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렇게 쿨하게 한대위를 쳐냈던 스기하라는 곧이어 가주의 방으로 끌려들어가 본가의 후계자로써 분가의 후계자와의 사이를 돈독히 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정실의 정통 후계자냐 아니면 자신이냐 왈가왈부하던 원로들이 결국 선택한 것은 자신인 모양이다. 어쩐지 요 며칠 조용하다 싶더니.. 가주도 원로도 모두 강함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마초들인 만큼 자신이 선택된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다. 오히려 어느정도 예상하던 바였기에 스기하라는 쉽게 기쁨의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가주는 오히려 그런 스기하라를 만족스럽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 정도로 강한 녀석이지. 너와 같이 매년 성장해나가고. 빛나는 재능이다.. 분가도 간만에 인재를 냈어.”
아 그래. 당신네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강한 녀석’말이지.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분가와 교류했다고 그러십니까.”
“분가 후계자 위로 누나가 하나 있다고 하더구나.”
“.....”
“그 여자를 본 적이 있지. 제법 이쁘장하고 강해보이더군. 알파 하나 오메가 하나를 낳았다고 했으니 그 여자는 오메가가 아니겠느냐. 강한 후계자를 가지기 위해선 여자도 신중히 골라야 하는 법이다.”
“지금 분가의 여자를 제 혼처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가주는 기가 찬 표정으로 반문하는 스기하라를 향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잘 대해 줘라. 네 처제가 될 수도 있으니.”
친하게 지내라는 것이 빈말이 아니었던지, 바로 그날 저녁 식사부터 한대위는 바로 자신의 옆을 배정받았다. 훈련도 대련도 쉬는 시간마저도 겹쳐졌다. 도저히 눈이 안 갈수가 없었다.
=
하루 두알씩 먹는 억제제의 부작용은 생각보다 심했다. 구역감과 현기증은 물론이고 입맛도 없어진데다가 가끔 이명도 들려왔다. 약을 먹기 시작한지 겨우 일주일째의 부작용이 이랬다.
같은 건물을 쓰는 스기하라는 자신을 보는둥 마는둥 신경쓰지 않았고, 방 안에서 챙겨온 책을 읽으며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먹고 가끔 도장에 나가 자세를 보고 대련을 좀 하는 것 외엔 하는 일이 없어 몸은 편했다. 단지 독한 억제제때문에 입맛이 없어 밥을 몇번이나 남겼더니 음식이 입에 맞지 않냐며 사용인들이 자꾸 간식거리를 챙겨주었다.
사실 음식은 굉장히 맛있었는데.. 최소한의 조미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일식은 꽤나 신선해서 한대위 본인도 남긴 음식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어쨌든 받은 간식을 버릴수도 없고, 입맛이 없어 먹지도 못하고 그걸 가지고 있다가 도장의 어린 녀석들에게 쥐어주길 몇번이나 했더니 애들은 이제 제법 친근하게 다가왔다.
“대위쨩, 나 자세 봐줘.”
“앗, 싫어! 나랑 대련해주기로 했단 말야!”
귀여운 양갈래 머리의 여자아이와 갓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의 남자애가 투닥거리며 싸우는 동안 또다른 아이가 한대위의 수련복 끝을 잡아당겼다.
“..나 스트레칭 도와줘어.”
“그래.”
철없는 아이들이라 해도 걸음마를 뗄 때부터 공수도를 배워온 아이들이다. 어릴 때부터 재능을 빛낸 아이들을 본가에서 추리고 추려낸 것이라 왠만한 고등학생 한둘은 찜쪄먹을 정도로 무예에 대한 소양이 깊었다. 개중엔 자신처럼 분가의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같은 분가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순전히 간식거리에 눈이 먼 건지.. 아니면 단지 자신이 만만하기 때문인지 자신 얼굴만 보면 뭐 해달라 달라붙어왔다.
“저기 스기하라 형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해.”
애 셋을 동시에 돌보는 건 도저히 무리다. 한대위는 허리에 매달리고 소매를 잡아당기는 아이들을 점잖게 타이르며 도장 구석에서 명상하는 스기하라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자, 저기 있다. 우리 또래 유망주.
그런데 아이들은 스기하라를 보며 우물우물 하더니 이내 다시 한대위의 소매를 잡아왔다.
“그치만..”
“무서워.”
“우리가 옆에 가면 싫어해.”
싫어하는걸 어떻게 아느냐, 라고 말하려던 한대위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 아이들은 알파일 가능성이 높다. 무의식 적으로 같은 알파의 배타적인 기운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대이가 좋아.”
“응응, 대위쨩 나랑 대련하자, 응?”
나에게도 알파향이 날텐데. ..선생님이 준 향수, 아이들에게는 먹히지 않는 걸까.
한대위는 잠시 Q가 준 향수의 성능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에선 유명하지 않지만 외국에선 꽤 흔하게 쓰이는 물건이라고.. 그럴싸하게 알파 ‘느낌’을 내게 해주는 물건이라고 들었다.
느낌이 난다 해도 '열성' 오메가이자 아직 한번도 히트싸이클이란걸 겪어보지 않은 한대위는 그게 어떤 건지 도통 감을 잡을수 없었지만 그동안 몇번이나 대련하며 부대낀 그가 이상한 점을 못느꼈다면 그걸로 됬다고 생각했었다.
한대위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아이들을 달래 스트레칭을 도와주고 꼬맹이들과 이대 일로 대련을 해주며 수련시간을 때웠다.
3주 뒤에 있을 가주계승식 때문에 본가의 분위기는 제법 어수선했으므로 한대위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분가의 후계자 얼굴이 궁금해 기웃대는 사람들을 피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되니까. 언제나처럼 그렇게 책을 읽고 있던 한대위의 방문에 노크가 두드려진 것은 여기 와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들어오세요.”
본가의 사용인인가 해서 그렇게 말했는데 문은 열리지 않았다. 분명 문 밖에 서있는 기척은 있는데.. 한대위는 고개를 갸웃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열린 문 뒤의 인물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었다.
너무 놀라서 미처 표정관리도 하지 못한 한대위의 얼굴은 어정쩡했다. 평소라면 스기하라 정도의 알파가 접근하는건 바로 알아챌수 있었을텐데, 일주일간 쉬지않고 억제제를 먹어댄 탓에 감각이 극도로 둔해진 모양이었다. 스기하라는 한대위의 표정을 보고 혀를 쯧 찼다. 본인도 오고 싶어 온게 아니었는데 이 새낀 아주 대놓고..
“밥 먹었나?”
“어? 아니.”
“그럼 나와.”
스기하라는 그렇게 단 두마디만을 던지고 휙 뒤돌아갔다. 잠시 멍하니 있던 대위가 허겁지겁 겉옷을 걸치고 따라나서자 이미 저 멀리 별채를 나선 스기하라의 뒷모습만 보였다.
저녁때가 다 되어 나가는데도 사용인들이 어딜 가냐고 묻지 않는걸로 봐서 이미 이야기가 다 된 모양이었다. 스기하라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죽 걸어 나가 버스정류장에 가더니 버스를 잡아 탔다. 대위는 스기하라 옆에 앉지 않고 세 칸쯤 뒤의 좌석에 앉았다. 스기하라의 등이 등받이에 편히 받쳐지는걸 보고 한대위는 이어폰을 꺼내 귀에 끼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떨어진 자리에 서로 쳐다보지도 않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일행이란 생각도 못할 정도였다.
처음엔 운전기사를 제외하고 단 둘뿐이던 버스에 점점 자리가 차기 시작했다. 삼십분쯤 지나자 의자는 꽉 차고 하나둘씩 일어선 사람들이 버스를 채울때쯤 스기하라는 말도 없이 버스를 내렸는데 다행히 한대위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꽤나 번화가를 걷던 스기하라는 뒤로 한대위가 따라오는 걸 확인하지도 않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어..”
오분정도 걸었을까, 살짝 한산해진 골목에 스기하라가 우뚝 멈춰선것을 발견하고 한대위는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간판이 익숙했다. 그야 한국어로 써있었으니까. 일본에선 찾아보기 힘든 한국식 백반집이었다.
“뭐해? 들어와.”
가게 안은 좀 낡았지만 깔끔했다. 곧이어 식탁 위로 보글보글 끓는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올라오자 그 짜고 시큼한 냄새에 한대위의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흰 쌀밥에 멸치볶음, 애호박나물, 약간 밍밍한 김치. 집에서 먹는 것보단 못했으나 간만의 한식에 한대위가 열심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외국 나가서 한식 찾는 사람들 보면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일주일만에 한국음식을 먹으니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스기하라는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 처음 별관에 왔을때 말을 쏘아붙인것이 그들이 나눈 대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갑자기 무턱대고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해봤자 한대위가 기꺼이 그러마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였다.
‘빌어먹을..’
친해지라는 말만 아니었어도.
처음 하루이틀을 어디 얼마나 잘 하나 보자 하고 자신과 한대위에게 신경을 끄던 가주는 요근래 탐색이라도 하듯이 그둘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식사시간마다 바로 옆에 앉아 대화 한마디 않고 밥을 먹는 모습이 맘에 안드는 양 그랬다.
스기하라는 보일듯 말듯 미간을 구기며 말없이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한대위의 인기척을 가늠했다. 구구절절 말하는 취미가 없어 일단 나오라는 말로 불러내긴 했는데 거기에 대해 한마디도 묻지 않는 모습이 까다롭게 느껴졌다. 이 녀석도 분명 친구가 없을 것이다. 스기하라는 다시 희미해진 한대위의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려는 목을 꾹 눌러 참았다. 한걸음이나 두걸음정도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한대위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어쩐지 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일부러 기척을 죽이는 거지.’
일부러 최대한 페로몬을 억제하는 건지, 한대위에게서 느껴지던 알파의 기세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꼭 자신을 엿먹이려는 것 같아 스기하라는 내심 한대위에 대한 반감이 더 커졌다. 아, 이 녀석도 내가 달갑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과 비슷했다.
그래서 스기하라는 밥상 앞에 아이처럼 놀라는 한대위의 얼굴을 보고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잘 먹는군.”
“음.”
자신도 모르게 나간 목소리에 한대위가 머쓱한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스기하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저을 뻔 했다. 먹는 모습이 거북해서 그런 소릴 한건 아니었다. 단지 평소 식사할때의 태도와 너무 달라 신기했을 뿐이었다.
“요리사에게 식사때 매운 음식을 좀 내달라고 말해두지.”
“아니, 정말 괜찮아. 매운걸 별로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그냥 요새 입맛이 없어서..”
“입맛에 없어보이진 않는데.”
나름 농담이라고 던진 말에 한대위가 피식 하고 웃었다. 스기하라는 속으로 자신의 재치를 다시금 칭찬하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매운 음식을 그렇게 잘 먹을줄은 몰랐어.”
“이게 매워..?”
뭐라는거지.
스기하라는 정색하며 한대위와 식탁을 번걸아가며 쳐다보았다. 용암처럼 새빨갛게 끓고 있는 그것은 밥과 함께 먹어도 너무 뜨겁고 매웠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먹어치우는 한대위가 처음으로 대단해보인 순간이었던 것이다.
“내 입맛엔.. 오히려 약간 단데.”
“이게 달다고?”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반어법인가? 아니면 네녀석 혀 괜찮아? 짜다면 모를까 달다는 말에 스기하라는 경악의 눈길로 한대위를 쳐다보자 그가 태연한 얼굴로 국자를 들어올렸다.
“김치만 먹지 말고 여기 고기 먹어봐. 잘 식혀서 먹으면 그리 안매워.”
“싫..어.”
“원래 이건 고기랑 김치랑 같이 먹어야 맛있는 건데.”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얼굴에 스기하라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했다.
웃는 모습 처음 본다. 의외로 웃는 모습이 보기 좋, 아니 어려보인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자신의 그릇에 고기를 덜어놓는 그 모습에 스기하라는 이내 자신의 평가를 수정했다.
지금은 악마로 보였다.
제 느린 곰손을 몹시..때려주세여 ㅠ0ㅠ!!!!!!!!!! 엉엉어ㅓㅇ엉 애들아 이렇게 진도 느려서 방앗간은 대체 언제..가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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