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은 병원 후문쪽에 위치해 있었다. 내려간 김에 응급실 당직실에 늘어져있던 보쿠토의 뒷덜미를 들어올려 자판기로 이끌었다. 바짓단을 걷어올린 슬리퍼 차림에 가운은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보이지도 않고, 마스크를 턱 아래 대충 고정한 모양이 교수님이 보았으면 기어코 한소리 들었을만한 불량한 모습이었다. 하품을 하며 턱을 긁는 모습이 전반적으로 구렸다.
쿠로오는 분명 이틀동안 몸뚱이에 물 한방을 묻히지 않았을 보쿠토의 상태를 보며 쯧쯧 고개를 저었다.
자판기에서 포카리를 뽑아 그에게 건네는 쿠로오의 몰골도 물론 보쿠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하던가.
“오늘 ER 아카아시 아니었냐.”
“아- 일이 생겼대서.”
“쯧쯧. 안됐구만~”
“너마저 날 두고 가지 마!”
복도에 미적거리며 집에 가려면 자신도 함께 데려가라던 개논리를 펼치던 보쿠토는 결국 처방 주셔야죠! 라고 외치는 ER간호사의 출동으로 쿠로오를 놔 줄 수밖에 없었다. 하아. 피식 웃으며 닫히는 응급실 문을 바라본 쿠로오는 기지개를 쭉 피며 하품을 쩍 했다.
집에 가면 목욕부터 하고 자야지. 그럼 내일 오전 7시 교수님 회진시간까지.. 한 여섯시간은 잘 수 있겠다. 시계를 확인한 쿠로오가 이내 가볍게 발걸음을 내딛으며 병원 후문을 벗어나는 순간, 가로등 밑의 한 인영이 눈에 박혀들었다. 딱 보니 정상인의 발걸음은 아니었다.
‘취했나?’
응급실에 실려오는 갖은 꽐라들의 진상짓을 보다보면 내성이라는게 생길 법도 한데, 개지랄은 아무리 익숙해져도 개지랄이라 싫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회사원인지 검은 양복을 입은 채 비틀비틀 병원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며 막 휴대폰과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뒤에서 털썩 하고 사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방금 지나친 그 남자가 주저앉은 것도 아니고 아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봐요!”
깜짝 놀라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 남자의 어깨를 잡고 흔든 쿠로오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망할. 어째서 방금 전은 모르고 지나쳤나 싶을 정도로 비린 피냄새가 진하게 난다. 지금 보니 남자가 지나온 보도블럭 위에도 핏방울이 점점히 떨어져 있었다. 미친, 실혈량이 엄청나잖아. 지금 이 상태로 멀쩡히 걸어왔다고!? 인간이야?
의사! 아니 내가 의산데, 앰뷸런스! 미친 여기가 응급실이잖아!
잠시간의 자아분열로 혼란스럽던 쿠로오가 제정신을 차리고 축 처진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피가 나지 않은 쪽 팔을 목에 걸어 그를 거의 업다시피해 들어올린 쿠로오의 머릿속엔 피투성이가 되어버릴 그의 상의에 대한 걱정은 들어있지도 않았다.
“긴급환자야! 복부에 자상! 라인부터 확보해!”
“쿠로오 선생님!? 퇴근하신거 아니었어요!?”
“보쿠토! 처방 좀 내줘!”
쿠로오가 남자를 업고 응급실로 뛰쳐들어오자 곧 눈치 빠른 간호사가 간이침대에 방수포를 깔고 바퀴를 드륵 밀어 남자를 그 위에 눕혔다. 트레이에 실린지를 가져온 간호사가 팔꿈치에 라인을 잡는 사이 쿠로오는 혈액검사 통을 잡히는 대로 손에 쥐어 가져갔다.
“헉. 쿠로오 혹시 아는 사람이야!?”
“설마. 이 앞에서 쓰러져 있길래 데려온거야.”
“지인 아니에요!? 접수해야 하는데!”
입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보쿠토는 가위로 남자의 옷을 자르며 상처부위를 드러냈고 간호사들은 혈압을 재고 소독셋을 준비했다.
남자의 상태는 퍽 심각했다. 얼굴도 피와 작은 상처들로 엉망, 오른쪽 옆구리는 칼 같은 것으로 적어도 두번은 찔렸고, 피가 멎지 않았다. 가위로 남자의 정장을 자르던 쿠로오는 퉁퉁 부어있는 남자의 팔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조심스레 팔을 다시 침대에 내려놓는 순간 남자의 미간이 움찔 찌푸려진다. 쿠로오가 남자의 귓가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외쳤다.
그렇게 묻는 간호사의 말에 쿠로오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보호자라니! 나 저 사람 초면이야!
“지금 보쿠토 선생님 OR[각주:5]에서 전화온거 받고 계시단 말예요! 보호자 동의 없인 수술 안되는거 알잖아요! 원래 최초발견자는 보호자 노릇까지 해야 한다구요!”
그때 또다른 간호사가 혈액운반 박스를 들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아, 마침 잘됐다. 쿠로오 선생님. 환자분 수혈있어요. 전혈이에요.”
“아악...!”
쿠로오는 짜증내며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혈액통을 받아들였다. 오늘따라 눈에 채이는 인턴들도 하나도 안 보이고, 보쿠토와 다른 의사들은 지금 사진 처방내고 OR스케쥴 조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잉여인력이라곤 쿠로오 본인뿐이다. 나는 이만 퇴근할께요~ 라고 말하기엔 쿠로오가 데려온 환자라 차마 그럴 염치가 없다. 혈액팩에 라인을 꽂고 쭈욱 공기를 내보내 남자의 팔꿈치와 연결된 쓰리웨이에 연결한다.
남자의 안색은 창백했고, 거즈와 붕대로 응급처치한 옆구리는 벌써 벌건 핏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짧은 곱슬머리가 이마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있었다.
등짝을 화려하게 수놓은 문신만 봐도 알겠지만 아무리 봐도 주먹 쓰는 형씨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만 가면 유흥가가 있어 응급실에서 이쪽 사람을 보는게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남자만큼 잘생긴 조폭은 보지 못했다- 라고 때에 맞지 않는 감상을 늘어놓고 있는데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쿠로오는 자연스레 수혈팩을 확인하는 척 고개를 들어올렸다.
“..누구야.”
“의사랍니다. 환자분, 정신이 좀 드시나요?”
“...사복이라 놀랐잖아.”
그리고 남자는 다시 기절했다, 진짜 기똥찬 능력이네. 쿠로오는 쯧 혀를 차고는 결국 남자가 수술실로 들어갈 때까지 응급실에서 손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흐아아암~”
“쿠로오 선생님. 오늘따라 머리가 강렬하네요.”
“아. 다이치 선생님.”
하품을 쩍 하며 가운을 걸치던 쿠로오는 다이치가 건네주는 종이컵을 받아들곤 입술에 가져갔다. 뜨거운 믹스커피에 입술만 적시고 컵을 내려놓자 식혀서 드릴껄 그랬나봐요, 라고 웃으며 자연스레 의국 문을 열고 쿠로오가 나올때까지 문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카라스노대병원 소화기내과 3년차 레지던트였다. 현재는 이 병원에 연구차 와있었고, 함께 네코마타 교수님 아래에서 전문의가 되기 위해 수학하는 사이였다.
“간만에 집에서 잤더니 머리카락이 좋다고 난리네요.”
“아아. 역시 의국 베개는 별로인가보네요.”
보통 오전 여섯시에 모여 간단히 담당 환자들 수술 일정과 사례들을 발표하고 일곱시 가량부터 회진이 시작된다. 회의실 앞에서 담당 환자들의 스케쥴을 체크하던 쿠로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환자목록 제일 위쪽 하늘색 표시가 되어있는 환자의 이름이 익숙했다.
‘마츠카와 잇세이.’
이 환자가 왜 나한테 와있어?[각주:6]타블렛을 터치해 환자정보를 보니 어제 응급실 통해 입원, 자상으로 인한 간손상, 복막손상, 맹장.. 아 어제 아예맹장까지 제거했구나. 수술경과를 보니 왜 소화기로 전과한건지는 알겠군. 그런데 분명 어제 소화기내과 당직이 리에프였을 텐데 왜 이 환자가 나한테 와있지. 게다가 지금 남는 병실 없을텐데. 병실을 확인하자 병원 동관 12층 VIP병동의 1인실이었다. 아아. 1인실은 이야기가 다르지..
다친 왼팔 때문인지 OS의 보쿠토에게 협진까지 처방되어 있는 상태였다. 좀 더 차트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네코마타 교수님의 등장으로 타블렛을 덮고 회의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리에프.”
쿠로오는 함께 온 다이치에게 양해를 구하고 리에프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 그래도 희멀건 녀석이 어제 밤을 샜는지 눈밑이 시꺼먼게 저승사자가 형님 하고 찾아올 정도로 안색이 퍼랬다.
“쿠로상..”
“어제 ER로 온 환자 기억해?”
“어.. 아, 쿠로상이 데려왔다는 환자 말이죠?”
쿠로오는 타블렛을 움직여 다이치가 발표하는 환자의 정보를 화면에 띄웠다. 귀로는 리에프의 말을 듣는 채였다.
“원래 제가 맡으려고 했는데, 환자분이 주치의 쿠로상 지명했다는데요. 그래서 ER에서 아예 쿠로상 환자로 위에 올렸다고..”
“지명? 여기서 호스트바냐 지명하게.”
“암튼 그렇다구요.. 제가 넘긴 거 아니에여.”
양복 꽤 비싸보였는데, 설마 내가 멋대로 옷 잘라버렸다고 손해배상 이야기 꺼내는건 아니겠지? 쿠로오는 잠시 그리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12층 환자는 귀찮은데. 일단 소화기병동인 본관 8층에서 왔다갔다 하기에 동선이 꼬이는데다 비싼 병실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만큼 걸핏하면 콜이 걸려와 오라가라 말이 많았다.
“하아.. 이몸의 인기란. 하여튼 죄많은 남자라니까.”
“죄는 그 환자가 더 많아보이던데요..”
네가 잠이 덜 깼구나. 쿠로오는 리에프의 목에 팔을 감고 그대로 체중을 꾸욱 눌렀다. 그러다 다이치의 상냥한 눈과 마주쳐 슬금 암바를 풀고 눈치만 보게 되었지만.
당연하지만 회진도 VIP병동부터 순회를 하게 된다. 8시면 막 병실에 아침식사가 나올 시간대였고, 전문의, 레지던트, 그리고 인턴들이라는 열명에 가까운 인원이 한분의 교수님 뒤를 쭐래쭐래 쫓아 환자와 차트를 비교하며 환자 앞에서 교수님께 대차게 까이는 순간이었다. 본격 환자 앞의 수치플레이랄까. 그러나 12층에 도착해 엘레비이터에 내렸을때, 쿠로오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스테이션의 간호사들이 소화기내과다! 왔어! 라고 작게 외치며 벌떡 일어나는 모습은 이 병원에서 일한 뒤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7호실 마츠카와 환자분 회진 오신거 맞으시죠..!?”
낯선 이름인지 네코마타 교수님이 갸웃하며 차트를 팔랑 넘겼다. 쿠로오는 교수님이 환자의 주치의를 확인하기 전에 먼저 나섰다.
“맞는데요. 무슨 일입니까.”
“아뇨, 환자분이 회진을 기다리고 계셨거든요! 이쪽이에요!”
쿠로오는 간호사의 변화에 일조한 것이 복도를 망보듯 두명씩 짝지어 드문드문 서있는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란 것을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병원인데, 너무하잖아. 아직 제대로 일면식도 없는 남자의 호감도가 야금야금 차감되는것을 느끼며 쿠로오는 교수님을 7호실로 안내했다. 가볍게 노크하자 인간보다는 고릴라의 생김에 가까운 덩치가 슬쩍 문을 열고 입을 열었다.
“뭐요?”
“...마츠카와 잇세이 환자분 병실 아닙니까. 회진입니다.”
남자는 뭐 어쩌라는 표정으로 쿠로오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번 슥 흩더니 힐끔 눈초리를 좁혔다. 기가 막혀서. 쿠로오는 제 뒤의 의사들이 벙찐 표정일꺼라 확신했다. 무슨 평일에 초인종 누르는 기독교 전교사같은 취급이냐.
“형님 주무시오. 낮에 다시 오쇼.”
“잠깐...!”
울컥한 쿠로오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문이 쾅 닫혔다. 쿠로오의 볼에 핏줄이 불뚝 섰다. 뭐 이런 진화 덜 된 새끼가..!
“그럼 다음 환자 가지.”
네코마타 교수님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차트를 팔랑 넘긴다. 쿠로오는 병실 문을 뒤돌아보며 홀로 짜증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탕, 하고 거칠게 식판을 내려놓는 쿠로오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점심 메뉴로 좋아하는 꽁치구이가 나온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이랄까. 쿠로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집어드는데 헤이! 하고 어깨가 붙들리며 옆자리로 누군가가 자릴 채운다. 쿠로오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실없는 소릴 하던 보쿠토는 식판 위의 꽁치를 들어 쿠로오의 식판에 턱 올렸다. 어멋! 이게 웬 떡이람! 쿠로오가 깜찍하게 외치며 보쿠토를 쳐다보자 나 생선은 별로야. 라고 대답하며 대신 쿠로오의 식판에 있던 감자샐러드를 숟가락으로 싹 긁어갔다. 어머 이게 웬 개떡이람.
“너 어차피 샐러드보다 꽁치 더 좋아하잖아! 아 맞다. 쿠로오, 어제 그 환자 있잖아?”
“생선만 먹으면 좀 짜단 말이지~ 그런데 그 환자라니?”
“네가 데려온 그 환자, 진짜 모르는 사람이야?”
쿠로오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제서야 보쿠토의 얼굴로 고갤 돌려 그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제 응급실 그 환자? 문신한? 응.
“진짜 몰라. 그냥 응급실 앞에서 쓰러지길래 데려온건데. 왜?”
“아. 그 사람이 너 찾았거든.”
쿠로오의 머릿속에 병실 앞을 지키던 험상궂은 남자들의 모습이 순간 스쳐지나갔다. 내가 어제 그 환자한테 뭐 어떻게 했더라. 정신차리라고 뺨이라도 때렸던가? 생각해보니 두번정도 때렸던 것도 같다.
“왜!?”
“몰라. 그냥 너 어디갔냐고 묻길래 퇴근했다 그러니까 이름 물어봤어.”
“그래서 대답해줬냐.”
“응.”
뭐 문제라도? 태연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뜬 보쿠토의 면상에 꽁치 머리를 던져버릴뻔 한 쿠로오는 한숨을 턱하니 내쉬었다. 어쩐지 리에프가 지명 운운 하더니만 보쿠토한테서 내 이름을 들었군..
뭐, 상관없지. 쿠로오는 이 생산성 없는 고민을 털어내버리기로 결정했다. 그 환자가 내 환자면 어떻게 리에프 환자면 어떠리. 어차피 리에프의 환자가 되었더라도 뒷감당은 죄다 자신이 해야 했을 것이다.. 애초에 쓰러진 남자에게 먼저 손은 내민건 자신이고 이제와 관련되기 싫다느니 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그 남자를 병원에 데리고 온 이상 빠르나 늦으나 그 환자 귀에 내 이름은 들어갔을 것이다.
“그보다 환자 왼팔골절, 어쩔꺼야? 그냥 깁스?”
“아아. 사진 보니까 수술해야 돼. Post op[각주:7]경과 보고 정하려고 했는데 환자 상태는 어때?”
쿠로오는 말없이 타블렛을 꺼내 환자의 차트를 내보냈고, 보쿠토는 더 금식시키지 말고 왠만하면 얼른 끝내버리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명 식판은 제가 먼저 퍼 온것 같은데 보쿠토는 빨리도 식판을 비웠다. 빈 식탁을 앞에 두고 옆에서 떠나질 않는 것이 혼자 밥먹는걸 좋아하지 않는 저를 배려한 거란걸 아는 쿠로오는 얼른 밥을 목구멍 안으로 우겨넣었다. 안그래도 바쁜 녀석인데 오래 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수술일정 잡히면 연락 줄께! 라고 외친 보쿠토와 헤어지고 쿠로오는 곧장 서관 1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주무시는 형님 지금쯤이면 잠 깨셨겠지.
병동으로 올라가자 마치 저만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간호사가 벌떡 일어났다. 오야? 왠일로 이렇게 적극적인..
“7호실 환자 맞으시죠!? 오신 김에 드레싱[각주:9] 좀 해주세요! 오전에 쫓겨났어요!”
이렇게 적극적인.. 떠넘기기가..
쿠로오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간호사가 내민 D-Set[각주:10]을 들고 인턴들은 어쨌냐고 물었다. 간호사는 그저 병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났다며 투덜거렸다. 어쩐지 점심때 헤모박[각주:11] 삼출물이 몇CC나왔는지 차트에 안 올라와 있더라니..
쿠로오는 예상대로 피곤한 환자라고 생각하며 병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얼핏 들어와.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어제 그 의사로군.”
이마엔 붕대, 볼에는 거즈, 왼팔은 깁스로 고정하고 구멍난 배엔 관이 연결되어 있는데다 멀쩡한 오른팔로는 세개나 되는 수액을 맞고 있는 목소리 치곤 지나치게 멀쩡했다.
“주치의인 쿠로오 테츠로라고 합니다. 초면은 아니죠?”
“아아. 솔직히 어제 봤을땐 진짜 의사 아닌 줄 알았는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더니 배가 아픈지 눈살을 잠시 찌푸렸다.
“가운 입은 모습도 의외로 잘 어울리네.”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쿠로오는 유들유들하게 받아치며 디셋을 환자 옆에 올려두고 커텐을 쳤다.
그 험상궂은 형님들은 점심시간이라고 나간 건지 병실 안은 이 환자 뿐이었다. 이래뵈도 꽤나 중환자인데, 여고생마냥 우르르 몰려다니지 말고 한명쯤은 붙어있으란 말이다..
남자의 눈썹이 제법 순박하게 아래로 쳐진데 반해, 눈매는 몹시 매서웠다. 의사와 환자로 만나 정면으로 얼굴 보지 길거리였다면 음 분명 내가 먼저 시선 피했다 싶을 정도로 살벌한 눈이었다. 쿠로오 본인의 인상도 몹시 사나워 길거리에서 무작위로 발생하는 눈싸움 따위에 단 한번도 시선을 피해본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붕대를 풀고 수술 부위를 새로 소독하며 거즈를 갈았다. 피주머니를 비우고 안에 찼던 핏물을 체크하고, 접합부를 다시 한번 거즈로 감싼다. 통증과 상처에 익숙한지 일련의 과정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쳐다보지 않던 남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제, 날 데려온게 선생이라며.”
쿠로오는 마지막으로 남자의 배에 다시 새 붕대를 감고 테이프로 고정했다. 흐음.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조용했지만 왠지 귓속에 직접적으로 꽂히는 목소리. 자신의 볼에 와닿는 남자의 시선에 어쩐지 담배가 고파질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뭐 감사받을 일이라고.”
“운 좋은 줄 알아. 내 얼굴에 손대고 멀쩡한 사람은 침대 안에 들어온 녀석들 뿐이거든.”
쿠로오는 허 하고 작게 웃었다. 대놓고 비웃을 수 없는 것은 그래도 이 남자가 아직 저의 환자이기 때문이다.
“환자분이야말로 운이 좋습니다. 저도 제 옷을 피범벅으로 만든 사람을 왠만하면 용서 못하는데, 환자는 예외거든요.”
“아하.”
환자복 상의를 대충 추스리는 남자를 뒤로하고 커텐을 열었다.
“그런데 아침잠이 많은 편이십니까? 매일 오전 8시경에 교수님이 오시는데, 기왕이면 얼굴 좀 보여주시는게 좋지 않을까요.”
오전 여덟시? 남자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시계로 시선을 올렸다.
“아아. 밤새 아파서 잠을 못 잤어. 새벽에 진통제 맞고 잤는데, 왜. 회진 오셨다가 쫓겨나기라도 했나?”
“..진통제 처방이 새벽에나 났습니까?”
리에프..! 쿠로오는 타블렛으로 환자의 지난 처방을 확인했다. 그의 말처럼 새벽 다섯시에 prn[각주:12]페치딘[각주:13] 처방이 나와 있는걸 보니 졸다가 새벽에야 일어나 부랴부랴 처방을 내린게 분명했다. 까다로운 환자였으면 진통제 안 주냐고 스테이션을 뒤집어 엎어도 할 말이 없을 일이었다. 쿠로오는 여기서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 그런데 회진이란 거 꼭 받아야 하나.”
“뭐, 입원했는데 교수님 얼굴은 봐야죠.”
“난 선생 얼굴이면 충분해.”
“하긴 제가 미남이란 소리는 많이 듣긴 합니다.”
쿠로오 딴엔 농담으로 던진 말에 남자는 입술만 끌어당겨 웃으며 눈으로 쿠로오의 얼굴을 샅샅히 흩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만져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나란 남자는 정말 죄많은 남자라니까.. 하고 웃어 넘기기도 힘들다 이런 눈은.
부러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얼굴을 돌리며 어디 불편한 곳은 없냐 물었는데, 남자는 턱끝으로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냉장고.”
“......”
의사는 네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이 환자 자식아. 그러나 결국 몸이 불편한 환자더러 일어나 냉장고로 가라 할 수 없어 쿠로오는 입가를 씰룩이며 냉장고로 걸어갔다.
“냉동실.”
냉동실.. 얼음팩이라도 대고 있으려는 건가. 미열이 좀 있긴 했는데 아이스팩을 댈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런 쿠로오의 염려와 달리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운것은 병원 지하 편의점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사온게 분명한 아이스크림 창고였다. 이정도 양이면 못해도 삼분지 일은 털어왔을 것이다.
쿠로오는 고갤 뒤로 돌려 제법 엄하게 환자를 다그쳤다.
“금식이란 말 못들으셨습니까?”
“내가 먹으려고 산 건 아냐. 더운데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가.”
“하하. 말씀은 고마운데.”
“어차피 내 주치의잖아. 먹으면서 이야기 하자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리 길게 하려고? 힐끔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한 쿠로오는 더 거절하지 않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집어들어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묻고싶은 거라도 있으십니까?”
“물은 언제부터 마실 수 있는거지?”
“일주일은 꿈도 꾸지 마시죠. 그래도 수액이 지속적으로 들어가니까 갈증은 심하지 않을 텐데요.”
“아아.. 입이 건조해지는 느낌이라.”
“간호사한테 거즈 몇장 얻어서 물에 적셔 물고 있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대신 목마르다고 물 빨아마시면 안되시고..”
아드득 하고 아이스바를 깨물어 먹으며 쿠로오가 이어 말했다. 호기롭게 아이스크림을 먹긴 하는데, 이거 금식하는 환자 앞에서 괜히 염장지르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남자는 조용히 아이스크림을 씹어먹는 쿠로오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웃음 비슷한 소릴 냈다. 원래 많이 웃는 편인가 아니면 저런 웃음인지 으르렁거림인지 하는 목울림은 버릇인 것인가. 참 생긴 것에 어울리는 살벌한 버릇이란 생각이 들었다.
“맛있게 먹네.”
“음식을 남기면 벌받는다고 배웠거든요.”
남자는 대답 없이 입꼬리만 묘하게 치켜 올리고 상체를 뒤로 비스듬히 눕혔다. 분명 이쪽의 시선이 위에 있는데 어쩐지 내려보는 느낌이 든다.
“벌 받는거 싫어하나봐..?”
하. 쿠로오는 뒷목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벌도 벌 나름이지.”
명백히 섹슈얼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 말투에 쿠로오는 대답 없이 다 먹은 아이스크림의 막대를 휴지통에 가볍게 던져넣었다.
탕, 하고 가벼운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쿠로오는 분위기를 환기하듯 아. 하고 막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왼팔 수술해야 하는건 이야기 들으셨나요?”
“처음인데.”
“뼈가 못나게 부러져서 철심 박아야 합니다. 아마 내일쯤 수술할텐데, 저녁 전에 동의서 받으러 사람 올테니 보호자랑 대기하고 계시죠.”
“그럼 선생도 같이 오겠네.”
“예?”
“어제부터 내 보호자였잖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비죽 웃었다. 쿠로오는 상냥하게 방긋 웃으며 대답 없이 나가 문을 쾅 닫았다.
남자는 손을 들어 이마를 한번 쓱 훔쳤다. 머리를 세워 시원하게 드러낸 이마엔 벌써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때는 봄, 아직 초여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날씨였지만 번쩍번쩍 빛나는 은색의 판금갑옷을 갖춰입고 건틀렛과 망토까지 차려입은 모습으로는 확실히 더울 만한 날씨였다.
흰색과 검은색의 모발을 한껏 세워 올린 남자는 손에 들고 보던 양피지를 둘둘 말아 허리춤에 찬 가죽가방에 집어넣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슬슬 마을이 나와야 하는데..
“오오!”
울창한 숲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만 빙 돌던 남자는 이내 사람 여럿이 다닐만한 길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여기가 그 마을이구나!”
“파아-! 이거 물이 정말 시원하군!”
“어이구, 기사님이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로..”
마을에 들어선 남자는 마을 주민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과 허리에 멋드러지게 찬 장검, 그리고 윤이 나는 망토는 남자의 신분이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왕국 근위기사단의 제 2기사단장인 보쿠토 코타로는 잔뜩 주눅든 마을 촌장에게 시원하게 웃어보였다.
“하하, 그야 자네들이 영주님에게 탄원서를 올렸지 않나!”
“예? 예, 물론 그랬습죠!”
“근위기사단들은 몇년에 한번씩 무사수행을 가야 해. 마침 이쪽 지역으로 왕국민을 도우러 온 김에 영주님의 부탁을 받고 내가 온거야. 대체 이 평화로운 마을에 대체 무슨 고민이 있지?”
그 말에 촌장집에 모여있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상에! 왕궁의 기사님이 직접 오시다니! 촌장댁의 낡은 창틀 밖에서 기사님을 훔쳐보던 악동들은 잔뜩 신나서 전쟁놀이를 하기 위해 나무막대기를 주웠고 기사님의 훤칠한 생김에 마을 처녀들의 가슴에 봄바람이 불었다.
“듣자 하니 사악한 마법사가 있다지?”
“예, 저기 숲 안쪽으로 성이 보이십니까?”
“호오..”
보쿠토는 촌장의 굽은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짙은 수해 너머로 뾰족한 성의 지붕이 튀어나와 있었다. 숲 한가운데에 지어졌다 생각되어지지 못할 정도로 크고 웅장해보이는 성이었다.
“저기엔 무서운 마법사가 살고 있습죠.. 그동안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다만은..”
그러나 몇달 전부터 숲속에서 검은 큰 짐승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때마침 마을의 몇 없는 가축들이 야생동물에게 습격을 당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달 전에는 밤마다 짐승 우는 소리가 들리고 불을 뿜으니 마을 사람들이 무서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사흘 밤을 꼬박 걸어가 영주에게 탄원을 넣었다.
“다행히 요즘은 밤중에 우레가 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말입니다.. 종종 닭이나 병아리들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요.”
“그렇군!”
보쿠토는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차림 음식 중에서 제일 가까이 있던 빵을 크게 이로 베어물었다. 평소 먹던 부드러운 빵과는 달리 거친 식감에 목넘김도 좋지 않았지만 시장이 반찬이었다. 염소젖으로 만은 퀴퀴한 치즈와 빵으로 대충 배를 채운 보쿠토는 촌장이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들고 숲에 난 길로 떠났다.
“아이구, 미치겠네. 자고 내일 떠나라고 할 때 그러마 할껄 그랬나.”
그리고 현재 보쿠토는 숲 한가운데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가죽 물통의 마개를 따고 있었다. 마을에서 봤을때는 상당히 가까운 성인줄 알았는데, 굽이굽이 난 숲길을 가서 그런지 아직도 성은 멀기만 했다. 밤중에 숲을 걸을 기술도 용기도 없으니 이곳에서 밤을 지내야 하는데 보쿠토는 아무런 도구도 없었다.
아무리 왕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라 해도 자는 동안 산짐승의 습격을 받으면 위험한 것이라, 보쿠토는 슬슬 본격적으로 밤을 지샐곳을 알아보야야 했다.
“가진 건 부싯돌 정도인가..”
급한대로 나뭇가지와 손수건을 이용해 횃불을 만들었다. 적당한 바위나 굴이라도 좀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숲길을 이탈할 수 없으니 길을 따라 죽 걷는다. 수도와 달리 이 울창한 숲은 아직 해가 채 지기도 전인데도 벌써부터 짙은 음영을 드리웠고, 밤을 사는 짐승들의 활발해진 소리가 조용한 숲 사이에 나직하게 울렸다.
“이거 조금 위험한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지만 횃불에 미친 기사의 눈동자는 금색으로 번뜩이며 주위를 날카롭게 흩었다.
사람의 눈동자는 야행성 동물에 비해 안광이 강하지 않다고 하는데, 남자를 보면 꼭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밤의 숲이 무섭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그는 곧 숲 안에서 작은 불빛을 발견하고 어..? 하며 눈을 깜빡깜빡 움직였다.
“헤이헤이헤이! 이봐!”
숲길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었다. 보쿠토는 무성히 자란 덤불을 제치고 성큼성큼 걸었다. 곧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공터와 함께 작은 나무 오두막이 나타났다. 작은 불빛은 바로 그 집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혹시 사람 있나!? 잠깐 나 좀 도와줘!”
보쿠토가 주먹으로 나무문을 막 두드리기 전에, 먼저 문이 끼익 열렸다. 보쿠토는 횃불을 들지 않은 손을 어정쩡하게 올리고 집 안에서 나온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런 시골 촌구석 숲 속의 오두막에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멀끔한 남자였다. 키는 보쿠토와 비슷하거나 조금 큰 것 같았지만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닌지 피부는 흰 편이었고 조금 마른 편이었다.
입고 있는 검은 옷은 시골에서 흔히 입는 아마색이나 갈색의 저렴한 천이 아닌지 약간 광택이 나고 있었다. 남자는 서늘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이 마치 자신을 비난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구?”
남자의 저음은 깜짝 놀랄 정도로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보쿠토는 살짝 열린 문 틈으로 반만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다 퍼뜩 대답했다.
“숲에서 맨몸으로 밤을 새게 되었거든! 헛간이라도 괜찮으니 좀 빌려줄 수 있어? 사례는 할 테니까.”
“흐음.. 들어와.”
보쿠토는 들고 있던 횃불을 바닥에 비벼 끄고 남자를 따라 문 안으로 몸을 옮겼다.
집 안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어보였다.
“현관에서 먼지 털고 들어와.”
막 안으로 발을 내딛은 보쿠토는 머쓱한 얼굴로 갑옷과 부츠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나뭇잎이 잔뜩 묻은 망토를 벗어 문 옆의 옷걸이에 걸었다. 아마도 저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외투 옆이었다.
보쿠토는 자신도 모르게 콧잔등을 킁, 하고 약하게 씰룩거렸다. 향긋한 약초 냄새에 섞여 정제되지 않은 기름 냄사와 아교 냄새같은게 섞여 묘한 향이 집안을 메우고 있었다.
남자가 손바닥만한 화로 안에 향료로 보이는 마른 풀을 넣고 뚜껑을 닫자 향긋한 냄새가 짙어졌다. 그는 보쿠토의 허리에 매달린 장검을 보고 물었다.
“흐음.. 기사님?”
“응. 맞아. 너는 이곳에서 사는건가?”
“보다시피. 뭔가 요깃거리라도 좀 드릴까나?”
“오오. 부탁해!”
남자의 집 안은 신기한 것이 많았다. 벽에 사슴 박제 따위가 걸려있는 걸 보니 사냥꾼인가 싶었지만 그런것 치고 활이나 올가미 따위의 도구는 보이지 않았고 가지런한 선반이나 낡았지만 꽤 화려만 무늬의 양탄자 따위가 집 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너무 집을 힐끔거리지 않으려 했지만 유리로 만든 램프며, 정체모를 것들이 잔뜩 든 병들을 보니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데 너는 사냥꾼인가?”
남자는 부엌의 화덕에서 검은 솥의 뚜껑을 열었다. 진한 우유 냄새가 나 그곳을 돌아보니 남자는 낡은 그릇에 야채와 고기가 듬뿍 든 스튜를 덜고 있었다.
“아니, 내가 사냥꾼으로 보여?”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숲에서 사는 자들은 사냥꾼들 아닌가?”
“내가 이곳에 사는건 이 숲의 약초 때문이야.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질 좋은 약초가 많거든.”
오오! 약초꾼이었구나. 보쿠토는 그렇게 납득하고는 이내 남자의 정체에 대해 궁리하던 것을 머리에서 날려버렸다.
남자는 식탁에 푸짐한 스튜 한그릇과 밋밋한 맛의 비스킷을 차렸다. 보쿠토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수저로 크게 한술 떠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음식을 집어삼켰다.
따뜻하고 기름진 음식이 위장에 닿자 몸에 활력이 돌았다. 작은 식탁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보쿠토에게 등을 보이고 화덕에 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였다.
“기사가 아니라 걸인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흠흠, 사실 배가 많이 고팠거든. 고마워.”
남자가 끓는 주전자 안에 찻잎을 넣고 보쿠토의 맞은편에 앉았을 때 보쿠토는 이미 스튜 한그릇을 거의 다 비운 뒤였다. 남자는 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찻잔 두개를 가져와 식탁에 올렸다. 이런 시골에서 보기엔 꽤나 고급스런 잔이었다.
“아니 정말로, 마을 촌장이 대접했던 빵은 먹기가 너무 힘들었거든.”
“아항.. 귀족 도련님인가 봐?”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기색은 애송이를 보는 눈빛과 비슷해서 보쿠토는 울컥 인상을 찌푸렸다.
“도련님이라니 실례야. 이래뵈도 왕궁 제 2근위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몸이다.”
“호오? 정말? 놀랍네. 거긴 실력 좋은 기사들만 입단할 수 있다는 곳 아냐?”
“으흠흠. 그렇지. 아, 자기소개가 늦었네. 나는 보쿠토 코타로라고 한다.”
“쿠로오라고 불러줘.”
남자, 그러니까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곤 찻물을 따라 보쿠토에게 건넸다. 찻잔을 쥔 보쿠토는 기대 이상의 향기에 찻물을 들고 눈을 감았다. 쿠로오도 보쿠토처럼 잠시 눈을 감고 차향을 음미하고는, 입으로 차를 머금어 숨을 한번 내쉬고는 작게 목울대를 넘겼다.
“그럼 기사님?”
“보쿠토로 충분해.”
“그럼 보쿠토씨. 이곳엔 무슨 일로 온거야?”
빙글빙글 웃으며 그렇게 웃는 남자의 모습을 본 보쿠토는 살짝 놀랐다. 수도에서 온 기사라는 것에 벌벌 떨던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약초꾼이라고 하지만 수도에서 정식으로 약학을 배우기라도 한 걸까..
“나는 숲쪽 성에 사는 마법사에게 볼일이 있다.”
“오야?”
“그래서 말인데, 저 성까지 길안내를 좀 부탁해도 될까?”
보쿠토는 일단 그렇게 묻고는 슬쩍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혼자 가기엔 숲길도 흐릿해지고, 이 깊은 숲속에 종자 한명 없이 달랑 들어가는것도 불안했다. 약초꾼이라면 이 근방 지리는 잘 알겠지.
“마법사에겐 무슨 일인데?”
“그건.. 저 성에 도착하면 알려주지.”
사악한 마법사를 퇴치하러 왔다고 하면 지레 겁먹고 도망쳐버릴 수도 있다. 보쿠토는 눈 앞의 이 남자가 겁먹은 모습이 잘 상상되지는 않았으나,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리고는 그렇게 납득했다.
“흐응.. 물론 보수는 지급하는 거지?”
“물론이지!”
“그럼 좋아. 내일 아침 출발하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또 싱긋 웃었다. 웃는게 버릇인가? 웃을 땐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부드러워지는 눈매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보쿠토는 오른손을 쭉 내밀며 쾌활하게 외쳤다.
“그럼 잘 부탁한다!”
“으응 뭐.”
쿠로오는 악수하기 위해 내밀어진 보쿠토의 손등을 한번 톡 치고 이내 그릇을 치웠다. 악수가 거절당했는데도 이상하게 면구스럽지 않은 제스처였다.
“식당은 따로 없고, 합숙관 1층에 도시락을 배달시켜 두었으니 하나씩 가져다가 먹으면 된다. 분리수거 봉투는 현관 앞에 있으니 깨끗히 관리하도록.”
“수고하셨습니다!”
네코마와 후쿠로다니의 감독님들은 허허 웃으며 체육관을 나서고, 남은 선수들은 각자 식사를 하러 가거나, 자율연습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신젠과 달리 체육관을 개방할 수 있는 시간은 저녁 9시까지였으므로 저녁밥을 두시간정도 미루고 마저 연습을 하고자 하는 인원들이 대다수였다.
쿠로오는 의식적으로 보쿠토를 피하고 있었다. 다행히 보쿠토도 방금 전의 그 소동이 부끄러웠던지 헤이헤이! 하고 부르는 소리 없이 조용했다.
리시브 연습은 지겹다며 뿌엥 우는 리에프의 뒷덜미를 잡아다 야쿠 앞에 대령해놓은 쿠로오는 체육관 입구에서 자신을 손짓해 부르는 후쿠로다니의 매니저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아, 도시락이 도착했는데 싸인을 할 사람이 없어서요..”
쿠로오는 감독님이나 코치님은 어디 가신거냐 하는 물음을 하는 대신 씩 웃으며 그럼 갈까?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노란 올빼미의 시선이 그런 쿠로오의 뒤를 쫓았다.
코치님들과 감독님들이 친목을 다지러 인간관계의 윤활유(술)을 들이키는 걸 방해하는 대신 쿠로오가 능숙하게 나서 배달직원에게서 도시락을 인수받고 싸인을 했다. 가끔 도시락 배달을 시켜먹곤 해서 직원과도 얼굴을 아는 사이였다.
“합숙관으로 옮기면 되는거지?”
쿠로오는 끙차 하고 작게 소리내며 도시락을 들어올렸다.
“아니에요! 제가 들께요!”
“귀여운 매니저양에게 이런걸 들게할 수는 없지~ 그럼 옆에 그거 들고 따라와줄래?”
“어머나.. 믿음직스럽네요!”
“제가 상냥한건 하루이틀일이 아니랍니다.”
“꺄아~”
소란스럽게 맞장구치는 여자 매니저의 재잘대는 소리는 듣기 좋았다.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느슨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버려 두었다.
여자에게 성욕을 느끼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모습은 굉장히 귀엽고 보기 좋다고 생각이 되어버린다. 둥글고 작은 어깨와 섬세한 손끝, 통통 튀는 목소리 같은 것.
보통 남자들은 이런 것에 사랑을 느끼겠지.
도시락을 옮기고 뒷목을 주무르며 체육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녁놀에 길쭉해진 사람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을 것을, 오늘은 이 학교에 타교생이 연습차 와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미 늦은 저녁시간이고 주변엔 길을 물을 사람도 없다. 혹여나 남의 학교에서 길을 잃거나 하면 상당히 부끄럽겠지. 혹시 모르니 보고 갈까 하며 쿠로오는 내면의 오지랖을 이기지 못하고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아시..! 나, 정말로!”
어라? 쿠로오의 눈이 깜박였다. 지나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또 보쿠토 풀죽음 모드 가동인가? 별 생각없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다가가던 쿠로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좋아하나봐..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어.. 라?
“보쿠토 선배, 잠시 진정해보세요.”
“방금 전에도 난..”
쿠로오는 빙글 뒤로 돌았다. 기계적으로 발걸음이 척척 앞으로 내딛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거지.
“윽..”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 집요하게 들려왔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순간 갑자기 머리에 열이 확 몰리며 흰자위가 뜨거워졌다. 눈앞이 일렁거렸다.
보쿠토는, 그러니까. 아카아시를..
남의 학교에서 고백이라니 배짱도 좋네- 따위의 생각도 들지 않았다.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잠깐, 내가 충격? 대체 왜?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꿈이란 잠자는 동안에 깨어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일을 겪는 정신현상이다.
꿈의 표상은 형상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다.
내가 꾸는 꿈은..
보쿠로 코타로가 나를 좋아해주는 것이었어.
하, 하고 쿠로오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보쿠토 코타로는 남을 기분좋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과 배구이야기를 하면 재미있다. 네트를 마주보고 서면 승부욕이 돋는다. 같은 코트에 서면 그 등을 하염없이 보게 될 정도로 믿음직스럽다. 함께 있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왜 내가 차인 기분이지.”
뭐냐 이거. 고백도 하기 전에 차였어?
입밖으로 소릴 내어 말하니 큭큭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고백을 받아들일까? 쿠로오는 어느새 학교 뒷편까지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곤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실연의 아픔에 눈물이라도 흘러야 하는데 눈가는 욱신거릴 뿐 건조하기만 했다.
쿠로오는 손을 올려 자신의 입매를 매만졌다. 의식적으로 늘 미소를 짓기 때문에 딱딱하게 굳은 입매는 낯설다. 쿠로오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 한번 씩 웃어보았다. 봄의 밤날씨가 지독하게 춥게 느껴졌다.
“쿠로? 어디 갔다와?”
“후쿠로다니 매니저랑 뭐 하고 온거에요!?”
“휘익-! 인기남!”
대충 멍한 머리를 정리하고 체육관으로 돌아오자 갑자기 체육관 안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버렸다. 쿠로오는 다들 뭡니까~ 하며 발치로 굴러온 배구공을 집어들었다.
“그치만 봤다구요! 아까 매니저랑 같이 나갔죠~”
짖궂은 일학년의 목소리에 쿠로오는 의식적으로 미소지으며 그쪽으로 배구공을 휙 던졌다.
으앗! 자자~ 헛소리 할 시간에 연습, 연습!
“그냥 도시락 받으러 갔다온거야.”
“도시락을 한시간씩이나? 밥부터 지었어요?”
푸하핫, 하는 웃음이 터져나온다. 쿠로오는 설마 자신이 한시간동안이나 멍을 때리고 있었을꺼란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당황한 얼굴로 볼을 긁었다.
“지금 벌써 여덟시야?”
“어어? 진짜 수상한데요! 켄마 선배! 이거 진짜에요?”
부원들이 껀수를 잡았다는 듯 와르르 달려들었으나 쿠로오는 가벼운 손짓으로 소문에 달려드는 부나방들을 퇴치해버렸다. 방법은 몹시 간단했다. 전원 리시브 30회! 라고 박력있게 한번 외쳐주면 되는 일이었다.
아마 그 매니저는 저녁 먹고 곧장 씻기라도 했겠지. 이런 식으로 오해가 얽히면 그녀에게도 좋을 것은 없을 것이다. 네코마의 부원들이야 대충 처리한다 해도 후쿠로다니의 부원들에게는 확실히 그게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해두는 편이 예의일 것 같았다.
“이봐, 나 매니저랑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체육관 한 구석 후쿠로다니 멤버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가자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어째 좀 조용한데? 평소 귀가 떨어져나갈 것처럼 소란스러운 후쿠로다니 답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폭풍의 동력원인 보쿠토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벽에 공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아카아시한테 차이기라도 한 건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해버리곤 쿠로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최악. 제멋대로 꿈에서 친구랑 섹스해버리고는 친구의 실연을 바라다니! 쿠로오씨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쿠로오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후쿠로다니의 선수들에게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혹시나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신경 쓰지 말라고-”
파앙! 그때 보쿠토가 쳐낸 공이 벽에 상흔을 남기고 쿠로오의 가슴께로 튕겨올랐다. 반사적으로 그 공을 잡아채자 보쿠토가 벽에서 빙글 몸을 돌려 쿠로오에게 시선을 보냈다. 턱끝에서 땀을 훔치며 이쪽을 바라보는 그 얼굴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웃음기를 걷어낸 날것의 시선이었다.
“쿠로오. 잠깐 나랑 이야기좀 하..?”
그 눈길을 정면으로 받은 쿠로오가 섬찟한 기운에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는 순간 뒤에서 쿠로오! 하고 다급한 목소리가 터졌다. 평소보다 조금 느린 반응으로 뒤를 돌아보고 난 뒤, 쿠로오는 별을 보았다.
쿵-!
시...발 하는 소리가 바로 그가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소리였다.
키 180이 넘는 건장한 남자가 관자놀이에 공을 맞고 쓰러지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모두가 벙찐 사이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보쿠토였다.
“쿠, 쿠로오!! 죽지마아!!!”
“불길한 소리 하지 마세요. 공에 맞아 죽을 리가 없잖아요.”
“그, 그런데 지금 쓰러지면서 엄청난 소리가..”
그 순간 사탕에 꼬이는 개미들처럼 선수들이 우르르 쿠로오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보쿠토는 얼른 쓰러진 쿠로오를 아카아시의 도움으로 등에 업었다.
주변을 정리한 것은 네코마의 세터인 켄마였다.
“보건실은 문을 닫았지만 당직실에 구호상자가 있어.”
“어디야, 거기!?”
“다들 침착하고 연습 재개해. 코치님한테는 내가 연락할 테니까.”
당직실은 비어 있었다. 운동부에서 합숙을 하는 날이면 보통 그날의 당직번은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담당하게 되어 있는데, 오늘은 술자리를 늦게까지 가지고 합숙소의 방으로 가실꺼라 했다.
켄마는 당직실 앞 화분을 들어올려 익숙하게 열쇠를 꺼내들고 당직실의 문을 열었다.
사람이 잘 쓰지 않는 곳인지 옅은 먼지 냄새와 컨테이너 박스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보쿠토는 자신의 등에 볼을 비비며 끙.. 하고 신음하는 쿠로오를 벽에 세워 앉히고 켄마를 도와 얼른 이불을 깔아 그 위에 쿠로오를 눕혔다.
선반을 뒤적거리던 켄마가 파스를 하나 들어올리고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근육통에 직빵이라는 그것을 뜯어 쿠로오의 이마 위로 찰싹 붙였다.
“이거 효과 있는건가..”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고.”
그런가!
켄마는 잠시 눈을 내려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이마에 붙인 파스 때문에 눈이 따가운건지 얼굴을 찡그리는게 곧 깨어날 것도 같았지만 그보다는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을 택했다.
“며칠 전에도 공에 머릴 맞았어.”
“응? 뭐? 쿠로오 말야?”
“응. 걱정되니까 구토같은걸 하면 고갤 옆으로 돌려줘.”
“뭣!? 그럼 앰뷸런스를 불러야 하잖아! 쿠로오오!!”
“시끄러워..”
켄마는 쿠로오가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보쿠토를 뒤로 하고 당직실 문을 나섰다. 친절하게 방문을 잠가주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당직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서있던 아카아시와 짧게 눈을 마주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렇게 손이 많이 가게 하다니.”
아카아시의 한숨과도 짧은 중얼거림이 켄마의 귀를 스쳤다. 켄마는 말없이 당직실을 한번 뒤돌아보았다.
배구공에 사람이 맞고 기절할수 있습ㄴ디ㅏ.. 고등학교 때 진짜로 친구가 5초정도 기절했었거든요....((((사실고증))))
어두운 방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광원은 커다란 26인지 모니터였다. 키가 훤칠한 한 남자는 헤드셋을 낀 채 모니터에 전체화면으로 동영상을 띄워놓고 몸부림을 치며 손수건을 입으로 쥐어뜯고 있었다. 하악하악. 숨소리가 제법 거칠다.
저런 반응을 보면 화면 안에는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영상 따위가 재생되고 있어야 하지만 막상 모니터 안에선 어두운 무대 위에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고 있었다.
“쿠로상.. 최고..”
지나친 흥분감에 들뜬 남자의 목소리가 곧 나직해졌다. 화면 속의 남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대 직캠이라 관객들의 웅성거림도 섞이고 음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죽이며 귀에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잔잔한 통기타소리. 평소 NEKOMA의 노래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발라드에 더 가까운 멜로디였다. 흡! 가슴 속 깊이 차오르는 감동의 물결에 남자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감동의 물결에 허우적거렸다.
좋아여..! 발라드도 x나게 좋아여..!!
3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노래가 끝나고 아무렇게나 뻗친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가 흠,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오른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그리고 영상이 끊겼다.
“....! 뭐야! 장난해!? 왜 여기서 끊는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잡아 마구 다른 동영상을 클릭한 리에프는 다음 동영상을 열었고, 무대 위엔 드럼과 키보드, 그리고 다른 NEKOMA의 전 멤버들이 올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같은 날 같은 무대 동영상이었지만 지금 리에프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쿠로상이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다음에 뭐라고 말했을까!? 감사합니다? 으으 농담하면서 작게 웃었을까 웃는 목소리도 진짜 대박인데.. 하.. 내가 진짜 여기가 러시아만 아니었어도..
리에프는 축 처진 어깨를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힘없는 손짓으로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경쾌한 드럼소리를 이어 밴드의 기타를 맡은 쿠로오의 솔로 뒤로 메인보컬 켄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책상에 침까지 흘릴 기세로 화면 속의 쿠로오를 멍하니 쳐다보던 리에프는 갑자기 벌컥 열린 방문에 상체를 벌뜩 일으켰다.
“어휴! 너 또 불끄고 컴퓨터해?”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방의 형광등을 켜버린 건 남자와 꼭 닮은 여자였다.
불이 환하게 켜진 방안은 연예인을 좋아한다면 응당 이정도는 해야 한다-는 식의 모범이 될법한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었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포스터, 30,000$를 호가하는 최고급 앰프와 연결된 오디오, 그리고 그 옆의 앨범진열장은 유리로 만들어져 몇 없는 NEKOMA의 앨범을 아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물론 진열장 안에 있는 것 말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음반 세장씩은 기본으로 킾해두고 있었다. 그중 리에프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방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에 걸어둔 2m크기의 세로현수막이었다. 아직 밴드가 뜨기 전 팬미팅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간소한 행사에서 한 팬이 만들어왔다는 이 전설의 등신대는 랜선의 소문을 타고 흘러흘러 리에프가 카드를 긁음으로써 진정한 창조경제를 실현하게 되었다. 판매자의 통장은 유례없는 대풍년이었고 리에프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나가여! 아직 나 무대 다 못봤단 말이야!”
“어라~ 진짜 나가?”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한발 들어온 여자는 양 손을 뒤로 숨기고 있었다. 리에프가 뭐에여.. 라고 미심쩍은 눈으로 중얼거리자 활짝 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민다. 짠! 하는 목소리와 함께 그 손에 쥐어진 것은 바로,
“헐!”
황색의 서류파일이었다.
리에프는 그 와중에도 동영상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합격, 합격이야!?”
“축하해~ 이제 당당하게 일본에 갈 수 있게 됐네.”
“....~~~!!!!!!”
소리없이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미친듯한 환희의 몸부림을 치던 리에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쿠로오의 등신대 앞으로 몸을 날리며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우리 만날 수 있어여!”
“......”
“쿠로상.. 조금만 기다려주세여.. 제가 쿠로상 있는 대학 가려고 얼마나..”
“너 답지 않게 상향지원하던게 그 이유였어!?”
이틀 뒤, 하네다 국제공항에 한 남자가 발간 볼을 가지고 육지에 발을 내딛었다. 선글라스를 낀 채 정장 위로 검은색의 롱코트를 걸친 모습이 상당히 근사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시선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남들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습 하고 가볍게 숨을 들이마쉬고는 변태처럼 헉헉거리며 중얼거렸다.
“쿠로오씨가 늘 마시는 공기..!”
“미친다 진짜..”
사업으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리에프의 보호자격으로 함께 온 누나 아리사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 동생이 사생이라니.. 사생이라니..
제대로 공부를 해보겠다며 일본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하겠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던 이유가 고작 가수 때문이라니..
“일단 예약해둔 숙소로 가자. 집은 학교 근처가 좋겠지?”
“대충 알아봐둔 곳이 있어!”
정말 유학을 오고 싶었던건지 평소 준비성과는 태양과 지구 만큼의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던 리에프가 그렇게 외쳤다. 어머나. 아리사는 내심 놀랐다.
아무리 가수 때문이라지만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다니?
“학교에서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하는 맨션인데, 바로 옆에 편의점이랑 버스정류장도 있고 신축한 건물이라 깔끔하다고 해여.”
어머어머. 정말로 다 알아놓았잖아? 자신의 남동생은 더이상 철없는 어린애가 아닌 것이다. 한 사람의 든든한 성인이었던 것이다.. 누나인 아리사는 내심 차오르는 뿌듯함에 몰래 눈물을 훔쳤다.
시내의 호텔에 간단히 짐을 풀고 둘은 지하철을 이용했다. 둘 다 일본의 지하철은 처음이었지만 역무원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표를 끊을 수 있었다. 누나와 달리 리에프는 꾸준히 일본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맨션까지 갈 수 있을 정도야?”
“검색해보니까 걸어서 10분정도라고 하는데..”
그럼 교통도 나쁘지 않은 편인가? 리에프가 여기에여! 라고 보여준 건물은 정말로 괜찮았기 때문에 두 남매는 무작정 근처의 부동산 사무소로 쳐들어가 남은 방을 알아보았다.
“방이 없다고여!?”
“아니 그렇게 말하셔도..”
물론 남는 방은 없었다. 둘은 도쿄의 부동산 사정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아리사가 어쩔 수 없네. 라고 체념하며 다른 방을 알아보자며 리에프의 옷을 잡아당겼으나 리에프는 성난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절.대. 안되여! 이 맨션이 아니면 안된다고여!”
“더 좋은 방을 찾을 수 있을꺼야. 이러면 이분이 곤란해하시잖니..”
“빈 방 있다는거 알고 있다고여! 분명 윗집이 빈집이라.. 헙.”
윗집이.. 빈집..?
아리사의 고개가 끼긱 소리를 나며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부동산업자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그 맨션에 지금 나가지 않은 방은 맨 위층의 3LDK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지내기엔 지나치게 넓은 방이고..”
“그거에여! 그걸로 할께여!”
“리에프! 혼자서 방 세개를 뭐 어쩌려구!?”
설마 아닐꺼야. 아리사가 리에프의 등짝을 팡 치며 말렸으나 이미 리에프의 눈동자는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하나는 손님방이고 하나는 내방이고 하나는 드레스룸 겸 창고로 쓰면 되잖아여?”
틀렸어. 이미 아무런 말도 닿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대체 왜 ‘내’ 방보다 ‘손님’방이 먼저 입에서 튀어나오는건지 아리사는 정말 동생의 머릿속이 알고싶지 않았다.
어딘가로 연락한 부동산업자는 맨션 주인에게 열쇠를 받아오겠다며 한시간 뒤 맨션 앞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잠시 외출했고, 리에프는 잔뜩 들뜬 얼굴로 자신의 누나를 이끌고 맨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탐색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렇게 충동적으로 집을 구해도 되겠어? 그래도 2년 넘게 살 곳인데?”
“괜찮아여. 분명 완벽한 곳일테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물론 맨션의 위치나 겉모습은 깔끔했지만, 내부를 보기도 전에 이렇게 계약을 확정지어버리는 것이 아리사로써는 못내 불만이었다.
“아.”
그때 문득 리에프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작은 화원이었다. 때는 5월. 제철을 맞아 화려하게 핀 붉은 장미가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리에프는 경쾌하게 걸어가검은 레이스리본으로 장식한 큼직한 장미꽃다발을 구매했다.
“흐음.. 향기 좋다.”
“어머나 예뻐라! 집에 꽂아두려구?”
“그건..”
업자가 약속한 시간은 거의 다 되었고, 둘은 꽃향기를 맡으며 맨션까지 느긋하게 걸었다.
리에프가 감정로봇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
아리사는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기타케이스를 어깨에 매고 나가는 것을 별다른 의식 없이 슬쩍 쳐다보았다.
“저, 저기여!!”
그때 갑자기 리에프가 쌩하니 앞으로 달려나가며 꽃다발을 남자에게 덥썩 내밀었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꽃을 받아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쿠로오가 반사적으로 리에프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저, 죄송한데 이건..”
“그, 저는..!”
쿠로오씨! 진짜 팬이에여! 2년 전에 우연히 유튜브 영상 보고 완전히 반해버렸어여! 완전 사랑해여! 앨범도 다 샀어여! 이번 무대에서 부른 발라드도 완전 짱이었어여! 솔로앨범 내실 생각은 없으신가여!? 저 인터넷 팬사이트 활동도 엄청 열심히 하는데여! 예전에 쿠로오씨가 리플 달아주신 것도 있는데! 닉네임은 리에프에여! 혹시 기억나시나여!? 뒤에 ^^ 웃는 이모티콘도 붙여주셨잖아여! 허윽 그런데 목소리 진짜 좋으세여! 노래하는 목소리도 좋은데 말하는 목소리도 진짜 좋으신거 같아여! 저 진짜 쿠로오씨 팬인데..! 순식간에 리에프의 머리에 복잡한 문장이 뒤엉키고 쪼그라들었다. 어버버 바보처럼 말을 더듬은 리에프가 양 손으로 쿠로오의 어깨를 덥썩 붙잡았다.
허억! 어깨에 손 올렸어! 더, 더 만지고 싶다...! 슬슬 쿠로오의 표정이 굳어갈 때쯤 리에프는 간신히 가슴 속의 한마디를 외칠 수 있었다.
“사랑해여!!”
“엑.”
“옛날부터 완전 팬, 컥!”
아리사의 날카로운 수도가 리에프의 갈비뼈 밑에 작렬했다. 옆구리를 움켜쥐고 비명을 지른 리에프를 밀친 아리사에겐 동생의 방 문을 열때마다 수없이 눈을 마주쳤던 그 남자를 실물로 보곤 제정신이 아닌 동생을 수습할 의무가 있었다.
“Sorry. He couldn't speak japenese well.”
“아.. 괜찮, 아니지, I'm Okay..?”
“Tomorrow, we'll gonna come moved here. Do you live here, right?”
“yes.. um.. wellcome?”
“Thank you. how kindness!”
“나, 나도.. 쿠로오상이랑 이야기 할꺼에여...!”
쿠로오는 처음 보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허리가 구부정해서 몰랐는데 남자의 키는 쿠로오의 시선 위에 있었다. 187이라는, 일반인 사이에선 거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키가 큰 쿠로오로써는 난생 처음 겪는 눈높이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실버블론드를 단정하게 넘긴 남자는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뒤적이더니 NEKOMA의 1집 앨범을 꺼내들었다.
“어라?”
“싸, 인해주세여..!”
앨범을 든 남자의 손은 발발 떨리고 있었다. 쿠로오는 그제서야 남자의 눈이 무대 아래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과 비슷할 정도로 이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쿠로오는 씩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진짜 제 팬이셨구나. 죄송합니다. 무대 아래에선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오늘은 놀이터에서 재미잇개 놀앗따! 개미랑 나뭇가지로 집을 지어ㅆ따. 오늘은 꿈에서 커다란 케이크를 개미랑 친구랑 가치 먹을 꺼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순간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때였을 것이다. 매일 숙제였던 그림일기를 써가면 담임선생님이 일기장에 도장을 찍어주곤 했다.
“보쿠토 군? 어제는 좋은 꿈을 꾸었어요?”
“네!”
“보쿠토 군이 꾸고 싶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네요. 커다란 케이크를 먹는 꿈을 꾸면 꼭 선생님한테도 알려주기?”
보쿠토는 눈을 깜박거리며 젊은 여선생님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작은 손가락을 감았다.
자신이 원하는 꿈을 꾸는 것은 당연한게 아닌가?
왜 그러지 못한 것처럼 이야기할까?
보쿠토는 꿈의 주인이었다.
하늘을 날고 싶으면 등에 날개를 달았고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쭉한 테이블에 음식을 가득 차릴수도 있었다.
바다에 가고 싶으면 모래사장과 발목을 간질이는 파도를 상상했다. 가끔 재미있게 본 영화가 꿈에 그대로 재현되기도 했다.
처음엔 단순히 배구연습을 하던 꿈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스스로의 크로스 스파이크에 자부심이 있던 보쿠토는 합숙에서 만난 동년배의 블로커에게 자신의 공이 모두 막혔다는 사실이 못내 분했다.
‘그렇다면 꿈 속에서 블록을 날려주겠어!’
..뭐, 결과적으로 꿈속에서의 이미지 트레이닝은 보쿠토 스스로의 실력을 높이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긴 했다.
‘예이~’
블록을 성공시키고는 버릇처럼 이죽대는 얼굴이 처음에는 발을 구를 정도로 얄미웠다. 그런데 네트를 사이에 두고 헐떡이는 쿠로오의 숨결이 얼굴에 닿는다고 생각한 순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숙이고 땀을 닦아내는 손길에서 왠지 눈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험한 잠버릇에 멋대로 뻗친 머리도 서늘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매도 길쭉한 팔다리도 어느 군데 이뻐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보쿠토는 스스로도 뭘 원하는지 모른 채로 쿠로오의 손목을 잡아챘다.
‘뭐 하자는 거야?’
‘오야? 이건 무슨 벌칙?’
‘잠깐, 이게 무슨..!’
‘진심? 보쿠토군 머리 아픈거 아니야?’
살아있는 사람을 지속적으로 꿈에 구현시키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든 것은 보쿠토가 기억하는 쿠로오 그 자체였다. 가끔 자기 자신조차 깜짝 놀랄 정도의 반응을 보여주곤 했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면 분명 쿠로오가 보였을 법한 반응이었다.
마치 꿈 속의 그가 곧 진짜 쿠로오 테츠로인 것처럼.
쿠로오의 날개뼈엔 작은 점이 하나 있다. 어느 순간 그것이 구현되어 있었는지는 보쿠토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쿠로오의 마른 등이 굽어질 때에 그 점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 시트에 볼을 문지르며 무릎을 세워 간신히 자신을 받아들이는 쿠로오의 등을 눈에 담을 때면 그 점이 그렇게 야해보일 수가 없었다.
헉, 헉.
보쿠토는 헐떡이며 상체를 굽혀 쿠로오의 날개뼈 위를 이로 물었다. 아으! 하고 화드득 놀라며 쿠로오의 내벽이 꿈틀거리며 자신의 것을 조여왔다. 끙 하고 목으로 신음을 삼키며 동그랗게 이빨자국이 난 곳을 혀로 햩아주면 쿠로오가 허리를 뒤틀며 신음해온다.
좋아, 좋아해 쿠로오.
하반신에서 시작된 열기가 핏줄을 타고 뇌를 녹였다. 계란 흰자처럼 흐물흐물해진 머리는 멋드러진 대사도 쳐보지 못하고 그저 같은 소리만 반복했다.
늘, 꿈에서 쿠로오를 만나면 보쿠토는 바보처럼 같은 소리만 중얼거렸다.
좋아해. 너를 좋아해.
보쿠토의 욕심은 꿈을 집어삼키고 점점 크기를 불려갔다. 만족할 수가 없었다. 꿈에서뿐만 아니라 잠에서 깨어났을때 옆에 누운 진짜 쿠로오를 원해. 언젠가 자신도 모르게 쿠로오의 손목을 잡아본 적이 있었다. 뭐 하냐는 듯 눈을 깜빡이는 쿠로오의 얼굴을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고 말았다.
“보쿠토?”
“보쿠토 선배.”
뒤에서 부르는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대로 입술을 부딪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 그렇게 티가 많이 나?”
“예. 솔직히 말하면 아직까지 쿠로오씨가 알아차리지 못한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으으. 나름대로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켄마 씨가 보쿠토선배를 그렇게 경계하는 이유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켄마도 안다고!? 그럼 쿠로오도 알고 있는거야!? 방금 제 말을 뭐로 들으신거죠.
사실 후쿠로다니 주전 선수들 중에 보쿠토의 짝사랑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네코마와 연습경기가 잡히기라도 하면 전날부터 초 하이 텐션에, 합숙 전날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번씩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곤 했다. 한마디로 아주 좋은 티를 있는 대로 내며 난리 법석을 떨었다.
“그치만, 쿠로오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인데..”
“옆에서 보는 것과 직접 그 대상이 되는 것을 다를테지요. 쿠로오 씨가 보쿠토 씨를 친구라고 믿고 있다면 그쪽으로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
보쿠토는 쿠로오와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놀랍게도 꿈 속의 쿠로오는 현실의 쿠로오와 모든 것이 비슷했다. 좋아하는 농담, 말투, 이죽거리는 얼굴, 배구에 정신이 팔린 것까지. 어떤 말을 하면 쿠로오가 반응을 보이는지, 어떤 말을 재미있어 하는지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쿠로오는 나를 믿고 있을까.
내가 밤마다 쿠로오와 섹스하는 꿈을 꾸는 녀석이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두근두근,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심장이 뛰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너는 나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게 될까?
보쿠토는 가슴 위를 주먹으로 꽉 쥐었다. 셔츠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말.. 못해.”
“의외네요. 선배가 먼저 고백하겠다고 나설 줄 알았는데요.”
“쿠로오가.. 멀어지기라도 하면..”
보쿠토에게는 꿈속의 쿠로오가 있었다.
현실의 쿠로오를 아예 잃게 되느니 친구로라도 곁에 남아서 네가 변하는 것을 두 눈에 담을래. 그리고 네 꿈을 꿀거야. 평생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없게 된다 해도 상관없어.
‘혼자 하는 섹스는 섹스가 아니라 자위랍니다? 보쿠토 어린이?’
비록 네가 다른 사람과 섹스하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고 해도, 참을 수 있어. 나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으니까..
탈의실에서 쿠로오는 무방비하게 셔츠를 벗어 맨살을 드러냈다. 꿈 속에서 숱하게 본 등이었지만 윽, 짝사랑의 열병을 앓는 고등학생에게 짝사랑 상대의 반누드라니. 당황스러움에 시선을 얼른 바닥으로 내렸다가 이내 슬그머니 눈을 그에게로 돌린다. 괜찮아. 뒤를 돌아보고 있으니까.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건 모를꺼야. 자신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가는게 마치 같은 반 여학생들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몰래 보는 중학생이라도 되어버린 것 같았다. 창문을 닫은 탓이 탈의실은 묘하게 어두컴컴했고 어딘지 은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여기서 쿠로오와 섹스해보고 싶다.
보쿠토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쿠로오는 락커 문을 열고 벗어둔 셔츠를 옷걸이에 걸기 시작했다.
그때 보쿠토는 쿠로오의 날개뼈 위에 작은 점을 발견했다.
“......”
무슨 생각을 할 것도 없이 보쿠토의 손이 멋대로 움직여 그 등에 닿았다.
“쿠로오. 너, 날개뼈에 점이 있어.”
언젠가 쿠로오가 지나가는 말로 자신의 등에 있는 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보쿠토는 스스로 내뱉은 말이 무슨 문장이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뭔가에 홀린 듯 그렇게 말하며 검지로 그 점이 있는 자리를 꾸욱 짓눌렀다. 깜짝 놀라며 어깨를 파드득 떠는 그 행동은 지나치게 낯이 익었다. 이거, 진짜 꿈인가?
“점이 있다고? 몰랐는데?”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곤 뒤를 돌았다. 왜 그래? 라고 묻는 얼굴은 태연했다.
“...그래?”
한박자 늦게 자신의 쉬어빠진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아. 나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지.
잠에서 깨어난 쿠로오는 젖은 바지춤을 추스르며 욕실로 향했다. 잠이 덜 깬 얼굴에서 당혹감이 뚝뚝 묻어져나온다.
이틀 연속으로 이런 꿈을 꾼 적은 없었는데.
쿠로오는 샤워기 물을 틀어 머리를 적시며 어제의 꿈을 떠올렸다. 사정시켜주지 않겠다느니 아프게 하겠다더니 하더니 정말로 꿈속에서는 지독하게 아팠다. 결국 어젠 정신 없이 보쿠토의 위에 올라타서 허리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게, 정말로 느끼는 부분을 전혀 문질러주지 않아서 짜증이 잔뜩..
쿠로오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욕실 타일에 이마를 툭 부딪혔다.
꿈 속의 보쿠토는 그저 내 머릿속의 보쿠토일 뿐이다. 현실하고는 전혀, 하나도 상관이 없어야 한다.
‘나는 쿠로오밖에 섹스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런 보쿠토의 말은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인 걸까? 시발 대답해라 내 무의식아. 나랑 진지하게 주먹으로 대화를 나눠보자.
아아. 오늘도 컨디션은 최악이다.
“쿠로오, 괜찮아?”
쿠로오는 오늘도 로드워크로 학교까지 등교했다. 아침 연습 시간이 아슬아슬하도록 맞춰 온 쿠로오는 켄마에게 씩 웃어보이고는 그가 건네주는 물병을 받았다.
어제 일 때문인지 쿠로오의 눈치를 보며 잔뜩 쪼그라든 리에프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말없이 리시브 연습에 끼어든다.
“이번 주말은 후쿠로다니 학원과 1박 2일 연습시합 및 합숙 일정이 잡혔다.”
“예? 주말이라고 해봤자 바로 내일 아닙니까?”
“원래 신젠 쪽에서 합숙을 하려고 했던것 같지만 그 학교는 지금 테니스 시즌이라 도저히 체육관을 비울 수 없다고 연락이 온 모양이야. 평소 네코마 쪽이 신세를 지는 입장이니만큼 교무실 측에서는 양해를 해 줬다.”
대체 왜 오늘 또 그런 꿈을 꾸게 된걸까. 또 왜 이 올빼미 녀석은 어째서 우리 학교에서 합숙을 하게 된 거냐고.
하루 종일 정신이 딴 데 팔린 쿠로오는 오늘 수업 시간 필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 몰라. 시험기간에 노트 빌리지 뭐. 휴대폰을 확인하자 마침 시간 맞춰 교문에 도착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은 없었다.
“헤이헤이! 여기야!”
쿠로오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씩 웃고는 보쿠토 옆의 코치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간단히 그들이 묵을 숙소를 확인하고 교무실에 서류를 전달하러 온 것이었다.
“보쿠토 너는?”
“난 그냥 널 보러 왔지!”
“하아.. 죄많은 남자는 괴롭다니까.”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보쿠토는 웃으며 스포츠백을 가르켰다.
“요 며칠 스파이크를 못 때렸더니 손이 근질근질해! 어울려 줄꺼지?”
그렇게 말하며 도발하듯 씨익 웃는 얼굴에 쿠로오는 호오.. 하고 잔뜩 날선 얼굴로 송곳니를 내보이며 웃었다.
“전부 블락당하고 풀이 죽어도 난 모른다? 미리 아카아시라도 불러 줄까?”
“너야말로 전부 뚫려서 엉엉 울거나 하지 말라고!”
“너야말로 울고 싶으면 미리 말해라? 내 가슴은 바빠서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빌려줄 수가 없습니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슥 쓸어넘기며 대답하자 보쿠토가 잔뜩 기대된다는 얼굴로 얼른 체육관으로 가자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후쿠로다니의 코치님을 교무실로 안내해드린 뒤 쿠로오는 산책 처음 나온 강아지처럼 이곳저곳 튀어나가려는 보쿠토를 이끌고 탈의실로 향했다.“다른 녀석들은 이미 체육관에 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내 락커 같이 쓰자.”
“어라? 남는 락커는 없어?”
“비품실에 있어. 내일 후쿠로다니가 오기 전에 가져다 둘꺼야.”
문을 닫자 탈의실 안이 어둑해졌다. 굳이 형광등을 킬 정도로 안이 어두컴컴한 것은 아니라 쿠로오는 셔츠를 훌렁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뭐 해? 옷 안갈아입어?”
“아, 어. 응.”
탈의실이 낯선지 괜히 이쪽저쪽을 쳐다보는 보쿠토에게 말을 걸자 그제서야 가방을 들고 허둥지둥 이쪽으로 다가온다. 연습용 유니폼 상의를 들고 벨트를 풀자 뒤에서 스포츠백의 지퍼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 뒤,
“..쿠로오.”
등에 그의 손이 닿았다.
쿠로오의 어깨가 눈에 띄일 정도로 움찔 굳었다. 소리를 내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맨살에 닿는 보쿠토의 손길이 소름끼칠 정도로 꿈과 같아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너, 날개뼈에 점이 있어.”
점 위를 덧그리기라도 하는 건지 보쿠토의 손가락이 등 위 어느 한 점을 꾸욱 눌렀다. 점이고 나발이고 알게 뭐냐.
“그래? 몰랐는데?”
빌어먹을. 쿠로오는 스스로의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어떻게 들어도 어색한 삑사리를 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쿠토의 거친 손바닥이 등에 닿았다. 순간적으로 어제 억지로 자신을 책상에 짓눌렀던 그 손짓이 떠올라 쿠로오는 확 소리가 날 정도로 뒤로 상체를 틀었다.
역광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를 보쿠토의 얼굴이 가까웠다. 황금색의 눈동자만이 또렷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쿠로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옷 안 갈아입어?”
“아, 잠깐만.”
보쿠토가 어설프게 가방 안에서 체육복을 꺼내는 사이 쿠로오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체육복을 갈아입고 탈의실 밖으로 태연히 걸어나갔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이대로 체육관에 가서 1학년들 블록연습 하는 곳에 저 녀석을 밀어넣으면 된다. 오늘은 갑자기 리에프에게 리시브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나오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곧 탈의실에서 태연한 얼굴로 나올 보쿠토에게 태연한 얼굴을 지어보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면의 평화를 찾았다.
“나왔냐? 락커 문은 닫았지?”
“응..”
보쿠토는 귓가를 미미하게 붉힌 채 시선을 바닥에 내리고 대답했다. 뭡니까. 왜 네녀석이 갑자기 그런 표정입니까? 쿠로오는 어제 얻어맞은 이마의 통증을 호소하고 싶어졌다.
쿠로오가 보쿠토를 체육관 한복판에 밀어넣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보쿠토는 언제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냐는 듯 헤이헤이헤이! 시끄럽게 굴며 1, 2학년들의 어설픈 블록을 와장창 깨부수고 있었다.
“켄마! 도망치지 마!”
“팔 떨어져..”
“무진장 아프지만 그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켄마 선배!”
“시끄럽고.”
쿠로오는 계속되는 보쿠토의 스파이크에 슬슬 일학년 녀석들의 얼굴에 약이 오르기 시작하는걸 보며 씩 웃었다. 그런 쿠로오의 얼굴을 보며 리에프는 조심스레 투덜거렸다.
“쿠로오 선배. 저도 저기 끼면 안됩니까?”
“호오?”
“보쿠토 상의 스파이크, 막아보고 싶은데여.”
“아직 너같은 초보자에겐 이릅니다? 말 할 힘 있으면 다시 리시브 간다!”
“이익!”
말이 끝나기 전에 공을 날려보내자 제법 익숙하게 리시브 자세를 잡고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춘다. 좋아. 그래도 자세는 꽤나 볼만하게 나온다. 쿠로오가 두번째 공을 들고 경쾌하게 공을 올리자 리에프 옆으로 휙 하고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엌, 하고 리에프와 부딪힌 그림자는 리에프를 밀치고 기어이 공을 리시브해 쿠로오에게 공을 넘겼다.
“보쿠토?”
“헤이헤이, 나도 끼워줘!”
어느새 일학년들은 헉헉거리며 벽에 기대어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저 스태미나 괴물 같으니. 스파이크를 그렇게 날려댔으면서도 땀 범벅인 것 외에는 멀쩡한 보쿠토를 보니 마치 본능처럼 말이 튀어나갔다.
“스파이크는 다 치셨나?”
“지금은 리시브 연습! 그리고 연습 끝나면 나랑 같이,”
“켁.”
“나 아직 말 다 안했는데..?”
어벙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보쿠토를 무시하고 쿠로오는 일부러 못되게 웃으며 공을 날렸다. 리에프, 받아!
리에프 한번, 보쿠토 한번 공을 넘겨주며 쿠로오는 리에프에게 끝없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팔 제대로 안 펴? 보쿠토 폼 봐. 무릎을 미리 낮춰야지!
한참동안 리에프만 데리고 말을 하자니 보쿠토의 얼굴이 점점 불퉁해지기 시작했다. 젠장할 아카아시.. 제발 여기에서 너네 주장 좀 어떻게 해봐..
“쿠로오! 나한테도 말 걸어줘!”
“하아?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폼인데요?”
“그럼 완벽한 폼이라고 칭찬이라도 해 줘!”
사실 리에프보단 월등히 나았지만 결단코 완벽하다고 할 정도의 리시브는 아니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야 이녀석. 귀찮아.. 쿠로오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걸 보다 못한 리에프가 아앗! 하더니 보쿠토의 서포터를 가르켰다.
“아앗! 그거 못보던 건데요! 보호대 새로 사신 겁니까?”
“아- 어제 그건가.”
“아아! 멋지지!?”
쿠로오는 들고 있던 배구공을 보내는 대신 위로 던져 다시 왼손으로 받아들었다. 리에프가 닌자 거북이같네여! 라고 외치자 그거 멋지다는 뜻이냐!? 하고 보쿠토가 대답했다.
“착용감은 어때?”
“아아. 나쁘지 않아. 어, 그런데 네껀?”
“집에 있어. 내일부터 차 보려고.”
“두분이서 서포터 공구 하셨어요?”
눈을 깜박이며 그렇게 물어오는 리에프의 말만을 기다렸는지 보쿠토가 코 밑을 검지로 쓱 훔치며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이건.. 쿠로오가 내게 선물한 거다!”
“으아앗! 저는요! 쿠로오 선배!”
“오야. 초밥 9천엔어치 쏘면 생각해보지.”
“엑.”
됐습니다.. 시무룩한 얼굴로 물러나는 리에프를 보고 대체 뭐에 이긴 기분인 건지 보쿠토의 얼굴이 몹시 하이해졌다.
한참 으쓱이며 서포터 자랑을 하던 보쿠토는 이내 옆구리에 끼고 있던 공을 박스에 던지며 쿠로오에게 말했다.
“쿠로오! 다 했으면 블록!”
“우리 일학년들로는 만족이 안되십니까? 이 욕심쟁이.”
“제대로 확! 하고 블록이 와야지 아무래도 재미가 있다니까?”
“이거 이거, 오늘은 봐주려고 했는데 기어코 벌주를 마시다니.”
“시끄러운 고양이 꼬리를 확 물어버려야지.”
“오 건방진 올빼미 부리를 꽉 다물리게 해 줘야지.”
보쿠토와 쿠로오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동시에 씨익 하고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우리 주장이 악역 같아요!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느새 어색하니 뭐니 하던 기분 따위 떨어져 나간지 오래였다.
“3:3 하자. 켄마! 공 올려줘!”
“싫어..”
“토라! 이리 와.”
“오옷!”
보쿠토와 켄마, 야쿠가 한 팀. 쿠로오 자신과 리에프, 토라가 한팀이었다. 서브를 올리는건 익숙하지 않지만 애초에 리에프에게 실전에서 블로킹하는 느낌을 알려줄 생각으로 짠 구성이었다.
보쿠토에게 서브를 올려야 하는 상황이 맘에 안드는지 켄마는 떫은 감을 씹는 표정으로 공을 튕겨 올렸다.
“간다아!”
“리에프! 스트레이트만 확실히 막아! 팔은 제대로 앞으로 기울여!”
“예에!”
퍼엉! 보쿠토의 황금색 눈이 형형하게 빛나며 리에프의 두 팔 사이로 어이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스트레이트가 꽂혔다. 리에프가 어벙벙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 데구르르 구르는 공을 확인하는 모습이 얼이 빠져 보였다.
야쿠의 서브로 시작된 공을 올려 토라가 공격했지만 야쿠는 능숙하게 공을 살려 기어이 켄마에게 공을 도달시켰다.
제 팀인 것마냥 녹아든 보쿠토가 제 쪽으로 달리며 켄마에게 외치자 켄마가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보쿠토의 브로드에 맞춰 토스를 올린다. 쿠로오는 네트를 사이에 둔 보쿠토의 눈동자를 파고들 것처럼 집요하게 따랐다.
스트레이트다.
날개를 펼치듯 날아오른 보쿠토와 거의 동시에 쿠로오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타앙! 하고 쿠로오의 팔에 막힌 공은 체육관 바닥을 치고 야쿠의 손 앞에서 튕겨나갔다.
“예이~”
“크으으!”
입으로는 아쉬워 죽겠다는 소리를 내면서도 보쿠토의 얼굴은 의욕만점이다. 저거저거, 저 표정을 울상으로 만드려면 시간 꽤나 걸리겠는데?
“리에프. 무조건 이 올빼미만 따라 다녀. 그리고 리드 블록! 기억해.”
“옙!”
“키는 크지만 1학년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건방진 올빼미를 닥치게 만들어!”
“에엑 무리에요!”
후쿠로다니와 네코마의 주장 둘의 눈에 불이 붙었다. 때아닌 화재로 고통받는 것은 억울하게도 네코마의 부원들 뿐이었다.
손님인 보쿠토가 먼저 삼학년들과 샤워실로 떠나고, 쿠로오는 다른 부원들과 함께 네트를 정리했다.
“아, 창고에 락커들 탈의실로 옮겨야 하는데.”
“몇 개 옮겨요?”
“네개 다 옮겨야지 뭐.”
“엑. 자리 없지 않아요?”
“문 열 공간만 남기고 채워넣어. 어차피 한꺼번에 못 들어가잖냐.”
“그런가-”
둘이서 락카를 하나씩 들고 탈의실로 가자 마침 1차로 샤워를 마친 팀이 탈의실에서 락카를 받아들었다.
“보쿠토. 내일 오는 선수들은 주전들만인가?”
“어? 아. 엉.”
“몇명은 둘이서 락카 하나를 써야 할것 같은데..”
“괜찮아! 난 너랑 같이 쓰면 되고!”
“누구 맘대로 그렇게 정합니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쿠로오는 내심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다 혀를 찼다. 그럼 일학년 둘만 락카를 같이 쓰게 하면 되니까..
쿠로오는 머리 위로 수건을 뒤집어쓴 채 상의를 탈의한 채로 입구까지 다가온 보쿠토의 벗은 몸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일부러 시선을 위로 올렸다.
프라이드라도 되는 양 위로 세운 머리가 물을 먹어 아래로 처진 모습은 쿠로오로써도 상당히 낯설었다. 진작에 머리 좀 내리고 다니지 그랬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결국 튀어나갔다.
“머리 내린거?”
축 처진 머리는 흰색과 검은색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켄마처럼 뿌리염색이 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진짜 특이한 머리색이었다. 노란 눈동자 위로 그림자를 만드는 머리카락에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꿈벅, 하고 보쿠토의 눈동자가 그런 쿠로오의 손가락 끝을 쫓았다.
“사람이 달라 보이네.”
확실히 헤어스타일이란게 사람의 인상을 크게 좌우하긴 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머리를 내리고 짙은 눈썹과 형형한 눈동자를 가린 보쿠토는 약간 얌전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 어때? 괜찮아?”
“잘생겼습니다~”
쿠로오는 대충 대답하며 옷을 챙겨 샤워실로 향했다. 헤이헤이헤이! 역시 난 최고지! 하고 방방 뛰는 소리가 들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보쿠토는 조용했다. 아무리 저녀석이라고 해도 간만에 녁 연습을 하니 진이 빠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쿠로오는 발걸음을 옮겼다.
보쿠토 코타로는 끝내주는 스파이크를 성공시킨 뒤, 늘 자신의 세터인 아카아시를 쳐다보는 버릇이 있다.
“......”
뭘까나, 이딴 버릇 따위 눈치채서 어쩌라고.
“쿠로. 서브.”
쿠로오는 봤냐! 봤냐고 아카아시! 라고 외치는 보쿠토에게서 시선을 떼어 켄마의 손에서 공을 받아들였다. 아직 이쪽은 게임중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틀어 잡념을 떨쳐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고 공을 위로 던진다.
“점프 서브야!”
맞은편 코트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화악, 유연하게 뒤로 젖혀진 허리가 탄력있게 굽혀지며 라인 안쪽으로 아슬아슬하게 공을 쏘아보낸다. 신젠 고교의 리베로가 아슬아슬하게 공을 받아내지 못하고 바닥에 배를 깔고 미끄러졌다.
“오오! 주장! 멋져!”
“한번 더 서브!”
가볍게 튕겨온 공을 다시 받고 손바닥 위로 가볍게 굴린다. 다시 공은 위로 높게 떠올랐다. 가볍게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쿠로오의 몸이 다시 당겨진 활시위처럼 유연하게 긴장하기 시작한다. 두 코트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모인 가운데 잔뜩 긴장한 상대편 신젠 고교의 선수들이 무릎을 굽히고 리시브를 준비했다.
탕, 하고 가볍게 튕겨진 공이 네트 안쪽으로 아슬아슬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와악!”
“페인트!”
이번엔 아슬아슬하게 공을 띄운 신젠 고교가 공을 연결했으나 자세가 무너진만큼 위력적인 공격이 들어오지 못했다. 예이~ 이죽거리며 코트 안쪽으로 뛰어들어온 쿠로오는 A속공으로 스파이크를 날리는 토라의 뒤에서 블록에 튕겨진 공을 받아내 켄마에게 보냈다. 그 직후 켄마의 능숙한 투어택으로 마침내 스코어는 결정되었다.
“저걸 받아냈어!”
“역시 네코마!!”
“25-21, 네코마 승!”
신젠 고교의 녀석들이 끙, 하며 플라잉 코트를 시작하는 것을 이죽거리며 내려본 쿠로오의 얼굴은 악당 그 자체였다. 타올을 목에 건 쿠로오는 이제 막바지로 치닫는 우부카와와 후쿠로다니의 시합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다음 시합은 후쿠로다니와 우리인가?”
“저쪽도 후쿠로다니가 이기겠는데.”
“쳇. 이번엔 이기자!”
통산 11승 15패, 이번 여름방학 합숙 현재까지의 스코어였다. 후쿠로다니 다음으로 승률이 높은 네코마였지만 결정력이 부족한 네코마로써는 후쿠로다니에게 한발 밀리는 감이 있었다.
25-22의 스코어로 후쿠로다니가 우부카와를 이긴 뒤 간단히 코트를 정비해 네코마와 후쿠로다니가, 그리고 카라스노와 신젠이 코트를 채웠다.
“제대로 막아! 블록!”
“이익!”
짙은 땀냄새와 그보다 더 짙은 승리의 냄새.
고작 공놀이일 뿐인데도 이 공을 올리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후회되는 것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몸을 바닥 위로 나동그라뜨렸다.
“켄마!”
야쿠의 연계로 이어진 공을 켄마가 받자 마자 쿠로오는 다리를 굽혀 점프했다. 히죽, 웃으며 정면으로 점프해 블록하는 보쿠토와 눈을 마주치자 마찬가지로 형형한 눈으로 살벌하게 웃음을 띄운다. 쿠로오의 스파이크가 보쿠토의 손끝을 맞고 아웃되어 그대로 득점에 성공했다.
“예이~”
“크윽! 오늘 컨디션 장난 아니잖아, 쿠로오!”
“아아? 이게 내 평소 실력입니다만?”
그게 진짜냐아! 라며 보쿠토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승부욕을 잔뜩 불태웠다.
코트 위의 열기가 치열해진다. 네코마와 후쿠로다니는 엎치락 뒤치락 점수 차이를 서로 2점 이상씩 벌리지 못하고 그대로 20점대까지 스코어를 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후쿠로다니 공격에 전위, 보쿠토. 네코마의 전위 쿠로오.
로테이션상 최고의 공격력이 되는 이 상황에서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쓰지 않을 리 없다. 쿠로오는 바짝 긴장하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햩았다. 이글이글하고 마주 웃는 보쿠토의 얼굴에는 열정이나 승부욕과도 비슷한 얼굴이 불타고 있었다. 저 눈을 보면 늘 침착한 쿠로오로써도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쿠로오는 자신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로 보내!”
군더더기 없는 A퀵! 화악 하고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보쿠토의 눈동자에 정신이 팔린 쿠로오가 반박자 늦게 팔을 들어올리고 점프했으나 날카로운 스파이크는 그대로 쿠로오의 팔을 제치고 타앙! 무자비하게 그 공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당혹한 쿠로오의 얼굴을 뚫을 듯이 노려보며 외쳤다.
“헤이헤이헤이!!”
“크읏!”
“어떠냐 쿠로오!! 이 몸의 스파이크가아!”
“아아-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네, 진짜.”
망할, 이게 공식전이었으면 교체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미스다. 켄마의 눈초리가 볼을 꾹꾹 누르는 느낌에 쿠로오는 하하.. 하고 억지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보쿠토의 금색 눈동자가 화르륵 불타올랐다.
보쿠토 코타로는 끝내주는 스파이크를 성공시킨 뒤, 자신의 세터인 아카아시를 쳐다보는 버릇이 있다.
일종의 의식이랄까, 버릇과도 같았다. 밤새 묻은 꿈의 잔재를 땀과 함께 털어내는 것처럼 쿠로오는 오늘은 먼저 가, 켄마. 라고 말하며 가방을 매고 뛰었고, 쿠로오의 버릇을 아는 켄마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하철로 혼자 등교를 했다.
오전 일곱시도 되지 않은 등굣길은 살짝 어두웠고,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은 모두 예상보다 추운 날씨가 당황스러운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걸었다.
낮이면 여름인가 싶을 정도로 공기가 훈훈해지지만 아침공기는 아직 눈동자를 시리게 만들 정도로 찼다. 쌀쌀함을 꾹 참고 오분쯤 달리면 열이 올라 입김이 허옇게 자국을 남긴다. 이마에 땀에 작게 배어나오다가 아직은 차가운 공기에 금새 식어버렸다.
교문이 보일 정도까지 오자 슬슬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 몇몇은 쿠로오를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평소라면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 그였지만 쿠로오는 표정을 무섭게 굳히고는 발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 뒷모습이 제법 사나워 손을 흔든 아이들은 머쓱하게 뒷목을 슬며 어, 못 봤나보다. 하고는 손을 내린다.
사실 쿠로오의 생김를 표현하자면 잘생겼다거나 단정하다기보다 날카롭거나 험상궂다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거기에 큰 키에 건장한 체구까지 더해져 본인도 그걸 아는지 늘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곤 했지만 무섭게 집중할때의 그의 얼굴은, 그러니까 그의 절친한 친구의 말을 빌자면
‘진짜, 진짜 험악하게 생겼다고오!’
그 순간 펑! 하고 쿠로오의 안면과 충돌한 배구공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나며 체육관 안의 이목이 몽땅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헐....”
“쿠, 쿠로상!?”
“허억! 괜찮아여!?”
막 체육관 문을 열고 발을 디딘 순간 포탄처럼 쏘아진 배구공이 쿠로오의 이마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방금 디딘 발이 공중에 붕 뜨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두세걸음 물러난 쿠로오가 뒤로 젖혀진 고개를 확 앞으로 돌렸을 때 리에프가 딸꾹, 하고 횡경막의 경련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작은 손이 쿠로오의 티셔츠 자락을 잡아당겼다.
“쿠로, 괜찮아?”
“어? 아아.. 켄마. 안 괜찮아. 골이 울려.”
다행인 것은 안면에 정통으로 충돌했다면 코뼈가 내려앉았을 스파이크가 이마만 치고 튕겨나갔다는 걸까. 코치님은 쿠로오의 이마와 뒷목을 몇번 만져보고는 아침 연습에서 쫓아냈다. 양호실부터 들러 필요하다면 1교시까지 쉬라는 의미였다.
“머리는 위험한데다, 무방비 상태에서 목이 충격을 받았어. 저녁 연습도 상태 봐서 참가해라.”
“쿠로 선배! 정말 죄송해요..!!”
리시브도 안되는 주제에 보쿠토처럼 크로스를 쳐보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나선 리에프가 범인이었다. 미안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연신 사과하는 리에프에게 괜찮다며 손짓하고는 쿠로오는 뒷목을 주무르며 양호실로 향했다.
방금 전엔 머리만 띵 한것 같았는데 코치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뒷목이 욱씬거렸다. 덕분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배구공에 거하게 얻어맞고 나니 꿈을 꾼 뒤로 찝찝했던 기분이 조금 가신 것 같다. 잊을 만 하면 욱씬거리는 이마도 한몫 했다.
“쿠로오 상 웃지 않으니 박력있다..”
“화 났을까여..?”
한편, 쿠로오가 퇴장한 뒤 체육관은 금새 수군수군하는 소리로 메워졌다.
리에프는 초조한 얼굴로 손가락을 꿈지럭댔고, 다른 부원들은 말없이 그의 등과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차분히 가로저었다.
“으으..! 켄마 선배!! 살려주세여!”
“괜찮아.. 쿠로가 기분이 나쁜 건.”
“으아아! 역시 기분 나빴겠죠! 그렇게 큰소리가 났는데에에!!! 야쿠 선배!”
“시끄러워!”
기분 나쁜 꿈을 꿔서 그런거니까.
뒷말을 본의 아니게 생략하게 된 켄마의 샐쭉한 눈초리가 리에프의 부산한 등에 머물렀다.
뭐.. 괜찮나.. 말하기 귀찮고.
“일주일동안 스파이크 금지야! 얌전히 리시브 연습이나 하라고!”
“에엑..!”
쿠로오 테츠로는 가끔 보쿠토 코타로와 섹스하는 꿈을 꾼다.
“목은 괜찮니? 혹시 모르니까 한시간정도만 찜질을 하자.”
“저야 고맙죠.”
양호실로 간 쿠로오는 배구공 무늬가 선명하게 찍힌 이마에 냉팩을 붙이고 뒷목에는 핫팩을 대고 침대에 엎드렸다.
낯선 시트와 베개에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모포는 얇았지만 양호실 안의 공기는 지나치게 훈훈했고 엎드린 상태로 뒷목에 뜨끈한걸 대고 있으니 절로 눈이 감겼다.
양호선생님은 교무실로 가는 김에 선생님들에게 제 상태를 얘기해주겠다 했고, 덕분에 그는 걱정 없이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지잉 하고 휴대폰이 울려 주섬주섬 꺼내들자 제대로 양호실에 갔느냐는 켄마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켄마는 쿠로오가 어떤 꿈을 꾸는지, 그리고 그 꿈을 꾼 날에 기분이 얼마나 다운되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쿠로오는 피식 웃으며 걱정 말라는 답장을 보냈다.
아. 정말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은데. 스파이크에 머리통 한번 얻어맞고 기분전환이 된다면 다음 번에도 리에프에게 스파이크를 쳐달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아직은 그 녀석, 스파이크가 서투니까.. 보쿠토의 스파이크에 얻어맞는다면 진짜로 목에 깁스를 차게 될 지도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게 보쿠토 쪽으로 생각이 기울자 쿠로오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려 천장을 올려다보였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도 휴대폰이 울린다.
[헤이, 오늘 저녁 연습 있어? 오늘 서포터 사러 가는데 같이 나갈래?? 저녁 쏠께!!!]
켄마에게도 말하지 않은 징크스는 사실 하나 더 있었다.
그 꿈을 꾼 날엔, 이상하게 보쿠토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 꿈을 언제적부터 꾸게 되었는지는 사실 확실하지 않다.
보쿠토를 처음 본 것은 1학년 춘고 예선에서 슬쩍 스쳐지나갔을 때가 처음, 제대로 통성명을 한 것은 그해 여름 네 학교의 공통 여름 합숙때였다.
그러니 아마 1학년 여름 이후일 것이다. 언제 꾼 꿈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뒤로 뜨거운 성기가 밀려들어올 때 코타로- 하고 헐떡이던 기억은 난다.
처음 꿈을 꾼 날, 침대를 박차고 젖은 속옷을 세면대에 문질러 빨면서 그는 영혼이 탈주했다는 감각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할 수 있었다. 16년 인생 최대의 위기이자 쇼크였다.
남자가 꿈에 나왔다고!? 그런데 내가 깔렸어! 심지어 나보다 키도 작은 녀석인데!? 게다가 난 왜, 왜 싸버린 건데!?
꿈의 시작은 설마 그런 식으로 잠에서 깨버릴 줄은 예상도 못할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여름 신젠 고교의 제 3체육관, 우연히 자율연습을 하던 녀석을 발견해 함께 스파이크와 블록 연습을 했던, 실제 있었던 것이 꿈이 나타난다는 지극히 평범한 흐름이었다.
비록 꿈의 마지막은 비품실 매트리스에서 발가벗겨진 채 뒷구멍이 무자비하게 쑤셔지는 것으로 끝날다고 할지라도.
쿠로오는 잠에서 깬 뒤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부인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주 잠깐 동안.
남자랑 섹스하는 꿈을 꾸다니 그럴 리 없어!
라고 생각한 지 십분쯤 뒤에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아닐지도..? 정도로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한번정도는 부정했었다.
아니, 한발 양보해서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치자. 중학교 무렵 그것을 어느정도 눈치채고 인터넷으로 관련 자료를 찾아본 적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하지만 호기심에 찾아본 영상은 생각보다 야하거나 섹시하지 않았고, 남자와 여자가 행위하는 영상만큼이나 놀랍고 약간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배우가 서양인들이라 그랬을까? 어쨌든 쿠로오는 그 뒤로 딱히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지 않았다. 다행히 그에겐 배구라는 아주 좋은 취미가 있었고 사람이 기절할 정도로 피곤하면 딱히 야한 생각도 별로 안 들었다.
어쨌든 쿠로오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겨우 얼굴하고 이름 정도만 아는, 그저 연습 몇번 어울려 한 적이 있는, 아니 사실 조금 친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절친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녀석이 꿈에 나온다는 것은 생각치도 못해본 일이었다.
차라리 그 녀석, 보쿠토 코타로를 보며 가슴이라도 한번 두근거렸으면 이게 바로 첫사랑인가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쿠로오가 꿈을 꾼 뒤 우연히 길거리에서 보쿠토를 만났을 땐, 놀라울 정도로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호탕하고 큰 목소리와 거리낌 없는 말투에 그저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하며 같이 배구 이야기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주먹으로 치며 낄낄거렸다.
쿠로오가 꿈에 나오는 보쿠토와 실제로 그가 만나고 이야기하는 보쿠토를 애써 타인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그가 꿈을 세번정도 더 꾸는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