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제일 잘 나가는건 생화보다는 다육식물이나 작은 화분종류다. 값도 저렴한데다 약간의 공간만 있다면 이 푸릇한 연두색 이파리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관리까지 쉽다. 뭐, 몇년동안이나 화분을 키워 더 큰 화분으로 분갈이를 하는 손님은 의외로 별로 없다고 하지만.
랜서는 양 손에 큼직한 양동이를 들고 꽃입 바깥의 화분 거치대 앞에 쪼그려앉았다. 양동이 안에는 한손에 들릴 만큼 작은 화분들이 빽빽히 들이차 있었다. 이번에 새로 들여온 모종을 작은 화분에 심고 물을 흠뻑 먹을 수 있도록 양동이에 통째로 담가 두었는데, 이렇게 하면 이 주 정도는 물을 주지 않아도 이파리가 마르지 않는다.
한 손에 마른걸레를 들고 물기를 닦으며 작은 화분들을 죽 진열했다.
가게의 분위기가 단번에 화사해져서, 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번쯤 돌아볼수밖에 없는 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흐뭇하게 웃으며 으쌰,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으로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오, 무슨 일이야 아가씨?”
근방 중년 여성들의 하트를 백발백중으로 꿰뚫었다는 상큼한 미소!
금눈돔 매출 180%상승의 주역이 반갑게 맞이한 것은 머리 한쪽에 리본을 맨 소녀였다.
사쿠라는 반갑게 마주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그 옆의 서번트-라이더-는 가볍게 눈을 깜빡이고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안녕하세요, 랜서 씨. 화분이 예쁘네요.”
“그렇지? 역시 봄이니까.”
하하호호 웃으며 덕담과 날씨 이야기로 분위기를 푼 사쿠라는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보통 이 정도에서 그럼 다음에 뵈요~ 하고 지나가고는 했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린의 부탁으로 이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랜서 씨..”
“응?”
이야기를 마치고 자연스레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랜서를 급히 불러세운 사쿠라는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1초, 2초.. 자신을 불러놓고 아무 말이 없는 사쿠라를 바라보는 랜서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언니 도와줘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남자와 남자의, 아니 서번트와 서번트 사이의 연애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면서 끼어드는 것이 좋을까!? 자기도 모르게 맘속으로 린을 부르짖은 사쿠라는 구회 말 2루 아웃의 구원투수처럼 옆으로 슥 나선 라이더를 감동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요즘 많이 바쁜가 보군요, 랜서.”
“응?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흐음. 한참동안 아쳐와 붙어다니지 않았나요? 요즘은 또 그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죠.”
라이더 나이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쥔 사쿠라는 엥? 그래? 하고 심드렁하게 뒷통수를 긁는 랜서를 몰래 살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린에게 들었던 아쳐의 상태와는 다르게 이쪽은 전혀 데미지가 없어 보였다..
“이쪽에 일이 좀 생겨서 말야, 애초에 저녁도 아쳐 녀석이 멋대로 하기 시작한 거고.”
“일?”
“멋대로?”
랜서의 말에 사쿠라와 라이더는 동시에 반문했다. 난데없이 두 미녀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랜서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어깨를 으쓱 올렸다. 자신에게 워낙 마스터 복이 없어놔서 그런가, 이 두 콤비는 유독 귀엽다.
‘뭐, 감시하는 눈길에 대해서 벌써 말 할 필요는 없겠지.’
저쪽은 감시라든가 하는 별 문제는 없는 것 같고, 이쪽도 피해를 봤다기엔 우습다. 랜서는 사쿠라 쪽으로 상체를 살짝 숙이며 말을 받았다.
“그래. 멋대로지. 갑자기 와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더니, 그 뒤로 시간 날 때마다 약속을 잡아댔거든.”
“아쳐 씨가요?”
“그래. 딱히 이유가 있어서 그 녀석하고 붙어다닌건 아니니까..”
“그, 그럼 순전히 아쳐 씨가 일방적으로 랜서 씨에게 접근했다는 건가요..?”
사쿠라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절박해졌다. 랜서는 어라, 하는 얼굴로 슬쩍 상체를 뒤로 뺐다. 어째 지금 말하는 어감이 좀 묘하지 않은가? 거기다 아가씨의 뭔가를 건드린 느낌이..?
사쿠라는 한숨을 내쉬며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는 시늉을 하며 어깨를 떨었다.
“아쳐 씨.. 불쌍해..”
“사쿠라..”
“어이, 갑자기 뭐야.”
왜 갑자기 그 뻔뻔한 궁병 녀석이 불쌍하다는 결론에 도착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때 랜서의 당황 따위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상냥하게 사쿠라의 어깨를 도닥이던 라이더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런데.. 꼭 아쳐의 요청 때문이라기엔 랜서 당신도 순순히 그와 어울리지 않았나요?”
“그 녀석 밥 맛있거든.”
“밥...”
“정말로 그 이유 뿐이에요..?”
사쿠라가 어쩐지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묻는다. 솔직히, 어째서 자신이 아쳐와의 만남에 대해 추궁을 받고 있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 바이올렛 콤비는 대체 언제부터 궁병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 녀석의 마스터는 어쩌고?
랜서는 아까부터 이 두 주종과 대화의 핀트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은데 하고 수상쩍어 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아니 뭐, 외롭다고도 했고.. 밥은 1인분을 만드나 2인분을 만드나 비슷하다고도..”
랜서가 변명처럼 늘여놓는 말에 사쿠라와 라이더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시선에 발끈한 랜서가 어이, 하고 눈살을 찌푸리자 라이더는 안경을 고쳐쓰며 툭 내뱉었다.
“아쳐도 정말 대단하군요. 이런 둔감해빠진 남자에게 작업을 걸다니.”
“이런 게 전쟁에서 피어나는 사랑인 걸까?”
“엥?”
라이더의 입에서 나온 무시무시한 말을 가볍게 긍정하는 사쿠라를 본 랜서는 차원과 자신이 격리되는 끔찍한 기분의 말단을 맛보고 말았다. 지금까지 말이 엇나간 건 모두 지금을 위한 추진력이었던가?
랜서는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으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작업.. 자악업..?”
“자각도 없었던 모양이군요.. 아아, 안타깝게도.”
“뭐야 그 눈! 절대 그런 거 아니니까 당장 시선 치워!”
랜서는 목뒤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는 느낌에 진저리를 쳤다. 아무리 마술사라지만 상상력이 어마어마하잖아 이 아가씨! 대체 세상을 어떤 채널로 바라보고 있는거야!?
“너무 자신만의 망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세상을 좀 객관적으로 판단하라고, 아가씨. 아쳐 녀석이 대체 뭣 때문에 나한테,”
“플러팅.”
“아니라니까!?”
사쿠라는 한 팔을 옆구리에, 그리고 한 팔은 쭉 뻗어 쿠훌린에게 손가락을 뻗어 외쳤다. 방금 전의 그 소녀는 대체 어딜 간 거냐 싶은 변화였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요! 거의 매일같이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후식을 준비하고, 뒷처리까지 해내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인줄 알아요!?”
“큭, 나, 나도 설겆이 정도는 한다고!”
“그렇게 접근한게 아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도 작업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어요?”
사쿠라의 말에 랜서는 말문이 막혔다.
어느새 그들에게 설득당하고 만 것인가?
갑자기 가게에 찾아와 말을 걸거나.. 외롭다면서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거나 밥을 먹이고 설거지거리엔 손도 못 대게 하던 아쳐의 모습이 거품처럼 퐁퐁 떠올랐다. 새, 생각해보니 정도 이상으로 친밀하게 굴지 않았나? 아니 확실히 그랬다..
“서, 설마.. 그 자식..”
억지로 받아들인 현실의 무게에 랜서가 휘청이는 사이 라이더가 라스트 펀치를 날렸다.
“린도 세이버도 시로도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을 본인만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나랑 자고 싶었던 건가!?”
“네?”
본래 영령이랑 영웅. 그리고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는 법이다.
평화로운 일상도 일상이지만 본래 그들이 속한 곳은 전장이었고, 아마 그쪽이 더 익숙한 영령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스터의 허락도 없이 이곳저곳에 싸움을 걸고 다닐 수는 없겠지, 그 궁병은. 비뚤어진 녀석이지만 나름대로 마스터를 챙기는 것 같았고.
들끓는 고양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섹스라면 환영이다. 아쳐 그 자식이라면 적어도 하고 싶은 만큼은 잔뜩 할 수 있을 테니까.
“하~ 진작 말할 것이지.”
“저기, 랜서 씨..”
“사쿠라, 쉿..”
마스터도 없이 남아 막돼먹은 미각치 수녀 밑에서 데굴데굴 굴려지며 의도치 않게 금욕하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한다면야 여자쪽이 환영이지만 남자 쪽 경험도 없는건 아니니 저쪽도 할 맘이 있다면 굳이 사양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랜서는 어쩐지 복잡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쿠라와 라이더에게 가볍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는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갔다.
정당한 노동 후의 섹스라, 좋은 어감 아닌가?
급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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