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손을 들어 이마를 한번 쓱 훔쳤다. 머리를 세워 시원하게 드러낸 이마엔 벌써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때는 봄, 아직 초여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날씨였지만 번쩍번쩍 빛나는 은색의 판금갑옷을 갖춰입고 건틀렛과 망토까지 차려입은 모습으로는 확실히 더울 만한 날씨였다.
흰색과 검은색의 모발을 한껏 세워 올린 남자는 손에 들고 보던 양피지를 둘둘 말아 허리춤에 찬 가죽가방에 집어넣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슬슬 마을이 나와야 하는데..
“오오!”
울창한 숲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만 빙 돌던 남자는 이내 사람 여럿이 다닐만한 길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여기가 그 마을이구나!”
“파아-! 이거 물이 정말 시원하군!”
“어이구, 기사님이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로..”
마을에 들어선 남자는 마을 주민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과 허리에 멋드러지게 찬 장검, 그리고 윤이 나는 망토는 남자의 신분이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왕국 근위기사단의 제 2기사단장인 보쿠토 코타로는 잔뜩 주눅든 마을 촌장에게 시원하게 웃어보였다.
“하하, 그야 자네들이 영주님에게 탄원서를 올렸지 않나!”
“예? 예, 물론 그랬습죠!”
“근위기사단들은 몇년에 한번씩 무사수행을 가야 해. 마침 이쪽 지역으로 왕국민을 도우러 온 김에 영주님의 부탁을 받고 내가 온거야. 대체 이 평화로운 마을에 대체 무슨 고민이 있지?”
그 말에 촌장집에 모여있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상에! 왕궁의 기사님이 직접 오시다니! 촌장댁의 낡은 창틀 밖에서 기사님을 훔쳐보던 악동들은 잔뜩 신나서 전쟁놀이를 하기 위해 나무막대기를 주웠고 기사님의 훤칠한 생김에 마을 처녀들의 가슴에 봄바람이 불었다.
“듣자 하니 사악한 마법사가 있다지?”
“예, 저기 숲 안쪽으로 성이 보이십니까?”
“호오..”
보쿠토는 촌장의 굽은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짙은 수해 너머로 뾰족한 성의 지붕이 튀어나와 있었다. 숲 한가운데에 지어졌다 생각되어지지 못할 정도로 크고 웅장해보이는 성이었다.
“저기엔 무서운 마법사가 살고 있습죠.. 그동안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다만은..”
그러나 몇달 전부터 숲속에서 검은 큰 짐승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때마침 마을의 몇 없는 가축들이 야생동물에게 습격을 당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달 전에는 밤마다 짐승 우는 소리가 들리고 불을 뿜으니 마을 사람들이 무서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사흘 밤을 꼬박 걸어가 영주에게 탄원을 넣었다.
“다행히 요즘은 밤중에 우레가 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말입니다.. 종종 닭이나 병아리들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요.”
“그렇군!”
보쿠토는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차림 음식 중에서 제일 가까이 있던 빵을 크게 이로 베어물었다. 평소 먹던 부드러운 빵과는 달리 거친 식감에 목넘김도 좋지 않았지만 시장이 반찬이었다. 염소젖으로 만은 퀴퀴한 치즈와 빵으로 대충 배를 채운 보쿠토는 촌장이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들고 숲에 난 길로 떠났다.
“아이구, 미치겠네. 자고 내일 떠나라고 할 때 그러마 할껄 그랬나.”
그리고 현재 보쿠토는 숲 한가운데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가죽 물통의 마개를 따고 있었다. 마을에서 봤을때는 상당히 가까운 성인줄 알았는데, 굽이굽이 난 숲길을 가서 그런지 아직도 성은 멀기만 했다. 밤중에 숲을 걸을 기술도 용기도 없으니 이곳에서 밤을 지내야 하는데 보쿠토는 아무런 도구도 없었다.
아무리 왕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라 해도 자는 동안 산짐승의 습격을 받으면 위험한 것이라, 보쿠토는 슬슬 본격적으로 밤을 지샐곳을 알아보야야 했다.
“가진 건 부싯돌 정도인가..”
급한대로 나뭇가지와 손수건을 이용해 횃불을 만들었다. 적당한 바위나 굴이라도 좀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숲길을 이탈할 수 없으니 길을 따라 죽 걷는다. 수도와 달리 이 울창한 숲은 아직 해가 채 지기도 전인데도 벌써부터 짙은 음영을 드리웠고, 밤을 사는 짐승들의 활발해진 소리가 조용한 숲 사이에 나직하게 울렸다.
“이거 조금 위험한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지만 횃불에 미친 기사의 눈동자는 금색으로 번뜩이며 주위를 날카롭게 흩었다.
사람의 눈동자는 야행성 동물에 비해 안광이 강하지 않다고 하는데, 남자를 보면 꼭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밤의 숲이 무섭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그는 곧 숲 안에서 작은 불빛을 발견하고 어..? 하며 눈을 깜빡깜빡 움직였다.
“헤이헤이헤이! 이봐!”
숲길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었다. 보쿠토는 무성히 자란 덤불을 제치고 성큼성큼 걸었다. 곧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공터와 함께 작은 나무 오두막이 나타났다. 작은 불빛은 바로 그 집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혹시 사람 있나!? 잠깐 나 좀 도와줘!”
보쿠토가 주먹으로 나무문을 막 두드리기 전에, 먼저 문이 끼익 열렸다. 보쿠토는 횃불을 들지 않은 손을 어정쩡하게 올리고 집 안에서 나온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런 시골 촌구석 숲 속의 오두막에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멀끔한 남자였다. 키는 보쿠토와 비슷하거나 조금 큰 것 같았지만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닌지 피부는 흰 편이었고 조금 마른 편이었다.
입고 있는 검은 옷은 시골에서 흔히 입는 아마색이나 갈색의 저렴한 천이 아닌지 약간 광택이 나고 있었다. 남자는 서늘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이 마치 자신을 비난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구?”
남자의 저음은 깜짝 놀랄 정도로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보쿠토는 살짝 열린 문 틈으로 반만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다 퍼뜩 대답했다.
“숲에서 맨몸으로 밤을 새게 되었거든! 헛간이라도 괜찮으니 좀 빌려줄 수 있어? 사례는 할 테니까.”
“흐음.. 들어와.”
보쿠토는 들고 있던 횃불을 바닥에 비벼 끄고 남자를 따라 문 안으로 몸을 옮겼다.
집 안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어보였다.
“현관에서 먼지 털고 들어와.”
막 안으로 발을 내딛은 보쿠토는 머쓱한 얼굴로 갑옷과 부츠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나뭇잎이 잔뜩 묻은 망토를 벗어 문 옆의 옷걸이에 걸었다. 아마도 저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외투 옆이었다.
보쿠토는 자신도 모르게 콧잔등을 킁, 하고 약하게 씰룩거렸다. 향긋한 약초 냄새에 섞여 정제되지 않은 기름 냄사와 아교 냄새같은게 섞여 묘한 향이 집안을 메우고 있었다.
남자가 손바닥만한 화로 안에 향료로 보이는 마른 풀을 넣고 뚜껑을 닫자 향긋한 냄새가 짙어졌다. 그는 보쿠토의 허리에 매달린 장검을 보고 물었다.
“흐음.. 기사님?”
“응. 맞아. 너는 이곳에서 사는건가?”
“보다시피. 뭔가 요깃거리라도 좀 드릴까나?”
“오오. 부탁해!”
남자의 집 안은 신기한 것이 많았다. 벽에 사슴 박제 따위가 걸려있는 걸 보니 사냥꾼인가 싶었지만 그런것 치고 활이나 올가미 따위의 도구는 보이지 않았고 가지런한 선반이나 낡았지만 꽤 화려만 무늬의 양탄자 따위가 집 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너무 집을 힐끔거리지 않으려 했지만 유리로 만든 램프며, 정체모를 것들이 잔뜩 든 병들을 보니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데 너는 사냥꾼인가?”
남자는 부엌의 화덕에서 검은 솥의 뚜껑을 열었다. 진한 우유 냄새가 나 그곳을 돌아보니 남자는 낡은 그릇에 야채와 고기가 듬뿍 든 스튜를 덜고 있었다.
“아니, 내가 사냥꾼으로 보여?”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숲에서 사는 자들은 사냥꾼들 아닌가?”
“내가 이곳에 사는건 이 숲의 약초 때문이야.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질 좋은 약초가 많거든.”
오오! 약초꾼이었구나. 보쿠토는 그렇게 납득하고는 이내 남자의 정체에 대해 궁리하던 것을 머리에서 날려버렸다.
남자는 식탁에 푸짐한 스튜 한그릇과 밋밋한 맛의 비스킷을 차렸다. 보쿠토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수저로 크게 한술 떠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음식을 집어삼켰다.
따뜻하고 기름진 음식이 위장에 닿자 몸에 활력이 돌았다. 작은 식탁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보쿠토에게 등을 보이고 화덕에 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였다.
“기사가 아니라 걸인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흠흠, 사실 배가 많이 고팠거든. 고마워.”
남자가 끓는 주전자 안에 찻잎을 넣고 보쿠토의 맞은편에 앉았을 때 보쿠토는 이미 스튜 한그릇을 거의 다 비운 뒤였다. 남자는 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찻잔 두개를 가져와 식탁에 올렸다. 이런 시골에서 보기엔 꽤나 고급스런 잔이었다.
“아니 정말로, 마을 촌장이 대접했던 빵은 먹기가 너무 힘들었거든.”
“아항.. 귀족 도련님인가 봐?”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기색은 애송이를 보는 눈빛과 비슷해서 보쿠토는 울컥 인상을 찌푸렸다.
“도련님이라니 실례야. 이래뵈도 왕궁 제 2근위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몸이다.”
“호오? 정말? 놀랍네. 거긴 실력 좋은 기사들만 입단할 수 있다는 곳 아냐?”
“으흠흠. 그렇지. 아, 자기소개가 늦었네. 나는 보쿠토 코타로라고 한다.”
“쿠로오라고 불러줘.”
남자, 그러니까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곤 찻물을 따라 보쿠토에게 건넸다. 찻잔을 쥔 보쿠토는 기대 이상의 향기에 찻물을 들고 눈을 감았다. 쿠로오도 보쿠토처럼 잠시 눈을 감고 차향을 음미하고는, 입으로 차를 머금어 숨을 한번 내쉬고는 작게 목울대를 넘겼다.
“그럼 기사님?”
“보쿠토로 충분해.”
“그럼 보쿠토씨. 이곳엔 무슨 일로 온거야?”
빙글빙글 웃으며 그렇게 웃는 남자의 모습을 본 보쿠토는 살짝 놀랐다. 수도에서 온 기사라는 것에 벌벌 떨던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약초꾼이라고 하지만 수도에서 정식으로 약학을 배우기라도 한 걸까..
“나는 숲쪽 성에 사는 마법사에게 볼일이 있다.”
“오야?”
“그래서 말인데, 저 성까지 길안내를 좀 부탁해도 될까?”
보쿠토는 일단 그렇게 묻고는 슬쩍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혼자 가기엔 숲길도 흐릿해지고, 이 깊은 숲속에 종자 한명 없이 달랑 들어가는것도 불안했다. 약초꾼이라면 이 근방 지리는 잘 알겠지.
“마법사에겐 무슨 일인데?”
“그건.. 저 성에 도착하면 알려주지.”
사악한 마법사를 퇴치하러 왔다고 하면 지레 겁먹고 도망쳐버릴 수도 있다. 보쿠토는 눈 앞의 이 남자가 겁먹은 모습이 잘 상상되지는 않았으나,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리고는 그렇게 납득했다.
“흐응.. 물론 보수는 지급하는 거지?”
“물론이지!”
“그럼 좋아. 내일 아침 출발하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또 싱긋 웃었다. 웃는게 버릇인가? 웃을 땐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부드러워지는 눈매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보쿠토는 오른손을 쭉 내밀며 쾌활하게 외쳤다.
“그럼 잘 부탁한다!”
“으응 뭐.”
쿠로오는 악수하기 위해 내밀어진 보쿠토의 손등을 한번 톡 치고 이내 그릇을 치웠다. 악수가 거절당했는데도 이상하게 면구스럽지 않은 제스처였다.
“식당은 따로 없고, 합숙관 1층에 도시락을 배달시켜 두었으니 하나씩 가져다가 먹으면 된다. 분리수거 봉투는 현관 앞에 있으니 깨끗히 관리하도록.”
“수고하셨습니다!”
네코마와 후쿠로다니의 감독님들은 허허 웃으며 체육관을 나서고, 남은 선수들은 각자 식사를 하러 가거나, 자율연습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신젠과 달리 체육관을 개방할 수 있는 시간은 저녁 9시까지였으므로 저녁밥을 두시간정도 미루고 마저 연습을 하고자 하는 인원들이 대다수였다.
쿠로오는 의식적으로 보쿠토를 피하고 있었다. 다행히 보쿠토도 방금 전의 그 소동이 부끄러웠던지 헤이헤이! 하고 부르는 소리 없이 조용했다.
리시브 연습은 지겹다며 뿌엥 우는 리에프의 뒷덜미를 잡아다 야쿠 앞에 대령해놓은 쿠로오는 체육관 입구에서 자신을 손짓해 부르는 후쿠로다니의 매니저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아, 도시락이 도착했는데 싸인을 할 사람이 없어서요..”
쿠로오는 감독님이나 코치님은 어디 가신거냐 하는 물음을 하는 대신 씩 웃으며 그럼 갈까?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노란 올빼미의 시선이 그런 쿠로오의 뒤를 쫓았다.
코치님들과 감독님들이 친목을 다지러 인간관계의 윤활유(술)을 들이키는 걸 방해하는 대신 쿠로오가 능숙하게 나서 배달직원에게서 도시락을 인수받고 싸인을 했다. 가끔 도시락 배달을 시켜먹곤 해서 직원과도 얼굴을 아는 사이였다.
“합숙관으로 옮기면 되는거지?”
쿠로오는 끙차 하고 작게 소리내며 도시락을 들어올렸다.
“아니에요! 제가 들께요!”
“귀여운 매니저양에게 이런걸 들게할 수는 없지~ 그럼 옆에 그거 들고 따라와줄래?”
“어머나.. 믿음직스럽네요!”
“제가 상냥한건 하루이틀일이 아니랍니다.”
“꺄아~”
소란스럽게 맞장구치는 여자 매니저의 재잘대는 소리는 듣기 좋았다.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느슨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버려 두었다.
여자에게 성욕을 느끼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모습은 굉장히 귀엽고 보기 좋다고 생각이 되어버린다. 둥글고 작은 어깨와 섬세한 손끝, 통통 튀는 목소리 같은 것.
보통 남자들은 이런 것에 사랑을 느끼겠지.
도시락을 옮기고 뒷목을 주무르며 체육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녁놀에 길쭉해진 사람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을 것을, 오늘은 이 학교에 타교생이 연습차 와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미 늦은 저녁시간이고 주변엔 길을 물을 사람도 없다. 혹여나 남의 학교에서 길을 잃거나 하면 상당히 부끄럽겠지. 혹시 모르니 보고 갈까 하며 쿠로오는 내면의 오지랖을 이기지 못하고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아시..! 나, 정말로!”
어라? 쿠로오의 눈이 깜박였다. 지나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또 보쿠토 풀죽음 모드 가동인가? 별 생각없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다가가던 쿠로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좋아하나봐..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어.. 라?
“보쿠토 선배, 잠시 진정해보세요.”
“방금 전에도 난..”
쿠로오는 빙글 뒤로 돌았다. 기계적으로 발걸음이 척척 앞으로 내딛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거지.
“윽..”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 집요하게 들려왔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순간 갑자기 머리에 열이 확 몰리며 흰자위가 뜨거워졌다. 눈앞이 일렁거렸다.
보쿠토는, 그러니까. 아카아시를..
남의 학교에서 고백이라니 배짱도 좋네- 따위의 생각도 들지 않았다.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잠깐, 내가 충격? 대체 왜?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꿈이란 잠자는 동안에 깨어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일을 겪는 정신현상이다.
꿈의 표상은 형상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다.
내가 꾸는 꿈은..
보쿠로 코타로가 나를 좋아해주는 것이었어.
하, 하고 쿠로오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보쿠토 코타로는 남을 기분좋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과 배구이야기를 하면 재미있다. 네트를 마주보고 서면 승부욕이 돋는다. 같은 코트에 서면 그 등을 하염없이 보게 될 정도로 믿음직스럽다. 함께 있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왜 내가 차인 기분이지.”
뭐냐 이거. 고백도 하기 전에 차였어?
입밖으로 소릴 내어 말하니 큭큭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고백을 받아들일까? 쿠로오는 어느새 학교 뒷편까지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곤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실연의 아픔에 눈물이라도 흘러야 하는데 눈가는 욱신거릴 뿐 건조하기만 했다.
쿠로오는 손을 올려 자신의 입매를 매만졌다. 의식적으로 늘 미소를 짓기 때문에 딱딱하게 굳은 입매는 낯설다. 쿠로오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 한번 씩 웃어보았다. 봄의 밤날씨가 지독하게 춥게 느껴졌다.
“쿠로? 어디 갔다와?”
“후쿠로다니 매니저랑 뭐 하고 온거에요!?”
“휘익-! 인기남!”
대충 멍한 머리를 정리하고 체육관으로 돌아오자 갑자기 체육관 안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버렸다. 쿠로오는 다들 뭡니까~ 하며 발치로 굴러온 배구공을 집어들었다.
“그치만 봤다구요! 아까 매니저랑 같이 나갔죠~”
짖궂은 일학년의 목소리에 쿠로오는 의식적으로 미소지으며 그쪽으로 배구공을 휙 던졌다.
으앗! 자자~ 헛소리 할 시간에 연습, 연습!
“그냥 도시락 받으러 갔다온거야.”
“도시락을 한시간씩이나? 밥부터 지었어요?”
푸하핫, 하는 웃음이 터져나온다. 쿠로오는 설마 자신이 한시간동안이나 멍을 때리고 있었을꺼란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당황한 얼굴로 볼을 긁었다.
“지금 벌써 여덟시야?”
“어어? 진짜 수상한데요! 켄마 선배! 이거 진짜에요?”
부원들이 껀수를 잡았다는 듯 와르르 달려들었으나 쿠로오는 가벼운 손짓으로 소문에 달려드는 부나방들을 퇴치해버렸다. 방법은 몹시 간단했다. 전원 리시브 30회! 라고 박력있게 한번 외쳐주면 되는 일이었다.
아마 그 매니저는 저녁 먹고 곧장 씻기라도 했겠지. 이런 식으로 오해가 얽히면 그녀에게도 좋을 것은 없을 것이다. 네코마의 부원들이야 대충 처리한다 해도 후쿠로다니의 부원들에게는 확실히 그게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해두는 편이 예의일 것 같았다.
“이봐, 나 매니저랑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체육관 한 구석 후쿠로다니 멤버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가자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어째 좀 조용한데? 평소 귀가 떨어져나갈 것처럼 소란스러운 후쿠로다니 답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폭풍의 동력원인 보쿠토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벽에 공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아카아시한테 차이기라도 한 건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해버리곤 쿠로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최악. 제멋대로 꿈에서 친구랑 섹스해버리고는 친구의 실연을 바라다니! 쿠로오씨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쿠로오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후쿠로다니의 선수들에게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혹시나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신경 쓰지 말라고-”
파앙! 그때 보쿠토가 쳐낸 공이 벽에 상흔을 남기고 쿠로오의 가슴께로 튕겨올랐다. 반사적으로 그 공을 잡아채자 보쿠토가 벽에서 빙글 몸을 돌려 쿠로오에게 시선을 보냈다. 턱끝에서 땀을 훔치며 이쪽을 바라보는 그 얼굴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웃음기를 걷어낸 날것의 시선이었다.
“쿠로오. 잠깐 나랑 이야기좀 하..?”
그 눈길을 정면으로 받은 쿠로오가 섬찟한 기운에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는 순간 뒤에서 쿠로오! 하고 다급한 목소리가 터졌다. 평소보다 조금 느린 반응으로 뒤를 돌아보고 난 뒤, 쿠로오는 별을 보았다.
쿵-!
시...발 하는 소리가 바로 그가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소리였다.
키 180이 넘는 건장한 남자가 관자놀이에 공을 맞고 쓰러지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모두가 벙찐 사이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보쿠토였다.
“쿠, 쿠로오!! 죽지마아!!!”
“불길한 소리 하지 마세요. 공에 맞아 죽을 리가 없잖아요.”
“그, 그런데 지금 쓰러지면서 엄청난 소리가..”
그 순간 사탕에 꼬이는 개미들처럼 선수들이 우르르 쿠로오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보쿠토는 얼른 쓰러진 쿠로오를 아카아시의 도움으로 등에 업었다.
주변을 정리한 것은 네코마의 세터인 켄마였다.
“보건실은 문을 닫았지만 당직실에 구호상자가 있어.”
“어디야, 거기!?”
“다들 침착하고 연습 재개해. 코치님한테는 내가 연락할 테니까.”
당직실은 비어 있었다. 운동부에서 합숙을 하는 날이면 보통 그날의 당직번은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담당하게 되어 있는데, 오늘은 술자리를 늦게까지 가지고 합숙소의 방으로 가실꺼라 했다.
켄마는 당직실 앞 화분을 들어올려 익숙하게 열쇠를 꺼내들고 당직실의 문을 열었다.
사람이 잘 쓰지 않는 곳인지 옅은 먼지 냄새와 컨테이너 박스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보쿠토는 자신의 등에 볼을 비비며 끙.. 하고 신음하는 쿠로오를 벽에 세워 앉히고 켄마를 도와 얼른 이불을 깔아 그 위에 쿠로오를 눕혔다.
선반을 뒤적거리던 켄마가 파스를 하나 들어올리고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근육통에 직빵이라는 그것을 뜯어 쿠로오의 이마 위로 찰싹 붙였다.
“이거 효과 있는건가..”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고.”
그런가!
켄마는 잠시 눈을 내려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이마에 붙인 파스 때문에 눈이 따가운건지 얼굴을 찡그리는게 곧 깨어날 것도 같았지만 그보다는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을 택했다.
“며칠 전에도 공에 머릴 맞았어.”
“응? 뭐? 쿠로오 말야?”
“응. 걱정되니까 구토같은걸 하면 고갤 옆으로 돌려줘.”
“뭣!? 그럼 앰뷸런스를 불러야 하잖아! 쿠로오오!!”
“시끄러워..”
켄마는 쿠로오가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보쿠토를 뒤로 하고 당직실 문을 나섰다. 친절하게 방문을 잠가주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당직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서있던 아카아시와 짧게 눈을 마주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렇게 손이 많이 가게 하다니.”
아카아시의 한숨과도 짧은 중얼거림이 켄마의 귀를 스쳤다. 켄마는 말없이 당직실을 한번 뒤돌아보았다.
배구공에 사람이 맞고 기절할수 있습ㄴ디ㅏ.. 고등학교 때 진짜로 친구가 5초정도 기절했었거든요....((((사실고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