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으음?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갸웃 기울였다. 연습 중 휴대전화를 많이 만지는 편이라 물으면 보쿠토의 대답은 아니오, 다. 아예 탈의실 캐비닛에 휴대전화까지 처박아놓는 편이고 그건 쿠로오도 마찬가지다. 아니, 분명 마찬가지인 줄 알았는데..
“주장, 이번엔 우리 팀이 스코어야.”
요즘 휴대전화 자주 만지네?
네 학교, 아니 다섯학교가 합세한 이번 합동연습은 네 팀이 게임을 할 동안 다른 한 학교는 그 학교들의 스코어나 주변정리를 돕는 식이다. 보쿠토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팔 위에 입고 있던 조끼를 벗었다.
“카라스노는 또 페널티~?”
“상대할땐 묘하게 까다롭지만 결정적인 뭔가는 없는 느낌이지?”
코트 위를 양보하고 수분보충을 하면서 코트의 네트를 점검한다. 패배한 팀이 플라잉 코트로 체육관을 반 정도 돌았을 때 쯤이었다. 보쿠토는 옆에서 들려오는 부원들의 목소리를 다른 쪽 귓구멍으로 질질 흘리면서 쿠로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쿠로오가 재미난 농담을 듣기라도 한 건지 입을 벌리고 고개를 젖혀 크게 웃고 있었다.
쿠로오 변했어. 웃는 모습도, 뭔가 예전하고 달라.
보쿠토는 제 옆에서 카라스노의 벌칙을 구경하던 아카아시의 팔을 툭 쳤다. 저기 있잖아.
“요새 쿠로오 뭔가 변하지 않았어?”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엑, 그래??”
그렇게 크게 놀라놓고서는,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데요? 라고 묻는 아카아시의 물음에는 그냥.. 이것저것 바뀌었잖아? 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소리밖엔 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자주 만지고, 자주 웃고, 그리고 웃는 모습이 예전하고 묘하게 달라졌는데. 그걸 또 어떻게 달라졌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고 말이지.
*
모처럼 연습이 없는 주말에 보쿠토는 꽤 이른 시각부터 집을 나섰다. 집에서 삼십분 거리, 도쿄역에 가까운 커다란 메가플렉스 쇼핑몰이 새로 생겼는데 스포츠웨어 가게들이 아울렛처럼 크게 입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덕이었다. 부원 몇몇과 함께 새 배구화를 보러 갈 생각에 잔뜩 들뜬 보쿠토는 문득 가보고 괜찮으면 쿠로오와 다시 오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런데 왜 오늘이 아니라 다음이지?
반사적으로 떠오른 질문에는 곧 자연스레 그 대답이 뒤따랐다.
그야, 내가 리드하는 편이 멋지니까?
어째서 쿠로오에게 멋지게 보여야 하는지- 라던가, 그런 의문은 채 머릿속에 떠오를 새가 없었다. 거기 괜찮은 식당도 있으려나? 어느새 쿠로오와 거기 가서 밥도 먹고 쇼핑도 하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만 몽실몽실 떠올랐다.
약속장소에 제일 먼저 도착해 있던 것은 아카아시였다. 코노하와 와시오는 약속시간에 조금 늦었고 대신 그 둘이 밥을 사기로 했다. 어차피 점심시간이 되려면 두시간도 더 남았고, 신발을 둘러볼 시간은 충분했기 때문에 보쿠토는 제법 느긋한 걸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식스 여기 들어가볼까?”
“20%할인중이래. 가보자!”
어차피 최신 디자인은 할인품목 제외 아닌가? 보쿠토는 현재 자신의 배구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
들어가보지 뭐. 가게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보쿠토가 입구에 커다랗게 걸린 거울에 시선을 슥 옮긴 순간이었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에서 홱 하고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급히 뒤를 돌아보는 보쿠토의 행동에 아카아시가 저도 모르게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깜짝 놀랐잖아요. 뭡니까?”
“저거 쿠로오 아냐?”
“예?”
“맞는 것 같아.”
안 들어오고 뭐 하냐며 가게 안에서 저를 돌아보는 코노하에게 뭐라 얘기할 틈도 없이 보쿠토는 쌩하니 달려나갔다. 미처 아카아시가 아닌 것 같은데요! 라던가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라고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운동화, 보고 계세요.”
저 녀석 어디 가냐는 표정으로 보쿠토의 등을 쳐다보던 코노하에게 대충 그렇게 말하고는 아카아시는 벌써 저 멀리 뛰쳐나간 보쿠토의 뒤를 따랐다. 그 걸음걸이마다 진한 한숨이 묻어나오는 것만 같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쿠토의 입가엔 히죽 웃음이 걸렸다. 거 봐! 역시 쿠로오 맞잖아?
저 비죽비죽한 머리도 그렇고, 뭣보다 내가 쿠로오를 못 알아볼 리 없지!
쿠로오는 기둥에 등을 기대어 서 있었는데, 하필 보쿠토에게 등을 보인 위치였다. 일부러 뛰던 발걸음을 멈추고 흠흠 숨을 가다듬은 보쿠토는 이내 여! 하고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쿠로오!”
너는 웃을까? 아니면 놀랄까? 어떻게 주말까지 얼굴을 보냐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을까? 곧 볼 표정인데 그 얼굴을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것만으로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걸렸다.
제 목소리를 들은 건지 어깨가 움찔 하며 쿠로오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사실 그리 천천히 돌린건 아닌 것 같은데. 분명 쿠로오는 평범하게 뒤를 돌아보았을 뿐인데.
마치 네트 너머로 스파이크의 궤적을 쫓을 때처럼 쿠로오의 머리카락 하나 하나가 선명하게 박혀들어왔다.
늘 반쯤 내리깐 채였던 눈꺼풀이 곱게도 접혔다. 블로킹에 성공한 뒤에 좋다고 웃던 그 입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입술이 꽃잎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제 눈 깜빡이는 것도 잊고 보쿠토는 멍하니 그런 쿠로오의 얼굴에 넋을 빼앗겼다.
와.
이건.
쿠로오는 이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키세?”
처음 듣는 이름과 함께 뒤를 돌아본 쿠로오의 표정이 금새 당혹감에 물들었다. 마치 방금 전의 웃음이 착각인것만 같아서 보쿠토는 손등으로 눈꺼풀을 비볐다.
어라. 내가 뭔가 잘못 봤나. 이거 아무리 봐도 평소의 쿠로오인데.
“보쿠토? 뭐야 너였냐. 여긴 왠일이래?”
“아, 부원들하고 신발보러 왔는데 네가 있길래. 혼자야?”
“여길 혼자 왔겠냐~”
“쿠로씨 지금 훌륭하게 혼자 아닙니까? 그렇게 부끄러워 할 것 없는데~”
“진짜야. 아쉽지만 선약이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 올린 쿠로오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뭐야. 내가 반갑지도 않은가? 괜히 툴툴대고 싶은 마음에 입술을 비죽 내미는데 쿠로오의 뒷통수 옆으로 왠 처음 보는 남자의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쿠로오와 마주보고 있던 탓에 그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보쿠토는 스냅백에 선글라스까지 챙겨쓴 그 남자가 렌즈 너머로 자신에게 찡긋 윙크를 하는 것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곧 그 표정은 남자가 두 손으로 쿠로오의 눈을 가리고 그 귓가에 속삭이는 걸 본 순간 딱딱하게 굳고 말았지만.
“누구게요?”
“풋, 재밌습니까? 키세 군?”
쿠로오는 그 장난이 익숙한지 손을 올려 눈을 가린 손을 떼려고 하지도 않고 피식 웃었다.
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입매와 턱선이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수려한 남자였다. 모자 아래로 비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은 심지어 반짝이는 금발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키도 쿠로오보다 약간 더 크고... 무, 물론 나도 아직 성장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남자는 쿠로오의 귓가에 키득거린 웃음을 남기곤 다시 보쿠토와 눈을 마주쳐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안녕하심까, 키세 료타라고 함다. 쿠로상 친구?”
“어어. 나는 보쿠토 코타로. 쿠로오, 여기는..”
“쿠로상 친구면 3학년이시겠네여! 혹시 배구 하심까?”
“응. 맞는데-”
“내가 말했잖아. 늘 연습 같이한다는 타교의.”
“아아! 그 에이스 스파이커! 얘기 많이 들었슴다!”
쿠로오가 내 얘기를 했다고? 괜히 그 한마디에 보쿠토의 입가가 헤실 풀어졌다.
남자는 꽤 호들갑스럽게 보쿠토와 악수까지 끝내고는 쿠로오의 어깨에 제 팔을 걸쳤다. 어깨동무라도 하는 과장된 동작에 쿠로오가 아 무겁다니까, 짜증을 내면서도 그의 팔을 치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뭐, 그럼 다음 연습때 보자. 먼저 간다.”
“어, 응? 갈꺼야?”
“너도 일행 있잖아?”
나 그 일행 버리고 너한테 온건데. 보쿠토가 망연한 표정으로 가볍게 말하는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그, 그런데 누구야? 그.. 키세라고 했던가? 친구?”
친구냐는 물음에 남자의 입가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빡칠 정도로 잘생겨서 괜히 속이 안 좋았다. 뒤로 타박, 하고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보쿠토는 돌아보지 않고서도 그게 아카아시의 발소리란걸 알아챘다.
“친한 후배야. 어라? 아카아시도 있었네.”
“안녕하세요.”
“쿠로상, 지금 안 가면 늦겠슴다.”
“아. 이런. 벌써 시간이.. 그럼 너희도 재밌게 놀아. 간다?”
남자의 재촉에 쿠로오는 휴대폰 액정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봐요. 가볍게 대답하는 아카아시와 달리 보쿠토는 조금 넋을 뺀 것처럼 손을 마주 흔들었다.
가죠. 아카아시가 가볍게 돌아섰지만 보쿠토는 그 자리에 누군가 시멘트를 부어두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쿠로오의 어깨를 두르던 남자는 그 둘이 손가락만하게 작아졌을 때 어깨를 풀고 쿠로오의 손을 잡았다. 어깨를 닿을 것처럼 가까이 한 채, 쿠로오는 얌전히 그의 손에 제 손을 마주잡고 걸었다. 보쿠토는 쿠로오의 손을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배구연습에 거칠어진 손등과 길쭉한 손가락. 손톱은 늘 짧고 손등엔 보기 좋게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저도 쿠로오의 손을 저것처럼 마주잡아본 적은 없었다.
“안 갑니까? 선배들이 기다려요.”
쿠로오가 변한 건 저 사람 때문일까. 그 문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선득해졌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어쩐지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거려서, 그리고 방금 전 본 쿠로오의 웃는 모습이 어째선지 지워지질 않아서.
보쿠토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더랜다.
평소랑 똑같이 웃는 쿠로오인데 보쿠토만 그게 변했다고 느꼈으면 그건 쿠로오가 아니라 보쿠토가 변한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