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은 대략 일주일에 두 번에서 한 번 정도로 불규칙했다. 한창 자고 있을 때 갑자기 자신을 깨우는 손길에 눈꼽만 떼고 나간 적은 두 번, 아침을 먹고 있는 시간에 들이닥친 것도 세번 쯤.. 쿠로오가 제발 오기 전에 대략적으로라도 귀띔을 해 주면 안되냐고 물었지만 보쿠토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곳으로 오는 일은 철저히 비밀스러운 행동인 모양이었다.
보쿠토는 한번 수업을 시작하면 삼십분에서 한시간 정도 머무르다가 가곤 했다. 두번째 수업에서 보쿠토는 정말 예고한 대로 포커의 룰을 거의 까먹은 상태였지만 수업이 두 번, 세 번 진행됨에 따라서 점차 룰에 익숙해졌다.
그보다 쿠로오에게 더 심각한 것은 보쿠토가 오지 않을 때였다. 보쿠토에게 이 건물 안이라면 맘껏 돌아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맡았지만, 2층의 어느 빈 방 바닥에서 미처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을 발견한 뒤로 쿠로오의 행동반경은 극히 좁아지고 말았다.
그나마 돌아다닐만한 곳이 1층의 텅 빈 홀과 4층의 서재 정도일까.
4층의 책을 원하는대로 꺼내 읽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쿠로오는 몇몇 소설책만 끄적대며 읽고는 서재에 잘 올라가지 않았다.
애초에 인문학적 소양도 별로 없는데다가, 알파벳도 간신히 떼었는데 책을 술술 읽을 수도 없었다. 공부라도 할 겸 추리소설이나 혹은 포커에 관한 책을 꺼내 읽긴 했지만 쿠로오는 다시 지루해졌다.
보쿠토와 함께 있는 시간만이 그나마 다른 사람과 대화하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카드를 섞는 건 안 배워도 되는거야?”
“음?”
쿠로오는 갑자기 튀어나온 보쿠토의 질문에 시선을 아래로 내려 만지던 카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흐으음.. 이제 카드 욕심이 좀 나나 보네? 대답 대신 화려하게 카드를 셔플하며 보쿠토의 앞으로 카드를 한장씩 날려보내자, 보쿠토는 우와! 하고 입을 쩍 벌리며 감탄했다. 쿠로오는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묘기를 배우고 싶은 거야?”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잘 하면 멋있잖아?”
“흐음.. 하긴, 제일 쉬운 방법이긴 하지.”
“뭐가 제일 쉬운데?”
“상대방에 포커에 조예가 있는지 없는지 제일 쉽게 구분하는 방법이라고.”
“헤에?”
“아무리 칩을 잘 따도 카드를 만지는게 어색하면 바로 티가 나니까.”
그렇지만, 카드를 만지는 걸 배우는 건 그냥 요령에 가까웠다. 테이블에 얹어진 카드 뒤쪽을 살짝만 들어올려 카드를 확인하는 손놀림이라든가, 카드를 확인한다고 카드를 손에 넣어 굴리는 시늉을 하는 것 말이다.
“혹시 그 수질관리 위원회란 테이블에선 딜러가 따로 없나?”“그건 잘 모르겠어.”
“그렇다면 홀덤일 가능성이 크네. 딜러를 할 일이 있다면 카드를 셔플하는 법 정도는 배워두는게 맞긴 한데.”
“가르쳐 줘!”
“일단 홀덤 룰부터 외워야 하지 않겠어요?”
쿠로오가 놀리듯 말하자 보쿠토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쿠로오는 낄낄 웃으며 보쿠토가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일단 카드를 쥘 땐 공기 한겹이 사이에 낀 것처럼 살짝 들어 쥐는게 좋아. 그리고 한번에 위로 들어올리는 카드는 밑에 남은 카드보다 적은 양일 것.”
이런 식으로. 라고 중얼거린 쿠로오가 천천히 카드를 셔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카드를 나눠서 다시 섞는걸 컷.”
보쿠토의 손이 쿠로오의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고, 카드는 한 장 빠져나가지 않고 물처럼 흐르듯 섞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이런 식의 리플 셔플을 많이 쓰지. 이런 식으로 섞는건 테이블 셔플이라고하고..”
머신건, 오버핸드, 다양하게 카드를 섞어낸 쿠로오는 입까지 헤 벌린 채 반짝반짝한 눈으로 카드를 쳐다보는 보쿠토를 보고 씩 웃었다.
“다음엔 새 카드 한벌을 준비해 둘 테니까, 다음 시간부터는 십분씩 카드 셔플하는 법까지 배우는걸로 할까나.”
“좋아! 엄청 멋지잖아 그거!”
여유로운 얼굴로 카드를 반씩 갈라 엄지로 스프링을 만들어 양쪽의 카드를 촘촘하게 섞고 이리저리 뒤흔들어보이자 질리지도 않는지 다시 감탄사를 내뱉는다. 쿠로오는 카드를 건네주고는 어설프게 셔플을 흉내내는 보쿠토를 빤히 쳐다보았다.
걸친 정장은 의자 뒤에 걸어두고 있었지만 헤어스타일은 처음 본 대로 이마 위로 치켜올린 머리였다.
어딘가 중요한 일이 있을때만 뒤로 얌전히 넘기는지, 첫 수업 이후로 늘 저 머리란 말이지..
쿠로오는 부엉이회라는 별명이 먼저인지 아니면 저 헤어스타일이 먼저인지 늘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아, 맞다.”
쿠로오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보쿠토가 무슨 일인데?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 하도 심심해서 건물 탐험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응.”
“2층 방에서 핏자국을 발견했는데..”
말꼬리를 흐린 쿠로오가 힐끔 보쿠토를 살피자, 보쿠토는 카드를 슬쩍 내려놓고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아.. 어딘지 알겠다.”
“혹시 이 건물..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아?”
사람이 죽었다든가 사람이 죽었다든가 사람이 죽었다든가...!
쿠로오가 비장한 얼굴로 그렇게 묻자 보쿠토는 슬쩍 눈동자를 굴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본 건물이랑 멀지도 않은데 사람도 별로 안 오지, 분명 해가 잘 드는 남향인데 묘하게 온도가 낮지.. 다른 건물도 아닌 마피아의 건물이니 그 정도는 예상했지만 확인사살을 당하니 새삼 간담이 서늘해졌다.
“맞아. 사실 이 장원이 코로나의 분파인 스텔라의 본거지였거든.”
“음?”
“여기가 원래 보스랑 보스 애인이 사람 불러서 파티하던 별장이었는데 우연히 뒷산으로 이어지는 도주용 비밀통로를 알아내서~ 그리로 쳐들어왔어.”
“오야?”
“나중에 여길 쓰려고 벽지도 싹 바꾸고 페인트도 새로 칠했는데 이상하게 보스가 죽은 방 핏자국이 안 지워진다더라고.”
말을 들어보니 이 건물에서 죽은 게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평소 귀신따위 믿지 않는다며 코웃음치던 쿠로오의 안색이 대번에 헤쓱해졌다.
“피, 핏자국이..?”
“응. 밑에 애들이 무서워하길래 그냥 놔두라고 했는데.. 괜찮아 쿠로오! 그 사람 이미 죽었거든!”
죽었으니까 문제지! 아아, 진짜! 쿠로오는 괜한 것을 물은 자신을 탓하며 보쿠토의 손에서 카드를 받아들였다. 보쿠토는 순식간에 침울해진 쿠로오의 분위기에 조심스레 고개를 기울이며 슬쩍 물었다.
“혹시 피가 무서워?”
“피가 무서운게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이란게..”
“원래 피는 잘 안 지워져. 그래서 난 빨지도 않고 새 옷 사버리는데.”
아니 제발.. 셔츠에 케첩 묻은 말투로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아줘! 쿠로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으며 카드 다섯 장을 테이블 위에 한장씩 올렸다.
“무서우니까 이 이야기는 그만 할까?”
“진짜 무서워?”
“자, 자. 수업 시작합시다. 여기 리버 카드까지 포함해 이게 보쿠토 네가 가진 핸드고 이쪽이 내가 가진 핸드라고 치면~”
“쿠로오, 쿠로오. 막 무서워서 잠도 안오고 그래?”
쿠로오는 선생님의 말을 끊고 불쑥 물어오는 보쿠토에게 핀잔을 주는 대신 손에 턱을 괴고 지긋하게 눈을 마주쳤다. 노랗고 동그란 눈동자가 그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빤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섭다기보단.. 심심했지.”
“응?”
“인터넷도 전화도 쓸 수 없는 데다가 하루 대부분을 이 건물에서 혼자 지내다시피 하니까.”
“스즈메다랑 시로후쿠는?”
“바쁘게 일하시는 분들인데 외롭다고 같이 있어달라고 할 순 없잖아?”
“흐음?”
보쿠토는 정말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인지 고개를 갸우뚱 옆으로 굴리며 눈을 깜박거렸다. 원래 사람을 방에 넣어두고 가만히 놔두면 심심해서 어쩔 줄 모르는게 정상이거든요~
“차라리 아예 혼자라면 모르는데...”
“외로운거 아니었어?”
“아무리 외로워도 귀신은 싫거든요!?”
질색하는 대답에 보쿠토는 뭐가 그리 웃긴지 배를 잡고 낄낄대며 웃어제꼈지만, 쿠로오는 정말로 웃을 수가 없었다. 초반의 장난 반 진심 반의 질문을 했을 때와 달리 지금은 좀 무섭다고..
한숨을 푹 쉬며 카드를 내려놓자 보쿠토가 쿠로오를 달래듯 살살 말을 걸었다.
“그러면 가끔 내가 놀러와도 돼?”
“응?”
“사실, 놀러가고 싶었는데 아카아시가 막았어! 내가 가면 오히려 불편해 할꺼라고..”
“......”
그야.. 불편하긴 하다. 가끔 자신의 위치를 까먹은 것처럼 편하게 구는데 보쿠토는 무려 이 도시를 주름잡는 무력과 권력을 가진 자였다. 바로 어제 그렇게 물었다면 쿠로오는 불편하게 있느니 차라리 심심하고 말지~라고 생각하며 매너있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이란 말이지..’
마피아들도 겁을 집어먹고 근처로 얼씬도 않을 건물에 나같은 민간인을 머무르게 하다니 너무한거 아닌가!
그런 쿠로오의 고민을 훤히 들여다 보듯 보쿠토는 짐짓 뻐기는 얼굴로 자랑스레 말을 이었다.
“나랑 있으면 귀신도 못 나올껄?”
“호오? 어째서? 혹시 퇴마 체질이야?”
“내가 그 보스 멱을 땄거든! 두 번 죽고 싶지 않으면 설마 다시 나타나겠어?”
“와.. 엄청난 자신감..”
그 보스 귀신이란게 진짜 있다 해도 저렇게 웃는 남자에게는 해코지 하지 못할 것 같다. 쿠로오는 어이없이 피식피식 웃으며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보쿠토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끔벅이는 두 눈은 시트린처럼 맑고 색이 고왔다. 저런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면 진짜로 귀신이 꼼짝 못 할지도 모르겠다.
쿠로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보쿠토가 앞으로 자주 보러 오겠다며 활짝 웃었는데, 그렇게 믿음직해 보일 수가 없었다.
웹상에 공개될 8~9편정도면 전체 분량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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