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쳐가 평소대로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면 빌딩에서 발을 헛디뎠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랜서의 감시를 게으르게 방치하고 린이 어지럽힌 저택의 지하실을 청소하는 중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슬슬 이상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청소에 집중하고 있는데도 한 시간에 세 번 꼴로 창병을 감시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오른다는 건 다분히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거기에 창병을 막상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있다고 해서 그 충동이 급격히 사그라드는 건 아니다. 전투의 고양감과도 비슷한 긴장감이 아쳐의 머리 한구석을 자꾸만 잡아채고 있었으니까.
처음엔 성배가 의도한 전투유지시스템의 일종인줄 알았지만.. 배불리 밥을 먹고 무방비 상태로 널부러진 창병을 공격할 의지가 들지 않았을 때부터 그게 아니라는걸 대충 깨닫고 있었다.
딱 봐도 수상쩍거나 의심스러운 마도구 등은 건드리지 않은 채 바닥과 책장 사이사이의 먼지를 쓸어내고 대걸레로 마무리를 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꽤 흘렀다. 애초에 사람 혼자서는 청소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고, 끝내 청소를 끝냈다는 것만으로 이 영령의 살림 랭크를 얼추 유추해볼 수 있을 정도다.
양동이에 든 시커먼 물과 대걸래를 들고 지하실을 올라와 회색이었던 대걸레가 뽀얗게 될 때까지 문질러 빨아 말리고 양동이도 헹궈 엎어두었다.
“후우..”
육체적으로 피곤함을 느끼지는 않지만, 청소를 마무리하고 숨을 내뱉으며 긴장을 푸는 것은 일종의 버릇이다.
그때 타이밍 좋게도 현관의 벨이 울렸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옅은 기척. 아마 린이 말했던 택배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한 아쳐는 천천히 걸어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태연히 서있는 창병을 보곤 그대로 다시 문을 닫는다. 경첩이 부서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렸지만 아쳐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문 너머에서 어슴푸레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감각을 느끼고 독을 씹는 것처럼 이를 악물었다.
“......”
차라리 창병의 환상이라도 봤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난데없이 본인이 튀어나오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어어이! 사람 면전에 대고 문을 닫다니 너무한거 아냐!?”
“..분명 당분간 못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걱정 마셔! 오늘은 감시가 없거든!”
랜서의 말에 아쳐는 더 반박할 거리도 없어 순순히 그를 집안으로 들였다.
일단 감시가 없다는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쳐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단지 그가 놀란 것은 자신이 권하지 않았는데도 랜서가 이곳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음? 오늘도 아가씨는 없는 건가~”
“린은 따로 약속이 있다. 올 때마다 엇갈리는것도 대단하군. 과연 행운 랭크 E는 허명이 아닌가..”
“어이, 네가 그렇게 말 할 처지냐?”
투덜거리면서도 자연스레 식탁으로 향하는 랜서의 뒤를 쫓는다. 그는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대충 봐서는 술과 담배가 담긴 것 같았다. 영령이면서도 가볍게 손댈 수 있는 향락은 제대로 취하고 있단 말이지.. 그것도 딱 자신이 즐기고 싶은 만큼만 절제해서.
“그래서, 정말로 여기에는 왠일이지? 미안하지만 식사는 준비되지 않았다.”
“엥? 밥 때문에 온 건 아닌데?”
“안주도 없다.”
단호한 아쳐의 말에 랜서의 어깨가 축 처진다. 아쳐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 아마 랜서는 감시가 없다는 사실에 기분이 꽤 좋아진 모양이다.
술과 맛있는 안주가 떠올라 습관적으로 여길 찾아온 거겠지. 이 정도면 파블로프의 개라고 불러도 반박할 말이 없겠지만, 진짜로 이걸 입 밖에 꺼냈다간 게이볼그에 심장이 꿰뚫리는 것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창병은 식탁에 봉지를 내려놓고서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음? 의아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으나 뒤에 있는 것은 현관 뿐이다. 나가서 안주거리라도 사오려는 건가. 길을 비켜주기 위해 몸을 옆으로 틀어 벽에 등을 가볍게 붙이자 랜서의 팔이 턱, 하니 벽을 짚었다.
벽과 랜서 사이에 갖힌 상황, 아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가까이 다가온 쿠훌린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팔짱을 풀지 않은 채라 얇은 티 한장을 사이에 두고 랜서의 가슴이 팔 위로 꾸욱 눌렸다.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
가까이 다가와 눈길만 빤히 주는 그의 행동에 심장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펄떡펄떡 뛰어대고, 순식간에 수십개의 생각이 피어올랐다가 꺼졌다. 팔에 닿는 감촉과 그딴 감각에 집중하는 자신에 대한 환멸감이 번갈아가며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컴퓨터로 치면 블루스크린쯤 되는 상태거나, 어쩌면 주마등과도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쳐는 랜서가 이대로 창을 내찔러도 제대로 피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바짝 다가온 남자의 기척에 집중했다. 얕은 숨결이 자신의 코끝에 와 닿고 있다는 사실에 아쳐의 머리 한구석이 다시 과부하 걸린 엔진처럼 삐그덕 거릴 때까지 랜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자신의 얼굴어림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슨 용건이지, 랜서.”
“아니, 아무래도 말로 전하는건 영.. 재주가 없어서.”
설마, 들킨 건가!?
순식간에 심장이 내려앉은 아쳐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랜서의 행동이 먼저 이루어졌다.
쪽, 하고 가볍게 아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 가볍게 빨아올린 랜서는 얼음기둥처럼 딱딱하게 굳은 아쳐를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까짓거, 섹스가 하고 싶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냐!”
*
창병이, 그러니까 눈앞의 푸른 랜서가.
아일랜드의 빛의 왕자라고 불리는 그 대영웅이, 인과역전의 마창 게이볼그의 주인이자 마경의 여왕 스카사하에게 무력을 사사받고 죽음의 여신인 모리안마저 탐냈다고 하는 남자가..
“어이? 왜 대답이 없냐?”
입을 맞췄다.
아쳐는 자신도 모르게 왼손으로 입술 위를 텁 막고 자신의 눈 앞에서 손을 살랑살랑 움직이는 랜서를 피해 순식간에 멀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남에게 입을 맞출 수가 있단 말인가!?
고대의 켈트라는 곳은 원래 이렇게 문란한 곳인가?(정답이다) 아무리 여러 명의 여자를 거친 남자라 해도 함부로 외간남자에게 입을 맞추면서 섹스를 말하고 있다니!?
아쳐의 머릿속이 폭발하기 직전의 간헐천처럼 과열되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닌 랜서는 훗, 하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 모습은 자신과 달리 자못 여유로워서 아쳐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쪽은 저 창병의 돌발행동에 엉망진창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저 녀석은..
“어떻게라니, 그야 네놈 행동을 보면 뻔하지!”
“뻔하다고..?”
“그래. 일하는 데까지 만나러 와서 약속 잡고 밥해주고 도시락까지 싸서 들려주는데.. 그걸 이쪽이 못 알아차린다고 생각했냐?”
“......”
랜서는 말문이 막힌 듯한 아쳐의 얼굴을 보며 상대방의 속셈을 모조리 간파한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아쳐는 쿠훌린이 열거한 사실과 섹스와 연관성을 이리저리 짜맞추다 어떤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확 붉혔다.
그러니까, 저 창병은 지금 내가 호감을 가지고 본인에게 집적거리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창병이 저렇게 여유롭게 재밌다는 듯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지금 이쪽은 일방적으로 그에게 플러팅을 걸고 있던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큭.”
아니라고 딱 잘라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부정하기에는 애써 외면해왔던 그동안의 이상행동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순순히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자존심이 묘하게 상했다. 뭣보다 처음에는 정말로 그를 감시하기 위해 밥을 미끼로 끌어들인 것 아닌가!?
아쳐가 고민한 시간은 꽤 길었고, 랜서는 별로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심드렁한 기색으로 골반 위에 가볍게 손을 걸치고는 중얼거렸다.
“뭐야, 안 꼴리냐? 그럼 그냥 가고.”
“무슨 소리지.”
“아니 뭐, 이쪽이 하고 싶다고 너도 타이밍 좋게 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바쁘면 다음에 오지 뭐.”
그리고는 진짜로 돌아갈 것처럼 식탁으로 돌아가 가져온 봉지를 집어들었다. 아쳐는 봉지를 쥔 랜서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고 그를 붙잡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참고로 세상에서 제일 단호한 표정이었다.
“걱정 마라, 나는 늘 하고 싶었다!”
“헤에.. 오늘따라 맘에 드는 말만 하네, 형씨.”
“......”
아쳐는 장난감을 발견한 늑대처럼 웃는 랜서를 바라보며 잠시 자신의 입을 꿰메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했다.
으으 저번화는 급전개에 이번화는 늘어지네요.. ㅇ<-<
드디어 다음편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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