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하고 탄력있는 배구공이 체육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돌돌돌 하고 작은 바퀴들이 굴러가며 네트가 걸리는 소리. 일상처럼 귓가에 자글거리는 작은 소리들을 무시하며 보쿠토는 샤프펜슬의 뭉툭한 끝을 턱으로 꾸욱 눌렀다. 살짝 찌푸린 눈길 앞엔 학교에서 나눠준 회색 갱지가 흐물흐물 펄럭거렸다.
“설문지 아직도 못 끝내셨나요?”
“으.. 설문지라기에 간단한 건줄 알았는데 쓰는 게 엄청 많잖아 이거!”
“연습 전까지 작성하시고 교무실에 제출하셔야합니다.”
“윽, 좀만 도와줘 아카아시~!”
보쿠토는 기다렸다는 듯 설문지를 아카아시에게 내밀었다. 아카아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순순히 회색 갱지와 샤프를 건네받아 벤치에 종이를 대고 앉았다. 아카아시가 대충 넘긴 첫표지엔 큼직한 고딕체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건전한 이성교제 실태파악 설문]
시험도 아니고, 이미 아카아시 본인은 점심에 작성해 제출한 설문지였다. 어차피 의무적으로 전교생이 하는 설문지다. 중간에 글씨가 바뀐다고 해서 큰일은 일어나긴 커녕 알아차리지도 못할 거리는데 아카아시는 자신의 에이스를 걸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곧 연습이 시작되니까.
아카아시는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설문지의 빈 칸을 메꿔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설문지를 작성하려 한 것인지 중간중간 보쿠토의 글씨가 채워진 칸도 몇개 눈에 띄었다. 거침없는 아카아시의 손길에 보쿠토가 역시! 하는 소리와 함께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 빠르잖아 아카아시!”
“...보쿠토 선배.”
설문지의 절반쯤을 채웠을까. 아카아시의 샤프가 툭, 갱지 위에 부딪혀 쉼표를 닮은 자국을 만들었다. 보쿠토의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낸 아카아시가 그것을 문질러 닦고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채워지는 설문지를 쳐다보던 보쿠토를 불렀다. 갱지에 눌린 자국이 만족스레 지워지지 않았다.
“이 설문은 직접 작성하신 건가요?”
14. 본인이 생각하는 친구간의 스킨십의 범위는?
아카아시가 샤프로 가리킨 설문을 본 보쿠토가 대수롭잖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묘한 눈으로 질문 밑의 답변을 죽 눈으로 흩었다.
어깨동무, 가벼운 포옹, 손잡기, 엉덩이, 뽀뽀,..
“응, 왜?”
“엉덩이가 대체 뭐.. 아니, 여기부터는 빼는게 좋지 않나 싶어서요.”
“음? 그래?”
“그리고 뽀뽀라니. 이건 비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긴 프랑스가 아닌데요.”
“친구사이에 그정도는 다 하지 않아?”
“하신 적 없으시잖아요?”
아무리 쉽게 들뜨고 쉽게 가라앉는 감정폭을 가지고 있다 해도, 보쿠토는 부원들에게 평균 이상의 스킨십을 한 적은 없었다. 하이파이브나 어깨동무정도야 뭐 그렇다고 쳐도 갑자기 엉덩이가 왜 튀어나오는 건지 아카아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쿠토 선배가 저 모르는 사이 부원들과 서로 엉덩이를 주무를 정도로 친밀해졌단 말인가요? 뽀뽀는 정말 불이해의 영역 너머에 있는 답변이었다.
“아냐! 쿠로오랑은 해!”
“..두 분 친구입니까?”
아직, 이라는 말이 생략된 문장을 꺼내어 물으며 아카아시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보쿠토는 설문지를 바라보느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보쿠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대답했다.
“당연하잖아~”
왜 당연한건지 모르겠다고 아카아시는 잠깐 생각했다.
첫번째. 보쿠토 선배에게 쿠로오 씨의 의사를 묻고 스킨십을 했는지 묻는다.
-> 왜 그런걸 물어봐? -> 상황에 따라 해당 스킨십을 당한 쪽이 성적인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다. -> 헉!? 내가 쿠로오에게 그렇게 나쁜 짓을..! -> 의기소침 모드가 된다.
두번째. 쿠로오 외의 다른 친구들과도 이런 스킨십을 하는지 묻는다.
-> 예라고 대답한 경우 -> 아 그렇군요..
-> 아니라고 대답한 경우 -> 둘 사이가 어떤 사이냐고 묻는다. -> 고민하느라 연습에 집중하지 못한다.
세번째 -> 설문지를 수정한다. -> 그거 왜 지워? -> 쿠로오 씨에게 물어보세요.
세번째가 제일 편하겠군. 아카아시는 샤프를 들어올려 보쿠토의 답변 위에 선을 그었다. 보쿠토가 어! 하고 눈을 동그렇게 떴다.
어깨동무, 가벼운 포옹, 손잡기, 엉덩이, 뽀뽀,..
“왜 지워?”
“글씨를 지워도 자국이 남거든요.”
“지우는 게 정답이야?”
“쿠로오 씨에게 물어보세요.”
아카아시는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 장의 설문을 작성하며 대답했고, 보쿠토는 흐음? 하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옆으로 갸웃 움직였다.
“다 작성했어요.”
“오우, 고마워. 진짜 빠르네~”
“곧 연습 시작입니다.”
“알았어! 금방 갔다올 테니까 코치님께 말씀드려줘!”
설문지를 구겨쥔 보쿠토가 힘차게 교무실로 달려나간 체육관 안에서, 아카아시는 쪼그려 앉아 저린 다리를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