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정신을 잃었는지, 의식을 차려 보면 누군가에게 안겨 이동중인 불안정인 자세가 먼저 자각되었다.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올리기 전에 손끝과 청각에까지 의식을 확장시킨다.
제일 가까운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슴이 울려, 랜서는 아마도 자신이 그와 가슴을 맞댄 자세로 안긴게 분명하다고 느릿하게 떠올렸다.
“먼저 아처 쪽에서 마력이 소모되길래 전투 태세로 들어간 줄 알았지.”
“그랬군.”
“보구라도 사용했던 거야? 이쪽에 별로 강하지 않는 몹이 몰린 대신 아처랑 랜서가 수고했겠구나.”
“...뭐, 그렇지.”
“캐스터, 랜서는 언제쯤 정신을 차릴까?”
“글쎄. 아마 지금 곧?”
랜서는 눈을 감은 채로 뜨끔한 표정을 감추려 애를 썼다. 자세는 좀 불편하지만 팔은 단단해서 안정적이고, 어쩐지 온몸에 마력이 쭉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노곤노곤하니 좀 더 안겨 있어도 큰 문제는..
‘그래서, 이건 누구지?’
팔이 주인공이 누구인지 깨달은 순간 랜서의 눈이 저절로 번쩍 뜨였다.
양 팔로 자신이 늘어져있던 상체를 밀어내듯 벌떡 깨어나자 자신을 안고 있던 아처가 뒤로 휘청이며 비틀거렸다.
“랜서! 정신이 들어?”
“진정해라!”
네 녀석이 왜 나를 껴안고 있어!? 기겁하듯 다리를 버둥거리자 아처가 랜서의 상체를 나머지 한 팔로 확 끌어안으며 귓가에 뭔가를 소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랜서의 움직임은 급격하게 안정되었다.
마스터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처에게 끌어안긴 상태의 랜서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아직 조금 혼란스러운가?”
“아, 아아.. 생각해보니 아직 두 발로 걷기엔 조금 힘이 드 네 하 하 하..”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밋밋한 랜서의 연기에 캐스터는 웃기고 있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지만 마스터와 마슈는 그럴 수도 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랜서는 그 눈길을 피하듯 눈을 감고 얌전히 고개를 숙여 아처의 귀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빌어먹을, 뺨을 때려서라도 깨웠어야지!’
‘뺨은 물론이고 엉덩이까지 두들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거긴 왜 때려!’
랜서가 얌전해진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아처가 성해포로 둘둘 둘러놓은 하반신이 아직도 발가벗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대체 기절한 새에 얼마나 쥐어짰으면 몸 안에 남은 마력이 한톨도 없었다. 다행히 마스터로부터 마력이 정상적으로 제공되어 조금만 더 있으면 갑주를 재생성할 수 있을 테지만, 그때까지는 꼼짝 없이 이 궁병 녀석의 너른 가슴에 안겨 이동해야 할 판이다.
아주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아처에게 안겨 오는 동안 둘 사이에 창과 칼보다 살벌한 설전이 오갔다. 설전이라기엔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했지만 다행히 아처의 인내심이 바닥나 랜서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기 전에 랜서의 마력이 모여 아처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마터면 하반신 누드 상태 혹은 이 녀석의 품에 안긴 채로 레이시프트해 삼박사일동안 다빈치의 놀림감이 될 뻔 했다.
랜서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애써 감추며 손으로 허벅지를 탁탁 털었다.
“헹, 누가 네 녀석 신세를 질 줄 알고!?”
“그러게 말이다. 역시 거기 갖혀있었을 때가 훨씬 귀여웠는데 말이지.”
“큭...!”
무사히 던전을 공략하고 난 뒤 미리 설치해둔 영맥의 포인트로 이동해 칼데아로 귀환했다. 정신적으로 몹시 피곤하고 지쳐버린 랜서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모든 걸 잊고 잠에 빠질 생각 뿐이었다.
“윽...!?”
그러나 레이시프트로 인한 영자이동으로 칼데아에 도착한 순간 랜서는 칼에 찔린 것처럼 헛숨을 삼켰다. 역시 아직 몸이 성치 않은 거냐며 호들갑인 마스터와 진찰을 준비하겠다는 로마니를 만류한 랜서는 혀를 깨물고 자살하기 직전의 얼굴로 아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부엌으로 향하던 아처가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하고 반문하자 랜서는 그 녀석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으르렁댔다.
‘당장 따라나와.’
거의 속삭이며 녀석을 데리고 으슥한 복도로 빠져나왔다.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랜서가 무어라 입을 여는 사이 아처는 랜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밀어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이젠 아주 빈정대는 게 인이 박혔는지 무슨 소리만 했다 하면 저런 얼굴이다.
“미안하지만, 누군가와 달리 나는 일이 있어서. 볼일이 있다면 용건을 말하고 미리 약속을 잡아라.”
“......”
세상에 이렇게 재수가 없을 수가! 랜서는 중지손가락을 들어올려 아처의 얼굴에 대고 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이걸로 이 녀석의 뺀질한 눈을 찌르고 싶어졌다.
정말 곤란한 상황이지만.. 꼭 이 녀석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갑자기 회의감이 든다.
거칠게 멱살을 풀고 꺼져, 하고 중얼거리자 아처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는 시늉을 하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뭐, 기꺼이.”
“짜증나는 놈.”
제길, 제기랄!
잠깐이나마 저 녀석이 얌전히 제 말을 들어줄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같다. 랜서는 한 손으로 아랫배를 쥐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픈 건 아니었지만 다리를 움직일수록 뱃속에 든 구슬이 점점 더 안쪽으로 이동하는 느낌이 들어서 더 걷기가 싫었다.
방 안에 돌아가서 혼자 끙끙대며 이 구슬을 빼낼 생각을 하니 눈앞의 모든 게 비참하고 서러워져서 지나가던 붉은 궁병이나 붉은 궁병이나 붉은 궁병의 심장에 바람구멍을 두어개쯤 내 주지 않으면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랜서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는지 아처는 한쪽 눈썹을 위로 들어올리며 랜서의 앞으로 다시 다가왔다.
“답지 않게 약한 모습이군. 원한다면 의료반으로 바래다주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미쳤냐!?”
의료반에 가서 갑자기 뱃속에 구슬이 자라났다는 되도 않는 핑계라도 늘어놓으란 건가. 탐구심에 미쳐 불타는 다빈치가 영령의 새로운 배설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라도 시작해버리면 랜서는 수치심으로 죽어버릴 지도 몰랐다. 만약 빼낸 구슬이 아처의 마력으로 만들어졌다는걸 알아차리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잠깐만.’
생각해보니 이걸 굳이 밖으로 꺼낼 필요가 없잖아? 저 녀석이 투영으로 만들어낸 거라면 그냥 저 녀석이 없앨 수 있는 것 아닌가. 애초에 마술사가 자신이 투영해낸 물건이 남의 엉덩이 안쪽에 남아있다는 걸 모를 수가 있나?
‘속았어!?’
그렇다면 그때 던전에서도, 순순히 이 녀석이 시키는 대로 구슬을 낳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었다!
랜서의 눈매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지금도 일부러 모른 척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표정을 보니 진짜로 모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 랜서는 아처를 믿을 수가 없었다. 바닥을 찍다 못해 음수에 한없이 가까운 신뢰도는 쉽게 회복될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 봐.”
랜서가 아처를 부르자 그가 말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 움직였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싸가지가 없어 보여, 울화를 꾹 눌러참은 랜서는 이를 악물고 말을 내뱉었다.
“언제 없앨 거냐..”
“뭐?”
“구슬. 언제 없앨 거냐고 물었다.”
“......”
흉흉한 적의를 가지고 아처를 올려다보던 랜서는 아처의 움직임이 정물처럼 딱 굳는 것을 보며 천천히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당황한 얼굴로 쿠훌린을 바라보던 아처의 얼굴이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올라, 그 급격한 변화에 덩달아 랜서도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분명 다 빼냈..!”
“하나 덜 뺐어! 네 녀석이 넣은 채로 쑤셨잖아!”
“..젠장!”
아처가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는지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올리더니 랜서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랜서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너 어디 가냐? 하고 물었다가 아처가 걸음을 멈추고 홱 뒤를 돌아 자신을 노려보며 쏘아대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나! 알았더라면..!!”
“말하려고 했는데, 네 녀석이 먼저 뺀질댔잖아!?”
“그건, 그..!”
“선약이 없어서 힘들다던게 어디의 누구시더라.”
“미, 미안하다..”
갑자기 풀 죽은 어린아이처럼 변한 얼굴에 랜서는 속이 거북한 얼굴로 고개를 틀었다. 느닷없이 저런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가슴이 울렁대는게 체했을 때와 같은 증상이었다. 저 자식이 얼마나 꼴보기 싫으면 이렇게 속이 불편할까!
“됐으니까 그냥 여기서 없애.”
랜서는 찡그린 얼굴로 손을 털어 아처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나 아처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지금 싫다고 한 거냐? 어이가 없어 느리게 눈을 끔벅거리고는 스산한 얼굴로 창을 들어올려 중얼거렸다.
“심장에 바람구멍이 나면 생각이 바뀔 거다.”
“기다려라 랜서!”
미지근한 살해협박 정도가 아닌 진심 가득한 살해예고 앞에서 아처는 황급히 양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지금은 없앨 수가 없다! 영자소환과정에서 그것이 네 몸과 함께 재구성되어버린 바람에..”
“그래서?”
“먼저 빼낸 다음에 부수는 방법 밖에는..”
“......”
그렇게 용을 써도 빠지지 않던 구슬이었다. 그런데 아처가 구슬을 빼지도 않고 그 큼직한 거시기로 마구 박아댄 덕분에 그때보다 훨씬 위로 밀려올라가 손가락을 집어넣어도 만져지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자신의 뱃속에 이상한 물건을 집어넣은 범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뭘 어쩌겠다고? 그게 말처럼 쉬우면 내가 여기서 널 붙잡고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겠냐..?
쿠훌린이 쥔 창에 어린 붉은 기운이 점차 강해졌다. 아처는 쿠훌린의 눈이 반쯤 맛이 간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끝까지 미뤄둔 선택지를 손에 쥘 수밖에 없었다.
“진정해라, 쿠 훌린!”
“그 심장 받아가마..”
아처의 눈이 질끈 감겼다. 랜서의 손에 들린 창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것과 그가 투영한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는 건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보구의 영창을 하던 중 배를 움켜쥐고 웅크린 랜서에게 가까이 다가간 아처는 구슬이 빠진 뒤라면 기꺼이 그에게 목숨을 내놓겠다는 결심을 하며 그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아들었다. 그 야릇하고 민망한 자세에 랜서는 부들부들 떨리는 고개를 들어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
“너, 너 진짜 죽여버릴..”
“구슬을 빼는 게 우선이다.”
“주, 윽, 흣..!”
뒤로 얻는 쾌감에 이미 익숙해진 몸이 잘게 떨리며 혀끝이 둔해지기 시작한다.
랜서의 결장 끄트머리에서 진동하는 구슬 덕분에 목숨을 구한 아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마이룸으로 직진했다. 랜서의 수치심보다 기동력을 우선한 것은 갑작스런 소란에 무슨 일인가 하고 복도로 와글와글 나온 다른 서번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 덕분이었다.
아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랜서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나중에 캐스터가 한동안 뭐가 성해포고 뭐가 얼굴이었는지 도통 분간할 수가 없었다며 빈정거릴 정도였다.
애매한 분량..!ㅇ<-< 그냥 벽에 끼인 랜서가 보고싶을 뿐이었는데 분량이 막 늘어나버렷내요 흑흑 이 정신나간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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