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서는 문 밖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마슈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귓가 근처에서 말하고 있는데 미동도 없는 게, 간밤에 애를 쓰긴 했는지 완전히 곯아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마스터는 마스터지. 영령씩이나 되는 남자가 고작 그거 같다가 엄살 부리는 꼴은 못 보는 성격의 랜서는 아처의 어깨를 몇 번 흔들다가 이내 손을 들었다.
철썩철썩, 요령 좋은 손바닥이 침대 위에 누운 남자의 볼을 두어번 후려쳤다. 그 충격에 드디어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올린 남자는 윽, 하고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두통의 이유를 짐작하는 랜서는 혀를 쯧쯧 차며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게 어제 엄청나게 마셔대더라니.”
평소라면 니나 잘하라는 식으로 신랄한 반격이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쳐는 아직도 잠이 덜 깬 얼굴로 멍하니 눈만 끔벅이고 있을 뿐이었다. 칼데아에서는 물론이고 이전의 기억을 통틀어서도 본 적이 없는 얼간이같은 표정이라, 랜서는 순간 어떤 가정이 불쑥 떠올랐다.
혹시 어제 내가 마력을 지나치게 끌어가버린 건가?
접촉해서 마력회로나 확인해볼까 하고 상체를 가까이 붙이고 손을 이마로 뻗었다. 그러나 아처는 마력회로의 스파크가 아닌 이불 밖으로 노출된 랜서의 상체에 반응하며 찬물 맞은 고양이처럼 앉은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랜서는 자신의 손길에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보이는 아처의 모습을 요상하게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팔을 거두었다.
“일어났으면 슬슬 나가보지 그래? 마스터가 애타게 찾고 있던데.”
상체를 일으켠 김에 쭈욱 기지개를 펴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전날 밤의 격렬한 운동은 신체에 나른한 근육통을 남겼다. 젖꼭지가 욱씬거리고 엉덩이가 좀 아리긴 해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처는 랜서가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불을 붙일 때까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자유롭게 풀어헤쳐진 푸른 머리칼 사이 흰 등에 남겨진 잇자국이나 엉덩이에 우악스레 남겨진 손자국 등을 천천히 눈으로 흩었다.
부스스한 흰색 머리칼 밑의 눈을 몇 번 끔벅거리자 점차 눈빛에 이성이 침착하게 자리잡기 시작한다.
‘무슨..?’
자신의 방, 자신의 침상 위에 누워 알몸으로 자신을 깨운 랜서. 천둥의 신이 망치로 정수리를 연신 두들겨대는 듯한 두통과 달리 묘하게 개운한 몸 상태. 당연하지만 본인도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고 시트는 수상한 액체로 축축해져 있는데, 그것이 랜서의 허벅지 사이에 말라붙은 것과 같은 성분이라는 것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확실했다. 무엇보다 자신 앞에서 무방비하게 알몸을 드러내고도 몸을 가릴 생각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마치,
‘설마...?’
내가 그와 간밤에 선을 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랜서. 어젯밤엔 대체..”
사실에 입각한 추론이지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거대한 진실의 파편에 상황에 아쳐는 허스키한 말의 조각을 간신히 하나씩 뱉어냈다. 랜서를 부르자 침대 옆에 서서 몸을 풀던 그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게 느껴졌지만 아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차마 그를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었다.
저 흰 피부에 새겨진 정사의 흔적이 아주 난리도 아니라, 저것을 남긴 것이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어떤 미치광이가 사람을 저렇게까지 물고 씹었냐고 혀를 찼을 것이다..
그러나 랜서는 아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툭 내뱉었다. 영향력으로 따지면 머릿속에 수류탄을 하나 까 넣은 것과 비슷한 충격량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이름으로는 안 부르기로 한 거냐?”
“뭐?”
“어제, 앞으로는 이름으로 부르겠다며. 뭐 잘만 부르더만. 쿠 훌린, 쿠 훌린 하고.”
“......!?”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어 랜서를 바라보았다. 간밤에 자신은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소릴 지껄인건가!?
당황스러움이 지나쳐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뭐.. 무슨.. 따위의 소리만 더듬더듬 중얼거리고 있자니 남은 담배 연기를 훅 내뱉고 남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끈 랜서가 다시 침상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의 안색을 살피듯 빤히 이쪽을 살피는 창병의 얼굴은 익숙하지만,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는 익숙치 않았다. 그는 훗, 하고 웃더니 오른손으로 아쳐의 등을 팡! 하고 크게 쳤다. 손바닥에 공기를 넣었는지 전해지는 충격보다는 큰 소리가 났다.
“어제 한 얘기 때문에 그러냐? 걱정 마, 아주 좋았으니까!”
“좋, 좋았다고..!?”
“그래. 엉덩이랑 허리가 좀 쑤시긴 하지만 뭐, 뒤로 해서 그렇게 느끼기 쉽지 않은데.. 제법이드만?”
적나라한 단어에 아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얼굴만 시뻘겋게 물들인 채 랜서가 한 말만 입으로 중얼거렸다. 좋았다니.. 그럼 간밤에 자신은 랜서를 충분히 만족시켰다는,
‘아니, 이게 아니지!’
왜 갑자기 기둥서방같은 마인드가 되어버린 건가!
애초에 자신이 그와 섹스했다고 해서 꼭 그가 좋, 좋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이왕이면.’
좋아해주는 쪽이 물론 좋을 테지만. 일부러 의식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던 어떤 생각의 실마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희고 단정한 이마와 곧은 콧날. 짙은 푸른색 눈썹 아래 루비보다 붉고 투명한 눈동자가 지척이었다. 능글맞게 웃고 있지만 저 얼굴이 어젯밤엔 만족스럽게 일그러졌을거라고 생각하니 그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아쳐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의아한지 랜서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이야? 잠깐. 설마, 너.”
“왜 그러지?”
“어젯 밤, 기억 안 나냐?”
아처는 그 말에 유연히 반응하지 못하고 멈칫, 숨을 삼켰다.
뭐라고 해야 하지. 기억은 안 나지만 좋았다? 드문드문 기억이 없다..? 그가 고민한 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랜서는 아쳐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랬군.”
“잠깐만, 랜, 쿠 훌린!”
황급히 그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누군가가 머리를 맥주병으로 내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시야가 핑글 돌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손으로 이마를 짚는 사이 마력으로 푸른 갑주를 소환한 랜서가 손을 뒤로 모아 머리칼을 정리했다. 달칵 소리와 함께 평소처럼 한데 묶은 머리를 한 채로, 랜서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아, 아까 내가 말했던건 잊어 주라.”
“뭐? 무슨 소리를..!”
벌떡 일어난 아쳐가 알몸으로 뛰쳐나오기 전에 랜서는 가볍게 출입문 버튼을 터치해 밖으로 걸어나갔다. 복도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반대편 귀를 통해 모래처럼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아쳐는 이게 꿈이라면 지금 당장 깨어나고 싶다는 얼굴로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눈을 뜨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놀람의 연속이었지만 지금처럼 박탈감이 느껴지는 상황이 닥칠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자신은 간밤에 무슨 짓을 한 건가?
무슨 짓을 했길래 아일랜드의 대영웅과 밤을 보내고 그 기억을 어디에 버려두었단 말인가.
방금 전만 해도 어젯밤의 기억이 없는 게 안타까운 정도였지만, 이제는 그 기억이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너무 아침드라마 도입부처럼 시작하는것같군요,,,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정도는 전체공개해도 되겠죠?(흠티콘
7월 오락관에 나갈것 같아서 티스토리에는 중반까지 공개될 예정이고 제목은 바뀔지도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