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토 코타로는 끝내주는 스파이크를 성공시킨 뒤, 늘 자신의 세터인 아카아시를 쳐다보는 버릇이 있다.
“......”
뭘까나, 이딴 버릇 따위 눈치채서 어쩌라고.
“쿠로. 서브.”
쿠로오는 봤냐! 봤냐고 아카아시! 라고 외치는 보쿠토에게서 시선을 떼어 켄마의 손에서 공을 받아들였다. 아직 이쪽은 게임중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틀어 잡념을 떨쳐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고 공을 위로 던진다.
“점프 서브야!”
맞은편 코트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화악, 유연하게 뒤로 젖혀진 허리가 탄력있게 굽혀지며 라인 안쪽으로 아슬아슬하게 공을 쏘아보낸다. 신젠 고교의 리베로가 아슬아슬하게 공을 받아내지 못하고 바닥에 배를 깔고 미끄러졌다.
“오오! 주장! 멋져!”
“한번 더 서브!”
가볍게 튕겨온 공을 다시 받고 손바닥 위로 가볍게 굴린다. 다시 공은 위로 높게 떠올랐다. 가볍게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쿠로오의 몸이 다시 당겨진 활시위처럼 유연하게 긴장하기 시작한다. 두 코트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모인 가운데 잔뜩 긴장한 상대편 신젠 고교의 선수들이 무릎을 굽히고 리시브를 준비했다.
탕, 하고 가볍게 튕겨진 공이 네트 안쪽으로 아슬아슬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와악!”
“페인트!”
이번엔 아슬아슬하게 공을 띄운 신젠 고교가 공을 연결했으나 자세가 무너진만큼 위력적인 공격이 들어오지 못했다. 예이~ 이죽거리며 코트 안쪽으로 뛰어들어온 쿠로오는 A속공으로 스파이크를 날리는 토라의 뒤에서 블록에 튕겨진 공을 받아내 켄마에게 보냈다. 그 직후 켄마의 능숙한 투어택으로 마침내 스코어는 결정되었다.
“저걸 받아냈어!”
“역시 네코마!!”
“25-21, 네코마 승!”
신젠 고교의 녀석들이 끙, 하며 플라잉 코트를 시작하는 것을 이죽거리며 내려본 쿠로오의 얼굴은 악당 그 자체였다. 타올을 목에 건 쿠로오는 이제 막바지로 치닫는 우부카와와 후쿠로다니의 시합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다음 시합은 후쿠로다니와 우리인가?”
“저쪽도 후쿠로다니가 이기겠는데.”
“쳇. 이번엔 이기자!”
통산 11승 15패, 이번 여름방학 합숙 현재까지의 스코어였다. 후쿠로다니 다음으로 승률이 높은 네코마였지만 결정력이 부족한 네코마로써는 후쿠로다니에게 한발 밀리는 감이 있었다.
25-22의 스코어로 후쿠로다니가 우부카와를 이긴 뒤 간단히 코트를 정비해 네코마와 후쿠로다니가, 그리고 카라스노와 신젠이 코트를 채웠다.
“제대로 막아! 블록!”
“이익!”
짙은 땀냄새와 그보다 더 짙은 승리의 냄새.
고작 공놀이일 뿐인데도 이 공을 올리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후회되는 것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몸을 바닥 위로 나동그라뜨렸다.
“켄마!”
야쿠의 연계로 이어진 공을 켄마가 받자 마자 쿠로오는 다리를 굽혀 점프했다. 히죽, 웃으며 정면으로 점프해 블록하는 보쿠토와 눈을 마주치자 마찬가지로 형형한 눈으로 살벌하게 웃음을 띄운다. 쿠로오의 스파이크가 보쿠토의 손끝을 맞고 아웃되어 그대로 득점에 성공했다.
“예이~”
“크윽! 오늘 컨디션 장난 아니잖아, 쿠로오!”
“아아? 이게 내 평소 실력입니다만?”
그게 진짜냐아! 라며 보쿠토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승부욕을 잔뜩 불태웠다.
코트 위의 열기가 치열해진다. 네코마와 후쿠로다니는 엎치락 뒤치락 점수 차이를 서로 2점 이상씩 벌리지 못하고 그대로 20점대까지 스코어를 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후쿠로다니 공격에 전위, 보쿠토. 네코마의 전위 쿠로오.
로테이션상 최고의 공격력이 되는 이 상황에서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쓰지 않을 리 없다. 쿠로오는 바짝 긴장하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햩았다. 이글이글하고 마주 웃는 보쿠토의 얼굴에는 열정이나 승부욕과도 비슷한 얼굴이 불타고 있었다. 저 눈을 보면 늘 침착한 쿠로오로써도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쿠로오는 자신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로 보내!”
군더더기 없는 A퀵! 화악 하고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보쿠토의 눈동자에 정신이 팔린 쿠로오가 반박자 늦게 팔을 들어올리고 점프했으나 날카로운 스파이크는 그대로 쿠로오의 팔을 제치고 타앙! 무자비하게 그 공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당혹한 쿠로오의 얼굴을 뚫을 듯이 노려보며 외쳤다.
“헤이헤이헤이!!”
“크읏!”
“어떠냐 쿠로오!! 이 몸의 스파이크가아!”
“아아-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네, 진짜.”
망할, 이게 공식전이었으면 교체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미스다. 켄마의 눈초리가 볼을 꾹꾹 누르는 느낌에 쿠로오는 하하.. 하고 억지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보쿠토의 금색 눈동자가 화르륵 불타올랐다.
보쿠토 코타로는 끝내주는 스파이크를 성공시킨 뒤, 자신의 세터인 아카아시를 쳐다보는 버릇이 있다.
일종의 의식이랄까, 버릇과도 같았다. 밤새 묻은 꿈의 잔재를 땀과 함께 털어내는 것처럼 쿠로오는 오늘은 먼저 가, 켄마. 라고 말하며 가방을 매고 뛰었고, 쿠로오의 버릇을 아는 켄마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하철로 혼자 등교를 했다.
오전 일곱시도 되지 않은 등굣길은 살짝 어두웠고,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은 모두 예상보다 추운 날씨가 당황스러운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걸었다.
낮이면 여름인가 싶을 정도로 공기가 훈훈해지지만 아침공기는 아직 눈동자를 시리게 만들 정도로 찼다. 쌀쌀함을 꾹 참고 오분쯤 달리면 열이 올라 입김이 허옇게 자국을 남긴다. 이마에 땀에 작게 배어나오다가 아직은 차가운 공기에 금새 식어버렸다.
교문이 보일 정도까지 오자 슬슬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 몇몇은 쿠로오를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평소라면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 그였지만 쿠로오는 표정을 무섭게 굳히고는 발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 뒷모습이 제법 사나워 손을 흔든 아이들은 머쓱하게 뒷목을 슬며 어, 못 봤나보다. 하고는 손을 내린다.
사실 쿠로오의 생김를 표현하자면 잘생겼다거나 단정하다기보다 날카롭거나 험상궂다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거기에 큰 키에 건장한 체구까지 더해져 본인도 그걸 아는지 늘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곤 했지만 무섭게 집중할때의 그의 얼굴은, 그러니까 그의 절친한 친구의 말을 빌자면
‘진짜, 진짜 험악하게 생겼다고오!’
그 순간 펑! 하고 쿠로오의 안면과 충돌한 배구공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나며 체육관 안의 이목이 몽땅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헐....”
“쿠, 쿠로상!?”
“허억! 괜찮아여!?”
막 체육관 문을 열고 발을 디딘 순간 포탄처럼 쏘아진 배구공이 쿠로오의 이마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방금 디딘 발이 공중에 붕 뜨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두세걸음 물러난 쿠로오가 뒤로 젖혀진 고개를 확 앞으로 돌렸을 때 리에프가 딸꾹, 하고 횡경막의 경련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작은 손이 쿠로오의 티셔츠 자락을 잡아당겼다.
“쿠로, 괜찮아?”
“어? 아아.. 켄마. 안 괜찮아. 골이 울려.”
다행인 것은 안면에 정통으로 충돌했다면 코뼈가 내려앉았을 스파이크가 이마만 치고 튕겨나갔다는 걸까. 코치님은 쿠로오의 이마와 뒷목을 몇번 만져보고는 아침 연습에서 쫓아냈다. 양호실부터 들러 필요하다면 1교시까지 쉬라는 의미였다.
“머리는 위험한데다, 무방비 상태에서 목이 충격을 받았어. 저녁 연습도 상태 봐서 참가해라.”
“쿠로 선배! 정말 죄송해요..!!”
리시브도 안되는 주제에 보쿠토처럼 크로스를 쳐보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나선 리에프가 범인이었다. 미안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연신 사과하는 리에프에게 괜찮다며 손짓하고는 쿠로오는 뒷목을 주무르며 양호실로 향했다.
방금 전엔 머리만 띵 한것 같았는데 코치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뒷목이 욱씬거렸다. 덕분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배구공에 거하게 얻어맞고 나니 꿈을 꾼 뒤로 찝찝했던 기분이 조금 가신 것 같다. 잊을 만 하면 욱씬거리는 이마도 한몫 했다.
“쿠로오 상 웃지 않으니 박력있다..”
“화 났을까여..?”
한편, 쿠로오가 퇴장한 뒤 체육관은 금새 수군수군하는 소리로 메워졌다.
리에프는 초조한 얼굴로 손가락을 꿈지럭댔고, 다른 부원들은 말없이 그의 등과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차분히 가로저었다.
“으으..! 켄마 선배!! 살려주세여!”
“괜찮아.. 쿠로가 기분이 나쁜 건.”
“으아아! 역시 기분 나빴겠죠! 그렇게 큰소리가 났는데에에!!! 야쿠 선배!”
“시끄러워!”
기분 나쁜 꿈을 꿔서 그런거니까.
뒷말을 본의 아니게 생략하게 된 켄마의 샐쭉한 눈초리가 리에프의 부산한 등에 머물렀다.
뭐.. 괜찮나.. 말하기 귀찮고.
“일주일동안 스파이크 금지야! 얌전히 리시브 연습이나 하라고!”
“에엑..!”
쿠로오 테츠로는 가끔 보쿠토 코타로와 섹스하는 꿈을 꾼다.
“목은 괜찮니? 혹시 모르니까 한시간정도만 찜질을 하자.”
“저야 고맙죠.”
양호실로 간 쿠로오는 배구공 무늬가 선명하게 찍힌 이마에 냉팩을 붙이고 뒷목에는 핫팩을 대고 침대에 엎드렸다.
낯선 시트와 베개에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모포는 얇았지만 양호실 안의 공기는 지나치게 훈훈했고 엎드린 상태로 뒷목에 뜨끈한걸 대고 있으니 절로 눈이 감겼다.
양호선생님은 교무실로 가는 김에 선생님들에게 제 상태를 얘기해주겠다 했고, 덕분에 그는 걱정 없이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지잉 하고 휴대폰이 울려 주섬주섬 꺼내들자 제대로 양호실에 갔느냐는 켄마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켄마는 쿠로오가 어떤 꿈을 꾸는지, 그리고 그 꿈을 꾼 날에 기분이 얼마나 다운되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쿠로오는 피식 웃으며 걱정 말라는 답장을 보냈다.
아. 정말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은데. 스파이크에 머리통 한번 얻어맞고 기분전환이 된다면 다음 번에도 리에프에게 스파이크를 쳐달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아직은 그 녀석, 스파이크가 서투니까.. 보쿠토의 스파이크에 얻어맞는다면 진짜로 목에 깁스를 차게 될 지도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게 보쿠토 쪽으로 생각이 기울자 쿠로오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려 천장을 올려다보였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도 휴대폰이 울린다.
[헤이, 오늘 저녁 연습 있어? 오늘 서포터 사러 가는데 같이 나갈래?? 저녁 쏠께!!!]
켄마에게도 말하지 않은 징크스는 사실 하나 더 있었다.
그 꿈을 꾼 날엔, 이상하게 보쿠토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 꿈을 언제적부터 꾸게 되었는지는 사실 확실하지 않다.
보쿠토를 처음 본 것은 1학년 춘고 예선에서 슬쩍 스쳐지나갔을 때가 처음, 제대로 통성명을 한 것은 그해 여름 네 학교의 공통 여름 합숙때였다.
그러니 아마 1학년 여름 이후일 것이다. 언제 꾼 꿈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뒤로 뜨거운 성기가 밀려들어올 때 코타로- 하고 헐떡이던 기억은 난다.
처음 꿈을 꾼 날, 침대를 박차고 젖은 속옷을 세면대에 문질러 빨면서 그는 영혼이 탈주했다는 감각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할 수 있었다. 16년 인생 최대의 위기이자 쇼크였다.
남자가 꿈에 나왔다고!? 그런데 내가 깔렸어! 심지어 나보다 키도 작은 녀석인데!? 게다가 난 왜, 왜 싸버린 건데!?
꿈의 시작은 설마 그런 식으로 잠에서 깨버릴 줄은 예상도 못할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여름 신젠 고교의 제 3체육관, 우연히 자율연습을 하던 녀석을 발견해 함께 스파이크와 블록 연습을 했던, 실제 있었던 것이 꿈이 나타난다는 지극히 평범한 흐름이었다.
비록 꿈의 마지막은 비품실 매트리스에서 발가벗겨진 채 뒷구멍이 무자비하게 쑤셔지는 것으로 끝날다고 할지라도.
쿠로오는 잠에서 깬 뒤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부인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주 잠깐 동안.
남자랑 섹스하는 꿈을 꾸다니 그럴 리 없어!
라고 생각한 지 십분쯤 뒤에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아닐지도..? 정도로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한번정도는 부정했었다.
아니, 한발 양보해서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치자. 중학교 무렵 그것을 어느정도 눈치채고 인터넷으로 관련 자료를 찾아본 적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하지만 호기심에 찾아본 영상은 생각보다 야하거나 섹시하지 않았고, 남자와 여자가 행위하는 영상만큼이나 놀랍고 약간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배우가 서양인들이라 그랬을까? 어쨌든 쿠로오는 그 뒤로 딱히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지 않았다. 다행히 그에겐 배구라는 아주 좋은 취미가 있었고 사람이 기절할 정도로 피곤하면 딱히 야한 생각도 별로 안 들었다.
어쨌든 쿠로오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겨우 얼굴하고 이름 정도만 아는, 그저 연습 몇번 어울려 한 적이 있는, 아니 사실 조금 친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절친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녀석이 꿈에 나온다는 것은 생각치도 못해본 일이었다.
차라리 그 녀석, 보쿠토 코타로를 보며 가슴이라도 한번 두근거렸으면 이게 바로 첫사랑인가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쿠로오가 꿈을 꾼 뒤 우연히 길거리에서 보쿠토를 만났을 땐, 놀라울 정도로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호탕하고 큰 목소리와 거리낌 없는 말투에 그저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하며 같이 배구 이야기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주먹으로 치며 낄낄거렸다.
쿠로오가 꿈에 나오는 보쿠토와 실제로 그가 만나고 이야기하는 보쿠토를 애써 타인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그가 꿈을 세번정도 더 꾸는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피를 뽑아가다니, 설마 내 생체정보를 이용해 클론이라도 만들 셈인가 정부는. 물론 내가 레일건 정도 된다면야 모를까, 일개 외톨이들을 대량생산 해봤자 ‘집단’ 이 아니라 대량의 외톨이들만 생성될 뿐이니 쓸모라곤 없을 테지. 그래서 그런 걱정에 대해선 아예염려를 하지 않고 있긴 하지만.
“히키가야. 검사는 다 끝났어?”
“켁.”
뭐야, 갑자기.
외톨이들은 갑작스럽게 이름을 불리는 거에 예민하다고. 왜냐하면 이름을 불릴 일이 별로 없으니까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 주눅들기 쉽거든. 주로 히키코모리 군이라던가 히키카에루 등으로 불리곤 했었으니 말이지..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한.. 아니 그보다 내 이름 제대로 알고 있었잖아!? 역시 이녀석도 그건가. 그녀석 이름은 알지만 부르기 싫은걸(웃음) 이런 건가. 가슴아픈 과거에 절로 표정이 어두워지자 하야마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와아. 다가오지 마 제발. 안전 거리를 지켜달라고.
하야마가 갑자기 이름을 부른 탓에 떨어뜨린 알콜솜을 주워 휴지통에 집어넣자 거리낌 없는 얼굴을 한 하야마 하야토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아. 응. 같이 돌아갈까 하고. 버스 타고 가지?”
내가 여자였으면 가져온 자전거따위 머릿속에서 지우고 응.. 이라고 수줍게 대답하며 단둘이 버스 데이트를 즐겼을 것만 같은 달콤한 목소리였다. 뭐야 무서워. 키크고 잘생기고 성적까지 좋은데 성격에 목소리까지 좋다니. 이런 스테이터스 배분으로 괜찮아? 괜찮은 거냐고.
일단 말없이 로비를 향해 걷자 하야마가 자신 바로 옆에 붙어 따라오기 시작했다. 자연히 주변의 시선도 이쪽으로 몰려든다. 와아 빌어먹을. 단지 이 리얼충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 데미지를 입는 기분이잖아.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지 서서히 팔다리가 쑤셔오기까지 하는 것 같다. 이정도의 정신력이라면 곧 생각만으로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 정도는 껌이겠는걸. 비로소 정신이 육체를 능가한다는 건가.
자동문이 열리자 바깥에서 뜨거운 바람이 느껴졌다. 바다가 인접한 탓에 끈적하고 습기찬 공기가 볼을 매만지는데 정말 이대로 쓰러져버리고 싶은 마음 뿐이다.
시간은 오후 세시 가량, 하루 중 제일 기온이 높을 때다. 후후. 태양은 정오에 가장 가까운데 왜 기온은 세시에 높냐고? 왜냐면 정오에 흡수한 열기를 콘크리트가 세시쯤 미친 듯이 뿜어내기 때문이지. 타이어가 녹아버릴 것만 같은 열기에 거의 한시간동안 자전거를 끌고 갈 생각을 하니 현기증부터 나기 시작한다. 누구 말마따나 확 버스를 이용해버릴까 싶은 마음도 잠깐 들었다니까.
“하야마. 넌 버스 타고 간댔지?”
“아, 응.”
“난 자전거 가지고 왔거든. 내일 보자.”
깔끔하게 말을 마치고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주륜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더할 나위 없는 거절의 기술이다.
뭐어. 어차피 하야마 저 녀석도 우연히 같은 반 아이를 만난 탓에 아무말 없이 돌아오기는 민망했을 테니까. 괜히 거기서 어영부영 친한 척을 했다간 버스 안에서 죽음보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게 분명하다. 누가 그딴 무간지옥에 갖힐 줄 알고. 차라리 이 뜨거운 콘크리트의 지옥에 뼈를 묻어주겠어.
자물쇠를 풀고 자전거 핸들을 잡아 끌기 시작하는데 어느새 하야마가 기척도 없이 내 뒤에 서 있었다. 화들짝 놀라며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하야마를 쳐다보는데 하야마가 억울한 듯 외쳤다.
“같이 가자고 했잖아. 자전거를 가지고 왔으면 이야기 해 주지 그랬어.”
평소의 어른스러운 모습과 달리 약간 삐진듯한 표정에 내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라고 말할 때가 아니지. 하. 이 자식 진심이냐. 리얼충 주제에 갭모에라니..
“아니 뭐. 버스 타고 간다며.”
“자전거.. 같이 타고 가면 되잖아?”
우와. 아무렇지도 않게 셔틀로 임명받았다.
날 때부터 명령하는 쪽이라 이건가. 이건 대체 무슨 패기냐. 패왕색? 아니면 리얼충색 패기?
어쨌든 하야마의 명령에 오래 끓인 된장국처럼 잔뜩 쫄아붙은 나는 말없이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대기했다. 이 자전거의 뒷자석에 코마치 외의 다른 사람을 앉히게 될 줄은..
미안하다 코마치. 50포인트정도 감점된다고 해도 묵묵히 받아들이겠어.
하지만 내 태도에 하야마는 묘한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히키가야, 나 꽤 무거운걸. 차라리 내가 운전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뭐? 네가 왜? 이건 내 자전거잖아.”
외톨이의 습성 하나 더. 자신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걸 꺼려한다. 왜냐하면 높은 확률로 없어지거나, 망가지거나 해서 돌아오니까.
“그치만 오르막길 꽤 길지 않아? 거기서 페달 밟으려면 꽤 힘들..”
나는 즉시 안장에서 엉덩이를 떼어냈다. 하마터면 잊을 뻔 했다. 쫄쫄이를 입은 채 자전거 위에서 헐떡이는 걸로 인생의 쾌감을 찾는 녀석들이나 찾을 법한 오르막길이 있었지. 올때는 내리막길을 쭉 내려오면 되지만 돌아가는 길엔 늘 자전거를 끌고 걸어올라갔었다.
하야마가 묘하게 웃으며 자전거에 앉고, 그 뒤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 곳에서 앞사람의 등을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앞사람의 등이 이렇게 넓어 보이는게 정상인가? 그렇다면 코마치도 늘 오빠의 넓은 등을 보며 든든함을 느껴 왔던 것일까.
“꽉 잡아, 히키가야.”
어? 하고 멍하니 반문하는데 급발진하는 자전거 탓에 무의식적으로 하야마의 허리를 끌어안다시피했다. 뭐, 뭐야 이거! 나 모르는 새 누가 내 자전거에 로켓포라도 달아둔거 아냐!? 낡은 자전거의 체인이 끼릭끼릭 비명을 지르며 환호하고 있었다. 마치 이 늙은 몸이 이렇게 빨리 달릴수도 있다니! 하고 놀라는 것 같군. 뭐. 나도 놀랐다. 뺨에 와닿는 바람이 평소와 전혀 다르다.
센티넬의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는 익히 들었지만, 이정도인줄은 몰랐으니까.
“대단하다..”
“하핫, 그래?”
혼잣말로 중얼거린 내 말을 하야마가 캐치했는지 넉살 좋게 받아쳐왔다.
이 스피드로 자전거를 몰고 있으면서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니, 정말 장난 아니구나. 문득 이런 인간과 필드에서 함께 뛰며 득점을 겨루는 상대편 축구팀이 불쌍해졌다.
“편하겠네. 이 스피드라면 등교도 5분만에 가능할지도.”
“편.. 하달까.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교차로의 신호등의 불이 바뀌길 기다리는 사이 하야마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센티넬의 50% 이상이 스트레스 과민으로 사망해.”
“그야 뭐..”
유명한 연구결과다. 굵고 짧게 간다고 해야하나. 각인자를 찾지 못한 센티넬들의 최후는 보통 몹시 괴롭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거야 제대로 된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 이야기고, 너처럼 인기있는 녀석 같은 경우는 보통 해당되지 않는다고.
“넌 그럴 걱정 없을 꺼 아냐. 주변에 가이드도 잔뜩 있고.”
“아니 난..”
교차로의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뀌며 하야마의 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무슨 말을 하려던건지는 모르지만 말을 삼키기로 작정한 듯, 하야마가 말없이 자전거를 몰았으므로 난 그냥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만 눈으로 흩었다.
두사람을 태운 자전거가 매끄럽게 운동장을 가로질러 주륜장으로 들어갔다. 어이. 뭐야, 왜 학교에 오는 건데. 이제 내 남은 스케쥴은 귀가뿐이라고.
“아, 난 이제부터 동아리 활동이 있어서. 히키가야군도 동아리 있지 않아?”
지금 내 동아리 활동까지 신경써준거냐. 정말 눈물나는 배려심이다. 이자식 왜 이렇게까지 성격이 좋은 거지? 이정도면 거의 병 아냐?
“동아리에 사정은 설명했어. 이제 난 집에 갈 거야.”
하야마가 자전거에서 내리고 나자 냉큼 안장에 엉덩이를 붙였다. 정기검진날에도 동아리 활동을 빼먹지 않다니, 그때도 느낀 거지만 유키노시타가 천재+노력이라는 느낌이라면 하야마 이 녀석은 노력+수재라는 느낌이다. 앞과 뒤가 뭐가 다르냐고 묻는 녀석들은 창의력 제로의 이과계 인간임이 틀림없다.
“그럼 난 간..”
“잠깐만.”
하야마의 손이 강하게 내 손목을 잡아왔다. 예상치 못한 악력에 몸이 쭉 딸려나가다시피 해서 상체가 앞으로 홱 쏠렸다. 짜증나는 눈빛으로 하야마를 홱 노려보자 당황한 얼굴로 손을 놓았다.
“아니, 그.. 히키가야 너.. 혹시.”
“왜.”
하야마는 뭔가 복잡한 얼굴로 몇초간 더 어물대다가 아무것도 아냐. 라며 주먹을 꽉 쥔다. 순간 너무 놀라서 어깨를 흠칫 떨 뻔 했다. 주먹 쥐지 마. 눈살 찌푸리지 말라고. 스쿨 카스트의 최하위에 위치한 녀석들은 괜히 윗 계급의 행동 하나하나에 과민반응하기 마련이라고. 딱히 저 큼직한 주먹에 얻어맞는 줄로만 알았던게 아냐. 으, 음습한 괴롭힘은 당했어도 직접적인 폭력은 별로 당해본 적이 없으니까, 흐, 흥! 착각하지 말아줘!
하야마가 결국 별 말 없이 인사를 고했으므로 나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귀가했다.
집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찜통의 절정같은 느낌이라, 찹쌀떡처럼 흐늘흐늘해져버린 것 같았다. 코마치의 상큼함에 치유받고 싶어어.. 물론 집에서 날 반긴건 내 정신을 맑게 해주는 코마치표 커피가 아니라 더위에 짜증이 날데로 난 카군 뿐이었다.
정말이지 고양이의 모피는 여름에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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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나에게 그런 표정을 지어보여도 소용 없다, 히키가야. 센티넬-가이드 매칭은 일개 교사의 권한이 아니니까.”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 뜬금없는 전개는 대체 뭐냐고.
제발 뭔가 말해달라는 내 필사적인 얼굴을, 히라즈카 선생님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것으로 간단히 무시했다. 가까스로 고개를 떨궈 아래를 내려보자 빳빳한 종이가 너울대며 자기주장을 한다.
“그보다.. 대체 왜 하야마죠.”
간단히 말해, 국가의 횡포다. 대체 무슨 권리로 센티넬 - 하야마와 가이드 ? 히키가야로 미션을 내리는 건데. ‘헐. 그 히키 뭐시기라는 그 음침한 녀석? 하야마가 불쌍해~ 그녀석 확 자살해버리면 좋을 텐데~’ 라는 말을 정면으로 들으면 이번엔 진짜 울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뭐야. 너 몰랐나?”
“예?”
“하야마는 너무 강력한 센티넬이라, 왠만한 가이드엔 금방 내성이 생겨버려. 아마 제일 오래 팀을 맺은 것도 석달정도가 끝이었다고 들었다.”
“예에?”
“뭐. 빛이 밝은 만큼 그림자도 짙다는 거지. 아무튼 그것 때문에 하야마는 전교에 거의 모든 가이드하고 팀을 맺었었거든.”
우와아. 이쯤 되면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디의 아방궁이냐. 하야마라는 술탄을 둔 할렘도 아니고.. 그렇게 따지면 나는 술탄의 자비에 하룻밤 은혜를 입은 외톨이 후궁 28 정도인가. 스스로 생각해낸 비유에 구역질이 날 정도다. 하하.
히라즈카 선생님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이곳이 교무실임을 상기했는지 필터 끝만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아마 너에게도 내성이 생기면 하야마는 다른 학교의 가이드에게까지 손을 뻗칠지도 모르지.”
“묘한 단어 선정이네요. 하야마가 좋아서 가이드를 한번씩 맛보고 내팽개치는게 아니잖아요.”
“네녀석의 단어가 훨씬 미묘하다만.. 아무튼 너의 존재감만큼이나 흐릿한 가이드 자질이라도 일단 가이드. 네가 좋든 싫든 하야마와 팀을 맺어야 해.”
나는 천천히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그러고보니 어제 묘한 말을 했었지. 센티넬의 얼마가 스트레스로 사망한다- 고. 그 음색에 담긴 감정을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가이드라서겠지. 센티넬의 감정에 예민한 가이드니만큼 그게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소리가 아니라 무심코 튀어나온 깊은 속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꿔 말하면 그 상냥한 성품의 센티넬이 늘 자신이 스트레스로 미치거나 죽는다는걸 염두에 두고 생활하고 있었단 말이다. 이쯤 되면 그 자제력에 인간적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인데?
그런 상냥한 하야마는 대체 얼마나 예민하길래 온 학교의 가이드들을 건드려 놓고서도 모자라서 내게까지 껄떡댄다는 말인가.
“아마 내일 모레 출발인가?”
“네.. 뭐.”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에겐 동아리를 쉬게 된다고 직접 말하도록. 아마 순순히 믿어주진 않을 테지만.”
“뭡니까. 저 인간적으로 신용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뭐? 네가? 착각은 자유라지만 방금 그 말은 좀 심하구나.”
“선생님이 훨씬 심하거든요..”
교무실에서 나와 교실로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 점심시간을 끝내고 5교시의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걸음을 서둘렀을 테지만 교사와 상담이라는 면죄부도 있겠다, 나는 느긋하게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점심시간에 하야마가 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와 팀을 짜는 것에 대해 이야기라도 꺼내면 받게 될 그 눈길들은 내 여린 하트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겠지. 수라장을 헤쳐 온걸로 따지자면 이미 흉터 투성이에 굳은살까지 배긴 내 하트겠지만... 아무리 단단한 굳은살이라도 칼로 찌르면 피가 난다고. 적어도 수업시간 중간에 들어간다면 그런 사태를 막을 수 있겠지.
“죄송합니다. 면담이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도록.”
뒷문을 열고 작게 인사하고 슬쩍 자리에 앉았다. 무심코 하야마쪽을 힐끔 쳐다보는데 마치 처음부터 날 쳐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순간 부정맥이 올 정도로 놀랐으나 가까스로 평정을 가장하고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끝나지 않기를 바란 국사 수업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곧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돈다. 나는 분위기를 살피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좋아. 아무도 내게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이대로 쉬는 시간동안 옥상에라도 가 있을까 하는 내 팔목을 강한 힘이 가로챘다.
“히키가야.”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하야마 하야토가 내 팔목을 잡고 놔주질 않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
라고 묻더니 이쪽의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팔목을 움켜쥔 채 걸음을 옮긴다. 의문형으로 말하면 명령형으로 알아듣는건 리얼충들의 법칙이냐. 네가 시건방진 아가씨 컨셉의 로리소녀가 아니면 용납될 수 없는 컨셉이거든?
“무슨 일인데?”
공교롭게도 하야마가 도착한 곳도 옥상이었다. 옥상 자물쇠가 고장난 상태라는거,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히키가야. 가이드.. 맞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에 그 병원에 가 있다는 건 센티넬 아니면 가이드 정도일 테니까. 하야마의 물음도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단 다시한번 확인한다는 뉘앙스가 더 강했다.
“부탁이 있는데.. 괜찮을까?”
부탁이란게 혹시 그건가? 역시나 싶지만.. 나는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의아한 듯 종이를 본 하야마는 내가 내민 종이를 받고 당혹스러워했다. 놀란 표정이 아닌걸 보니 이렇게 될 걸 대략 알고 있었나 보다.
“놀라지 않네.”
“아니, 난.. 히키가야가 이 학교 마지막으로 남은 가이드란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되지 않을까 했었어. 그래서 미리 양해를 구하려고 했던 건데.”
“뭐, 이런 식으로 팀업되는 시스템이라면 굳이 네가 나한테 양해를 얻지 않아도 되잖아?”
말이 학교지 내가 받은 명령서는 군인의 것이나 다름없다. 내 말에 하야마는 무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보는 내 쪽이 오히려 송구해지는 표정이다. 어디까지 예의바른 놈이냐. 이건.
“하지만 히키가야, 이미 팀을 이룬 센티넬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하야마가 민망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뭐? 무슨 엄한 소리야. 내 스스로 할 말은 아니지만 난 그렇게 인기있는 가이드가 아니다.
찌푸린 내 표정을 보고 하야마가 당황하자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내뱉었다.
“난 팀을 이룬 센티넬 없어.”
“뭐?”
“새삼스럽게.. 그리고 정식으로 미션에 나가는것도 처음이니까 나야말로 양해를 구해야겠다.”
“정말? 하지만 히키가야 너..”
뭔가 물어보려던 하야마는 내 표정을 보곤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렸다. 남이 했더라면 답답하고 우유부단해 보였을 것을, 하야마가 하니 대체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파급력이 엄청나다. 이게 바로 초 리얼충 스킬인가.
“미션을 이틀 뒤지?”
“응.”
“그럼 오늘부터 하교 같이 하면 되겠다. 히키가야 동아리 있지?”
“있는데, 잠깐. 하교?”
하야마가 무어라 더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수업종이 울려 우린 서둘러 교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교 시간이 되어서야 난 하야마가 하려던 말이 뭔지 알게 되었다.
“왜?”
“왜냐니.. 원래 이런 거잖아.”
센티넬이 가이드를 만나 심신이 안정된다고 해도, 무슨 기계도 아니고 한순간에 뚝딱 상태가 호전되는건 아니다. 아니 그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론적으로 알던 사실을 직접 생활에 적용하려니 적응이 안되고 있었다.
미션을 이틀 앞둔 오늘부터, 하야마는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최대한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 같았다.
등하교 시간은 물론이고, 수업시간에마저 자리를 바꾸는게 용인된다.
남들이 자리 바꾸고 하는것에 무관심해서 미처 몰랐었다. 내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어디에 앉는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냐.
“오늘도 자전거 가져왔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하야마가 웃으며 주륜장으로 앞장섰다.
딱 한번 본 내 자전거를 잊지 않았는지 수대의 자전거 사이에서 내 자전거를 찾아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핸들을 쥔다.
웃으며 날 돌아보는 폼이 누가 보면 자전거 주인인줄 알겠다.
난 머릿속으로는 하야마의 말을 이해했지만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들어 몇 발자국 뒤에서 그런 하야마를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어느 쪽이야?”
아무리 센티넬이라도, 아니 아무리 리얼충이라도 그렇지, 남에게 너무 거리낌이 없는 거 아닌가? 아직 난 하야마와의 거리를 좁힐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쪽에서 마구잡이로 내 방 안을 침범하는 것 같잖아.
언짢은 표정을 느꼈는지 하야마가 자전거에서 손을 떼고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뒤로 흠칫 물러날만큼 거부감이 들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하야마의 표정이 몹시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같은 반의 존재감 없는 남학생을 보는 표정이 아니라 흡사 울기 직전의 다섯 살박이 여자애를 보는 듯한... 젠장 왜 이따위 비유밖에 떠오르는 게 없는 거지.
“히키가야..?”
“...너 동아리 활동 있지 않았던가?”
“그거라면 아까 점심때 말해뒀어. 너야말로 동아리는?”
“오늘은 쉬는 날이야.”
후.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 자전거로 다가갔다. 하야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내 배타적인 기색을 느낀게 분명하다. 하야마는 센티넬이니까.
나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 빌어먹을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이정도는 양보해 주지.
자전거의 뒷자석에 앉은 나는 몇발자국 떨어진 상태의 하야마에게 툭 던졌다.
“집에 안 데려다 줘?”
하야마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자전거 앞좌석에 걸터앉았다.
“꽉 잡아.”
“알겠으니까 가기나 해.”
학교의 리얼충 하야마가 모는 자전거 뒷자리에 타게 될 날이 다 오다니. 교내의 여학생들이 눈에 불을 키고 원하는 포지션이 아니었던가. 물론 며칠이면 이것도 끝이겠지만.
‘하야마는 너무 강력한 센티넬이라, 왠만한 가이드엔 금방 내성이 생겨버려.’
내 가이드로써의 자질은 형편 없다고 국가기관의 검사를 통해 밝혀진 바 있으니 하야마의 가이드 노릇을 하는 것도 길어봤자 일주일이겠지. 어쩌면 임무 중에 쫓겨나게 될지도 모른다.
몸이 어느정도 자전거의 속도에 익숙해져 나는 어깨에 힘을 조금 풀었다.
“하야마.”
“응?”
타이밍 좋게도 교차로의 신호등 때문에 자전거가 멈춰섰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우리처럼 신호를 기다리는 아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한건지 하야마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고, 나는 무심코 내뱉을 뻔한 질문을 주워삼켰다.
하야마 너는 괜찮은거냐, 고.
괜찮을 리가 없겠지. 나와는 여러 모로 껄끄러운 사이이고. 착한 아이인 하야마는 나라에서 정해주는 가이드를 거부할 리가 없지. 여러모로 마음이 해이해진 모양이다.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할 뻔 한걸 보면 말이다.
“...아냐, 신호 바뀌었다.”
자전거는 쏜살같이 달렸다. 물리적으로 따지자면 컵라면에 물을 붓고 딱 먹기 좋을만한 시간이 흘렀다고나 할까, 상대성 이론으로 따지자면 아침 등교와 하교 사이의 시간만큼의 시간이 흘렀다고나 할까.. 두 발 두 다리 멀쩡한 주제에 말없이 하야마의 허리를 잡고 자전거 뒷자석에 있자니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하야마를 알아보고 나를 의아한 듯 쳐다보는게 마음에 안 들었다. 쳇. 내 여린 신경에 손상이 간다고.
하야마는 능숙하게 우리 집 앞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자전거의 핸들을 건네받고 하야마를 배웅하려는데 떠날 기색 없이 가만히 서서 이쪽을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발이 저려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히키가야.”
하야마가 악수하듯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 라고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내 오른손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젠장. 외톨이는 이런 식의 형식을 갖춘 인사에 자동반사적으로 대응하는 습성이 있다는걸 간파할 줄이야. 악수하듯 내 오른손을 맞잡은 하야마는 위아래로 팔을 흔드는 대신 손아귀에 힘을 주고 내 손을 꾹 잡았다.
“좀 더.. 괜찮아?”
“뭐가?”
이제 슬슬 손은 놔줬으면 하는데.. 한여름에 남자와 손을 잡아서 땀이 차다니 최악이다. 하지만 하야마는 내 반응따위 아랑곳 하지 않고 맞잡은 손을 살짝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뒤 다른 팔로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크허억!?”
하야마의 단단한 가슴에 폭 껴안긴 순간 두근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을 리가 있냐! 땀내 나는 남자의 가슴이라니, 게다가 코에 닿은게 근육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다 돋는다. 뱃속에서 끌어올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하야마를 거세게 밀쳐내자 그는 순순히 뒤로 밀려나갔다. 아니지, 하야마는 뿌리 박힌 고목처럼 단단히 서 있었고 오히려 내가 튕겨나간 느낌이었다. 내 엉덩이에 부딪힌 자전거를 보면 확실하다..
“히키가야, 내가 공격이라도 한 것같은 비명이잖아.”
“그 말 그대로다. 내 데이터가 오염될 것 같은 정신공격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냐, 너.”
“꿍꿍이라니..”
하야마가 곤란한 듯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나는 그 사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낡은 자전거를 나와 하야마 사이의 장애물로 배치하는 것에 성공했다. 뭐냐 저거, 바이러스형.. 아니 리얼충형 완전체 디지몬이냐, 대체 다음에 무슨 짓을 하려는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바로 등 뒤가 현관이라는 것이 엄청난 안도로 다가왔다.
“센티넬-가이드 미션이 처음이라 그래서 잘 모를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직접 설명하려니 조금 민망하네.”
고개를 갸웃, 왼쪽으로 살짝 까닥이며 말을 꺼낸 하야마는 조금 쑥쓰러운 표정이었지만 당당했다. 미소녀만이 용서되는 제스처인줄 알았는데, 빌어먹게도 미남에게도 통용되는 것이었나.
“사흘 뒤 미션을 위해 계속 행동을 같이한다는건 설명 했었지?”
“아아. 이해했다.”
“그것의 연장선이야.”
“미안, 무슨 뜻이냐?”
“가이드와의 스킨십만큼-”
“어라? 오빠!”
드, 들었다. 스킨십이란 말을 들어버렸다고! 더 이상은 무리. 하야마 네가 딱히 싫어서가 아니라 생리학적으로 무리다. 마침 나이스 타이밍으로 현관에서 나온 코마치가 여신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어라? 하야마 씨 맞으시죠?”
“으응.. 안녕?”
“왠일이세요? 설마 오빠의 친구라거나? 꺄아! 팥밥 지어야 겠다!”
“코마치. 그럴 일은 없다. 그리고 팥밥은 그럴 때 먹는게 아냐.”
코마치의 등장으로 자연스레 대화는 끊기고, 나는 집에 들어가려는 제스처를 취한 것만으로 이어질 하야마의 대화를 원천차단했다. 정말 잘했다 코마치. 사랑스러운 여동생 기준으로 이번 건 정말 포인트 높았다.
다행히 하야마는 여동생이 듣는 앞에서 가이드가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하기는 꺼려졌는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내일 봐, 히키가야.”
“아아.”
“내일 일곱시면 될까?”
“너 늘 그렇게 일찍 다니는 거냐?”
“아니, 네 시간에 맞춘 건데.”
“..그럼 일곱시 십오분으로.”
마지막까지 예의바른 말투를 사용한 하야마는 신사답게 웃으며 온 길을 되돌아갔다. 단지 하야마와 나의 대화를 들은 코마치가 부들부들 떨며, 볼을 부풀리고 있는 게 무서웠다. 설마 이 상황에서 부후후훗 하고 웃어대는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정말 파이트클럽급의 소름끼치는 반전이다. 허나 코마치는 잔뜩 해맑은 얼굴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오빠 축하해! 제대로 된 첫 남자친구를 사귀었구나!”
“뭐냐. 그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문장은.”
나는 자전거를 대문 안쪽에 기대어두고 현관쪽으로 들어왔다. 코마치는 뭐가 그리 신나는건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하치만적으로 포인트는 높다만, 의미불명이라 좀 꺼림칙한데?
“유이 언니랑 유키노시타 언니 덕분일까? 저 오빠, 4월 합숙 때 봤던 그 오빠지?”
“아아. 하야마 말이냐.”
“으응- 맞아. 하야마 하야토라는 이름이었어.”
“친구 같은거 아냐.”
아, 내 동생이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상냥한 녀석이다. 물론 그게 오해라는 점은 미리 말해줘야겠다. 아무리 코마치라도 그 녀석과 내가 친구라는 꺼림칙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참을 수가 없다. 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쏙 들어가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