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한다!”
“네에.”
“당직콜은 리에프에게 돌려 무조건! 알았지!”
“어우 알았어요. 그런데 리에프쌤이 쿠로오 선생님께 전화 돌리는건 못 막아요.”
진심이라고. 자다가 처방해달라는 전화같은거 받기 싫단 말이야!
스테이션에 앉아 그렇게 말하는 간호사의 말에 옆자리의 간호사들이 다함께 꺄르르 웃었다.
막 교대시간이라 인계차 앉아 있던 간호사들이 평소보다 많아, 쿠로오는 평소보다 더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사흘만에 달콤한 퇴근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엘레베이터에 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쿠로오는 뻐근한 뒷목을 주물렀다. 버스는.. 밤이라 띄엄띄엄 있을테니 지하철로 갈까..
“여, 오늘도 ER[각주:1]당직?”
“으하함- 쿠로오! 뭐야 집에 가!? 배신자!”
“넌 어제 다녀왔잖아!”
응급실은 병원 후문쪽에 위치해 있었다. 내려간 김에 응급실 당직실에 늘어져있던 보쿠토의 뒷덜미를 들어올려 자판기로 이끌었다. 바짓단을 걷어올린 슬리퍼 차림에 가운은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보이지도 않고, 마스크를 턱 아래 대충 고정한 모양이 교수님이 보았으면 기어코 한소리 들었을만한 불량한 모습이었다. 하품을 하며 턱을 긁는 모습이 전반적으로 구렸다.
쿠로오는 분명 이틀동안 몸뚱이에 물 한방을 묻히지 않았을 보쿠토의 상태를 보며 쯧쯧 고개를 저었다.
자판기에서 포카리를 뽑아 그에게 건네는 쿠로오의 몰골도 물론 보쿠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하던가.
“오늘 ER 아카아시 아니었냐.”
“아- 일이 생겼대서.”
“쯧쯧. 안됐구만~”
“너마저 날 두고 가지 마!”
복도에 미적거리며 집에 가려면 자신도 함께 데려가라던 개논리를 펼치던 보쿠토는 결국 처방 주셔야죠! 라고 외치는 ER간호사의 출동으로 쿠로오를 놔 줄 수밖에 없었다. 하아. 피식 웃으며 닫히는 응급실 문을 바라본 쿠로오는 기지개를 쭉 피며 하품을 쩍 했다.
집에 가면 목욕부터 하고 자야지. 그럼 내일 오전 7시 교수님 회진시간까지.. 한 여섯시간은 잘 수 있겠다. 시계를 확인한 쿠로오가 이내 가볍게 발걸음을 내딛으며 병원 후문을 벗어나는 순간, 가로등 밑의 한 인영이 눈에 박혀들었다. 딱 보니 정상인의 발걸음은 아니었다.
‘취했나?’
응급실에 실려오는 갖은 꽐라들의 진상짓을 보다보면 내성이라는게 생길 법도 한데, 개지랄은 아무리 익숙해져도 개지랄이라 싫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회사원인지 검은 양복을 입은 채 비틀비틀 병원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며 막 휴대폰과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뒤에서 털썩 하고 사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방금 지나친 그 남자가 주저앉은 것도 아니고 아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봐요!”
깜짝 놀라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 남자의 어깨를 잡고 흔든 쿠로오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망할. 어째서 방금 전은 모르고 지나쳤나 싶을 정도로 비린 피냄새가 진하게 난다. 지금 보니 남자가 지나온 보도블럭 위에도 핏방울이 점점히 떨어져 있었다. 미친, 실혈량이 엄청나잖아. 지금 이 상태로 멀쩡히 걸어왔다고!? 인간이야?
의사! 아니 내가 의산데, 앰뷸런스! 미친 여기가 응급실이잖아!
잠시간의 자아분열로 혼란스럽던 쿠로오가 제정신을 차리고 축 처진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피가 나지 않은 쪽 팔을 목에 걸어 그를 거의 업다시피해 들어올린 쿠로오의 머릿속엔 피투성이가 되어버릴 그의 상의에 대한 걱정은 들어있지도 않았다.
“긴급환자야! 복부에 자상! 라인부터 확보해!”
“쿠로오 선생님!? 퇴근하신거 아니었어요!?”
“보쿠토! 처방 좀 내줘!”
쿠로오가 남자를 업고 응급실로 뛰쳐들어오자 곧 눈치 빠른 간호사가 간이침대에 방수포를 깔고 바퀴를 드륵 밀어 남자를 그 위에 눕혔다. 트레이에 실린지를 가져온 간호사가 팔꿈치에 라인을 잡는 사이 쿠로오는 혈액검사 통을 잡히는 대로 손에 쥐어 가져갔다.
“헉. 쿠로오 혹시 아는 사람이야!?”
“설마. 이 앞에서 쓰러져 있길래 데려온거야.”
“지인 아니에요!? 접수해야 하는데!”
입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보쿠토는 가위로 남자의 옷을 자르며 상처부위를 드러냈고 간호사들은 혈압을 재고 소독셋을 준비했다.
“80/40, 130, 37.5, 24회[각주:2]에요!”
“망할. 혈압 낮네. 혈액형 나왔어!?”
“바로 전화 준대요!”
남자의 상태는 퍽 심각했다. 얼굴도 피와 작은 상처들로 엉망, 오른쪽 옆구리는 칼 같은 것으로 적어도 두번은 찔렸고, 피가 멎지 않았다. 가위로 남자의 정장을 자르던 쿠로오는 퉁퉁 부어있는 남자의 팔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조심스레 팔을 다시 침대에 내려놓는 순간 남자의 미간이 움찔 찌푸려진다. 쿠로오가 남자의 귓가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외쳤다.
“이봐요! 정신 차려봐요.”
“환자 의식 있어? 오리엔테이션[각주:3]은?”
“끙...”
마침내 잔뜩 잠긴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눈이 설핏 뜨인다. 쿠로오는 그 사이 남자의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두툼한 지갑이 잡혀 열어보자 남자의 신분증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보였다.
“마츠카와 잇세이씨, 맞습니까?”
“아.. 병원이군.”
“네! 병원입니다! 바로 사진 찍고 수술해야 합니다! 보호자 연락처 있으세요!?”
“병원비는 카드로 결제해..”
“환자분! 저기!”
남자는 제 할말만 하고 다시 고개를 푹 고꾸라뜨렸고, 보쿠토는 남자의 부러진 팔에 임시 보호구를 대더니 급히 처방을 내리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출력되는 바코드를 떼어 일일히 혈액통에 붙이는 걸 옆에서 돕고 있자 다른 간호사가 1cc실린지와 바코드를 내밀었다.
“ABGA[각주:4]처방났어요.”
“뭐야. 보쿠토한테 하라고 해. 난 지금 의료인이 아니랍니다.”
“그럼 마츠카와 잇세이 환자분 보호자님? 피보호자 동맥혈좀 뽑아주실래요?”
그렇게 묻는 간호사의 말에 쿠로오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보호자라니! 나 저 사람 초면이야!
“지금 보쿠토 선생님 OR[각주:5]에서 전화온거 받고 계시단 말예요! 보호자 동의 없인 수술 안되는거 알잖아요! 원래 최초발견자는 보호자 노릇까지 해야 한다구요!”
그때 또다른 간호사가 혈액운반 박스를 들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아, 마침 잘됐다. 쿠로오 선생님. 환자분 수혈있어요. 전혈이에요.”
“아악...!”
쿠로오는 짜증내며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혈액통을 받아들였다. 오늘따라 눈에 채이는 인턴들도 하나도 안 보이고, 보쿠토와 다른 의사들은 지금 사진 처방내고 OR스케쥴 조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잉여인력이라곤 쿠로오 본인뿐이다. 나는 이만 퇴근할께요~ 라고 말하기엔 쿠로오가 데려온 환자라 차마 그럴 염치가 없다. 혈액팩에 라인을 꽂고 쭈욱 공기를 내보내 남자의 팔꿈치와 연결된 쓰리웨이에 연결한다.
남자의 안색은 창백했고, 거즈와 붕대로 응급처치한 옆구리는 벌써 벌건 핏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짧은 곱슬머리가 이마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있었다.
등짝을 화려하게 수놓은 문신만 봐도 알겠지만 아무리 봐도 주먹 쓰는 형씨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만 가면 유흥가가 있어 응급실에서 이쪽 사람을 보는게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남자만큼 잘생긴 조폭은 보지 못했다- 라고 때에 맞지 않는 감상을 늘어놓고 있는데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쿠로오는 자연스레 수혈팩을 확인하는 척 고개를 들어올렸다.
“..누구야.”
“의사랍니다. 환자분, 정신이 좀 드시나요?”
“...사복이라 놀랐잖아.”
그리고 남자는 다시 기절했다, 진짜 기똥찬 능력이네. 쿠로오는 쯧 혀를 차고는 결국 남자가 수술실로 들어갈 때까지 응급실에서 손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흐아아암~”
“쿠로오 선생님. 오늘따라 머리가 강렬하네요.”
“아. 다이치 선생님.”
하품을 쩍 하며 가운을 걸치던 쿠로오는 다이치가 건네주는 종이컵을 받아들곤 입술에 가져갔다. 뜨거운 믹스커피에 입술만 적시고 컵을 내려놓자 식혀서 드릴껄 그랬나봐요, 라고 웃으며 자연스레 의국 문을 열고 쿠로오가 나올때까지 문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카라스노대병원 소화기내과 3년차 레지던트였다. 현재는 이 병원에 연구차 와있었고, 함께 네코마타 교수님 아래에서 전문의가 되기 위해 수학하는 사이였다.
“간만에 집에서 잤더니 머리카락이 좋다고 난리네요.”
“아아. 역시 의국 베개는 별로인가보네요.”
보통 오전 여섯시에 모여 간단히 담당 환자들 수술 일정과 사례들을 발표하고 일곱시 가량부터 회진이 시작된다. 회의실 앞에서 담당 환자들의 스케쥴을 체크하던 쿠로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환자목록 제일 위쪽 하늘색 표시가 되어있는 환자의 이름이 익숙했다.
‘마츠카와 잇세이.’
이 환자가 왜 나한테 와있어?[각주:6] 타블렛을 터치해 환자정보를 보니 어제 응급실 통해 입원, 자상으로 인한 간손상, 복막손상, 맹장.. 아 어제 아예 맹장까지 제거했구나. 수술경과를 보니 왜 소화기로 전과한건지는 알겠군. 그런데 분명 어제 소화기내과 당직이 리에프였을 텐데 왜 이 환자가 나한테 와있지. 게다가 지금 남는 병실 없을텐데. 병실을 확인하자 병원 동관 12층 VIP병동의 1인실이었다. 아아. 1인실은 이야기가 다르지..
다친 왼팔 때문인지 OS의 보쿠토에게 협진까지 처방되어 있는 상태였다. 좀 더 차트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네코마타 교수님의 등장으로 타블렛을 덮고 회의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리에프.”
쿠로오는 함께 온 다이치에게 양해를 구하고 리에프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 그래도 희멀건 녀석이 어제 밤을 샜는지 눈밑이 시꺼먼게 저승사자가 형님 하고 찾아올 정도로 안색이 퍼랬다.
“쿠로상..”
“어제 ER로 온 환자 기억해?”
“어.. 아, 쿠로상이 데려왔다는 환자 말이죠?”
쿠로오는 타블렛을 움직여 다이치가 발표하는 환자의 정보를 화면에 띄웠다. 귀로는 리에프의 말을 듣는 채였다.
“원래 제가 맡으려고 했는데, 환자분이 주치의 쿠로상 지명했다는데요. 그래서 ER에서 아예 쿠로상 환자로 위에 올렸다고..”
“지명? 여기서 호스트바냐 지명하게.”
“암튼 그렇다구요.. 제가 넘긴 거 아니에여.”
양복 꽤 비싸보였는데, 설마 내가 멋대로 옷 잘라버렸다고 손해배상 이야기 꺼내는건 아니겠지? 쿠로오는 잠시 그리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12층 환자는 귀찮은데. 일단 소화기병동인 본관 8층에서 왔다갔다 하기에 동선이 꼬이는데다 비싼 병실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만큼 걸핏하면 콜이 걸려와 오라가라 말이 많았다.
“하아.. 이몸의 인기란. 하여튼 죄많은 남자라니까.”
“죄는 그 환자가 더 많아보이던데요..”
네가 잠이 덜 깼구나. 쿠로오는 리에프의 목에 팔을 감고 그대로 체중을 꾸욱 눌렀다. 그러다 다이치의 상냥한 눈과 마주쳐 슬금 암바를 풀고 눈치만 보게 되었지만.
당연하지만 회진도 VIP병동부터 순회를 하게 된다. 8시면 막 병실에 아침식사가 나올 시간대였고, 전문의, 레지던트, 그리고 인턴들이라는 열명에 가까운 인원이 한분의 교수님 뒤를 쭐래쭐래 쫓아 환자와 차트를 비교하며 환자 앞에서 교수님께 대차게 까이는 순간이었다. 본격 환자 앞의 수치플레이랄까. 그러나 12층에 도착해 엘레비이터에 내렸을때, 쿠로오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스테이션의 간호사들이 소화기내과다! 왔어! 라고 작게 외치며 벌떡 일어나는 모습은 이 병원에서 일한 뒤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7호실 마츠카와 환자분 회진 오신거 맞으시죠..!?”
낯선 이름인지 네코마타 교수님이 갸웃하며 차트를 팔랑 넘겼다. 쿠로오는 교수님이 환자의 주치의를 확인하기 전에 먼저 나섰다.
“맞는데요. 무슨 일입니까.”
“아뇨, 환자분이 회진을 기다리고 계셨거든요! 이쪽이에요!”
쿠로오는 간호사의 변화에 일조한 것이 복도를 망보듯 두명씩 짝지어 드문드문 서있는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란 것을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병원인데, 너무하잖아. 아직 제대로 일면식도 없는 남자의 호감도가 야금야금 차감되는것을 느끼며 쿠로오는 교수님을 7호실로 안내했다. 가볍게 노크하자 인간보다는 고릴라의 생김에 가까운 덩치가 슬쩍 문을 열고 입을 열었다.
“뭐요?”
“...마츠카와 잇세이 환자분 병실 아닙니까. 회진입니다.”
남자는 뭐 어쩌라는 표정으로 쿠로오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번 슥 흩더니 힐끔 눈초리를 좁혔다. 기가 막혀서. 쿠로오는 제 뒤의 의사들이 벙찐 표정일꺼라 확신했다. 무슨 평일에 초인종 누르는 기독교 전교사같은 취급이냐.
“형님 주무시오. 낮에 다시 오쇼.”
“잠깐...!”
울컥한 쿠로오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문이 쾅 닫혔다. 쿠로오의 볼에 핏줄이 불뚝 섰다. 뭐 이런 진화 덜 된 새끼가..!
“그럼 다음 환자 가지.”
네코마타 교수님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차트를 팔랑 넘긴다. 쿠로오는 병실 문을 뒤돌아보며 홀로 짜증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탕, 하고 거칠게 식판을 내려놓는 쿠로오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점심 메뉴로 좋아하는 꽁치구이가 나온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이랄까. 쿠로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집어드는데 헤이! 하고 어깨가 붙들리며 옆자리로 누군가가 자릴 채운다. 쿠로오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보쿠토냐.”
그 순간 보쿠토가 킁킁 코를 훌쩍이더니 얼굴을 목덜미로 바짝 가져왔다.
“쿠로오, 너 어제 집에 들어가서 목욕했구나!”
“..나 지금 조금 소름 돋았습니다. 보쿠토 선생님.”
“아 왜! 냄새가 다른걸 다르다고 말했을 뿐인데!”
보쿠토가 숟가락을 입에 물고 억울한 표정으로 외치자, 쿠로오는 키득키득 웃으며 대충 장단을 맞춰주었다.
“내가 쓰는 샴푸 브랜드도 맞추면 개코로 인정해주지.”
“비달사순?”
“땡. 그런데 뜬금없이 왠 비달사순이야. 너 그거 써?”
“아니.. 갑자기 그 브랜드 광고가 떠올랐어.”
실없는 소릴 하던 보쿠토는 식판 위의 꽁치를 들어 쿠로오의 식판에 턱 올렸다. 어멋! 이게 웬 떡이람! 쿠로오가 깜찍하게 외치며 보쿠토를 쳐다보자 나 생선은 별로야. 라고 대답하며 대신 쿠로오의 식판에 있던 감자샐러드를 숟가락으로 싹 긁어갔다. 어머 이게 웬 개떡이람.
“너 어차피 샐러드보다 꽁치 더 좋아하잖아! 아 맞다. 쿠로오, 어제 그 환자 있잖아?”
“생선만 먹으면 좀 짜단 말이지~ 그런데 그 환자라니?”
“네가 데려온 그 환자, 진짜 모르는 사람이야?”
쿠로오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제서야 보쿠토의 얼굴로 고갤 돌려 그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제 응급실 그 환자? 문신한? 응.
“진짜 몰라. 그냥 응급실 앞에서 쓰러지길래 데려온건데. 왜?”
“아. 그 사람이 너 찾았거든.”
쿠로오의 머릿속에 병실 앞을 지키던 험상궂은 남자들의 모습이 순간 스쳐지나갔다. 내가 어제 그 환자한테 뭐 어떻게 했더라. 정신차리라고 뺨이라도 때렸던가? 생각해보니 두번정도 때렸던 것도 같다.
“왜!?”
“몰라. 그냥 너 어디갔냐고 묻길래 퇴근했다 그러니까 이름 물어봤어.”
“그래서 대답해줬냐.”
“응.”
뭐 문제라도? 태연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뜬 보쿠토의 면상에 꽁치 머리를 던져버릴뻔 한 쿠로오는 한숨을 턱하니 내쉬었다. 어쩐지 리에프가 지명 운운 하더니만 보쿠토한테서 내 이름을 들었군..
뭐, 상관없지. 쿠로오는 이 생산성 없는 고민을 털어내버리기로 결정했다. 그 환자가 내 환자면 어떻게 리에프 환자면 어떠리. 어차피 리에프의 환자가 되었더라도 뒷감당은 죄다 자신이 해야 했을 것이다.. 애초에 쓰러진 남자에게 먼저 손은 내민건 자신이고 이제와 관련되기 싫다느니 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그 남자를 병원에 데리고 온 이상 빠르나 늦으나 그 환자 귀에 내 이름은 들어갔을 것이다.
“그보다 환자 왼팔골절, 어쩔꺼야? 그냥 깁스?”
“아아. 사진 보니까 수술해야 돼. Post op[각주:7]경과 보고 정하려고 했는데 환자 상태는 어때?”
쿠로오는 말없이 타블렛을 꺼내 환자의 차트를 내보냈고, 보쿠토는 더 금식시키지 말고 왠만하면 얼른 끝내버리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BPR은 괜찮네. 계속 금식[각주:8]중이지?”
“응. 앞으로 일주일은 더 금식이야.”
“수술실 스케쥴 나는대로 잡지 뭐. 오늘 교수님한테 말해야겠다.”
분명 식판은 제가 먼저 퍼 온것 같은데 보쿠토는 빨리도 식판을 비웠다. 빈 식탁을 앞에 두고 옆에서 떠나질 않는 것이 혼자 밥먹는걸 좋아하지 않는 저를 배려한 거란걸 아는 쿠로오는 얼른 밥을 목구멍 안으로 우겨넣었다. 안그래도 바쁜 녀석인데 오래 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수술일정 잡히면 연락 줄께! 라고 외친 보쿠토와 헤어지고 쿠로오는 곧장 서관 1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주무시는 형님 지금쯤이면 잠 깨셨겠지.
병동으로 올라가자 마치 저만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간호사가 벌떡 일어났다. 오야? 왠일로 이렇게 적극적인..
“7호실 환자 맞으시죠!? 오신 김에 드레싱[각주:9] 좀 해주세요! 오전에 쫓겨났어요!”
이렇게 적극적인.. 떠넘기기가..
쿠로오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간호사가 내민 D-Set[각주:10]을 들고 인턴들은 어쨌냐고 물었다. 간호사는 그저 병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났다며 투덜거렸다. 어쩐지 점심때 헤모박[각주:11] 삼출물이 몇CC나왔는지 차트에 안 올라와 있더라니..
쿠로오는 예상대로 피곤한 환자라고 생각하며 병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얼핏 들어와.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어제 그 의사로군.”
이마엔 붕대, 볼에는 거즈, 왼팔은 깁스로 고정하고 구멍난 배엔 관이 연결되어 있는데다 멀쩡한 오른팔로는 세개나 되는 수액을 맞고 있는 목소리 치곤 지나치게 멀쩡했다.
“주치의인 쿠로오 테츠로라고 합니다. 초면은 아니죠?”
“아아. 솔직히 어제 봤을땐 진짜 의사 아닌 줄 알았는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더니 배가 아픈지 눈살을 잠시 찌푸렸다.
“가운 입은 모습도 의외로 잘 어울리네.”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쿠로오는 유들유들하게 받아치며 디셋을 환자 옆에 올려두고 커텐을 쳤다.
그 험상궂은 형님들은 점심시간이라고 나간 건지 병실 안은 이 환자 뿐이었다. 이래뵈도 꽤나 중환자인데, 여고생마냥 우르르 몰려다니지 말고 한명쯤은 붙어있으란 말이다..
남자의 눈썹이 제법 순박하게 아래로 쳐진데 반해, 눈매는 몹시 매서웠다. 의사와 환자로 만나 정면으로 얼굴 보지 길거리였다면 음 분명 내가 먼저 시선 피했다 싶을 정도로 살벌한 눈이었다. 쿠로오 본인의 인상도 몹시 사나워 길거리에서 무작위로 발생하는 눈싸움 따위에 단 한번도 시선을 피해본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붕대를 풀고 수술 부위를 새로 소독하며 거즈를 갈았다. 피주머니를 비우고 안에 찼던 핏물을 체크하고, 접합부를 다시 한번 거즈로 감싼다. 통증과 상처에 익숙한지 일련의 과정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쳐다보지 않던 남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제, 날 데려온게 선생이라며.”
쿠로오는 마지막으로 남자의 배에 다시 새 붕대를 감고 테이프로 고정했다. 흐음.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조용했지만 왠지 귓속에 직접적으로 꽂히는 목소리. 자신의 볼에 와닿는 남자의 시선에 어쩐지 담배가 고파질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뭐 감사받을 일이라고.”
“운 좋은 줄 알아. 내 얼굴에 손대고 멀쩡한 사람은 침대 안에 들어온 녀석들 뿐이거든.”
쿠로오는 허 하고 작게 웃었다. 대놓고 비웃을 수 없는 것은 그래도 이 남자가 아직 저의 환자이기 때문이다.
“환자분이야말로 운이 좋습니다. 저도 제 옷을 피범벅으로 만든 사람을 왠만하면 용서 못하는데, 환자는 예외거든요.”
“아하.”
환자복 상의를 대충 추스리는 남자를 뒤로하고 커텐을 열었다.
“그런데 아침잠이 많은 편이십니까? 매일 오전 8시경에 교수님이 오시는데, 기왕이면 얼굴 좀 보여주시는게 좋지 않을까요.”
오전 여덟시? 남자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시계로 시선을 올렸다.
“아아. 밤새 아파서 잠을 못 잤어. 새벽에 진통제 맞고 잤는데, 왜. 회진 오셨다가 쫓겨나기라도 했나?”
“..진통제 처방이 새벽에나 났습니까?”
리에프..! 쿠로오는 타블렛으로 환자의 지난 처방을 확인했다. 그의 말처럼 새벽 다섯시에 prn[각주:12] 페치딘[각주:13] 처방이 나와 있는걸 보니 졸다가 새벽에야 일어나 부랴부랴 처방을 내린게 분명했다. 까다로운 환자였으면 진통제 안 주냐고 스테이션을 뒤집어 엎어도 할 말이 없을 일이었다. 쿠로오는 여기서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 그런데 회진이란 거 꼭 받아야 하나.”
“뭐, 입원했는데 교수님 얼굴은 봐야죠.”
“난 선생 얼굴이면 충분해.”
“하긴 제가 미남이란 소리는 많이 듣긴 합니다.”
쿠로오 딴엔 농담으로 던진 말에 남자는 입술만 끌어당겨 웃으며 눈으로 쿠로오의 얼굴을 샅샅히 흩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만져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나란 남자는 정말 죄많은 남자라니까.. 하고 웃어 넘기기도 힘들다 이런 눈은.
부러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얼굴을 돌리며 어디 불편한 곳은 없냐 물었는데, 남자는 턱끝으로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냉장고.”
“......”
의사는 네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이 환자 자식아. 그러나 결국 몸이 불편한 환자더러 일어나 냉장고로 가라 할 수 없어 쿠로오는 입가를 씰룩이며 냉장고로 걸어갔다.
“냉동실.”
냉동실.. 얼음팩이라도 대고 있으려는 건가. 미열이 좀 있긴 했는데 아이스팩을 댈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런 쿠로오의 염려와 달리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운것은 병원 지하 편의점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사온게 분명한 아이스크림 창고였다. 이정도 양이면 못해도 삼분지 일은 털어왔을 것이다.
쿠로오는 고갤 뒤로 돌려 제법 엄하게 환자를 다그쳤다.
“금식이란 말 못들으셨습니까?”
“내가 먹으려고 산 건 아냐. 더운데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가.”
“하하. 말씀은 고마운데.”
“어차피 내 주치의잖아. 먹으면서 이야기 하자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리 길게 하려고? 힐끔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한 쿠로오는 더 거절하지 않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집어들어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묻고싶은 거라도 있으십니까?”
“물은 언제부터 마실 수 있는거지?”
“일주일은 꿈도 꾸지 마시죠. 그래도 수액이 지속적으로 들어가니까 갈증은 심하지 않을 텐데요.”
“아아.. 입이 건조해지는 느낌이라.”
“간호사한테 거즈 몇장 얻어서 물에 적셔 물고 있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대신 목마르다고 물 빨아마시면 안되시고..”
아드득 하고 아이스바를 깨물어 먹으며 쿠로오가 이어 말했다. 호기롭게 아이스크림을 먹긴 하는데, 이거 금식하는 환자 앞에서 괜히 염장지르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남자는 조용히 아이스크림을 씹어먹는 쿠로오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웃음 비슷한 소릴 냈다. 원래 많이 웃는 편인가 아니면 저런 웃음인지 으르렁거림인지 하는 목울림은 버릇인 것인가. 참 생긴 것에 어울리는 살벌한 버릇이란 생각이 들었다.
“맛있게 먹네.”
“음식을 남기면 벌받는다고 배웠거든요.”
남자는 대답 없이 입꼬리만 묘하게 치켜 올리고 상체를 뒤로 비스듬히 눕혔다. 분명 이쪽의 시선이 위에 있는데 어쩐지 내려보는 느낌이 든다.
“벌 받는거 싫어하나봐..?”
하. 쿠로오는 뒷목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벌도 벌 나름이지.”
명백히 섹슈얼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 말투에 쿠로오는 대답 없이 다 먹은 아이스크림의 막대를 휴지통에 가볍게 던져넣었다.
탕, 하고 가벼운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쿠로오는 분위기를 환기하듯 아. 하고 막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왼팔 수술해야 하는건 이야기 들으셨나요?”
“처음인데.”
“뼈가 못나게 부러져서 철심 박아야 합니다. 아마 내일쯤 수술할텐데, 저녁 전에 동의서 받으러 사람 올테니 보호자랑 대기하고 계시죠.”
“그럼 선생도 같이 오겠네.”
“예?”
“어제부터 내 보호자였잖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비죽 웃었다. 쿠로오는 상냥하게 방긋 웃으며 대답 없이 나가 문을 쾅 닫았다.
각주.. 괜히 달았나.....ㅠ0ㅠ... 각주 찾느라 시간 다감...ㅠㅠㅠ
- 응급실 [본문으로]
- B혈압P맥박R호흡+T체온 혈압 평균은 120/80. 실혈로 인해 혈압이 낮고 맥박이 빠르고 호흡이 가빠진 상태 [본문으로]
- 위치 시간 이름 등 현재 환자가 자신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지 여부 확인. [본문으로]
- 동맥혈가스분석 [본문으로]
- 수술실. 정규시간 8~16시 이후엔 수술실이 모두 개방되어 있지 않다. [본문으로]
- 응급실을 통해 내원한 환자는 보통 그날 당직이 그대로 맡아 처리한다. [본문으로]
- 수술 후 경과 [본문으로]
- 아무것도 먹지 않는 치료처방. 물도 금지된다. 보통 수술 전후 처방된다. [본문으로]
- 수술부위 혹은 상처부위의 피와 분비물을 흡수하고 통증과 감염을 막기 위해 행해지는 치료법. [본문으로]
- 소독 셋트. 멸균소독한 케이스 안에 소독약과 거즈와 핀셋이 들어있다. [본문으로]
- 수술부위에 삼출물이나 혈액이 고이는 것을 방지하고 지속적인 음압을 유지해 배액을 돕는 기구. 피주머니라고도 불린다. [본문으로]
- pro re nata 수시로 필요한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놓는 처방전. 진통제를 prn으로 처방하면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자마자 곧장 약을 투여할 수 있다. [본문으로]
- 마약성 진통제. 모르핀과 비슷한 효능.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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