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막 깨어나기 전의 어슴푸레한 의식 속에서 이불의 온기를 느끼는 것, 그리고 묵직한 눈꺼풀을 추욱 늘어뜨린 채 부드러운 베개에 볼을 문지르며 잠을 만끽하는 것. 그 나른한 감각은 쿠로오 테츠로가 가장 사랑하는 감각 중 하나였다.
원래 고양이 수인들이 나른하게 누워 게으름을 부리는 것을 좋아한다.
“흐아암..”일부러 잠을 깨기 위해 크게 하품을 한 쿠로오는 이불 안에서 쭈욱 기지개를 켜고 마지막으로 조금 꼼지락거렸다.
아직 밖이 어두울 정도로 이른 새벽이다. 베개에 짓눌려 엉망으로 뻗친 머리를 한 쿠로오는 비몽사몽한 얼굴로 일어나 욕실에서 씻기 시작했다.
양껏 게으름을 부리고 싶지만 곧 아침 연습을 할 시간이 다가온다. 쿠로오가 고양이답지 않게 부지런을 떠는 까닭은 이불보다 더 좋아하는 배구를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켄마를 깨워 아침연습에 늦지 않게 데려가기 위해서.
유독 켄마에게 텃세를 부리던 3학년이 졸업한 뒤의 첫 연습이었다. 쿠로오는 잠기운에 채 떨어지지 않은 눈꺼풀을 한 채로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칫솔에 치약을 주욱 짜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쿠로오에겐 수인의 상징과도 같은 동물의 흔적이 없었다.
쿠로오는 전신의 체모가 까맣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단모종의 고양이였다. 정확히는 고양이 수인이다.
딱히 자신의 본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숨겨야 할 이유도 없는 쿠로오가 그냥 사람이라고 해도 믿고 말 정도로 능숙한 의태를 사용하는 이유는 꽤 복잡하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꽤 옛날 일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현대의 수인들이라고 해도 같은 종끼리 모여살던 습성이 남아있어 쿠로오가 살던 동네는 옛부터 고양이 수인들이 많던 동네였다. 지금에야 살던 동네도 개발되어 거의 그런 구분이 없어졌다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쿠로오가 고양이가 아닌 다른 수인을 보려면 지하철을 타고 나가거나 티비를 켜야 했다.
그 시절의 쿠로오는 귀와 꼬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고 다니던 평범한 수인이었다.
그러니까.. 삼색고양이 남성인 켄마가 한 잡지에 소개되기 전까진.
쿠로오가 다섯살이 되던 해 켄마는 쿠로오와 한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어렸던 쿠로오는 부모님이 동생을 데려왔다고 뛸듯이 기뻐했더랬다. 교통사고로 죽은 오랜 친구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조금 크고 나서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키가 껑충하던 쿠로오와 달리 켄마는 덩치가 조금 작았다. 얼핏 보기엔 한살 차이가 아니라 서너살 차이는 나 보였고, 쿠로오는 식탁머리서부터 켄마의 밥을 챙기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좋을 때였다.
학교에서 놀다가 집에 와서 간식 먹고, 다시 켄마와 공놀이 하러 가고..
때는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흰 바탕에 삼색의 털을 가진 모프가 여성이 많다는 걸 책으로는 배웠지만 어린 쿠로오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을 때다. 백만명에 한명 꼴이니 뭐니 해도 아이들은 체감으로 와닿는 것 외에는 영 둔감하다. 동네에 같은 나잇대의 삼색모는 네명 정도였는데 남자애 하나에 여자애가 셋이라는 비율이였다. 하물며 그 남자애가 제 동생인데에야.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저기, 거기 키 큰 학생.”
“에?”
“이상한 사람 아니고 기자야~ 여기 명함. 이 학교에 삼색묘 수컷.. 아니 남자가 있다면서?”
난생 처음 받아본 뻣뻣한 명함을 손에서 굴리던 쿠로오에게 그렇게 물은 건, 동물의 흔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혹은 완벽하게 의태한 숨긴 수인이거나.
마침 하교하던 켄마와 눈이 마주쳤지만 쿠로오는 켄마의 의아한 눈빛을 무시하고 어깨를 으쓱 올렸다.
“있다는 거 같은데.. 저는 잘 몰라요. 우리 학년이 아니라서.”
“그래? 그럼 혹시 친한 아이라든가..”
“나 학원 갈 시간이에요! 안녕!”
쿠로오는 켄마가 사라진 골목의 반대방향으로 두다다다 뛰어갔다. 뒤에서 작게 욕설을 내뱉은 기자가 다른 아이에게 켄마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빙 돌아 집으로 돌아온 쿠로오는 거실 소파에 앉아 우유를 홀짝거리며 마시는 켄마를 확인하고 곧장 어머니에게 오늘 만난 이상한 남자에 대해 말했다. 의외로 어머니는 크게 놀라지 않았고 대신 쿠로오의 대처를 칭찬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거라고 예상한 모양이었다.
켄마는 이미 예전부터 수상한 사람들이 접근하거나 하면 어떤 식으로 대처하라고 미리 부모님께 언질을 들어온 모양이었다.
난 왜 몰랐지? 어렸던 쿠로오는 부모님과 켄마 사이에 자신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부모님은 켄마를 불러 앉히고는, 예정보다 이르지만 미리 의태를 배워두는 것이 좋겠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켄마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야기를 들은 쿠로오가 그럼 자신도 함께 배우고 싶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
약간 당황한 얼굴의 부모님 대신 쿠로오를 막은 건 켄마였다.
“그치만 쿠로오, 배구 할 꺼잖아. 의태를 어릴때 배우면 키가 안 자랄수도 있어.”
“잘 자라는 사람이 반이나 된다던데!”
“이상한 데서 긍정적인 사고 하지 마.”
“어차피 어른이 되면 할 줄 알아야 되잖아? 미리 배우는게 뭐 어때서.”
켄마는 자신 때문에 쿠로오가 괜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지 마뜩찮은 기색이었지만 쿠로오의 제안을 혼쾌히 승낙한 것은 아버지 쪽이었다.
“대신, 중간에 힘들다고 해도 관두기 없기다? 그리고 너무 어렸을 때부터 의태를 해서 좋을 건 없으니 집에 돌아와서는 무조건 의태를 푸는 걸로 하자꾸나.”
어머니도 아버지도 일터에선 의태를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귀와 꼬리를 편하게 내놓고 다닌다.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며칠 뒤, 어릴 적 켄마의 사진이 한 잡지에 실렸고 한적한 도쿄 외곽의 동네는 이방인으로 들끓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억지로 끌려가려던 켄마를 쿠로오가 발견해 소리를 지른 것만도 세 번이 넘었다.
다행히 그해 겨울 도쿄 도심에 집을 구한 쿠로오네 가족은 도망치듯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둘의 의태도 완벽해질 때 쯔음이었다.
그러니까 쿠로오는 딱히 의태를 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검은 털의 고양이 수인은 귀한 편도 아니었으니까. 단지 쿠로오는 켄마를 어린 수인주제에 의태하고 다니는 별종이라고 혼자 손가락질 받게 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익숙치 못한 수인들은 죽어도 못 하는게 의태라고 하지만 쿠로오와 켄마처럼 소동물을 조상으로 둔 수인들은 의태를 할 때 크게 힘들어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저 딱 맞는 옷을 세겹정도 겹쳐 입었을 때의 갑갑한 느낌 정도랄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조금 유난 떤다 싶을 정도였다. 가끔 부활동을 하다가 지나치게 흥분하면 의태가 풀리기도 하는 정도다.
어렸을 때야 제멋대로 동물의 흔적을 내보이고 다닌다지만, 어른이 되어 공적인 자리에 나서게 될 때 동물의 흔적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은 조금 칠칠맞은 성격으로 비춰졌다.
아마도 옛날의 풍습이겠지만 덕분에 쿠로오와 켄마는 나이가 먹어갈수록 별 특이한 녀석이라는 눈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켄마, 일어나~ 아침 연습가야지.”
“혼자 가...”
“오야? 이제 1학년 후배들도 들어오는데 게으른 모습을 보일 셈이야?”
켄마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쿠로오를 흘겨보고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간다. 쿠로오는 씩 웃으며 적당히 아침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침을 차린다고 해도 전날 어머님이 끓여둔 된장국을 데우고 냉장고 속의 고기감자조림과 멸치 샐러드 정도를 꺼내 차리는 정도였다. 전기밥솥의 밥을 밥그릇에 담고, 계란 후라이를 하나씩 부쳐 밥봉분 위로 툭 떨어뜨리는 걸로 간단히 밥 준비가 끝났다.
부모님의 출근 시간은 아직 멀었기 때문에 식탁은 둘의 밥먹는 소리만으로 조용했다. 졸린 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멍하니 밥을 씹는 켄마를 빤히 쳐다보던 쿠로오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툭 말을 꺼냈다.
“맞다, 이번주에 골든위크 합숙에 앞서서 후쿠로다니랑 주말 이틀동안 합동연습할꺼야.”
“후쿠로다니라면, 그 날짐승들..?”
느릿한 켄마의 말에 쿠로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날짐승들. 학교를 설립한 재단이 부엉이의 혈족이 세운 것이라선지 그 학교는 유독 날짐승의 비율이 높았다. 마찬가지로 네코마는 육식 네발짐승이, 신젠에는 물질하는 짐승들의 후손이 모인 학교다. 비슷한 종들이 모이는 습성대로 고등학교쯤 되면 자신과 비슷한 동종들이 있는 곳으로 학교를 정하고는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