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가의 공기는 어쩐지 평소보다 들뜬 상태다. 슈퍼 앞에는 평소 볼 수 없었던 알록달록한 패키지의 초콜릿이 진열되어 있었고 새로운 학기에 적응하기 시작하는 학생들부터 봄나물의 가격을 가늠하러 장바구니를 나온 주부까지 자연스레 상점가의 들뜬 공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 본래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어야 할 서번트들조차 그런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으니 세계 속의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오우, 고마워 아가씨!”
“어머어머, 아가씨라니~!”
아르바이트생의 와일드한 미소에 출생 뒤 반백년은 지난 어린 아가씨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났다. 오랜만에 듣는 아가씨 소리가 듣기에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듣기 나쁘지 않다 뿐인가, 발렌타인 시즌이 되자 마자 상점가에서 세 개에 1000엔씩이나 하는 초콜릿을 사다 안겨줄 정도로 단단히 팬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일주일에 고작 이틀 정도만 일하는 꽃집이지만 큼직한 체구에 야무진 손끝, 남녀노소 고루고루 잘 먹히는 수려한 외모를 가진 이 점원에게만 와서 꽃을 사가는 고정 손님이 생겼을 정도로 인기가 좋은 알바생이었다.
멋진 미소와 함께 초콜릿을 카운터 뒤쪽의 바구니에 넣어 두고(따로 바구니까지 준비할 정도면 초코를 한두개 받은 게 아닌 모양이다.), 손님이 주문한 꽃을 포장하기 시작하는 손놀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자아~ 여기 있습니다 손님!”
“내가 주문한 건 안개꽃 다발인데?”
“이건 초콜릿에 대한 답례.”
넉살 좋게 웃으며 안개꽃 다발 안에 작은 분홍색의 봉오리를 가진 장미를 한줄기 끼워넣는다. 흔히 보던 장미보다 사이즈가 작아 제대로 다발을 만드려면 좀 까다로운 녀석이지만, 가벼운 답례로 쓰기엔 가격도 모양새도 적당했다.
호들갑과 함께 꽃을 안고 떠난 손님의 뒤에서 손을 흔들어주던 남자는 얼굴의 미소를 지우고 길게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심드렁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뭐야.. 세이버의 마스터 쪽인 줄 알았는데.”
“그쪽이 아니라서 미안하게 됐군.”
골목 안쪽에서 인기척을 죽인 발걸음이 슥 다가왔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엔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난 것처럼 보였지만 남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얼굴로 으쓱 어깨만 올렸다 내렸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깔끔하게 이마 뒤로 넘긴 은발, 거기에 뚜렷한 이목구비는 국적을 알기 힘든 분위기다. 평소의 붉은 성해포가 아니라 별다른 장식 없는 검은 옷을 입었지만 상점가의 소소한 분위기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하긴, 저 영령에게 불가사의한 점이 어디 국적뿐이겠냐만은.
팔 한쪽에 낀 장바구니가 민망할 정도로 시장과는 연이 없을 것 같은 얼굴을 한 남자는 어쩐지 기분이 상당히 언짢아 보였다.. 아닌가? 평소에도 저렇게 무게잡는 표정으로 뚱하니 있곤 했던가.
“그래서, 용건은?”
“가게에 와서 점원에게 가진 용건이라고는 하나 뿐이겠지. 거실에 둘 꽃을 보러 왔을 뿐이다.”
쿠 훌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꽃을 구경하기 편하도록 가게 안쪽으로 한발 물러났다. 새벽에 사장님이 갓 공수해온 스위트피와 리시안셔스, 흔하지 않은 패랭이꽃에 작은 통에 잠긴 저것은 나뭇가지째 잘라온 목련에 세종류가 넘는 장미종, 스프레이 카네이션, 아네모네, 설유화..
동네 꽃집에 있기엔 종류도 다양한데다가 고급스러운 라인업이었다. 이유는 물론 꽃집도 상점가의 두근두근한 분위기에 합류해 매출증대를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나.. 예쁜 꽃이네~”
“어서 오세요, 아가씨!”
꽃을 보는 궁병을 내버려두는 사이 또 다른 손님이 평소 보기 힘든 꽃에 흥미를 느끼고 다가왔다. 추위가 물러나고 곧 날이 따뜻해지는 시기에 이런 저런 이유로 꽃을 사는 고객님들도 있어서, 랜서는 평소보다 딱 세 배 정도 바빴다.
“이건 메간장미라고 해. 비싸서 늘 들여오는 녀석은 아닌데, 꽃잎이 얇고 촘촘하게 모여서 봉오리도 그렇지만 만개했을 때 정말 화려하고 예쁘지. 색도 곱고요?”
“색이 참 예쁘네요.”
“크림색도 독특해서 좋고, 곧 봄이니까 이 복숭아 오렌지색도 좋지. 식탁 위에 놔두면 집안 분위기가 단번에 살아나거든.”
크림색의 장미와 레몬잎으로 구성된 꽃다발을 보기 좋게 엮어 묶자 우아하면서도 심플한 꽃다발이 금새 만들어졌다. 손님은 마음에 꼭 든다는 말과 함께 꽤 비싼 값을 치르고 꽃을 안아들었다.
그리고 막 생각난 것처럼 가볍게 웃으며 꽃집 알바의 손바닥 위에 작은 초콜렛을 하나 건네주었다.
“아, 그렇지. 이것도 받아요.”
“오야? 뭘 이런 걸 다! 미리미리 줬으면 사장님 몰래 꽃 한송이라도 더 넣어줬을 텐데!”
손바닥 위의 정사각형 포장지를 확인한 쿠훌린은 활짝 웃으며 번지르르하게 말을 이었다.
사소한 선물이지만 말을 저렇게 듣기 좋게 해주니 기분이 좋아 웃고 만 손님은 알바생의 열렬한 배웅을 뒤로 하고 아쉬운 걸음을 옮겼다.
매출도 올렸지 초콜렛도 받았지, 노동의 기쁨에 콧노래를 부르던 쿠 훌린은 아까부터 자신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궁병에게 느릿하게 시선을 던졌다. 손님을 대할 때와는 온도차가 너무 심해서 재채기가 날 정도였다.
“뭐야. 너도 장미로 정했냐?”
“아니. 생각보다 익숙해보인다 싶어서 말이다.”
아쳐의 시선은 랜서의 손바닥에 놓인 작은 초콜릿 위에 가 있었다. 아~ 뭐 그 쪽인가. 카운터 뒤의 바구니에 초콜렛을 가볍게 던져넣은 랜서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왜, 귀엽잖아 이런 말랑말랑한 이벤트. 호감의 표시로 단 걸 주다니.”
“서번트면서 속세에 찌든 소리를 하는군.”
“그런 네 쪽은.. 설마 아직이냐?”
그 물음에 궁병은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반문하듯 창병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당해보이기까지 하는 저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우와.. 사지 멀쩡하고 심지어 멀끔하게 생기기까지 했는데, 진짜로 초콜릿을 하나도 못 받았다고?
꼭 연애의 의미가 아니라 친분이 있는 사람들-마스터라든가-에게 한두개쯤은 받을 만도 한데.. 평소 얼마나 비비꼬인 성격을 드러내고 다닌 거야 저 녀석.
비꼬는 얼굴이 아니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기색에 아쳐는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을 꾹 눌러참았다.
“그게 중요한가?”
“야.. 인간관계라는게 말야, 거 참.”
말끝을 흐리며 혀를 차는게 정말로 궁병이 안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평범한 사람들의 이벤트에 그렇게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았던 아쳐로써는 새삼 열받는 반응이었지만 카운터의 초코 바구니를 뒤적이던 랜서가 무언가를 불쑥 내밀자 생각이 끊겼다.
“이건..?”
“다른 사람과 나눠먹어도 된다, 고 한 초콜릿은 이것뿐이라서 말이야.”
손바닥만한 황갈색 크라프트지 봉투를 열자 동전보다 약간 크고 납작한 초코 쿠키가 가득 담겨있었다. 아몬드 슬라이스가 군데군데 박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쿠키다.
아쳐는 그 포장지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랜서가 건네는 쿠키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익숙한 포장지군.’
전날 린이 온몸에 단내를 풀풀 풍기며 돌아온 것, 그리고 오늘 아침 거실의 소파테이블에 놓여 있던 저것과 같은 모양의 봉투를 떠올리며 상황을 유추했다.
아마 곧 있을 발렌타인 데이의 사전연습이라도 해서 다 함께 쿠키라도 구운 거겠지.
그리고 다 함께 만들었다면 필시 저 과자를 만드는데 들어간 노동력의 팔 할 이상은 ‘그’가 담당했을 것이다.
묘한 눈빛으로 과자를 쳐다보던 아쳐가 천천히 과자를 입에 물자 랜서도 곧장 쿠키를 하나 입에 쏙 집어넣더니, 쿠키가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맛있게 그것을 먹어치웠다.
“그 꼬마 녀석, 요리하는 재주가 있더라고. 이것도 꽤 맛있어.”
그 태평한 목소리에 바로 눈 앞에 서있는 랜서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아쳐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마 랜서 본인은 초콜릿도 하나 못 받은 불쌍한 영혼에게 하나 적선한다는 생각으로 쿠키를 내민 것 뿐이겠지만..
아쳐는 느릿하게 쿠키를 씹어 삼켰다. 입 안에 가득 찬 인공적인 단맛이 어쩐지 불쾌하게 느껴졌다.
“더 먹을래?”
“사양하고 싶군. 그보다 네가 말한 그 맛있는 과자라는건 대체 어디 있는 건가? 설마 이런 싸구려 쿠키를 맛있다고 먹고 있던 건 아니겠지.”
“......”
두 개째의 과자를 씹던 쿠 훌린의 입이 우뚝 멈췄다. 뜬금없는 폭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이 정도면 맛있는데?’
대답 없이 눈을 끔벅이는 랜서의 얼굴을 확인한 아쳐는 하,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정말 끝내주게 재수없어보였다.
“흥, 고대인의 입맛에는 이런 시판 코코아분말로 맛을 낸 과자면 충분하다는 건가. 그러나 알고 있나 쿠 훌린. 초콜릿에는 독성이 있어서 개가 먹으면 복통을 일으키기 쉽다는 걸 말이다.”
“지금 개라고 했냐..?”
“흐음. 설마 새삼스럽게 배가 아픈 건가? 모르고 있었다면 미안하게 됬군.”
이번 성배전쟁이 일어난 시대는 문물이 극도로 발달한 덕분에 과거라면 귀하거나 구할 수 없던 식재료를 이용한 요리문화도 덩달아 발전해있었다.
생전 먹어보지 못한 재료에 온갖 다양한 조리법까지, 현대 생활을 영위하면서 먹는 즐거움까지 알뜰살뜰하게 즐기고 있는 창병은 이 시대의 수혜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 몇 안되는 서번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 창병의 입맛에도 이 과자는 흠잡을 데 없이 맛이 좋았다. 가볍게 근처 슈퍼에서 파는 과자랑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는데 이런 악평이라니!?
유독 가시가 돋힌 반응에 쿠 훌린은 불쾌한 얼굴을 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 녀석 성격 나쁜 거야 알고 있었지만 쓸데없는 도발로 괜히 시비를 거는 녀석은 아닐 텐데, 싸우자는 것도 아니면서 이 시점에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올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이게 맛이 없다니.. 대체 너는 평소에 뭘 먹고 다니는 거냐?”
“훗.. 말이 나온 김에 보여줄 수 밖에 없겠군. 쿠키에 대한 답례로는 과분할 정도일 거다 창병!”
그렇게 외친 아쳐는 다음을 기약하는 악당의 대사를 남기며 유유히 걸어갔다. 내가 줄 초콜릿을 먹고 기절하지나 말라는 심하게 말랑한 대사였지만, 머리에 남지 않고 흘려듣게 되는 건 로켓단의 대사나 궁병의 대사나 다를 바가 없었다.
“잠깐, 아쳐..!”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아쳐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랜서는 퍼뜩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그를 불렀지만 아쳐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걸음걸이를 멈추지 않았다. 저 자식 분명 들리고 있을 텐데 모른 척 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꽃도 안 사고.. 과자만 처먹고 도망쳤잖아..!”
저 치사한 궁병녀석..! 쿠 훌린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마지못해 쿠키 봉지를 앞치마 주머니에 쑤셔넣고 손님을 응대하기 시작했다.
대체 뭘 기대하라는건지 모를 아쳐의 대사가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
그로부터 며칠 뒤, 토오사카 저택으로 온 국제배송 소포에 린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상자를 작게 흔들어보았다.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꽤 묵직하다. 상자 위에 붙은 전표에는 떡하니 토오사카저의 주소가 쓰여 있었지만 받는이의 이름은 ‘스즈키’ 라고 써있을 뿐 흔한 전화번호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벨기에? 그쪽엔 아는 마술사도 없는데..”
“나에게 온 물건이군.”
소파 뒤쪽에서부터 뻗어나온 팔이 린이 들고 있던 소포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발송지를 확인하고 안에 든 물건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처럼 신중하게 소포를 쳐다보더니 훗, 하는 의기양양한 미소와 함께 부엌으로 사라지는 남자의 이름은 물론 스즈키가 아니었다.
“아쳐!? 설마 진명이 이런 시시한 이름이었던..!?”
“당연히 가명이다, 린.”
“가며엉!?”
“인터넷으로 교류하는 정도의 친분이다. 가짜 이름을 쓰는 것 정도야 당연한 것 아닌가?”
인터넷? 교류? 설마 자신이 학교로 등교하는 동안 집안일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던 서번트가 인터넷으로 교류를? 린이 충격에 빠진 사이 아쳐는 포장을 뜯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었다.
상자 안의 보냉팩이 아직 서늘한걸 보면 정말 빠른 수단으로 이걸 보내준 것 같은데, 제대로 답례를 해야겠군.
“그래서, 교류의 결과로 얻은게 그거야? 대체 뭔데, 그거?”
“카카오매스를 1차 가공한 커버춰 초콜릿이다. 최상등품이군.”
“초콜릿!? 설마 발렌타인 대비로..!”
“물론 마스터의 몫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마스터의 몫‘도’ 라는 건 따로 줄 사람이 있다는 건가? 아쳐의 말에서 특이점을 찾아냈지만 그걸 꼬투리잡을 틈이 없었다.
아쳐가 포장을 뜯자 직사각형의 단단한 반죽같은 것이 공기중에 드러났는데, 린은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에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이 그윽하면서도 부드러운 향기...! 평소 알던 초콜릿의 향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향..
“세상에, 이게 진짜 카카오의 향기야..!?”
린이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사이 아쳐는 냉정한 눈으로 레시피를 여러개 떠올렸다.
원재료가 워낙 좋으니 템퍼링을 거쳐 몰드에 굳히거나 생크림과 버터를 넣고 가열해 생 초콜릿을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런 본격적인 초콜릿은 그가 원하는 그림과는 조금 달랐다.
린에게는 생초코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그리고 창병에게는 초콜릿을 응용한 디저트 정도가 딱이다. 코코아분말로 만든 쿠키 따위를 좋다고 먹는 창병에게 카카오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만한 녀석으로..
“케이크.. 아니 브라우니 정도면.”
“우웃.. 관심 없는 척 하더니 발렌타인 대비로 이런 걸 준비할 줄은. 아무리 내 서번트지만 방심할 수 없는 남자네 당신.”
약간 질린 듯한 목소리에 아쳐는 훗,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반적으로 시장에 유통되는 카카오빈이 아니라 전 세계 카카오빈 산출량중 단 5%를 차지하는 품종의 콩을 가공한 것으로, 아는 셰프가 벨기에의 쇼콜라티에를 소개시켜주지 않았더라면 얻을 수조차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다 린. 이건 장인의 작품이다. 살롱 드 쇼콜라에서 2년 연속 우승을 거머쥔 쇼콜라티에의 공방에서 나온 작품이지. 베네수엘라 산지에서 난 콩을 바로 공수해 만든 거라 일반적인 초콜릿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향과 풍미를 가지고 있다.”
“......!!”
린의 눈이 호기심과 탐욕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무시하고 지금 바로 요리에 쓸 양을 떼어냈다. 남은 부분은 새로 사서 깨끗히 씻어둔 락앤락 통에 담아두고 단단히 밀봉을 해 둔다. 어차피 바로 요리해 먹어치울거라 오래 보관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약속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아앗!! 완전히 잊고 있었어!!”
그 린이 깜빡 시간을 잊을 정도로 소포 안의 내용물이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아쳐는 부산스레 외투를 찾아입고 떠난 린을 배웅하고 다시 부엌 앞에 섰다.
필요한 도구를 꺼내고, 몇몇 물건은 투영해 준비한 뒤 동선이 길어지지 않도록 필요한 재료들을 모두 꺼내두었다. 먼저 오븐을 예열한 뒤, 손을 씻고 앞치마를 두르는 것으로 짧은 준비는 모두 끝났다.
“...좋아.”
브라우니는 초콜렛을 이용한 디저트 중에선 단연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인지도를 가진 과자였다. 특징은 쫄깃하고 촘촘한 식감과 초코퍼지를 통째로 입에 머금은 듯한 진한 초콜릿의 풍미.
상대적으로 만드는 이의 솜씨보다 재료의 질에 의해 맛이 좌우되는 과자라는 평이 있지만, 바꿔 말하면 재료가 좋다면 그 맛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과자라는 뜻이었다.
반죽을 부풀일 일 없어 금방 구울 수 있는데다가 견과류, 말린 과일 등 첨가재료를 바꾸는 것만으로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선보일 수 있다.
큼직한 은색 보울에 커버춰 초콜릿과 그 무게의 삼분지 일쯤에 해당하는 버터를 넣고 천천히 중탕을 시작한다. 너무 고온에 녹여서도, 너무 저온에 녹여서도 안되기에 온도계를 쳐다보는 눈빛은 제법 엄중했다.
중탕이 끝나면 윤기나는 초콜릿과 버터의 혼합물을 식히며 미리 믹서기에 갈아 입자를 곱게 만든 설탕을 섞는다. 카카오매스의 원재료인 사탕수수원당을 구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모자랐다.
힐끔 시계를 곁눈질한 아쳐는 곧이어 체에 밀가루를 받쳐 고운 입자를 내면서, 구워서 잡미를 절제한 소금을 한소끔 집어넣었다.
‘그리고 여기에..!’
아쳐가 집어든 것은 까맣고 짧은 나무막대기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말린 콩 꼬투리처럼 생겼지만 큼직한 식칼로 나무젓가락보다 얇은 꼬투리의 배를 갈라 속을 긁어내자 달콤한 향기와 함께 검은 색의 찌꺼기처럼 생긴 것이 따라나왔다.
섬세한 손으로 바닐라빈을 소량 집어 체친 밀가루 위에 올리고, 이어서 칼등으로 초콜릿 커버취를 몇 번 탕탕 내리쳤다. 큼직한 조각들은 그대로 놔둔 채 잘게 부스러진 것들을 밀가루에 함께 섞고 몇 번 섞는다. 마지막으로 밀가루의 가운데를 움푹하게 만든 뒤 실온에 두어 미지근해진 달걀 두개를 잽싸게 까넣었다.
거품기를 이용해 반죽을 시작하는 일련의 동작이 어찌나 신속하고 빠른지 아직도 오븐의 예열은 끝나지 않은 채였다. 중탕해두었던 초콜릿과 반죽을 섞어 진한 초콜릿 색이 된 무른 반죽을 뒤섞던 아쳐는 손등에 튄 반죽을 닦아 맛을 보았다.
“흠..”
역시, 흠잡을 데 없는 맛이다.
마무리로 오븐팬 위에 유선지를 깔고 그 위에 방금 부순 큼직한 초콜릿 덩어리들을 불규칙하게 올려두었다. 스페츌러로 반죽을 모아 팬에 부은 뒤, 반쪽에 산미가 강한 크랜베리와 반건조 딸기를 적당히 올렸다.
나머지 반쪽에는 저렴하고 흔한 아몬드 슬라이스 따위가 아니라 이란에서 공수한 피스타치오에 베트남에서 최고급으로 키워지는 캐슈넛도 아끼지 않고 듬뿍 올린다.
그와 동시에 오븐의 예열이 끝나, 아쳐는 도자기를 굽는 장인의 마음으로 팬을 오븐의 정중앙에 집어넣었다.
상상하는것은 언제나 최강의 자신-..
자신의 모든 기량을 다한 아쳐의 얼굴은 후련해보이기까지 했다.
*
브라우니가 구워지는 데에는 삼십분이면 충분하다. 시간이 너무 지나면 빵이 건조해지거나 윗부분이 타버리고, 너무 덜 익히면 빵이 질척거리게 된다.
그 시간은 아쳐가 주방을 정리한 뒤 포장지까지 준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오븐의 뚜껑을 열고 브라우니의 윗부분을 살핀 아쳐의 눈에 안도감이 옅게 깔렸다. 육안으로 봤을 때에도 훌륭하고, 빵을 찌른 나무막대에도 꾸덕한 반죽이 묻어나오지 않는다. 주방 가득 퍼진 달콤한 향기는 덤이었다.
유선지째로 들어올린 브라우니를 꺼내고, 도마째로 창가에 올려 차갑게 식힌다. 브라우니를 잘라 포장할 정도로 열기가 빠지자 식칼로 브라우니의 귀퉁이를 잘라 한입 맛보았다.
“...음. 훌륭하군.”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릴 정도로 완벽하다. 어쩌면 자신은 마스터피스를 탄생시켜 버린 것이 아닐까? 이 것이라면 랜서가 먹다가 에미야 시로가 죽어도 모를 것이다..
브라우니를 스물 네 조각으로 잘라 그중 딱 두조각을 따로 포장했다. 너무 많이 담는것도 좋지 않다. 어디까지나 브라우니를 만드는 김에 양이 남는 것을 전해주었다 싶은 정도면 충분하다.
무늬 없는 봉투에 아무렇게나 넣어진 브라우니의 모양이 조금 뭉개졌지만 아쳐는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딱 이 정도로 무신경해 보이는 쪽이 좋다.
포장까지 완벽하게 해 낸다면 발렌타인이라는 것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이미 벨기에에서 직접 공수한 초콜릿을 가지고 승부를 본 시점에서 의미없는 고민이라고 생각하지만, 본인은 진지한 모양이었다.
*
이제야 제대로 발렌타인데이를 맞이한 꽃집은 예약된 주문에 밀려들어오는 손님으로 정신없이 바빴다. 한차례 여고생 손님들의 무리가 지나간 곳에서 쿠 훌린은 쑥대밭이 된 경작지를 내려다보는 농부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담배 한대만 피우고 싶다는 얼굴이다.
아쳐의 구둣발이 딱, 소리를 내며 가게 앞에 다가와 서자 그제서야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아쳐의 모습을 확인하고 말도 없이 오른손을 살짝 들어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바쁜 모양이군.”
“아아.. 졸업식 시즌만큼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대목이라서 말야.”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휙 던져진 무언가를 반사적으로 잡아챈 랜서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곧이어 손에 쥐어진 과자의 포장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하는 과정은 놀라울 만큼 솔직-.. 아니 잠깐, 떨떠름하다고?
“어.. 설마 발렌타인 선물이냐?”
“그 때의 답례다.”
“그 때라니 언제?”
아무리 일이 바쁜 와중이라 해도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에미야 시로에게 받은 싸구려 쿠키는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이 마스터피스를 앞두고서는 이런 미적지근한 반응이라니!? 어쩐지 불합리한 감정에 짜증이 솟구쳤다.
“뭐어, 어쨌든 고맙다. 아쳐. 네가 이런 걸 챙겨줄 줄은 몰랐는데?”
“기대해도 좋다, 쿠 훌린. 지금껏 먹어보지 못한 맛이라고 장담하지.”
“요 며칠 초코는 질리도록 먹어왔다고..”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랜서는 브라우니의 포장을 바로 뜯었다.
바구니에 대충 던져두고 천천히 먹을까 했는데 궁병의 눈빛이 어째 지금 당장 먹어달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저 녀석이 초콜릿 따위를 챙겨준 것도 우습지만 과자를 전해주고 바로 뒤돌아 자리를 떠날 줄 알았는데 굳게 서있는걸 보니 어지간히 맛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잠깐, 그럼 설마 이걸 직접 구워 온 건가?
브라우니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려던 손이 멈추고 킁킁 냄새를 맡는 행동에 아쳐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유심히 살폈다.
“이거, 직접 만든 거냐?”
“물론이다.”
“호, 그래서 그런가. 뭔가 향, 그러니까 좋은 냄새가..”
말을 이으며 브라우니를 텁, 하고 크게 한입 베어문 랜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입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아쳐와 손에 들린 브라우니를 번갈아 쳐다보는 제스처에 아쳐는 그제서야 팔짱 안쪽에서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의 힘을 뺐다.
“훗.”
“우와, 이거! 진짜 맛있네!”
랜서는 솔직한 감탄성과 함께 브라우니 한 조각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그리고 하나 남은 브라우니를 아쉬운 듯 쳐다보더니 입맛을 쩝 다시며 어색하게 물어왔다.
“아쉽네. 남는거 더 없냐?”
조금만 덜 기뻤더라면 약하게 들어오는 쿠훌린을 잔뜩 비꼬아 줄 수 있었을 텐데.. 지나치게 뿌듯한 고양감에 궁병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속내를 숨겨오는 버릇은 하루이틀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기쁘긴 커녕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카카오의 메틸크산틴 성분은 개에게 구토와 설사를 유발할 수 있으니 자제하는게 좋을 거다.”
“왜 난데없이 시비야!?”
그러나 랜서는 화를 내는 대신 남은 브라우니를 입에 물었다. 화를 내기엔 이게 너무 맛있다. 단 맛이 물리지도 않는지 두개째의 브라우니를 먹어치운 랜서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입맛에 맞나 보군.”
“오! 진짜 맛있더라. 두번째 껀 새콤새콤한 말린 과일이 또 독특하네.”
“남는 브라우니가 있으면 가져다주지. 뜨끈한 브라우니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어 먹는 것도 별미다.”
“호오?”
어쩐지 말랑한 반응에 랜서는 의아함과 기대감이 섞인 눈으로 아쳐를 쳐다보았다. 재봉에 꽃꽂이에 청소까지 재능이 있다는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요리까지 수준급이었다니.
“아, 잠시 기다려봐.”
맛있게 잘 얻어먹었으니 뭔가 보답을 해야겠는데.. 랜서는 아쳐가 거실에 둘 꽃을 보러 왔다가 그대로 가버렸던것을 떠올리고 적당히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미 만개해버린 설유화를 메인으로 장미와 리시안셔스를 모아 엮어낸 랜서는 가게 앞이 텅 비어버린 걸 확인하고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또 어딜 갔어?”
*
가게가 바빠 보였으니 더 붙잡고 있는 것도 실례다 싶은 아쳐는 먼저 가게를 떠났다.
그 쿠키를 먹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거기에 대고 구차하게 어느 것이 맛이 더 좋은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언제나 감정에 솔직한 영령이라 그런지 몰라도 브라우니를 입에 물고 깜짝 놀라다 빙글빙글 웃는 얼굴은 천진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얼굴을 봤으니 번거로운 과정을 걸쳐 카카오매스를 얻어낸 보람이 충분히..
‘이런.’
걸음을 우뚝 멈춘 아쳐가 급히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언제부터 웃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기에 뭐? 나는 단지 원시수준에서 머물러 있던 창병에게 새로운 맛의 지평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었는데.
‘아니지, 그저 간단한 답례다. 먼저 초콜릿을 준 건 그 창병 쪽이니까..’
토오사카 저택에 천천히 걸어 도착할 때까지도 머릿속은 빙글빙글 돌았다. 주방에 도착해 잔뜩 남은 브라우니를 볼 때까지도 마찬가지라, 도통 창병의 웃는 얼굴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발렌타인의 달달한 분위기에 편승해보고 싶었는데 둘 대화보다 베이킹 과정글이 더 긴거 실화인가요 제발 궁창 연애좀했으면좋겠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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