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을 목에 걸어 그 끝을 양손으로 잡은 쿠로오가 터벅터벅 걸었다. 시바야마와 야쿠가 얼굴을 맞대고 종이를 살피다 쿠로오에게 내밀자 그것을 받아들곤 흐음, 눈썹을 위로 휙 들어올린다.
후쿠로다니 5승 1패
네코마 4승 2패
신젠 3승 3패
우부가와 1승 5패
“오늘의 꼴찌는 우부가와인가~”
후쿠로다니는 오늘도 강세다. 그래도 후쿠로다니를 상대로 유일하게 1승을 챙겨간게 네코마라는 사실에 쿠로오는 만족스럽게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럼 내일은 2승을 챙겨가 볼까.. 머릿속으로 오늘 연습 게임이 어떤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잠깐 복기하는 사이 보쿠토가 쿠로오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헤이, 헤이, 쿠로오!”
“오야?”
“뭐 보고 있어? 스코어?”
쿠로오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종이를 보쿠토의 눈 앞에서 팔랑거렸고, 보쿠토는 아아!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 노 페널티 기록하고 싶었는데! 요괴 고양이가~!”
“네네 아쉽게 됐습니다~”
“뭐야, 우릴 이겼는데 좀 더 신나게 반응하라고!”
“연습게임에 일일히? 참고로 내일도 노 페널티는 물건너 간 줄 알아라.”
“그거 도전이냐! 좋은데!?”
기세 좋게 외친 보쿠토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맺혔다. 몇마디 말로 보쿠토의 페이스를 제 좋을대로 주무른 쿠로오가 스코어를 시바야마에게 넘기고 어깨에 닿을 듯이 붙어온 보쿠토의 얼굴을 옆에서 빤히 쳐다보았다. 고개를 뒤로 돌리면 코끝이 닿을 정도였다.
“..어째 얼굴 너무 가깝지 않냐?”
“응? 나 땀냄새 나?”
보쿠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반문했다. 냄새가 나서 불쾌하다는 의미보단 진짜 그 말 그대로의 의미였는데. 쿠로오는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틀어 보쿠토의 귀 옆으로 코를 옮겨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켁. 엄청난데.”
“으악, 매너없어 쿠로오!”
“설마 진짜 안 날꺼라고 생각한건 아닐테고?”
쿠로오가 키들키들 소리를 내어 웃자, 보쿠토가 과장되게 시무룩한 척을 하며 쿠로오의 어깨에 이마를 붙이고 허리를 껴안았다.
“달라붙지 마, 더워~”
“상처받았어! 쿠로오 엉덩이로 치유받지 않으면!”
보쿠토의 장난스런 목소리에 체육관 안의 시선이 일시에 쏠렸다. 순식간에 빙하기가 온 체육관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은 보쿠토는 쿠로오의 어깨에 이마를 부비던 채 그대로 양 손을 쿠로오의 엉덩이 위로 올리고 장난스레 주물거리기 시작했다. 쿠로오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보쿠토를 떼어내려는 듯 어깨를 흔들었다.
“우와아, 왠 지하철 변태영감인가 했네!”
“이거 여자애들한테 하면 성희롱일까?”
“나한테 해도 성희롱이거든.”
“푸하하!!”
웃겨? 내가 웃겨?
쿠로오가 보쿠토의 볼을 꼬집어 늘리자 보쿠토가 왁왁 외치며 쿠로오의 손목을 떼어내려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 뭐야. 그냥 장난이네. 금새 해동된 체육관의 사람들이 다시 어슬렁거리기 시작하고, 아카아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둘의 장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래서 그 이야기가 나온 거였군.’
엉덩이라니,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신체부위 아닌가.
전혀 다른 성격인것만 같으면서도 또 어쩔 땐 기가 막히게 죽이 잘 맞는 둘이었다.
정규 연습시간이 끝나고 먼저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하는 사람들과 남아서 연습을 좀 더 하는 사람들이 섞여 체육관이 어수선했다.
보쿠토는 연습이 끝난 뒤에 식사를 하는 스타일이었고, 덕분에 아카아시도 그것이 익숙해진 상태였다.
아카아시, 토스 올려줘! 양팔에 공 두개를 끼우고 총총 걸어오는 보쿠토에게 고개를 끄덕인 아카아시가 코트 안으로 들어오자 약속이라도 한 듯 쿠로오가 반대편 네트에 서서 몸을 풀고 있었다.
“쿠로오! 블록 뛰어줄꺼지!”
“오늘은 리시브 연습. 블록 필요해?”
“흠..? 리시브로 내 공을 막을수 있으려나~”
“오야? 이쪽은 네코마의 주장이거든?”
“오야오야?”
묘한 승부욕에 불붙은 둘이 히죽히죽 웃으며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공이 가득 든 볼케이지를 돌돌 밀어 가져온 아카아시가 바닥에 가볍게 공을 튕겨 받았다.
“시작하죠.”
“헤이,헤이,헤이-!!”
단번에 뚫어주지! 퍼엉! 하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내리꽂힌 보쿠토의 스파이크가 바닥에 닿지 못하고 튕겨올랐다. 깔끔한 리시브에 크윽! 하고 숨을 들이삼킨 보쿠토의 얼굴이 살벌해졌다.
“웨이~”
대신 몸을 날려 보쿠토의 스파이크를 받아낸 쿠로오가 여유롭게 웃으며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자세를 낮추고 손가락을 까딱하는 움직임에 보쿠토의 턱에서 이빨 가는 소리가 빠득 새어나왔다. 역시 네코마, 리베로가 아닌 선수라도 리시브가 익숙하다. 아카아시는 곁눈질로 슬쩍 보쿠토의 상태를 확인한 뒤 공을 토스해 올렸다.
“이것도 받아보시지!”
“후욱!”
텅! 하고 불안정한 소리와 함께 쿠로오의 손목에 튕겨오른 공이 그대로 아웃되자, 보쿠토가 헤이헤이!! 하고 허공에 주먹을 휘저었다. 얼얼한 손목을 탈탈 턴 쿠로오가 혀를 차며 다시 자세를 잡자 근육을 잔뜩 수축시킨 보쿠토가 공을 향해 다시 뛰어올랐다.
몇 번의 스파이크 후 보쿠토의 컨디션이 한창 달아오르고, 네트 너머의 쿠로오는 자세를 낮춰 잔뜩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바로 지근거리에서 심리전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블록과 달리 리시브는 철저하게 반사신경과 실력을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다.
“흣!”
오른쪽! 사냥감을 기다리는 고양잇과의 맹수처럼 바닥에 가까이 자세를 낮춘 쿠로오의 운동화가 삑, 소리를 내며 강하게 미끄러진다. 라인 안쪽으로 아슬아슬하게 파고드는 절묘한 스파이크였다. 젠장, 저 부엉이 녀석 스파이크가 점점 날카로워지잖아!
거리가 멀었다. 쿠로오는 두번 생각하지 않고 몸을 띄워 공을 받았다. 타앙! 제대로 튕겨올려진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공이 코트 안쪽으로 깔끔하게 떨어져내렸다.
“젠장!”
비장의 스파이크를 받아친 쿠로오의 모습에 보쿠토가 분한 얼굴로 아카아시! 하고 외친다. 다음 공을 올려달라는 재촉에 공을 튕겨올리던 아카아시의 손이 멈칫했다.
시야에 언뜻 붉은 것이 스친 것 같았다.
“헉, 쿠로오!”
동시에 같은 것을 발견한건지 보쿠토의 목소리보다 그의 발걸음이 먼저 우렁차게 튀어나갔다. 체육관 바닥에 쓸린 쿠로오의 무릎에서 피가 맺혀 종아리까지 주륵 흘러내렸다.
둘의 반응에 시선을 내려 자신의 무릎을 확인한 쿠로오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살짝 화끈하다 싶더니. 무리하게 몸을 날려 제대로 몸을 띄우지 못했던 것이 원인인 모양이다.
순식간에 쿠로오의 앞으로 다가온 보쿠토가 주저앉은 쿠로오의 앞에 주저앉았다.
“괜찮아!?”
“아아, 뭐 그리 아프진 않은데..”
“피 엄청 나는데?”
“몸을 잘못 띄웠어.”
덤덤한 쿠로오보다 더 인상을 구긴 보쿠토가 쿠로오의 상처 위로 고개를 숙여 상처를 보는 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아프겠다. 작게 중얼거리고는 혀를 내밀어 상처 위를 살짝 햩짝거리더니, 상처 위로 혀끝을 꾸욱 눌렀다. 쿠로오가 눈썹을 찌푸리며 보쿠토의 이마를 가볍게 밀며 중얼거렸다.
“따가워.”
불그스름해진 혀끝이 보쿠토의 입 속으로 사라지더니 쩝쩝하고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린다. 아카아시는 다가가보려던 발걸음을 슬쩍 멈추고 둘을 눈에 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위기가 묘하다.
“우, 비리다.”
“그걸 또 먹어보냐?”
그것보다 할 말이 있지 않으신가요? 아카아시는 잠시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닫고 벤치로 걸음을 옮겼다. 짠맛이 나네 마네, 그건 피가 아니라 땀인게 분명하네 하는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보쿠토가 벌떡 일어났다.
“나 매니저들한테 밴드 얻어올께!!”
순식간에 체육관을 빠져나간 보쿠토의 뒤에서 아카아시는 새 타올에 생수를 묻혀 쿠로오에 내밀었다.
“오, 땡큐.”
쿠로오가 씩 웃으며 수건을 받아들여 종아리와 무릎을 톡톡 쳐서 닦기 시작하는것을 내려본 아카아시가 그 옆에 주저앉았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의 아카아시를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건지, 묘한 얼굴로 할 말을 정리하는 아카아시에게 별 말을 걸지 않은 채로 다리를 닦던 쿠로오는 아카아시의 질문에 바로 대답해 주었다.
“서포터는 안하세요?”
“갑갑해서 싫어.”
“쿠로오 씨는 왜 보쿠토 선배가 엉덩이를 만지게 두시는건가요.”
“.....응?”
아카아시의 질문에 쿠로오는 희한한 눈으로 아카아시를 쳐다보았다. 누가 만지게 둔다고?
아카아시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부연설명을 하기 시작했고, 쿠로오는 허탈하게 대답했다.
“아 그건.. 전에 보쿠토가 마른 사람은 의자에 오래 앉아있으면 엉덩이가 배기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어쩌다 이야기가 나오다보니. 그런데 그때도 딱히 내 엉덩이를 만져봐도 된다던가 그런 소릴 한건 아니거든?”
“그런가요?”
“그리고 뭐, 악의라든가 그런걸 가지고 만지는게 아니라 그냥 장난이잖아, 그 녀석은? 일일히 뭐라 하기도 애매하고.”
“그건 그렇지만,”
두분 요즘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두다다 하는 발소리와 함께 보쿠토가 손에 든 것을 힘차게 흔들며 달려들었다.
“쿠로오! 밴드 가져왔어!!”
새끼손가락만한 길이의 길쭉한 밴드 두개를 가져온 보쿠토가 손을 흔들며 뽈뽈 달려와 포장을 뜯었다. 뭉툭한 손끝이 익숙하게 밴드를 벗겨내고 금새 쿠로오의 무릎에 밴드 두개를 가지런히 붙인다.
“어차피 샤워할때 뜯어질텐데.”
“방수밴드래.”
“방수밴드란거 믿을만 한거야? 대체 어디까지가 방수밴드인걸까.”
“그거 아냐? 수심 50m까지 안심입니다~”
“그건 방수 시계고.”
“비를 맞아도 괜찮다.. 라던가?”
“워터 프루프- 인가!”
“에엥! 어째 약해보이는데!?”
상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반듯하게 붙여진 밴드 위를 쳐다보던 보쿠토는 갑자기 배가 고프다며, 저녁 반찬이 돈까스라는 이유를 들어 쿠로오와 아카아시에게 식당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다. 언제나 식당 문이 닫히기 직전에 가는 사람이 왠일인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카아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쿠로오는 조금 더 리시브 하고 가고 싶은데- 라고 중얼거리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밥 먹고 씻으러 가자!”
“돈까스는 어딜 도망가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쿠로오 씨에게 둘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말해서 무얼 할까. 저녁을 먹고 자기 전에 조금 더 연습을 하려는 일학년들에게 체육관을 맡긴 아카아시는 먼저 앞서 걸어가는 둘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쿠토는 벌써 저녁을 다 먹은 것처럼 외쳤다.
“오늘은 내가 샤워실 청소 당번이니까, 쿠로오 너도 도와줘!”
“엑. 싫은데?”
“전에 내가 도와줬잖아!”
기억이 안 나는데~ 잽싸게 달려나가는 쿠로오의 유들유들한 대답에 보쿠토가 빽 소리를 지르며 쿠로오의 뒤를 쫓아 달렸다. 아카아시는 피식 웃으며 느긋하게 식당으로 향했다.
통, 하고 탄력있는 배구공이 체육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돌돌돌 하고 작은 바퀴들이 굴러가며 네트가 걸리는 소리. 일상처럼 귓가에 자글거리는 작은 소리들을 무시하며 보쿠토는 샤프펜슬의 뭉툭한 끝을 턱으로 꾸욱 눌렀다. 살짝 찌푸린 눈길 앞엔 학교에서 나눠준 회색 갱지가 흐물흐물 펄럭거렸다.
“설문지 아직도 못 끝내셨나요?”
“으.. 설문지라기에 간단한 건줄 알았는데 쓰는 게 엄청 많잖아 이거!”
“연습 전까지 작성하시고 교무실에 제출하셔야합니다.”
“윽, 좀만 도와줘 아카아시~!”
보쿠토는 기다렸다는 듯 설문지를 아카아시에게 내밀었다. 아카아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순순히 회색 갱지와 샤프를 건네받아 벤치에 종이를 대고 앉았다. 아카아시가 대충 넘긴 첫표지엔 큼직한 고딕체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건전한 이성교제 실태파악 설문]
시험도 아니고, 이미 아카아시 본인은 점심에 작성해 제출한 설문지였다. 어차피 의무적으로 전교생이 하는 설문지다. 중간에 글씨가 바뀐다고 해서 큰일은 일어나긴 커녕 알아차리지도 못할 거리는데 아카아시는 자신의 에이스를 걸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곧 연습이 시작되니까.
아카아시는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설문지의 빈 칸을 메꿔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설문지를 작성하려 한 것인지 중간중간 보쿠토의 글씨가 채워진 칸도 몇개 눈에 띄었다. 거침없는 아카아시의 손길에 보쿠토가 역시! 하는 소리와 함께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 빠르잖아 아카아시!”
“...보쿠토 선배.”
설문지의 절반쯤을 채웠을까. 아카아시의 샤프가 툭, 갱지 위에 부딪혀 쉼표를 닮은 자국을 만들었다. 보쿠토의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낸 아카아시가 그것을 문질러 닦고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채워지는 설문지를 쳐다보던 보쿠토를 불렀다. 갱지에 눌린 자국이 만족스레 지워지지 않았다.
“이 설문은 직접 작성하신 건가요?”
14. 본인이 생각하는 친구간의 스킨십의 범위는?
아카아시가 샤프로 가리킨 설문을 본 보쿠토가 대수롭잖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묘한 눈으로 질문 밑의 답변을 죽 눈으로 흩었다.
어깨동무, 가벼운 포옹, 손잡기, 엉덩이, 뽀뽀,..
“응, 왜?”
“엉덩이가 대체 뭐.. 아니, 여기부터는 빼는게 좋지 않나 싶어서요.”
“음? 그래?”
“그리고 뽀뽀라니. 이건 비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긴 프랑스가 아닌데요.”
“친구사이에 그정도는 다 하지 않아?”
“하신 적 없으시잖아요?”
아무리 쉽게 들뜨고 쉽게 가라앉는 감정폭을 가지고 있다 해도, 보쿠토는 부원들에게 평균 이상의 스킨십을 한 적은 없었다. 하이파이브나 어깨동무정도야 뭐 그렇다고 쳐도 갑자기 엉덩이가 왜 튀어나오는 건지 아카아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보쿠토 선배가 저 모르는 사이 부원들과 서로 엉덩이를 주무를 정도로 친밀해졌단 말인가요? 뽀뽀는 정말 불이해의 영역 너머에 있는 답변이었다.
“아냐! 쿠로오랑은 해!”
“..두 분 친구입니까?”
아직, 이라는 말이 생략된 문장을 꺼내어 물으며 아카아시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보쿠토는 설문지를 바라보느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보쿠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대답했다.
“당연하잖아~”
왜 당연한건지 모르겠다고 아카아시는 잠깐 생각했다.
첫번째. 보쿠토 선배에게 쿠로오 씨의 의사를 묻고 스킨십을 했는지 묻는다.
-> 왜 그런걸 물어봐? -> 상황에 따라 해당 스킨십을 당한 쪽이 성적인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다. -> 헉!? 내가 쿠로오에게 그렇게 나쁜 짓을..! -> 의기소침 모드가 된다.
두번째. 쿠로오 외의 다른 친구들과도 이런 스킨십을 하는지 묻는다.
-> 예라고 대답한 경우 -> 아 그렇군요..
-> 아니라고 대답한 경우 -> 둘 사이가 어떤 사이냐고 묻는다. -> 고민하느라 연습에 집중하지 못한다.
세번째 -> 설문지를 수정한다. -> 그거 왜 지워? -> 쿠로오 씨에게 물어보세요.
세번째가 제일 편하겠군. 아카아시는 샤프를 들어올려 보쿠토의 답변 위에 선을 그었다. 보쿠토가 어! 하고 눈을 동그렇게 떴다.
어깨동무, 가벼운 포옹, 손잡기, 엉덩이, 뽀뽀,..
“왜 지워?”
“글씨를 지워도 자국이 남거든요.”
“지우는 게 정답이야?”
“쿠로오 씨에게 물어보세요.”
아카아시는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 장의 설문을 작성하며 대답했고, 보쿠토는 흐음? 하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옆으로 갸웃 움직였다.
“다 작성했어요.”
“오우, 고마워. 진짜 빠르네~”
“곧 연습 시작입니다.”
“알았어! 금방 갔다올 테니까 코치님께 말씀드려줘!”
설문지를 구겨쥔 보쿠토가 힘차게 교무실로 달려나간 체육관 안에서, 아카아시는 쪼그려 앉아 저린 다리를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끝까지 들어 바보야. 오늘은 내 침대에서 몰래 재워줄테니까, 내일 날이 밝기전에 떠나. 아침 정도는 챙겨줄 수 있으니까.”
“응?”
“좁지만 낑겨 자면 둘이 못잘것도 없으니까, 들어와.”
보쿠토는 눈을 깜박였다. 침대에 누운 쿠로오가 이불을 들어올려 매트리스 위를 손바닥으로 약하게 팡팡 치며 보쿠토를 부르고 있었다.
“어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보쿠토는 홀린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춥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이불 안쪽은 이상하게도 따스했다. 보쿠토는 자신도 모르게 후우, 하고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너 혹시 아직 추워? 몸이 차갑다.”
“아니, 괜찮은데..”
“교복 구겨져서 어쩌냐..”
“그것도 괜찮아! 빨면 되지!”
뭐 다 괜찮대. 쿠로오가 목을 울려 키득키득 웃자 코에 맞닿은 쿠로오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보쿠토는 어쩐지 쿠로오를 껴안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처럼 손이 근질근질해져 쿠로오의 허리를 양 손으로 꽈악 껴안아 제 품에 닿았다. 어리광을 부리듯 콧날을 쿠로오의 목과 어깨 사이로 끼워넣은 보쿠토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쿠로오는 보쿠토가 춥다고 생각한 건지 등 뒤로 팔을 둘러 이불을 목끝까지 덮어주었다.
그리고 쿠로오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나 말야. 처음엔 내가 고아란거 딱히 숨길 생각이 없었어.”
“으응..”
“그런데 이야기하다 보니까 어쩌다보니.. 이야기를 할 타이밍을 놓쳤다고 해야 하나.”
“아.....”
“고아라고 했을 때 다들 어쩌면 좋냐는 식으로 날 쳐다보는것도 사실 좀 맘에 안들고.”
“.......”
“이렇게 되고 나니 왜 숨기려고 했더라 싶네.”
“쿠로오..”
보쿠토는 쿠로오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어내 그를 마주보았다. 쿠로오의 다정한 갈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놀란 보쿠토를 담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예쁜 표정..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쿠로오는 작게 중얼거렸다.
“날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게 잘 자, 하며 눈을 감는다. 보쿠토는 새빨개진 얼굴에 열이 나는것 같아 입술을 깨물고 쿠로오의 등 뒤로 얽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너무 좋아, 쿠로오가 너무 좋아.
보쿠토는 입밖에 낼 수 있었더라면 진작에 수십번쯤 외쳤을 문장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고마워, 네가 나를 만나러 호그와트까지 와줘서 너무 고마워..
보쿠토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그 얼굴은 제법 비장해보였다. 베개에 누운 쿠로오는 눈을 다시 뜨고 의아한 표정으로 보쿠토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있잖아 쿠로오.”
“응?”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고 돌아가셨대.”
뭐? 쿠로오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지만 보쿠토는 코를 한번 훌쩍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 그럼 매주 소포 보내주시는 어머니는..”
“응. 새엄마. 그리고 나, 사실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마법은 하나도 못 썼어.”
“.....?”
“보통 순수혈통의 마법사들은 대여섯살만 되면 유아용 지팡이를 가지고 놀거든. 나 처음 마법 쓴 날에 혼자 몰래 울었다? 영영 마법을 못 써서 집에서 버림받을 줄 알았거든.”
쿠로오는 보쿠토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말에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늘 자신감에 넘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보쿠토라고 생각했었다.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호그와트에 오지도 못했을 거고, 너도 못 만났을꺼 아냐.”
“......”
보쿠토는 쿠로오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고, 그 웃음에 쿠로오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얼굴로 입을 살짝 열었다 닫았다.
“지금.. 나한테 비밀 이야기 한거야?”
평소와 달리 어색한 문장이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치부를 들켰을 때보다 더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쿠로오를 내려다보고는 응! 하고 대답하며 히죽 웃었다.
“그냥 나도 쿠로오의 비밀을 알았으니까, 나도 하나 말해주고 싶었어.”
“바보냐. 그런건 억지로 말하는게 아니거든?”
“억지 아닌데? 그냥 난 쿠로오가 나에 대해서 잔뜩 알고 있으면 좋겠어!”
“웃기는 녀석.”
어두운 속에서도 보쿠토의 노란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고는 보쿠토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눕기나 해. 라고 말하듯 약한 손짓에 보쿠토는 순순히 침대에 등을 눕히고, 얼른 몸을 돌려 쿠로오 쪽으로 돌아누웠다.
쿠로오의 숨결이 볼에 닿아 간지러울 정도로 가까이 붙은 보쿠토는 보채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린 서로 비밀을 하나씩 공유한거지? 그렇지?”
“그러네.”
선선히 나온 긍정의 말에 가슴이 끓는 물이 담긴 냄비처럼 자꾸만 달그락거렸다. 언젠가 이 물이 흘러넘쳐서 쿠로오의 발끝을 적시면 쿠로오도 날 다시 봐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간신히 멈췄던 눈물이 비죽 나올 것 같았다.
마음만 같아선 밤 새도록 자는 쿠로오의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보쿠토와 쿠로오는 어린 짐승처럼 서로를 껴안고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먼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잠자리가 불편했던 보쿠토였다. 보쿠토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멍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평소와 달리 딱딱한 매트리스에 구겨져 잔 덕에 등이 뻐근했지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린 쿠로오가 바로 옆에 누워있다는 사실은 퍽 고무적이었다.
“도련님, 이렇게 불편한 곳에서 주무시다니..”
물론 일어나자마자 들은 것이 집요정의 목소리라는 건 아쉬웠지만.
아마 쿠로오와 보쿠토가 잠에 빠진 뒤 이곳에 도착해서 차마 보쿠토를 깨우지 못하고 밤새 서서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보쿠토는 침대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집요정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뒤, 실실 웃으며 쿠로오의 어깨로 얼굴을 가져가 작게 쿠로오를 불렀다.
“테츠~”
“우....”
“일어나. 응?”
쿠로오의 등 뒤를 덮듯이 껴안은 보쿠토가 쿠로오의 뒷목에 이마를 붙이고 얼굴을 비볐다. 입으로는 일어나라 하지만 사실은 쿠로오를 놔주기 싫은 것처럼 등을 눌러, 쿠로오가 비켜,, 라고 웅얼거리며 눈을 꿈벅거렸다.
아 젠장, 새벽같이 일어나서 보쿠토 녀석을 보내려고 했는데 창문 밖은 해가 이미 진작에 떠오른 상태였다.
“으, 지금 몇시야?”
“한.. 아홉시쯤 됬을라나?”
“망했네.. 우리 고아원 외부인 출입금지란 말이야.”
“아, 그건 걱정마! 집요정이 왔거든!”
집요정? 그 말에 고개를 돌려 확인하자 언제 온 건지 방문 앞에 우물쭈물한 기색으로 서 있던 집요정이 고개를 푹 숙였다.
“..순간이동으로?”
“응!”
방학 때마다 보쿠토를 데리러 오던 집요정이라 익숙한 얼굴이었다. 집요정은 품 안에 가지런히 접힌 보쿠토의 망토와 그의 빗자루를 든 상태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보쿠토는 아직 잠이 덜 깬 멍한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며 쿠로오에게 대뜸 물었다.
“나 가끔 여기 놀러와도 돼?”
“안돼. 알바 있어.”
“알바가 뭔데?”
“편지해.”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쭈욱 펴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편지로는 쿠로오를 볼 수가 없잖아! 볼을 불퉁 부풀린 보쿠토가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쿠로오의 방문을 똑똑 노크했다.
이크! 하고 부산스레 일어난 쿠로오가 보쿠토의 등을 떠밀었다.
“일단 집에가서 편지해!”
“쿠로오, 잠깐만!”
“주- 주인님이 기다리고 계셔요! 작은 주인님!”
“아직 이동하지-”
팟!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보쿠토와 집요정은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쿠로오는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문을 열었고, 방 안을 슬쩍 흩은 켄마가 그에게 물었다.
“...갔어?”
“응. 도와줘서 고마워 켄마.”
“아침 먹어.”
제 할말만 툭 내뱉고 돌아가는 켄마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쿠로오가 천천히 뒤를 따랐다. 보쿠토가 올까? 안올까? 아마 오겠지. 어쩌면 오늘 밤 당장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득 뒤를 돌아본 켄마가 입을 열었다.
“꿈 꿨어?”
“어?”
“아니, 웃고 있길래.”
내가 그랬나? 쿠로오는 머쓱한 얼굴로 제 입가를 문질렀다. 내가 보쿠토를 떠올리면서 웃고 있었나.. 하긴, 워낙에 유쾌한 녀석이니까.
쿠로오는 잠시 눈곱도 떼지 않고 제 방에서 쫓겨난 보쿠토를 떠올리며 키득거리다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 올리곤 발을 다시 움직였다.
아직은 역치 미만의 감정이었다.
※ 역치 :생물이 외부환경의 변화, 즉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
어떤 행동을 하고자 할때 그것을 필사적으로 만드는 것은 적절한 동기나 주변의 칭찬이 아니었다. 적어도 슬리데린에게 있어 그 요소는 행동을 할때 피해야만 하는 장애물이나 혹은 강력한 반대같은 것이다.
쿠로오 테츠로가 보쿠토의 의견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처럼 살살 달래어가며, 다음 방학을 기약하면 어땠을까?
쿠로오는 아직 열여섯이었다. 호그와트에서 사귄 가장 친한 친구에게 아직은 자신의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아차렸지만 그로 인해 보쿠토가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에 대해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보쿠토는?”
“아직 방에 틀어박히신것 같은데요.”
뒤에서 저를 부르는 보쿠토를 버리고 들어와 쿠로오가 밤새 숙면을 취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쿠로오는 잠을 설쳐 거뭇해진 눈밑을 비비며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름방학은 길었고 그 기간 내내 보쿠토와 이렇게 불편한 상태로 떨어져있고 싶지는 않았다.
“보쿠토한테, 편지 보내달라고 이야기좀 전해줘. 우리집엔 부엉이가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개학하고 뵙겠습니다.”
쿠로오는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까지 플랫폼에서 보쿠토를 기다렸다.
마지막 경적이 울리고 기관사가 출발을 외치고 나서야 기차에 올랐고, 곧 기차는 출발했다. 맨 뒷차량에 올라탄 쿠로오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하염없이 호그와트 쪽을 쳐다보았다.
진짜로 얼굴도 안 보여주기냐.
“보쿠토.. 그 바보녀석.”
역시 어제 좀 더 부드럽게 말할걸 그랬나. 살짝 후회되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한 말을 무를수는 없었다. 쿠로오는 잠을 설쳐 거칠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 한구석이 자꾸만 걸렸지만 밤새 쌓인 잠은 묵혀진 눈처럼 묵직하게 쌓였다.
보쿠토를 모시러 온 집요정이 열차가 떠난 플랫폼으로 헐레벌떡 뛰어온 것은 막 기차가 터널 안으로 사라진 순간이었다.
*
“코타로 도련님!”
“어라? 넌..”
“아카아시 도련님! 작은 주인님이 사라지셨어요!!”
집요정답지 않은 깔끔한 베갯잇을 걸친 집요정이 엉엉 울며 달려나왔다. 집요정의 길고 마디가 툭 불거진 손가락에는 찢어진 양피지 조각이 들려 있었다.
아카아시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였고, 기차가 이미 떠난것을 확인한 집요정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왕방울만한 눈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작은 주인님의 안부를 빌고 있었다.
[쿠로오랑 같이 있을꺼야! 데리러 오지 마!]
아카아시는 양피지 조각에 휘갈긴 그 문장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쿠로오의 동의를 받지 않은 부분은 명확해보인다. 아카아시는 작은 주인님을 보필하지 못했다며 철로에 머리를 쾅쾅 부딪히려 드는 집요정을 불러 양피지 조각을 돌려주었다.
“보쿠토 씨는 기차를 타고 간거야?”
“제가- 제가 투명 망토를 가져다 드렸어요! 작은 주인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거든요!”
“대체 언제.. 아니 아무것도 아냐. 보쿠토 씨를 찾기보다 쿠로오 씨를 찾는게 더 빠를테니 큰 주인님께 이 쪽지를 전달하는게 좋을꺼야. 집요정의 마법이라면 찾을 수 있겠지.”
“아- 알고 있어요! 그분은 작은 주인님의 친구분이시죠! 차- 찾을 수 있을 꺼에요!”
집요정은 할 일이 주어지자 언제 울었냐는 듯 벌떡 일어나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아카아시는 순식간에 조용해진 플랫폼에서 어깨를 으쓱이고는, 마찬가지로 자신을 데리러 온 집요정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귀가했다. 집에 도착한 아카아시가 제일먼저 한 일은 부엉이를 시켜 쿠로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
“보쿠토.. 그 바보 녀석.”
쿠로오의 입에서 작은 투덜거림이 새어나왔다.
보쿠토는 심장이 입밖으로 튀어나갈듯 뛰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했다. 푸흐, 하고 숨소리가 튀어나갔으나 쿠로오는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기울였다.
들, 들키는 줄 알았네. 투명 망토를 뒤집어쓴 보쿠토는 야물지게도 쿠로오와 같은 객실 안으로 성공적으로 잠입할 수 있었다.
쿠로오의 눈 앞으로 손을 살랑살랑 흔들던 보쿠토는 망토를 뒤집어쓴 그대로 쿠로오의 맍은편 좌석에 앉았다. 망토 밖으로 비죽 파이어볼트의 꼬리가 빠져나오고, 폭신한 좌석이 혼자서 아래로 짓눌리는 것처럼 움직였다.
..잠을 못 잔걸까? 쿠로오는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진건지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젯밤 내내, 내 생각을 하다가 잠들지 못한 거면 좋겠다. 그렇다면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
보쿠토 본인이 그랬으니 말이다.
열차의 풍경이 바뀔 때까지, 보쿠토는 잠든 쿠로오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저 자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즐거운데.
쿠로오의 잠이 깊어지는 만큼 숨소리가 늘어지듯 깊어진다. 보쿠토는 망토 밖으로 손을 빼내어 쿠로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뻣뻣해보이지만 사실 쿠로오의 머리카락은 굉장히 가늘고 부드러웠다.
보쿠토 자신처럼 약으로 머리를 세우는게 아니라, 그저 잠을 좀 특이하게 잘 뿐인데도 머리카락이 짓눌릴 정도로 보드랍다. 직접 만져보지 않으면 모를 껄? 보쿠토는 호그와트 내에서 유일하게 쿠로오의 머리카락을 마음껏 만지작거릴 수 있을 정도로 친한 사람이었고, 아무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 없어할 정도로 그 사실에 깊이 만족하고 있었다.
*
“으.. 고개야. 머리카락은 또 왜 이래..?”
문득, 깊은 잠에 빠져있다가 무언가에 끌려나오듯 잠에서 깨어나버릴 때가 있다. 꼭 누군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처럼 깜짝 놀라면서 말이다.
쿠로오는 반짝, 눈꺼풀을 들어올리고는 멍하니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잘 자다가 왜 갑자기 깼지, 아니 그보다 머리가 왜 이모양이지?
저녁때가 되어 어두운 밖은 객실의 유리창을 거울처럼 반질반질하게 만들고 있었다.
쿠로오는 창문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머리카락을 슥슥 만지기 시작했다.
베개도 없는데 꼭 뭔가에 쓸린것마냥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만지면 만질수록 더욱 강렬해지는 헤어스타일을 빠르게 포기한 쿠로오는, 주머니를 뒤적여 기름종이에 싼 칠면조 샌드위치를 꺼내들었다.
아침에 특별히 집요정들에게 부탁해 챙겨둔 것이었다.
‘열차의 군것질거리들이 유독 비싸기도 하고.’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다보니 역에 도착했는지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멈춰섰다.
남은 샌드위치를 한입에 우겨넣고 쿠로오는 교복 겉 망토를 벗어 트렁크에 쑤셔넣었다. 머글 교복과 비슷한 차림이 된 쿠로오가 트렁크를 끌고 역으로 나가는 것을 보쿠토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쫓아가기 시작했다.
‘으, 사람이 너무 많아!’
투명망토를 입은 채로 저 인파 속으로 파고들기는 무리였다. 보쿠토는 조심조심 엎드리듯 파이어볼트에 올라타 둥실 떠올랐다.
쿠로오는 그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서도 잘도 걸음을 옮겼다. 기차역에서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쿠로오는 이내 파란 버스에 냉큼 올라탔다. 막 기차역을 빠져나온 보쿠토가 입에서 앓는 소리를 내며 그 버스를 쫓아 비행을 시작했다.
보쿠토는 주먹만한 공을 쫓아 골을 넣는 추격꾼이었고, 느릿하게 움직이는 버스를 쫓아 비행하는 것이 버겁지는 않았다. 오히려 버스가 너무 느려서 감질맛이 난다. 몇 번 신호등에 부딪혀 빗자루에서 떨어질 뻔한 보쿠토가 고도를 높이고는 욕설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빠진 버스가 갑자기 속력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젠장!’
설상가상으로 날이 어두워지며 버스를 쫓기가 어려워졌다. 보쿠토는 빗자루를 쥔 손이 차가운 바람에 얼얼해진걸 느끼며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장갑을 가져올껄.
몇시간이나 버스로 이동해야 할 줄은 몰랐다. 보쿠토 자신만 해도 집요정이 순간이동으로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으니까...
코와 볼까지 바람에 새빨갛게 얼기 시작해 보쿠토가 콧물을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집에 꼭 가야해?’
문득 든 억울한 생각에 그리 생각하고 만 보쿠토는 뭔가 걸리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쿠로오는 늘 몇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버스를 타고 혼자 기차역까지 가곤 했을까. 부모님이 데리러 오시지 않는건가?
그러고 보니 기차역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는 학부모들을, 쿠로오는 누군가를 찾으려는 시늉도 하지 않고 지나쳤었다. 부모님이 많이 바쁘신건가?
보쿠토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구름이 달빛을 완전히 가리기 전에 쿠로오가 버스에서 내렸기 때문이다.
보쿠토는 양 손으로 빗자루의 머리를 땅으로 향하게 하고 밑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익숙한 곳인지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은 쿠로오는 그대로 캐리어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곧 집에 도착할까? 내가 따라온걸 발견하면 쿠로오, 혹시 화 내려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보쿠토는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히죽히죽 웃었다.
곧 쿠로오의 집에 도착한다는 생각을 하니 대책없이 설레버렸기 때문이다.
낮은 경사의 언덕배기 길을 올라 쿠로오가 도착한 곳은 꽤나 큰 집이었다. 보쿠토가 살고 있는 성에 비견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큰 편이다.
담장에서 정문까지의 거리가 꽤 있는 거대한 저택이랄까, 머글들의 건축양식인지 통짜 바위를 깎아 건물을 만든 듯 직사각형으로 밋밋하게 생긴 건물이었다.
담장에서 이어진 정문에 주저앉아있던 단발머리의 소년이 쿠로오를 발견하자, 쿠로오가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보쿠토는 빗자루를 쥐고 있던 손을 들어 눈을 거칠게 비볐다.
“켄마, 추운데 왜 나와있었어.”
“어서 와.”
쿠로오가 입꼬리만 비죽 올려 웃은게 아니라 눈웃음을 쳤어!?
보쿠토는 이때쯤 모습을 드러내야겠다 생각한 것도 잊고 쿠로오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굉장히, 보쿠토 스스로 말하기에 뭔가 억울하고 자존심 상하는 생각이었지만..
쿠로오의 얼굴이 낯설었다.
“버스가 막혀서, 통금시간 아슬아슬하게 도착해버렸네.”
“나오이 선생님이 저녁밥 남겨두셨대.”
“아하.”
마침내 정문에 도착한 쿠로오가 트렁크에서 손을 떼어 소년을 포옹했다.
단발머리의 소년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곤, 쿠로오의 등 뒤로 작은 손바닥을 올렸다.
“다녀왔어.”
“응..”
보쿠토는 쿠로오의 머리 위보다 높이 뜬 그대로,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누굴까 저건. 쿠로오의 동생? 아니면 친구? 친구라기엔 소년의 체구는 쿠로오에 비해 너무 왜소해보였다.
어쩐지 초조하고 가슴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저 소년은 누구길래, 쿠로오에게 저런 얼굴을 보이게 하는걸까.
서로를 도닥이며 재회의 포옹을 마친 둘은 손을 꼬옥 잡고 담장 안쪽의 건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묘한 패배감에 멍해져 있던 보쿠토가 퍼뜩 눈을 깜빡이곤 허겁지겁 담장 위로 빗자루를 향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는 온통 쿠로오에게 정신이 팔려 보이지도 않던 것이 눈에 띄었다.
[네코마 고아원]
분명 2편 예정 없다고 햇는데..^--------^ 너무너무너모부끄럽다 헤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계탑 위에 있는 레번클로나 그리핀도르와 달리 햇볕이 적고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핀도르의 말마따나 지하감옥처럼 음산하다는 표현은 맞지 않았다.
오히려 슬리데린의 휴게실은 아늑한 동굴처럼 느릿하고 안온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지하치고 높은 천장에서 늘어뜨려진 램프에선 초록색과 주황색 불빛이 어우러쳐 실내를 아롱지게 만들고 있었고 드문드문 배치된 폭신한 소파와 소근대는 학생들의 말소리는 휴게실의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베개에 짓눌린듯한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은 따끈한 모닥불 난로 가까이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아카아시라 불리는 짧은 곱슬머리의 소년이 체스판을 골똘히 노려보고 있었다.
쿠로오는 체스 실력이 그럭저럭 쓸만한 편이었지만 아카아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래도 가볍게 게임을 즐길 정도는 되었는데, 소꿉친구인 켄마와의 대전 덕분에 강한 사람과의 게임에서 오래 버티는 요령만 주로 습득했기 때문이었다.
쿠로오는 고민하는 아카아시를 쳐다보며 검은 망토 안에 접힌 손가락을 들어 제 허벅지를 베고 누운 보쿠토의 뻣뻣한 머리카락을 슬슬 쓰다듬었다.
“보쿠토, 이제 슬슬 일어나지?”
“응?”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소파에 누운 보쿠토가 성의없이 대답하며 읽고있던 책을 배 위로 내려놓었다.
“왜~?”
“왜긴 왜야, 다리 저려. 더이상 내 허벅지에게 고행을 강요할 수 없어. 일어나.”
“에엑, 너무해! 일어나고 싶지 않은데!”
쿠로오의 단호한 말에 보쿠토는 과장되게 우는 시늉을 하며 몸을 둘려 쿠로오의 배에 얼굴을 폭 박고 쿠로오의 허리를 양팔로 껴안아버렸다.
커헉! 하고 숨멎는 소릴 낸 쿠로오가 손에 쥔 체스말을 떨어뜨리는 줄도 모르고 보쿠토는 킁킁대며 쿠로오의 배에 콧날을 부볐다. 갓 세탁된 옷의 햇볕 냄새와, 그 안에 옅게 배인 쿠로오의 체취가 묘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쿠로오는 체취가 약한 편이었고, 시도때도없이 목덜미에 코를 박고 킁킁거려도 책과 잉크냄새가 아닌 쿠로오의 체취를 맡을 수 있을 때는 별로 없었다.
“무겁다고, 보쿠토!”
“싫어!”
“아카아시! 보쿠토좀 떼어내봐!”
“방금 비숍 움직이신거 맞죠? 체크메이트입니다.”
“으앗!”
시종일관 나직한 대화소리뿐인 슬리데린의 휴게실에서 유일하게 큰 소리가 나는 때가 있다면 보쿠토와 쿠로오, 아카아시의 3인방이 있는 곳 정도일 것이다.
셋의 조합은 아주 기묘했다. 현직 마법부 장관의 아들이자 28개의 순혈 마법사 가문중 재력으로는 수위를 달리는 가문의 장남인 보쿠토 코타로에, 그와 입학 전부터 친하게 지났다는 아카아시까지는 그러려니 하지만 보쿠토와 함께 슬리데린에 입학해 단짝친구가 된 쿠로오 테츠로는 슬리데린으로썬 드물게 머글 출신의 마법사였다. 아무리 능력 좋은 마법사라도 머글 출신이라면 일단 배척하고 보는 순혈 마법사 가문에서 무슨 생각으로 머글 태생의 마법사를 끼고 도는지 모르겠다며 수군대던것도 몇년 전이다.
셋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녹아들어갔으며, 호그와트의 학생들은 꼭 그 셋을 한 셋트처럼 묶어 이야기하곤 했다.
쿠로오는 열한살이 되는 날 호그와트의 편지를 받을 때까지도 세상에 마법과 산타할아버지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믿는 척 하는 아주 이성적이고 약은 어린이였으며, 보쿠토는 어릴 적부터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야 마는 어린이였다.
둘은 같은 슬리데린이었지만 또 묘하게도 아주 다른 타입이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서로에게 끌렸는지도 모른다.
“어이, 방학때 열차 타고 집으로 돌아갈 녀석들, 게시판에 종이 붙여뒀으니까 확인하고 신청해!”
반장의 말에 소파에서 보쿠토와 엎치락 뒤치락 장난치던 쿠로오의 움직임이 멎었다. 잠깐만, 작게 중얼거린 소리에 보쿠토가 얼른 쿠로오의 허리를 껴안았던 손을 풀자, 쿠로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게시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소파에 누운 채로 고개만 들어 그런 쿠로오의 뒷모습을 확인하던 보쿠토의 표정이 영 뚱했다.
“쿠로오 씨는 이번에도 집으로 돌아가시는군요.”
“......”
방학은 싫다.
쿠로오는 방학때면 집에 보물이라도 숨겨놓은 것처럼 낼름 가버리곤 했다. 보쿠토가 방학때 호그와트에서 머물며 온종일 빗자루를 타고 놀자고 해도, 니스의 별장이 비었으니 해수욕을 하자고 꼬셔봐도 쿠로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에 가봤자, 나랑 같이 노는 것보다 재밌지도 않을텐데.”
“그건 모르는 일이죠.”
말도 안되는 소릴 툴툴거리는 보쿠토를 무시하며 아카아시는 체스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이번에도 집에 가?”
“뭐, 그렇지.”
흐응. 보쿠토는 눈을 반개한채 한쪽 눈썹을 위로 스윽 들어올렸다.
어째 당연한걸 묻고 있냐는 반응이네. 쿠로오는 방학동안 나를 못 보는게 아쉽지도 않은가.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었다.
“나랑 같이 호그와트에 남아서 놀자, 응?”
“미안하지만~”
“또 안돼?”
어라어라. 쿠로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보쿠토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맹금류의 눈동자처럼 노랗고 동그란 것이 끔벅거렸다.
“..말했다시피, 머글 학교는 원래 방학때마다 학생들을 꼬박꼬박 집으로 돌려보내거든?”
“한번쯤은 괜찮잖아!? 우리 벌써 열여섯이고!”
열여섯도 미성년자거든. 쿠로오는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 깃펜과 잉크병을 쑤셔넣었다.
곧 약초학 수업이 시작할 때였고,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들은 모두 온실로 이동한지 오래였다.
“미안하지만 안 돼.”
싱긋 웃으며 내뱉어지는 쿠로오의 단호한 대답에 보쿠토의 부탁은 상아색 말랑한 치즈처럼 쑹덩 잘려나갔다. 어떻게 다시 물어볼 껀덕지도 없이 아주 깔끔하게 거절당해, 보쿠토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렇게 하나도 안 아쉬운 것처럼 대답하지 마!
“윽.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래!”
“뭐?”
“학교에 있는것도, 우리집에 오는것도 싫으면 내가 그리로 갈께!”
보쿠토는 멋진 해결책을 발견했다는 듯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쿠로오가 이쪽으로 오기 싫다면 내가 가면 되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짐을 쌀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린 보쿠토가 외치자, 쿠로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보쿠토를 옆눈질로 흘겨보았다.
꼭 사물함 속에 처박혀 60일묵은 우유를 발견한 얼굴처럼 썩어있었다.
“안 돼.”
“엑!? 어째서!?”
“절대 안돼. 미안하지만 너까지 챙겨줄 정도로 한가한 방학이 아니거든?”
“챙겨줄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니까?”
보쿠토는 책을 챙겨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쿠로오의 등에 덥썩 매달리듯 들려들어 껴안았다. 으앗, 넘어져! 작게 타박하듯 외친 쿠로오의 등에 얼굴을 파묻은 보쿠토는, 단호하게 자신을 떼어내곤 꿈도 꾸지 말라고 거절한 쿠로오에게 아주 삐지고 말았다.
쿠로오의 심드렁한 말에 아카아시는 보쿠토 쪽으로 향하려던 얼굴을 다시 앞으로 고정했다. 쿠로오의 얼굴에 구멍이라도 낼 기세로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보쿠토는 그들과 몇 자리나 떨어진 곳에 앉아 온몸으로 심기가 불편하니 건들지 말라는 기운을 뭉게뭉게 피워올리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보쿠토씨 시무룩모드가 되어버릴 것 같은데요. 뭣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슬슬 화해해주시죠?”
“하아...”
쿠로오의 스푼이 그릇과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는 한숨을 진하게 쉬더니 손으로 엉망으로 뻗친 머리를 아무렇게나 헤집어댔다.
“저 녀석이 갑자기 방학때 우리집에 온다잖냐.”
“으음.. ”
“이쪽은 도련님 수발까지 들 정도로 한가하지 못하거든. 아카아시 네가 말좀 잘 해줘라.”
아카아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쿠로오씨가 도련님이라는 소리까지 할 정도면 보쿠토씨의 저 제안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보쿠토는 하루 세번씩 쿠로오에게 방학때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따라가고 말겠다 선언했고, 그 때마다 쿠로오는 질색하는 얼굴을 함으로써 보쿠토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 표정 대체 뭔데! 내가 가는게 그렇게 싫어!?”
“그걸 이제 알았어?”
“....!”
보쿠토가 말문 막힌 부엉이처럼 입을 뻐끔거리면, 쿠로오는 그렇게 귀여운 척 해도 안 봐준다. 라고 말하며 망토를 추스르고 먼저 자리를 떠버렸다. 보쿠토가 그런 쿠로오의 등을 나라잃은 선비처럼 망연하게 바라보는것이 하루에도 몇번씩 반복되자, 보다 못한 슬리데린의 몇몇 녀석들이 좀 봐주지 그러냐. 하고 쿠로오에게 한마디씩 던질 정도였다.
물론 쿠로오는 가차없이 거절했다.
그날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아무래도 방학 전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 보쿠토를 좀 더 초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보쿠토와 쿠로오는 평소와 달리 같은 소파가 아닌 각자 다른 자리에 앉았다.
대화도 시선도 없었지만 잔뜩 긴장된 공기가 흐르는 것이, 휴게실에 있던 다른 학생들이 슬슬 눈치를 보며 자리를 하나둘씩 피하다 보니 어느새 남은 것은 둘 뿐이었다.
채 아홉시도 되지 않은 밤이었다.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쿠로오는 옆 소파에 앉아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보쿠토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읽던 책을 탁 덮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하는 쿠로오의 뒤에서 다급한 보쿠토의 외침이 그를 붙잡았다.
“쿠, 잠깐만, 쿠로오!”
쿠로오는 보쿠토의 끈질기고 집요한 조름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고, 혀끝의 독설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이쯤 말했으면 슬슬 알아들을 때가 되지 않았나? 쿠로오가 아카아시에게 그렇게 투덜거릴 정도였다. 그 말은 들은 아카아시는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는데, 알아들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건지 아니면 이만 포기하라는 뜻인지 모호한 몸짓이었다.
“진짜 안 돼!? 나 너 귀찮게 안 할꺼야, 밥도 내가 알아서 먹고 잠도 알아서 잘께! 그냥 같이있고 싶어서 그래!”
보쿠토의 고백을 들은 그 누구라도 볼을 붉힐 정도로 구구절절한 외침이었다. 쿠로오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한 보쿠토의 얼굴에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것은 아니다.
쿠로오가 말없이 보쿠토를 빤히 쳐다보자 후다닥 다가온 보쿠토가 쿠로오의 망토 자락을 쥐고 제 입가로 끌어당겼다.
“코타로.. 너.”
“테츠..”
울망한 눈으로 제 애칭까지 부르며 매달리는 보쿠토에게 차마 험한 말을 내뱉을 수가 없어, 쿠로오는 보쿠토의 어깨를 손으로 슬쩍 쥐었다.
“혼자 지하철 타본적은 있냐?”
“응..?”
“공중전화에서 전화하는 법은..?”
“그거 알아야 해?”
이래서 순혈이란 것들은. 쿠로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까 내가 말한거 혼자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절대 안 돼.”
“엑...”
“내일 아침 일찍 기차타고 떠날꺼야. 개학하고 보자.”
쿠, 쿠로오! 보쿠토가 다시 한번 불렀지만 쿠로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보쿠토는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소파에 쪼그려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너무해..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쿠로오가 플루 가루 쓰는법이나 땅귀신 잡는 법 같은거, 하나도 몰라도 상관없는데!
한참을 훌쩍거리던 보쿠토가 이내 천천히 얼굴을 들어올렸다.
무언가 아주 큰 결심을 한 얼굴이었다.
1이라고 써뒀지만 후편은 예정이없답ㄴ디ㅏ!!
보쿠토 캐붕너무심하고 울보만들었는데 생각해보니 이번 냥온에 내는 개인지 2권 다 보쿠토 질질짜는................어떸ㅋ하지........ㅋ.ㅋ.ㅋㅋ.......그치만 우는 왼쪽이 너무좋아요..
파티라는 말에 잔뜩 긴장한 쿠로오가, 평소답지 않은 얼굴로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느냐고 물은 순간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푸하하 하고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귀엽잖아, 쿠로오!
엉덩이가 걷어차였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웃겨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쿠로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갈 때 쯔음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대충 와도 좋다고 말했는데, 너무 웃었는지 쿠로오의 표정이 영 뚱한게 살벌해보이기만 했다.
그런데 진짜, 귀엽잖아.
약속장소에서 쿠로오를 발견한 보쿠토는 자신도 모르게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려다가 입술을 오므려 참았다. 그렇게 초조해한 것 치고는 무난한 옷차림이었다. 스키니한 몸에 달라붙는 긴 검은 바지와 반팔 티셔츠, 그리고 손목에 찬 스포츠아대 하나 뿐인 단촐한 차림이었는데, 키도 키지만 몸매가 탄탄하다보니 상당히 근사하다. 모델 지망생이니 뭐니하는 녀석들과도 잠자리를 가져봤지만 사실 쿠로오만큼 몸매 좋은 녀석들은 별로 없었다.
쿠로오는 파티가 처음인지 답지 않게 상당히 초조한 얼굴이었다. 앞장서 걷자 뒤에서 딱 붙어 걸어오는 걸음걸이에서 긴장한 티가 난다. 어쩐지 상당히 재미있어진 보쿠토는 일부러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어떻게든 파티에 입장하기 위해 입구에서 대기중엔 사람들을 떼어내고, 전세낸 클럽 안으로 들어오자 쿠로오가 헉, 하고 숨을 삼키는 것이 느껴졌다.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실실 웃으며 쿠로오의 귓가로 얼굴을 가져가 속삭였다.
“혹시 이상한거 들었을수도 있으니까, 음료수 함부로 먹지 마. 얘긴 해 두겠지만 장난기 많은 녀석들이 있어서.”
“뭐!?”
예상대로 쿠로오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두 눈을 휘둥그래 뜨더니, 웨이트리스를 발견하고는 민망한지 고개를 푹 숙였다. 여자랑 섹스 한번 해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게 나름 새로웠다. 아, 어쩌면 진짜 안 해봤을지도. 쿠로오 천상 마짜라 여자한테는 안 설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잘못된 지식을 습득한 보쿠토는 이내 자신을 이 파티로 부른 일행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보쿠토 간만이다?”
“헤이헤이, 오랜만!”
“네 파트너야? 흠.. 분위기 좋은데? 어디 에이전시에 있어?”
헤이헤이헤이, 쿠로오가 좀 근사하긴 하지! 보쿠토는 제가 받은 칭찬도 아닌데 괜히 들뜨고 설렜다. 생긴 것만 괜찮은게 아니라고? 가는 얼굴이 얼마나 에로한지 자랑하고 싶은 마음 반, 혼자만 알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아아, 쿠로오는 모델이 아니고 내가 데려온 녀석이야! 운동하는 녀석이니까 약은 먹이지 마!”
“야. 보쿠토.”
보쿠토는 간만에 보는 녀석들과 대충 인사를 마치고는 쿠로오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파티 분위기가 익숙치 않은지 약간 주춤한 모습이 새로워 내내 옆에 끼고 있고싶었지만 오늘은 할 일이 있었다.
스즈키 아미라고 했던가? 아무튼 흔한 이름이었는데.
보쿠토는 제 친구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긴 검은 생머리의 여자아이의 허리를 잡고 입을 맞추었다.
일단, 어느 정도 여지는 주라고 했던가.. 섹스만 안 하면 되는건가?
뒤에서 불안한 쿠로오가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어쩐지 짜릿해졌다.
꺄악, 싫지 않은 비명을 내지른 여자가 보쿠토의 목에 팔을 감아왔다. 억센 쿠로오와는 달리 한줌에 다 잡힐 정도로 약한 손짓이었다. 그러고보니 여자는 간만이던가?
가슴에 맞닿는 말캉한 가슴을 주물거리니 흥분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보쿠토는 여자를 이끌어 천연 직물로 짜인 부드러운 소파 위에 눕히고 올라탔다.
아버지는 적당히 놀아주라고 했지만. 보쿠토는 여자의 팔을 올려 상의를 벗기며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벽에 기대어 선 쿠로오가 아직도 제 등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어쩐지 흥분되기 시작해, 여자의 목덜미를 일부러 끈적하게 햩아내렸다. 여자의 교성도 듣기 나쁘지 않네. 물론 아래 깔린게 쿠로오라면 더 좋았겠지만.. 문득 쿠로오가 다른 사람 보는 앞에서 할 땐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한참 여자 위에서 가슴을 애무하던 보쿠토는 결국 고개를 들어올려 쿠로오를 찾았다. 요즘은 이상하게 여자의 부드러운 가슴보다 쿠로오의 조그만 젖꼭지 쪽이 더 꼴리는것 같단 말야. 뭔가 엉덩이도 말랑말랑 요샌 주무르는 맛도 상당하고.
‘..역시, 쿠로오랑 하고 싶어.’
쿠로오의 야한 얼굴을 자랑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불안하다. 내가 데려온 녀석이라고 도장을 꽝 찍어놔야 벌레가 꼬이지도 않을거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보쿠토는 이내 방금 그 자리 약간 뒤에서 쿠로오를 발견해냈다.
“쿠로오!”
크게 소리내어 불렀더니 놀랐는지 아미가 움찔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음악에 가려져 쿠로오가 있는 쪽까지는 들리지 않았던지 쿠로오는 보쿠토와 눈을 마주치곤 씨익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손을 내젓고 뒤돌아 인파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방금 전 어색했던 모습은 어디가고 어느새 잔뜩 여유로운 걸음걸이였다.
“뭐야 보쿠토, 안해?”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보쿠토는 제 옷깃을 잡아당겨 재촉하는 아미의 젖가슴에 다시 입술을 올렸다. 뭐.. 쿠로오도 어련히 잘 놀겠지. 남자랑이든 여자랑이든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어쩐지 이 곳에서 쿠로오가 다른 애들과 섹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뭔가 불편해졌다.
“뭐 신경.. 쓰이는거라도 있어?”
“아, 친구 데려왔거든. 이런데 전혀 모르는 녀석이라 왠지.”
“에에~? 그럼 왜 데려온거야?”
“그러게. 다음부턴 안 데려올래.”
보쿠토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미의 길고 가는 머리카락을 사락 쓸어 뒤로 넘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쿠로오의 야한 얼굴을 자랑하고 싶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걸까. 보쿠토는 눈치가 많이 부족한데 비해 의외로 머리는 영리한 편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놀랍게도 빨리 그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쿠로오의 얼굴을 야하게 만들어서 자랑하고 싶은 거였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보쿠토는 금새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역시 옆에 끼고 있을껄. 하지만 이미 쿠로오는 파티를 즐기러 떠났고, 그런 쿠로오를 데려다 억지로 옆에 둔다는 멋없는 짓거릴 할 수는 없었다.
보쿠토는 살짝 가라앉은 표정으로 상기된 아미의 볼을 톡톡 쓰다듬고는 벌어진 옷을 추슬러 입혔다.
아는 녀석들이 있는것도 아니고 오래 놀다오진 않겠지? 기다리다가 쿠로오가 홀로 나오면 얼른 낚아채 돌아가자고 말할 셈이었다.
그리고 잔뜩 섹스해야지!
하지만 파티가 파할 때까지 쿠로오는 보쿠토가 기다리는 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보쿠토는 쿠로오에게 아무 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쿠로오가 단 한 마디라도 클럽에 대해 입을 열었다면 보쿠토는 자연스레 쿠로오에게 물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날 어디 갔었어, 하고. 가만히 쿠로오를 바라보고 있으면 턱끝까지 울컥 그런 질문이 치밀어 올랐으나 참은 이유는 어떤 예감 때문이었다.
이 질문을 내뱉으면, 쿠로오와는 지금처럼 지낼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그게 문제였다.
* * *
평소라면 수건이 가득 쌓여있을 세탁실엔 어째선지 마른 수건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보쿠토는 젖은 상체가 싸늘히 식어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분명 여기 세탁실에 수건을 둔다고 그랬었는데!
“젠장, 하필..!”
발을 구르던 보쿠토는 얼른 복도를 박차고 달려 매니저들이 묵는 숙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자는 매니저들을 깨워 간신히 마른 수건을 얻어낸 보쿠토는 푸헷취! 하고 터져나간 재채기에 눈을 끔벅거렸다. 누가 내 욕하나? 꼭두새벽에 깨웠으니 매니저들에게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긴 하지. 주전인 만큼 컨디션 조절이 그 어느것보다 중요했지만 보쿠토는 제 옷을 찾아 입기보단 발놀림을 좀더 재게 놀렸다.
쿠로오가 기다리겠다.
안그래도 안에다 잔뜩 싸서 기분이 나쁜데 이렇게 기다리게 만들기까지 하면, 으으. 보쿠토는 불만스런 얼굴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앞으로 한달은 안에 못 싸게 하겠네..
수건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은 제 잘못이긴 했지만, 보쿠토는 돌아가서 쿠로오에게 싹싹 빌 생각을 하며 샤워실의 문을 슬쩍 열었다.
“어이어이, 쿠로오~”
어라? 아직 더운 기가 가시지 않은 샤워실엔 아무도 없었다. 눈을 깜박이다 샤워실 밖의 바구니를 살피자 쿠로오의 옷은 없었다. 어떻게든 수건을 구해 먼저 옷을 입고 돌아가버린 모양이었다.
“뭐야~ 괜히 서둘렀네.”
보쿠토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제서야 벗은 상체에 찬기가 돌아 주섬주섬 옷을 주워입었다.
기다려줄 줄 알았는데.
시계를 보니 보쿠토가 수건을 찾아 떠난 시간으로부터 벌써 이십오분이나 지나 있었다. 늦은 자는 할 말이 없는 법이지만, 어쩐지 조금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내일 연락해서 투덜거려야지. 그렇게 결심한 보쿠토가 조금 나아진 얼굴로 발걸음을 옮긴다.
후쿠로다니의 숙소쪽으로 돌아가자 아카아시가 왠일로 잠을 자지 않고 복도에 나와있었다. 누군가와 연락하는지 휴대폰을 확인하는 중이다. 보쿠토가 자는 녀석들을 떠올리곤 작은 목소리로 뻐끔대며 아카아시에게 팔을 붕붕 휘둘렀다.
“보쿠토 상? 이 늦은 시간에 샤워라도 하고 오시는 겁니까?”
“더워서 잠이 안오길래. 너는?”
“저는 그냥 잠시..”
“헤에? 애인이야?”
“아뇨, ...아직은요.”
“오오! 그럼 곧이라는거네!?”
보쿠토는 큰소리 내지 말라며 눈썹을 찌푸리는 아카아시의 모습에 헙,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있는 곳에서 더 연락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건지 휴대폰을 순순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아카아시 있잖아-”
“네에, 왜요 보쿠토 선배.”
“아까 샤워하고 나니까 샤워실에 수건이 하나도 없는거야! 어쩔수 없이 세탁실까지 갔는데 거기에도 수건이 하나도 없더라고! 수건 가지러 매니저들 방까지 다녀왔다니까? 이거 코치님한테 말해야하나?”
흐음. 그렇습니까?
“매니저들에게 수건 확인을 좀 해달라고 하는건 어떠세요?”
“아아~ 그래야겠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아카아시는 투덜거리기 시작하는 보쿠토의 뒤에서 눈썹을 휙 들어올리며 웃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네요. 왠만하면 샤워실에 수건이 떨어질 일이 없는데.
사실 12층에서 콜이 온다면 누구 때문인지는 뻔하다. 그 병동에 쿠로오가 맡은 환자는 한명 뿐이었다. 마츠카와 잇세이 환자. 그동안은 드레싱 시간 외에 부르지도 귀찮게 하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일일까. 타블렛으로 차트를 한번 흩는데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때 문득 남자의 이름자를 눈으로 읽자니 어제의 그 황당한 기억이 왈칵 뇌리를 점령했다.
‘테츠로.’
아~ 진짜 예의 없어. 보쿠토도 나를 테츠로라고 부르지는 않는단 말이지. 괜히 울컥한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잇세이. 라는 이름을 입 안으로 굴린 쿠로오는 이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피식 웃었다. 12층으로 가기 위해 엘레베이터로 가자 막 1층으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 한대, 게다가 왠지 열리는 문마다 족족 스트레쳐카가 들이차 있었다. 차라리 걸어가는게 빠르겠네. 쿠로오는 빈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 대신 비상계단으로 이동해 계단을 한번에 두세칸씩 밟아 올랐다.
어라? 싶은 기분이 된 것은 막 12층 비상계단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요즘들어 12층에 올 때마다 날로 새로워지는 기분인데.. 특히 간호 스테이션쪽 분위기가 싸한 것이. 쭈뼛거리며 콜 했습니까..? 라고 다가온 쿠로오는 희번뜩하게 도끼눈을 뜬 간호사를 보고 목을 움츠렸다.
“늦으셨어요!”
“윽. 무슨 일인데 그래요?”
10년차 간호사쯤 되면 1,2년차 레지던트들은 그냥 찜쪄먹는 패기가 생긴다. 간호사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쿠로오를 스테이션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준비실 안에서 훌쩍훌쩍 하는 소리가 들려 보니 간호사 한명이 울고 있었다.
“진짜 무슨 일입니까?”
“7호실 환자가 라인 잡는걸 거부하고 폭력을 휘둘렀어요.”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간호사를 쳤어요!?”
“아뇨, 그랬으면 경찰을 불렀지 이러고 있겠어요? 그냥 의자를 발로 차고 약이랑 실린지 들어있던 쟁반을 엎었어요.”
“뭐라고요? 하.. 갑자기 무슨. 그런데 저 간호사 울고 있는데.. 진짜 괜찮은 거에요?”
“얼굴이 무서웠대요.”
음. 그 환자 얼굴이 살벌하긴 하지. 간호사와 쿠로오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왜 갑자기 성질이 나온건지 쿠로오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간호사를 때리진 않았다 해도 저렇게 거칠게 나오시면 입원, 거부할 수밖에 없어요.”
이거다. 실질적으로 병동 살림을 책임지는 간호사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은 하나 없다. 간호사들끼리의 유대는 엄청나게 돈독해서, 간호사 하나에게 말 한마디 함부로 내뱉었다간 그 이후로 모든 병원의 간호사에게 호감도가 마이너스를 찍는 기적을 볼 수 있게 된다. 쿠로오는 환자와 간호사 사이에서 팔자에도 없는 줄타기를 해야 하는 자신이 서러워졌다.
“아니, 그런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환자가 갑자기 왜 그런거랍니까?”
조심스레 그리 물으며 쿠로오는 반사적으로 타블렛을 들어 마츠카와 환자의 차트를 불렀다. 올라오기전에 분명 확인 했는데.. 별다른 검사도 없고?
“지금 라인이 사흘째거든요. 상태가 안 좋길래 인펙션될까봐 라인 새로 잡으라 시켰는데..”
“환자가 거부했다?”
“네. 사실 단순히 안티 연결하는 것도 굉장히 꺼려하시긴 했어요.”
“꺼렸다고요?”
처음 듣는 이야긴데? 나 이 환자 주치의 아니었나? 진작 알았더라면 효과는 좀 떨어지더라도 먹는 약으로 처방을 바꿨을 것이다.
쿠로오가 자릴 고쳐앉고 귀를 기울이자 간호사가 이어 말했다.
“라인을 새로 잡는것도 아니고 항생제 들어간 수액 새로 거는 것 뿐인데 굉장히 불편한 티를 내셔서요.. 드레싱도 거부하고 하는걸 보면 접촉 혐오증 같은게 아닌가 싶은데.”
“접촉 혐오증이라니, 저 사람 직업군으로 봤을땐 성립하기 힘든 병인데요..”
“그 정도로 싫어한다는 말이에요.”
그 환자가 드레싱이나 접촉을 꺼리는 기색이 있었던가? 쿠로오는 맘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자신이 있을 땐 그런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다는 건 확실했다. 만약 있었다면 진작에 정신과 협진처방을 내렸을 것이다.
그때 마침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 주머니에 양 손을 푹 집어넣은 쿠로오가 가볍게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제가 가서 보죠. 안되면 C-Line 이라도 잡아야지 어쩌겠어요.”
“그냥 먹는 약으로 바꿨으면 하는데.. 일단 수액이랑은 다 스탑해뒀으니까, 얘기 끝나면 새로 처방주세요.”
병실 복도가 어수선하긴 했다. 스테이션에 나와 험한 얼굴로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 남자는 제법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쿠로오는 몇 번 인사를 나눴던 남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 움직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이구. 선생, 마침 잘 왔습니다. 저거 우리 형님 주사를 다 빼버리고 저래도 되는거요!?”
“사실 금식이 해제됐기 때문에 수액을 꼭 맞을 필요는 없어요. 일단 제가 한번 보죠.”
평소 복도에 어수선하게 흩어져있던 어깨들이 7호실 앞에 모이자 근처 병실 사람들이 힐끔대며 문을 닫는다. 윽, 이거 또 컴플레인 들어오려나.
다 닫히지 못하고 멀거니 열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밖에서 문을 닫았다. 달각. 아직 낮이지만 형광등을 키지 않으면 어두운 병실에 전등을 켰다. 그리고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쿠로오는 바닥에 떨어진 앰플조각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구둣발로 얇은 유리조각을 부쉈다.
쟐그락 하는 소리에 마츠카와의 시선이 느릿하게 쿠로오에게 닿았다.
“쿠로오.”
마치 반칙처럼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에 쿠로오의 입이 다물렸다. 대신 눈을 굴려 방 안을 한번 흩었다. 간호사가 놀라긴 했는지 바닥에 떨어진 실린지며 뒤집힌 의자가 그대로다. 저 혼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침대 위에 반쯤 누워 손을 내밀기엔 방 안이 지나치게 난장이었다.
쿠로오는 잡아달란 것처럼 뻗은 마츠카와의 손을 일부러 무시하며 침대가에 섰다.
“주사기가 무서울 나이는 지나지 않았던가요?”
“딱히 주사기를 꺼린 건 아닌데..”
치켜 올라간 눈꼬리 안의 눈동자가 주머니 안에 단단히 넣어진 쿠로오의 손을 흩었다.
“그럼 아픈게 싫은 걸까나.”
“설마.”
피식 웃는 남자의 얼굴은 곧 잠에 들 것처럼 나른해보이기도 하고 기분 나쁜 기색을 억지로 억누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째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마침 점심시간이었고, 쿠로오는 쿨하게 제 점심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바닥에 누운 의자를 끌어와 침대 프레임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바짝 당겨앉은 쿠로오는 이를 드러내고 입가를 비죽 올렸다.
“설마 간호사가 너무 예뻐서 떨리기라도 한 겁니까?”
“이 병원에서 선생 이상으로 내 취향인 사람은 없으니 걱정 마.”
조금 조용하다 싶더니 훅 치고 들어오는 남자의 말에 쿠로오는 켁, 하고 과장된 소리를 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그의 눈이 쿠로오의 목이며 가슴을 흩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츠카와의 손이 가볍게 움직인다 싶더니 쿠로오의 상체가 휘청 앞으로 기울었다. 목에 건 아이디 카드가 궁금했던 건 이해하지만 그 카드가 자신의 목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으면 하는데 말이죠.
“..이 사진, 언제 찍은거야?”
“대학교 졸업 때.”
“귀엽네.”
피식? 웃네? 이 얼굴이 귀엽다구요? 하하 환자분도 참. 쿠로오의 손가락이 마츠카와의 손바닥을 꾹 눌렀다. 쿠로오의 카드를 꽉 쥐고 있던 마츠카와의 손에 힘이 풀리고, 쿠로오는 손쉽게 그 손에서 자신의 아이디카드를 탈환해 허리를 다시 펴는데 성공했다.
“제 얼굴에 뿅 갔다는 사실은 처음 내원한 날부터 알고 있었던 터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군요.”
“아. 들켰네.”
그리곤 목을 울려 웃는데 쿠로오는 지금 여기가 병원인지 서스펜스 극장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평소엔 그러려니 하는데 엉망이 된 병실에서 이렇게 웃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이 저새끼가 범인이다! 하고 외쳐도 할 말이 없을꺼다.
“그런데 정말로, 주사가 불편합니까?”
유들유들 입가에 띄웠던 미소를 지우고 쿠로오가 다시 물었다.
“간에 염증이 생길 위험이 아직 있어서 말입니다. 사실 먹는 약을 처방할 수는 있지만 효율성 면으로 따지면 비교할 수가 없죠.”
그때 남자의 눈썹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정말로 바늘이 찌르는 것 따위는 아무렇지 않아.”
“그러면?”
“자꾸 닿으면 짜증나. 누가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건 딱 질색이야.”
어라.. 그게 정말입니까. 쿠로오는 가운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손가락에 빙글 돌려 끼웠다. 역시 10년차 간호사의 감은 무시할게 못 되는구나. 가벼운 접촉혐오증일 수도 있겠군.
제 손을 들어 침대 위에 놓인 마츠카와의 손등 위를 덮었다. 닿은 곳을 쳐다보다가 쿠로오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 남자의 얼굴 옆으로 물음표가 든 말풍선이 하나 떠오른 느낌. 할 말이 있는 표정이다. 쿠로오는 남자가 할 말이 있을 때 아랫입술을 살짝 비죽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이 같은 버릇이라 생각하면서도 쿠로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손 잡은거, 기분나쁘진 않습니까?”
“전혀.”
“그럼 이건요?”
쿠로오는 그대로 상체를 숙여 남자의 어깨에 코가 닿을 듯 가까이 가져갔다. 펄쩍 뛰는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대로 뒷통수를 잡아 눌러버릴줄은 몰랐다.
푹 하고 어깨에 코를 박은 쿠로오가 당황하며 얼른 고개를 들었다. 제 완벽한 코를 뭉개버릴 셈이었습니까?
그렇게 묻자 마츠카와의 눈썹이 꿈틀 움직여 기분 나쁜 기색을 꺼리지 않고 드러냈다. 그리곤 어이 없단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사춘기 중학생으로 보여?”
“안 그럼 왜 방을 이 꼴로 만드셨답니까.”
“남자든 여자든, 쓸데없이 깔짝대는게 싫을 뿐이야.”
“아니, 저거 보이시죠?”
깔짝대? 쿠로오는 어이 없는 얼굴로 침대 옆 폴대에 매달린 수액을 가르켰다. 아직 절반도 채 안 들어간 것이었다.
“저거 넣으려고 라인 잡으려고 한 거에요. 설마 환자분 손 한번 잡아보려고 그랬겠어요?”
“..아니었어?”
“이봐요. 마츠카와..”
환자분. 이라고 이어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남자의 굳은살 배긴 손가락이 턱 아래 여린 살에 슥 스쳤다. 목줄기에 닿은 것이 날선 것마냥 오싹 소름이 돋는다.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려고 했는데, 남자의 눈을 쳐다보는것이 아니었다.
씨발.. 이라는 욕설이 남자의 입술에 덮여 먹혔다. 태연하게 제 주치의의 입술에 도장을 찍고는 입술 위를 덮듯이 쪼옥 빨아올린 뒤 다시 슬쩍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내 전화번호 물어보던데.”
“......”
쿠로오는 뻣뻣하게 굳은 자신의 모가지를 원망하는 대신, 눈을 슬쩍 깜빡이고는 턱을 살짝 위로 들어올렸다. 그것만으로 다시 남자의 입술이 축축하게 닿았다, 쿠로오의 혀가 남자의 아랫입술을 사악 햩자 기다렸다는 듯 깊게 입을 맞춰왔다. 거친 입술과 달리 남자의 혀는 뜨겁고 보드라웠고, 또 아주 노련하기도 했다. 혀를 마주 감아 올리고 혀 밑의 여린살을 자극해 헐떡이게 만들고는 잇몸과 이빨 사이를 혀로 눌러왔다.
대담하게 입을 연 쿠로오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키스가 깊어졌지만, 어느새 가운이 잡혀 쿠로오는 뒤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상기된 얼굴로 질척하게 혀를 내밀었다.
“후우..”
머리가 몽롱했다. 이 환자, 키스 너무 잘하는거 아닌가.. 점막과 점막이 문질러지는 느낌이 야하다 못해 마치 섹스 같았다.
끔벅, 말없이 눈을 깜박이자 마츠카와가 느리게 숙였던 고개를 들고 쿠로오의 볼 위로 자신의 손바닥을 올렸다. 그게 입가로 흐른 침 때문이란 걸 쿠로오는 그의 엄지가 입가를 쓸고 지나간 다음에야 알았다.
“하, 진짜..”
“왜. 그렇게 좋았어?”
가려질 리 없겠지만 쿠로오는 손바닥으로 입가와 볼을 쓸었다. 좋았냐고? 맘만 같아선 고작 그걸로 되겠냐고 강짜를 부려보고 싶었으나 손가락 끝까지 저릿해졌다.
“진짜.. 그렇게 주사를 맞기가 싫어요?”
“선생. 나랑 연애 한번 해볼래?”
연애.
쿠로오가 놀란 얼굴을 숨기지도 못하고 마츠카와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황하는 쿠로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쿠로오의 손을 살짝 잡아 깍지를 껴온다.
“그럼 얌전히 주사 맞을 테니까. 응?”
*
대학교 입학 전까지만 해도 쿠로오는 자신이 남자를 연애대상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보쿠토 코타로는 신입생 OT때부터 만나 무섭도록 친해진 과 동기였으나, 단순한 동기 이상의 사이가 되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쿠로오는 자신이 보쿠토와 연애를 하는줄로만 알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친구부터 시작해서 보통 친구들과는 하지 않는 스킨십까지, 가랑비에 조금씩 옷이 젖어들듯 보쿠토와의 거리는 그렇게 가까워졌다.
“나 이번에 여자친구 생겼다!”
“응..? 뭐?”
“아앗! 놀랐지, 놀랐지!”
매너 좋기로 소문 자자한 의대 킹카 쿠로오는 얼굴도 모르는 보쿠토의 여친에게 의문의 1패를 당했다.
얼빠진 쿠로오의 모습을 제가 먼저 애인이 생겨 그러냐는 웃음으로 넘긴 보쿠토가 먼저 자리를 뜰 때까지, 쿠로오는 다리에 힘이 빠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후의 일주일은 기억이 없다. 저가 무슨 생각으로 꼬박꼬박 등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쿠토는 그때 저가 교양과목 조별과제로 정신이 없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 그때 그 과목은 빵꾸났다. 10대를 공부로 보내고 대학생이 된 쿠로오는 자신이 보쿠토와 하고 있던 것이 연애가 아니며, 보쿠토는 그저 자신을 친구로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오로지 자신의 착각으로 이루어졌던 관계라는것이 사무치게 부끄러워졌다.
그동안 저가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고민을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인 일이다. 쿠로오는 이번만큼 자신의 조심스러운 성격이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처음 제 볼에 보쿠토가 뽀뽀한 날 두근거려서 밤에 잠을 못 자다가 결국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을 때의 심란함보다 오백 배는 더 혼란스러웠다.
그럼 나한테 왜 뽀뽀했어?
그럼 왜 시험기간에 나랑만 붙어다녔어?
그럼 술 마시러 갈때 왜 나부터 챙기는데?
남자와 남자가 서로 사랑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제 자신이 보쿠토에게 있어 특별한 줄 알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침착함을 되찾고 객관적으로 보쿠토를 바라본 쿠로오는 곧 깨닫고야 말았다.
보쿠토는 원래 그런 녀석이었다. 제 감정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고, 사람을 잘 챙기고. 비단 저에게만 그런 식으로 대하는게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 친한 친구인가보다 싶은 녀석들에게 저처럼 어깨동무하고 웃는 모습을 본 쿠로오는 아주 천천히, 차곡차곡 보쿠토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접어야 했다.
“헤어졌어.”
“에. 벌써?”
얼빠진 쿠로오의 대답에 보쿠토는 얼굴을 찌푸리곤 뚱하니 의자에 제 등을 기울였다.
아, 그 찌그러진 낯짝 진짜 웃긴다. 쿠로오가 킬킬거리자 보쿠토가 헤이헤이! 이 절세 미남을 두고 찌그라졌다니! 너무하잖아! 하고 개소리를 해댔다. 그 말에 쿠로오가 세상에서 제일 웃긴 농담을 들은 것처럼 빵 터져 웃자 보쿠토가 버럭 외치며 테이블을 마구 두들겼다.
“그래서, 뭣땜에 차였는데?”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쓸어넘긴 쿠로오가 간신히 다시 묻자 보쿠토가 꿍얼거리며 작게 대답했다.
“...해서.”
“뭐?”
“그 여자, 네 욕 했어. 그래서 짜증나서.”
“어, 라...”
접어야 하는데, 접을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 안거 아닙니까? 의대 킹카 쿠로오에게 여자가 욕을 하다니 있을 수도 없는~”
“푸하핫, 방금 그거 진짜 웃겼어!!”
“농담한거 아니거든!”
보쿠토가 여자를 만나고, 또 별별 이유를 들어 애인을 차거나 혹은 차이는 모습을 보며
쿠로오는 조심스럽게 확신했다. 보쿠토와 저는 몇년째 썸을 타고 있었다.
“쿠로오 넌 애인 안 만들어?”
몇번째였지. 본과 2학년쯤 되었을 때인가. 그때가 아마 보쿠토의 세번째였나, 네번째 여자친구와 함께하던 자리였다. 자신의 베스트프렌드라며 타교의 여학생에게 자신을 소개한 보쿠토의 앞에서 쿠로오는 이제 자연스럽게 웃으며 그녀와 악수를 할 수도 있었다.
호프를 시키고 그녀에게 먹고싶은 안주를 물어 주문을 했다.
먼저 나온 생맥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하고 한모금씩 마시자 보쿠토가 갑자기 떠오른 것처럼 그렇게 물었다.
쿠로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쿠토는 눈썹을 스윽 들어올리며 옆자리의 애인에게 얼굴을 기대 속삭였다.
“이녀석 그렇게 안 생겨서 모태솔로다?”
“어머, 정말요? 말도 안돼요. 이렇게 잘생겼는데!”
“하하, 보쿠토 이자식이 천사를 잡아챘나. 덕분에 제가 잘생겼다는 칭찬을 다 듣네요.”
눈을 마주치고 빙긋 웃자 여자가 볼을 복숭아처럼 붉히고 양 손으로 입을 막는다. 귀엽네. 보쿠토가 심기가 불편해진 얼굴로 쿠로오의 잔에 제 잔을 부딪혔다.
“근데 너 진짜 왜 누굴 사귀질 않아? 만나는 사람은 있었잖아?”
“학점관리 하려고 그런다, 왜? 애인은 전문의까지 마쳐서 여유 생기면 할꺼야.”
“에엑!? 진짜?”
쿠로오의 말에 보쿠토가 마시던 맥주를 뿜을 기세로 반문했다. 전문의!? 앞으로 십년은 더 남았잖아!?
“십년이나요!?”
덩달아 놀라는 보쿠토의 여자친구에게 쿠로오는 그저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딱 십년 정도.
내가 이 녀석을 잊으려면 그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서.
곧 보쿠토는 어떤 사소한 이유로 그녀와 헤어졌다. 그리고 곧 죽을만치 바빠졌기 때문에, 보쿠토도 쿠로오도 곧 애인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쿠로오만큼이나 연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밤을 보낸 적은 많다. 그걸 굳이 보쿠토에게 숨기려도 든 적도 없고, 보쿠토는 그것에 대해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좋은 친구인 것처럼 곁에 남아있었다.
단, 밀고 당기듯 간을 보는 것만틈은 자신이 있다. 아마 5년 넘게 썸만 탄 병신짓의 반대급부가 아닐까.
아 어떠케ㅠㅠㅠㅠㅠ 리엪냥 청소기에 절하구있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ᅟᅲᆿ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와중에 쿠로냥 고맙다고 꼭꼭 켄마냥까지 넣어서 사진찍었긔 그런데 켄마냥 저세상귀찮음 오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용적인 선물 사달라더니 나 지금까지 조공해서 이렇게 반응좋은거 첨봄 ㅠㅠㅠㅠㅍㅠㅠㅠㅠㅠㅠㅠ조용한 청소기 진짜 가지고싶었나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어빠ㅠㅠㅠㅠㅠㅠㅠ
댓글 72개
날 덕통시킨 쿠로냥 저 위험한 손가락.... 절하는 리엪냥 귀엽고요 흑 이와중에 바지 짧은거봐ㅠㅠㅠㅠㅠ
ㄴ 폭풍성장 막내임ㅠㅠㅠ아직 자라고 있어서 옷사는거 싫어한다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ㄴ 메친ㅋㅋㅋㅋㅋㅋ그럼 우리 청소기보다 리엪냥 바지조공 해줘야하는거 아니냐곸ㅋㅋㅋㅋㅋㅋ
ㄴ 야근데 지금보니까 쿠로냥보다 커보이는데!? 설마 더 큰건가!?!?
ㄴ 플필은 아직 185라고 되어있는데 너무 빨리자라서 일일히 업뎃하는거 관둔듯..
ㄴ 리엪냥 쿠로냥 키 넘었을껄 저번달 공항사진보면 워커 신은 쿠로냥이랑 비슷했던덧
ㄴ 헐미친 막내가 포풍성장해서 리더보다 커졌어.. 졸라 마음이 위험해지는데..
ㄴ 옄키잡각아니냐이거
ㄴ 너젤리 여기서 이러지말고 팬픽란 가라
켄마겅듀님 오구오구 게이미가 하고시프셔써요ㅠ0ㅠ
ㄴ저기 혀 반토막 떨어졌어 네꺼니?
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친자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개무서웤ㅋㅋㅋㅋㅋ
ㄴ졸라 깔끔한 디스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새기ㅋㅋㅋ
사진은 카이냥이 찍어준건가..ㄸㄹㄹ ....어빠.. 손가락이라도 보고싶어여...ㅠㅠㅠㅠㅠㅠ
ㄴ무슨 소리야 카이냥이 없으면 네코마도 없거든?? 왜냐면.. 공기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ㄴ개새끼야 니가 제일 나빠
ㄴㅅㅂ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우리들은.. 공기다! 순환해라!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도록!
ㄴ이젤리 은근슬쩍 더하고있잖아
* * *
영세 연예기획사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피워낸 불꽃, NEKOMA☆는 이름에서도 알다시피 아이돌그룹이었다.
언더그라운드 랩퍼중에 당시 가장 실력있다 평가받던 쿠로오부터 뮤지컬 배우를 하기엔 아직 실전감각이 부족하니 무대에서 조금 더 경험을 쌓고 오라는 사장의 말에 넘어간 카이, 작곡하다가 쿠로오에게 끌려온 켄마, 외국인이니까 너도 일단 TV앞에 서는 것부터 익숙해지렴! 하고 마지막으로 합류한 리에프까지. 오합지졸이란 말이 따로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제대로 된 연습실도 없이 극단의 배우들과 같은 연습실에서 귀퉁이 자리를 얻어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이게 과연 자신의 커리어와 발전에 도움이 될까 고민하던 어린 영혼들은 지금 -
야... 걔넨 재벌이잖아..ㅠㅠㅠㅠㅠ우리 냥이들도.. 있는 힘껏 기뻐해줬으면 된거 아니냐고ㅠㅠ!!
ㄴ 문제는 이거 두 반응 같이 붙여서 페북이랑 커뮤랑 졸라 퍼짐ㅠㅠㅠㅠㅠㅠㅠ
ㄴ 우리 쿠로냥 탈모오는거 아니냐...
ㄴ 졸라 우리 냥이들반응 평균 아니냐고요ㅠㅠㅠㅠㅠ킁 그치만 저 재력은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ㄴ 이거시 바로... 솔직헌... 제 마음..!
ㄴ ㅇㄱㄹㅇ졸라게부럽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생계형 아이돌 냥이들 까지마라ㅠㅠㅠㅠ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페북반응이랑 보니까 존나 빡친다 진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ㄴ시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 *
“우와! 카이씨! 청소기 진짜 조용해요! 최고다 이거!”
“야. 청소기 다 돌렸으면 꺼. 전기세 나가.”
현관에서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온 쿠로오가 끼어들어 대답했다. 리더의 서릿발같은 호령에 리에프의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왔으나, 순순히 전원버튼을 끄고 청소기를 제자리에 가져다놓는다.
“그런데여 전깃줄 없으니까 허전하네여. 예전 청소기는 돌돌 되서 좋았는데.”
“전깃줄 빨아들이는 그거?”
“네! 네 그거여!”
식탁에 장바구니를 내려놓은 쿠로오가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곧 여름이라 이제 마스크는 무리다. 그새 장바구니를 확인한 리에프가 달걀 한판 밑에 깔린 유부를 발견하고 희희낙락 웃으며 냉장고로 걸어간다.
“유부 초밥 언제 먹어여!?”
“너 돈 벌어오면.”
“맨날 벌잖아여!!”
막내의 쫑알거림에 쿠로오는 네 네~ 대충 대답하며 장봐온 물건들을 식탁 위에 하나씩 꺼내두기 시작했다. 재래시장에서 싸게 산 꽁치와 미나리, 두부 등 찬거리를 정리하고 리에프에게 계란통을 건네자 리에프는 조심조심 계란을 교차하며 통에 넣기 시작한다. 아주 효과적으로 리에프의 입을 다물게 만든 쿠로오는 장바구니를 차곡차곡 접어 전자렌지 밑의 공간에 잘 수납했다.
“카이, 우리 내일 스케쥴 있던가?”
“응. 켄마랑 리에프. 내일 기사님이 데리러 올꺼야~”
“코디누나한테 문자 보내놔야겠다.”
“내가 보냈어.”
“오! 역시 우리 엄마야!”
소파에 앉아 펜을 움직이던-아마도 가계부를 쓰고 있을 것이었다.-카이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름대로 인지도 있는 아이돌이라지만 전속 코디나 매니저는 없었다.
매니저가 할 일은 카이와 쿠로오가 나눠서 하고 있었고, 코디는 예전 드라마 촬영때 알게 된 코디누나 몇명에게 연락해 그때그때마다 일당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계약하고 있었다.
그나마 조금 인지도가 생기자, 소속사에서 차와 기사를 내어줘 어디 갈때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진 않아도 된 것이 불과 일년 전이다. 그 전에는 택시도 타고 버스도 타고 심지어 지하철도 타면서 스케쥴에 다녔다.
그나마 저번 앨범이 조금 히트쳐서, 예능에도 잠깐 나가고 쿠로오는 심지어 드라마에 조연으로도 나간 결과였다. 물론 그 드라마는 쪽박 쳤지만.
쿠로오는 고개를 주억이며 현관 옆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옷장문을 열어 이것저것 뒤져보기 시작했다. 일명 전투복장이라고, 협찬받아 아직 입지 않은 옷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참고로, 새것처럼 입고 반납해야 하기 때문에 두세번 이상을 못 입고 반납해야 한다.
“리에프 설마 너 또 키 큰거 아니지?”
“저번주보다 0.2센치 컸어여.”
쿠로오의 물음에 계단을 다 정리한 리에프가 걸어오며 대답했다. 콩나물이냐!? 쿠로오는 그나마 받았던 바지 중 기장이 제일 긴 바지를 들어올리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젠장. 그럼 이 바지 짧겠네.”
“롤업해 입으면 안되여?”
“...그때도 롤업해서 아슬아슬했어.”
“그럼 그냥 제 바지 입져 뭐.”
“하아. 다음에 돈 들어오면 네 옷부터 사러가야겠다.”
“좋아여!!”
아직도 제가 작은줄 아는지, 큰형의 어깨에 매달려 애교를 부리는데 이게 바로 대형견을 키우는 견주의 마음인가 싶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가벼웠는데 어느새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서.. 허리가 나가버릴 것 같다.
“...이제 그만 매달리지?”
“어? 눈치챘군여!”
“야! 발 떼지마!! 업히지마!”
쿠로오와 리에프가 우당탕 마룻바닥에서 레슬링을 하는 동안 켄마가 멍한 얼굴로 방문을 벌컥 열었다.
리에프의 어깨를 비틀던 쿠로오가 고개를 번쩍 들어올리자 켄마가 터벅터벅 걸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뒤로 쭈욱 빼냈다.
“오. 켄마. 일은 끝났어?”
“으응.. 외주 온거랑, 그리고.. 우리 다음 앨범곡도.”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입으로 휘파람을 휙 불었다. 몇개월씩이나 노래가 성에 차지 않는다며 3집을 미루고 미뤄왔던 것을, 드디어 완성시켰다는 소리였다.
리에프가 밑에서 살려주세여! 라고 외치는 말을 가볍게 씹으며 쿠로오가 리에프 허리 위로 엉덩이를 털썩 주저앉혔다. 밑에서 리에프가 앓는 소리를 내며 죽는 시늉을 해댔다.
“그럼, 우리 곧 안무연습이랑 들어가야겠네?”
“응. 노랜 내일 보낼거고.”
“수고했어, 켄마.”
쿠로오의 말에 켄마가 보일듯 말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오늘은 상으로 애플파이라도 구워볼까.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사과는 없었지만 작년에 만들어둔 사과잼은 남아 있으니 얼추 비슷하게는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뒷주머니에 꽂아뒀던 휴대폰이 어느새 저 거실바닥에서 웅 하고 진동했다.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리에프의 호흡을 정상으로 되돌린 쿠로오의 얼굴에 혈관이 빠직 솟았다.
“아... 진짜 싫다.”
“엑. 갑자기 무슨 일이에여?”
“..진짜 부엉이네 사사건건 짜증나.”
어떤 상황에서나 빙글빙글 미소를 잃지 않는 쿠로오가 유일하게 얼굴에서 웃음기를 없앨 때는 딱 한가지 상황 뿐이었다.
보쿠토 코타로, 혹은 그가 속한 후쿠로다니의 이야기가 나올 때.
리에프는 낯선 장소로 납치당한 고양이가 몸을 웅크리듯 어깨를 움츠리고는 물었다.
“또 왜여.”
“이새끼 또 돈지랄이야.”
나름 인지도 있는 아이돌그룹 리더인 쿠로오는 sns마케팅에 대해서 굉장히 긍정적인 편이었다. 기사를 섭외하고 인터뷰를 하지 않아도 일상 사이사이 뉴스를 끼워넣으면 알아서 퍼지고 기사가 저절로 나곤 했다. 물론 sns하다가 훅 간 스타들도 여러명 본 만큼 양날의 검이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거야 조심하면 되지.
하지만 쌍방소통이란 특성상 쿠로오는 종종 자신이 보고싶지 않은 정보를 억지로 확인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오지랖 넓은 팬이 오빠 이거 봤어요? 태그한 근면돌vs재벌돌 같은거 말이다.
* * *
유명 아이돌이라기엔 약간 모자란, 그렇다고 듣보잡이라기엔 노래 한번쯤 들어본 적 있는 애매한 아이돌그룹, 그게 바로 NEKOMA였다.
그에 반해 후쿠로다니는 그야말로 한손가락에 꼽힌다는 탑 아이돌 그룹으로, 수많은 아이돌과 배우를 배출한 거대 소속사의 간판 아이돌이었다.
그런 후쿠로다니도 징크스 탓인지 1집은 시원하게 말아먹었는데, 오히려 그땐 네코마쪽의 인지도가 약간 더 높았다.
데뷔날짜가 비슷해 몇몇 프로그램에선 아예 신인 아이돌이랍시고 함께 시간을 배정하기도 했고, 인지도 없는 신인들 여러 그룹을 한 대기실에 몰아넣는 일은 다반사라 그때 네코마와 후쿠로다니는 무섭게 친해졌다. 오죽 했으면 케이블티비에 네코로다니의 쇼타임이라는 프로그램이 짧게 생길 정도로 붙어다녔다.(시청률이 좋지 않아 석달뒤 개편되어버리긴 했지만) 휴식기에 두 그룹 리더가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열개를 한번에 작살내는 모습이 sns에 뜨기도 했다.
그렇게 친하던 둘의 사이가 급격하게 벌어진 건 1집 이후 휴식기부터였다.. 고 팬덤은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그 일의 시발점이 바로 ‘나쁜손 사건’ 일 것이라고.
일명 나쁜손 사건의 시발점은 지금으로부터 약 1년 반 전으로 돌아간다.
당시 켄마가 작곡한 네코마의 1집 타이틀곡이 상당히 잘 뽑혀서, 2주간 음원사이트 1위를 고수하며 한창 잘나가고 있던 때였다.
쿠로오도 지상파 드라마속의 작은 조연 자리를 맡았고, 2집 준비기간 들어가기 전 마지막 예능으로 대형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아이돌 프로그램에 출연제의를 받았다.
해당 프로그램에 나온 것만으로 어느정도 영향력있는 아이돌임을 인정받은것과 마찬가지라 쿠로오도 내심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영세 기획사치고는 놀라울 정도의 성과였다.
* * *
“저기, 잠깐만요. 저 곧 촬영이..!”
“응, 걱정 마 빨리 끝내줄테니까~”
쿠로오는 이를 악물었다. 네가 조루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지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 십분 뒤 진짜로 뛰고 달리는 체육대회를 촬영하는데 엉덩이 구멍을 지분거리는 손길엔 배려가 없었다.
차마 입으로 하겠다기엔 이미 코디가 만져준 머리나 차려입은 의상이 망가질까 먼저 말을 꺼낼수가 없었다.
쿠로오는 제 허리춤을 더듬고 트레이닝 복의 고무줄을 늘리기 시작하는 남자의 손길에 이를 악물었다. 쿠로오가 저보다 키도 작고 나이도 스무살은 더 먹은 남자를 강하게 내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남자가 쿠로오의 스폰서였기 때문이다. 뭐, 그렇게 말해도 드라마 조연자리에 꽂아준게 다지만 연줄도 빽도 없는 쿠로오로썬 인지도를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
“이, 있다가 천천히 하죠?”
“씁.. 요새 말이 길다? 드라마 촬영중이라고 건방지게..”
‘망할.’
짐짓 남자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거칠게 쿠로오의 엉덩이를 터뜨릴 듯 꽉 잡아 주물렀다. 나잇살 먹어서 미성년 엉덩이나 따먹는 새끼가.. 쿠로오가 이를 악물고 눈을 감자 얌전해졌다고 생각한 건지 남자 거칠게 바지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리에프? 아니면 보쿠토? 그 누구든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 망할. 소변을 보고, 손을 씻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린 그 누군가는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왔다.
쿠로오는 제 등에 얼굴을 박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는 피디를 힐끔 돌아보곤 짜증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밝히기는 더럽게 밝히는 주제에 화장실에서의 성추행은 혹여라 들킬세라 잔뜩 쫄아있었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여기서 하려고 한 거야? 그 순간 탕, 하는 소리가 화장실을 울렸다. 문을 여는 소리다.
제 등에 얼굴을 처박은 남자가 흠칫 떨더니 두 손이 우왕좌왕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장실 칸을 탕, 가볍게 쳐서 열고, 또 다음 칸을 탕, 쳐서 열고.
화장실 안에 잠겨있는 칸은 쿠로오와 남자가 있던 제일 마지막 칸 하나뿐이었고, 누군가는 꼭 도망가려면 지금이야. 라고 말하든 천천히 화장실의 칸을 하나씩 열어젖혔다.
“젠장.”
아마 그가 있는 칸의 전 칸이나, 전전칸의 문을 탕, 열어젖힌 때였을 것이다. 쿠로오의 바지춤에서 손을 쑥 빼낸 남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화장실 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힘없이 화장실 변기에 털썩 주저앉은 쿠로오는 반쯤 열린 문을 노려보며 바지춤에 손을 올렸다. 천천히 허리끈을 다시 묶고 있자니 발밑이 어둑해졌다. 화장실 칸을 막듯이 선 보쿠토가 씩 웃으며 쿠로오를 내려보고 있었다. 다행이다.
“쿠로오.”
“보쿠토.”
반사적으로 그에 웃어준 쿠로오의 얼굴 위로 짙은 음영이 졌다. 방금 전의 남자와 교대하듯 화장실 칸으로 들어온 보쿠토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칸을 잠갔다. 찰칵, 하는 소리가 참 날카롭게도 울렸다.
“저 사람이야? 그때 그 사람.”
“그래.. 그보다 좁은데, 나가서 얘기하지?”
쿠로오가 반사적으로 리에프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한 것은 저 남자와 있는 것을 보쿠토에게 들킨 것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로 지금보다 더 최악이었다. 방송국 비품실에서 바지만 벗겨진 채 보쿠토와 눈이 마주쳤으니까. 참고로 그날은 하필 드라마 제작발표회 당일이었고, 속옷 없이 발표회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보쿠토는 쿠로오의 굳은 표정에 대고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내가 말했던 거. 생각해봤어?”
“......”
보쿠토는 변기에 앉은 저를 내려다보며 쑥쓰럽게 볼을 긁적였다. 화장실까지 걸어잠그고 할 말은 아닌것 같지만 글쎄, 아마 보쿠토가 그날 자신에게 무슨 소릴 했는지 알면 그럴만도 하지. 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저기! 쿠로오 너 몸 팔거면 나한테 안 올래? 우리집 꽤 잘 살고. 회사 하니까.’
‘뭐..?’
‘그러니까 스폰 같은거 필요하면 그거 나로 하라고.’
‘너.. 미쳤냐?’
“나 진짜 잘 해줄께. 저새끼처럼 화장실에서 찝적거리지도 않을 거고.”
다시 한번 그 소릴 듣자 쿠로오의 머릿속에 열이 확 올랐다. 라이벌, 혹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녀석의 입에서 듣고싶은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차라리 저 늙다리한테 다리를 벌렸으면 벌렸지, 너한테만은 아니야.”
보쿠토의 멱살을 잡고 귓가에 으르렁거린 쿠로오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보쿠토의 노란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잠시간 말없이 그 눈동자를 쳐다보던 쿠로오는 보쿠토를 밀치고 화장실 문을 쾅 열어제꼈다. 동그란 눈동자가 깜박거리며 저를 의아한 듯 빤히 쳐다보는데 그 표정에 구역질이 다 났다. 진짜 몰라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제가 밀치는 손에 따라 비틀, 제 옆으로 물러선 보쿠토가 자신을 끈덕지게 쳐다보는것이 느껴졌지만, 쿠로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장실을 나섰다.
짜증난다. 보쿠토에게 그런 소리나 들어야 할 정도로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스스로가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쿵쿵거리며 화가 덕지덕지 묻은 발걸음으로 네코마 대기실로 돌아간 쿠로오는, 어딜 갔다 왔느냐는 카이의 물음에도 제대로 웃어줄 수가 없었다.
* * *
잔뜩 주물러진 허벅지 안쪽이 홧홧해 까슬한 여름 트레이닝복이 스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쿠로오가 나가는 경주는 50미터 릴레이, 그리고 구기종목인 배구였다.
달리기경주의 꽃인 남자 릴레이는 1부 후반, 그리고 배구는 2부에 시합하게 되니 아직 쿠로오가 활약할 시간은 한참 남아있다고 봐도 좋다.
릴레이 전 분위기를 띄우는 미션레이스경주를 훈훈하게 바라보던 쿠로오의 옆에서 리에프가 음료수를 건네자 그쪽을 보지도 않고 음료수를 받아 뚜껑을 연다. 리에프는 삐진 듯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완전 헤롱헤롱거리네여.”
“뭐? 내가?”
“눈도 안 깜빡이고 보고 있잖아여!”
“웃기지 않아?”
쿠로오가 턱짓으로 가르킨 곳엔 머릴 양갈래로 앙증맞게 틀어올린 홍팀 여가수가 청팀인 아카아시의 팔짱을 끼고 낑낑대고 있었다.
“아앗! 리사 상!”
리에프가 화들짝 놀라 이름을 부른 여가수는 망부석처럼 바닥에 달라붙은 아카아시를 데려가지 못하고 앉아 헥헥거리다 대화를 시도했다. 협상을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리에프와 쿠로오는 홍팀, 그리고 켄마와 카이는 백팀, 야쿠는 청팀으로 나뉘었다. 후쿠로다니쪽도 골고루 나뉘었네. 쿠로오는 황팀쪽에서 응원봉을 흔들며 같은 팀 선수를 응원하는 보쿠토를 잠시 노려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보쿠토네 집이 꽤 잘 사는편- 을 넘어설 정도로 돈이 많다는 사실은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 보쿠토는 딱히 자랑할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물질적으로 모자람이 없던 사람 특유의 말버릇이라거나.. 묘한 위화감을 쿠로오가 놓칠 리 없다. 딱히 보쿠토가 그걸 알아주길 바란것도 아니고 쿠로오도 햄버거를 사는 정도는 그냥 부담없이 보쿠토에게 미뤄버릴 수 있는 유도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번 사건만 아니었다면 쿠로오와 보쿠토는 평소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몸 팔 거면 나한테 안 올래?’
미친. 죽어라 진짜.
보쿠토가 악의없이 예민한 말을 툭툭 던져대는 녀석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쿠로오고 이해해줄 수가 없었다. 우린 친구였잖아. 그런데 어떻게 저런 말을 내뱉어?
순간적으로 돈과 권력으로 저를 멋대로 주무르려는 스폰서와 보쿠토의 얼굴이 겹쳐져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아니잖아. 너는 그런 녀석이 아닌데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해.
일단 화나서 뛰쳐나오긴 했지만 쿠로오는 보쿠토가 진심으로 저런 말을 내뱉은건 아닐거라 생각했다. 천천히,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주면 분명 미안하다고 사과하겠지 싶었다.
양손을 합장하듯 붙여 내밀고 미안하다며 고개를 푹 숙이고, 옆에서 아카아시가 그러니까 말을 할 땐 좀 생각이란 걸 해 보라 툭 던지고 있을 것이다. 수십번 본 광경인만큼 쉽게 눈에 그려지는 모양새였다.
그럼 녹화 끝나고 잠깐 보자고 할까. 그렇게 잠시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던 쿠로오는 불쑥 튀어나온 보쿠토의 손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끌려가고 말았다.
왁! 하고 보쿠토가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쿠로오! 빨리, 빨리!!”
[아앗! 황팀의 보쿠토 선수! 홍팀의 쿠로오 선수를 납치하다시피 데려가고 있습니다!]
[홍팀 선수는 아직도 우왕좌왕하고 있는데요!]
방금 전의 일은 까맣게 잊기라도 한건지 보쿠토는 씩 웃으며 쿠로오의 손목을 쥔 손을 흔들었다. 웃는 낯에 침 못뱉는다고 하던가, 보쿠토가 평소처럼 움직이는데 이쪽만 정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설프게 웃으며 발걸음을 놀렸다.
심판 앞에 선 보쿠토는 제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손을 단단히 쥔 채 쪽지를 내밀었다. 쪽지를 받아든 심판은 종이에 한번, 그리고 쿠로오에게 시선을 한번 준 뒤 카메라에 쪽지를 비추었다. 쿠로오의 한쪽 눈썹이 위로 휙 들렸다.
뭐야, 대체 무슨 단어가 써있길래 저런 반응이야들?
[심판이 주심을 소환하는데요~ 판단에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보쿠토 선수! 각선미가 아름다운 사람을 데려오라는데 쿠로오 선수를 데려왔어요!]
[아니 각선미 말입니까!?]
심판을 거쳐 사회자들에게 들어간 쪽지의 내용에 관중석과 마이크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를 데리고 왔군요! 그거 너무 주관적인 평가 아닙니까!?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보쿠토의 뒷통수를 내리쳤다. 딱! 하고 손가락이 아려오더니 보쿠토의 입에서 아 왜! 하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왜 나를 데려오고 난리냐, 이 바보 부엉이가!”
“각선미라잖아!”
“객관적인 각선미는 보통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오오. 쿠로오 선수의 각선미에 대한 정의가 뚜렷하군요.]
[심판들이 각선미에 대한 국립어대사전의 검색결과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과연 보쿠토 선수는 이 미션레이스를 성공적으로 골인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뒤에 홍팀이 대기중이에요. 여기서 황팀이 실패하면 자동적으로 꼴찌가 되겠지요~]
[홍팀인 쿠로오 선수가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니거든!? 각선미는 다리가 예쁜걸 말하는 건데!”
“그러니까 그 예쁜 다리가,”
쿠로오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숨을 들이삼켰다. 성큼 다가온 보쿠토의 손바닥이 쿠로오의 반바지 안쪽을 파고들어 허벅지를 꽉 쥐었다.
보쿠토의 손목 아래께로 드러난 하얀 허벅지 안쪽을 기민하게 잡아챈 카메라가 노골적으로 쿠로오의 다리를 아래에서 위로 쭈욱 흩는다.
“쿠로오 너 다리 예쁘잖아!”
“야!!”
보쿠토는 잘 보라는 양 쿠로오의 허벅지 안쪽까지 손가락으로 사악 흩었다. 오빠 허벅지다!! 오빠아악!! 꺄아악! 하는 소프라노톤의 비명이 관중석에서 와르르 튀어나왔다.
그런데 하필 보쿠토의 손가락이 흩은 곳이 방금 전까지 주물러지던 곳이다. 약간 벌겋게 상기된 허벅지 안쪽이 드러나는 순간 쿠로오는 팔꿈치로 보쿠토의 명치를 그대로 퍽 찔러올렸다. 켁.. 하고 무릎을 털썩 꿇으며 상체를 둥글게 만 보쿠토의 반응에 화면에선 [보쿠토 코타로 처치!] 라는 웃기는 자막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쿠로오는 이를 악물었다.
이 녀석, 알고 한 거다. 일부러, 보란 듯이-
“뭐하는 짓이야!”
“나아.. 죽으면.. 묘비에 쿠로오 각선미를 찾아서.. 라고 써 줘..”
“보쿠토!”
쿠로오의 외침은 터져나온 관객들의 웃음소리에 파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보쿠토는 히죽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보쿠토의 부상투혼에 감동하기라도 한 건지 심판은 보쿠토의 미션을 인정했다.
[네에, 쿠로오 선수의 각선미가! 드디어 최고로 인정받은 순간입니다!]
[방금 전부터 너무 좋아하시는거 아닙니까!?]
쿠로오는 흐느적거리며 제게 손을 내미는 보쿠토를 쳐다보다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쿠로오? 제 어깨에 팔을 올리고 몸을 축 늘어뜨리려 했던 보쿠토의 얼굴에 살짝 의아한 기색이 맴돈다. 두팔은 아직도 제게 쭉 뻗은 채였다.
쿠로오는 웃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보쿠토를 빤히 쳐다보다, 그대로 몸을 돌려 대기석으로 걸어나갔다.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쿠로오?”
완전히 등을 보이고 먼저 걸어나가는 쿠로오의 등을, 보쿠토는 빤히 쳐다보다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제 귓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울린 그의 이름에 쿠로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쿠로오가 연락을 안 받아.”
“내가 몇번을 말해. 이미 차단 당한거라니까!”
코노하의 목소리에 보쿠토의 얼굴이 금새 시무룩해졌다. 뭔가 말실수라도 하신 건 아닙니까?
아카아시가 정답에 가까운 대답을 내놓았지만 보쿠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제법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내 생각인데, 좀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아.”
“하아?”
여러모로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코노하가 콧방귀를 치며 쿠로오에게 차단당한게 아니면 제 손에 장을 지지겠다 호언장담을 하자 보쿠토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카아시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보쿠토 씨의 반응이 평소와 다른데? 뭔가, 짚히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쿠로오 씨가 부끄러워할만한 상황을 보쿠토 씨가 알고 있다던가 하는.
“그러고 보니 쿠로오씨와 연락이 되지 않은게 체육대회 쯔음.. 부터였던가요?”
아카아시가 슬쩍 말을 시작하자 보쿠토의 어깨가 움찔 하고 크게 튀었다. 코노하의 입매가 비싯 위로 치켜올라갔다. 아카아시와 눈을 마주친 코노하가 보쿠토의 옆구리를 은근하게 찔렀다.
“혹시 그때 그거 때문에 그래?”
“무, 뭐! 나 쿠로오한테 아무 말도 안했거든!!!!!”
“뭐래, 너 그때 각선미 어쩌구 하면서 쿠로오 데려가서 허벅지 주무른 거 때문에 연락 끊은거 아니야?”
“아? 아.. 그거? 아.. 그런가?”
“그 전에 쿠로오 씨와 무슨 일 있었죠?”
“엥?”
“헉!”
아카아시의 날카로운 말에 보쿠토가 숨을 들이키곤 입술을 우물우물 베어물었다. 빨리 털어놓는 편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네가 고민해봤자 쿠로오가 차단을 풀어주는 것도 아니잖냐.
보쿠토는 눈동자를 어지럽게 깜빡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민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두배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고민량 감소의 비법을 몸소 경험해보기로 마음먹은 보쿠토의 입은 이내 쿠로오와 있던 일을 줄줄 털어놓고 있었다. 사실 그때 화장실에서.. 그리고 예전에 방송국에서 말야..
“그래서 결론은?”
“쿠로오가 왜 내 스폰을 안 받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결국 쿠로오가 연락이 되지 않게 걱정이 되네 마네 했던게 그거 때문이었어? 보쿠토의 폭탄 발언에 둘 다 놀랄만도 하건만 코노하도 아카아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뭐야 시시하네. 그거야 네가 제대로 조건을 내걸면 되는거 아냐?”
“제대로 말 했어!”
“화장실에서 안할께가 뭐냐 대체~”
코노하의 말에 보쿠토의 얼굴이 급격히 시무룩해지기 시작했다. 시든 난초처럼 흐물거리기 시작하는 보쿠토가 그럼 어떻게 말하면 되는데..? 하고 칭얼대기 시작하자 아카아시가 말을 받았다.
보쿠토는 춤추고 노래하는 데 있어서는 타고났다 해도 좋을만큼 잘 해내고 있었지만 연기력은 글쎄..
‘호랑이가 고기를 먹어야지 풀을 뜯어먹어야 되겠습니까? 얘는 연기 시키지 말고 노래, 춤 이런거 시키세요. 괜히 이상한 짤방 생성시키지 말고.’
‘보쿠토씨 연기가 그정도입니까?’
드라마를 찍기 전 짤방생성부터 염려될 정도였던 것이다. 아카아시가 말해놓고 아차 한 순간,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쥐고 헤이헤이헤이!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나 쿠로오랑 같이 드라마 찍을래!”
“엥?”
“그리고 드라마 같이 하고 나서 다음 드라마를 걸고 스폰제의 걸어야지!!”
“와 인성이 썩었네.”
“어차피 쿠로오 몸 굴릴거, 내가 데리고 있고 싶어서 그러는건데 뭐.”
보쿠토는 대수롭잖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당장 연기수업 시작하겠다고 해야지!
소란스레 어딘가로 뛰쳐나가는 보쿠토의 뒤에서, 아카아시는 그저 간만에 보쿠토 씨가 열심히 뭔가를 하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설마 드라마 출연을 허락받을 때까지 일년 반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될 줄 알았더라면 허튼짓 하지말고 쿠로오씨에게 연락하지 말고 일단 싹싹 빌고 보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다.
* * *
[멤버/프로필] 2016.0421 수정완료!
추가 수정사항 있으면 댓글 ㄲ
쿠로오 테츠로, 방년 23세.
키 187.7cm 몸무게 75.3kg
좋아하는 음식 : 꽁치구이
생일 1117
중학교때부터 공테이프에 라임을 넣어서 취미로 랩을 하기 시작했고, 19세에 네코마 리더로 데뷔.
꿀성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목소리가 좋다. 국내 랩퍼이야기나오면 꼭 탈아이돌급
랩퍼라고 이름나옴.
수목드라마 엔젤포유에서 조연으로 브라운관 데뷔. 연기도 그럭저럭 했다는 평인데 그 이후 찍은 작품은 아직 없음. 드라마가 개노잼이어서 그랬던거 같다..
현재 막내가 자기 키 추월한게 신경쓰이는 모양.
후쿠로다니(일명 붱그룹)의 리더 보쿠토 코타로와 사이가 좋지 않음.
예전 1집때까지 네코로다니의 쇼타임 하면서 되게 친했다 들었는데 일명 나쁜손 사건 이후로 만나면 그렇게 붱붱냥냥한다고.
사실 이때를 기점으로 그동안 팬픽에서 만년 최강공 능글공 자리를 고수하던 쿠로오의 아성이 무너져서 싫어한다는 소문도 있다.
팬픽선물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빵터지면서 낭독해서 무개념 사생 쫓아낸적도 있음.
SNL보고있냐!
그런데 누가 보쿠토x쿠로오 팬픽 선물했을때 개정색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자기가 여자역인 글은 아직 보기 어려워하는듯.
엔젤포유갤러리 링크 >>>
나쁜손 사건 전말 링크 >>>
* * *
[잡담/익명] 뉴떡밥엔 쿠로냥 벅지짤 재업
[GIF짤]
나온지 1년도 더됐지만 아직도 내 최애짤임. 아무리 봐도 저 끈적하게 종아리부터 초근접으로 허벅지까지 올라가는 저 화면 저거 진짜 배운 변태 카메라감독님.. 사는동안 많이 버시오ㅠㅠ
하필 쿠로냥은 그날 반바지를 입었고 하필 보쿠토가 각선미 좋은 사람을 데려가야했고 사회자는 미쳐 날뛰고있고..
지금은 나름 보이지만 그땐 그룹간 크로스오버 팬픽 거의 없었을때라 금손들 연성 갈곳잃고 헤매이는거 많다ㅠㅜ 젤리쪽에도 없고 둥지쪽에도 없어서 가끔 기타연예인란 보면 뜬금포로 붱냥픽 있고 ㅅㅂ
네코마 3집은 벨론 차트 1위를 삼주간 지켰다. 괄목할만한 성과였고, 쿠로오는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빠진 일정에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리에프의 죽어가는 신음과 함께였다.
팬들의 복귀축하 조공보다 더 기쁜 것은 사무실에서 드디어 네코마를 위한 전용 차량과 매니저를 준비해주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제몫을 하는 팀으로 인정을 받은 것일까. 본디 아이돌이나 가수를 위한 소속사가 아니라 연극배우를 위한 작은 소속사라 그동안 대우받지 못한 설움이 사르르 녹아버릴 정도였다.
“...드라마를요?”
“우와! 쿠로오씨 최고다!”
갑작스레 바빠진 스케쥴 때문에 멤버 전원이 한집에 모이는 시간이 오히려 더 드물었다. 쿠로오는 냉장고의 밑반찬을 적당히 차려 켄마와 리에프를 억지로 식탁에 앉히고는, 갑작스레 찾아온 매니저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매니저 형은 당연히 쿠로오가 거절할리 없다는 듯 아예대본까지 가져와 쿠로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쿠로오는 식탁에 올려진 다섯 화 분량의 대본다발을 슬쩍 흩어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려 케이블도 아니고 공중파 드라마다.
매니저는 이미 소속사의 노련한 배우는 더 비중있는 조연으로 확정되었다며, 부담 없이 생각해보라 대본을 밀었다. 오디션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선택권을 주는 식의 컨택은 처음이었다.
첫 드라마땐 스폰에게 몸을 대고 나서도 오디션을 봐야 했고, 확정이 나기 전까지 어떻게 될 줄 모른다며 들들 볶이며 엄청나게 혹사당해야했다. 물론 아랫도리가.
“저 드라마 말아먹은거 알면서 이러세요.”
예전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덥썩 붙잡았을 것이지만, 이제 제법 연예게 물을 먹었다고 댓가 없는 호의란 없다는걸 알고 있었다. 조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적어도 소속사에서 이렇게 좋은 배역을 자신쪽까지 신경써줄 이유는 없었다.
“그건 드라마 대본이 구려서 그런거지, 네 연기 평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 알면서 그래?”
“예에? 그건 그거고 망한건 망한거죠. 그렇다고 연기 평이 막 좋지도 않았잖아요.”
“아냐 이거, 피디님이 널 직접 지명한거야.”
매니저는 그리 말하며 쿠로오 쪽으로 대본을 쭈욱 밀어 내밀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공중파 황금시간대 피디라는 사람이면 손에 쥔 패가 엄청 날텐데, 그 사람이 어째서 자신한테까지 관심을 돌렸을까?
쿠로오는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 다짐하며 대본을 살짝 열어보았다.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대본이 얼마나 이상하면 나한테까지 바톤이 오나 싶어서였다.
매니저는 쿠로오가 대본을 확인하기 시작하자 입을 다물었고, 리에프는 수저를 입에 물고 쿠로오의 어깨 너머에서 고개를 기웃거렸다.
흔하디 흔한 연애물이나 되겠거나 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은 주인공에게 시비를 걸고 나중에 신나게 털리는 불량배 A쯤이나 되는 역할일까 했는데.. 대본이 너무 재미있었다. 초능력을 이용한 수사물이었는데 주인공은 우연히 능력을 개화한 대학생에, 여주인공은 해당 사건을 맡은 햇병아리 형사였고 쿠로오가 맡게 될 배역은 주인공에게 힘을 쓰는 법에 대해 조언을 던지는 초능력자였다. 5화인데 벌써 가벼운 전투씬이 나올 정도로 비중이 있는 역할이었다.
“대본.. 재밌는데요!?”
“그렇지! 투자처도 빵빵하다니까. 이 배역 따고 싶어하는 애들이 진짜 줄을 섰어! 이건 진짜 놓쳐서는 안 될 기회야, 물 들어올때 노 저으라고, 지금 아니었으면 이런 역할이 들어오지도 않는다니까?”
“으음..”
하긴 지금 네코마는 예전과 달리 몸값이 무섭게 오른 상태였다. 팬클럽 신규회원수도 무섭게 늘고 있었고 벌써 광고도 두개나 계약이 되어 있다. 쿠로오가 이 드라마에서 성공적으로 자리만 굳힌다면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배역도 노려볼 수 있을지 모른다.
쿠로오가 잔뜩 갈등에 빠진 사이 쿠로오가 든 대본의 표지를 힐끔 쳐다본 켄마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 드라마, 제목이..”
“아, 이거 가제라고 써있는데.. 헌티드라는 제목이야. 왜?”
“외주 들어왔었어. 드라마 OST로.”
헐.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반쯤 열었다가 다물었다. 엄청 비싸게 돈 쳐줬다는 그거? 응 그거.
쿠로오는 결심을 굳혔다. 이 드라마는 무조건 뜬다. 그쪽 피디가 무슨 속셈이던간에 매니저 말대로 이 기회는 무조건 잡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