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적신 수건으로 목을 닦던 대위는 어쩐지 긴장한 기색의 누나를 보며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또 된장찌개를 망쳤나? 그러나 한대위는 이어지는 누나의 말에 잠시 아찔함을 느껴야 했다.
“본가에 갈 일이 생겼어.”
“얼마나?”
“적어도.. 한 달.”
그건 좀 힘들겠는데.. 한대위는 볼을 긁적였다. 아마 왠만한 일이라면 누나 선에서 이미 거절했을 것이다. 누나가 이걸 나에게 말 했다는 것은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꼭 내가 가야할 일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인데?”
“본가의 후계자가 결정되는 자리야. 아버지가 안 계신 이상 분가의 대표인 네가 가야해.”
그거 진짜 뺄수 없는 일이군. 한대위는 속으로 몰래 혀를 내둘렀다.
단 며칠간 본가에 갈 일이 생길때도 한대위는 늘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본가의 어른들은 어찌나 보수적인지, 본가든 분가든 무조건 가주는 알파에 남자. 알파인 여자도 오메가인 남자도 모두 결격대상. 오랜 전통을 이어온 한씨 가문의 공수도류가 끊길 위험에서 분가의 그들이 선택한 것은 성년이 되어 정당한 가주로 인정받을 때까지 형질을 속이는 것이었다.
여자인 누나가 남자인 척 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한대위가 그 역할을 맡았다.
오메가가 알파인 척 속이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남장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으나 다행히 본가에 가는 기간이 오래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옆집의 의사선생님 덕분에 시판되지 않은 페이크 알파 페로몬 따위의 물건을 몇 번 얻어쓰니 본가의 사람들은 아예 한대위의 형질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거기엔 한대위의 겉모습이 큰 역할을 했다. 알파 여자보다 뼈대가 여리고 골반이 넓은 알파 남성과 달리 한대위는 뒤늦게 열일곱이 되어 형질이 발현될 때까지 당연히 알파로 발현되리라 생각할 정도로 체구가 건장했다. 지금도 백팔십이 넘는 키에 탄탄한 근육이 절대 오메가로는 생각되지 않는 몸이었다. 게다가 형질도 열성으로 지금까지 히트사이클인지 뭔지도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터라, 한대위 자신도 스스로 오메가란 인식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Q쌤한테 억제제 챙겨달라고 하면 되나?”
“한달 치를 처방해주실지 모르겠다. 후.. 몸에 좋지도 않은 걸..”
“어쩔 수 없지. 이제 얼마 안남았으니까.”
말마따나 정말 얼마 안 남았다. 열아홉이 될 때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일년. 이번 고비만 무사히 넘긴다면 본가에 다시 갈 일도 없으니 사실상 마지막 고비인 셈이었다.
“그래도.. 갑자기 거기서 히트싸이클이 오기라도 하면.”
“억제제만 제대로 먹으면 열성은 거의 안 오잖아.”
슬슬 저녁 때다. 훈련은 이만 접고 씻고 부엌에 서기 위해 도장 안을 주섬주섬 정리하는데 아직도 걱정이 끊이질 않는지 누나가 초조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대위는 매트를 접어 선반 위로 올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열명 중에 한명인데 걱정이 안 되니? 본가엔 또 알파가 얼마나 많다구..”
“뭐 다 쭉정이들이던데.”
“진모리에 비하면야 그렇겠지만 거기 스기하라도 그렇고,”
“누나.”
갑자기 착 가라앉은 한대위의 목소리에 그녀는 핫,하고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이건 자신의 실수다. 그녀는 더이상 한대위에게 잔소리를 이어 하지 못하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괜찮을 꺼야.”
“......”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선명하게 그어진 한대위의 선 밖에서 그녀는 그저 말없이 한대위의 등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스기하라는 아직도 한대위의 까만 눈동자를 기억한다.
그것은 경계라기보단 호기심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저녀석,날 모르는 건가? 자신을 보는 눈빛은 그저 이 자리에 자신처럼 어린 아이가 있어 신기하다는 표정 뿐이었다. 너무 담담한 표정이라 얼핏 졸린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본가에서 꽤 유명한 녀석이었다. 극진 공수도의 정통 본가가 아닌 분가인데도 강한 녀석이라고. 같은 나이 또래인 만큼 자신과 여러모로 비교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짧은 도복 소매 밑으로 보이는 발목은 덜 여물었지만 단단해 보였다. 처음 오는 장소인데도 과히 들뜨지 않고 침착한 모습이 확실히..
이쪽의 허울뿐인 본가의 후계자보다는 강해보인다.
잔잔한 호수의 표면처럼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간만에 승부욕을 끓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피를 이었지만 첩에게서 낳은 자식이라 본가에선 자신을 계륵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본처가 아닌 한국인 첩에게서 낳은 자신을 정식으로 호적에 올린 것은 순전히 자신이 정실이 낳은 후계자 녀석보다 강하기 때문이었다.
치열한 환경 속에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스기하라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강해지는 것 뿐이었다.
쓰러뜨려야 할 적이 있을 지언정 호적수란 것은 허울 좋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했던 스기하라가 처음으로 라이벌이나 호적수란 단어에 근접한 감정을 가진 것이 바로 그였다.
“한대위?”
일년에 한번씩 얼굴만 스쳐 지나간지 2년째 되던 날,스기하라는 그 녀석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대-이? 데이? 발음하기 어려운 발음이다. 스기하라는 두어번 그 이름을 입속에서 굴리고는 대련이다. 라는 짤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너보다 한살 어린 녀석이지.”
당연히 이겨야 한다는 말투였다. 스기하라는 그 날 열두살의 한대위와의 대련에서 그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알려준 동년배 또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5년간의 친선 대련에서 한대위가 스기하라를 이겨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단지 짜증나는 것은 그렇게 져 놓고도 무덤덤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하는 얼굴에서 단 한점의 초조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굳이 강해져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지 않더라도 이미 그 존재만으로도 사랑받고 있다는 자신감인가.
자신처럼 악착같이 기어오르지도 않는 주제에 한대위는 강했다. 공격은 묵직하고 매서웠으며,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날카로운 킥이 상중하단을 노리고 짓쳐들어왔다. 공격받는 자신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절묘한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면 주위에선 안타까운 탄성이 들린다. 그러나 자신의 회심의 공격이 막혔는데도 막상 한대위 본인은 아쉬운 티를 전혀 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점이 자신의 열등감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스기하라는 점점 한대위가 짜증나기 시작했다. 비단 자신의 깊은 곳을 긁는 열등감 때문만이 아니라 일본에 방문할 때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하듯 짙어만 가는 알파의 페로몬 때문이기도 했다.
후계자가 으레 그러하듯 한대위도 자신과 같은 알파인 모양으로,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갑작스러운 합숙 통보에 스기하라는 호기심보다 불쾌함을 먼저 느껴야 했다.
물론 본가에서 스기하라의 불만은 가볍게 묵살되었다. 심지어 그들은 스기하라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는 별채의 방을 그 분가의 후계자에게 멋대로 내주기까지 했다. 대체 본가는 무슨 생각인 건가. 그동안 그렇게나 대련을 붙여왔으면서 우리가 설마 친해졌을거라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스기하라는 불편한 눈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는 한대위의 정수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정원의 한대위보다 두세계단 정도 위에 있기에 가능한 시선이었다. 한달동안 머무른다더니 큼직한 트렁크에 어깨에 비껴 맨 뚱뚱한 보스턴백이 묵직해 보였다.
“.....”
스기하라는 잠시 그를 빤히 쳐다보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뒤에서 들리는 작은 목소리가 그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저기,내 방은?”
어설픈 일본어였다. 몇년간 그와 대련을 하며 나눈 대화가 한마디도 없었다는 것을 스기하라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따라와.”
사용인들이 안쓰던 방의 가구를 들어내고 며칠간 부산하게 쓸고 닦은 방이 있었다. 그 곳으로 안내하면 되겠지. 스기하라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한국어에 한대위의 눈이 크게 뜨였으나 스기하라는 모른 척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이 방을 써. 저녁 시간이 되면 사람이 널 데리러 올꺼다.”
“고마워. 그런데 너 한국어 할 줄..”
“야.”
벌써 친근함을 담고 말을 걸어오는 한대위의 목소리에 스기하라는 말허리를 끊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곧게 자신을 쳐다보는 까만 눈동자를 짜증스럽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말해두는데 분가든 뭐든 너랑 친해질 마음 없으니까 먼저 말 걸지마.”
표정에 변화가 없어 놀란 건지 아닌건지도 모르겠다. 스기하라는 멍하니 볼을 긁적이는 한대위를 뒤로 남기고 몸을 휙 돌려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오야마 스기하라.”
“......”
그러다 갑자기 풀네임이 불릴 줄 몰랐던 그가 걸음을 멈추는 사이 어설픈 일본어로 고맙다.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텅 빈 복도와 닫힌 문이 있을 뿐이다.
스기하라는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역시 저 녀석은 뭔가 맘에 안 든다.
저거 제목 계속 반복해서 말하면여 꺄르륵 본가분가본가분가봉가붕가붕가붕가... ...
...
....제성해여.. 짜질께여.... ,_.)
토라님 리퀘하고 야키님 리퀘가 둘다 스기대위라 제가.. 제가.. 그 두 리퀘를 한번에 하고 대신 양을 늘리기로 했어여..ㅠㅠㅠ 짧은 시간내 같은 커플링 이야기 완전 다른걸로 쓸 자신이 없어서..ㅠㅠㅠ정말 제성합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장편병 도짐..ㅠㅠㅠ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