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표의 목소리는 낭랑하다. 힘있게 쭉 뻗어가는 진모리의 목소리와는 또 다른 듣는 맛이 있었다. 한대위는 헤드셋을 매만지며 작게 웃었다. 옆에서 진모리가 무슨 일이냐는듯 슬쩍 시선을 건네온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자 진모리가 다시 마이크에 집중했다. 한대위는 테이블로 시선을 내려 간단하게 짜여진 각본을 다시 확인했다.
“..해서, 오늘의 별헤는 밤 주제는 추억이네요. 음악 나오는 동안 청취자분들의 각자 소중한 추억을 문자로 보내주시면, 저희가 몇분을 추첨해서 읽어드리고 소정의 사은품을 드립니다. 그럼 음악 갈께요.”
일표형이 라디오의 DJ를 맡은 것도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간다. 새벽 두시부터 시작하는 심야라디오라 피곤할만도 한데, 박일표는 의외로 이 DJ를 굉장히 즐겼다. 일하는 느낌이 아니라 청취자와 소통하는 느낌이라 하나도 힘들지 않다나. 자리에 앉아 아주 적은 대사만 날리는데도 피곤해져오는 자신은 이해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물론 맞은편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하품을 쩍 하는 제갈택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제갈택. 입 찢어지겠다.”
마이크가 꺼진 것을 확인하고 박일표가 헤드셋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그런 박일표의 말에 제갈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를 힐끔 한번 쳐다볼 뿐이었다.
“어쩌라고.”
“보이는 라디오가 아니라 다행이지만 적어도 하품할 땐 마이크에서 입을 떼는게 어때?”
“뭐 들리지도 않는데.”
“기본 예의란게 있잖아.”
백승철도, 진모리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각자 딴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워낙에 상성이 안좋아 제갈택과 박일표는 시시때때로 부딪히곤 했고, 오늘 이 정도의 언쟁이야 시비거리 축에도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것으로도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싸울 수 있을 만큼 사이가 나빴으니까. 물론 사이가 나쁘기만 한 게 아니라-
문득 한대위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겨 주의를 환기시켰다.
“형. 노래 10초 남았어요.”
“아. 응. 고마워 대위야.”
박일표는 얼른 헤드셋을 다시 머리에 얹고 마이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커다란 모니터엔 현재 실시간으로 도착하는 문자들이 화면에 전송되어 보이고 있었다. 마침내 노래가 끝나고 박일표가 하핫, 하는 작은 웃음과 함께 말을 시작했다.
“와아. 보내주신 문자 정말 감사드려요. 그런데 청취자들의 추억 이야기보다 어째 저희들의 추억 이야기를 궁금해해주시는 청취자분들이 많으시네요.”
한대위는 말에 따라 덩달아 바뀌는 박일표의 온화한 표정에서 눈을 떼고 부산스럽게 바디랭귀지를 시도하는 라디오 피디의 몸짓에 시선을 집중했다.
박일표와 진모리의 시선도 따라 그리로 가는데 어째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가 팔을 머리위로 동그랗게 들어올렸다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피디의 몸짓언어를 도통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마침내 피디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의사소통을 포기하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멤버각자의추억담 각5분씩.]
라디오의 진행시간은 한시간, 멤버가 다섯이니 각자 5분씩이라고 해도 그 반절을 훌쩍 써버리고 만다. 박일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멈추지 않던 말의 마무리를 멋지게 지어냈다.
“그럼, 먼저 저희가 썰을 좀 풀어보고, 청취자분들의 이야기를 이어 듣는걸로 할까요? 마침 게스트는, 저희 멤버들이죠!”
“안녕하세요! 디컨입니다!”
“하필 또 저희가 게스트로 나올 때 주제가 추억이네요.”
“추억 하면 또 많죠.”
한대위는 뭐가 그리 좋은지 파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진모리의 목소리를 헤드셋을 통해 들으며 입가에 미소를 물었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목소리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은 백승철이 그 순간 마침 한대위에게 대화의 화살표를 꽂아넣었다.
“그런데 한대위, 넌 무슨 추억이 떠올랐길래 그렇게 웃고 있었음?”
“어? 대위가 웃고 있었나?”
“난 봤음. 바로 맞은편이라.”
“치사해! 나한테도 웃어줘, 한대위!”
한대위는 난감한 미소를 입가에 베어물고 아무 것도 아닌데.. 라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카메라에 찍히는 기타 프로그램과 달리 라디오는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 존재감이 단숨에 영점을 향해 추락해버린다. 어째 출연료 받고 숨만 쉬다 왔냐는 타박을 듣지 않으려면 열심히 입을 열어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이 났죠.”
“이런저런 무슨 생각? 그럼 이 김에 대위부터 추억을 하나씩 얘기해볼까?”그 순간 테이블 밑의 손에 진모리의 손가락이 얽어왔다. 아주 조심스럽게 검지 끝이 맞닿은 느낌이 들더니 슬며시 손가락의 끝마디를 끼워넣는다. 한대위는 그런 진모리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입으로 끙 소리를 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음.. 데뷔 전에 처음 멤버들하고 밥 같이 먹었던 추억?”
“아~ 나 기억나! 메뉴도 다 기억해! 고등어구이랑, 된장국이랑, 열무 겉절이, 장조림..”
“헐. 진짜임.”
한대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모리가 그때 먹었던 메뉴를 줄줄 읊었다. 설마 메뉴까지 기억해낼 줄은 몰랐던 한대위가 놀란 눈으로 진모리를 쳐다보자 진모리가 한대위를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난 대위가 해준 밥은 다 기억해.”
“고맙다.”
어쩐다. 나는 진모리에게 해준 반찬을 다 기억 못하는데. 어정쩡하게 그리 대답하자 진모리는 으헤헤 바보처럼 웃으며 테이블 밑의 손에 힘을 주어 한대위의 손깍지를 강하게 꼈다.
“맞다. 그거 대위가 처음으로 저희들한테 차려준 밥이었어요. 그 전까진 완전 까도남인줄 알았는데.”
“까도남은 무슨.”
“와. 갑자기 문자가 폭주하네요. 제가 한번 대위한테 읽어드릴께요.”
박일표의 말마따나, 모니터에 떠오르는 문자들이 미친듯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박일표는 언제나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하나씩 문자를 읽어내렸다. 마치 자기가 직접 그 문자를 보낸 사람인 것처럼 감정이입까지 해 가면서 말이다.
“오빠! 요리 잘하세요? 오빠가 제일 자신있는 요리가 뭐에요? 오빠 저랑 결혼해요! 예. 대충 이 세종류네요.”
“한대위 취미가 요리임.”
“그렇죠.”
ㅎㅎ... 어색하게 마이크에 웃음소리를 흘리며 한대위는 제갈택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영 좋지 않은지 라디오가 시작되고 나서 아직까지 입 한번 벙긋하지 않았다. 일표형한테 시비 거려고 저러는 건가.
“자신 있는 요리는.. 음. 딱히 없는데, 한식보단 양식?”
“근데 대위 요리는 진짜 혁명이었음.”
“그때 저희 식생활이 별로 안 좋았죠. 저희가 알아서 해 먹어야 했는데, 뭐 저희가 할 수 있는 요리가 있어야 말이죠.”
“맞아! 맨날 라면만 먹고. 냉장고에 반찬도 없었어.”
“저도 그때 기억이 나네요. 아침밥으로 그거 먹고 1집 앨범자켓 찍으러 갔었는데.”
한대위가 간단히 던진 화두에 주로 라디오를 이끄는 것은 백승철과 진모리, 그리고 박일표였다. 진모리가 마주 잡은 손에 땀이 차서 조금 불편해졌다. 손가락을 꼼지락 움직이자 진모리가 슬쩍 고개를 틀어 한대위와 눈이 마주쳤다. 어째 시무룩한 기색이라 한대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진모리의 손을 다시 고쳐잡았다.
“그럼, 두번째는 오늘의 주제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택이가 이야기 해볼까?”
아. 일표 형 화났다.
게스트로 나온 주제에 심드렁하게 턱이나 괴고 있는 모습이 맘에 안 들었는지 한대위는 박일표의 흰 볼 위에 마치 만화처럼 십자 핏줄마크가 돋아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제갈택은 귀찮은 표정이었지만 라디오에서까지 박일표의 말을 씹어먹을만큼 막나가는 녀석은 아니었다. 으음.. 하고 한대위처럼 고민하는 척 신음을 내뱉은 제갈택은 이내 뭔가를 결정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추억이라면.. 우리 1집 끝나고 잠깐 바다 갔던거.”
“아-”
제갈택의 말에 멤버들 전원이 작게 입을 열어 탄식했다. 1년전 겨울, 갓 성인이 된 멤버들은 회사 몰래 차를 훔쳐타고 서울을 벗어났다. 무작정 새해 첫 일출을 보겠다고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물론 스케쥴엔 늦지 않았지만 핸드폰도 죄 꺼버리고 증발한 멤버들 덕분에 매니저는 수명이 십년은 깎였다며 엉엉 울었다.
“그 바다, 옛날엔 프라이빗 비치가 아니었어. 나중에 내가 산거지.”
제갈택의 말에 진모리와 백승철이 역시 재벌돌! 이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제갈택은 평소라면 닥쳐! 라고 짜증을 낼 것을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추억에 잠긴 건지 제법 아련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평소의 제갈택에게선 찾아볼 수도 없는 황당한 모습이라 한대위는 눈을 비볐다. 내가 잘못 봤다. 제갈택이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지도 않고 이빨도 드러내지 않은 채 웃은 것 같은데.
“원래부터 파도가 세고 돌이 많아서 인기있는 해변은 아니었는데, 음. 맨날 본 애가 있었거든.”
“애? 친구? 아니면 첫사랑?”
“우와아아-”
백승철의 말에 진모리가 우와! 하고 환호성을 질러준다. 은근히 들이 쿵짝이 잘 맞는다니까. 첫사랑이냐는 질문에 아까 한대위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문자가 폭주하고 있었다. 묘하게 조용해진 박일표에게 신경 쓸 틈도 없이 한대위는 정신없이 문자들을 확인했다. 첫사랑이라는 애절한 단어의 위력이 세긴 센듯 했다.
“그냥, 그 앤 거기서 가끔 노래를 불렀거든. 사람 있을땐 입 꾹 다물고 해변을 뛰다가, 사람이 없다 싶으면 노래를 하더라고.”
“노래라? 나보다 잘했어?”
“아니. x나 못했어.”
“야, 너 욕했어.”
“흠. 죄송합니다 감독님. 그냥 삐- 처리 해주세요.”
“생방송인데..”
“알았다고, 암튼 되게 노래 못했어.”
제갈택은 아주 열심히 그 사람이 노래를 못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박일표는 여전히 조용했다.
백승철은 고개를 갸웃하며 제갈택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뭐임? 대체 뭐가 추억인 거임? 부동산 구매가 추억일 리는 없고.. 역시 그 노래하던 사람?”
“몰라. 그냥 가끔 생각나. 그 새.. 아니아니, 그 사람이 노래는 못해도 열심히 불렀거든. 기껏 실컷 노래하라고 해변 사놓고 사람 출입 막으니까 입 싹 닫고 사라지더라고.”
“헐. 지금 그 사람때문에 그 땅 산거임?”
“겸사겸사야. 그 해변 옆에 있는 절벽에 원래 우리 집 별장이 있었거든. 원래 우리가 매입하네 마네 이야기가 있어서 거기가 개발이 안된 거고.. 아씨, 내가 왜 이런것까지 말하고 있지?”
“추억의 짝사랑인가보네.”
“짝사랑 아니거든?”
진모리가 깐죽대자 제갈택이 짜증나는 표정으로 대본을 집어던졌다. 그걸 맞아줄 진모리는 또 아니라 진모리는 혀를 내밀고 베- 제갈택을 약올렸다. 제갈택이 어쭈?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을 백승철이 온몸을 던져 막고 마주 일어나려는 진모리는 한대위 자신이 끌어안아 말리고는 박일표를 불렀다.
‘형, 진행, 진행!’
“아, 흠흠. 제갈택에게 의외의 추억이 있었네요. 저는 저희 멤버들 여행간 게 추억인 줄 알았는데.”
“여행간지 얼마나 됐다고 추억이야?”
“추억은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으니까. 생각 나서 좋으면 그게 추억이지.”
“오오~ 리더 명언이다!”
박일표는 이내 매끄럽게 라디오의 진행을 시작했다. 진모리와 백승철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나자 딱 라디오의 절반을 진행한 시간이 흘렀다. 중간중간 멤버들이 끼어들기도 하고, 또 이상한 주제로 대화가 빠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팬들에게 자신들의 일화를 들려주는 것 뿐이다. 멤버들은 적당히 많은 시간을 공유했고, 이런 자리에서 훈훈하게 꺼낼 일화 정도야 몇개씩 준비된 상태다.
“아- 아쉽게도 시간이 모자라서 제 차례까지는 안 돌아왔네요.”
박일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자들이 매섭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리더다운 인기다. 하지만 박일표는 멤버들의 추억이 곧 자신의 추억이라며 조곤조곤 청취자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0758님. 제갈택 오빠의 추억이랑은 안 겹치잖아요! 일표오빠 추억 말해주세요~ 라고 보내주셨는데요. 음. 제갈택이 눈치가 없어서 지 혼자만의 추억을 얘기한거죠. 반칙이에요 저건.”
“아 박일표 또 시비걸어.”
“택이는 눈치도 없고 또 쌈닭이거든요~”
“매일 리더 자리를 걸고 결투함.”
“으하하하!”
“신이 제갈택을 만들때 돈이랑, 치아, 작곡에 대한 재능은 주셨지만 깜빡 하고 빼놓은게 있는데 뭐냐면요. 싸가지랑 존댓말, 그리고 눈치랑 눈썰미죠.”
“음. 맞음. 제갈택 눈썰미 없음.”
“내 눈썰미가 뭐가 어때서? 보통이거든?”
“눈썰미가 보통이라고? 하하. 제갈택이 농담은 제법 하네요.”
어째 자연스럽게 제갈택이 라디오의 진행에 끼어들며 저절로 육두문자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피디가 필사적인 바디랭귀지를 보내는 걸 모르는건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건가 싶었다.
그러다가 슬쩍 진모리가 한대위의 어깨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대위의 헤드셋을 손가락으로 내리고는 귓가에 작게 중얼거렸다.
‘근데, 갑자기 일표 형 기분 되게 좋아보인다.’
‘...그러게.’
방금 전만 해도 제갈택 때문에 심기가 잔뜩 불편한 상태였는데.. 라디오 진행을 하면서 제갈택의 태도가 바뀐 것 때문인가, 싱글벙글 웃으며 잔뜩 기분 좋은 목소리로 라디오 진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모리. 손 놓으면 안돼냐.’
‘왜?’
‘땀 차..’
“둘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사이좋게 속달거려?”
싱글싱글 웃는 낯의 박일표가 그렇게 진모리와 한대위를 겨냥했다. 한대위는 아무 것도. 라고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했지만 진모리는 다시 헤드셋을 고쳐쓰고는 마이크에 대고 빽 소리를 질렀다.
“대위가 손 안잡아준대!”
“저런..”
“손에 땀 차서 좀..”
“너무해! 사랑이 식었어!”
진모리의 오버스런 말투에 한바탕 웃음이 터지고 나자 피디가 휴식을 알리는 수신호를 보내왔다. 얼추 1부가 끝날 시간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그 때인가보다.
박일표는 얼른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댔다. 낭랑한 목소리가 감미롭게 헤드셋을 타고 흘러나왔다.
제갈택의 태연한 말에 한대위는 말없이 제갈택의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를 눈으로 흝었다. 그 적나라한 시선에 제갈택이 뭐 할말이 있냐는 표정으로 턱끝을 들어올렸다.
저 선글라스... 그래 공인이니까 선글라스 정도는 뭐 오바도 아니지. 이제 해가 다 들어가는 초저녁이지만 햇살을 가릴 용도가 아니라 얼굴을 가리는 용도라면 저 큐빅-아마 가짜 큐빅이 아니라 진짜 다이아일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한대위는 일부러 그 사실을 무시했다.-이 잔뜩 박힌 저 요란한 선글라스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시선을 밑으로 내려 상의를 보면 과연 얼굴을 가리는 목적이 무엇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팬들이 만들어 선물한 티셔츠가 소중한건 알겠지만 슈퍼 가는데 자기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티는 좀 아니다 싶었다. 그런데 바지는 정말 보통 일반인들이 소화하기 어려운 현란한 붉은 색이었다. 그런데 스키니도 아니고 통이 묘하게.. 아니 저건 일자핏도 아니고 힙합핏도 아니고 설마 스투핏인가? 저 바지는 대체 어디서 난 거지? 분명 매니저형이 택이 옷장정리를 다 했다고 뿌듯해했는데...
“..나도 좀 살꺼 있는데 내가 사다 줄까?”
한대위는 제갈택의 패션을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 지 몰라 일단 우회적으로 그의 의사를 물어왔다. 하지만 제갈택은 한대위의 제안을 깔끔하게 거절했다.
“아니, 가서 보고 이것저것 간식거리도 고를 꺼야.”
틀렸다. 저건 무슨 일이 있어도 밖에 나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제갈택의 단호한 대답에 한대위는 작게 한숨을 쉬며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었다. 저걸 말리지 못하면 적어도 사진이라도 안 찍히게 몸으로 막아볼 셈이었다.
물론 한대위 본인도 패션 감각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차라리 멤버들 중에선 코디가 정해준 옷만 그대로 입고 다니는 진모리나 무난하게 입고다니는.. 가끔 바지 걷는걸 까먹고 한짝만 걷는 등의 행동을 하는 일표형 같은 경우가 차라리 나았다. 한대위는 무난한 까만 져지를 입고 지퍼를 턱밑까지 채운 채 캡모자를 썼다. 제갈택은 대위가 모자를 쓰는 걸 보더니 까만 마스크를 하나 들어 턱에 멋들어지게 끼워 썼다. 뭐.. 넌 숨을 턱으로 쉬냐. 왜 마스크를 턱에 끼워...
파파라치를 경계하며 밖으로 나가자 밖에서 대기중이던 몇몇 사생팬들이 꺄아아 비명을 지르며 한대위와 제갈택에게 휴대폰과 싸인지를 내밀어댔다. 대박, 존나 잘생겼어! 오빠! 같은 비명 가운데 찰칵 찰칵 하고 셔터 눌리는 소리가 들려 한대위는 얼른 제갈택을 몸으로 가렸다.
“왜 또 옷장룰렛 돌렸어요!”
“오빠..! 그 티 안티가 준거라니까요!!”
“대위 오빠 택이오빠 티셔츠 찢어주세요!!”
제갈택과 한대위가 사생팬들을 해치고 마트로 향하는 동안 한대위는 아마도 제갈택의 팬으로 보이는 여학생 무리들의 외침을 애써 무시했다. 그들도 제갈택의 패션에 대해 뭔가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는데 아쉽게도 제갈택은 자신의 신념이 뚜렷하면 남이 말하는건 다 개가 짖는 것처럼 치부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제갈택은 훗.. 내 옷이 그렇게 괜찮나? 하고 중얼거리며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한대위를 기함하게 만들었다.
저기 너 귀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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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야. 너 이리 와봐.”
한대위는 매니저, 사이 누나의 매서운 눈길에 깨갱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 뜬 인터넷 기사 때문이었다.
[디컨 멤버 제갈택의 화려한 외출]
[패션 리더? 노노~ ‘긤긔 눈감아’]
[‘디컨’ 제갈택, 알고보니 패션 테러리스트? 그래도 ‘핸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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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야.. 이 기사들 보고 뭐 느껴지는 건 없니?”
“저기.. 그게.. 택이를 말리려고 했는데.”
“우와아!! 대위야, 이거 봤어!?!?”
사이 누나 앞에서 쪼그라던 한대위의 어깨에 진모리의 팔이 턱 걸쳐졌다. 휴대폰엔 어제 제갈택이 쓰고 나갔던 선글라스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었다.
“제갈택꺼 썬글라스 저거 오천만원 짜리래!!”
와 대 단 하 다.
매니저 누나의 표정이 점점 안좋아지는 걸 모르는지 진모리는 연신 신기하지 않냐며 한대위에게 휴대폰 화면을 볼것을 종용했다.
그런 진모리의 반응에 사이는 하아 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진모리 너-”
“에이, 매니저누나 무섭게 왜 그래요. 누나도 제갈택 못 말리면서. 우리 대위한테만 그래.”
누가 우리 대위냐? 라고 어이없어하는 한대위의 말을 씹으며 진모리는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래욧! 하고 외치는 학부모처럼 한대위의 어깨를 껴안고 도전적으로 매니저 누나를 쳐다보며 볼을 부풀렸다.
대위는 내가 지킨다는 진모리의 단호한 표정 때문인지 아니면 진모리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건지 사이는 더이상 대위에게 무언가를 말하는걸 포기했다.
정말이지.. 같이 밖에 나와서 기사가 제갈택에 대한 것만 뜨는 것 좀 보라고 하고 팬 관리좀 하라고 말하려 했는데.
어째 진모리가 그걸 알고 선수를 친 것 같아 영 껄쩍지근 했다.
물론 아이돌의 패션이 괴랄하다는 것이 마이너스일 수도 있지만 화제가 된다는 점에선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갭 모에가 잘 먹힐 때도 있었고.
단지 한대위 본인도 좀 연예인으로써 관리를 들어가야 한다고 말을 이을 셈이었는데.
진모리는 어떻게 알고 그때마다 한대위 옆에 찰싹 달라붙어 논점을 흐리곤 했다.
사이는 콧등을 찡그리며 숙소로 들어가는 진모리와 한대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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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모리 덕분에 무사히 숙소로 돌아온 한대위는 약간 침울해진 거실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 옆으로 기울였다.
“무슨 일이야?”
“어제 외출한거.. 기사 뜬거 보고 제갈택 충격 먹음.”
으음... 목 안으로 침음성을 삼킨 한대위는 자신도 모르게 달력을 확인하고 말았다.
이번엔 기사가 좀 많이 떴으니 적어도 2주일.. 아니 어쩌면 3주일 정도 약발이 갈 수도 있겠군. 대위가 3주인가? 하고 작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백승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무 날은 가겠지. 하고 말을 받았다. 여기서 한대위와 백승철이 가늠하는 기간은 제갈택이 자신의 패션감각에 회의를 느끼며 얌전히 코디 말을 잘 듣는 기간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래서.. 택이는 방에 있고?”
“ㅇㅇ. 방금 일표형이 들어갔음.”
한대위가 그럼 제갈택이 좋아하는 반찬이라도 차려줘야겠다며 소매를 걷고 부엌으로 들어가자 진모리가 그런 한대위의 뒤를 쭐래쭐래 쫓았다.
“나는? 나는?”
“뭐 먹고싶은거 있어서 그래?”
“아니, 그냥 나 신경써달라고.”
“어..”
진모리와 한대위가 사이좋게 부엌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백승철이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애써 부엌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섞인 쪽쪽대는 소음에서 청각을 분리해가며 노트북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때 제갈택의 방문이 열리며 작게 한숨을 쉬는 박일표가 살짝 지친 표정으로 걸어나왔다. 저 표정을 보니 이번엔 제갈택이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라고 백승철은 생각했다.
“후우..”
“제갈택은?”
“으으음. 이번엔 좀 쇼크였나봐. 팬이 선물한 옷을 입은건데 팬카페에서 놀림 당하고 있어서..”
그러니까 그거 평범한 팬이 선물한거 아닌 거 같다니까. 백승철은 괜히 어깨를 으쓱 했다. 몸통 가득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얼굴을 가득 프린트한 티를 선물하는 팬이나 그걸 고맙다고 입은 아이돌이나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