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제목이랑은 상관없어지는 내용..
아쳐가 랜서를 감시하기 시작한 지도 거의 한달이 되어가고, 랜서는 이제 토오사카 저에서 저녁밥을 먹는 날보다 먹지 않는 날이 적어질 정도로 궁병의 저녁밥에 익숙해졌다.
린과 시로를 비롯한 다른 마스터들과 서번트들이 절찬리 오해를 해 준 덕분에 그 둘을 방해하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원거리에서 랜서를 감시하고 또 가까이에서 저녁을 먹으며 관찰하기 시작했음에도 딱히 수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 정도다. 어느 날은 크게 마음을 먹고 어디서부터 마력을 공급받고 있느냐 물었더니 나도 모른다, 라는 심플한 대답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 랜서의 대답이니만큼 거짓은 없을 테지만 그런 맥빠지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처음 랜서를 감시하기 시작할 때의 초조함은 없었다.
‘이대로 랜서가 돌발행동하지 않도록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 하다는 건가.’
팔짱을 끼고 나름대로 고민해보지만 워낙 가진 정보가 적다. 애초에 랜서를 감시해야겠다는 충동도 어느날 갑자기 불쑥 튀어오른 것 아니었던가.
느긋하게 낚싯대를 드리우는 랜서의 뒷모습을 약 7km거리의 바깥에서 지켜보던 아쳐는 시간을 확인하고 빌딩을 가볍게 박찼다. 오늘의 저녁은 닭다리살 오븐 구이로, 슈퍼마켓의 4시 타임세일에 맞춰 가지 않으면 메인 메뉴를 준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단 몇초 차이로, 아쳐는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아쳐가 서 있던 빌딩을 바라보는 랜서를 놓쳤다.
*
닭 허벅지살을 뼈에서 분리하고 칼집을 내어 우유에 재워둔다. 소금과 후추를 뿌려 간을 한 뒤 녹말가루를 묻히고 은박지로 감싼 뒤 낮은 온도에서 오래도록 익히면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닭고기가 완성된다.
곁들일 소스를 두어가지 준비하고, 야채를 크게 썰어 토마토 소스에 볶아 양식풍의 반찬을 만드는 아쳐의 손놀림은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영령이 되어도 퇴색되지 않는 그의 요리의 재능은 그야말로 완벽해서, 그가 대충 소금을 집어 넣고 도마에 남은 양념장을 대충 털어넣어도 완성된 요리의 맛은 깊은 풍미와 음식에 대한 절도가 있었다.
요리에 쓰인 도마와 그릇들을 미리 설겆이해 두고 새우가 듬뿍 든 에스닉한 스타일의 샐러드를 준비하고 있던 아쳐는 시간 맞춰 현관벨을 누르는 랜서를 맞이하러 현관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알록달록한 하와이안 셔츠를 걸친 랜서에게서 담배 냄새가 훅 풍긴다. 아쳐는 여, 하고 가볍게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랜서의 앞을 팔로 가로막았다.
“응?”
“담배 냄새가 난다. 달리기라도 해서 냄새를 빼고 와.”
“뭐어? 뭐 그렇게까지..!”
“이 집은 린이 사는 곳이다. 안 그래도 담배 냄새는 쉽게 빠지지 않는데, 랜서 넌 설마 혼자 사는 여자아이의 집에 담배냄새를 묻힐 셈인가?”
아쳐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점이 하나 없었다. 랜서는 쳇, 하고 혀를 차더니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가 금새 다시 돌아왔다. 잠시 영체화라도 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이 근방을 달려서 냄새를 뺀 건지는 모르지만 아쳐는 결과에 만족하기로 했다.
식사를 마친 랜서는 평소처럼 잘 먹었다며 배를 두드리더니 지친 듯이 거실의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제는 아주 제 집마냥 자연스럽다. 아쳐는 직접 만든 브레드푸딩을 접시에 담아 가져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식사를 하고 바로 드러눕지 말아라.”
“켁, 잔소리 하는 엄마같다는 소리 자주 듣지 너?”
“글쎄? 금시초문인데.”
태연한 얼굴로 코웃음을 치는 아쳐를 올려다보던 랜서가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으쌰 일어났다. 손으로 뒷목을 주무르는게 정말로 뭔가 피곤해 보인다.
서번트인 저 창병이 체력적으로 피로감을 느낄 리는 없을텐데..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순식간에 아쳐의 눈매가 바짝 곤두섰다.
“뭐, 너에게라면 말해도 되겠지.”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고쳐앉은 랜서는 제 앞에 놓인 빵을 건드리지도 않고 턱을 괴고 팔꿈치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아쳐는 신경쓰지 않는 척 스푼으로 막 오븐에서 나온 푸딩의 배를 갈랐다. 표면에 뿌려진 땅콩 크럼블 아래로 커스터드 크림과 빵, 럼레이즌이 듬뿍 들어 있었다. 만족스러운 눈으로 제대로 구워진 브레드푸딩을 한번 확인한 아쳐는 그것을 큼직하게 스푼으로 들어올렸다. 딱 그 때였다. 랜서는 꽁치구이가 맛있었다와 비슷한 어조로 툭 내뱉었다.
“요즘 감시당하고 있어.”
쨍그랑.
손에서 스푼이 미끄러지고 순식간에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아쳐의 정신력은 제 할일을 다 해냈다.
그의 피부색이 조금만 더 희었더라면 순식간에 시커매진 안색이 도드라졌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랜서는 지근거리의 마초를 그리 자세히 관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쳐는 그 말만 내뱉고 침묵하는 랜서를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둔 채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그보다 지금 이 사실을 나에게 말하는 이유는..!?
이유를 듣기 전에는 살려놓겠다는 뜻인가..?
순식간에 수만가지의 가능성과 선택지가 머릿속을 희뿌옇게 채웠다가 가라앉았다. 느껴지는 살기는 없다. 간신히 태연을 가장하고 랜서를 올려보자 그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역시.. 너도 알고 있었냐.”
“...? 무슨 소리지?”
아쳐는 자세를 고쳐앉으며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예상하던 최악의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아닌 제 3자가 랜서를 감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순식간에 불쾌감이 스물스물 피어올라 아쳐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랜서의 시선에 금새 표정을 정리하고 잡생각을 털어낸다. 상식적으로 그런 감시자를 자신이 놓치고 있을리 없으니 랜서가 말하는 감시자는 아마 자신이 맞을 것이다.
‘설마 알아차렸을줄은 몰랐지만.’
*
아쳐 녀석, 모르던 소식을 들은 것 치곤 제법 침착한 기색이었다. 짐작하고 있던 건가.. 궁병 클래스 보정인지 원거리 탐지 능력은 자신보다 뛰어난 모양이었다.
사실 그가 감시의 시선을 알아차린 건 랜서 클래스 보정보다는 본인의 감에 의한게 컸기 때문에 비교대상은 아니었지만.
“자랑은 아니지만 워낙 험하게 자라서 말야, 그런 식의 시선에는 꽤 익숙하거든.”
“호오..”
언제부터인가 혼자 있을 때면 뒤통수를 살살 간질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 했다. 확신하지 못하는 건 랜서 본인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약한 느낌이라, 처음 몇번은 그저 착각인가 하고 넘겼기 때문이다.
아쳐는 뭔가 계산이라도 하듯 진중한 얼굴로 눈을 몇번 깜빡이다가 물었다.
“착각이 아니라고 확신한 이유가 있나?”
“그런 건 딱히 없어. 그냥 그 수상한 느낌이 계속되니까 대충 알아차린 거지.”
착각인가, 하고 넘기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그게 일주일 열흘이 되면 확신이 된다.
특히 정기적으로 머무르는 아르바이트 가게나 낚시터 쪽에서는 시선이 더 노골적이다. 그런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본인의 행적이 노출된 것 같다는게 쿠훌린의 주장이었다.
“짐작가는 쪽이라도?”
아쳐는 테이블 가운데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스푼을-방금 손에서 놓친 것이다.- 다시 제 앞에 똑바로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랜서를 바라보았다. 역시 여난의 남자, 세계에서 한 손에 꼽히는 미모와 전투력을 가진 여자들 사이에서 할렘을 구사한 남자다운 평정심이었다.
랜서는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목을 뒤로 젖혀 거하게 하품을 했다.
“전~혀 모르겠는데?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 것 같긴 한데, 이상하게 너랑 있으면 감시의 눈길이 없어지는 느낌이란 말이지.”
“콜록, 콜록쿨럭, 쿨럭..!!!!”
그 말에 아쳐는 심근경색이 온 사람처럼 가슴을 부여잡고 거세게 기침을 했다.
이건 위험하다, 정답에 거의 근접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랜서가 붉은 창을 내지르며 범인은 너였냐! 라고 외치는 건 아닐까 싶어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아무래도 네가 아쳐 클래스라는것 까지 아는 것 같단 말야.. 거 참. 만만하게 보인건가.”
“큼, 뭐라고?”
“섣부르게 나섰다가는 궁병의 시야에서 못 벗어날 거 아냐. 뭐, 너무 긴장하지 마라, 지금은 시선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 헛수고야.”
랜서는 그렇게 말하곤 숟가락으로 푸딩을 푹 퍼서 한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달고 따끈하고 부드러워서 추운 겨울날 이런 걸 먹어버렸다간 일주일동안 다른 건 아무것도 못 먹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랜서가 푸딩에 열중하는 사이 아쳐는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저 창병은.. 무려 5km가 넘는 거리에서의 내 감시를 알아차린데다가 내가 주변에 있을 때는 감시가 없다는 사실까지 깨달아놓고서 감시자가 나란걸 특정하지 못한 상황인건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머리가 좋은 것과 머리를 잘 쓰는 것은 약간 다른 문제고.. 저 창병은 자기 자신의 보전이나 이득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걸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타입의 성격이었다.
애초에 육안으로도 확인하기 어려운 먼 거리에서의 감시를 알아차린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상황 아닌가?
고민하는 것처럼 한참동안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던 아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감시당하고 있는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겠나?”
“아, 시도해봤는데 영 가물가물 하더라고. 그런데 이거 맛있다? 좀 달긴 해도!”
“원래 달게 먹는 디저트다. 차를 내왔으니 같이 먹어라.”
아쳐는 여러가지 의미가 섞인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쿠훌린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리고는 시침을 뚝 떼고는 어렵사리 고민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어쌔신의 기척 차단인가?”
“아니면 내가 감지하지도 못할 장거리에서의 감시나, 아니면 사역마같은 걸 쓰고 있을 지도 모르지.”
“마술협회를 염두에 두고 있나?”
“교회까지도. 뭐, 알겠지만 지금 상황이 여러모로 수상하잖냐. 성배전쟁이 끝나도 서번트가 그대로 현계해 남은 상황은 처음이라고 하니까.”
“흐음.”
설마 그런 쪽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을 줄이야..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이미 아쳐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상태였다. 랜서는 디저트 그릇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은 뒤 그대로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그러니까 신세 좀 지자!”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
“생각해보라고, 어디서 누가 보고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단 말이다. 덕분에 낚시도 공치고 젠장.. 아무튼 아가씨는 없다고 들었으니까 하루 신세진다?”
저 창병이라면 감시의 눈길이 있든 말든 신경쓰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후.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이..
‘......’
망상으로 도피해봤자 현실을 깨닫고 나면 비참할 뿐이다.
살짝 자괴감을 느낀 아쳐는 술도 마시지 않고 그대로 드러누워 푸 하고 잠들어버린 쿠훌린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거실의 불을 끄고 담요를 가져와 위에 덮어주었다.
그에게 딱히 필요는 없겠지만 하와이안 셔츠를 대충 입은 남자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아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당장이라도 랜서의 감시를 철회하고 모른 척 시침을 떼야 하나? 그러나 타이밍 좋게도 아쳐에게 말한 뒤로 뚝 끊긴 시선을 랜서가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일곱살이라도 두 사건의 연관성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아쳐는 자신이 랜서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꼭 숨겨야 하나 하는 데까지 사고가 미쳤다.
어차피 아군도 뭣도 아닌 상황인데, 한때 적이었던 서번트를 감시하는 게 문제될 일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이유를 듣고 깔끔하게 납득해버릴지도 모른다.
“흐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더이상 랜서를 저녁식사에 초대할 명분이 없다.
불현듯 떠오른 문장에 아쳐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정의되지 않은, 이불 아래 놓인 콩처럼 은근하게 머리 한구석을 찌르던 위화감을 막상 찾아내고 보니 어이없을 정도로 초라했기 때문이다.
고작 이것 때문에 그렇게 초조해 했었단 말인가. 그런 거라면 해결은 간단하다.
랜서의 감시를 중단하면 된다.
애초에 랜서가 마스터의 마력공급 없이 현계하고 있는 특이상황 때문에 감시하기로 결심했을 뿐이니 그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아쳐도 딱히 그를 감시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쓸었다.
완벽한 해결책이지만 이상하게 내키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빛나는 창병의 실루엣을 눈에 담았다.
궁창떡보고시퍼요.....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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