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 보쿠토 x 갬블러 쿠로오
다음날 쿠로오는 시로후쿠에게 보쿠토가 쓸 새 카드 한벌을 요청했고, 다음날부터 보쿠토는 자신의 카드를 만지며 셔플에 익숙해지는데 하루에도 몇분씩 시간을 쏟았다.
하루 몇 시간이라도 방문할 것처럼 이야기하던 보쿠토의 말과 달리 그는 바쁜 퍽 바쁜 사람이었다. 마지막 수업으로부터 사흘쯤 지났을까, 놀러온다는 말은 그냥 예의상 해 본 말이었던 걸까~ 하고 넘기던 쿠로오는 서재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보쿠토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야? 오늘 수업이야!?”
“아니아니, 오늘은 그냥 자유시간!”
자유시간이라니, 여기가 학교냐? 쿠로오는 학교에 제대로 다녀본 적도 없으면서 반사적으로 그렇게 농지거리를 지껄였다. 보쿠토는 대답 대신 쿠로오가 앉은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와 상체를 철푸닥 엎드렸다. 그리고는 티 나게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데.. 쿠로오가 걱정스런 얼굴로 내려보며 어디 아픈거 아냐? 하고 묻자 냉큼 입을 열었다.
꼭 그런 소리를 해주길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지금 원로회의에서 대차게 잔소리 듣고 오는 길이야!”
“어이구 힘들었겠네요~ 그런데 원로회?”
“있어.. 꼰대들 친목회같은거.”
원로회인지 뭔지에 대해 상당히 감정히 쌓였는지 보쿠토는 불만을 쫑알댔다. 그동안 친구 없어서 이야기도 못하고 어떻게 살았나 몰라.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려주며 맞장구를 치는 사이 쿠로오는 기억을 더듬었다. 마피아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보스 아니었던가? 그 보스에게 잔소리를 한다는 원로회란 건 대체 뭘까. 쿠로오는 주로 갱들의 영역에서 살아왔기에 흑사회의 생리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물어볼까 말까.. 기분 나빠하지 않고 대답해주려나. 속으로 다섯번쯤 고민하다 질문을 던지자 보쿠토는 쿠로오의 고민이 우습도록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원로회가 보스보다 더 높은 사람들인거야? 왜 네가 잔소리를 들어?”
“음.. 이게 사실 야쿠자나 흑사회쪽 풍습이긴 한데..”
보쿠토는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하려는 것처럼 상체를 느릿하게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원로회는 전대의 실세들이야, 보스의 오른팔이었거나..”
“지금의 보스는 너인데도?”
“다 친척 어르신들이라..”
한숨과 함께 보쿠토는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고,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지금 친척 어르신들한테 잔소리 듣고 와서 이렇게 우는 소릴 하는거야?
“진정한 의미의 패밀리 비지니스네.”
“그렇지 뭐, 나름대로 백년 넘게 이쪽 업계에 종사한 거니까~”
“백년이나!?”
쿠로오는 깜짝 놀라며 그렇게 반문했다. 아무리 아는게 없어도 부엉이회가 삼년쯤 전에 갑자기 나타나 세력을 불리기 시작했다는 건 안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을 것이다. 흑사회의 분파치고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구나~ 했는데.
“흐음.. 그럼 본토에서 넘어온거야?”
“아니! 후쿠로다니회 자체는 이 도시에 쭉 있었지. 본래는 이 도시의 화교들이 만든 거라서.”
이 도시가 무법지대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50여년 전.
그 이전부터 도시를 지키던 후쿠로다니는 갑작스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동네 주먹패 모임 정도의 알량한 세력밖에는 가지지 못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리 체계적인 기틀이 잡혀있긴 했지만.
“뭐만 하면 이게 다 우리가 잘 해둔 탓이라느니.. 한 거라곤 쥐콩만한 건물 한채 가지고 월세받아먹기밖에 못 했으면서 말이야.”
이야기를 듣다 보니 보쿠토는 이 도시에서 태어난 토박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뭐.. 외부에 본부가 있는 큼직한 단체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쿠로오는 별다른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나저나 부엉이회의 안 쪽에서 외부 도시에서 자라고 도시로 들어온 신 세력과 이 도시에서 세력을 보존하던 구 세력으로 파벌이 나뉘어진 모양인데, 외부인에게 이런 것까지 이야기해줘도 되는 건가? 하는 순간 별 세세한 이야기까지 쫑알대던 보쿠토가 입을 다물었다.
얼굴을 보니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게 아닌가 싶은 얼굴이길래 쿠로오는 시침을 뚝 떼고 책에 귀를 기울이던 척 했다.
“뭐야, 쿠로오 네가 물어봤으면서 왜 책을 읽고 있는데!?”
“어? 이야기 다 끝난거야? 너무 길어지길래 언제 끝나나 했다.”
“하나도 안 들었지! 너무하네 정말!”
“아니 들었다니까~ 그러니까.. 백년이 넘었다며?”
“헤이헤이헤이, 완전 초반 이야기잖아!!”
보쿠토는 짐짓 마음이 상한 것처럼 투덜거리며 쿠로오가 보던 책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지만, 쿠로오는 보쿠토가 정말로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리저리 부대낀지 거의 두달이 되어가는데 모를 리가 있나. 쿠로오는 책을 덮어 그 사이 짓눌린 보쿠토의 손바닥을 아프지 않게 꾹 눌러주고-보쿠토는 엄살을 부리며 비명을 질렀다.- 낄낄 웃었다.
“그런데 무슨 책 보고 있었어? 포커에 대한 거?”
“저는 쉬는 시간에까지 자기개발에 투자하고 싶지는 않답니다~”
처음 서재에 도착해 이곳저곳 뒤져보니 포커 입문에 대한 책이 두어권 나오긴 했지만, 인쇄가 십오년도 더 전에 된 책이었다. 그걸 보니 왠지 다른 서재의 책들도 부엉이회가 아닌 이전 이 건물을 썼다는 스텔라가 채워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책등에서 핏자국을 발견하더라도 놀라지 말아야겠다.
쿠로오가 대답을 피하자 보쿠토는 책을 자기 쪽으로 슥 끌어와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기기 시작했다.
“여행 이야기네.”
“아아 뭐~ 그림 많은 책은 그런 것밖에 없더라고.”
“시로후쿠에게 동화책이라도 사다놓으라 그럴까?”
“어유 감사해라.”
쿠로오는 농담처럼 넘겼지만 그가 들고 있던 책은 사람의 손이 꽤 오래간 탄 것처럼 가운데가 쉽게 벌어졌다.
사진작가의 기행문이었는데, 말 한줄 없이 사진으로만 가득 채워진 페이지도 많았다.
인도네시아 발리, 뉴욕의 맨하탄, 그린란드의 오로라 명소.. 도시고 휴양지고 작가가 발 디뎌 이동한 대로 중구난방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보쿠토는 책 위쪽에 작게 접힌 부분을 매만지며 작게 입을 열었다.
이 책을 오래 봤을까?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을 마킹해둔건가? 쿠로오의 손길을 탄 이 책을 보자 어딘가 작은 가시가 박힌 것처럼 불편했는데, 왜 이런 느낌인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여행 가려고?”
“언젠가 갈 수 있겠지 싶어서 보는거지 뭐.”
“흐응..”
보쿠토는 혀를 굴려 본인의 볼 안을 쿡쿡 찔렀다.
그러고 보니, 쿠로오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은 단 1년 뿐이었다. 사실 처음엔 그 정도면 차고 넘치도록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야 지금까지 선생이라고 온 녀석들은 다 재미없는 녀석들 뿐이었는걸.
보쿠토는 딱히 뭐라 할 수 없는 표정으로 책을 탁 덮었다. 쿠로오는 그새 다른 책을 펼쳐들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왠지 심통이 나서 손으로 방해를 하자 순순히 책을 덮고 이쪽을 바라봐왔다.
“이렇게 산만해서야, 친척 어른들에게 더 혼나야겠는데?”
“내가 놀러왔는데 책만 보고.. 놀아줘!”
“음.. 일층에서 당구라도 칠까? 당구 쳐본 적 있지?”
“헤이헤이헤이! 그 정도는 칠 줄 알거든?”
쿠로오는 당구도 처음부터 가르쳐줘야 할 줄 알았지~ 라며 보기 좋게 웃었다.
보쿠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쿠로오가 책을 정리하는 참을 기다리지 못하고 문가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한낮의 고양이처럼 나긋하고 나른한 걸음걸이에 애가 타는 건 보쿠토 쪽이다.
처음엔 이게 포커 선생인지 신입인지 헷갈릴 정도로 험악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웃는 모습을 보고 대번에 인식이 바뀌었다.
남을 위압하려는 본인의 여유로움과 힘을 과시하는 미소와는 달랐다. 순전히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는 웃음이었는데 이 도시에 와서 자신에게 그렇게 거리낌없이 웃어주는 이를 보는건 처음이라 솔직히 기분이 아주 좋았다.
첫인상이 좋으면 다른 행동도 자연히 곱게 보이는지라 쿠로오가 어떤 행동을 해도 밉게 보이지가 않는다. 솔직히 가끔 건방지게 행동하는 것 같아도 눈치가 좋아서 금새 자제하기도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껄적지근한 뒷맛은 책정리를 마치고 걸어오는 쿠로오를 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보쿠토는 활짝 웃으며 쿠로오의 손목을 잡고 1층의 당구대로 후다닥 뛰어내려갔다. 왜 이리 서두르는 거냐고 타박하는 목소리마저 웃음이 서려 있었다.
*
“좋아, 그럼 네가 가진 핸드가 이렇게 있다고 하면, 이 상황에선 콜이야 레이즈야?”
“으으음..”
쿠로오의 손가락이 클로버 9와 K가 나란히 눕혀진 자리 위를 툭 쳤다. 족보는 얼추 외웠다지만 아직 단번에 카드의 하이로우를 가리는게 어려워 보쿠토는 조금 시간을 들였다. 리버 카드가 J나 Q둘 중 하나라도 나와주면 바로 레이즈를 부를 텐데, 아니면 수티드라도! 지금 쿠로오가 가진 카드는 하트와 클로버로 2, 7이다. 단순 계산만 해도 보쿠토 쪽이 가진 카드가 높은 패였다. 보쿠토는 자신있게 외쳤다.
“레이즈!”
“흐음, 왜?”
“음.. 일단 내 패가 좀 더 하이 카드니까. 못해도 K하이는 먹을 수 있을것 같아서.. 그리고 쿠로오가 가진 카드보다 숫자가 더 붙어있으니까!”
“스트레이트를 노렸다?”
“응!”
“그럼 카드가 오픈되었을 때 이렇게 되면?”
쿠로오가 테이블에 남은 다섯장의 카드를 모두 공개하자 보쿠토가 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결과는 쿠로오의 트리플, 보쿠토의 원 페어다.
“엑.. 너무해! 쿠로오에게 7이 하나 더 있었어?”
“보쿠토 네가 롱스택을 가진 상태라면 적당히 레이즈를 받아줘도 큰 손해는 보지 않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번 판단 하나로 단번에 알거지가 되는 수가 있어.”
“으으..”
“왠지 K라든가 높은 카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K혼자 잘나봤자 2원페어에 진다는건 잘 알지?”
“그건 알지만.. 왠지 잘 안 와닿아서.”
쿠로오는 보쿠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을 가르쳐 보는게 처음이라 보쿠토의 진도가 빠른지 느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쿠토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작은 종이에 핸드 순위를 적어가기도 하고, 휴대폰에 포커 게임 어플을 받아서 가끔 쳐본다고도 했다.
온라인상의 숏스택 게임이야 워낙에 룰을 모르고 막치는 사람이 많아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지만.
“제대로 테이블을 몇 번 돌아보면 감이 잡힐텐데.. 이 건물 와이파이 안 된다고 했던가?”
“응.. 옛날 건물이고 쓰지 않던 거라..”
노트북이라도 연결이 된다면 돈을 충전해서 적당한 온라인 카지노에 접속할 수도 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쿠로오는 아쉬운 맘을 접고는 다시 카드를 삭삭 모아 셔플했다.
보쿠토가 테이블 맞은편에서 자신의 카드를 셔플하는 연습을 하는 사이 보쿠토의 앞으로 카드를 두 장 밀어두고, 테이블 위에 카드 다섯장씩 네줄을 늘어놓았다.
“그럼 시간 될 때까지 객관식 문제를 풀어볼까? 지금 가진 핸드로 가장 높은 점수를 얻는 카드는 어느 걸까요? 카운트 다운은 30초.”
“에엑, 잠깐만!”
“25, 24, 23..”
보쿠토 자신이 가진 카드 두 장과 테이블에 놓인 다섯 장의 카드 중 세장을 골라 다섯장의 패를 만들어 그걸로 계산을 해내야 했다. 아직 카드를 보는데 익숙치 않은 보쿠토가 허둥거리는 사이 쿠로오는 느긋하게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대고 턱을 괴었다.
이제 패를 혼자 읽을 수 있으니 기본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진도는 이제 응용편으로 접어든다. 이 무법도시에서 카지노의 오너가 카드를 배워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공구리치는 녀석들 제대로 알아보고 잡으려는 거지.
‘준비물이 필요해.’
쿠로오는 테이블 위를 슥 흩어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딜러버튼과 실제로 사용되는 카지노 칩으로 꽤나 풍성해진 테이블이었지만 쿠로오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일반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후쿠로다니쪽에서 이걸 구해다줄 수 있나 모르겠네.. 괜히 잡음이 생기는거 아냐?’
제한시간인 30초를 훌적 넘기긴 했지만 보쿠토는 정답을 구해냈다.
쿠로오는 방긋 웃으며 문제를 몇 번 더 냈고, 보쿠토가 머리에 쥐가 날 것 같다고 울먹이는 소리를 내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카드를 만지는 건 금새 익숙해 졌으면서 참 귀엽기도 하지.
‘귀엽다는 건 좀 아닌가?’
쿠로오는 문득 든 생각에 자조하며 카드를 내려다보는 보쿠토의 정수리를 쳐다보았다.
마피아 보스에게 귀엽다니, 우스꽝스러운 역설처럼 느껴진다. 처음 이곳에 끌려왔을 때, 아니 다우트 스트릿에 살면서 무언가가 바닥에 털썩 쓰러지는 소리만으로 그게 시체인지 아닌지 가늠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20170806 부산 통온 플라이큐! 에 신간으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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