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나 늦어져서 면목이 없는 것 ..ㅠㅠㅠㅠ
아이돌AU일표택임미다..
태양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현란한 조명이 반짝인다. 귀를 울릴 정도의 음량이 심장박자처럼 쿵쿵댔고 성급하게 마신 술은 허공에 뜬 듯한 부유감을 선사했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여름보다 더 심한 노출을 한 여자들이 힐끔대며 시선을 던지는 꼴을 코웃음도 치지 않고 무시한다. 남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익숙한 사람의 반응이었다. 확실히 남자치고 긴 머리를 높이 올려 묶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여 습관적으로 리듬을 타는 모습이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맛이 있긴 했다.
자신의 얼굴을 믿고 끈적하게 들이댔던 여자들을 몇 번 무참하게 거절하자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의 수가 확 줄었다.
‘심심하네.’
시간이 흐를수록 클럽 안의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춤을 추며 끈적하게 달라붙는 남녀와 은근히 서로의 몸을 비비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지만 제갈택의 눈동자는 심드렁하게 가라앉았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숙소에서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잘 걸 그랬군.
사실 제갈택이 클럽에 나오는 것은 반쯤은 습관이었다. 머리꼭지에 피가 마르기도 전인 십대부터 줄창 클럽을 다니며 나름대로 문란한 생활을 해온 그라 이제와서 클럽에 목 맬 정도로 굶주려있지도 않다. 박일표를 제외한 멤버들에겐 스트레스 해소용이라 말하지만 그가 클럽에 나오는 나머지 절반의 이유는 바로 그 박일표 때문이었다.
어영부영 감정을 깨닫고 고백해 연인 비슷한게 되어있긴 하지만, 박일표는 본래 헤테로였다.
게이인 자신이 교제해달라 했을때 놀라던 반응을 보면 자신이 고백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을게 뻔했다. 하지만 박일표는 어째서인지 순순히 제갈택의 연인이 되어 주었고..
‘술맛 떨어지는군.’
모든 연애가 동화처럼 해피엔딩인 것은 아니었다.
제갈택은 가끔 박일표의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다. 이럴거면 왜 자신과 사귀기로 했느냐고, 설마 그룹 멤버가 고백했기 때문에 차마 거절할수 없었느냐고.
박일표는 착한 사람이었다. 늘 상냥하게 웃으며 모두에게 공평했고 그 말은 연인으로썬 영 글러먹었다는 뜻과 같았다.
스킨십을 거절하지만 않지만 절대 먼저 손을 대는 법이 없었다. 스킨십 뿐만 아니라 그들 관계의 거의 대부분이 그랬다. 제갈택이 먼저 지쳐 떨어지지 않거나 박일표에게 저렇게 따져묻지 않는 까닭은 그런 점마저 모두 안고 갈 정도로 제갈택이 박일표에게 흠뻑 빠져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뭣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제갈택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이를 갈면서도 박일표의 얼굴만 보면 독기가 빠졌다. 그게 제일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어쨌든 연인으로써 봐줄 거라곤 얼굴과 몸 정도인 박일표가 그나마 연인다운 행세를 할 때는 제갈택이 말 없이 밤새 놀다 오거나 할 때 뿐이었다. 그마저도 늘 지적하지 않고 두세번에 한번씩 제갈택의 침실이 비어있는것을 확인하고는 무어라 잔소리를 할 뿐이었지만 제갈택은 그게 그렇게 기꺼웠다.
‘오늘은 그냥 돌아갈까.’
손에 든 술잔을 모두 입안에 털어넣은 제갈택은 칵테일잔을 바에 반납하고 빽빽히 들어선 사람들의 틈을 해지고 걸어나갔다. 워낙에 사람이 많은 데다 다들 취한듯 흐느적거려 그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만으로도 곤욕이다. 제갈택이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 순간 뒤에서 끈적한 손이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어떤 년이야.’
방금 전 호되게 당한 여자들에게 소문은 못 들었나보지. 짜증난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본 제갈택의 눈에 보여진 것은 가슴이 훤히 드러난 옷을 입은 여자가 아니라 눈높이가 제법 높은 남자였다. 깨끗한 피부에 둥근 이마가 꽤나 번지르르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남자는 제갈택의 대놓고 짜증난다는 시선에도 싱긋 웃더니 몸을 살짝 붙여 손바닥을 슬쩍 가슴께로 올린다.
제갈택이 입을 뻐끔 열자 남자가 빙긋 웃더니 고개를 숙여 자신의 귀를 제갈택의 입가에 내렸다.
“이태원이나 쳐 가, 이 게이새끼야.”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어?”
그래놓고는 제법 사람 좋은 웃음을 빙그레 지어보이는데, 제갈택은 순간적으로 눈썹을 꿈틀 일그러뜨렸다. 뭔가 익숙하다 했더니.. 모양 좋은 눈썹 하며 순하게 처진 눈매, 그리고 웃는 모습이 박일표와 닮았다.
제갈택은 그대로 상대의 멱살을 잡아 끌어 입을 맞췄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적극적으로 혀를 감아온다.
“쯧.”
클럽 바로 옆의 호텔에서 잠에서 깬 제갈택은 쯧 하고 작게 혀를 찼다. 호텔 난방이 너무 강해서 입술이 건조했고, 등 뒤로는 어제 그 녀석이 찰싹 달라붙어 껴안은 상태라 더웠다.
욕실로 가서 거울을 보니 가슴에 빨갛게 울혈이 생겼다. 원나잇에 더럽게 매너없네.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으나 브이넥 니트를 입어도 보이지 않는 가슴께라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뜨거운 물을 틀어 샤워를 시작했다.
더듬거려 아래를 만져보자 아래는 젤로 범벅이었다. 뜨거운 물로 살짝 굳은 젤을 녹여버리고 살짝 부어 아릿한 입구와 저린 허리를 두들겼다.
샤워를 마치고 대충 옷을 주워입은 제갈택은 지갑에서 십만원짜리 수표 두어장을 꺼내 침대위에 두고 방을 나섰다.
그래도 원나잇 치고는 나쁘지 않은 테크닉이었다고 생각하며.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에 도착하자 늦은 오전이었다. 스케쥴이 있는 녀석들은 진작에 나섰을 것이고 스케쥴이 없다면 지금쯤 일어나 느즈막히 아침을 먹을 시간이다.
“어디 갔다와?”
숙소에 처음 들어서자마자 바로 박일표를 만나게 되는 건 예상 외였지만.
제갈택의 시선이 힐끔 거실의 스케쥴보드를 향했다.
“본가에 좀.. 그런데 너 스케쥴 있지 않았나?”
“아 취소되서. 대위가 밥해뒀는데 먹을래?”
어제 술을 잔뜩 마셔 속이 더부룩했다. 거절하려고 고개를 젓는데 박일표가 냄비 뚜껑을 열자 고소하면서도 시원한 미역국 냄새가 확 퍼졌다. 와 술국 땡겨. 제갈택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들어가 불편한 옷을 벗고 편한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었다. 추워 옷 안에 꽁꽁 싸맸던 머리가 덜 말라 아직 물기가 축축한 것을 대충 풀어 뒤로 늘어뜨리고 부엌으로 나가자 박일표가 국을 데우고 반찬을 꺼내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연습실인지, 아니면 스케쥴인지 모르겠지만 집 안엔 박일표뿐인 모양이다. 식탁 위에선 한동안 말없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박일표는 그저 말없이 밥을 먹다 태연한 얼굴로 자신이 설겆이를 하겠노라 했고, 제갈택은 그대로 식탁을 떠났다. 본가는 얼어죽을. 박일표는 오늘도 알아채지 못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설겆이하는 박일표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뭔가 하고 확인하니 처음 보는 이름으로 메세지가 와 있었다. 범일태? 어제 그 새낀가? 와 이거 진짜 골때리네. 자는 사람 몰래 휴대폰에 번호를 저장해두다니 쌍팔년도 영화에서나 나올 짓을 하고 앉아있냐.
범일태 { 왜 그렇게 일찍 갔어요? 어제 무리했을텐데. ]
- 제갈택님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
- 범일태님이 제갈택님을 초대했습니다. -
범일태 { 하하, 혹시 쑥쓰러워서 그래요? 어제는 그렇게 적극적이더니. ]
- 제갈택님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
- 범일태님이 제갈택님을 초대했습니다. -
범일태 { 혹시 대화하기 싫은거? 나 상처받을 거 같은데.. ]
- 제갈택님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
- 범일태님이 제갈택님을 초대했습니다. -
범일태 { 어제 찍은 사진 제 인스타에 올려도 되요? ]
제갈택 { 씨발새끼야. ]
범일태 { 와 드디어 대답해줬다!^^ ]
제갈택은 이를 악문 채로 손가락을 두다다 움직였다. 아이폰 액정이 깨지기라도 할 기세였다. 지금 유명인 약점 잡았다고 뻗대는 거 같은데.. 너 사람 잘 만났다. 제갈택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었고, 제갈택이 십대부터 클럽을 들락거려도 겉으로는 멀쩡하게 아이돌질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가문의 이름 덕분이었다. 폭력사건을 경찰서까지 갈 정도로 휘말린 것을 한 기자가 기사화했다가 갑자기 모든 광고가 끊겨 부랴부랴 기사를 내렸던 사건 정도는 기자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도 못 될 정도였다.
제갈택 { 원하는게 뭔데? 돈? ]
범일태 { 원하는 거라면.. 굳이 따지자면 몸인가? ]
하. 제갈택은 어이가 없어 폐하가 승천할 지경이 되어 코웃음을 팩 쳤다. 왠만하면 양 변호사에게 연락하지 않고 좋게 끝내려고 했더니..
이틀 뒤에 경찰서에서 보자, 라고 짧게 보내려 대화방을 나가려는 찰나 몇개의 메세지가 순식간에 띠롱띠롱 수신되기 시작했다.
범일태 { 농담이에요, 농담ㅠㅠ 씹지 마요.. 사실 나 ]
범일태 { 이번에 가수 데뷔하게 됬거든요. ]
범일태 { 선배로써 이것저것 궁금한것도 있고. 그래서 그런데 한번만 만나주면 안되나? ]
왠만하면 그냥 대화방을 나가버렸을텐데 뒤에 붙는 이야기가 제법 흥미로웠다. 가수라? 그러고보니 목소리도 낮은 저음이 꽤나 섹시했고 마스크도 나쁘지 않았지.
제갈택 { 사진은. ]
범일태 { 그냥 얼굴만 찍은 거에요ㅠㅠ. 나오면 보여주고 바로 그자리에서 삭제할께요. ]
제갈택 { 나 바쁜데. ]
범일태 { 저희 그룹 데뷔무대 이번에 음중에서 하는데.. 그때 시간 맞으면 잠깐 보는것도 괜찮은데^^ ]
제갈택 { 5분. ]
범일태 { 귀여운 후배 만나는 거니까 딱 5분만 더해주면 안될까요 >.<? ]
- 제갈택님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
- 범일태님이 제갈택님을 초대했습니다. -
범일태 { 잘못했어요. 그럼 7분만 시간 내줘요. ]
제갈택 { ㅇ ]
제갈택은 대충 긍정의 답을 보낸 뒤 휴대폰을 쇼파 위에 턱하니 던졌다. 어쩐지 자신을 보는 눈이 묘하다 싶더니만... 자기 애를 배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눈빛과 비슷하다 했더니 아이돌 선배인 제갈택에게 나쁘게 보일 필요는 없다 이건가. 사실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제갈택은 자신이 그 녀석에게 여지를 준 게 맞다고 확신했다. 확실히.. 자신이 다른 녀석에 비해 무르게 대응한다는 느낌은 있었다. 그래도 음. 일단 섹스는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박일표를 닮았으니까. 스스로 찾아낸 이유를 긍정하던 제갈택은 어느새 맞은편 소파에 앉은 박일표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괜히 제발 저린 느낌이었다.
“왜?”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박일표의 시선이 소파에 놓인 휴대폰에 가 닿아있는걸 확인한 제갈택의 안색이 묘해졌다. 설마 신경쓰는 건가 싶어서 살짝 기쁘기도 하다가 왠지 외도한 느낌에 뒷목이 싸해지기도 했다.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한 얼굴로 박일표를 쳐다보는 제갈택의 표정에 박일표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본가에 있다 왔다더니 집에서 온 연락인가봐?”
“어.. 음.”
가요계 후배를 좀 보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숨길 일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의 연쇄다. 박일표의 말에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자 소파 위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평소라면 슬쩍 박일표에게 다가앉아 손이라도 잡아봤을 텐데 묘하게 위축된 제갈택은 그저 제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거실 한구석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박일표는 말없이 그런 제갈택을 쳐다보다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흐지부지 대충 한번 보기로 정하고 난 뒤, 제갈택은 당연히 얼굴 한번 보여주면 모든 연락이 끊기겠거니 했지만 음중 녹화 전까지 연락이 끊기질 않았다,
어림 잡아 하루 열두번까지도 오는 것 같았는데 어찌나 짜증나던지 나중에는 오는 연락을 죄다 씹었다. 그럼에도 그녀석을 차단하지 않은건 오직 박일표를 닮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벤에 피곤한듯 주저 앉아 아이폰을 집어든 제갈택의 표정이 묘해졌다. 맞은편에 앉은 박일표가 무어라 입을 어는 순간 제갈택이 손가락으로 두다다 무언갈 치며 메신저로 대화를 시작해버리자 박일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묘하게 조용해진 벤 안에서 진모리와 한대위는 서로 박일표와 제갈택을 힐끔대며 눈치만 봤다. 매니저 옆 조수석에 앉은 백승철을 부러워하면서.
범일태 { 방송국 도착! 선배님들은 대기실 따로 있으시죠? ]
제갈택 { ㅇ 그리고 아직 도착도 안했어. ]
범일태 { 어? 곧 리허설 시작인데요? ]
제갈택 { 우리가 니네같은 새파란 신입이랑 같냐?? ]
범일태 { 그럼 우리 언제 만나요ㅠ0ㅠ ]
제갈택 { 니네 리허설 끝나고 오든가. 아 그리고 토나오니까 이모티콘좀 치워 ]
범일태 (하트뿅뿅 귀여운 이모티콘 있음)
- 제갈택님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
- 범일태님이 제갈택님을 초대했습니다. -
범일태 { 다신 안할께요. ]
참고로 제갈택은 박일표에게 메신저 보낼 때 이모티콘좀 넣어서 부드럽게 보내주면 안되겠냐는 투정까지 부려본 전적이 있던 남자였다.
화보촬영을 마치고 3집을 들고 오래간만에 음중무대에 서게 됬다. 당연하지만 그룹의 순서는 맨 뒤, 프로그램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위치였다.
컴백소식 때문에 간만에 방송국 앞이 더할 나위 없이 혼잡해 이 추운 날에 주차장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차에서 쫓겨나야 했다.
“미안한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지금 주차 못하겠다. 너희 먼저 뒷문으로 들어가 있어. 대충 차 두고 올테니까.”
훈훈한 히터가 틀어져 있던 차와 달리 밖은 점심때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매섭기 그지없었다. 서로 달라붙어 손을 잡고 온몸으로 하트 광선을 내뿜는 진모리와 한대위를 쳐다보자니 저절로 표정이 썩어들어간다. 괜히 박일표를 힐끔 쳐다보자 꼴에 리더랍시고 앞장서 척척 걸어간다. 젠장. 제갈택은 추운 손을 파카 주머니에 쑥 집어 넣고 박일표의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애인이 있는데도 옆구리가 못내 시렸다.
걷는 와중 아이폰이 징 울어 확인하니 그 녀석이었다. 자기는 리허설이 끝났다며 피디님이 무섭다고 칭얼거리는데 이모티콘도 없이 참 잘도 징징댄다 싶었다.
박일표를 뒤따라 걸으며 대충 답을 해주는데 곧 만날수 있기 때문인지 아주 메세지로 테러를 하기 시작한다. 아 어쩌지. 다시 보게 된다니 너무 좋네요 따위의 문장 때문에 계속 울리는 휴대폰을 보다 거기에 적힌 장소를 본 제갈택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야, 우리 대기실 어디야.”
“3층 오른쪽임.”
“그 큰 방? 알았어. 나는 좀 있다가 간다.”
그렇게 말하고 뒤로 빠지자 박일표의 시선이 묘하게 자신에게 달라붙어온다. 제갈택은 왠지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 생각하며 일부러 박일표의 눈길을 못 알아챈척 뒤를 돌았다.
신인 그룹은 보통 프로그램의 맨 앞, 그리고 인기그룹일수록 프로그램의 뒤에 배치되기 마련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쪽의 출연이 다 끝낼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오래 걸리니 먼저 끝난 쪽이 다른 쪽이 리허설을 시작하기 전에 얼른 만나러 오겠다는 거다. 그녀석은 방송국도 처음이라는 주제에 또 이런 데엔 빠삭해보였다.
아무도 없어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휴게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제갈택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일주일간 제갈택을 끈질기게도 괴롭혀오던 녀석이었다.
“아! 안 늦었다!”
“..누가 쫓아 오냐?”
“그렇지만 늦게 오면 그냥 가버릴 것 같아서요.”
그 말엔 반박하지 못했다. 삼분정도 기다리다 안오면 바로 가버릴 생각이었으니까.
리허설 끝나고 바로 왔다더니 옷이며 메이크업까지 풀로 마친 상태다. 그 상태로 허겁지겁 달려왔는지 헉헉대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전신에 달라붙은 검은 가죽옷을 보니 그룹 컨셉이 대충 감이 잡힌다. 제갈택의 시선이 자신의 옷을 위아래로 흩는 것을 확인한 그는 수줍게 웃으며 물었다.
“우리 무대의상 어때요? 섹시하죠? 막 두근거리지 않아요?”
“지랄. 무대에서 머리라도 맞았냐?”
사실 조금 두근거리긴 했다. 그런데 그건 저 부담 백배 검정 레자가 섹시해서가 아니라 살짝 길러 펌을 넣은 헤어스타일이 박일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제갈택은 눈썹을 들어올리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헉.. 악수해도 되요?”
“닥치고 사진 내놔.”
제갈택의 싸늘한 말에 범일태는 그 큰 덩치를 시무룩하게 숙이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비밀번호도 지정되어있지 않은 폰을 열어 멋대로 갤러리를 뒤진 제갈택은 저장된 사진을 찾아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얼굴만 찍긴 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잠든 옆모습이었고 그 옆엔 뺀질한 범일태의 얼굴이 함께 나와 있었다. 게다가 이불 밖으로 맨어깨가 삐죽 비져나와 그냥 아는 형동생이 자는 모습이라기엔 묘하게 야릇한 사진이었다.
“다시 인스타니 뭐니 하는 헛소리 지껄이면 죽여버린다.”
일말의 미련도 없이 사진을 삭제하고 휴대폰을 돌려주자 범일태가 축 처진 어깨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제갈택을 붙잡아 휴게실 의자에 앉혔다.
“아직 5분 남았으니까 이야기나 좀 해요.”
그러나 제갈택의 얼굴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받을거 다 받았으니 이제 볼일이 없다 이거야. 라는게 드러난 표정에 범일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에 훤히 보인다. 그게 아이같아 보이기도 하지만서도 제갈택이란 남자는 굳이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감출 필요가 없이 살아왔다는걸 상기시키기도 했다.
“원래는 아이돌 선배로써 뭐 충고라도 해주기 위해서 오신 거잖아요. 아무 이야기나 해 줘요.”
“딴따라가 인기 얻으려면 노래 잘 부르고 춤 잘추면 됐지 뭘 바라냐?”
“노래도 노래 나름이지.”
“비싼 작곡가를 사시던가.”
“소속사가 가난해서 그건 좀..”
쓸쓸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범일태는 곧 방긋 웃으며 그런 의미로 후배한테 곡 하나만 써주면 안될까요? 하고 넉살 좋게 웃어보였다.
거절당할걸 전제로 꺼낸 말인지 범일태는 곧 떨어질 제갈택의 짜증스런 목소리를 예상하며 작게 어깨를 움츠렸지만, 제갈택은 그런 범일태를 빤히 노려보았다.
“..만들어둔 노래 하나 있는데, 줄까?”
그러더니 답지 않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는 것이다. 그 얼굴에 왠지 범일태는 평소처럼 웃으며 대답하지 못하고 목이 콱 매였다. 그 순간 휴게실 문이 벌컥 열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바보처럼 말을 더듬고 말았을 것이다.
“택아.”
그러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자 마자 범일태는 벌떡 일어나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군대도 아니고, 식겁한 제갈택이 뒤를 돌아보자 평소처럼 순둥한 얼굴을 한 박일표가 갑작스러운 인사에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박일표 선배님, 저는 신인그룹..”
“택아, 우리 리허설 해야 돼.”
범일태의 인사를 무시하고 바로 제갈택을 불러 데려간다. 범일태가 살짝 벙찐 얼굴로 서있자 박일표의 손에 손목을 잡혀 끌려가던 제갈택이 뒤를 가볍게 돌아보더니 자유로운 한 손으로 전화하는 손을 만들어 얼굴 옆에 붙였다.
“노래 생각 있으면 연락해.”
“아..”
그러나 채 범일태가 대답을 하기 전에 휴게실의 문은 닫혔다. 그러니까.. 다음에 또 연락해도 된다는 뜻?
“친구가 인사성이 좋네.”
“저렇게 인사하는건 처음 봤는데.”
어디가서 박일표한테 맞기라도 했나 싶을 정도다. 제갈택의 대답에 박일표가 티나지 않게 살짝 뒤를 돌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여전히 박일표는 제갈택의 앞에 서 있었고 제갈택은 박일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많이 친한 친구인가봐. 노래도 만들어주고.”
“저거 친구 아닌데?”
박일표가 살짝 멈칫한 사이 제갈택은 먼저 앞서나가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한대위의 무릎을 베고 있던 진모리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다가 문앞에 서있는것이 제갈택임을 확인하고 심드렁하게 다시 누웠다.
“깜짝이야.. 볼일 있다더니 왤케 빨리 왔어?”
“.....”
제갈택은 바보가 아니었고, 그래서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다.
리허설에 본공연까지 마치고 핸드폰을 확인하자 여김없이 그녀석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노래를 준다고 한건 반쯤 충동적인 생각이었지만 진짜로 만들어둔 노래가 있긴 했다. 톡으로 목소리를 들어봐야 하니 MR뺀걸로 노래 부른 파일을 보내달라고 하고 이메일 주소를 넘기자 그쪽도 상당히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겨우 원나잇 한번에 노래 하나라니 확실히 파격적이긴 했다. 어디까지나 제갈택의 기분이 좋기 때문에 주는 서비스였지만 말이다.
뭐 그래도.. 확실히 박일표가 내 애인은 맞는 모양이지. 제갈택의 입가에 기분 좋은 -남들이 보기엔 비릿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미소가 매달렸다.
그림, 음악, 조각을 불문하고 예술하는 사람들의 영감의 원천은 무엇을까. 보통 그것은 예술가의 애정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연인이라든가 가족, 혹은 자신의 조각을 보고 사랑에 빠졌던 피그말리온처럼 예술가의 창작물과 그의 애정의 대상은 아예 별개일 수가 없는 것이다.
제갈택 또한 부끄럽지만 박일표에게 줄 노래를 작곡해본 적이 있었다.
물론 나온 것은 박일표에게 주기는 한참 모자란 곡들 뿐이라 박일표에게 선물한 곡은 막상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삽질을 한 덕분에 곡이 잔뜩 남아돌았으니 그 중 하나를 다듬어서 그녀석에게 선물하는 것 정도는 상관 없을것이다.
나름 기특하단 말이지.. 그 박일표가 질투도 다 하게 만들고, 아주 기특한 녀석이야.
“큰일났어.”
평소 여유로운 모습과 인상 좋은 웃음이 트레이드 마크일 정도로 느긋한 박일표답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초조한 얼굴로 다리를 떨기 시작하는 박일표를 보며 백승철과 진모리는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임?”
“뭐 큰일이라도 난거야??”
박일표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애 끓는 소리를 냈다.
“택이가.. 다른 남자를 만나나봐..”
백승철 은(는) 금새 심드렁해졌다!
진모리 은(는) 귀를 후비기 시작했다!
제갈택과 박일표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고 사귀기 전부터 종종 들어왔던 내용이었다. 애써 귀찮은 기색을 감춘 진모리가 투덜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만나지 말라고 해.”
“택이는 구속하는거 싫어해.”
“흐음. 글쎄?”
진모리는 묘하게 웃었고, 박일표의 일이 그닥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백승철은 노트북을 무릎에 올리고 전원을 켜기 시작했다.
“쿨한 애인이 되고 싶다고 클럽 가는것도 봐주는데 다른 남자 만나는건 못 봐주겠음?”
“클럽에선 그래도 여자만 만나잖아. 그리고 그새끼는 좀 느낌이 이상해.”
와, 일표형이 그새끼래. 진짜 맘에 안드나봐.
진모리가 백승철 옆에서 속닥거렸다. 눈썹을 찌푸린 박일표는 미처 그런 진모리를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택이가.. 그 새끼한테 노래 준다고 했단 말이야.”
“흠?”
그제서야 노트북에 고정되어 있던 백승철의 눈이 박일표를 향했다.
“아~그러고 보니 일표형도 택이한테 노래 받은적 없구나?”
진모리의 태연한 목소리에 백승철은 입 다물라는 뜻으로 진모리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제갈택은 작곡에 손을 댄지 3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작곡한 노래마다 대박을 터뜨렸다. 두글자로 줄여 말하자면 천재다. 1집부터 해서 솔로로 낸 곡까지 지금 발표한 곡으로 벌어들이는 저작권료만 해도 평생을 호사스럽게 놀고먹어도 될 정도다.
하지만 성격이 심히 사나운 탓에 다른 그룹에 노래를 주긴 커녕 같은 소속사 선배에게 노래를 줬다가도 부르는게 맘에 안 든다며 깽판을 쳐 노래를 다시 받아온 전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 사람이 가수임?”
“이번에 새로 데뷔했나봐,”
백승철의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이더니 모니터에 사진을 띄웠다. 무대 사진을 몇개 띄워 박일표에게 모니터롤 보여주자 박일표가 손가락으로 한 남자의 얼굴을 집었다.
“오. 이 사람 잘생겼네.”
“키가 190이야. 제갈택보다 큼.”
평소 제갈택보다 작은 키를 은근히 신경쓰고 있던 박일표의 눈썹이 꿈틀 일그러졌다.
그러나 박일표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 백승철이 선수를 쳤다.
“이 사람이랑 제갈택이랑 나란히 기사 떴네?”
“..볼래.”
박일표는 백승철의 노트북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고, 프로필을 보던 박일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거 진짜야..?”
“어제자 기사니까 오늘 제갈택 돌아오면 물어보셈. 둘이 생각보다 친한듯?”
박일표는 말없이 노트북의 뚜껑을 닫았다. 초조함을 넘어서 화까지 나려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상태라 백승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쩍 노트북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기만 했다.
“오늘부로.”
박일표가 생긋 웃었다.
“쿨한 애인은 관둬야겠다.”
“와.. 진짜 너무한다. 모른척 한게 아니라 정말 모르고 있던 거구나.”
제갈택은 생각치도 못했던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친 범일태를 벙찐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 얼굴이 웃겼는지 풉 하고 웃은 범일태가 바로 옆을 지나가던 급사에게서 라임슬링이 든 잔을 하나 낚아채 제갈택에게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잔을 받아든 제갈택이 애써 담담한척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선배처럼 아버지 따라온거죠, 뭐. 가수 하는 조건이 이거였거든요. 공식적인 자리는 빠짐없이 참석할 것.”
제갈택은 칵테일 잔에 붙은 설탕 부스러미를 혀로 녹여먹고는 범일태를 째려보았다.
“삼진물산? 아니면 보람중공?”
“후자요.”
범일태의 담백한 대답에 제갈택이 짜증난다는 뜻으로 팍 인상을 썼다.
파티에서 자신을 이미 봤으면서 후배니 뭐니 가증스럽게 모른척 했다 이거지??
제갈택의 표정을 읽었는지 범일태가 먼저 선수를 쳤다.
솔직히 파티에서 몇번이나 마주쳤는데, 당연히 알아볼 줄 알았죠. 모르는 척 하고 있는데 먼저 아는척하기도 뭐해서요.
“가난하다며!?”
“소속사가 가난해요. 집에서 전혀 지원을 안 해줘서 연습생부터 굴렀단 말이에요.”
정말 고생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꼴을 보니 작정하고 속인게 맞다. 파티로비 한 가운데라 차마 큰소리로 욕도 못 내뱉고 제갈택이 씨근덕대자 범일태가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빨개지네요. 새삼 반했어요?”
“죽는다 진짜..”
그러더니 확 뒤를 돌아 자리를 옮긴다. 그렇게 튀게 생겼으면서 남들 주목을 받는건 그닥 좋아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구설수에 오르는게 싫은건지 공적인 자리에서만은 얌전한 모양이었다.
범일태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런 제갈택의 뒤를 따라붙었다.
“어디가요? 심심한데 이야기나 하지.”
“할 얘기 없어.”
와 진짜 단호하다, 단호박인줄. 그렇게 우는 소리를 내자 제갈택이 짜증난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왠지 기분이 좋네요.”
“매져냐?”
“곡을 준게 예전 친분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저와의 하룻밤이 좋아서.. 라는 거잖아요? 괜히 자부심이 느껴지고 막, 악!”
“닥쳐!”
“혹시 내가 너무 정곡을 찔러서, 아, 진짜 아픈데!”
제갈택의 딱딱한 구두코가 범일태의 정강이를 가격했다. 딱 소리가 날 정도로 제대로 맞았는지 악악대는 소리에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이 가볍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디컨 ‘제갈택’ & 뉴렘 ‘범일태’ 둘이 이렇게 친했나? ]
[뉴렘 범일태, 의외의 친분 과시]
[파티에서 둘만의 세계 - 제갈택, 뉴렘 범일태와 절친?]
[뉴렘 후속곡 선물까지? 제갈택 의외의 일면]
이와 같은 기사를 본 박일표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런지는 꿈에도 모른 채였다.
일표택인데 오리캐 비중이 더 커서 fail...ㅠ0ㅠ
제갈택은 자기가 박일표를 더 많이 좋아하는줄 아는데 사실 박일표도 지지않을만큼(!!) 제갈택을 좋아하고 있던 게 보고싶었는데.. 사실 이보다 더 길었었는데 밑도끝도없이 길어져서 중간 뭉텅이로 잘라먹었더니 일표가.. 일표 비중이.. 큽..
제제님 사랑합니다 ㅠ0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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