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야 시로는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잘못 봤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에미야 시로는 제발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길 빌며 천천히 눈을 떴다.
이럴 수가.
아무리 그가 눈앞의 현실을 부정해도 골목 안쪽 구석진 곳에서 딱 달라붙은 두 인영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는 잘 아는 두 사람의 키스씬을 목격한 것 치고는 무례할 정도로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는 자리를 피하고 그들을 못 본 척 하는게 예의라는것을 에미야 시로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엔 그들은 사이좋게 키스를 할 사이도 아닐 뿐더러 그런 사이가 되어도 키스를 할만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어째서 하필 저 둘이 자신의 눈에 띈 걸까? 뭔가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계략일까? 혹시 저주라도 받은 게 아닐까? 둘 중 한명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인데 자신이 그것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복잡하게 돌아가던 그의 상념은 둘 중 한명과 눈이 마주치면서 주춤 멈춰들었다.
언제부터인지 짙은 회색의 눈동자가 에미야 시로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필 저 사람에게 들키고 말다니! 시로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걸어와 남의 프라이버시를 훔쳐보다니 인성이 되먹지 못했다며 마구 빈정대겠지!
곧이어 날아올 언어의 폭격을 대비해 시로의 발걸음이 반걸음정도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 인물은 전혀 의외의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아예 에미야 시로를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
인간적으로 이런 상황이면 스킨십을 멈추고 눈을 마주친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게 당연하지 않나? 보란 듯이 상대방의 허리께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더 진하게 키스를 하는 경우는 대체 어느 나라 법도인가.
당연하지만 에미야 시로는 물론이고 아처와 키스를 하던 그 상대방까지 흠칫 놀랐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투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뒤척이는 듯 하더니 이내 포기한 듯 아처의 뒤통수를 껴안고 얼굴을 비틀며 혀를 섞는다. 영화에서나 보던 딥 키스! 평화로운 미야마 마운트 상점가의 골목에서 일어났다기엔 지나치게 외설적이라 더 보고 있기 굉장히 민망해졌다. 시로는 더 버티지 못하고 자리를 후다닥 피했다.
“......”
그래도 하필 저 두 사림이 왜?
기계적으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에미야 시로의 얼굴엔 물음표가 떠나질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아처는 남자를 연애상대로 볼 수 있게 된 걸까. 지금의 나로써는 절대 상상할 수 없어..
*
“그래서, 무슨 일이냐 꼬맹아.”
“윽.”
에미야 시로는 항구를 마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한가하게 낚싯대를 드리운 영령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는게 맞는 말일 것이다.
랜서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시로는 한참동안이나 입 속에서 말을 골랐다.
결국 호기심을 누르다 못해 여기까지 와버렸지만 어떤 식으로 서두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생 이런 주제로는 대화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일은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이다.
“그.. 며칠 전에 아처랑 같이 있던 걸 봤거든.”
대화하는 내내 낚싯대에 집중할거라고 생각한 랜서의 얼굴이 슬쩍 뒤를 향했다.
시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고의는 아니었어. 딱히 두 사람의 사생활에 간섭할 생각도 없고.”
“아.. 그땐가. 언제인지 대충 알겠다.”
랜서는 푸우, 하고 성의없이 담배연기를 뿜으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두 뺨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반응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민망해 할 줄은 알았는데 아주 큰 오산이었다.
이 담대한 대영웅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묻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이 주제에 관심이 한 톨도 없다는 듯 수면 위에서 일렁이는 찌에다가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왜?”
“신경쓰이는 점이 있어서..”
“아, 혹시 그거냐? 동성간의 스킨십은 이 사회에서 떳떳하게 드러낼 게 못 된다 어쩌구?”
“아니, 그건 개인의 취향이니까 나와는.. 물론 성별을 불문하고 공공장소에서의 스킨십은 늘 떳떳하지 못하다고 봐!”
시로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친 말에 랜서는 재미있다는 듯 목을 울리며 웃었다. 시로는 정말로 그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 묻기가 두려워졌다.
‘아처의 진명을 모르고 있는 건가?’
성배전쟁에서 몇차례나 부딪혔던 전적은 둘째치고서라도, 랜서, 쿠 훌린은 이미 한번 ‘에미야 시로’의 심장을 찔러 죽인 적이 있는 영령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 남자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도 설마 자신을 한번 죽인 남자와 키, 아니 스킨십을 하다니..?
‘진짜 변태 아냐..?’
랜서야 모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쳐도 아처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애초에 이해할만한 사람, 아니 영령은 아니었지만 정말 모르겠다. 그와 같은 길을 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 정도까지 괴리감이 느껴지면 나이를 먹는게 할아버지의 유전자에 대머리인자가 포함되어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무섭다.
“그런 것보단 왜 하필 그 상대가 아처인지가 궁금해서 온 거야.”
툭 내뱉고 나자 가슴의 무게가 1킬로그램은 줄어든 것처럼 시원했다. 고작 이 한 문장이 뭐라고! 그러나 랜서는 태연하게 손을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아, 걱정 마라. 딱히 그쪽 진영하고 함께하기로 한 건 아니니까.”
“아니, 그거 말고.”
“? 평소엔 사람들 눈 안 뛰는데서 하니까.”
“아냐! 그것도 아냐!”
“아 귀찮구만. 그럼 대체 뭐가 문젠데 그래.”
랜서는 정말 귀찮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런 반응이라니, 마치 내가 일방적으로 찾아와 쓸데없는 질문 따위를 하며 귀찮게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 같잖아?
정말로 대답을 해주지 않고 자리를 피할 모양인지 랜서는 느릿하게 낚싯대를 정리하고 담배 꽁초를 캔에 꾹 눌러 껐다.
“그러니까, 키스가 문제라니까!”
말해버렸어! 결국 아처와 랜서 둘이 키스를 하는 사이라는 것을 입밖으로 내서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최대한 직시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었는데..
시로가 잠시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사이 랜서가 짐을 어깨에 걸치며 툭 내뱉었다.
“별 것도 아니었는데?”
“별 게..!”
시로가 거의 반사적으로 랜서의 말에 츳코미를 거는 순간, 랜서의 손가락이 시로의 턱을 위로 살짝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쪼옥.
입술 위에 장난스레 도장을 찍은 랜서는 온 세상을 부정하기 시작하는 에미야 시로의 텅 빈 눈을 보며 재밌어 죽겠다는 듯 낄낄 웃었다.
“마력공급도 아니고, 그냥 이런 거였으니까 신경 꺼라, 꼬맹아.”
“......”
랜서는 소금기둥이 된 시로를 지나쳐 걸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시끄러운 꼬맹이를 입다물게 한 것도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붉은 궁병에게 간만에 한방 먹인 것도 통쾌했다.
그리고 랜서가 떠난 빈 항구에서, 시로는 뒤늦게 “어째서!?” 하고 외치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윽고 완전히 새하얗게 변한 에미야 시로의 입에서 작은 단어가 흘러나왔다.
“말랑말랑..”
얼스터의 대영웅쯤 되면 입술로 칼날도 막을 줄 알았는데, 말랑말랑했다. 그냥 사람 입술이었다. 감촉이 조금 좋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큰일 났다.
입술이 이렇게 말랑말랑하다면 키스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납득하고 말았어.. 게다가.
“마력이 부족한게 아니면 거기서 왜 키스했는데!?”
제일 중요한 것에 대한 대답은 날렵하게 회피했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영령!
뜻밖의 패배감에 시로는 크윽 하고 침음성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차마 저 궁병과 창병이 절찬리 연애중일지도 모른다는, 우주 저편의 진리와도 같은 끔찍한 사실은 차마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토오사카는 알고 있을까..”
모를 일이다. 본인조차 이 불가사의한 4일간의 고리 속에서 반복되는 시간보다 미스터리어스한 일이 또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