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토는 두툼한 양모 담요를 얻어 작은 불이 타는 화덕 옆자리에 잠자리를 잡았다.
그동안의 여독이 풀릴 만큼 단잠을 자고 일어나자 어느새 몸단장까지 마친 쿠로오가 보쿠토를 깨웠다.
“집 뒤켠으로 가면 개울이 있어. 씻고 오지 그래, 기사님?”
“흐아암.. 보쿠토로 됐다니까.”
늘어지게 하품을 한 보쿠토는 쿠로오가 말한 대로 집 뒤켠으로 이동했다.
“호오.. 이건 또.”
아침의 숲은 밤의 숲과는 달리 굉장히 낭만적이었다. 풀잎에 맺힌 이슬은 요정처럼 빛났고 산새들의 지저귐과 작은 개울 흐르는 소리, 그리고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작은 오두막. 확실히 이런 곳이라면 마을에서 떨어져 살만 하겠어. 세수를 하고 머리까지 감았는데 그제서야 제가 수건이며 뭐며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물을 뚝뚝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자 쿠로오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수건을 던졌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네.”
“하하! 그런 소리는 자주 듣지!”
“칭찬이 아닐텐데?”
식탁엔 어제 먹다 남은 스튜에 물을 더 넣고 끓여 스프처럼 묽어진 것과 흰빵, 그리고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가 차려져 있었다.
고기잖아! 스프는 밋밋했지만 염장한 고기와 함께 먹으니 맛이 좋았다. 보쿠토는 간만에 먹는 부드러운 흰 빵을 우물우물 씹어삼키며 남자의 얼굴을 힐끔 눈에 담았다. 조용조용 빵을 뜯어먹는 자세는 귀족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절도와 기품이 넘쳤다.
“뭔가 할 말이라도?”
눈을 음식에 고정하고 있던 것 같은데, 시선을 알아차렸나? 보쿠토는 당황해서 괜히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 아니. 그냥 오늘 가는 길이 걱정돼어서.”
“그거라면 걱정 마. 길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오오. 그거 믿음직스럽네!”
식사를 마치고 쿠로오가 그릇을 정리하고 짐을 챙기는 동안 보쿠토는 가지고 다니는 손칼로 대충 면도를 했다. 손가락으로 턱을 쓸자 매끈한 감촉에 괜히 전의가 불탄다. 좋아! 이쪽은 준비 만반이라고!
갑옷을 챙겨입고 망토를 걸치자 쿠로오는 붉은 외투를 걸치고 등에 비스듬히 가죽가방을 매었다.
“그거, 숲에 입고 가도 괜찮겠어?”
“응?”
“그 외투 말이야. 비싸보이는데..”
“아아. 걱정 마. 어차피 하나뿐인 외투고, 이럴 때 입지 않으면 언제 입겠어.”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슬리퍼를 벗고 갈색의 가죽 부츠를 신었다. 문단속도 하지 않고 대충 집의 문을 닫아두고 나오는데, 보쿠토는 그걸 보고 괜찮을까 싶었지만 이런 깊은 숲속까지 사람이 올 일이 있을까 싶어 그냥 놔두었다.
“갈까?”
“오옷! 좋아!”
보쿠토의 예상대로 점점 흐릿해지던 오솔길은, 그들이 집을 출발한지 한시간쯤 되자 완전히 흔적이 끊겼다. 길이 나있지 않은 곳을 걷자 몇배로 힘이 드는 느낌이었다.
‘덤불이라도 좀 치면서 걸으면..’
보쿠토가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빼들었다. 스릉하고 날카로운 소리에 쿠로오의 귀가 쫑긋 움직이며 날카롭게 뒤를 돌았다.
“무슨 짓...!?”
“응? 나는 그냥 덤불을 좀 치려고..”
쿠로오는 눈썹을 와락 찌푸리며 비웃듯이 입을 열었다. 괜히 그 얼굴에 보쿠토의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그래서 내 뒤에서 휙휙 칼질을 하겠다?”
“아.. 헉! 미안해! 절대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그럼 내가 앞에 가서 덤불을 칠테니까..!”
확실히 이건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 생각해보니 행군을 할때도 덤불을 치는 건 맨 앞의 녀석이 하는 일이었던가! 보쿠토가 허둥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쿠로오는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올리며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됐네요. 도련님. 그냥 내가 가는 길로만 잘 따라와. 그러고 그런 장검으로 풀 치는거 아냐. 금새 녹슬어 버릴껄?”
또 이름을 부르지 않네. 보쿠토의 볼이 불퉁해졌으나 지은 죄가 있어 뭐라 말도 못했다.
작은 소란 끝에 쿠로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주의 깊게 쿠로오가 발을 디딘 곳으로 움직이자 신기하게 몸이 별로 힘들지 않았다. 봄은 모든 식물들이 기지개를 편다. 이것은 숲속의 식물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뿌리를 아래로 둔 식물들이 위로 줄기를 활짝 뻗으면 잘못해서 뿌리를 밞거나 해서 걷는데 상당히 어려운게 숲길이었는데. 쿠로오는 마치 두서없이 자란 이 덤불들의 안쪽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굉장하네. 아까보다 훨씬 편해졌어.”
“흐응.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여서는 해결하지 못할 일도 있답니다.”
“확실히 그렇군..”
쿠로오 덕분에 걸음걸이에 훨씬 여유가 생긴 덕분에 보쿠토는 그에게 이것 저것 대화를 시도했다. 얼핏 상냥한 성격인데 그는 절대로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대답은 꽤나 상냥해서 대화하기에 나쁜 상대는 아니었다.
“나이가 어떻게 돼?”
“도련님은?”
“보쿠토라고 부르라니까. 나는 스물 세살이야.”
“엑. 그렇게 어리.. 어려 보이는데?”
보쿠토는 내심 쿠로오의 나이가 자신과 비슷할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는 상당히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면도를 해서 그런가? 동안이란 소리에 헤벌쭉 벌어진 얼굴로 보쿠토가 되물었다.
“헤이, 나 진짜 어려 보여?”
“어.. 음.. 다시 보니 제 나이 같아 보이기도 하네.”
“쿠로오는? 나랑 동갑? 아니면 위?”
“동갑.. 이라고 해둘까나.”
“엑. 그게 뭐야?”
“하하. 농담이야. 방년 스물 셋이랍니다.”
그들은 대화를 하다가, 말거리가 끊기면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걸었다. 어느새 해가 중천으로 떠올랐고, 보쿠토가 허리에 매단 물주머니를 세번정도 열어 목을 축였을 때 쿠로오가 살짝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 그럼 여기서 잠깐 쉬었다가 갈까?”
“좋아. 성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이제 금방이야.”
고개를 드니 확실히 성의 지붕이 굉장히 가까워져 있었다. 이 정도라면 수도 외곽성벽에서 광장 중앙의 시계탑까지 거리 정도일까. 허나 그 사이에 놓인 것이 탁 트이고 정리된 도로가 아니라 빽빽한 수해였던 고로 그 둘은 적당한 곳에 주섬주섬 자리를 폈다. 저리 가까워 보이지만 아마 한시간은 더 걸어야 할 것이다.
쿠로오는 가방을 열어 기름종이에 싼 차가운 햄과 겉이 단단한 흰 빵, 그리고 치즈 한덩어리를 꺼냈다. 빵을 반으로 쪼개 햄과 치즈를 끼워넣자 훌륭한 샌드위치가 되었다. 보쿠토는 와구와구 빵을 먹어치우고 입가에 남은 고소한 치즈를 삭 햩았다. 쫄깃하고 선명한 상아색 치즈는 끝맛까지 환상적이었다. 분명 이것도 어느정도 가격이 나가는 식재료일 것이 틀림없다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좋은 것만 먹어온 귀족자제인 보쿠토는 생각했다.
“조금만 마셔.”
쿠로오가 건낸 손바닥보다 작은 가죽 물병을 받아 기울이자 알싸한 알콜향이 풍겼다. 달콤하면서 쌉쓰름한 향기에 슬쩍 병을 기울여 한모금 마시자 목줄기가 짜르르 울릴 정도로 독했지만 맛이 좋았다.
“오! 이거 좋은데!”
“독한 녀석이니까 입가심만 해.”
쿠로오는 이런 곳에서 취하면 버리고 갈꺼에요~ 라고 이죽거렸고 제 주량을 아는 보쿠토는 입맛을 다시며 술병을 다시 쿠로오에게 내밀었다.
그는 두모금 정도 술을 삼킨 뒤 술병을 다시 품에 넣고, 보쿠토가 건네주는 물을 마셨다.
묵직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갑옷의 무게는 익숙했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보쿠토는 어깨와 목을 움직여 대충 스트레칭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갈까나?”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쿠로오는 붉은 외투에 나뭇잎 몇장이 붙었다. 보쿠토는 그 나뭇잎을 정리해 주다가 제 망토나 잘 챙기라는 핀잔을 들었다.
“이제 금방이야.”
“아아. 알고 있어.”
보쿠토는 긴장하며 검의 손잡이를 한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장막처럼 펼쳐져 있던 숲이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낡은 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까악- 까악-
성의 첨탑은 까마귀들의 차지가 된 건지 검은 깃털이 지저분하게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다. 구름 한점 없는 날씨인데도 울려 퍼지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괜히 음산했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여기까지 도움을 받았지만 마법사를 무찌르는 데까지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보쿠토는 쿠로오를 두고 성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무가 아닌 쇠로 만들어진 문은 보쿠토의 키를 훌쩍 넘는 크기였고 녹이 슬었지만 아직 단단했다. 건틀렛을 낀 손으로 문을 두드리자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쾅쾅쾅!
“문을 열어라!”
쾅쾅!
“이 봐! 안에 있는거 다 알고 왔어!!”
“그래봤자 잠긴 문이 풀리진 않을 텐데..?”
한참 뒤에서 보쿠토가 뭘 하려는지 보고 있던 쿠로오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보쿠토는 그렇지만.. 하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순순히 문을 열어주진 않겠지?”
“아니, 내 말은 안에 아무도 없으니까 문을 열어줄 수 없다는 뜻이었어.”
“안에 아무도 없다고!?”
쿠로오의 말에 보쿠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럼 마법사는!? 난 마을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온건데!?
보쿠토의 옆으로 걸어온 쿠로오는 품 안에서 커다란 놋쇠 열쇠를 꺼냈다. 그 열쇠를 문의 열쇠구멍에 넣고 가볍게 돌리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열렸다.
“에..?”
“자. 이제 말 해도 돼.”
쿠로오는 두 팔로 문을 활짝 열었다. 보쿠토는 정말 아무도 없는지 생활의 흔적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성 안을 쳐다보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쿠로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이 성에서 마법사에게 할 말이란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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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넘죠아ㅠ0ㅠ
뒷내용은 201609냥온, 201701 대운동회때 가져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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