 남자를 따라 문 안으로 몸을 옮겼다.
집 안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어보였다.
“현관에서 먼지 털고 들어와.”
막 안으로 발을 내딛은 보쿠토는 머쓱한 얼굴로 갑옷과 부츠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나뭇잎이 잔뜩 묻은 망토를 벗어 문 옆의 옷걸이에 걸었다. 아마도 저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외투 옆이었다.
보쿠토는 자신도 모르게 콧잔등을 킁, 하고 약하게 씰룩거렸다. 향긋한 약초 냄새에 섞여 정제되지 않은 기름 냄사와 아교 냄새같은게 섞여 묘한 향이 집안을 메우고 있었다.
남자가 손바닥만한 화로 안에 향료로 보이는 마른 풀을 넣고 뚜껑을 닫자 향긋한 냄새가 짙어졌다. 그는 보쿠토의 허리에 매달린 장검을 보고 물었다.
“흐음.. 기사님?”
“응. 맞아. 너는 이곳에서 사는건가?”
“보다시피. 뭔가 요깃거리라도 좀 드릴까나?”
“오오. 부탁해!”
남자의 집 안은 신기한 것이 많았다. 벽에 사슴 박제 따위가 걸려있는 걸 보니 사냥꾼인가 싶었지만 그런것 치고 활이나 올가미 따위의 도구는 보이지 않았고 가지런한 선반이나 낡았지만 꽤 화려만 무늬의 양탄자 따위가 집 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너무 집을 힐끔거리지 않으려 했지만 유리로 만든 램프며, 정체모를 것들이 잔뜩 든 병들을 보니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데 너는 사냥꾼인가?”
남자는 부엌의 화덕에서 검은 솥의 뚜껑을 열었다. 진한 우유 냄새가 나 그곳을 돌아보니 남자는 낡은 그릇에 야채와 고기가 듬뿍 든 스튜를 덜고 있었다.
“아니, 내가 사냥꾼으로 보여?”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숲에서 사는 자들은 사냥꾼들 아닌가?”
“내가 이곳에 사는건 이 숲의 약초 때문이야.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질 좋은 약초가 많거든.”
오오! 약초꾼이었구나. 보쿠토는 그렇게 납득하고는 이내 남자의 정체에 대해 궁리하던 것을 머리에서 날려버렸다.
남자는 식탁에 푸짐한 스튜 한그릇과 밋밋한 맛의 비스킷을 차렸다. 보쿠토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수저로 크게 한술 떠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음식을 집어삼켰다.
따뜻하고 기름진 음식이 위장에 닿자 몸에 활력이 돌았다. 작은 식탁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보쿠토에게 등을 보이고 화덕에 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였다.
“기사가 아니라 걸인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흠흠, 사실 배가 많이 고팠거든. 고마워.”
남자가 끓는 주전자 안에 찻잎을 넣고 보쿠토의 맞은편에 앉았을 때 보쿠토는 이미 스튜 한그릇을 거의 다 비운 뒤였다. 남자는 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찻잔 두개를 가져와 식탁에 올렸다. 이런 시골에서 보기엔 꽤나 고급스런 잔이었다.
“아니 정말로, 마을 촌장이 대접했던 빵은 먹기가 너무 힘들었거든.”
“아항.. 귀족 도련님인가 봐?”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기색은 애송이를 보는 눈빛과 비슷해서 보쿠토는 울컥 인상을 찌푸렸다.
“도련님이라니 실례야. 이래뵈도 왕궁 제 2근위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몸이다.”
“호오? 정말? 놀랍네. 거긴 실력 좋은 기사들만 입단할 수 있다는 곳 아냐?”
“으흠흠. 그렇지. 아, 자기소개가 늦었네. 나는 보쿠토 코타로라고 한다.”
“쿠로오라고 불러줘.”
남자, 그러니까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곤 찻물을 따라 보쿠토에게 건넸다. 찻잔을 쥔 보쿠토는 기대 이상의 향기에 찻물을 들고 눈을 감았다. 쿠로오도 보쿠토처럼 잠시 눈을 감고 차향을 음미하고는, 입으로 차를 머금어 숨을 한번 내쉬고는 작게 목울대를 넘겼다.
“그럼 기사님?”
“보쿠토로 충분해.”
“그럼 보쿠토씨. 이곳엔 무슨 일로 온거야?”
빙글빙글 웃으며 그렇게 웃는 남자의 모습을 본 보쿠토는 살짝 놀랐다. 수도에서 온 기사라는 것에 벌벌 떨던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약초꾼이라고 하지만 수도에서 정식으로 약학을 배우기라도 한 걸까..
“나는 숲쪽 성에 사는 마법사에게 볼일이 있다.”
“오야?”
“그래서 말인데, 저 성까지 길안내를 좀 부탁해도 될까?”
보쿠토는 일단 그렇게 묻고는 슬쩍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혼자 가기엔 숲길도 흐릿해지고, 이 깊은 숲속에 종자 한명 없이 달랑 들어가는것도 불안했다. 약초꾼이라면 이 근방 지리는 잘 알겠지.
“마법사에겐 무슨 일인데?”
“그건.. 저 성에 도착하면 알려주지.”
사악한 마법사를 퇴치하러 왔다고 하면 지레 겁먹고 도망쳐버릴 수도 있다. 보쿠토는 눈 앞의 이 남자가 겁먹은 모습이 잘 상상되지는 않았으나,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리고는 그렇게 납득했다.
“흐응.. 물론 보수는 지급하는 거지?”
“물론이지!”
“그럼 좋아. 내일 아침 출발하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또 싱긋 웃었다. 웃는게 버릇인가? 웃을 땐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부드러워지는 눈매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보쿠토는 오른손을 쭉 내밀며 쾌활하게 외쳤다.
“그럼 잘 부탁한다!”
“으응 뭐.”
쿠로오는 악수하기 위해 내밀어진 보쿠토의 손등을 한번 톡 치고 이내 그릇을 치웠다. 악수가 거절당했는데도 이상하게 면구스럽지 않은 제스처였다.
흑마법사 쿠로오라니.. 원작이 주신 AU의맛 잊지 않겟습니다...(햘짝....
둘이 만나게 하고 힘빠짐 츄우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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