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6월인데 이렇게 더울 일인가.”
“올해 평균 기온이 예년보다 높대요.”
“한여름 같아!”
어쩌면 늦봄이라고 볼 수도 있는 계절이었지만 공기는 푹푹 찌기만 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 좋은 봄비가 내렸었는데 지금이 되니 남은 습기와 더위가 만나 숨막힐 정도로 찌는 공기가 체육관 안을 메웠다.
도립 네코마 고등학교는 적어도 칠월은 되지 않으면 체육관에 에어컨을 켜주지 않았고, 이 찜통 더위에 그대로 노출된 두 학교의 배구부 학생들은 일찌감치 혀를 내물고 나가떨어졌다.
보쿠토 저 녀석은 덥지도 않나?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움직였으면서 다시 공을 주워드는 모습은 방금 운동을 시작한 사람처럼 쌩쌩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체육관 바닥에 털썩 주지앉은 쿠로오는 허벅지에 시원하게 닿는 바닥의 감촉에 꿍얼꿍얼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그대로 상체를 눕혔다.
게임으로 치면 디버프,.. 아니지, 계속해서 체력이 깎여나가는 중독에 걸린 느낌이었다.
“더워.. 힘들어어..”
소나무처럼 늘 고고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던 쿠로오의 타락에 적잖이 충격받은 두 학교의 후배들이 놀라건 말건 쿠로오는 차가운 바닥이 금새 뜨끈해지는 감각에 진저리를 쳤다.
“헤이헤이헤이~ 쿠로오! 뭐야, 벌써 지쳤어?”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덥다..”
신나게 배구할 때는 더운 것조차 몰랐는데 아드레날린이 가라앉고 열기가 뇌에 훅 끼치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렇잖아도 기상과 더위에 약한 저혈압 체질인데 옆에 하이 텐션의 보쿠토가 맴도는 것만으로 생명력이 쭉 빨리는 느낌이었다.
보쿠토는 유독 맥을 추지 못하는 쿠로오가 신기한지 쿠로오의 겨드랑이 아래 손을 넣어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우곤 앞뒤로 쿠로오를 탈탈 털었다.
“왜, 왜 이렇게 시들어 버린거야!?”
장난 삼아 털어댔는데 맥아리없이 흔들리는 게 꼭 증기 안에서 오분쯤 익어 흐물흐물해진 배추 꼴이다. 보쿠토는 축 처진 쿠로오의 이마가 자신의 어깨에 힘없이 닿는 감촉에 깜짝 놀랐다.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더워서 그런 거야!?”
“에어컨 없는 집으로 들어가기 싫어..”
다 죽어가는 병자 흉내를 내며 에어컨을 찾는 걸 보니 아직은 살만 한 모양이다.
막상 쿠로오는 보쿠토가 자신을 흔들며 호들갑을 떠니 살짝 제정신이 돌아왔는데 보쿠토의 얼굴은 심각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여름 합숙때도 멀쩡했는데..!”
“신젠은 시원하고 후쿠로다니랑 우부가와는 에어컨이 빵빵하니까.”
“어라? 멀쩡해진 것 같다?”
“아아 어지러워라..”
멀쩡한 듯 대답하다가도 다시 가녀린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널부러지는 쿠로오의 모습에 보쿠토가 키들키들 웃으며 그 옆에 앉아 무릎에 팔꿈치를 디디고 턱을 괴었다.
약한 척 하는 모습은 아닌 것 같은데 평소와 달리 약간 나사가 풀린 것 같아서 귀엽다.
보쿠토는 방긋 웃으며 최대한의 호의를 담아 외쳤다.
“많이 더우면 우리 집에 올래? 에어컨 켜줄 테니까!”
“후읏.”
그 믿음직한 얼굴에 쿠로오는 감격하며 숨을 뱉었다. 세간에서 비웃음이라고 부르는 소리와 아주 흡사한 소리였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쿠로오는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는 귀부인처럼 호호 웃는 시늉을 하며 보쿠토를 장난스레 흘겼다.
“오야오야~ 이 쿠로오씨가 그런 일차원적인 플러팅에 넘어갈 것 같나요?”
“플..! 아니거든!? 난 그냥 쿠로오가 더워하니까!”
어쩐지 정곡을 찔린 얼굴을 한 보쿠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쿠로오는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빙글빙글 웃었다.
“어라~ 나를 집에 데려가서.. 뭘 하려고?”
“우우~!!”
“응큼하네, 맹금류 대장!!”
“아냐 그런거! 손끝 하나 안 댈께!!”
“푸, 푸하하하!”
보쿠토의 과민반응에 쿠로오뿐만 아니라 체육관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보쿠토는 그제사 자신이 놀림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방 뛰었지만 이미 일학년들이 우다다 달려들었다.
“저! 저 보쿠토 선배네 놀러가고 싶어요!”
“저도요! 도쿄 시내의 대저택이라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그건 루머입니다.”
반짝반짝한 눈빛 공격에 보쿠토가 당황해서 너희 모두를 초대할 수는 없어! 하고 패닉한 사이 쿠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쿠토를 내버려두고 슬슬 체육관 밖으로 도망쳤다. 아직은 견딜 만 한 봄의 끝물이었다.
*
어느 날 쿠로오는 꿈을 꾸었다. 찜통안에 든 만두가 되어 불투명한 만두피가 서서히 투명해지도록 쪄지는 꿈이었다. 뿌연 증기는 살인적인 열기를 담고 만두 속까지 뜨겁게 달구어 만두소의 육즙을 낸다.
찜통의 뚜껑이 열리길 애타게 기원하는데 문득 꿈에서 깨어 보니 자신은 쿠로오 테츠로가 아닌가. 이는 대체 쿠로오 테츠로인 자신이 꿈속에서 만두가 된 것인가 아니면 만두가 꿈에 쿠로오 테츠로가 된 것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미치겠다..”
때는 7월의 중반, 살인적인 더위의 한창이었다.
왠일로 부모님이 이 더운 날에 여행을 떠나시나 했다. 빈 집에 부활동도 없겠다, 이 더운 날엔 쾌적한 집에서 에어컨을 켜두고 뒹굴거리는게 최고의 피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동안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잠만 자곤 했더니 오래된 에어컨을 작년에 버렸다는 것은 완전히 까먹은 상태였다.
그리고 뒤늦게 주문한 에어컨은 삼주 뒤에나 설치가 가능하댄다.
부모님들이 괜히 피서를 가신 게 아니었다. 진짜로 더위를 피해 도쿄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찜통해서 탈출해 버리신 거다. 여름 합숙이 예정되어 옴짝달짝 하지 못하는 쿠로오는 그저 낡은 선풍기를 꺼내 바람세기 버튼을 강으로 올리는 것으로 더위에 반항심을 표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바람에 살갗이 닿는 부위만 약간 시원해지고 바람의 영향권이 아닌 부분은 마치 낡은 컴퓨터의 본체처럼 이글이글 열기를 피워올렸다.
현재 기온은 섭씨 38도, 인간의 체온보다 높은 온도였다.
“피난.. 은행으로..? 아니 백화점..”
괜히 찐만두가 되는 악몽을 꾸며 일어난게 아니다. 차라리 에어컨이 빵빵한 후쿠로다니 고교의 체육관이 그립다. 거기서라면 리에프 열다섯명에게 한꺼번에 리시브를 가르치라 해도 기꺼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만큼!
벌써부터 이렇게 더우면 여름방학의 합숙은 대체 어쩌면 좋을까 싶을 정도로 더웠다.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공기의 온도 자체가 가열된 것 같다!
이대로 있으면 미지근한 물 속의 개구리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익어버리는것 아닐까!?
만일 내가 찜통 속의 만두라면? 어떤 미친 과학자가 거기에 전기충격을 주고 있는 거라면?
더운 육체에서 탈출해 멘탈이 안드로메다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때 쯤 발열을 이유로 멀리 떨어뜨려두었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혹여나 앞 스케쥴이 캔슬된 에어컨 설치기사가 아닐까 생각한 쿠로오가 전광석화같은 손놀림으로 휴대폰을 낚아챘다.
B [쿠로오, 뭐해?]
B [내일 눈마새 개봉하는거 알지? 보러 가자!]
K [뭐야 너냐.]
쿠로오는 손가락 끝으로 자판을 톡톡 느릿하게 쳤다. 이 더운날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영화관으로의 외출은 반갑지만 그 영화를 위해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서 직사광선을 받으며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나친 더위로 인한 체력고갈 상태라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해진 것 같기도 했다.
K [더워서 폰 만지기도 ㅅㅣㄹㅓ. .. ,]
B [밖이 그정도로 더워? 방에만 있어서 몰랐어!]
K [방?]
B [응. 계속 에어컨을 켜둬서..]
K [지금 간다.]
B [어? 어디? 쿠로오? 헤이헤이헤이!]
B [영화관이야? 아, 우리집?]
B [테츠?]
쿠로오의 이성이 끊기는데에는 보쿠토의 그 짧은 문자 한 통이면 충분했다.
*
밖이 그렇게 덥냐는 문자, 본인은 더위로 인한 불쾌감 따위 느끼지 않고 있다는 문자에서 익숙한 에어컨의 향기를 맡은 쿠로오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니 이미 지하철 안이었고 시원한 지하철의 공기에 정신이 돌아온 뒤에야 핫, 하고 가방을 확인했다.
“음.. 준비는 완벽하네.”
갈아입을 옷과 속옷에 칫솔, 휴대폰 충전기까지 짐은 완벽하게 챙겨두었다.
마침 운이 좋게도 전철역에서 내린 뒤 보쿠토의 집 근처로 가는 버스도 바로 왔다. 평소엔 걸어다니는 거리지만 지금은 버스비가 아깝지 않은 기온이었다. 주말의 낮이었지만 살인적인 더위에 다들 움직이지 않는지 버스는 거의 비어 있었다.
“어서 와!”
“향긋한 에어컨의 냄새...”
보쿠토는 쿠로오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냉큼 문을 열어주었다. 반쯤 정신 나간 얼굴로 현관에 선 쿠로오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주위를 살폈다.
“어? 왜 안 들어와?”
“아니, 너희 부모님은? 인사를 드려야..”
“아! 두 분 나가셔서 안계셔. 들어와 들어와~”
그렇다면 사양않고 들어가야지. 쿠로오는 씩 웃으며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크게 외쳤다.
보쿠토가 부엌 쪽에서 뭔가를 달그락거리고 있었지만 그보단 샤워가 급하다. 욕실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쿠토에게 대충 양해를 구하고 샤워를 시작했다.
정수리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올 것 같은 날씨에도 찬물로는 씻지 못하는 타입이라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오니 폐 속까지 청량해지는 시원한 공기가 쿠로오를 반겼다.
이 정도 되면 저절로 탄성이 새어나온다. 온몸이 후끈후끈한데 살갗에 닿는 공기는 차가워서 엄청 기분이 좋고.. 인류 발전의 혜택을 만끽하는 기분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다.
“거실 어지르면 안되니까 내 방에서 놀자!”
“응.”
쿠로오는 익숙한 보쿠토 방의 침대에 앉아서 흐물흐물해졌다. 여름이불의 약간 사각거리는 감촉과 피부에 닿는 차가움이 너무 좋다.
약간 넋이 나간 채로 보쿠토의 이불을 움켜쥔 쿠로오가 뒤늦게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고맙다. 신세지네.”
“헤이헤이헤이! 그럼 다음에 블록 뛰어주라! 세시간!”
“날 죽일 셈이냐?”
내일 볼 영화라든가 에어컨의 소중함에 대해 몇마디 떠들다 보쿠토가 예쁘게 접시에 담아 내온 주전부리 따위를 주워먹으며 만화책을 읽었다.
하지만 땀도 잔뜩 흘리고 뜨거운 물에 샤워까지 한 뒤였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감각에 쿠로오는 만화책을 보다 말고 불편한 자세로 깜빡 잠이 들었다.
왠만하면 다른 사람 집에서 쉽게 잠드는 타입이 아닌데 폭염과 샤워, 에어컨의 삼단콤보는 쿠로오의 높다란 경계심을 단번에 허물어뜨렸다. 옆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보쿠토라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쿠로오..? 자?”
곤히 자는 쿠로오의 얼굴 앞으로 보쿠토의 손바닥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쿠로오는 굽은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만화책을 쥔 상태 그대로 깊게 잠에 빠져 있었다.
조심스레 쿠로오의 손에서 만화책을 빼내자 저항 없이 손이 스륵 무너진다.
보쿠토는 괜히 침을 꿀꺽 삼키며 쿠로오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손을 잡은게 처음이 아닌데도 괜히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웠다. 그야, 이런 식으로 손을 잡은 적은 처음이니까!
게다가 짝사랑 상대가 샤워를 하고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 자고 있다니?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쿠로오의 손을 실컷 만지작거리던 보쿠토의 얼굴에 돌연 비장한 표정이 떠올랐다.
‘뽀뽀하자!’
이건 일생 일대의 기회였다.
눈치채셨겠지만 원래 여름에 써둔 글입니다.. 금방 마무리할수 있을 것 같아서 마감하다 기분전환용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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