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서는 문 밖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마슈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귓가 근처에서 말하고 있는데 미동도 없는 게, 간밤에 애를 쓰긴 했는지 완전히 곯아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마스터는 마스터지. 영령씩이나 되는 남자가 고작 그거 같다가 엄살 부리는 꼴은 못 보는 성격의 랜서는 아처의 어깨를 몇 번 흔들다가 이내 손을 들었다.
철썩철썩, 요령 좋은 손바닥이 침대 위에 누운 남자의 볼을 두어번 후려쳤다. 그 충격에 드디어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올린 남자는 윽, 하고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두통의 이유를 짐작하는 랜서는 혀를 쯧쯧 차며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게 어제 엄청나게 마셔대더라니.”
평소라면 니나 잘하라는 식으로 신랄한 반격이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쳐는 아직도 잠이 덜 깬 얼굴로 멍하니 눈만 끔벅이고 있을 뿐이었다. 칼데아에서는 물론이고 이전의 기억을 통틀어서도 본 적이 없는 얼간이같은 표정이라, 랜서는 순간 어떤 가정이 불쑥 떠올랐다.
혹시 어제 내가 마력을 지나치게 끌어가버린 건가?
접촉해서 마력회로나 확인해볼까 하고 상체를 가까이 붙이고 손을 이마로 뻗었다. 그러나 아처는 마력회로의 스파크가 아닌 이불 밖으로 노출된 랜서의 상체에 반응하며 찬물 맞은 고양이처럼 앉은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랜서는 자신의 손길에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보이는 아처의 모습을 요상하게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팔을 거두었다.
“일어났으면 슬슬 나가보지 그래? 마스터가 애타게 찾고 있던데.”
상체를 일으켠 김에 쭈욱 기지개를 펴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전날 밤의 격렬한 운동은 신체에 나른한 근육통을 남겼다. 젖꼭지가 욱씬거리고 엉덩이가 좀 아리긴 해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처는 랜서가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불을 붙일 때까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자유롭게 풀어헤쳐진 푸른 머리칼 사이 흰 등에 남겨진 잇자국이나 엉덩이에 우악스레 남겨진 손자국 등을 천천히 눈으로 흩었다.
부스스한 흰색 머리칼 밑의 눈을 몇 번 끔벅거리자 점차 눈빛에 이성이 침착하게 자리잡기 시작한다.
‘무슨..?’
자신의 방, 자신의 침상 위에 누워 알몸으로 자신을 깨운 랜서. 천둥의 신이 망치로 정수리를 연신 두들겨대는 듯한 두통과 달리 묘하게 개운한 몸 상태. 당연하지만 본인도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고 시트는 수상한 액체로 축축해져 있는데, 그것이 랜서의 허벅지 사이에 말라붙은 것과 같은 성분이라는 것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확실했다. 무엇보다 자신 앞에서 무방비하게 알몸을 드러내고도 몸을 가릴 생각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마치,
‘설마...?’
내가 그와 간밤에 선을 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랜서. 어젯밤엔 대체..”
사실에 입각한 추론이지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거대한 진실의 파편에 상황에 아쳐는 허스키한 말의 조각을 간신히 하나씩 뱉어냈다. 랜서를 부르자 침대 옆에 서서 몸을 풀던 그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게 느껴졌지만 아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차마 그를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었다.
저 흰 피부에 새겨진 정사의 흔적이 아주 난리도 아니라, 저것을 남긴 것이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어떤 미치광이가 사람을 저렇게까지 물고 씹었냐고 혀를 찼을 것이다..
그러나 랜서는 아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툭 내뱉었다. 영향력으로 따지면 머릿속에 수류탄을 하나 까 넣은 것과 비슷한 충격량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이름으로는 안 부르기로 한 거냐?”
“뭐?”
“어제, 앞으로는 이름으로 부르겠다며. 뭐 잘만 부르더만. 쿠 훌린, 쿠 훌린 하고.”
“......!?”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어 랜서를 바라보았다. 간밤에 자신은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소릴 지껄인건가!?
당황스러움이 지나쳐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뭐.. 무슨.. 따위의 소리만 더듬더듬 중얼거리고 있자니 남은 담배 연기를 훅 내뱉고 남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끈 랜서가 다시 침상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의 안색을 살피듯 빤히 이쪽을 살피는 창병의 얼굴은 익숙하지만,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는 익숙치 않았다. 그는 훗, 하고 웃더니 오른손으로 아쳐의 등을 팡! 하고 크게 쳤다. 손바닥에 공기를 넣었는지 전해지는 충격보다는 큰 소리가 났다.
“어제 한 얘기 때문에 그러냐? 걱정 마, 아주 좋았으니까!”
“좋, 좋았다고..!?”
“그래. 엉덩이랑 허리가 좀 쑤시긴 하지만 뭐, 뒤로 해서 그렇게 느끼기 쉽지 않은데.. 제법이드만?”
적나라한 단어에 아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얼굴만 시뻘겋게 물들인 채 랜서가 한 말만 입으로 중얼거렸다. 좋았다니.. 그럼 간밤에 자신은 랜서를 충분히 만족시켰다는,
‘아니, 이게 아니지!’
왜 갑자기 기둥서방같은 마인드가 되어버린 건가!
애초에 자신이 그와 섹스했다고 해서 꼭 그가 좋, 좋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이왕이면.’
좋아해주는 쪽이 물론 좋을 테지만. 일부러 의식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던 어떤 생각의 실마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희고 단정한 이마와 곧은 콧날. 짙은 푸른색 눈썹 아래 루비보다 붉고 투명한 눈동자가 지척이었다. 능글맞게 웃고 있지만 저 얼굴이 어젯밤엔 만족스럽게 일그러졌을거라고 생각하니 그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아쳐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의아한지 랜서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이야? 잠깐. 설마, 너.”
“왜 그러지?”
“어젯 밤, 기억 안 나냐?”
아처는 그 말에 유연히 반응하지 못하고 멈칫, 숨을 삼켰다.
뭐라고 해야 하지. 기억은 안 나지만 좋았다? 드문드문 기억이 없다..? 그가 고민한 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랜서는 아쳐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랬군.”
“잠깐만, 랜, 쿠 훌린!”
황급히 그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누군가가 머리를 맥주병으로 내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시야가 핑글 돌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손으로 이마를 짚는 사이 마력으로 푸른 갑주를 소환한 랜서가 손을 뒤로 모아 머리칼을 정리했다. 달칵 소리와 함께 평소처럼 한데 묶은 머리를 한 채로, 랜서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아, 아까 내가 말했던건 잊어 주라.”
“뭐? 무슨 소리를..!”
벌떡 일어난 아쳐가 알몸으로 뛰쳐나오기 전에 랜서는 가볍게 출입문 버튼을 터치해 밖으로 걸어나갔다. 복도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반대편 귀를 통해 모래처럼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아쳐는 이게 꿈이라면 지금 당장 깨어나고 싶다는 얼굴로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눈을 뜨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놀람의 연속이었지만 지금처럼 박탈감이 느껴지는 상황이 닥칠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자신은 간밤에 무슨 짓을 한 건가?
무슨 짓을 했길래 아일랜드의 대영웅과 밤을 보내고 그 기억을 어디에 버려두었단 말인가.
방금 전만 해도 어젯밤의 기억이 없는 게 안타까운 정도였지만, 이제는 그 기억이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너무 아침드라마 도입부처럼 시작하는것같군요,,,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정도는 전체공개해도 되겠죠?(흠티콘
7월 오락관에 나갈것 같아서 티스토리에는 중반까지 공개될 예정이고 제목은 바뀔지도모릅니다..
재미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랜서가 아쳐의 목에 양 팔을 걸고 살짝 끌어당겼다. 그는 조금 당황하나 싶더니 순순히 랜서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앞으로 숙여 입술을 겹쳤다. 콧날을 살짝 옆으로 틀고는 자연스럽게 혀를 안으로 집어넣어 진하게 키스를 하는데, 랜서는 아쳐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다가 어어하는 순간 페이스를 빼앗겨 혀끝이 얼얼할 정도로 잔뜩 빨리고 깨물렸다.
근육으로 꽉 찬 몸뚱이와 달리 입술과 혀는 매끈하고 부드럽다. 천천히 떨어진 입술이 침으로 젖어 혀로 그것을 낼름 햩은 랜서는 다시 아쳐에게 입술을 부딪혔다. 퍽, 하고 꽤 큰 소리가 나며 아쳐의 뒤통수가 벽에 부딪혔지만 둘 다 신경도 쓰지 않고 헐떡이며 혀와 입술을 문질렀다.
웃을 때마다 드러나 처음 볼 때부터 신경쓰였던 송곳니는 생각보다 뾰족했다. 일부러 혀를 내어 입천장을 간질이다 혓바닥 옆구리가 화끈해지고 비릿한 맛이 입안을 감돌 때까지도 정신없이 랜서의 입술을 물고 빨던 궁병은 살짝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물리는 랜서를 얼떨떨하게 쳐다보다 왼손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붉은 기가 진하게 묻어나오는걸 보면 상처가 상당히 크게 난 모양이었다.
“안 아프냐?”
피 맛이 비린지 입술을 우물대던 랜서가 조용히 묻자 궁병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상처를 자각하고 나서야 통증이 느껴졌는데, 랜서의 입술이 침으로 번들거리는걸 눈으로 확인한 순간 통증은 아스팔트 위의 알코올처럼 싹 사라졌다. 고개를 숙이고 랜서의 허리 뒤로 손을 가져가 자신 쪽으로 바짝 당겨온 아쳐는 여유로운 얼굴로 자신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는 푸른 창병의 제스처에 한쪽 눈썹을 휙 들어올렸다. 설마 이제 와서 물러나겠다는-
“뭐지?”
“아니, 여기서 할 거면 옷부터 벗고 싶은데?”
그제서야 아쳐는 자신이 랜서의 옷을 쥐어 짤 정도로 강하게 움켜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에서 힘을 풀었다.
실수했군. 난생 처음 섹스하는 애송이처럼 굴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아쳐의 낯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섹스할 생각 만반인 아일랜드의 빛의 왕자는 구겨진 티셔츠 밑단을 손으로 몇 번 만지작거리다 그대로 위로 들어올려 훌렁 벗어제낀다.
“무슨..!”
방금 전만큼은 아니지만 궁병의 평정심이 달고나처럼 파사삭 부서지기엔 충분한 충격이었다. 예상보다 피부가 희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처럼 미끈한 피부에 탄탄하게 자리잡은 근육은 문학가처럼 유려하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저 어깨에 늘어진 푸른 머리카락까지 완벽했고... 그를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정도가 그의 최선이었다.
“왜 그래?”
“응?”
그러나 정신없이 자신의 벗은 몸을 바라보는 궁병의 정신머리를 다시 붙잡은 것도 눈 앞의 창병이었다.
그는 티셔츠에서 한쪽 팔과 고개를 빼낸 자신과 달리 두 손 놓고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아쳐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설마 옷까지 직접 벗겨달라는건 아니겠지?
“지금 안 하려고?”
“설마 여기서 하잔 말인가?”
“벽도 있고 지붕도 있고, 거기에 목격자도 없는데 뭐가 문제야?”
현관을 코앞에 둔 거실 통로에서 옷을 벗으며 하는 말 치고는 제법 논리적이라 얼핏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린다. 순간 설득되버릴 뻔한 궁병은 고개를 휙휙 저어 잡념을 털어내고 단호한 얼굴로 벨트를 쥔 창병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고대인의 감각에야 어떨지 몰라도, 일단 이 집에 왔으니 내 고집을 따라줬으면 좋겠군.”
“흐음.”
랜서는 귀찮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자신의 손목을 쥐고 앞장서 걷는 아쳐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쪽 팔엔 벗다 만 흰 티셔츠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나무로 된 계단을 올라 짧은 복도를 지나자 나오는 첫번째 문 앞에서 멈춰선 궁병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낮게 중얼거렸다.
“여기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문을 열자 저택의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문과 더블 사이즈의 침대가 보였다.
침대 아래 낡은 러그는 깨끗했지만 그뿐이었다. 휑한 방 안에 있는 것은 오직 침대뿐으로 생활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 예상대로 삭막한 방인데.”
“수면은 필요 없으니 사용한 적은 없다. 방이 많아서 하나 받았을 뿐이지.”
사실 소파에서 랜서와 아쳐가 거사를 치렀다고 오해한 린이 부랴부랴 마련해준 방이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번 고개를 휘 둘러보는 것으로 방구경은 끝났고, 마력의 흔적이나 함정으로 생각되는 장치도 없다. 아쳐 녀석이 손수 뜬 털실 목도리 같은게 걸려 있어도 놀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볼 게 없는 것도 의외였다.
랜서는 푹신한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아 흰티를 마저 벗어 바닥에 대충 떨어뜨렸다. 현관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따라붙던 시선이 자신의 벗은 상체어림을 흩는 것을 눈치챈 그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전투나 섹스나, 막상 본게임에 들어갈 때까지는 뒤로 빼다 갑자기 치고 나오는게 스타일이 똑같다.
“뭐야, 설마 직접 벗기고 싶었냐?”
“..그것도 좋지.”
나름대로 농지거리랍시고 던진 말에 아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허리를 숙여 랜서의 티를 주워들었다. 가볍게 삭삭 접어 적당한 곳에 옷을 치워둔 아쳐는 입고 있던 검은 셔츠를 벗으며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왠지 떨떠름한 표정의 창병이 피식 웃고 있었다. 눈으로 묻자 랜서는 설레설레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어째 한마디도 안 지나 싶어서 말이야..”
“언쟁을 벌일 마음은 없었다만.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불쾌했나?”
“그런 건 아니고.”
이쪽이 먼저 한 말인데 새삼 기분이 나쁠 것도 없다. 대신 상의를 벗은 채 침대에 앉은 궁병의 분위기가 쓸데없이 진지해서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랜서는 자신의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할 지 몰랐지만, 친구네 생일파티에 초대받아 갔더니 자신만 청바지 차림인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턱시도에 드레스를 입고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면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
그냥 가볍게 섹스하러 온 건데 이 그윽한 분위기는 대체 뭐지..? 랜서가 입을 여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자 궁병은 천천히 팔을 뻗어 랜서의 팔뚝 위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가만히 있었더니 바짝 다가와 어깨 위쪽까지 부드럽게 매만졌다.
엉덩이도 가슴도 아니고 팔은 대체 왜 만지작대는 건지. 새삼 반응하기 어색해 궁병의 팔에 시선을 고정했다.
팔뚝이 생각보다 두껍다. 잘 익은 빵 껍질처럼 구릿빛 피부에 두툼한 근육의 모양이 창을 쓰는 자신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주로 무기를 쥐고 내지르는 자신과 달리 사람만한 장궁의 현을 쥐고 잡아당기는 것은 어깨와 팔꿈치 사이의 근육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그런 것치고는 어깨에서 이어지는 등근육도 제법이었다. 그러고 보니 궁병 주제에 검도 곧잘 썼었지..
섹스를 앞두고 태평한 생각이라고 할 수 도 있겠지만 랜서는 아쳐의 몸에 집중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하품이 나와버릴지도 모른다.. 이대로 팔뚝만 만지작거리게 두면 되는 건가? 그냥 아까처럼 입부터 부딪혀볼까? 정말 미안하지만 섹스하기 전에 이렇게 경건하게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는 문화는 어디 건지 모르겠고, 그에겐 적응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랜서의 반듯한 쇄골 위를 손가락으로 죽 미끄러뜨리며 부드럽군. 하고 중얼거린 아쳐의 목소리에 목덜미에 닭살이 돋고야 말았다.
랜서는 자신의 쇄골을 만지작대는 아쳐의 손목을 텁 붙잡고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아쳐의 얼굴에 으르렁댔다.
“뭘 하는 건데?”
“음? 전희에는 익숙하지 않은 건가?”
살짝 눈웃음을 치고는 콧날을 문질러 입술이 마주닿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아쳐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랜서는 히익 하고 기겁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상체를 쭉 뒤로 뺐다. 결과적으로 침대에 풀썩 눕게 되었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그냥 아까처럼 하면 안 돼겠냐!? 애를 만드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전희야!”
아쳐가 말하는 게 뭔지는 안다. 자신도 여자를 안을 때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함께 기분이 좋아질 수 있도록 이런저런 노력도 많이 기울인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대가 그 별종 아쳐 아닌가!?
진짜 단순히 박거나 박히거나 싸고 싶어서 온 건데 이렇게 나올 줄이야?
그러나 뜨악한 표정의 랜서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아쳐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랜서의 입술에 진하게 입을 맞췄다. 랜서는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곤 자신을 살피는 아쳐를 마주 노려보며 순순히 입을 벌려 혀를 내밀었다. 질척하게 점막과 혀가 비벼지는 감촉이 적나라했다. 키스는 속도광이 모는 오픈카 수준인데 왜 섹스는 스쿨존처럼 하려고 하는지 진짜 모르겠다.
“그런 취향이라면 맞춰주지 못할 건 없지만, 나는 그런 아까운 짓을 하고싶지는 않다.”
“켁.. 좀 맞춰주면 거기가 식기라도 해?”
“먼저 하자고 온 건 네 쪽이니 침대 위에선 내쪽에 맞춰주는게 균형이 맞겠지.”
“이봐요, 형씨.”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랜서. 재촉받는것도 나름대로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만! 마음대로 하쇼!”
무슨 언변이 이 따위야!
순식간에 하고 싶어 안달난 영령으로 자신을 매도하는-사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궁병의 말에 랜서는 항복하듯 외치고 양 팔을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무장 해제의 뜻이 퍽 마음에 드는지 큭큭 웃던 아쳐는 랜서의 바지에 손가락을 걸고 그대로 밑으로 끌어당겼다. 허리를 들어올려 바지를 벗기기 쉽게 도운 랜서는 아쳐가 바지를 침대 바닥에 휙 내던지는걸 곁눈질로 확인하고는 씩 웃었다. 혹시라도 무릎 끓고 바지를 개기 시작하면 그냥 뒤통수를 부수고 교회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운이 좋은 녀석이다.
“끄응..”
입에서 탄식 비슷한 소리가 새어나온다. 마주댄 입술에서부터 턱끝, 쇄골까지 내려간 입술이 가슴 어림을 맴돌고 있었고 큼직하고 뜨끈한 손바닥은 무릎과 허벅지를 더듬더듬 문질렀다. 가슴에 닿는 뜨끈한 숨결이 기분나쁜건 아니었지만, 은근슬쩍 엉덩이를 주무르려다 마는 손길은 역시 조금 신경쓰였다. 랜서는 눈을 감고 눈썹을 팍 일그러뜨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뼈가 붙고 살이 붙어 어쩌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만들어냈다.
‘이 새끼.. 혹시 처음은 아니겠지?’
생긴 것만 보면 양팔에 미인을 두셋씩 끼고 후려댔을것처럼 생겼으면서 설마 경험이 없다거나?
애송이처럼 키스하다 피를 보거나 어설프게 간을 보는 손장난도 경험이 없어서 허둥대고 있는 거였나.. 랜서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아쳐의 움직임은 느릿했다. 어찌 보면 최선을 다해 만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해 우물쭈물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녀석도 할 맘은 있는것 같은데..
짠하다.
랜서는 어른이었고, 아쳐를 탓하는 대신 자신의 행운 랭크를 탓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자신의 매력에 대해서는 티끌의 의심도 없다는 점이 정말로 어른스러운 점이었다.
“아-쳐.”
“음?”
“남자랑 해본 적은 있냐?”
“......”
정답이구만. 저 녀석 성깔에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지금이라도 엎어버릴까? 하지만 남자가 처음이라는 녀석 뒤를 그렇게 정성껏 공략하고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강하게 끝까지 치닫고 싶을 뿐이다.
랜서는 벗은 다리를 들어올려 아쳐의 허리에 감고 바짝 당겼다. 흡, 하고 숨막히는 소리와 함께 두둑한 고간이 꾹 문질러져 랜서는 퍽 안심했다.
일단 물건의 질량이 보통 이상이라는 점이 마음에 쏙 든다.
“어쨌든 네가 넣는 쪽이면 어렵지도 않거든? 내가 엉덩이를 내준다는데 뭘 그렇게 염불을 외고 있냐.”
“엉덩, 아니 그게 아니라 랜서,”
“재촉해서 될 일이면 재촉해야지. 안 그래?”
이를 드러내며 씩 웃자 아쳐의 얼굴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어라, 이 녀석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가? 쪽팔린건 알고 있다 이거야?
“미안하다.”
“그래, 미안.. 엥?”
“확실히, 너무 이쪽 생각만 한 모양이군.”
영문 모를 소릴 중얼거린 아쳐의 손가락이 엉덩이 윗 부분, 침대에서 살짝 떠오른 공간을 파고들어 엉덩이 골 위쪽을 문지르다 밑으로 미끄러졌다. 살덩이를 가르듯 엉덩이를 움켜쥐는 손이 제법 거칠어서 랜서는 윽, 하고 방심한 채 짧게 소리를 냈다.
“최선을 다해보겠다.”
“그, 그래..”
교회 앞에서 맞붙었을때도 이런 얼굴은 아니었던것 같은데. 랜서는 어쩐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