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령에게 수면은 필수적이지 않다.
식사와 마찬가지로, 원하면 취할 수는 있지만 없어도 생존에 해를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단순히 잠에 빠지는 순간을 만끽하고 싶어서, 혹은 마력을 온존하기 위해 수면을 취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제대로 된 마스터에게서 마력을 공급받고 있는 아쳐에게는 해당하는 바가 없었다.
즉 밤새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샐러리맨처럼 초췌한 궁병의 얼굴은 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었다.
“밤새 덜그럭거리던 소리가 이거였냐.”
“그렇지. 괜찮으면 점심으로 좀 싸가겠나.”
“그럼 고맙고.”
“그리고 아침도 먹고 가라.”
랜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 앉았다. 과장 않고 쌀 한말은 통째로 쏟아부은 것처럼 큼직한 쟁반 다섯개에 빼곡하게 탑을 이뤄 쌓인 주먹밥은 백여개가 넘어 보였다.
“주먹밥은 연어마요, 청어알, 멸치, 매실, 닦고기중에 어떤 걸로?”
“골라야 돼?”
종류별로 하나씩 먹으면 되지 않나? 랜서가 그렇게 묻자 아쳐는 뭐, 그렇다면.. 하고 중얼거리더니 찬장을 뒤적여 큼직한 국수그릇을 꺼내들었다.
거기에 미리 끓여두고 한 김 식힌 주전자를 기울여 미지근한 녹차를 적당히 따른 뒤, 겉을 노릇하게 구운 주먹밥 다섯개를 통째로 집어넣고는 그 위에 김가루와 참깨, 매콤한 후리카게를 왕창 뿌렸다.
“자. 맛있게 먹어라.”
“잘먹겠습니다!”
평범한 오차즈케였지만 사이즈가 괴상하다. 남자의 요리도 정도가 있지, 큼직한 그릇에 가득 담긴 탄수화물은 통짜 바베큐와는 다른 박력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랜서는 이걸 다 먹을 수 없다는 걱정이나 싫은 기색 없이 숟가락을 들어올렸다. 그 세이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쿠훌린도 꽤나 대식가인 데다가, 아쳐의 요리는 왠만하면 맛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랜서가 와구와구 밥을 먹는 사이 아쳐는 마지막 주먹밥에 김을 붙여 마무리하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한 요리로 머릿속을 정리한다는게 그만 집에 남아있던 쌀을 몽땅 탕진하고 말았다. 오늘 상점가에서 쇼핑할 목록에 쌀 10kg 짜리 포대를 추가한 아쳐는 미리 준비한 도시락통에 주먹밥을 차곡차곡 집어넣기 시작했다. 칸 한 쪽에는 무친 무말랭이와 냉장고에서 차가워진 라따뚜이에 소세지를 추가한 반찬, 그리고 잘게 자른 매실장아찌를 참기름으로 양념한 것을 같이 올리고 은박지로 양념이 넘치지 않도록 꼼꼼하게 칸을 만들었다.
랜서는 아침부터 밥을 배불리 먹어 기분이 한껏 좋아진 얼굴로 주먹밥이 열 개 정도 든 거대한 도시락을 받아들였다.
아쳐는 내심 아침과 같은 메뉴라 걱정하고 있었지만 랜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도시락의 내용물보다는 아쳐의 분위기다. 도시락을 건네주는 아쳐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뭐랄까, 말 한마디 없이도 초조한 분위기 같은게 이쪽까지 전해져오고 있다고 해야 하나..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어나 볼까 하던 랜서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삼키고 어깨를 으쓱 올렸다. 전날 자신이 한 말을 생각하면 아쳐가 저렇게 날이 선 것도 이해할만 했다. 랜서 자신을 향한 감시의 눈길이 린이나 아쳐에게까지 번질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겠지. 현재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언제 상황이 반전할지 모르는 일이다.
“아, 맞다. 아쳐.”
“뭐지?”
“당분간 저녁식사 초대에는 못 올 것 같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뭐?”
뜬금없는 말이었던지 아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워낙에 비꼬는 표정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렇게 작게 놀란 모습도 꽤나 귀하다. 뭐, 굳이 이런 걸 볼거리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말야.
“너야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그 아가씨에게 감시의 눈길이 옮겨붙기라도 하면 미안하잖냐. 안 그래도 거의 매일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데.”
“아니.. 그건.”
“그동안은 딱히 해를 끼치지 않으면 두고볼까 했는데, 슬슬 거슬리기도 하고?”
“..내가 도울 일은?”
“됐어됐어, 나중에 필요하면 요청하지.”
그렇게 말하지만 애초에 아쳐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 랜서는 다음에 가져다주겠다며 도시락통을 들어올리곤 가벼운 발걸음으로 토오사카저를 떠났다.
때문에 랜서는, 자신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아쳐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라고 하지만, 방법은 딱히 없단 말이지.’
파하, 하는 싶은 숨과 함께 희뿌연 담배연기를 내뱉은 랜서는 잔잔한 수면 위로 평화롭게 떠있는 낚시찌에 시선을 고정했다.
랜서 옆의 양동이엔 고작해야 손가락만한 사이즈의 피라미만 한마리 빙글빙글 헤엄치고 있었다.
아무리 점심 전이라지만 손맛이 별로인걸 보면 왠지 오늘도 공쳐버린 느낌이었다.
물고기 녀석들도 이쪽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렸다는걸 귀신같이 알아차린 건가.
랜서는 뒤통수에 간질간질하게 박히는 시선을 느끼며 흐아함 하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있는 듯 없는 듯 감시하는 눈길이 있다.
차라리 원거리에서 저격이 들어왔어도 이보다 더 짜증이 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한바탕 시원하게 싸우고 나면 남는 건 앙금을 털어 시원해진 머릿속과 상대방의 시체 뿐이니까.
지금 할 수 있는게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 뿐이라는 사실은 랜서의 의욕을 퍽 갉아먹는 일이었다.
‘밥이나 먹을까.’
시선을 힐끔 바로 옆에 놓인 쇼핑백으로 옮겼다. 뭘 그리 바리바리 싸 뒀는지 얇은 보냉팩에 일회용 젓가락, 물티슈에 차라운 우롱차가 든 물병까지 가득이었다.
이미 먹어본 맛이라 맛을 상상하는건 어렵지 않다.
침을 꼴깍 삼킨 랜서는 찌를 살살 움직여 낚싯바늘을 건지고 입에 물고있던 담배꽁초를 다 마신 맥주캔 위에 끝을 비벼 껐다.
새것 티가 나는 도시락 뚜껑을 열고 안에 가득 든 주먹밥 중에서 하나를 골라 덥썩 입에 물었다. 짭짤하고 찰진 밥알 안쪽에 잘게 썰어 양념에 볶은 닭고기가 꽉 차 있었다.
확실히 편의점에서 사먹는 주먹밥 따위하고는 비교할 수 없게 맛있었다.
순식간에 주먹밥 세 개를 먹어치우고 우롱차를 한모금 마신 랜서는 아쉬운 얼굴로 도시락을 내려다보았다. 남은 주먹밥이 하나 둘 셋.. 겨우 일곱 개 뿐이다.
냉장고도 없이 실온에 그냥 뒀다간 상할게 분명하니 지금 바로 먹어치워야하지만 퍽 아쉽다.
궁병의 밥은 정말 맛있었고 앞으로 당분간 그 밥을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박탈감마저 느껴졌다.
‘얼른 감시하는 녀석하고 결판이 나야 다시 밥을 얻어먹든지 할 텐데 말야.’
네 번째의 주먹밥의 내용물은 잘게 채썬 쪽파와 익힌 연어살에 마요네즈 소스로 속을 채운 것이었다. 이것도 더할 나위 없이 맛있다.
도시락통에 가득 찼던 주먹밥을 남김없이 먹어치우자 배가 부르다. 맛있는걸 먹고 기분이 좀 좋아진 랜서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이마를 시원하게 간질이는 바닷바람을 만끽했다.
그 모습의 어디가 요즘 감시당하는 것 같아 스트레스야~ 라고 말하던 남자인 것인가.
*
“아쳐, 주전자가 넘치고 있는데.”
“아아.”
막 침실에서 나온 채 머리도 정리하지 않은 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부엌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나도 당황하지 않았다는 얼굴로 가스불을 끄고 주전자를 들어 티팟에 붓는 움직임은 군더더기 하나 없었지만, 홍차캔의 찻잎이 와르르 쏟아진 것처럼 보이는건 착각일까..?
“자아.”
“오늘도 고마워.”
찻잔에 조르르 담기는 찻물은 여느 때와 같이 향긋했다. 린은 미심쩍은 기색을 감추고 방긋 웃으며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그러나 곧 린의 움직임이 딱딱하게 굳으며 그녀의 미간이 꾸깃하게 구겨졌다.
‘써...’
떫고 쓰고 뜨겁고 최악의 트리플 콤보다.
보통 차를 우리는 물 온도보다 높은 온도에, 지나치게 많은 찻잎을 넣은게 분명했다.
그녀가 찻잔에서 입술을 떼어내고 아쳐에게 시선을 향하자 창밖을 바라보던 아쳐가 무슨 일이냐는 듯 린에게 눈길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음.. 뭐..”
며칠 전부터 아쳐가 이상하다.
평소라면 가차없이 찻잔을 내려놓았을 린이지만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찻물을 꼴깍 삼켰다. 혀끝이 짜르르 떨릴 정도로 떫었다.
아쳐는 대수롭지 않게 차를 마시는 린에게서 시선을 떼내어 다시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헀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한껏 분위기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린이 보기에는 마리오네트의 저주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생기가 없었다.
찻잔을 가지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 린은 남은 차를 싱크대에 부어버리고 홍찻잎이 들었던 캔을 뽀각 열어 안을 확인했다.
‘역시~!!!’
귀한 찻잎이 뭉텅이로 줄어 있었다. 소리없이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은 린의 눈빛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울니트를 뜨거운 물에 빨아 아동복 사이즈로 만드는 것도, 청소에 미친 것처럼 달려들어 거실에 돌아다니는 먼지 한톨 한톨에 집착하는것도 다 괜찮다. 하지만 차를 이따위로 타서 내오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하겠어!
아쳐의 시선은 아직도 창밖의 푸른 하늘에 가 있었다.
그가 저렇게 된 이유라면 짐작이 간다. 사실 끝까지 모른 척 하고 싶었지만..
파랗다거나 창이라든가 랜서라든가 하는 단어에 과민반응하고 있는 꼴을 보면 알아차리지 못하는게 이상하지.
한창 러브러브한 분위기를 내다가 갑자기 영혼이 털린 것처럼 구는 일이야 뻔하다. 뭐, 싸웠다거나 의견다툼이 있었거나 칼로 물을 베었다든가.. 아니면.
‘헤어졌다거나?’
서번트의 연애사업에 끼어들다니, 마스터로써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린은 이마에 손을 올리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먹고싶은게 생기면 그때그때 쿠훌린에게 먹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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