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모리x한대위
어느날부터 비가 오면 배가 저리기 시작했다.
가을에서 막 겨울로 들어서기 시작하는 쌀쌀한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꾸물꾸물 하늘이 심상치 않더니 장마처럼 제법 강한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대위는 말없이 배를 움켜쥐었다. 간지럽거나 거슬리는 느낌이 강하다. 뭔가로 긁어내고 싶기도 하고 뭔가로 뱃속을 가득 채우고 싶어 밥도 두그릇이나 먹었는데, 이상하게 속이 더 허해졌다. 뭐지? 내가 회충약 먹는걸 잊었나?
한대위의 이상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진모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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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야, 너 입술이 보라색이야?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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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모리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술을 매만진 한대위는 놀랬다.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 같지 않게 입술이 차가웠다. 그걸 인식하자마자 전신에 싸늘한 한기가 돌았다. 춥다. 너무 춥다. 설마 방에 에어컨을 킨 걸까? 한대위가 두 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한차례 바르르 떨었다. 그의 팔을 진모리의 뜨끈한 손이 턱하니 잡아왔다. 지금 안 건데, 진모리는 가벼운 나시 한 장만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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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너 추워? 어디 아픈거 아냐? 몸이 차가워!
-어... 좀 추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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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말하는 한대위의 상태는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진모리는 기겁하며 한대위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마치 시체처럼 차가웠다.
진모리는 두 팔로 한대위의 허리와 엉덩이 아래를 껴안아 번쩍 들어올렸다. 무방비상태였던 한대위의 배가 진모리의 어깨에 눌릴 정도로 격한 움직임이었다. 진모리는 그렇게 한대위를 안고 어딘가로 두다다다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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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녀 할머니! 대위 이상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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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모리가 자신을 푹신한 소파에 내려놓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그냥 조금 추울 뿐이니까 아마 감기같은 것에 걸린게 아닌가 싶은데.. 웅녀의 보드라운 고사리손이 한대위의 새끼손가락을 가만히 쥐더니 그녀가 음 하고 목을 울렸다.
동시에 웅녀에게 잡힌 손가락에서 퍼진 따스한 기운이 한대위를 감쌌다. 어? 한대위가 눈을 크게 뜨고 웅녀를 올려다보자 그녀가 한대위의 질문을 읽은 것처럼 선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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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방편이다.
-네?
-음양오행이라는 것 들어는 봤겠지?
-알고 있어요. 대위가 이러는게 그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건데요.
이어지는 웅녀의 말에 진모리가 대답했다. 한대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Q에게 간단하게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물론 그나 자신이나 이론보다 실전을 중시하는 타입이었으므로 한대위의 머리에 깊게 남은 이야기는 없었으나, 음양이니 오행이니 하는 것들은 워낙에 유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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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과 양, 각각 찬것과 뜨거운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그리고 여성과 남성, 달과 해. 각각 상반된 것을 뜻하는 것임을 알고 있을 거야.
-으음...
-한대위가 다루는 기운은 물의 기운, 한없이 음기에 가까운 기운이다. 차력을 다루는데 서툴러 음기에 몸이 침범당한 일시적인 증상이야.
-많이 안좋은 거에요?
-본래 양의 기운을 가져야 하는 몸뚱아리에 음의 기운이 차들어오니 불편할만도 하지.
-그럼 유미라는? 유미라 차력은 남자인데 별 문제 없던데..
-그녀의 차력은 남자이나 본래 인간이었던 것이 아니냐. 이 녀석의 차력은 자연력을 다루는 환수 그 자체야.
-그럼 대위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말했잖느냐, 일시적인 증상이라고. 양기를 보충해주고 쉬게 해주면 될 거다. 비가 와 사방이 음기로 가득하니 몸 안의 음기가 더욱 날뛸 뿐이야. 시간이 지나 차력에 익숙해지면 이런 증상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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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과 함께 웅녀는 방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양기를 보충할만한 음료나 음식을 먹으면 좀 도움이 될거란 말과 함께였다. 웅녀가 멀어지자 왠지 다시 추워지는 느낌에 한대위가 한 손으로 어깨를 감싸자 진모리의 손이 그 손 위에 닿았다.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질 정도의 체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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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지금은 아까보다 나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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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위는 진모리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오히려 부끄러워졌다. 단지 추웠을 뿐이다. 옷을 두껍게 입고 이불 안에 들어가 있으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정도였는데 추태를 보였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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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올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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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에게 부탁해서 좀 일찍 전기장판을 깔아야겠다. 그리고 겨울이불을 덮고 몸을 지지면 견딜 만 할꺼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진모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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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춥지? 근데 왠지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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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는 진모리의 눈동자가 한순간 십자 모양으로 작게 빛났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그 말에 대답한 것은 한대위가 아니라 한 손에 큼직한 머그컵을 든 웅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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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넌 들끓는 용암속에서 몸이 제련된 화과산 돌원숭이 아니냐. 음기를 가진 해태와 상극일 정도로 양기에 치우친 녀석인데, 당연히 만만하게 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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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그녀는 한대위의 손에 머그컵을 들려주었다. 인삼과 대추 향이 나는 뿌연 차였다.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것을 한모금 마시자 뱃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이라 한대위는 홀짝거리며 한잔을 금새 다 비웠다. 꿀을 넣었는지 쌉쌀하고 달콤한 것이 맛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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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위.
-네?
-진모리에게 가라. 곁에만 있어도 넘치는 양기 때문에 몸에 나쁠 일은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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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녀의 말에 진모리가 활짝 웃었고, 대위는 알았다며 핸드폰을 들었다. 누나에게 외박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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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안고 가려는 진모리를 간신히 말리고 한대위는 무사히 걸어 진모리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웅녀할머니의 말마따나 그 임시 방편이 제법 효과가 있는지 빗방울이 어깨를 때려도 그렇게 춥지 않았다. 그래도 서서히 몸에 한기가 돌기 시작하는지라 진모리의 방에 도착하니 어디든 따뜻한 곳에 처박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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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을래?
-아. 먼저 씻어도 돼?
-이불 깔아 놓을테니까 따뜻한 물에 씻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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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물. 진모리의 말을 듣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수에 몸을 담그는 것이 간절해졌다. 한대위는 염치 불구하고 집주인보다 먼저 욕실에 들어갔다.
진모리는 그 사이 겨울에나 깔고 덮던 제일 두꺼운 이불들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나는 좀 덥겠지만 대위가 추워하니까. 나 좀 기특한 듯? 헤헤 웃으며 한 이불에 베개도 이쁘게 두 개를 놓고 나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감돌았다. 괜히 수학여행에 온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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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위는 욕실에 물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뜨거운 물을 튼 샤워기 밑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신세를 지는 것도 미안한데 팔자 좋게 욕조에 물받아놓고 몸을 담그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였다. 몸이 완전히 뜨끈뜨끈해질 때까지 물밑에 서있다가 대충 비누거품으로 머리와 몸을 씻고 나오니 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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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씻었어? 일찍 나왔네.
-다 했어.
-그럼 머리 말리고 있어. 나 씻고 나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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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모리의 옷을 빌려 입은 한대위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몸상태는 최상이었다. 하지만 이불에 걸터앉아 머리를 말리는 사이 몸이 점점 식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머리 덜 말렸는데.. 베개가 젖을 텐데 하면서도 한대위는 꾸물꾸물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왠지 지금보다 더 추워지면 이불에 들어가봤자 소용 없는 상태가 되리란걸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전기장판 전원 어딨지? 어? 전기장판 아니네.. 이불 밖으로 고개만 내민 채 전기장판을 키려던 한대위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이불 안에 들어왔지만 몸은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다. 일단 체온으로 덥혀야 이불 속이 훈훈해지는데 몸 자체가 차가우니 그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말리지 않은 머리에서 점점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고.. 한대위가 이불 속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모리가 머리를 탈탈 털며 욕실에서 걸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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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조금 배고프지 않아? 치킨 시킬까?
-나 치킨 싫어해..
-아 맞다. 어? 벌써 자게?
-추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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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모리는 한대위의 머리맡에 쭈그려 앉아 아직 물기가 많이 남은 한대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한번 쓸어보고는 가지고 있던 수건으로 대위 머리의 물기를 꾹꾹 짜기 시작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어깨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무시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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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젖은 채로 자면 감기 걸려.
-집에 드라이기 없어?
-망가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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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놈의 집구석에 있는 게 없냐.
한동안 말없이 대위의 머리를 말리던 진모리는 손가락을 대위의 입술에 대고 꾹 눌렀다. 한대위의 의아한 눈이 진모리의 얼굴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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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입술이 보라색이 될랑말랑 한데.
-어. 좀 추워지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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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말에 진모리는 두말 않고 이불 안으로 몸을 넣었다. 베개가 젖는 것따위 하등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진모리의 두 팔이 한대위의 등을 감싸고 다리를 옭아매었다. 답답하지도 않고 따끈따끈했다. 그리고 진모리는 팔과 가슴에 닿는 한대위의 몸이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더운 이불을 덮고 자면 답답해서 이불을 차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대위를 안고 있으면 시원해서 그러지도 않을 것 같았다. 꼭 시원한 죽부인을 껴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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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많이 추운 줄 몰랐어.
-네가 미안할게 뭐있냐.
-이러고 있으니까 니가 꼭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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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모리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한대위가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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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부인?
-어? 어떻게 알았어?
-나도 방금 그런 생각 하고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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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모리는 싱글싱글 웃으며 한대위의 머리통을 자신의 가슴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한대위의 팔이 슬금슬금 자신의 등을 향하는게 느껴졌다. 나는 음.. 대위의 핫팩 같은 건가? 생체난로?
둘의 몸이 이불 안에서 딱 달라붙은 채였다. 한대위는 따뜻한 물에 잠겼을 때처럼 만족스러웠다. 이제야 좀 잘만 하네. 차가운 발가락을 진모리의 종아리에 부비자 진모리가 장난을 걸어왔다. 한동안 투닥거리며 발장난을 하던 둘은 이내 서로의 체온에 만족감을 느끼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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