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은 따로 없고, 합숙관 1층에 도시락을 배달시켜 두었으니 하나씩 가져다가 먹으면 된다. 분리수거 봉투는 현관 앞에 있으니 깨끗히 관리하도록.”
“수고하셨습니다!”
네코마와 후쿠로다니의 감독님들은 허허 웃으며 체육관을 나서고, 남은 선수들은 각자 식사를 하러 가거나, 자율연습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신젠과 달리 체육관을 개방할 수 있는 시간은 저녁 9시까지였으므로 저녁밥을 두시간정도 미루고 마저 연습을 하고자 하는 인원들이 대다수였다.
쿠로오는 의식적으로 보쿠토를 피하고 있었다. 다행히 보쿠토도 방금 전의 그 소동이 부끄러웠던지 헤이헤이! 하고 부르는 소리 없이 조용했다.
리시브 연습은 지겹다며 뿌엥 우는 리에프의 뒷덜미를 잡아다 야쿠 앞에 대령해놓은 쿠로오는 체육관 입구에서 자신을 손짓해 부르는 후쿠로다니의 매니저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아, 도시락이 도착했는데 싸인을 할 사람이 없어서요..”
쿠로오는 감독님이나 코치님은 어디 가신거냐 하는 물음을 하는 대신 씩 웃으며 그럼 갈까?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노란 올빼미의 시선이 그런 쿠로오의 뒤를 쫓았다.
코치님들과 감독님들이 친목을 다지러 인간관계의 윤활유(술)을 들이키는 걸 방해하는 대신 쿠로오가 능숙하게 나서 배달직원에게서 도시락을 인수받고 싸인을 했다. 가끔 도시락 배달을 시켜먹곤 해서 직원과도 얼굴을 아는 사이였다.
“합숙관으로 옮기면 되는거지?”
쿠로오는 끙차 하고 작게 소리내며 도시락을 들어올렸다.
“아니에요! 제가 들께요!”
“귀여운 매니저양에게 이런걸 들게할 수는 없지~ 그럼 옆에 그거 들고 따라와줄래?”
“어머나.. 믿음직스럽네요!”
“제가 상냥한건 하루이틀일이 아니랍니다.”
“꺄아~”
소란스럽게 맞장구치는 여자 매니저의 재잘대는 소리는 듣기 좋았다.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느슨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버려 두었다.
여자에게 성욕을 느끼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모습은 굉장히 귀엽고 보기 좋다고 생각이 되어버린다. 둥글고 작은 어깨와 섬세한 손끝, 통통 튀는 목소리 같은 것.
보통 남자들은 이런 것에 사랑을 느끼겠지.
도시락을 옮기고 뒷목을 주무르며 체육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녁놀에 길쭉해진 사람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을 것을, 오늘은 이 학교에 타교생이 연습차 와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미 늦은 저녁시간이고 주변엔 길을 물을 사람도 없다. 혹여나 남의 학교에서 길을 잃거나 하면 상당히 부끄럽겠지. 혹시 모르니 보고 갈까 하며 쿠로오는 내면의 오지랖을 이기지 못하고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아시..! 나, 정말로!”
어라? 쿠로오의 눈이 깜박였다. 지나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또 보쿠토 풀죽음 모드 가동인가? 별 생각없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다가가던 쿠로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좋아하나봐..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어.. 라?
“보쿠토 선배, 잠시 진정해보세요.”
“방금 전에도 난..”
쿠로오는 빙글 뒤로 돌았다. 기계적으로 발걸음이 척척 앞으로 내딛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거지.
“윽..”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 집요하게 들려왔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순간 갑자기 머리에 열이 확 몰리며 흰자위가 뜨거워졌다. 눈앞이 일렁거렸다.
보쿠토는, 그러니까. 아카아시를..
남의 학교에서 고백이라니 배짱도 좋네- 따위의 생각도 들지 않았다.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잠깐, 내가 충격? 대체 왜?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꿈이란 잠자는 동안에 깨어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일을 겪는 정신현상이다.
꿈의 표상은 형상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다.
내가 꾸는 꿈은..
보쿠로 코타로가 나를 좋아해주는 것이었어.
하, 하고 쿠로오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보쿠토 코타로는 남을 기분좋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과 배구이야기를 하면 재미있다. 네트를 마주보고 서면 승부욕이 돋는다. 같은 코트에 서면 그 등을 하염없이 보게 될 정도로 믿음직스럽다. 함께 있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왜 내가 차인 기분이지.”
뭐냐 이거. 고백도 하기 전에 차였어?
입밖으로 소릴 내어 말하니 큭큭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고백을 받아들일까? 쿠로오는 어느새 학교 뒷편까지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곤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실연의 아픔에 눈물이라도 흘러야 하는데 눈가는 욱신거릴 뿐 건조하기만 했다.
쿠로오는 손을 올려 자신의 입매를 매만졌다. 의식적으로 늘 미소를 짓기 때문에 딱딱하게 굳은 입매는 낯설다. 쿠로오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 한번 씩 웃어보았다. 봄의 밤날씨가 지독하게 춥게 느껴졌다.
“쿠로? 어디 갔다와?”
“후쿠로다니 매니저랑 뭐 하고 온거에요!?”
“휘익-! 인기남!”
대충 멍한 머리를 정리하고 체육관으로 돌아오자 갑자기 체육관 안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버렸다. 쿠로오는 다들 뭡니까~ 하며 발치로 굴러온 배구공을 집어들었다.
“그치만 봤다구요! 아까 매니저랑 같이 나갔죠~”
짖궂은 일학년의 목소리에 쿠로오는 의식적으로 미소지으며 그쪽으로 배구공을 휙 던졌다.
으앗! 자자~ 헛소리 할 시간에 연습, 연습!
“그냥 도시락 받으러 갔다온거야.”
“도시락을 한시간씩이나? 밥부터 지었어요?”
푸하핫, 하는 웃음이 터져나온다. 쿠로오는 설마 자신이 한시간동안이나 멍을 때리고 있었을꺼란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당황한 얼굴로 볼을 긁었다.
“지금 벌써 여덟시야?”
“어어? 진짜 수상한데요! 켄마 선배! 이거 진짜에요?”
부원들이 껀수를 잡았다는 듯 와르르 달려들었으나 쿠로오는 가벼운 손짓으로 소문에 달려드는 부나방들을 퇴치해버렸다. 방법은 몹시 간단했다. 전원 리시브 30회! 라고 박력있게 한번 외쳐주면 되는 일이었다.
아마 그 매니저는 저녁 먹고 곧장 씻기라도 했겠지. 이런 식으로 오해가 얽히면 그녀에게도 좋을 것은 없을 것이다. 네코마의 부원들이야 대충 처리한다 해도 후쿠로다니의 부원들에게는 확실히 그게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해두는 편이 예의일 것 같았다.
“이봐, 나 매니저랑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체육관 한 구석 후쿠로다니 멤버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가자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어째 좀 조용한데? 평소 귀가 떨어져나갈 것처럼 소란스러운 후쿠로다니 답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폭풍의 동력원인 보쿠토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벽에 공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아카아시한테 차이기라도 한 건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해버리곤 쿠로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최악. 제멋대로 꿈에서 친구랑 섹스해버리고는 친구의 실연을 바라다니! 쿠로오씨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쿠로오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후쿠로다니의 선수들에게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혹시나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신경 쓰지 말라고-”
파앙! 그때 보쿠토가 쳐낸 공이 벽에 상흔을 남기고 쿠로오의 가슴께로 튕겨올랐다. 반사적으로 그 공을 잡아채자 보쿠토가 벽에서 빙글 몸을 돌려 쿠로오에게 시선을 보냈다. 턱끝에서 땀을 훔치며 이쪽을 바라보는 그 얼굴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웃음기를 걷어낸 날것의 시선이었다.
“쿠로오. 잠깐 나랑 이야기좀 하..?”
그 눈길을 정면으로 받은 쿠로오가 섬찟한 기운에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는 순간 뒤에서 쿠로오! 하고 다급한 목소리가 터졌다. 평소보다 조금 느린 반응으로 뒤를 돌아보고 난 뒤, 쿠로오는 별을 보았다.
쿵-!
시...발 하는 소리가 바로 그가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소리였다.
키 180이 넘는 건장한 남자가 관자놀이에 공을 맞고 쓰러지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모두가 벙찐 사이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보쿠토였다.
“쿠, 쿠로오!! 죽지마아!!!”
“불길한 소리 하지 마세요. 공에 맞아 죽을 리가 없잖아요.”
“그, 그런데 지금 쓰러지면서 엄청난 소리가..”
그 순간 사탕에 꼬이는 개미들처럼 선수들이 우르르 쿠로오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보쿠토는 얼른 쓰러진 쿠로오를 아카아시의 도움으로 등에 업었다.
주변을 정리한 것은 네코마의 세터인 켄마였다.
“보건실은 문을 닫았지만 당직실에 구호상자가 있어.”
“어디야, 거기!?”
“다들 침착하고 연습 재개해. 코치님한테는 내가 연락할 테니까.”
당직실은 비어 있었다. 운동부에서 합숙을 하는 날이면 보통 그날의 당직번은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담당하게 되어 있는데, 오늘은 술자리를 늦게까지 가지고 합숙소의 방으로 가실꺼라 했다.
켄마는 당직실 앞 화분을 들어올려 익숙하게 열쇠를 꺼내들고 당직실의 문을 열었다.
사람이 잘 쓰지 않는 곳인지 옅은 먼지 냄새와 컨테이너 박스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보쿠토는 자신의 등에 볼을 비비며 끙.. 하고 신음하는 쿠로오를 벽에 세워 앉히고 켄마를 도와 얼른 이불을 깔아 그 위에 쿠로오를 눕혔다.
선반을 뒤적거리던 켄마가 파스를 하나 들어올리고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근육통에 직빵이라는 그것을 뜯어 쿠로오의 이마 위로 찰싹 붙였다.
“이거 효과 있는건가..”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고.”
그런가!
켄마는 잠시 눈을 내려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이마에 붙인 파스 때문에 눈이 따가운건지 얼굴을 찡그리는게 곧 깨어날 것도 같았지만 그보다는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을 택했다.
“며칠 전에도 공에 머릴 맞았어.”
“응? 뭐? 쿠로오 말야?”
“응. 걱정되니까 구토같은걸 하면 고갤 옆으로 돌려줘.”
“뭣!? 그럼 앰뷸런스를 불러야 하잖아! 쿠로오오!!”
“시끄러워..”
켄마는 쿠로오가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보쿠토를 뒤로 하고 당직실 문을 나섰다. 친절하게 방문을 잠가주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당직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서있던 아카아시와 짧게 눈을 마주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렇게 손이 많이 가게 하다니.”
아카아시의 한숨과도 짧은 중얼거림이 켄마의 귀를 스쳤다. 켄마는 말없이 당직실을 한번 뒤돌아보았다.
배구공에 사람이 맞고 기절할수 있습ㄴ디ㅏ.. 고등학교 때 진짜로 친구가 5초정도 기절했었거든요....((((사실고증))))
어두운 방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광원은 커다란 26인지 모니터였다. 키가 훤칠한 한 남자는 헤드셋을 낀 채 모니터에 전체화면으로 동영상을 띄워놓고 몸부림을 치며 손수건을 입으로 쥐어뜯고 있었다. 하악하악. 숨소리가 제법 거칠다.
저런 반응을 보면 화면 안에는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영상 따위가 재생되고 있어야 하지만 막상 모니터 안에선 어두운 무대 위에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고 있었다.
“쿠로상.. 최고..”
지나친 흥분감에 들뜬 남자의 목소리가 곧 나직해졌다. 화면 속의 남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대 직캠이라 관객들의 웅성거림도 섞이고 음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죽이며 귀에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잔잔한 통기타소리. 평소 NEKOMA의 노래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발라드에 더 가까운 멜로디였다. 흡! 가슴 속 깊이 차오르는 감동의 물결에 남자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감동의 물결에 허우적거렸다.
좋아여..! 발라드도 x나게 좋아여..!!
3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노래가 끝나고 아무렇게나 뻗친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가 흠,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오른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그리고 영상이 끊겼다.
“....! 뭐야! 장난해!? 왜 여기서 끊는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잡아 마구 다른 동영상을 클릭한 리에프는 다음 동영상을 열었고, 무대 위엔 드럼과 키보드, 그리고 다른 NEKOMA의 전 멤버들이 올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같은 날 같은 무대 동영상이었지만 지금 리에프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쿠로상이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다음에 뭐라고 말했을까!? 감사합니다? 으으 농담하면서 작게 웃었을까 웃는 목소리도 진짜 대박인데.. 하.. 내가 진짜 여기가 러시아만 아니었어도..
리에프는 축 처진 어깨를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힘없는 손짓으로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경쾌한 드럼소리를 이어 밴드의 기타를 맡은 쿠로오의 솔로 뒤로 메인보컬 켄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책상에 침까지 흘릴 기세로 화면 속의 쿠로오를 멍하니 쳐다보던 리에프는 갑자기 벌컥 열린 방문에 상체를 벌뜩 일으켰다.
“어휴! 너 또 불끄고 컴퓨터해?”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방의 형광등을 켜버린 건 남자와 꼭 닮은 여자였다.
불이 환하게 켜진 방안은 연예인을 좋아한다면 응당 이정도는 해야 한다-는 식의 모범이 될법한 인테리어를 가지고 있었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포스터, 30,000$를 호가하는 최고급 앰프와 연결된 오디오, 그리고 그 옆의 앨범진열장은 유리로 만들어져 몇 없는 NEKOMA의 앨범을 아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물론 진열장 안에 있는 것 말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음반 세장씩은 기본으로 킾해두고 있었다. 그중 리에프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방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곳에 걸어둔 2m크기의 세로현수막이었다. 아직 밴드가 뜨기 전 팬미팅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간소한 행사에서 한 팬이 만들어왔다는 이 전설의 등신대는 랜선의 소문을 타고 흘러흘러 리에프가 카드를 긁음으로써 진정한 창조경제를 실현하게 되었다. 판매자의 통장은 유례없는 대풍년이었고 리에프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나가여! 아직 나 무대 다 못봤단 말이야!”
“어라~ 진짜 나가?”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한발 들어온 여자는 양 손을 뒤로 숨기고 있었다. 리에프가 뭐에여.. 라고 미심쩍은 눈으로 중얼거리자 활짝 웃으며 손을 앞으로 내민다. 짠! 하는 목소리와 함께 그 손에 쥐어진 것은 바로,
“헐!”
황색의 서류파일이었다.
리에프는 그 와중에도 동영상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합격, 합격이야!?”
“축하해~ 이제 당당하게 일본에 갈 수 있게 됐네.”
“....~~~!!!!!!”
소리없이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미친듯한 환희의 몸부림을 치던 리에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쿠로오의 등신대 앞으로 몸을 날리며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우리 만날 수 있어여!”
“......”
“쿠로상.. 조금만 기다려주세여.. 제가 쿠로상 있는 대학 가려고 얼마나..”
“너 답지 않게 상향지원하던게 그 이유였어!?”
이틀 뒤, 하네다 국제공항에 한 남자가 발간 볼을 가지고 육지에 발을 내딛었다. 선글라스를 낀 채 정장 위로 검은색의 롱코트를 걸친 모습이 상당히 근사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시선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남들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습 하고 가볍게 숨을 들이마쉬고는 변태처럼 헉헉거리며 중얼거렸다.
“쿠로오씨가 늘 마시는 공기..!”
“미친다 진짜..”
사업으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리에프의 보호자격으로 함께 온 누나 아리사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 동생이 사생이라니.. 사생이라니..
제대로 공부를 해보겠다며 일본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하겠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던 이유가 고작 가수 때문이라니..
“일단 예약해둔 숙소로 가자. 집은 학교 근처가 좋겠지?”
“대충 알아봐둔 곳이 있어!”
정말 유학을 오고 싶었던건지 평소 준비성과는 태양과 지구 만큼의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던 리에프가 그렇게 외쳤다. 어머나. 아리사는 내심 놀랐다.
아무리 가수 때문이라지만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다니?
“학교에서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하는 맨션인데, 바로 옆에 편의점이랑 버스정류장도 있고 신축한 건물이라 깔끔하다고 해여.”
어머어머. 정말로 다 알아놓았잖아? 자신의 남동생은 더이상 철없는 어린애가 아닌 것이다. 한 사람의 든든한 성인이었던 것이다.. 누나인 아리사는 내심 차오르는 뿌듯함에 몰래 눈물을 훔쳤다.
시내의 호텔에 간단히 짐을 풀고 둘은 지하철을 이용했다. 둘 다 일본의 지하철은 처음이었지만 역무원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표를 끊을 수 있었다. 누나와 달리 리에프는 꾸준히 일본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맨션까지 갈 수 있을 정도야?”
“검색해보니까 걸어서 10분정도라고 하는데..”
그럼 교통도 나쁘지 않은 편인가? 리에프가 여기에여! 라고 보여준 건물은 정말로 괜찮았기 때문에 두 남매는 무작정 근처의 부동산 사무소로 쳐들어가 남은 방을 알아보았다.
“방이 없다고여!?”
“아니 그렇게 말하셔도..”
물론 남는 방은 없었다. 둘은 도쿄의 부동산 사정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아리사가 어쩔 수 없네. 라고 체념하며 다른 방을 알아보자며 리에프의 옷을 잡아당겼으나 리에프는 성난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절.대. 안되여! 이 맨션이 아니면 안된다고여!”
“더 좋은 방을 찾을 수 있을꺼야. 이러면 이분이 곤란해하시잖니..”
“빈 방 있다는거 알고 있다고여! 분명 윗집이 빈집이라.. 헙.”
윗집이.. 빈집..?
아리사의 고개가 끼긱 소리를 나며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부동산업자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그 맨션에 지금 나가지 않은 방은 맨 위층의 3LDK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지내기엔 지나치게 넓은 방이고..”
“그거에여! 그걸로 할께여!”
“리에프! 혼자서 방 세개를 뭐 어쩌려구!?”
설마 아닐꺼야. 아리사가 리에프의 등짝을 팡 치며 말렸으나 이미 리에프의 눈동자는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하나는 손님방이고 하나는 내방이고 하나는 드레스룸 겸 창고로 쓰면 되잖아여?”
틀렸어. 이미 아무런 말도 닿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대체 왜 ‘내’ 방보다 ‘손님’방이 먼저 입에서 튀어나오는건지 아리사는 정말 동생의 머릿속이 알고싶지 않았다.
어딘가로 연락한 부동산업자는 맨션 주인에게 열쇠를 받아오겠다며 한시간 뒤 맨션 앞에서 보자는 말과 함께 잠시 외출했고, 리에프는 잔뜩 들뜬 얼굴로 자신의 누나를 이끌고 맨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탐색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렇게 충동적으로 집을 구해도 되겠어? 그래도 2년 넘게 살 곳인데?”
“괜찮아여. 분명 완벽한 곳일테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물론 맨션의 위치나 겉모습은 깔끔했지만, 내부를 보기도 전에 이렇게 계약을 확정지어버리는 것이 아리사로써는 못내 불만이었다.
“아.”
그때 문득 리에프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작은 화원이었다. 때는 5월. 제철을 맞아 화려하게 핀 붉은 장미가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리에프는 경쾌하게 걸어가검은 레이스리본으로 장식한 큼직한 장미꽃다발을 구매했다.
“흐음.. 향기 좋다.”
“어머나 예뻐라! 집에 꽂아두려구?”
“그건..”
업자가 약속한 시간은 거의 다 되었고, 둘은 꽃향기를 맡으며 맨션까지 느긋하게 걸었다.
리에프가 감정로봇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
아리사는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기타케이스를 어깨에 매고 나가는 것을 별다른 의식 없이 슬쩍 쳐다보았다.
“저, 저기여!!”
그때 갑자기 리에프가 쌩하니 앞으로 달려나가며 꽃다발을 남자에게 덥썩 내밀었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꽃을 받아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쿠로오가 반사적으로 리에프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저, 죄송한데 이건..”
“그, 저는..!”
쿠로오씨! 진짜 팬이에여! 2년 전에 우연히 유튜브 영상 보고 완전히 반해버렸어여! 완전 사랑해여! 앨범도 다 샀어여! 이번 무대에서 부른 발라드도 완전 짱이었어여! 솔로앨범 내실 생각은 없으신가여!? 저 인터넷 팬사이트 활동도 엄청 열심히 하는데여! 예전에 쿠로오씨가 리플 달아주신 것도 있는데! 닉네임은 리에프에여! 혹시 기억나시나여!? 뒤에 ^^ 웃는 이모티콘도 붙여주셨잖아여! 허윽 그런데 목소리 진짜 좋으세여! 노래하는 목소리도 좋은데 말하는 목소리도 진짜 좋으신거 같아여! 저 진짜 쿠로오씨 팬인데..! 순식간에 리에프의 머리에 복잡한 문장이 뒤엉키고 쪼그라들었다. 어버버 바보처럼 말을 더듬은 리에프가 양 손으로 쿠로오의 어깨를 덥썩 붙잡았다.
허억! 어깨에 손 올렸어! 더, 더 만지고 싶다...! 슬슬 쿠로오의 표정이 굳어갈 때쯤 리에프는 간신히 가슴 속의 한마디를 외칠 수 있었다.
“사랑해여!!”
“엑.”
“옛날부터 완전 팬, 컥!”
아리사의 날카로운 수도가 리에프의 갈비뼈 밑에 작렬했다. 옆구리를 움켜쥐고 비명을 지른 리에프를 밀친 아리사에겐 동생의 방 문을 열때마다 수없이 눈을 마주쳤던 그 남자를 실물로 보곤 제정신이 아닌 동생을 수습할 의무가 있었다.
“Sorry. He couldn't speak japenese well.”
“아.. 괜찮, 아니지, I'm Okay..?”
“Tomorrow, we'll gonna come moved here. Do you live here, right?”
“yes.. um.. wellcome?”
“Thank you. how kindness!”
“나, 나도.. 쿠로오상이랑 이야기 할꺼에여...!”
쿠로오는 처음 보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허리가 구부정해서 몰랐는데 남자의 키는 쿠로오의 시선 위에 있었다. 187이라는, 일반인 사이에선 거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키가 큰 쿠로오로써는 난생 처음 겪는 눈높이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실버블론드를 단정하게 넘긴 남자는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뒤적이더니 NEKOMA의 1집 앨범을 꺼내들었다.
“어라?”
“싸, 인해주세여..!”
앨범을 든 남자의 손은 발발 떨리고 있었다. 쿠로오는 그제서야 남자의 눈이 무대 아래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과 비슷할 정도로 이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쿠로오는 씩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진짜 제 팬이셨구나. 죄송합니다. 무대 아래에선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오늘은 놀이터에서 재미잇개 놀앗따! 개미랑 나뭇가지로 집을 지어ㅆ따. 오늘은 꿈에서 커다란 케이크를 개미랑 친구랑 가치 먹을 꺼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순간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때였을 것이다. 매일 숙제였던 그림일기를 써가면 담임선생님이 일기장에 도장을 찍어주곤 했다.
“보쿠토 군? 어제는 좋은 꿈을 꾸었어요?”
“네!”
“보쿠토 군이 꾸고 싶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네요. 커다란 케이크를 먹는 꿈을 꾸면 꼭 선생님한테도 알려주기?”
보쿠토는 눈을 깜박거리며 젊은 여선생님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작은 손가락을 감았다.
자신이 원하는 꿈을 꾸는 것은 당연한게 아닌가?
왜 그러지 못한 것처럼 이야기할까?
보쿠토는 꿈의 주인이었다.
하늘을 날고 싶으면 등에 날개를 달았고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쭉한 테이블에 음식을 가득 차릴수도 있었다.
바다에 가고 싶으면 모래사장과 발목을 간질이는 파도를 상상했다. 가끔 재미있게 본 영화가 꿈에 그대로 재현되기도 했다.
처음엔 단순히 배구연습을 하던 꿈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스스로의 크로스 스파이크에 자부심이 있던 보쿠토는 합숙에서 만난 동년배의 블로커에게 자신의 공이 모두 막혔다는 사실이 못내 분했다.
‘그렇다면 꿈 속에서 블록을 날려주겠어!’
..뭐, 결과적으로 꿈속에서의 이미지 트레이닝은 보쿠토 스스로의 실력을 높이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긴 했다.
‘예이~’
블록을 성공시키고는 버릇처럼 이죽대는 얼굴이 처음에는 발을 구를 정도로 얄미웠다. 그런데 네트를 사이에 두고 헐떡이는 쿠로오의 숨결이 얼굴에 닿는다고 생각한 순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숙이고 땀을 닦아내는 손길에서 왠지 눈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험한 잠버릇에 멋대로 뻗친 머리도 서늘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매도 길쭉한 팔다리도 어느 군데 이뻐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보쿠토는 스스로도 뭘 원하는지 모른 채로 쿠로오의 손목을 잡아챘다.
‘뭐 하자는 거야?’
‘오야? 이건 무슨 벌칙?’
‘잠깐, 이게 무슨..!’
‘진심? 보쿠토군 머리 아픈거 아니야?’
살아있는 사람을 지속적으로 꿈에 구현시키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든 것은 보쿠토가 기억하는 쿠로오 그 자체였다. 가끔 자기 자신조차 깜짝 놀랄 정도의 반응을 보여주곤 했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면 분명 쿠로오가 보였을 법한 반응이었다.
마치 꿈 속의 그가 곧 진짜 쿠로오 테츠로인 것처럼.
쿠로오의 날개뼈엔 작은 점이 하나 있다. 어느 순간 그것이 구현되어 있었는지는 보쿠토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쿠로오의 마른 등이 굽어질 때에 그 점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 시트에 볼을 문지르며 무릎을 세워 간신히 자신을 받아들이는 쿠로오의 등을 눈에 담을 때면 그 점이 그렇게 야해보일 수가 없었다.
헉, 헉.
보쿠토는 헐떡이며 상체를 굽혀 쿠로오의 날개뼈 위를 이로 물었다. 아으! 하고 화드득 놀라며 쿠로오의 내벽이 꿈틀거리며 자신의 것을 조여왔다. 끙 하고 목으로 신음을 삼키며 동그랗게 이빨자국이 난 곳을 혀로 햩아주면 쿠로오가 허리를 뒤틀며 신음해온다.
좋아, 좋아해 쿠로오.
하반신에서 시작된 열기가 핏줄을 타고 뇌를 녹였다. 계란 흰자처럼 흐물흐물해진 머리는 멋드러진 대사도 쳐보지 못하고 그저 같은 소리만 반복했다.
늘, 꿈에서 쿠로오를 만나면 보쿠토는 바보처럼 같은 소리만 중얼거렸다.
좋아해. 너를 좋아해.
보쿠토의 욕심은 꿈을 집어삼키고 점점 크기를 불려갔다. 만족할 수가 없었다. 꿈에서뿐만 아니라 잠에서 깨어났을때 옆에 누운 진짜 쿠로오를 원해. 언젠가 자신도 모르게 쿠로오의 손목을 잡아본 적이 있었다. 뭐 하냐는 듯 눈을 깜빡이는 쿠로오의 얼굴을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고 말았다.
“보쿠토?”
“보쿠토 선배.”
뒤에서 부르는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대로 입술을 부딪히고 말았을 것이다.
“그, 그렇게 티가 많이 나?”
“예. 솔직히 말하면 아직까지 쿠로오씨가 알아차리지 못한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으으. 나름대로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켄마 씨가 보쿠토선배를 그렇게 경계하는 이유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켄마도 안다고!? 그럼 쿠로오도 알고 있는거야!? 방금 제 말을 뭐로 들으신거죠.
사실 후쿠로다니 주전 선수들 중에 보쿠토의 짝사랑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네코마와 연습경기가 잡히기라도 하면 전날부터 초 하이 텐션에, 합숙 전날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번씩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곤 했다. 한마디로 아주 좋은 티를 있는 대로 내며 난리 법석을 떨었다.
“그치만, 쿠로오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인데..”
“옆에서 보는 것과 직접 그 대상이 되는 것을 다를테지요. 쿠로오 씨가 보쿠토 씨를 친구라고 믿고 있다면 그쪽으로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
보쿠토는 쿠로오와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놀랍게도 꿈 속의 쿠로오는 현실의 쿠로오와 모든 것이 비슷했다. 좋아하는 농담, 말투, 이죽거리는 얼굴, 배구에 정신이 팔린 것까지. 어떤 말을 하면 쿠로오가 반응을 보이는지, 어떤 말을 재미있어 하는지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쿠로오는 나를 믿고 있을까.
내가 밤마다 쿠로오와 섹스하는 꿈을 꾸는 녀석이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두근두근,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심장이 뛰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너는 나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게 될까?
보쿠토는 가슴 위를 주먹으로 꽉 쥐었다. 셔츠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말.. 못해.”
“의외네요. 선배가 먼저 고백하겠다고 나설 줄 알았는데요.”
“쿠로오가.. 멀어지기라도 하면..”
보쿠토에게는 꿈속의 쿠로오가 있었다.
현실의 쿠로오를 아예 잃게 되느니 친구로라도 곁에 남아서 네가 변하는 것을 두 눈에 담을래. 그리고 네 꿈을 꿀거야. 평생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없게 된다 해도 상관없어.
‘혼자 하는 섹스는 섹스가 아니라 자위랍니다? 보쿠토 어린이?’
비록 네가 다른 사람과 섹스하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고 해도, 참을 수 있어. 나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으니까..
탈의실에서 쿠로오는 무방비하게 셔츠를 벗어 맨살을 드러냈다. 꿈 속에서 숱하게 본 등이었지만 윽, 짝사랑의 열병을 앓는 고등학생에게 짝사랑 상대의 반누드라니. 당황스러움에 시선을 얼른 바닥으로 내렸다가 이내 슬그머니 눈을 그에게로 돌린다. 괜찮아. 뒤를 돌아보고 있으니까. 내가 쳐다보고 있다는 건 모를꺼야. 자신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가는게 마치 같은 반 여학생들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몰래 보는 중학생이라도 되어버린 것 같았다. 창문을 닫은 탓이 탈의실은 묘하게 어두컴컴했고 어딘지 은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여기서 쿠로오와 섹스해보고 싶다.
보쿠토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쿠로오는 락커 문을 열고 벗어둔 셔츠를 옷걸이에 걸기 시작했다.
그때 보쿠토는 쿠로오의 날개뼈 위에 작은 점을 발견했다.
“......”
무슨 생각을 할 것도 없이 보쿠토의 손이 멋대로 움직여 그 등에 닿았다.
“쿠로오. 너, 날개뼈에 점이 있어.”
언젠가 쿠로오가 지나가는 말로 자신의 등에 있는 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보쿠토는 스스로 내뱉은 말이 무슨 문장이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뭔가에 홀린 듯 그렇게 말하며 검지로 그 점이 있는 자리를 꾸욱 짓눌렀다. 깜짝 놀라며 어깨를 파드득 떠는 그 행동은 지나치게 낯이 익었다. 이거, 진짜 꿈인가?
“점이 있다고? 몰랐는데?”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곤 뒤를 돌았다. 왜 그래? 라고 묻는 얼굴은 태연했다.
“...그래?”
한박자 늦게 자신의 쉬어빠진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아. 나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지.
잠에서 깨어난 쿠로오는 젖은 바지춤을 추스르며 욕실로 향했다. 잠이 덜 깬 얼굴에서 당혹감이 뚝뚝 묻어져나온다.
이틀 연속으로 이런 꿈을 꾼 적은 없었는데.
쿠로오는 샤워기 물을 틀어 머리를 적시며 어제의 꿈을 떠올렸다. 사정시켜주지 않겠다느니 아프게 하겠다더니 하더니 정말로 꿈속에서는 지독하게 아팠다. 결국 어젠 정신 없이 보쿠토의 위에 올라타서 허리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게, 정말로 느끼는 부분을 전혀 문질러주지 않아서 짜증이 잔뜩..
쿠로오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욕실 타일에 이마를 툭 부딪혔다.
꿈 속의 보쿠토는 그저 내 머릿속의 보쿠토일 뿐이다. 현실하고는 전혀, 하나도 상관이 없어야 한다.
‘나는 쿠로오밖에 섹스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런 보쿠토의 말은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인 걸까? 시발 대답해라 내 무의식아. 나랑 진지하게 주먹으로 대화를 나눠보자.
아아. 오늘도 컨디션은 최악이다.
“쿠로오, 괜찮아?”
쿠로오는 오늘도 로드워크로 학교까지 등교했다. 아침 연습 시간이 아슬아슬하도록 맞춰 온 쿠로오는 켄마에게 씩 웃어보이고는 그가 건네주는 물병을 받았다.
어제 일 때문인지 쿠로오의 눈치를 보며 잔뜩 쪼그라든 리에프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말없이 리시브 연습에 끼어든다.
“이번 주말은 후쿠로다니 학원과 1박 2일 연습시합 및 합숙 일정이 잡혔다.”
“예? 주말이라고 해봤자 바로 내일 아닙니까?”
“원래 신젠 쪽에서 합숙을 하려고 했던것 같지만 그 학교는 지금 테니스 시즌이라 도저히 체육관을 비울 수 없다고 연락이 온 모양이야. 평소 네코마 쪽이 신세를 지는 입장이니만큼 교무실 측에서는 양해를 해 줬다.”
대체 왜 오늘 또 그런 꿈을 꾸게 된걸까. 또 왜 이 올빼미 녀석은 어째서 우리 학교에서 합숙을 하게 된 거냐고.
하루 종일 정신이 딴 데 팔린 쿠로오는 오늘 수업 시간 필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 몰라. 시험기간에 노트 빌리지 뭐. 휴대폰을 확인하자 마침 시간 맞춰 교문에 도착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은 없었다.
“헤이헤이! 여기야!”
쿠로오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씩 웃고는 보쿠토 옆의 코치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간단히 그들이 묵을 숙소를 확인하고 교무실에 서류를 전달하러 온 것이었다.
“보쿠토 너는?”
“난 그냥 널 보러 왔지!”
“하아.. 죄많은 남자는 괴롭다니까.”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보쿠토는 웃으며 스포츠백을 가르켰다.
“요 며칠 스파이크를 못 때렸더니 손이 근질근질해! 어울려 줄꺼지?”
그렇게 말하며 도발하듯 씨익 웃는 얼굴에 쿠로오는 호오.. 하고 잔뜩 날선 얼굴로 송곳니를 내보이며 웃었다.
“전부 블락당하고 풀이 죽어도 난 모른다? 미리 아카아시라도 불러 줄까?”
“너야말로 전부 뚫려서 엉엉 울거나 하지 말라고!”
“너야말로 울고 싶으면 미리 말해라? 내 가슴은 바빠서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빌려줄 수가 없습니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슥 쓸어넘기며 대답하자 보쿠토가 잔뜩 기대된다는 얼굴로 얼른 체육관으로 가자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후쿠로다니의 코치님을 교무실로 안내해드린 뒤 쿠로오는 산책 처음 나온 강아지처럼 이곳저곳 튀어나가려는 보쿠토를 이끌고 탈의실로 향했다.“다른 녀석들은 이미 체육관에 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내 락커 같이 쓰자.”
“어라? 남는 락커는 없어?”
“비품실에 있어. 내일 후쿠로다니가 오기 전에 가져다 둘꺼야.”
문을 닫자 탈의실 안이 어둑해졌다. 굳이 형광등을 킬 정도로 안이 어두컴컴한 것은 아니라 쿠로오는 셔츠를 훌렁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뭐 해? 옷 안갈아입어?”
“아, 어. 응.”
탈의실이 낯선지 괜히 이쪽저쪽을 쳐다보는 보쿠토에게 말을 걸자 그제서야 가방을 들고 허둥지둥 이쪽으로 다가온다. 연습용 유니폼 상의를 들고 벨트를 풀자 뒤에서 스포츠백의 지퍼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 뒤,
“..쿠로오.”
등에 그의 손이 닿았다.
쿠로오의 어깨가 눈에 띄일 정도로 움찔 굳었다. 소리를 내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맨살에 닿는 보쿠토의 손길이 소름끼칠 정도로 꿈과 같아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너, 날개뼈에 점이 있어.”
점 위를 덧그리기라도 하는 건지 보쿠토의 손가락이 등 위 어느 한 점을 꾸욱 눌렀다. 점이고 나발이고 알게 뭐냐.
“그래? 몰랐는데?”
빌어먹을. 쿠로오는 스스로의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어떻게 들어도 어색한 삑사리를 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쿠토의 거친 손바닥이 등에 닿았다. 순간적으로 어제 억지로 자신을 책상에 짓눌렀던 그 손짓이 떠올라 쿠로오는 확 소리가 날 정도로 뒤로 상체를 틀었다.
역광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를 보쿠토의 얼굴이 가까웠다. 황금색의 눈동자만이 또렷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쿠로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옷 안 갈아입어?”
“아, 잠깐만.”
보쿠토가 어설프게 가방 안에서 체육복을 꺼내는 사이 쿠로오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체육복을 갈아입고 탈의실 밖으로 태연히 걸어나갔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이대로 체육관에 가서 1학년들 블록연습 하는 곳에 저 녀석을 밀어넣으면 된다. 오늘은 갑자기 리에프에게 리시브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나오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곧 탈의실에서 태연한 얼굴로 나올 보쿠토에게 태연한 얼굴을 지어보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면의 평화를 찾았다.
“나왔냐? 락커 문은 닫았지?”
“응..”
보쿠토는 귓가를 미미하게 붉힌 채 시선을 바닥에 내리고 대답했다. 뭡니까. 왜 네녀석이 갑자기 그런 표정입니까? 쿠로오는 어제 얻어맞은 이마의 통증을 호소하고 싶어졌다.
쿠로오가 보쿠토를 체육관 한복판에 밀어넣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보쿠토는 언제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냐는 듯 헤이헤이헤이! 시끄럽게 굴며 1, 2학년들의 어설픈 블록을 와장창 깨부수고 있었다.
“켄마! 도망치지 마!”
“팔 떨어져..”
“무진장 아프지만 그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켄마 선배!”
“시끄럽고.”
쿠로오는 계속되는 보쿠토의 스파이크에 슬슬 일학년 녀석들의 얼굴에 약이 오르기 시작하는걸 보며 씩 웃었다. 그런 쿠로오의 얼굴을 보며 리에프는 조심스레 투덜거렸다.
“쿠로오 선배. 저도 저기 끼면 안됩니까?”
“호오?”
“보쿠토 상의 스파이크, 막아보고 싶은데여.”
“아직 너같은 초보자에겐 이릅니다? 말 할 힘 있으면 다시 리시브 간다!”
“이익!”
말이 끝나기 전에 공을 날려보내자 제법 익숙하게 리시브 자세를 잡고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춘다. 좋아. 그래도 자세는 꽤나 볼만하게 나온다. 쿠로오가 두번째 공을 들고 경쾌하게 공을 올리자 리에프 옆으로 휙 하고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엌, 하고 리에프와 부딪힌 그림자는 리에프를 밀치고 기어이 공을 리시브해 쿠로오에게 공을 넘겼다.
“보쿠토?”
“헤이헤이, 나도 끼워줘!”
어느새 일학년들은 헉헉거리며 벽에 기대어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저 스태미나 괴물 같으니. 스파이크를 그렇게 날려댔으면서도 땀 범벅인 것 외에는 멀쩡한 보쿠토를 보니 마치 본능처럼 말이 튀어나갔다.
“스파이크는 다 치셨나?”
“지금은 리시브 연습! 그리고 연습 끝나면 나랑 같이,”
“켁.”
“나 아직 말 다 안했는데..?”
어벙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보쿠토를 무시하고 쿠로오는 일부러 못되게 웃으며 공을 날렸다. 리에프, 받아!
리에프 한번, 보쿠토 한번 공을 넘겨주며 쿠로오는 리에프에게 끝없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팔 제대로 안 펴? 보쿠토 폼 봐. 무릎을 미리 낮춰야지!
한참동안 리에프만 데리고 말을 하자니 보쿠토의 얼굴이 점점 불퉁해지기 시작했다. 젠장할 아카아시.. 제발 여기에서 너네 주장 좀 어떻게 해봐..
“쿠로오! 나한테도 말 걸어줘!”
“하아?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폼인데요?”
“그럼 완벽한 폼이라고 칭찬이라도 해 줘!”
사실 리에프보단 월등히 나았지만 결단코 완벽하다고 할 정도의 리시브는 아니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야 이녀석. 귀찮아.. 쿠로오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걸 보다 못한 리에프가 아앗! 하더니 보쿠토의 서포터를 가르켰다.
“아앗! 그거 못보던 건데요! 보호대 새로 사신 겁니까?”
“아- 어제 그건가.”
“아아! 멋지지!?”
쿠로오는 들고 있던 배구공을 보내는 대신 위로 던져 다시 왼손으로 받아들었다. 리에프가 닌자 거북이같네여! 라고 외치자 그거 멋지다는 뜻이냐!? 하고 보쿠토가 대답했다.
“착용감은 어때?”
“아아. 나쁘지 않아. 어, 그런데 네껀?”
“집에 있어. 내일부터 차 보려고.”
“두분이서 서포터 공구 하셨어요?”
눈을 깜박이며 그렇게 물어오는 리에프의 말만을 기다렸는지 보쿠토가 코 밑을 검지로 쓱 훔치며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이건.. 쿠로오가 내게 선물한 거다!”
“으아앗! 저는요! 쿠로오 선배!”
“오야. 초밥 9천엔어치 쏘면 생각해보지.”
“엑.”
됐습니다.. 시무룩한 얼굴로 물러나는 리에프를 보고 대체 뭐에 이긴 기분인 건지 보쿠토의 얼굴이 몹시 하이해졌다.
한참 으쓱이며 서포터 자랑을 하던 보쿠토는 이내 옆구리에 끼고 있던 공을 박스에 던지며 쿠로오에게 말했다.
“쿠로오! 다 했으면 블록!”
“우리 일학년들로는 만족이 안되십니까? 이 욕심쟁이.”
“제대로 확! 하고 블록이 와야지 아무래도 재미가 있다니까?”
“이거 이거, 오늘은 봐주려고 했는데 기어코 벌주를 마시다니.”
“시끄러운 고양이 꼬리를 확 물어버려야지.”
“오 건방진 올빼미 부리를 꽉 다물리게 해 줘야지.”
보쿠토와 쿠로오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동시에 씨익 하고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우리 주장이 악역 같아요!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느새 어색하니 뭐니 하던 기분 따위 떨어져 나간지 오래였다.
“3:3 하자. 켄마! 공 올려줘!”
“싫어..”
“토라! 이리 와.”
“오옷!”
보쿠토와 켄마, 야쿠가 한 팀. 쿠로오 자신과 리에프, 토라가 한팀이었다. 서브를 올리는건 익숙하지 않지만 애초에 리에프에게 실전에서 블로킹하는 느낌을 알려줄 생각으로 짠 구성이었다.
보쿠토에게 서브를 올려야 하는 상황이 맘에 안드는지 켄마는 떫은 감을 씹는 표정으로 공을 튕겨 올렸다.
“간다아!”
“리에프! 스트레이트만 확실히 막아! 팔은 제대로 앞으로 기울여!”
“예에!”
퍼엉! 보쿠토의 황금색 눈이 형형하게 빛나며 리에프의 두 팔 사이로 어이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스트레이트가 꽂혔다. 리에프가 어벙벙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 데구르르 구르는 공을 확인하는 모습이 얼이 빠져 보였다.
야쿠의 서브로 시작된 공을 올려 토라가 공격했지만 야쿠는 능숙하게 공을 살려 기어이 켄마에게 공을 도달시켰다.
제 팀인 것마냥 녹아든 보쿠토가 제 쪽으로 달리며 켄마에게 외치자 켄마가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보쿠토의 브로드에 맞춰 토스를 올린다. 쿠로오는 네트를 사이에 둔 보쿠토의 눈동자를 파고들 것처럼 집요하게 따랐다.
스트레이트다.
날개를 펼치듯 날아오른 보쿠토와 거의 동시에 쿠로오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타앙! 하고 쿠로오의 팔에 막힌 공은 체육관 바닥을 치고 야쿠의 손 앞에서 튕겨나갔다.
“예이~”
“크으으!”
입으로는 아쉬워 죽겠다는 소리를 내면서도 보쿠토의 얼굴은 의욕만점이다. 저거저거, 저 표정을 울상으로 만드려면 시간 꽤나 걸리겠는데?
“리에프. 무조건 이 올빼미만 따라 다녀. 그리고 리드 블록! 기억해.”
“옙!”
“키는 크지만 1학년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건방진 올빼미를 닥치게 만들어!”
“에엑 무리에요!”
후쿠로다니와 네코마의 주장 둘의 눈에 불이 붙었다. 때아닌 화재로 고통받는 것은 억울하게도 네코마의 부원들 뿐이었다.
손님인 보쿠토가 먼저 삼학년들과 샤워실로 떠나고, 쿠로오는 다른 부원들과 함께 네트를 정리했다.
“아, 창고에 락커들 탈의실로 옮겨야 하는데.”
“몇 개 옮겨요?”
“네개 다 옮겨야지 뭐.”
“엑. 자리 없지 않아요?”
“문 열 공간만 남기고 채워넣어. 어차피 한꺼번에 못 들어가잖냐.”
“그런가-”
둘이서 락카를 하나씩 들고 탈의실로 가자 마침 1차로 샤워를 마친 팀이 탈의실에서 락카를 받아들었다.
“보쿠토. 내일 오는 선수들은 주전들만인가?”
“어? 아. 엉.”
“몇명은 둘이서 락카 하나를 써야 할것 같은데..”
“괜찮아! 난 너랑 같이 쓰면 되고!”
“누구 맘대로 그렇게 정합니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쿠로오는 내심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다 혀를 찼다. 그럼 일학년 둘만 락카를 같이 쓰게 하면 되니까..
쿠로오는 머리 위로 수건을 뒤집어쓴 채 상의를 탈의한 채로 입구까지 다가온 보쿠토의 벗은 몸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일부러 시선을 위로 올렸다.
프라이드라도 되는 양 위로 세운 머리가 물을 먹어 아래로 처진 모습은 쿠로오로써도 상당히 낯설었다. 진작에 머리 좀 내리고 다니지 그랬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결국 튀어나갔다.
“머리 내린거?”
축 처진 머리는 흰색과 검은색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켄마처럼 뿌리염색이 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진짜 특이한 머리색이었다. 노란 눈동자 위로 그림자를 만드는 머리카락에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꿈벅, 하고 보쿠토의 눈동자가 그런 쿠로오의 손가락 끝을 쫓았다.
“사람이 달라 보이네.”
확실히 헤어스타일이란게 사람의 인상을 크게 좌우하긴 하는 모양이다. 심지어 머리를 내리고 짙은 눈썹과 형형한 눈동자를 가린 보쿠토는 약간 얌전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 어때? 괜찮아?”
“잘생겼습니다~”
쿠로오는 대충 대답하며 옷을 챙겨 샤워실로 향했다. 헤이헤이헤이! 역시 난 최고지! 하고 방방 뛰는 소리가 들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보쿠토는 조용했다. 아무리 저녀석이라고 해도 간만에 녁 연습을 하니 진이 빠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쿠로오는 발걸음을 옮겼다.
보쿠토 코타로는 끝내주는 스파이크를 성공시킨 뒤, 늘 자신의 세터인 아카아시를 쳐다보는 버릇이 있다.
“......”
뭘까나, 이딴 버릇 따위 눈치채서 어쩌라고.
“쿠로. 서브.”
쿠로오는 봤냐! 봤냐고 아카아시! 라고 외치는 보쿠토에게서 시선을 떼어 켄마의 손에서 공을 받아들였다. 아직 이쪽은 게임중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틀어 잡념을 떨쳐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고 공을 위로 던진다.
“점프 서브야!”
맞은편 코트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화악, 유연하게 뒤로 젖혀진 허리가 탄력있게 굽혀지며 라인 안쪽으로 아슬아슬하게 공을 쏘아보낸다. 신젠 고교의 리베로가 아슬아슬하게 공을 받아내지 못하고 바닥에 배를 깔고 미끄러졌다.
“오오! 주장! 멋져!”
“한번 더 서브!”
가볍게 튕겨온 공을 다시 받고 손바닥 위로 가볍게 굴린다. 다시 공은 위로 높게 떠올랐다. 가볍게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쿠로오의 몸이 다시 당겨진 활시위처럼 유연하게 긴장하기 시작한다. 두 코트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모인 가운데 잔뜩 긴장한 상대편 신젠 고교의 선수들이 무릎을 굽히고 리시브를 준비했다.
탕, 하고 가볍게 튕겨진 공이 네트 안쪽으로 아슬아슬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와악!”
“페인트!”
이번엔 아슬아슬하게 공을 띄운 신젠 고교가 공을 연결했으나 자세가 무너진만큼 위력적인 공격이 들어오지 못했다. 예이~ 이죽거리며 코트 안쪽으로 뛰어들어온 쿠로오는 A속공으로 스파이크를 날리는 토라의 뒤에서 블록에 튕겨진 공을 받아내 켄마에게 보냈다. 그 직후 켄마의 능숙한 투어택으로 마침내 스코어는 결정되었다.
“저걸 받아냈어!”
“역시 네코마!!”
“25-21, 네코마 승!”
신젠 고교의 녀석들이 끙, 하며 플라잉 코트를 시작하는 것을 이죽거리며 내려본 쿠로오의 얼굴은 악당 그 자체였다. 타올을 목에 건 쿠로오는 이제 막바지로 치닫는 우부카와와 후쿠로다니의 시합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다음 시합은 후쿠로다니와 우리인가?”
“저쪽도 후쿠로다니가 이기겠는데.”
“쳇. 이번엔 이기자!”
통산 11승 15패, 이번 여름방학 합숙 현재까지의 스코어였다. 후쿠로다니 다음으로 승률이 높은 네코마였지만 결정력이 부족한 네코마로써는 후쿠로다니에게 한발 밀리는 감이 있었다.
25-22의 스코어로 후쿠로다니가 우부카와를 이긴 뒤 간단히 코트를 정비해 네코마와 후쿠로다니가, 그리고 카라스노와 신젠이 코트를 채웠다.
“제대로 막아! 블록!”
“이익!”
짙은 땀냄새와 그보다 더 짙은 승리의 냄새.
고작 공놀이일 뿐인데도 이 공을 올리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후회되는 것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몸을 바닥 위로 나동그라뜨렸다.
“켄마!”
야쿠의 연계로 이어진 공을 켄마가 받자 마자 쿠로오는 다리를 굽혀 점프했다. 히죽, 웃으며 정면으로 점프해 블록하는 보쿠토와 눈을 마주치자 마찬가지로 형형한 눈으로 살벌하게 웃음을 띄운다. 쿠로오의 스파이크가 보쿠토의 손끝을 맞고 아웃되어 그대로 득점에 성공했다.
“예이~”
“크윽! 오늘 컨디션 장난 아니잖아, 쿠로오!”
“아아? 이게 내 평소 실력입니다만?”
그게 진짜냐아! 라며 보쿠토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승부욕을 잔뜩 불태웠다.
코트 위의 열기가 치열해진다. 네코마와 후쿠로다니는 엎치락 뒤치락 점수 차이를 서로 2점 이상씩 벌리지 못하고 그대로 20점대까지 스코어를 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후쿠로다니 공격에 전위, 보쿠토. 네코마의 전위 쿠로오.
로테이션상 최고의 공격력이 되는 이 상황에서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쓰지 않을 리 없다. 쿠로오는 바짝 긴장하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햩았다. 이글이글하고 마주 웃는 보쿠토의 얼굴에는 열정이나 승부욕과도 비슷한 얼굴이 불타고 있었다. 저 눈을 보면 늘 침착한 쿠로오로써도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쿠로오는 자신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로 보내!”
군더더기 없는 A퀵! 화악 하고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보쿠토의 눈동자에 정신이 팔린 쿠로오가 반박자 늦게 팔을 들어올리고 점프했으나 날카로운 스파이크는 그대로 쿠로오의 팔을 제치고 타앙! 무자비하게 그 공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당혹한 쿠로오의 얼굴을 뚫을 듯이 노려보며 외쳤다.
“헤이헤이헤이!!”
“크읏!”
“어떠냐 쿠로오!! 이 몸의 스파이크가아!”
“아아-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네, 진짜.”
망할, 이게 공식전이었으면 교체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미스다. 켄마의 눈초리가 볼을 꾹꾹 누르는 느낌에 쿠로오는 하하.. 하고 억지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보쿠토의 금색 눈동자가 화르륵 불타올랐다.
보쿠토 코타로는 끝내주는 스파이크를 성공시킨 뒤, 자신의 세터인 아카아시를 쳐다보는 버릇이 있다.
일종의 의식이랄까, 버릇과도 같았다. 밤새 묻은 꿈의 잔재를 땀과 함께 털어내는 것처럼 쿠로오는 오늘은 먼저 가, 켄마. 라고 말하며 가방을 매고 뛰었고, 쿠로오의 버릇을 아는 켄마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하철로 혼자 등교를 했다.
오전 일곱시도 되지 않은 등굣길은 살짝 어두웠고,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은 모두 예상보다 추운 날씨가 당황스러운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걸었다.
낮이면 여름인가 싶을 정도로 공기가 훈훈해지지만 아침공기는 아직 눈동자를 시리게 만들 정도로 찼다. 쌀쌀함을 꾹 참고 오분쯤 달리면 열이 올라 입김이 허옇게 자국을 남긴다. 이마에 땀에 작게 배어나오다가 아직은 차가운 공기에 금새 식어버렸다.
교문이 보일 정도까지 오자 슬슬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 몇몇은 쿠로오를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평소라면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 그였지만 쿠로오는 표정을 무섭게 굳히고는 발을 쉬지 않고 달렸다.
그 뒷모습이 제법 사나워 손을 흔든 아이들은 머쓱하게 뒷목을 슬며 어, 못 봤나보다. 하고는 손을 내린다.
사실 쿠로오의 생김를 표현하자면 잘생겼다거나 단정하다기보다 날카롭거나 험상궂다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거기에 큰 키에 건장한 체구까지 더해져 본인도 그걸 아는지 늘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곤 했지만 무섭게 집중할때의 그의 얼굴은, 그러니까 그의 절친한 친구의 말을 빌자면
‘진짜, 진짜 험악하게 생겼다고오!’
그 순간 펑! 하고 쿠로오의 안면과 충돌한 배구공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나며 체육관 안의 이목이 몽땅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헐....”
“쿠, 쿠로상!?”
“허억! 괜찮아여!?”
막 체육관 문을 열고 발을 디딘 순간 포탄처럼 쏘아진 배구공이 쿠로오의 이마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방금 디딘 발이 공중에 붕 뜨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두세걸음 물러난 쿠로오가 뒤로 젖혀진 고개를 확 앞으로 돌렸을 때 리에프가 딸꾹, 하고 횡경막의 경련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작은 손이 쿠로오의 티셔츠 자락을 잡아당겼다.
“쿠로, 괜찮아?”
“어? 아아.. 켄마. 안 괜찮아. 골이 울려.”
다행인 것은 안면에 정통으로 충돌했다면 코뼈가 내려앉았을 스파이크가 이마만 치고 튕겨나갔다는 걸까. 코치님은 쿠로오의 이마와 뒷목을 몇번 만져보고는 아침 연습에서 쫓아냈다. 양호실부터 들러 필요하다면 1교시까지 쉬라는 의미였다.
“머리는 위험한데다, 무방비 상태에서 목이 충격을 받았어. 저녁 연습도 상태 봐서 참가해라.”
“쿠로 선배! 정말 죄송해요..!!”
리시브도 안되는 주제에 보쿠토처럼 크로스를 쳐보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나선 리에프가 범인이었다. 미안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연신 사과하는 리에프에게 괜찮다며 손짓하고는 쿠로오는 뒷목을 주무르며 양호실로 향했다.
방금 전엔 머리만 띵 한것 같았는데 코치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뒷목이 욱씬거렸다. 덕분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배구공에 거하게 얻어맞고 나니 꿈을 꾼 뒤로 찝찝했던 기분이 조금 가신 것 같다. 잊을 만 하면 욱씬거리는 이마도 한몫 했다.
“쿠로오 상 웃지 않으니 박력있다..”
“화 났을까여..?”
한편, 쿠로오가 퇴장한 뒤 체육관은 금새 수군수군하는 소리로 메워졌다.
리에프는 초조한 얼굴로 손가락을 꿈지럭댔고, 다른 부원들은 말없이 그의 등과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차분히 가로저었다.
“으으..! 켄마 선배!! 살려주세여!”
“괜찮아.. 쿠로가 기분이 나쁜 건.”
“으아아! 역시 기분 나빴겠죠! 그렇게 큰소리가 났는데에에!!! 야쿠 선배!”
“시끄러워!”
기분 나쁜 꿈을 꿔서 그런거니까.
뒷말을 본의 아니게 생략하게 된 켄마의 샐쭉한 눈초리가 리에프의 부산한 등에 머물렀다.
뭐.. 괜찮나.. 말하기 귀찮고.
“일주일동안 스파이크 금지야! 얌전히 리시브 연습이나 하라고!”
“에엑..!”
쿠로오 테츠로는 가끔 보쿠토 코타로와 섹스하는 꿈을 꾼다.
“목은 괜찮니? 혹시 모르니까 한시간정도만 찜질을 하자.”
“저야 고맙죠.”
양호실로 간 쿠로오는 배구공 무늬가 선명하게 찍힌 이마에 냉팩을 붙이고 뒷목에는 핫팩을 대고 침대에 엎드렸다.
낯선 시트와 베개에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모포는 얇았지만 양호실 안의 공기는 지나치게 훈훈했고 엎드린 상태로 뒷목에 뜨끈한걸 대고 있으니 절로 눈이 감겼다.
양호선생님은 교무실로 가는 김에 선생님들에게 제 상태를 얘기해주겠다 했고, 덕분에 그는 걱정 없이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지잉 하고 휴대폰이 울려 주섬주섬 꺼내들자 제대로 양호실에 갔느냐는 켄마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켄마는 쿠로오가 어떤 꿈을 꾸는지, 그리고 그 꿈을 꾼 날에 기분이 얼마나 다운되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쿠로오는 피식 웃으며 걱정 말라는 답장을 보냈다.
아. 정말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은데. 스파이크에 머리통 한번 얻어맞고 기분전환이 된다면 다음 번에도 리에프에게 스파이크를 쳐달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아직은 그 녀석, 스파이크가 서투니까.. 보쿠토의 스파이크에 얻어맞는다면 진짜로 목에 깁스를 차게 될 지도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게 보쿠토 쪽으로 생각이 기울자 쿠로오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려 천장을 올려다보였다. 그 순간 타이밍 좋게도 휴대폰이 울린다.
[헤이, 오늘 저녁 연습 있어? 오늘 서포터 사러 가는데 같이 나갈래?? 저녁 쏠께!!!]
켄마에게도 말하지 않은 징크스는 사실 하나 더 있었다.
그 꿈을 꾼 날엔, 이상하게 보쿠토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 꿈을 언제적부터 꾸게 되었는지는 사실 확실하지 않다.
보쿠토를 처음 본 것은 1학년 춘고 예선에서 슬쩍 스쳐지나갔을 때가 처음, 제대로 통성명을 한 것은 그해 여름 네 학교의 공통 여름 합숙때였다.
그러니 아마 1학년 여름 이후일 것이다. 언제 꾼 꿈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뒤로 뜨거운 성기가 밀려들어올 때 코타로- 하고 헐떡이던 기억은 난다.
처음 꿈을 꾼 날, 침대를 박차고 젖은 속옷을 세면대에 문질러 빨면서 그는 영혼이 탈주했다는 감각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할 수 있었다. 16년 인생 최대의 위기이자 쇼크였다.
남자가 꿈에 나왔다고!? 그런데 내가 깔렸어! 심지어 나보다 키도 작은 녀석인데!? 게다가 난 왜, 왜 싸버린 건데!?
꿈의 시작은 설마 그런 식으로 잠에서 깨버릴 줄은 예상도 못할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여름 신젠 고교의 제 3체육관, 우연히 자율연습을 하던 녀석을 발견해 함께 스파이크와 블록 연습을 했던, 실제 있었던 것이 꿈이 나타난다는 지극히 평범한 흐름이었다.
비록 꿈의 마지막은 비품실 매트리스에서 발가벗겨진 채 뒷구멍이 무자비하게 쑤셔지는 것으로 끝날다고 할지라도.
쿠로오는 잠에서 깬 뒤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부인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주 잠깐 동안.
남자랑 섹스하는 꿈을 꾸다니 그럴 리 없어!
라고 생각한 지 십분쯤 뒤에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아닐지도..? 정도로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한번정도는 부정했었다.
아니, 한발 양보해서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치자. 중학교 무렵 그것을 어느정도 눈치채고 인터넷으로 관련 자료를 찾아본 적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하지만 호기심에 찾아본 영상은 생각보다 야하거나 섹시하지 않았고, 남자와 여자가 행위하는 영상만큼이나 놀랍고 약간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배우가 서양인들이라 그랬을까? 어쨌든 쿠로오는 그 뒤로 딱히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지 않았다. 다행히 그에겐 배구라는 아주 좋은 취미가 있었고 사람이 기절할 정도로 피곤하면 딱히 야한 생각도 별로 안 들었다.
어쨌든 쿠로오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겨우 얼굴하고 이름 정도만 아는, 그저 연습 몇번 어울려 한 적이 있는, 아니 사실 조금 친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절친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녀석이 꿈에 나온다는 것은 생각치도 못해본 일이었다.
차라리 그 녀석, 보쿠토 코타로를 보며 가슴이라도 한번 두근거렸으면 이게 바로 첫사랑인가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쿠로오가 꿈을 꾼 뒤 우연히 길거리에서 보쿠토를 만났을 땐, 놀라울 정도로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호탕하고 큰 목소리와 거리낌 없는 말투에 그저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하며 같이 배구 이야기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주먹으로 치며 낄낄거렸다.
쿠로오가 꿈에 나오는 보쿠토와 실제로 그가 만나고 이야기하는 보쿠토를 애써 타인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그가 꿈을 세번정도 더 꾸는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피를 뽑아가다니, 설마 내 생체정보를 이용해 클론이라도 만들 셈인가 정부는. 물론 내가 레일건 정도 된다면야 모를까, 일개 외톨이들을 대량생산 해봤자 ‘집단’ 이 아니라 대량의 외톨이들만 생성될 뿐이니 쓸모라곤 없을 테지. 그래서 그런 걱정에 대해선 아예염려를 하지 않고 있긴 하지만.
“히키가야. 검사는 다 끝났어?”
“켁.”
뭐야, 갑자기.
외톨이들은 갑작스럽게 이름을 불리는 거에 예민하다고. 왜냐하면 이름을 불릴 일이 별로 없으니까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 주눅들기 쉽거든. 주로 히키코모리 군이라던가 히키카에루 등으로 불리곤 했었으니 말이지..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한.. 아니 그보다 내 이름 제대로 알고 있었잖아!? 역시 이녀석도 그건가. 그녀석 이름은 알지만 부르기 싫은걸(웃음) 이런 건가. 가슴아픈 과거에 절로 표정이 어두워지자 하야마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와아. 다가오지 마 제발. 안전 거리를 지켜달라고.
하야마가 갑자기 이름을 부른 탓에 떨어뜨린 알콜솜을 주워 휴지통에 집어넣자 거리낌 없는 얼굴을 한 하야마 하야토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아. 응. 같이 돌아갈까 하고. 버스 타고 가지?”
내가 여자였으면 가져온 자전거따위 머릿속에서 지우고 응.. 이라고 수줍게 대답하며 단둘이 버스 데이트를 즐겼을 것만 같은 달콤한 목소리였다. 뭐야 무서워. 키크고 잘생기고 성적까지 좋은데 성격에 목소리까지 좋다니. 이런 스테이터스 배분으로 괜찮아? 괜찮은 거냐고.
일단 말없이 로비를 향해 걷자 하야마가 자신 바로 옆에 붙어 따라오기 시작했다. 자연히 주변의 시선도 이쪽으로 몰려든다. 와아 빌어먹을. 단지 이 리얼충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 데미지를 입는 기분이잖아.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지 서서히 팔다리가 쑤셔오기까지 하는 것 같다. 이정도의 정신력이라면 곧 생각만으로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 정도는 껌이겠는걸. 비로소 정신이 육체를 능가한다는 건가.
자동문이 열리자 바깥에서 뜨거운 바람이 느껴졌다. 바다가 인접한 탓에 끈적하고 습기찬 공기가 볼을 매만지는데 정말 이대로 쓰러져버리고 싶은 마음 뿐이다.
시간은 오후 세시 가량, 하루 중 제일 기온이 높을 때다. 후후. 태양은 정오에 가장 가까운데 왜 기온은 세시에 높냐고? 왜냐면 정오에 흡수한 열기를 콘크리트가 세시쯤 미친 듯이 뿜어내기 때문이지. 타이어가 녹아버릴 것만 같은 열기에 거의 한시간동안 자전거를 끌고 갈 생각을 하니 현기증부터 나기 시작한다. 누구 말마따나 확 버스를 이용해버릴까 싶은 마음도 잠깐 들었다니까.
“하야마. 넌 버스 타고 간댔지?”
“아, 응.”
“난 자전거 가지고 왔거든. 내일 보자.”
깔끔하게 말을 마치고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주륜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더할 나위 없는 거절의 기술이다.
뭐어. 어차피 하야마 저 녀석도 우연히 같은 반 아이를 만난 탓에 아무말 없이 돌아오기는 민망했을 테니까. 괜히 거기서 어영부영 친한 척을 했다간 버스 안에서 죽음보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게 분명하다. 누가 그딴 무간지옥에 갖힐 줄 알고. 차라리 이 뜨거운 콘크리트의 지옥에 뼈를 묻어주겠어.
자물쇠를 풀고 자전거 핸들을 잡아 끌기 시작하는데 어느새 하야마가 기척도 없이 내 뒤에 서 있었다. 화들짝 놀라며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하야마를 쳐다보는데 하야마가 억울한 듯 외쳤다.
“같이 가자고 했잖아. 자전거를 가지고 왔으면 이야기 해 주지 그랬어.”
평소의 어른스러운 모습과 달리 약간 삐진듯한 표정에 내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라고 말할 때가 아니지. 하. 이 자식 진심이냐. 리얼충 주제에 갭모에라니..
“아니 뭐. 버스 타고 간다며.”
“자전거.. 같이 타고 가면 되잖아?”
우와. 아무렇지도 않게 셔틀로 임명받았다.
날 때부터 명령하는 쪽이라 이건가. 이건 대체 무슨 패기냐. 패왕색? 아니면 리얼충색 패기?
어쨌든 하야마의 명령에 오래 끓인 된장국처럼 잔뜩 쫄아붙은 나는 말없이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대기했다. 이 자전거의 뒷자석에 코마치 외의 다른 사람을 앉히게 될 줄은..
미안하다 코마치. 50포인트정도 감점된다고 해도 묵묵히 받아들이겠어.
하지만 내 태도에 하야마는 묘한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히키가야, 나 꽤 무거운걸. 차라리 내가 운전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뭐? 네가 왜? 이건 내 자전거잖아.”
외톨이의 습성 하나 더. 자신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걸 꺼려한다. 왜냐하면 높은 확률로 없어지거나, 망가지거나 해서 돌아오니까.
“그치만 오르막길 꽤 길지 않아? 거기서 페달 밟으려면 꽤 힘들..”
나는 즉시 안장에서 엉덩이를 떼어냈다. 하마터면 잊을 뻔 했다. 쫄쫄이를 입은 채 자전거 위에서 헐떡이는 걸로 인생의 쾌감을 찾는 녀석들이나 찾을 법한 오르막길이 있었지. 올때는 내리막길을 쭉 내려오면 되지만 돌아가는 길엔 늘 자전거를 끌고 걸어올라갔었다.
하야마가 묘하게 웃으며 자전거에 앉고, 그 뒤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 곳에서 앞사람의 등을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앞사람의 등이 이렇게 넓어 보이는게 정상인가? 그렇다면 코마치도 늘 오빠의 넓은 등을 보며 든든함을 느껴 왔던 것일까.
“꽉 잡아, 히키가야.”
어? 하고 멍하니 반문하는데 급발진하는 자전거 탓에 무의식적으로 하야마의 허리를 끌어안다시피했다. 뭐, 뭐야 이거! 나 모르는 새 누가 내 자전거에 로켓포라도 달아둔거 아냐!? 낡은 자전거의 체인이 끼릭끼릭 비명을 지르며 환호하고 있었다. 마치 이 늙은 몸이 이렇게 빨리 달릴수도 있다니! 하고 놀라는 것 같군. 뭐. 나도 놀랐다. 뺨에 와닿는 바람이 평소와 전혀 다르다.
센티넬의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는 익히 들었지만, 이정도인줄은 몰랐으니까.
“대단하다..”
“하핫, 그래?”
혼잣말로 중얼거린 내 말을 하야마가 캐치했는지 넉살 좋게 받아쳐왔다.
이 스피드로 자전거를 몰고 있으면서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니, 정말 장난 아니구나. 문득 이런 인간과 필드에서 함께 뛰며 득점을 겨루는 상대편 축구팀이 불쌍해졌다.
“편하겠네. 이 스피드라면 등교도 5분만에 가능할지도.”
“편.. 하달까.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교차로의 신호등의 불이 바뀌길 기다리는 사이 하야마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센티넬의 50% 이상이 스트레스 과민으로 사망해.”
“그야 뭐..”
유명한 연구결과다. 굵고 짧게 간다고 해야하나. 각인자를 찾지 못한 센티넬들의 최후는 보통 몹시 괴롭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거야 제대로 된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 이야기고, 너처럼 인기있는 녀석 같은 경우는 보통 해당되지 않는다고.
“넌 그럴 걱정 없을 꺼 아냐. 주변에 가이드도 잔뜩 있고.”
“아니 난..”
교차로의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뀌며 하야마의 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무슨 말을 하려던건지는 모르지만 말을 삼키기로 작정한 듯, 하야마가 말없이 자전거를 몰았으므로 난 그냥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만 눈으로 흩었다.
두사람을 태운 자전거가 매끄럽게 운동장을 가로질러 주륜장으로 들어갔다. 어이. 뭐야, 왜 학교에 오는 건데. 이제 내 남은 스케쥴은 귀가뿐이라고.
“아, 난 이제부터 동아리 활동이 있어서. 히키가야군도 동아리 있지 않아?”
지금 내 동아리 활동까지 신경써준거냐. 정말 눈물나는 배려심이다. 이자식 왜 이렇게까지 성격이 좋은 거지? 이정도면 거의 병 아냐?
“동아리에 사정은 설명했어. 이제 난 집에 갈 거야.”
하야마가 자전거에서 내리고 나자 냉큼 안장에 엉덩이를 붙였다. 정기검진날에도 동아리 활동을 빼먹지 않다니, 그때도 느낀 거지만 유키노시타가 천재+노력이라는 느낌이라면 하야마 이 녀석은 노력+수재라는 느낌이다. 앞과 뒤가 뭐가 다르냐고 묻는 녀석들은 창의력 제로의 이과계 인간임이 틀림없다.
“그럼 난 간..”
“잠깐만.”
하야마의 손이 강하게 내 손목을 잡아왔다. 예상치 못한 악력에 몸이 쭉 딸려나가다시피 해서 상체가 앞으로 홱 쏠렸다. 짜증나는 눈빛으로 하야마를 홱 노려보자 당황한 얼굴로 손을 놓았다.
“아니, 그.. 히키가야 너.. 혹시.”
“왜.”
하야마는 뭔가 복잡한 얼굴로 몇초간 더 어물대다가 아무것도 아냐. 라며 주먹을 꽉 쥔다. 순간 너무 놀라서 어깨를 흠칫 떨 뻔 했다. 주먹 쥐지 마. 눈살 찌푸리지 말라고. 스쿨 카스트의 최하위에 위치한 녀석들은 괜히 윗 계급의 행동 하나하나에 과민반응하기 마련이라고. 딱히 저 큼직한 주먹에 얻어맞는 줄로만 알았던게 아냐. 으, 음습한 괴롭힘은 당했어도 직접적인 폭력은 별로 당해본 적이 없으니까, 흐, 흥! 착각하지 말아줘!
하야마가 결국 별 말 없이 인사를 고했으므로 나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귀가했다.
집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찜통의 절정같은 느낌이라, 찹쌀떡처럼 흐늘흐늘해져버린 것 같았다. 코마치의 상큼함에 치유받고 싶어어.. 물론 집에서 날 반긴건 내 정신을 맑게 해주는 코마치표 커피가 아니라 더위에 짜증이 날데로 난 카군 뿐이었다.
정말이지 고양이의 모피는 여름에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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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나에게 그런 표정을 지어보여도 소용 없다, 히키가야. 센티넬-가이드 매칭은 일개 교사의 권한이 아니니까.”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 뜬금없는 전개는 대체 뭐냐고.
제발 뭔가 말해달라는 내 필사적인 얼굴을, 히라즈카 선생님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것으로 간단히 무시했다. 가까스로 고개를 떨궈 아래를 내려보자 빳빳한 종이가 너울대며 자기주장을 한다.
“그보다.. 대체 왜 하야마죠.”
간단히 말해, 국가의 횡포다. 대체 무슨 권리로 센티넬 - 하야마와 가이드 ? 히키가야로 미션을 내리는 건데. ‘헐. 그 히키 뭐시기라는 그 음침한 녀석? 하야마가 불쌍해~ 그녀석 확 자살해버리면 좋을 텐데~’ 라는 말을 정면으로 들으면 이번엔 진짜 울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뭐야. 너 몰랐나?”
“예?”
“하야마는 너무 강력한 센티넬이라, 왠만한 가이드엔 금방 내성이 생겨버려. 아마 제일 오래 팀을 맺은 것도 석달정도가 끝이었다고 들었다.”
“예에?”
“뭐. 빛이 밝은 만큼 그림자도 짙다는 거지. 아무튼 그것 때문에 하야마는 전교에 거의 모든 가이드하고 팀을 맺었었거든.”
우와아. 이쯤 되면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디의 아방궁이냐. 하야마라는 술탄을 둔 할렘도 아니고.. 그렇게 따지면 나는 술탄의 자비에 하룻밤 은혜를 입은 외톨이 후궁 28 정도인가. 스스로 생각해낸 비유에 구역질이 날 정도다. 하하.
히라즈카 선생님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이곳이 교무실임을 상기했는지 필터 끝만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아마 너에게도 내성이 생기면 하야마는 다른 학교의 가이드에게까지 손을 뻗칠지도 모르지.”
“묘한 단어 선정이네요. 하야마가 좋아서 가이드를 한번씩 맛보고 내팽개치는게 아니잖아요.”
“네녀석의 단어가 훨씬 미묘하다만.. 아무튼 너의 존재감만큼이나 흐릿한 가이드 자질이라도 일단 가이드. 네가 좋든 싫든 하야마와 팀을 맺어야 해.”
나는 천천히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그러고보니 어제 묘한 말을 했었지. 센티넬의 얼마가 스트레스로 사망한다- 고. 그 음색에 담긴 감정을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가이드라서겠지. 센티넬의 감정에 예민한 가이드니만큼 그게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소리가 아니라 무심코 튀어나온 깊은 속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꿔 말하면 그 상냥한 성품의 센티넬이 늘 자신이 스트레스로 미치거나 죽는다는걸 염두에 두고 생활하고 있었단 말이다. 이쯤 되면 그 자제력에 인간적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인데?
그런 상냥한 하야마는 대체 얼마나 예민하길래 온 학교의 가이드들을 건드려 놓고서도 모자라서 내게까지 껄떡댄다는 말인가.
“아마 내일 모레 출발인가?”
“네.. 뭐.”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에겐 동아리를 쉬게 된다고 직접 말하도록. 아마 순순히 믿어주진 않을 테지만.”
“뭡니까. 저 인간적으로 신용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뭐? 네가? 착각은 자유라지만 방금 그 말은 좀 심하구나.”
“선생님이 훨씬 심하거든요..”
교무실에서 나와 교실로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 점심시간을 끝내고 5교시의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걸음을 서둘렀을 테지만 교사와 상담이라는 면죄부도 있겠다, 나는 느긋하게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점심시간에 하야마가 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상냥하게 웃으며 다가와 팀을 짜는 것에 대해 이야기라도 꺼내면 받게 될 그 눈길들은 내 여린 하트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겠지. 수라장을 헤쳐 온걸로 따지자면 이미 흉터 투성이에 굳은살까지 배긴 내 하트겠지만... 아무리 단단한 굳은살이라도 칼로 찌르면 피가 난다고. 적어도 수업시간 중간에 들어간다면 그런 사태를 막을 수 있겠지.
“죄송합니다. 면담이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도록.”
뒷문을 열고 작게 인사하고 슬쩍 자리에 앉았다. 무심코 하야마쪽을 힐끔 쳐다보는데 마치 처음부터 날 쳐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순간 부정맥이 올 정도로 놀랐으나 가까스로 평정을 가장하고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끝나지 않기를 바란 국사 수업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곧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돈다. 나는 분위기를 살피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좋아. 아무도 내게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이대로 쉬는 시간동안 옥상에라도 가 있을까 하는 내 팔목을 강한 힘이 가로챘다.
“히키가야.”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하야마 하야토가 내 팔목을 잡고 놔주질 않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
라고 묻더니 이쪽의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팔목을 움켜쥔 채 걸음을 옮긴다. 의문형으로 말하면 명령형으로 알아듣는건 리얼충들의 법칙이냐. 네가 시건방진 아가씨 컨셉의 로리소녀가 아니면 용납될 수 없는 컨셉이거든?
“무슨 일인데?”
공교롭게도 하야마가 도착한 곳도 옥상이었다. 옥상 자물쇠가 고장난 상태라는거,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히키가야. 가이드.. 맞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에 그 병원에 가 있다는 건 센티넬 아니면 가이드 정도일 테니까. 하야마의 물음도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단 다시한번 확인한다는 뉘앙스가 더 강했다.
“부탁이 있는데.. 괜찮을까?”
부탁이란게 혹시 그건가? 역시나 싶지만.. 나는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의아한 듯 종이를 본 하야마는 내가 내민 종이를 받고 당혹스러워했다. 놀란 표정이 아닌걸 보니 이렇게 될 걸 대략 알고 있었나 보다.
“놀라지 않네.”
“아니, 난.. 히키가야가 이 학교 마지막으로 남은 가이드란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되지 않을까 했었어. 그래서 미리 양해를 구하려고 했던 건데.”
“뭐, 이런 식으로 팀업되는 시스템이라면 굳이 네가 나한테 양해를 얻지 않아도 되잖아?”
말이 학교지 내가 받은 명령서는 군인의 것이나 다름없다. 내 말에 하야마는 무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보는 내 쪽이 오히려 송구해지는 표정이다. 어디까지 예의바른 놈이냐. 이건.
“하지만 히키가야, 이미 팀을 이룬 센티넬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하야마가 민망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뭐? 무슨 엄한 소리야. 내 스스로 할 말은 아니지만 난 그렇게 인기있는 가이드가 아니다.
찌푸린 내 표정을 보고 하야마가 당황하자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내뱉었다.
“난 팀을 이룬 센티넬 없어.”
“뭐?”
“새삼스럽게.. 그리고 정식으로 미션에 나가는것도 처음이니까 나야말로 양해를 구해야겠다.”
“정말? 하지만 히키가야 너..”
뭔가 물어보려던 하야마는 내 표정을 보곤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렸다. 남이 했더라면 답답하고 우유부단해 보였을 것을, 하야마가 하니 대체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파급력이 엄청나다. 이게 바로 초 리얼충 스킬인가.
“미션을 이틀 뒤지?”
“응.”
“그럼 오늘부터 하교 같이 하면 되겠다. 히키가야 동아리 있지?”
“있는데, 잠깐. 하교?”
하야마가 무어라 더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수업종이 울려 우린 서둘러 교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교 시간이 되어서야 난 하야마가 하려던 말이 뭔지 알게 되었다.
“왜?”
“왜냐니.. 원래 이런 거잖아.”
센티넬이 가이드를 만나 심신이 안정된다고 해도, 무슨 기계도 아니고 한순간에 뚝딱 상태가 호전되는건 아니다. 아니 그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론적으로 알던 사실을 직접 생활에 적용하려니 적응이 안되고 있었다.
미션을 이틀 앞둔 오늘부터, 하야마는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최대한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 같았다.
등하교 시간은 물론이고, 수업시간에마저 자리를 바꾸는게 용인된다.
남들이 자리 바꾸고 하는것에 무관심해서 미처 몰랐었다. 내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어디에 앉는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냐.
“오늘도 자전거 가져왔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하야마가 웃으며 주륜장으로 앞장섰다.
딱 한번 본 내 자전거를 잊지 않았는지 수대의 자전거 사이에서 내 자전거를 찾아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핸들을 쥔다.
웃으며 날 돌아보는 폼이 누가 보면 자전거 주인인줄 알겠다.
난 머릿속으로는 하야마의 말을 이해했지만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들어 몇 발자국 뒤에서 그런 하야마를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어느 쪽이야?”
아무리 센티넬이라도, 아니 아무리 리얼충이라도 그렇지, 남에게 너무 거리낌이 없는 거 아닌가? 아직 난 하야마와의 거리를 좁힐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쪽에서 마구잡이로 내 방 안을 침범하는 것 같잖아.
언짢은 표정을 느꼈는지 하야마가 자전거에서 손을 떼고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뒤로 흠칫 물러날만큼 거부감이 들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하야마의 표정이 몹시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같은 반의 존재감 없는 남학생을 보는 표정이 아니라 흡사 울기 직전의 다섯 살박이 여자애를 보는 듯한... 젠장 왜 이따위 비유밖에 떠오르는 게 없는 거지.
“히키가야..?”
“...너 동아리 활동 있지 않았던가?”
“그거라면 아까 점심때 말해뒀어. 너야말로 동아리는?”
“오늘은 쉬는 날이야.”
후.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 자전거로 다가갔다. 하야마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내 배타적인 기색을 느낀게 분명하다. 하야마는 센티넬이니까.
나는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 빌어먹을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이정도는 양보해 주지.
자전거의 뒷자석에 앉은 나는 몇발자국 떨어진 상태의 하야마에게 툭 던졌다.
“집에 안 데려다 줘?”
하야마는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자전거 앞좌석에 걸터앉았다.
“꽉 잡아.”
“알겠으니까 가기나 해.”
학교의 리얼충 하야마가 모는 자전거 뒷자리에 타게 될 날이 다 오다니. 교내의 여학생들이 눈에 불을 키고 원하는 포지션이 아니었던가. 물론 며칠이면 이것도 끝이겠지만.
‘하야마는 너무 강력한 센티넬이라, 왠만한 가이드엔 금방 내성이 생겨버려.’
내 가이드로써의 자질은 형편 없다고 국가기관의 검사를 통해 밝혀진 바 있으니 하야마의 가이드 노릇을 하는 것도 길어봤자 일주일이겠지. 어쩌면 임무 중에 쫓겨나게 될지도 모른다.
몸이 어느정도 자전거의 속도에 익숙해져 나는 어깨에 힘을 조금 풀었다.
“하야마.”
“응?”
타이밍 좋게도 교차로의 신호등 때문에 자전거가 멈춰섰다.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우리처럼 신호를 기다리는 아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한건지 하야마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고, 나는 무심코 내뱉을 뻔한 질문을 주워삼켰다.
하야마 너는 괜찮은거냐, 고.
괜찮을 리가 없겠지. 나와는 여러 모로 껄끄러운 사이이고. 착한 아이인 하야마는 나라에서 정해주는 가이드를 거부할 리가 없지. 여러모로 마음이 해이해진 모양이다.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할 뻔 한걸 보면 말이다.
“...아냐, 신호 바뀌었다.”
자전거는 쏜살같이 달렸다. 물리적으로 따지자면 컵라면에 물을 붓고 딱 먹기 좋을만한 시간이 흘렀다고나 할까, 상대성 이론으로 따지자면 아침 등교와 하교 사이의 시간만큼의 시간이 흘렀다고나 할까.. 두 발 두 다리 멀쩡한 주제에 말없이 하야마의 허리를 잡고 자전거 뒷자석에 있자니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하야마를 알아보고 나를 의아한 듯 쳐다보는게 마음에 안 들었다. 쳇. 내 여린 신경에 손상이 간다고.
하야마는 능숙하게 우리 집 앞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자전거의 핸들을 건네받고 하야마를 배웅하려는데 떠날 기색 없이 가만히 서서 이쪽을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발이 저려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히키가야.”
하야마가 악수하듯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 라고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내 오른손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젠장. 외톨이는 이런 식의 형식을 갖춘 인사에 자동반사적으로 대응하는 습성이 있다는걸 간파할 줄이야. 악수하듯 내 오른손을 맞잡은 하야마는 위아래로 팔을 흔드는 대신 손아귀에 힘을 주고 내 손을 꾹 잡았다.
“좀 더.. 괜찮아?”
“뭐가?”
이제 슬슬 손은 놔줬으면 하는데.. 한여름에 남자와 손을 잡아서 땀이 차다니 최악이다. 하지만 하야마는 내 반응따위 아랑곳 하지 않고 맞잡은 손을 살짝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긴 뒤 다른 팔로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크허억!?”
하야마의 단단한 가슴에 폭 껴안긴 순간 두근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을 리가 있냐! 땀내 나는 남자의 가슴이라니, 게다가 코에 닿은게 근육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다 돋는다. 뱃속에서 끌어올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하야마를 거세게 밀쳐내자 그는 순순히 뒤로 밀려나갔다. 아니지, 하야마는 뿌리 박힌 고목처럼 단단히 서 있었고 오히려 내가 튕겨나간 느낌이었다. 내 엉덩이에 부딪힌 자전거를 보면 확실하다..
“히키가야, 내가 공격이라도 한 것같은 비명이잖아.”
“그 말 그대로다. 내 데이터가 오염될 것 같은 정신공격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냐, 너.”
“꿍꿍이라니..”
하야마가 곤란한 듯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나는 그 사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낡은 자전거를 나와 하야마 사이의 장애물로 배치하는 것에 성공했다. 뭐냐 저거, 바이러스형.. 아니 리얼충형 완전체 디지몬이냐, 대체 다음에 무슨 짓을 하려는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바로 등 뒤가 현관이라는 것이 엄청난 안도로 다가왔다.
“센티넬-가이드 미션이 처음이라 그래서 잘 모를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직접 설명하려니 조금 민망하네.”
고개를 갸웃, 왼쪽으로 살짝 까닥이며 말을 꺼낸 하야마는 조금 쑥쓰러운 표정이었지만 당당했다. 미소녀만이 용서되는 제스처인줄 알았는데, 빌어먹게도 미남에게도 통용되는 것이었나.
“사흘 뒤 미션을 위해 계속 행동을 같이한다는건 설명 했었지?”
“아아. 이해했다.”
“그것의 연장선이야.”
“미안, 무슨 뜻이냐?”
“가이드와의 스킨십만큼-”
“어라? 오빠!”
드, 들었다. 스킨십이란 말을 들어버렸다고! 더 이상은 무리. 하야마 네가 딱히 싫어서가 아니라 생리학적으로 무리다. 마침 나이스 타이밍으로 현관에서 나온 코마치가 여신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어라? 하야마 씨 맞으시죠?”
“으응.. 안녕?”
“왠일이세요? 설마 오빠의 친구라거나? 꺄아! 팥밥 지어야 겠다!”
“코마치. 그럴 일은 없다. 그리고 팥밥은 그럴 때 먹는게 아냐.”
코마치의 등장으로 자연스레 대화는 끊기고, 나는 집에 들어가려는 제스처를 취한 것만으로 이어질 하야마의 대화를 원천차단했다. 정말 잘했다 코마치. 사랑스러운 여동생 기준으로 이번 건 정말 포인트 높았다.
다행히 하야마는 여동생이 듣는 앞에서 가이드가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하기는 꺼려졌는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내일 봐, 히키가야.”
“아아.”
“내일 일곱시면 될까?”
“너 늘 그렇게 일찍 다니는 거냐?”
“아니, 네 시간에 맞춘 건데.”
“..그럼 일곱시 십오분으로.”
마지막까지 예의바른 말투를 사용한 하야마는 신사답게 웃으며 온 길을 되돌아갔다. 단지 하야마와 나의 대화를 들은 코마치가 부들부들 떨며, 볼을 부풀리고 있는 게 무서웠다. 설마 이 상황에서 부후후훗 하고 웃어대는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정말 파이트클럽급의 소름끼치는 반전이다. 허나 코마치는 잔뜩 해맑은 얼굴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오빠 축하해! 제대로 된 첫 남자친구를 사귀었구나!”
“뭐냐. 그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문장은.”
나는 자전거를 대문 안쪽에 기대어두고 현관쪽으로 들어왔다. 코마치는 뭐가 그리 신나는건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하치만적으로 포인트는 높다만, 의미불명이라 좀 꺼림칙한데?
“유이 언니랑 유키노시타 언니 덕분일까? 저 오빠, 4월 합숙 때 봤던 그 오빠지?”
“아아. 하야마 말이냐.”
“으응- 맞아. 하야마 하야토라는 이름이었어.”
“친구 같은거 아냐.”
아, 내 동생이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상냥한 녀석이다. 물론 그게 오해라는 점은 미리 말해줘야겠다. 아무리 코마치라도 그 녀석과 내가 친구라는 꺼림칙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참을 수가 없다. 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쏙 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센티넬은 일반인보다 오감이 예민하고 육체적 능력이 뛰어남. 보통 형질이 발현할때부터 국가의 관리를 받으며 성인이 되고나서부터 의무적으로 나라에 잡혀 일해야함. 군복무처럼. 그것만 끝나면 직업군인으로 남을지 아니면 다른 길로 갈지 선택가능한데 센티넬군인은 대우가 매우 좋으며 사회 상류층이라는 인식이 강하므로 +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사회적 분위기로 보통 군복무 선택.
대신 각인자가 없는 센티넬이란건 불안정하므로 제대로 입대하려면 각인자를 찾는게 필수.
가이드는 센티넬보다 수가 많아 가치는 떨어짐. 하지만 센티넬과 각인한 가이드의 경우는 직급이 주어짐.
센티넬과 가이드는 꼭 각인하지 않아도 어느정도 진정효과가 있음. 보통 가이드의 재량에 따라 달라지는데 특급 가이드의 경우 자신의 각인자가 아닐 센티넬이라도 거의 완벽하게 커버 가능하고 일반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정도.
일단 센티넬 AU 세계관이라 사람들 많이 사는 도시 외곽, 시골같은 곳에 종종 괴물이나 요괴라고 불리는 것들이 등장하는 것만 빼면 원작하고 내용은 똑같이 흘러감.
하치만은 초고교급으로 눈이 썩어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고, 잔뜩 삐뚤어진 인생관을 가지고 있어 시즈카 선생님의 명령으로 봉사부에 입부하게 됨.
그리고 거기서 묘하게 자신과 가치관이 같은 듯 다른 예쁜 여자아이를 만나게 됨. 순간 이게 바로 청춘인가 싶었으나 인간으로써의 존엄성을 지뢰 터뜨리듯 박살내는 그 언동으로 제정신을 차림.
하치만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당한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뒤 자신이 가이드란걸 알아차리게 된 케이스였어. 보통 십대 후반쯤 많이들 각성하므로 평범한 편이지. 하지만 하치만은 외톨이였음.
육체적, 지능적으로 우월한 센티넬이나 다른 사람의 정신상태에 영향을 주는 가이드들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무리의 중심에 서게 될 수밖에 없어. 하치만식으로 말하자면 스쿨 카스트 최상위의 존재라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기묘하게도 하치만은 되다 만 가이드였어. 일반인은 물론이고 센티넬에게도 그닥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음.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삐뚤어진 근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직 센티넬-가이드의 메커니즘은 과학자들에게 연구 대상인 관계로 그저 최하위 가이드라는 꼬리표만 붙을 뿐이었음.
학교 내의 센티넬과 가이드들은 평소엔 평범하게 학창시절을 보내지만 종종 ‘실습’이란걸 가게 됨. 진학후 곧장 군에 들어가는 만큼 인턴쉽? 미션 형식으로 진짜 싸움을 견학하거나 체험해보는 느낌으로. 그때그때 케이스에 맞춰 이번엔 소부고에서 센티넬 몇 명과 가이드 몇 명, 다른 학교는 센티넬 몇 명.. 이런 식으로 정해지는데 초반엔 그 선발이 랜덤으로 이루어져.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거기서 받은 점수에 따라 미션의 등급이 나뉘고, 그 미션에 선발된다는 건 그만큼 강력한 센티넬-가이드란 뜻이 되므로 눈에 보이는 격차가 생기게 되는 거지.
하야마 하야토는 강력한 센티넬이었어. 각인된 센티넬과 가이드 부모에게서 자란 하야토는 센티넬버스에 대해 아는것도 많고 능력 또한 출중해서 촉망받는 인재임.
유일한 단점이라면 아직 각인자가 없다는 건데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그닥 큰 문제는 되지 않음. 학교뿐만 아니라 비교대상이 되는 근처 지역구 고등학생들 중에서도 센티넬로써의 능력이 탑을 달려서 근방 가이드라면 모두 하야마 하야토라는 아이와 각인되기를 소원할 정도임.
그래서 미션에도 자주 참가하는 편이었고... 물론 하치만은 능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이름만 가이드라는 취급을 받고 있었으므로 일학년 초반 몇 번의 임무만 견학하고 그 뒤부턴 프리덤!!
이런 견학은 정기검진과 더불어 하치만이 제일 질색하는 일중 하나였으므로 2학년이 되어 제일 좋은 일로 하치만은 이런곳에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걸 뽑음.
세상은 불공평하다. 빌어먹게도 인간을 센티넬이니 가이드니 뭐니 하는 걸로 칸막이를 나눠대고 말이지. 세상이 그딴 칸막이 일일이 만들어주지 않아도 어차피 인간 관계란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거라고.
모든 인류가 평등하다는 머리에 꽃 핀 소리 하는 녀석들에겐 이 세상의 섭리에 반하는거냐! 라고 외치며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고 싶어진다. 아무렴. 세상 자체가 이딴 식으로 인간의 피라미드를 만들어둔 상태에서 우린 언제나 함께야~ 라던가 친구니까 당연한 거잖아? 라고 말하는 것들은 마더-가이아의 의지에 반하는 것들이 틀림 없다.
언제나 함께라니 그건 대체 무슨 말이냐? 디지몬 오프닝에 나오는 모두 함께냐? 정말로 언제든지 붙어있을 거라면 프라이버시니 뭐니 하면서 핸드폰 락 걸어둔거나 해지해버리지 그래?
정오의 무더운 햇살이 머리 위를 내리쬐자 평소보다 깊은 짜증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다른 올바른 학생이라면 점심시간 후에 5교시 수업 준비를 시작할 시간이다.
후후. 우매한 것들.. 언제까지 학교라는 요람 안에서 버티고 있을 테냐..? 이라고 비웃을 기력도 나지 않는다. 오후 수업이 면제라고 해도 검진센터에 들렀다가 가면 동아리 활동까지 마치고 집에 도착하는 시간과 다를 바가 없단 말이다.
기왕 버린 가이드 취급 받는거, 정기검진도 어떻게든 빠질 수 없을까 꼼수를 부려 보았지만 센티넬과 가이드의 명단은 국가에서 관리되는 만큼 나라의 녹을 받는 공무원들은 얌전히 학생들을 호출해 몸안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관찰해 보고해야 하는 모양이다. 정말 공무원은 최악이다. 자신의 의지에 상관 없이 나라라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하다니, 내 사전에 근로라는 단어를 말소해버려야겠다는 의지만이 샘솟아버린다니까.
자전거를 타고 치바 시내 외곽으로 나가니 세련된 흰색 건물이 주변의 낙후한 건물들 사이에서 홀로 튀고 있었다. 검진센터를 겸하는 시립 병원이다. 주륜장에 자전거를 묶고 손목시계를 보니 한시 이십 오분가량. 예약된 시간은 한시 반이니 완벽하게 시간을 맞춰 왔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식으로 자신과의 약속이나 병원, 극장 등의 시간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것은 외톨이의 기본 소양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고? 외톨이는 친구들과 시간 약속을 할 기회가 없으니까. 괜히 언제까지 몇시에 가야한다는 것 만으로 설레서 이른 시간에 준비를 마치기 마련이거든.
훗. 중학생 때는 모두 함께 가는 현장실습 시간에 들떠 두시간이나 먼저 약속장소에 와 있다가 기분나쁘다는 소릴 들었던 기억이.. 젠장. 과거의 쓰라린 추억 때문에 무심코 눈물을 흘릴 뻔 했잖아.
로비에 들어서니 문명의 이기, 에어컨이 내뿜는 시원한 바람이 땀에 젖은 이마뿐만 아니라 번뇌로 가득한 내 가슴 속까지 씻어내리는 느낌이다. 땀을 잔뜩 흘렸더니 몸이 나른해졌다고 해야 하나. 번호표를 뽑고 대기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시원한 공기를 만끽하고 있는데 문득 그림자가 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고 형광등 불빛 아래에 있을 때와 달리 좀 더 어두워진 느낌.
“히키타니? 여긴 무슨 일이야?”
“에.. ”
위험했다. 무심코 엑. 하고 중학교때 맨발로 바퀴벌레를 밟아버렸을때와 비슷한 소릴 낼 뻔 했잖아. 그나저나 히키타니는 누구냐. 설마 나냐?
일단 고개를 좌우로 돌려 하야마의 근처에 나 외에 소부고교 학생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하야마를 쳐다보았다. 역시나 아무 거리낌 없이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분명 무의식적으로 지어냈을 저 상큼한 미소가 대답을 중용하는 느낌이라고.
“..정기 검진.”
“어? 왜?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거야?”
역시나라고 해야 할지.. 악의업는 그 물음에 난 썩은 눈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내가 가이드라는 사실은 히라츠카 선생님을 비롯해서 단 몇 명 뿐이고, 인기만점의 센티넬인 녀석 주변엔 나완 비교도 되지 않는 가이드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나같은 가이드한테까지 신경이 미칠 여력은 없겠지. 오히려 얼굴을 알고 있던 것만으로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대답을 하지 않으려는데 화사하게 웃으며 상체를 살짝 숙여 대답을 기다리는 몸짓에 나는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무서워.. 이런게 바로 리얼충의 스킬인가!? 약간의 제스처만으로 사람을 조종하다니 이건 어디의 기어스야.
타의에 의해 스스로 내 자신이 가이드라고 말해야 하는 느낌은 비참하다.
사회의 상류층이니 뭐니, 센티넬에 빌붙어야만 진가를 발휘하는 가이드 따위 절대 하고 싶지 않다고. 가끔가다 코마치가 ‘여자에게 빌붙어 살아가려는 오빠의 삐뚤어진 근성이 오빠를 가이드로 인도한게 아닐까? 센트럴 여자를 잡으면 만사형통 아냐?’라고 내 맘에 스크래치를 남기지만 달라! 난 센트럴과 가이드가 아닌 부양자와 피부양자의 입장이 되고 싶은 거니까!
“그건 아니고. 내가 가..”
그 순간, 마치 타이밍의 신이 날 구제하기라도 한 듯 신호음이 울리고 내 손에 들린 번호표와 같은 숫자가 벽면에 크게 새겨졌다. 벌떡 일어나 하야마를 지나쳐 검진실로 들어가는데 뒤를 보니 하야마가 나와 부딪친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와아. 순간적으로 히키가야균으로 불리던 때의 트라우마가 생각날 뻔 했어. 하야마는 손을 들어 어깨를 털어낸다거나 하는 짓을 하지 않았고 단지 그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수에 젖어 있던지 나는 하나터면 홀딱 반해버릴뻔 했다.
..일리가 있냐. 난 더 이상 하야마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검진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 싫다고. 멋대로 내 정보를 빼앗아가다니, 무슨 BB(Bog Brother)냐고. 빌어먹을 디스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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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만이 검진실로 사라지고 나서 하야마는 웃는 낯으로 접수대의 간호사에게 다가갔음. 간호사가 하야마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자 하야마는 미소를 지었어.
"누나, 방금 들어간 애 있잖아요."
"응. 8번 접수표 말이지. 왜?"
"검사 언제쯤 끝나요? 같이 집에 가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안 맞을것 같아서."
"음.. 보자. 오늘은 심리검사랑 혈액 체취 정도야. 네 검사결과 나올때쯤엔 나올 것 같네. 늘 에이치로 교수님이 담당하는 가이드거든."
"그건 몰랐네요.."
"으응. 조금 특이한 가이드라서, 교수님이 직접 보셔. 아, 이건 친구에겐 비밀이야?"
하야마는 무의식중에 하치만과 부딪친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쥐었음.
따뜻한 물 한방울을 셔츠 위에 떨어뜨린 것처럼 부드럽게 젖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거기에 집중하면 아주 편안한 느낌이 들었어.
역시 가이드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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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마는 학교 내의 거의 모든 가이드와 한번씩 페어를 이루었음. 짧게는 이틀, 길면 몇달간.
일단 가이드들에게 원체 인기가 좋기도 했고, 하야마의 센티넬로써의 능력치도 최상급.
그가 파견되는 임무에 같이 곁다리로만 끼어가도 실적이 꽤 오르는 모양이니 가이드들이 마다할리가 없음.
실적이 좋으면 나중에 정식으로 입대할때 가산점이 되는 거.
문제는 하야마가 너무 강한 센티넬이라서 그의 각인자가 아닌 가이드로써는 그를 오래 지탱해 줄 수가 없었음.
초반엔 어느정도 진정이 되다가도, 마치 그 가이드에게 면역이 생기듯이 점점 약발이 떨어지는 거임.
다행히 하야마는 자기 상태를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케어해서 자기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하지 않음.
질보다 양이라고, 하야마가 자기 주변에 여러명의 가이드들과 몰려다니는 것도 그 이유임.
주로 학교에선 가이들과 센티넬 그리고 일반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딱 그어진 느낌이라 하야마는 하치만이 가이드란걸 알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음.
왜 알아차리지 못했지? 하고. 그러다가 애초에 가까이 있어본 적이 없어서 그랬구나 하고 깨닫는 거임.
같은 반인 데다가 여름방학때 봉사활동도 같이 갔었던 만큼 아예 접점이 없던건 아니지만 하치만의 존재는 다른 가이드들에게 묻혀 있었으니까.
하야마는 간단히 민감도 검사와 근력테스트를 하면서 다음주정도에 다음 미션이 떨어질거라고 의사에게 언질을 받았음.
그러려니 하면서 이야기를 흘려듣다가 다음 파트너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자 귀가 저절로 쫑긋 일어섰어. 자신이 알기로 이제 소부 고교의 남은 가이드는 히키가야 뿐이니까..
"옆 난파고교의 노련한 가이드야."
"에? 난파고라뇨? 저희 학교 가이드는?"
하야마가 자신도 모르게 물음을 던졌음. 센티넬과 가이드에게 있어 고등학교란 자대배치 받기 전의 훈련소같은 느낌이라 각 학교마다 라이벌의식도 있는 마당임.
이런 상황에 갑자기 임무를 다른 학교 학생이랑 가라니?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도 담당은 기다렸다는듯 말을 이었음.
"어쩔 수 없어. 같은 학교의 가이드랑은 너 이미 페어를 다 이뤘는걸."
"아직 페어가 안 된 가이드가 있잖아요."
담당은 불시의 기습을 받은 얼굴이 되었어. 하야마는 그 얼굴을 보고 그가 히키가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걸 알아차렸음. 그게 아니면 저렇게 정곡이 찔린 얼굴이 될 리가 없으니까.
"그.. 그는 제대로 된 가이드가 아니라서."
"저는 걔랑 같은 반이에요. 괜찮을 것 같던데요."
"그, 그래? 효과가 있는것 같아?"
"네."
하야마는 자신의 어깨쪽을 흘끔 흩으며 대답함. 담당은 다행과 안도와 걱정을 동시에 느끼는 사람처럼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지만 일단 알겠다며 자리를 떴음. 급한 일인지 자신에게 나가란 말도 없이 떠난 그를 보며 검사를 마친 하야마는 접수대쪽의 대기 의자에 앉아 하치만을 기다렸어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은 타고난 예민 때문에 끝없이 고통받게 된다.
백미터 밖의 구둣발 소리,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 종이가 펄럭이는 소리와 옆 사람의 심박동, 느껴지는 체취, 혹은 바로 벽을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가이드의 존재감이라던가.
어마어마한 정보량에 뇌가 휩쓸리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 그건 센티넬로써의 자제력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하야마는 늘 그 상태와 가이드로 인해 안정된 상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각인된 상대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아직 면역이 생기기 전의 가이드를 만났는데, 센티넬이라면 누구라도 그 곁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을게 뻔하다. 하야마는 단지 그뿐이라고 자기 자신에게 되뇌었다.
그동안의 미묘한 거리감을 한번에 좁히게 될지도 모른다. 나와 페어를 이룬다면 그 녀석은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평소처럼 심드렁한 얼굴이겠지.
평소 말을 걸 때조차 경계하는 얼굴로 돌아보는 마당이다. 하야마는 하치만의 반응을 상상하며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태양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현란한 조명이 반짝인다. 귀를 울릴 정도의 음량이 심장박자처럼 쿵쿵댔고 성급하게 마신 술은 허공에 뜬 듯한 부유감을 선사했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여름보다 더 심한 노출을 한 여자들이 힐끔대며 시선을 던지는 꼴을 코웃음도 치지 않고 무시한다. 남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익숙한 사람의 반응이었다. 확실히 남자치고 긴 머리를 높이 올려 묶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여 습관적으로 리듬을 타는 모습이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맛이 있긴 했다. 자신의 얼굴을 믿고 끈적하게 들이댔던 여자들을 몇 번 무참하게 거절하자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의 수가 확 줄었다. ‘심심하네.’ 시간이 흐를수록 클럽 안의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춤을 추며 끈적하게 달라붙는 남녀와 은근히 서로의 몸을 비비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지만 제갈택의 눈동자는 심드렁하게 가라앉았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숙소에서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잘 걸 그랬군. 사실 제갈택이 클럽에 나오는 것은 반쯤은 습관이었다. 머리꼭지에 피가 마르기도 전인 십대부터 줄창 클럽을 다니며 나름대로 문란한 생활을 해온 그라 이제와서 클럽에 목 맬 정도로 굶주려있지도 않다. 박일표를 제외한 멤버들에겐 스트레스 해소용이라 말하지만 그가 클럽에 나오는 나머지 절반의 이유는 바로 그 박일표 때문이었다. 어영부영 감정을 깨닫고 고백해 연인 비슷한게 되어있긴 하지만, 박일표는 본래 헤테로였다. 게이인 자신이 교제해달라 했을때 놀라던 반응을 보면 자신이 고백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을게 뻔했다. 하지만 박일표는 어째서인지 순순히 제갈택의 연인이 되어 주었고.. ‘술맛 떨어지는군.’ 모든 연애가 동화처럼 해피엔딩인 것은 아니었다. 제갈택은 가끔 박일표의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다. 이럴거면 왜 자신과 사귀기로 했느냐고, 설마 그룹 멤버가 고백했기 때문에 차마 거절할수 없었느냐고. 박일표는 착한 사람이었다. 늘 상냥하게 웃으며 모두에게 공평했고 그 말은 연인으로썬 영 글러먹었다는 뜻과 같았다. 스킨십을 거절하지만 않지만 절대 먼저 손을 대는 법이 없었다. 스킨십 뿐만 아니라 그들 관계의 거의 대부분이 그랬다. 제갈택이 먼저 지쳐 떨어지지 않거나 박일표에게 저렇게 따져묻지 않는 까닭은 그런 점마저 모두 안고 갈 정도로 제갈택이 박일표에게 흠뻑 빠져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뭣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제갈택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이를 갈면서도 박일표의 얼굴만 보면 독기가 빠졌다. 그게 제일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어쨌든 연인으로써 봐줄 거라곤 얼굴과 몸 정도인 박일표가 그나마 연인다운 행세를 할 때는 제갈택이 말 없이 밤새 놀다 오거나 할 때 뿐이었다. 그마저도 늘 지적하지 않고 두세번에 한번씩 제갈택의 침실이 비어있는것을 확인하고는 무어라 잔소리를 할 뿐이었지만 제갈택은 그게 그렇게 기꺼웠다. ‘오늘은 그냥 돌아갈까.’ 손에 든 술잔을 모두 입안에 털어넣은 제갈택은 칵테일잔을 바에 반납하고 빽빽히 들어선 사람들의 틈을 해지고 걸어나갔다. 워낙에 사람이 많은 데다 다들 취한듯 흐느적거려 그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만으로도 곤욕이다. 제갈택이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 순간 뒤에서 끈적한 손이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어떤 년이야.’ 방금 전 호되게 당한 여자들에게 소문은 못 들었나보지. 짜증난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본 제갈택의 눈에 보여진 것은 가슴이 훤히 드러난 옷을 입은 여자가 아니라 눈높이가 제법 높은 남자였다. 깨끗한 피부에 둥근 이마가 꽤나 번지르르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남자는 제갈택의 대놓고 짜증난다는 시선에도 싱긋 웃더니 몸을 살짝 붙여 손바닥을 슬쩍 가슴께로 올린다. 제갈택이 입을 뻐끔 열자 남자가 빙긋 웃더니 고개를 숙여 자신의 귀를 제갈택의 입가에 내렸다. “이태원이나 쳐 가, 이 게이새끼야.”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어?” 그래놓고는 제법 사람 좋은 웃음을 빙그레 지어보이는데, 제갈택은 순간적으로 눈썹을 꿈틀 일그러뜨렸다. 뭔가 익숙하다 했더니.. 모양 좋은 눈썹 하며 순하게 처진 눈매, 그리고 웃는 모습이 박일표와 닮았다. 제갈택은 그대로 상대의 멱살을 잡아 끌어 입을 맞췄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적극적으로 혀를 감아온다.
“쯧.” 클럽 바로 옆의 호텔에서 잠에서 깬 제갈택은 쯧 하고 작게 혀를 찼다. 호텔 난방이 너무 강해서 입술이 건조했고, 등 뒤로는 어제 그 녀석이 찰싹 달라붙어 껴안은 상태라 더웠다. 욕실로 가서 거울을 보니 가슴에 빨갛게 울혈이 생겼다. 원나잇에 더럽게 매너없네.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으나 브이넥 니트를 입어도 보이지 않는 가슴께라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뜨거운 물을 틀어 샤워를 시작했다. 더듬거려 아래를 만져보자 아래는 젤로 범벅이었다. 뜨거운 물로 살짝 굳은 젤을 녹여버리고 살짝 부어 아릿한 입구와 저린 허리를 두들겼다. 샤워를 마치고 대충 옷을 주워입은 제갈택은 지갑에서 십만원짜리 수표 두어장을 꺼내 침대위에 두고 방을 나섰다. 그래도 원나잇 치고는 나쁘지 않은 테크닉이었다고 생각하며.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에 도착하자 늦은 오전이었다. 스케쥴이 있는 녀석들은 진작에 나섰을 것이고 스케쥴이 없다면 지금쯤 일어나 느즈막히 아침을 먹을 시간이다. “어디 갔다와?” 숙소에 처음 들어서자마자 바로 박일표를 만나게 되는 건 예상 외였지만. 제갈택의 시선이 힐끔 거실의 스케쥴보드를 향했다. “본가에 좀.. 그런데 너 스케쥴 있지 않았나?” “아 취소되서. 대위가 밥해뒀는데 먹을래?” 어제 술을 잔뜩 마셔 속이 더부룩했다. 거절하려고 고개를 젓는데 박일표가 냄비 뚜껑을 열자 고소하면서도 시원한 미역국 냄새가 확 퍼졌다. 와 술국 땡겨. 제갈택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들어가 불편한 옷을 벗고 편한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었다. 추워 옷 안에 꽁꽁 싸맸던 머리가 덜 말라 아직 물기가 축축한 것을 대충 풀어 뒤로 늘어뜨리고 부엌으로 나가자 박일표가 국을 데우고 반찬을 꺼내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연습실인지, 아니면 스케쥴인지 모르겠지만 집 안엔 박일표뿐인 모양이다. 식탁 위에선 한동안 말없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박일표는 그저 말없이 밥을 먹다 태연한 얼굴로 자신이 설겆이를 하겠노라 했고, 제갈택은 그대로 식탁을 떠났다. 본가는 얼어죽을. 박일표는 오늘도 알아채지 못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설겆이하는 박일표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뭔가 하고 확인하니 처음 보는 이름으로 메세지가 와 있었다. 범일태? 어제 그 새낀가? 와 이거 진짜 골때리네. 자는 사람 몰래 휴대폰에 번호를 저장해두다니 쌍팔년도 영화에서나 나올 짓을 하고 앉아있냐.
범일태 { 왜 그렇게 일찍 갔어요? 어제 무리했을텐데. ] - 제갈택님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 - 범일태님이 제갈택님을 초대했습니다. - 범일태 { 하하, 혹시 쑥쓰러워서 그래요? 어제는 그렇게 적극적이더니. ] - 제갈택님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 - 범일태님이 제갈택님을 초대했습니다. - 범일태 { 혹시 대화하기 싫은거? 나 상처받을 거 같은데.. ] - 제갈택님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 - 범일태님이 제갈택님을 초대했습니다. - 범일태 { 어제 찍은 사진 제 인스타에 올려도 되요? ] 제갈택 { 씨발새끼야. ] 범일태 { 와 드디어 대답해줬다!^^ ]
제갈택은 이를 악문 채로 손가락을 두다다 움직였다. 아이폰 액정이 깨지기라도 할 기세였다. 지금 유명인 약점 잡았다고 뻗대는 거 같은데.. 너 사람 잘 만났다. 제갈택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었고, 제갈택이 십대부터 클럽을 들락거려도 겉으로는 멀쩡하게 아이돌질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가문의 이름 덕분이었다. 폭력사건을 경찰서까지 갈 정도로 휘말린 것을 한 기자가 기사화했다가 갑자기 모든 광고가 끊겨 부랴부랴 기사를 내렸던 사건 정도는 기자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도 못 될 정도였다.
제갈택 { 원하는게 뭔데? 돈? ] 범일태 { 원하는 거라면.. 굳이 따지자면 몸인가? ]
하. 제갈택은 어이가 없어 폐하가 승천할 지경이 되어 코웃음을 팩 쳤다. 왠만하면 양 변호사에게 연락하지 않고 좋게 끝내려고 했더니.. 이틀 뒤에 경찰서에서 보자, 라고 짧게 보내려 대화방을 나가려는 찰나 몇개의 메세지가 순식간에 띠롱띠롱 수신되기 시작했다.
범일태 { 농담이에요, 농담ㅠㅠ 씹지 마요.. 사실 나 ] 범일태 { 이번에 가수 데뷔하게 됬거든요. ] 범일태 { 선배로써 이것저것 궁금한것도 있고. 그래서 그런데 한번만 만나주면 안되나? ]
왠만하면 그냥 대화방을 나가버렸을텐데 뒤에 붙는 이야기가 제법 흥미로웠다. 가수라? 그러고보니 목소리도 낮은 저음이 꽤나 섹시했고 마스크도 나쁘지 않았지.
제갈택 { 사진은. ] 범일태 { 그냥 얼굴만 찍은 거에요ㅠㅠ. 나오면 보여주고 바로 그자리에서 삭제할께요. ] 제갈택 { 나 바쁜데. ] 범일태 { 저희 그룹 데뷔무대 이번에 음중에서 하는데.. 그때 시간 맞으면 잠깐 보는것도 괜찮은데^^ ] 제갈택 { 5분. ] 범일태 { 귀여운 후배 만나는 거니까 딱 5분만 더해주면 안될까요 >.<? ] - 제갈택님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 - 범일태님이 제갈택님을 초대했습니다. - 범일태 { 잘못했어요. 그럼 7분만 시간 내줘요. ] 제갈택 { ㅇ ]
제갈택은 대충 긍정의 답을 보낸 뒤 휴대폰을 쇼파 위에 턱하니 던졌다. 어쩐지 자신을 보는 눈이 묘하다 싶더니만... 자기 애를 배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눈빛과 비슷하다 했더니 아이돌 선배인 제갈택에게 나쁘게 보일 필요는 없다 이건가. 사실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제갈택은 자신이 그 녀석에게 여지를 준 게 맞다고 확신했다. 확실히.. 자신이 다른 녀석에 비해 무르게 대응한다는 느낌은 있었다. 그래도 음. 일단 섹스는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박일표를 닮았으니까. 스스로 찾아낸 이유를 긍정하던 제갈택은 어느새 맞은편 소파에 앉은 박일표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괜히 제발 저린 느낌이었다. “왜?”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박일표의 시선이 소파에 놓인 휴대폰에 가 닿아있는걸 확인한 제갈택의 안색이 묘해졌다. 설마 신경쓰는 건가 싶어서 살짝 기쁘기도 하다가 왠지 외도한 느낌에 뒷목이 싸해지기도 했다.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한 얼굴로 박일표를 쳐다보는 제갈택의 표정에 박일표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본가에 있다 왔다더니 집에서 온 연락인가봐?” “어.. 음.” 가요계 후배를 좀 보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숨길 일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의 연쇄다. 박일표의 말에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자 소파 위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평소라면 슬쩍 박일표에게 다가앉아 손이라도 잡아봤을 텐데 묘하게 위축된 제갈택은 그저 제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거실 한구석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박일표는 말없이 그런 제갈택을 쳐다보다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흐지부지 대충 한번 보기로 정하고 난 뒤, 제갈택은 당연히 얼굴 한번 보여주면 모든 연락이 끊기겠거니 했지만 음중 녹화 전까지 연락이 끊기질 않았다, 어림 잡아 하루 열두번까지도 오는 것 같았는데 어찌나 짜증나던지 나중에는 오는 연락을 죄다 씹었다. 그럼에도 그녀석을 차단하지 않은건 오직 박일표를 닮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벤에 피곤한듯 주저 앉아 아이폰을 집어든 제갈택의 표정이 묘해졌다. 맞은편에 앉은 박일표가 무어라 입을 어는 순간 제갈택이 손가락으로 두다다 무언갈 치며 메신저로 대화를 시작해버리자 박일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묘하게 조용해진 벤 안에서 진모리와 한대위는 서로 박일표와 제갈택을 힐끔대며 눈치만 봤다. 매니저 옆 조수석에 앉은 백승철을 부러워하면서.
범일태 { 방송국 도착! 선배님들은 대기실 따로 있으시죠? ] 제갈택 { ㅇ 그리고 아직 도착도 안했어. ] 범일태 { 어? 곧 리허설 시작인데요? ] 제갈택 { 우리가 니네같은 새파란 신입이랑 같냐?? ] 범일태 { 그럼 우리 언제 만나요ㅠ0ㅠ ] 제갈택 { 니네 리허설 끝나고 오든가. 아 그리고 토나오니까 이모티콘좀 치워 ] 범일태 (하트뿅뿅 귀여운 이모티콘 있음) - 제갈택님이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 - 범일태님이 제갈택님을 초대했습니다. - 범일태 { 다신 안할께요. ]
참고로 제갈택은 박일표에게 메신저 보낼 때 이모티콘좀 넣어서 부드럽게 보내주면 안되겠냐는 투정까지 부려본 전적이 있던 남자였다.
화보촬영을 마치고 3집을 들고 오래간만에 음중무대에 서게 됬다. 당연하지만 그룹의 순서는 맨 뒤, 프로그램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위치였다. 컴백소식 때문에 간만에 방송국 앞이 더할 나위 없이 혼잡해 이 추운 날에 주차장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차에서 쫓겨나야 했다. “미안한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지금 주차 못하겠다. 너희 먼저 뒷문으로 들어가 있어. 대충 차 두고 올테니까.” 훈훈한 히터가 틀어져 있던 차와 달리 밖은 점심때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매섭기 그지없었다. 서로 달라붙어 손을 잡고 온몸으로 하트 광선을 내뿜는 진모리와 한대위를 쳐다보자니 저절로 표정이 썩어들어간다. 괜히 박일표를 힐끔 쳐다보자 꼴에 리더랍시고 앞장서 척척 걸어간다. 젠장. 제갈택은 추운 손을 파카 주머니에 쑥 집어 넣고 박일표의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애인이 있는데도 옆구리가 못내 시렸다. 걷는 와중 아이폰이 징 울어 확인하니 그 녀석이었다. 자기는 리허설이 끝났다며 피디님이 무섭다고 칭얼거리는데 이모티콘도 없이 참 잘도 징징댄다 싶었다. 박일표를 뒤따라 걸으며 대충 답을 해주는데 곧 만날수 있기 때문인지 아주 메세지로 테러를 하기 시작한다. 아 어쩌지. 다시 보게 된다니 너무 좋네요 따위의 문장 때문에 계속 울리는 휴대폰을 보다 거기에 적힌 장소를 본 제갈택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야, 우리 대기실 어디야.” “3층 오른쪽임.” “그 큰 방? 알았어. 나는 좀 있다가 간다.” 그렇게 말하고 뒤로 빠지자 박일표의 시선이 묘하게 자신에게 달라붙어온다. 제갈택은 왠지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 생각하며 일부러 박일표의 눈길을 못 알아챈척 뒤를 돌았다. 신인 그룹은 보통 프로그램의 맨 앞, 그리고 인기그룹일수록 프로그램의 뒤에 배치되기 마련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쪽의 출연이 다 끝낼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오래 걸리니 먼저 끝난 쪽이 다른 쪽이 리허설을 시작하기 전에 얼른 만나러 오겠다는 거다. 그녀석은 방송국도 처음이라는 주제에 또 이런 데엔 빠삭해보였다. 아무도 없어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휴게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제갈택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일주일간 제갈택을 끈질기게도 괴롭혀오던 녀석이었다. “아! 안 늦었다!” “..누가 쫓아 오냐?” “그렇지만 늦게 오면 그냥 가버릴 것 같아서요.” 그 말엔 반박하지 못했다. 삼분정도 기다리다 안오면 바로 가버릴 생각이었으니까. 리허설 끝나고 바로 왔다더니 옷이며 메이크업까지 풀로 마친 상태다. 그 상태로 허겁지겁 달려왔는지 헉헉대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전신에 달라붙은 검은 가죽옷을 보니 그룹 컨셉이 대충 감이 잡힌다. 제갈택의 시선이 자신의 옷을 위아래로 흩는 것을 확인한 그는 수줍게 웃으며 물었다. “우리 무대의상 어때요? 섹시하죠? 막 두근거리지 않아요?” “지랄. 무대에서 머리라도 맞았냐?” 사실 조금 두근거리긴 했다. 그런데 그건 저 부담 백배 검정 레자가 섹시해서가 아니라 살짝 길러 펌을 넣은 헤어스타일이 박일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제갈택은 눈썹을 들어올리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헉.. 악수해도 되요?” “닥치고 사진 내놔.” 제갈택의 싸늘한 말에 범일태는 그 큰 덩치를 시무룩하게 숙이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비밀번호도 지정되어있지 않은 폰을 열어 멋대로 갤러리를 뒤진 제갈택은 저장된 사진을 찾아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얼굴만 찍긴 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잠든 옆모습이었고 그 옆엔 뺀질한 범일태의 얼굴이 함께 나와 있었다. 게다가 이불 밖으로 맨어깨가 삐죽 비져나와 그냥 아는 형동생이 자는 모습이라기엔 묘하게 야릇한 사진이었다. “다시 인스타니 뭐니 하는 헛소리 지껄이면 죽여버린다.” 일말의 미련도 없이 사진을 삭제하고 휴대폰을 돌려주자 범일태가 축 처진 어깨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제갈택을 붙잡아 휴게실 의자에 앉혔다. “아직 5분 남았으니까 이야기나 좀 해요.” 그러나 제갈택의 얼굴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받을거 다 받았으니 이제 볼일이 없다 이거야. 라는게 드러난 표정에 범일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에 훤히 보인다. 그게 아이같아 보이기도 하지만서도 제갈택이란 남자는 굳이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감출 필요가 없이 살아왔다는걸 상기시키기도 했다. “원래는 아이돌 선배로써 뭐 충고라도 해주기 위해서 오신 거잖아요. 아무 이야기나 해 줘요.” “딴따라가 인기 얻으려면 노래 잘 부르고 춤 잘추면 됐지 뭘 바라냐?” “노래도 노래 나름이지.” “비싼 작곡가를 사시던가.” “소속사가 가난해서 그건 좀..” 쓸쓸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범일태는 곧 방긋 웃으며 그런 의미로 후배한테 곡 하나만 써주면 안될까요? 하고 넉살 좋게 웃어보였다. 거절당할걸 전제로 꺼낸 말인지 범일태는 곧 떨어질 제갈택의 짜증스런 목소리를 예상하며 작게 어깨를 움츠렸지만, 제갈택은 그런 범일태를 빤히 노려보았다. “..만들어둔 노래 하나 있는데, 줄까?” 그러더니 답지 않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는 것이다. 그 얼굴에 왠지 범일태는 평소처럼 웃으며 대답하지 못하고 목이 콱 매였다. 그 순간 휴게실 문이 벌컥 열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바보처럼 말을 더듬고 말았을 것이다. “택아.” 그러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자 마자 범일태는 벌떡 일어나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군대도 아니고, 식겁한 제갈택이 뒤를 돌아보자 평소처럼 순둥한 얼굴을 한 박일표가 갑작스러운 인사에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박일표 선배님, 저는 신인그룹..” “택아, 우리 리허설 해야 돼.” 범일태의 인사를 무시하고 바로 제갈택을 불러 데려간다. 범일태가 살짝 벙찐 얼굴로 서있자 박일표의 손에 손목을 잡혀 끌려가던 제갈택이 뒤를 가볍게 돌아보더니 자유로운 한 손으로 전화하는 손을 만들어 얼굴 옆에 붙였다. “노래 생각 있으면 연락해.” “아..” 그러나 채 범일태가 대답을 하기 전에 휴게실의 문은 닫혔다. 그러니까.. 다음에 또 연락해도 된다는 뜻?
“친구가 인사성이 좋네.” “저렇게 인사하는건 처음 봤는데.” 어디가서 박일표한테 맞기라도 했나 싶을 정도다. 제갈택의 대답에 박일표가 티나지 않게 살짝 뒤를 돌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여전히 박일표는 제갈택의 앞에 서 있었고 제갈택은 박일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많이 친한 친구인가봐. 노래도 만들어주고.” “저거 친구 아닌데?” 박일표가 살짝 멈칫한 사이 제갈택은 먼저 앞서나가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한대위의 무릎을 베고 있던 진모리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다가 문앞에 서있는것이 제갈택임을 확인하고 심드렁하게 다시 누웠다. “깜짝이야.. 볼일 있다더니 왤케 빨리 왔어?” “.....” 제갈택은 바보가 아니었고, 그래서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다. 리허설에 본공연까지 마치고 핸드폰을 확인하자 여김없이 그녀석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노래를 준다고 한건 반쯤 충동적인 생각이었지만 진짜로 만들어둔 노래가 있긴 했다. 톡으로 목소리를 들어봐야 하니 MR뺀걸로 노래 부른 파일을 보내달라고 하고 이메일 주소를 넘기자 그쪽도 상당히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겨우 원나잇 한번에 노래 하나라니 확실히 파격적이긴 했다. 어디까지나 제갈택의 기분이 좋기 때문에 주는 서비스였지만 말이다. 뭐 그래도.. 확실히 박일표가 내 애인은 맞는 모양이지. 제갈택의 입가에 기분 좋은 -남들이 보기엔 비릿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미소가 매달렸다. 그림, 음악, 조각을 불문하고 예술하는 사람들의 영감의 원천은 무엇을까. 보통 그것은 예술가의 애정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연인이라든가 가족, 혹은 자신의 조각을 보고 사랑에 빠졌던 피그말리온처럼 예술가의 창작물과 그의 애정의 대상은 아예 별개일 수가 없는 것이다. 제갈택 또한 부끄럽지만 박일표에게 줄 노래를 작곡해본 적이 있었다. 물론 나온 것은 박일표에게 주기는 한참 모자란 곡들 뿐이라 박일표에게 선물한 곡은 막상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삽질을 한 덕분에 곡이 잔뜩 남아돌았으니 그 중 하나를 다듬어서 그녀석에게 선물하는 것 정도는 상관 없을것이다. 나름 기특하단 말이지.. 그 박일표가 질투도 다 하게 만들고, 아주 기특한 녀석이야.
“큰일났어.” 평소 여유로운 모습과 인상 좋은 웃음이 트레이드 마크일 정도로 느긋한 박일표답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초조한 얼굴로 다리를 떨기 시작하는 박일표를 보며 백승철과 진모리는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임?” “뭐 큰일이라도 난거야??” 박일표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애 끓는 소리를 냈다. “택이가.. 다른 남자를 만나나봐..” 백승철 은(는) 금새 심드렁해졌다! 진모리 은(는) 귀를 후비기 시작했다! 제갈택과 박일표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고 사귀기 전부터 종종 들어왔던 내용이었다. 애써 귀찮은 기색을 감춘 진모리가 투덜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만나지 말라고 해.” “택이는 구속하는거 싫어해.” “흐음. 글쎄?” 진모리는 묘하게 웃었고, 박일표의 일이 그닥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백승철은 노트북을 무릎에 올리고 전원을 켜기 시작했다. “쿨한 애인이 되고 싶다고 클럽 가는것도 봐주는데 다른 남자 만나는건 못 봐주겠음?” “클럽에선 그래도 여자만 만나잖아. 그리고 그새끼는 좀 느낌이 이상해.” 와, 일표형이 그새끼래. 진짜 맘에 안드나봐. 진모리가 백승철 옆에서 속닥거렸다. 눈썹을 찌푸린 박일표는 미처 그런 진모리를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택이가.. 그 새끼한테 노래 준다고 했단 말이야.” “흠?” 그제서야 노트북에 고정되어 있던 백승철의 눈이 박일표를 향했다. “아~그러고 보니 일표형도 택이한테 노래 받은적 없구나?” 진모리의 태연한 목소리에 백승철은 입 다물라는 뜻으로 진모리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제갈택은 작곡에 손을 댄지 3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작곡한 노래마다 대박을 터뜨렸다. 두글자로 줄여 말하자면 천재다. 1집부터 해서 솔로로 낸 곡까지 지금 발표한 곡으로 벌어들이는 저작권료만 해도 평생을 호사스럽게 놀고먹어도 될 정도다. 하지만 성격이 심히 사나운 탓에 다른 그룹에 노래를 주긴 커녕 같은 소속사 선배에게 노래를 줬다가도 부르는게 맘에 안 든다며 깽판을 쳐 노래를 다시 받아온 전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 사람이 가수임?” “이번에 새로 데뷔했나봐,” 백승철의 손가락이 가볍게 움직이더니 모니터에 사진을 띄웠다. 무대 사진을 몇개 띄워 박일표에게 모니터롤 보여주자 박일표가 손가락으로 한 남자의 얼굴을 집었다. “오. 이 사람 잘생겼네.” “키가 190이야. 제갈택보다 큼.” 평소 제갈택보다 작은 키를 은근히 신경쓰고 있던 박일표의 눈썹이 꿈틀 일그러졌다. 그러나 박일표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 백승철이 선수를 쳤다. “이 사람이랑 제갈택이랑 나란히 기사 떴네?” “..볼래.” 박일표는 백승철의 노트북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고, 프로필을 보던 박일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거 진짜야..?” “어제자 기사니까 오늘 제갈택 돌아오면 물어보셈. 둘이 생각보다 친한듯?” 박일표는 말없이 노트북의 뚜껑을 닫았다. 초조함을 넘어서 화까지 나려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상태라 백승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쩍 노트북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기만 했다. “오늘부로.” 박일표가 생긋 웃었다. “쿨한 애인은 관둬야겠다.”
“와.. 진짜 너무한다. 모른척 한게 아니라 정말 모르고 있던 거구나.” 제갈택은 생각치도 못했던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친 범일태를 벙찐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 얼굴이 웃겼는지 풉 하고 웃은 범일태가 바로 옆을 지나가던 급사에게서 라임슬링이 든 잔을 하나 낚아채 제갈택에게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잔을 받아든 제갈택이 애써 담담한척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선배처럼 아버지 따라온거죠, 뭐. 가수 하는 조건이 이거였거든요. 공식적인 자리는 빠짐없이 참석할 것.” 제갈택은 칵테일 잔에 붙은 설탕 부스러미를 혀로 녹여먹고는 범일태를 째려보았다. “삼진물산? 아니면 보람중공?” “후자요.” 범일태의 담백한 대답에 제갈택이 짜증난다는 뜻으로 팍 인상을 썼다. 파티에서 자신을 이미 봤으면서 후배니 뭐니 가증스럽게 모른척 했다 이거지?? 제갈택의 표정을 읽었는지 범일태가 먼저 선수를 쳤다. 솔직히 파티에서 몇번이나 마주쳤는데, 당연히 알아볼 줄 알았죠. 모르는 척 하고 있는데 먼저 아는척하기도 뭐해서요. “가난하다며!?” “소속사가 가난해요. 집에서 전혀 지원을 안 해줘서 연습생부터 굴렀단 말이에요.” 정말 고생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꼴을 보니 작정하고 속인게 맞다. 파티로비 한 가운데라 차마 큰소리로 욕도 못 내뱉고 제갈택이 씨근덕대자 범일태가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빨개지네요. 새삼 반했어요?” “죽는다 진짜..” 그러더니 확 뒤를 돌아 자리를 옮긴다. 그렇게 튀게 생겼으면서 남들 주목을 받는건 그닥 좋아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구설수에 오르는게 싫은건지 공적인 자리에서만은 얌전한 모양이었다. 범일태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런 제갈택의 뒤를 따라붙었다. “어디가요? 심심한데 이야기나 하지.” “할 얘기 없어.” 와 진짜 단호하다, 단호박인줄. 그렇게 우는 소리를 내자 제갈택이 짜증난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왠지 기분이 좋네요.” “매져냐?” “곡을 준게 예전 친분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저와의 하룻밤이 좋아서.. 라는 거잖아요? 괜히 자부심이 느껴지고 막, 악!” “닥쳐!” “혹시 내가 너무 정곡을 찔러서, 아, 진짜 아픈데!” 제갈택의 딱딱한 구두코가 범일태의 정강이를 가격했다. 딱 소리가 날 정도로 제대로 맞았는지 악악대는 소리에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이 가볍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디컨 ‘제갈택’ & 뉴렘 ‘범일태’ 둘이 이렇게 친했나? ] [뉴렘 범일태, 의외의 친분 과시] [파티에서 둘만의 세계 - 제갈택, 뉴렘 범일태와 절친?] [뉴렘 후속곡 선물까지? 제갈택 의외의 일면]
이와 같은 기사를 본 박일표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런지는 꿈에도 모른 채였다.
일표택인데 오리캐 비중이 더 커서 fail...ㅠ0ㅠ
제갈택은 자기가 박일표를 더 많이 좋아하는줄 아는데 사실 박일표도 지지않을만큼(!!) 제갈택을 좋아하고 있던 게 보고싶었는데.. 사실 이보다 더 길었었는데 밑도끝도없이 길어져서 중간 뭉텅이로 잘라먹었더니 일표가.. 일표 비중이.. 큽..
한대위는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교실까지 걸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게이.. 게이라고.. 게이면 그거잖아. 남자 동성애자. 그러고 보면 휘모리도 진모리도 모두 자신을 보며 눈을 과하게 반짝거렸지. 게다가 자신에게 잔뜩 치근덕대던 휘모리와 진모리의 도를 넘은 스킨십에다가, 순간 진모리의 능수능란한 키스를 떠올린 한대위가 양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뜯기 시작했다. 사실 진모리의 테크닉은 객관적으로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게임 속의 플레이어로써 한대위는 무조건적으로 감도가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한대위는 현실의 진짜 진모리도 저렇게 능숙할까.. 까지 생각하다가 머리를 세차게 털었다.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경기가 일어날 것 같았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교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은 한대위를 발견한 학우들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평소에도 알바 때문에 늘 피곤한 기색인 녀석이었지만 오늘은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암울하게 책상에 앉아 음산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야.. 너 괜찮아?” “왜이래?” [한대위님, 많이 피곤하신가요?] 평소 엎드려서 잠만 자다가 점심시간에만 비척대고 일어나고 가끔 수업이나 땡땡이치는 불량학생 한대위였지만 일단 아이들은 한대위를 그렇게 어려워하진 않았다. 다른 노는 아이들처럼 수업 분위기를 흐리거나 괜히 센척하며 으르렁거리는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대위는 그런 주변 아이들이나 수업하러 들어오는 선생님도 알아채지 못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눈에 띄게 헬쓱해진 한대위를 본 1교시 문학선생은 한대위를 양호실로 보냈다. 원래 자는 아이들도 터치하지 않을 정도로 느긋한 선생님이서 그런 모양인지 한대위는 졸지에 수업중인 복도를 지나 터덜터덜 양호실로 향해야 했다. “...양호실엔 설마 없겠지.” 고등학교에 입학해 양호실은 가본 적 없지만 문학선생님이 그대로인걸 보면 상당히 현실 반영이 잘 되어있는것 같았다. 건강 빼고 시체인 진모리나 휘모리가 설마 양호실로 찾아올 리는 없으니 양호실은 괜찮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한대위는 옆에서 오늘의 진도를 축하하는 미라미라의 초음파 목소리를 무시하며 양호실 문을 드르륵 열어제꼈다. 그리고 흰 가운을 입고 신문을 읽는 양호선생을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노크도 없이 누구야?” 짜증난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올린것은 한대위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어, 언제 우리 학교에 취업한거지.. “뭐야, 너냐? 대련하다가 어디 다치기라도 한거냐.” 큼직한 뿔테 안경으로 가려지지 않는 수려한 외모, 짙은 녹색의 올백머리를 가진 남자는 사지 멀쩡해 보이는 한대위를 위아래로 흩어보았다. 진모리와 휘모리처럼 그에게도 스포트라이트처럼 조명이 반짝였는데 허름한 공립학교의 양호실이 아니라 무슨 드라마 셋트장처럼 근사해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났다. 학교 선생이라는 신분은 망각한건지 떡 하니 입에 문 담배가 연기를 몽실몽실 피워올렸다. 그나저나 Q씨는 저게 진짜 본명인가. 머리 의엔 Q라는 대문자 알파벳만 떡하니 떠 있었다. “어.. Q... 선생님...?” “왜.” [호감도가 10 상승하였습니다.] 대답했다! 선생님이란 단어에 대답했어..! 이쯤 되니 이 무시무시한 상황에 울음마저 터질 것 같았다. 한대위가 입을 다물고 Q와 눈을 마주친 상태로 가만히 서있자 미라미라가 환희를 이기지 못하고 뾰로롱 날아올랐다. [어머나 세상에! 벌써 세번째 공략대상이에요!] 나도 알아. 제기랄.
다행인 것은 휘모리나 진모리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호감도가 오르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한대위는 잠시 이대로 뒤를 돌아 도망쳐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Q의 태도에 천천히 양호실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만약 Q가 현실만큼 강하다면 도망쳐도 세 발자국 떼기 전에 잡힐 것이다. 한대위가 주춤거리며 양호실 문을 닫고 서자 Q는 보던 신문을 접어 책상위에 올려넣고 이상하다는 듯 한대위를 올려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선생님께 말씀은 드리고 온거냐?” “아, 네. 문학선생님이 가라고 해서요.” “가도 된다는게 아니라 가라고..? 너 안색이 왜그래.” 그제서야 한대위의 얼굴을 제대로 본 건지 Q가 한대위를 불러 의자에 앉혔다. Q는 제법 능숙하게 한대위의 찬 손을 주물러보고 체하진 않았는지, 가슴이 답답한지 이것저것 문진을 해 보았다. 한대위는 Q가 자신의 손을 만지자 흠칫 놀랐지만 그저 진찰만을 위한 담백한 손길에 안심했는지 이내 어깨의 힘을 풀었다. 음 뭐랄까. 이 사람 진짜 어른이구나. 한대위는 새삼 놀라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진모리나 휘모리처럼 막 달려들면 내 힘으로는 막을 수 없겠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Q는 그런 한대위의 예상을 비웃듯이 제법 상냥했다. 옆에서 이벤트 하나는 뽑을 수 있겠죠..? 하고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는 미라미라만 아니었으면 그의 곁에서 제법 심신의 안정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열도 없고.. 체한것도 아닌데 왜 안색이 썩었지. 저혈당인가. 너 아침은 먹었냐?” “네. 먹었는데요.” “그럼 좀 쉬고 있던가.” Q는 책상 옆의 커튼을 열어 양호실 침대를 턱짓으로 가르켰다. 철제 프레임을 가진 작은 침대가 두개정도 있었는데 아침부터 양호실에 온 학생은 없는지 두 침대 다 구김 하다 없는 흰 시트가 깔려있었다. “편한대로 누워 있어.” Q는 아직도 어색하게 서있는 대위를 침대에 눕히고 군용 담요 비슷한것을 덮어주었다. 조금 싸늘했는데 담요를 덮자 금새 체온으로 몸이 덥혀지는 기분이라 한대위는 미간의 힘을 약간 풀었다. “아. 저기요.” 한대위는 반사적으로 침대 옆에 서서 커텐을 만지는 Q의 가운 끝자락을 잡아챘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고,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데 그동안 자신의 멘토였던 그를 보니 의지하지 말라는게 무리였다. “..상담할 게 있는데.” [호감도가 15 상승하였습니다.] 흥미로운 눈으로 침대 옆의 의자에 앉는 Q를 보며, 한대위는 저 빌어먹을 반투명 창만 없으면 지금보다 두배는 더 행복해질거라고 생각했다.
“그.. 음.. 친한 친구가 있는데요.” “그래.” “걔가 갑자기 저한테 뽀뽀를 하는 거에요..” [상대방의 호감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약간 놀란 기색으로 뿔테안경을 스윽 만지는데 뜬금없이 왜 호감도는 처 오르는지 모르는 일이다. 휘모리와 진모리는 호감도가 오를 때마다 반응이라도 보였지 Q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사실 Q가 너무 태연해서 한대위는 눈 앞에 떠오르는 호감도 창의 진위여부를 의심하게 될 지경이었다. “뽀뽀라.. 벌칙같은걸로? 어디에다가 했는데? 볼에다가?” “입에다가요.” 한대위의 대답에 Q는 벙찐 얼굴로 그를 쳐다봤는데 그 사이에 호감도가 두번이나 올랐다. 옆에서는 미라미라가 아주 난리를 치고 있었다. “만약 그 친구가 너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그 이상 진도를 나가려고 하거든 콘돔은 꼭 챙기라고 해라.” “아니에요.” “이거 참. 성교육을 다시 해야 하나.” “아니라니까요!!” Q는 자신의 농담이 웃긴지 킬킬거렸고 한대위는 억울한 얼굴로 씨근덕거렸다. 이렇게 농담으로 치부해주는게 차라리 고맙긴 한데. 전교에 한대위의 친구라고 할 사람이 한 손에 꼽을 정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지 한대위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조그맣게 말을 이었다. “저는 걔를 친구로는 좋아하는데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뭐 그리 심각해? 고백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장난일수도 있지.” 장난은 아니에요... 무려 저한테 성욕을 느꼈단 말입니다. 그 진모리가. 그 말을 꿀꺽 삼킨 한대위는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혀를 막 넣어서 빠는데 걔가 너무 잘해서 기분이..” “푸큽!?” 쿨럭쿨럭하고 잘못 넘어간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Q가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기침을 했다. 양호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담배를 비벼 끈 Q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자 한대위는 그 당황한 얼굴에 미안함마저 느꼈다. “뽀뽀가 아니라 키스를?” “예.. 뭐..” “그런데 기분이 좋았다고..?” Q의 목소리에 한대위가 앉은채로 펄쩍 뛰었다. 부끄러움에 한대위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기분 좋았다고는 안 했어요! 그, 그냥 처음이라 놀라서!” “아~ 처음이었다고?” “.....!!?!?!?” 호감도가 순식간에 세번이나 올랐다. 한대위는 이마 위로 손을 올리고 아니에요.. 라고 중얼거리며 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 Q의 눈은 처음보다 퍽 다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궁금한건 뭔데? 원래 키스란게 그렇게 짜릿한건지 물어보고 싶어서?” “아오, 아니라니..!” 벌컥 짜증을 내려던 한대위는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위로 들러올린 Q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지긋하게 자신의 눈을 쳐다보는 Q의 얼굴이 왠지.. 익숙한 거리감인데.. 한대위의 등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Q 선생님..?” “왜.” “너무 가까운데요..” 슬금슬금 뒤로 몸을 빼도 거리가 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Q가 그만큼 상체를 밀어붙였기 때문이었다. “키스가 궁금한거 아니었어?” “아닌..!” 헙 하고 숨이 막히는 소리와 함께 Q의 입술이 한대위의 입술을 폭 덮었다. [호감도가 20 상승하였습니다.] [상대방이 성욕을 느낍니다.] [한대위님! 세, 세번째 이벤트에요! 침대가 있으니 어쩌면..!?] ‘제기랄!’ 믿었던 Q에 대한 배신감이 너무 커서 한대위는 거의 울 뻔 했다. 그러나 한대위는 울지도 Q를 밀어낼수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흐응.. 응..!” “.....” “으흐...”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부드럽게 입술을 빨아 올리자 저절로 입이 열렸다. 부드럽게 잇몸 위를 흩은 혀에는 담배냄새가 묻어 있었지만 역겹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뜨거운 그 혀가 잇몸과 이 사이를 부드럽게 문지르자 저절로 턱에 힘이 빠져버렸다. Q는 아주 능숙하게 한대위의 혀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왔다. 진모리처럼 허겁지겁 달려드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조금 느린 편이었는데도 한대위는 반항하지 못하고 숨만 내쉬었다. “흐응..” 뾰족하게 세운 혀 끝으로 한대위의 혀를 희롱한 Q가 한대위의 혀 밑을 간지르자 한대위는 자신도 모르게 아주 요상한 콧소리를 내버렸다. 뒤이어 애를 태우듯 입천장의 오돌도돌한 부분을 혀로 쓸고 지나가자 저절로 허리가 튕겨올랐다. 스스로의 언행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한대위는 한번 신음이 터지자 자제할수가 없었다. “으응..!” Q를 밀어내기 위해 그위 어깨 위로 올린 손은 어느새 힘이 빠져 간신히 그의 셔츠를 잡고 매달려 있었고, 상체를 덮듯이 침대 위에 누운 한대위에 올라탄 Q는 아주 느긋하게 한대위에게 공들여 키스했다. 사실 Q는 혀로 체리꼭지 세개를 단번에 묶어낼 정도의 테크니션이었다. 하지만 그런 Q도 한대위가 이렇게까지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릴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혀를 살짝 깨물고 볼 안쪽을 부드럽게 빨아올리고 집 안 전체를 성감대로 만들어버릴 기세로 잔뜩 자극하자 한대위는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늘 인생 재미없다는 표정의 녀석이 키스 한번에 잔뜩 풀린 눈이 되어버리니 Q도 슬쩍 회가 동했다. ‘..이럴 수가.’ 진모리의 키스가 그냥 커피라면 Q는 TOP.. 한대위는 Q의 능수능란한 테크닉에 정신없이 흐물거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 진짜 키스란게 이런 건가. 영화속에서 다리가 풀리던 여자들이 격하게 공감되었다. 맨 정식으로 이런 키스를 받으면 누구라도 힘이 빠져 다리가 풀릴 것이다. 한대위는 웃기게도 자신이 침대 위에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서 있었다면 분명 꼴사납게. “야.” 순간 Q가 피식 웃으며 한대위의 볼을 툭툭 쳤다. 멍하니 Q를 올려보던 한대위가 그제서야 깜짝 놀라 아직도 꽉 쥐고 있는 Q의 셔츠에서 손을 확 떼냈다. “두번째 키스는 어땠어?” 어느새 침대 위에 앉은 Q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물었다. 한대위는 자신도 모르게 좋았.. 까지 입밖에 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Q는 그것이 한대위가 부끄러워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미라미라가 그들의 적나라한 키스씬을 찍어 한대위 눈 앞에서 활짝 펼쳤기 때문이었다. [헤헷, 잘 나왔죠!? 대위님의 눈이 몽롱하게 풀린게 평소보다 훨씬 섹시해 보이네요.] 시, 시발면 같은... 한대위는 눈을 반쯤 감은채 여유롭게 자신의 위에 올라탄 Q와 그 밑에서 정신 못 차리고 허덕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어려워 차라리 눈을 꾹 감아버렸다. Q앞에 서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학생이라도 된 모양새라 자존심이 다 상한다. 이를 으득 간 한대위의 가슴 위로 Q의 큼직한 손이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한대위는 슬쩍 자신의 교복 단추를 푸는 Q의 손을 발견하고 눈을 떠 그를 올려보았다. 어느새 자신의 위에 올라탄 그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때. 키스 다음 단계는 궁금하지 않아?” “키스 다음,” [이라면 역시 섹스죠!! 꺄아악!! 양호실 쎆쓰-!!!!!] 이 미친 요정이!! 큐가 잔뜩 치명적인 미소를 지었으나 한대위는 옆에서 매미처럼 쎆쓰쎆쓰 하고 우는 미라미라를 경악한 눈으로 쳐다보기 바빴다. 그 때문에 Q에게 제대로 반항할 틈도 없이 넥타이가 벗겨지고 셔츠의 단추가 죄다 무장해제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대위는 자신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미라미라가 일부러 저런 경박한 짓거리를 했다는 음모론을 믿게 되었다. “Q선생님, 으, 잠깐만요..!” “호오. 튕길줄도 알아? 귀엽네.” [호감도가 9 상승하였습니다.] 이 미친! 튕기는걸 싫어하든가 좋아하든가 하나만 해라! Q가 재밌다는듯 이죽대며 한대위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스윽 흩었다. 남자치곤 흰 피부에 달린 유두는 웃기게도 연한 분홍색이었다. 사실 유두 색이라는게 여성호르몬이 많을수록, 만질수록 짙어지는거라 남자가 색이 연한건 당연하긴 한데 한대위의 유두는 지나치게 색이 고왔다. 그 깜찍하고 귀여운 유두는 게다가 예민하기까지 했다. Q의 손길이 닿자마자 한대위가 흠칫 놀라며 당황하듯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내 가슴 왜이래!?’ 한대위는 어느새 자신의 상체가 공기중에 드러났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가슴이 지나치게 간지럼에 민감하다는 사실과 여자처럼 유두가 꼿꼿하게 서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겁했다. [우웅~ 플레이어의 육체는 섹스에 최적화있기 때문에 힘들지는 않을 거에요!] 그, 그걸 말이라고! Q가 엄지와 검지로 한대위의 꼭지를 가볍게 쥐어 흔들자 한대위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움찔움찔 튕겼다. “너 귀엽다?”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로 색이 고운 유두가 Q의 손가락에 빙글빙글 돌려지기도 하고 짖궂게 꼬집어지기도 했다. Q는 만져주는 대로 솔직하게 반응하는 한대위의 유두를 괴롭히는 것만으로 한대위의 얼굴을 키스 직후의 그것으로 만들었다. Q가 발딱 선 유두를 혀로 내어 햩자 한대위는 자신도 모르게 흐으으 하고 신음을 흘렸다. Q가 유두를 혀로 간지럽히고 빨아 주는데 키스의 여운으로 반쯤 흥분했던 한대위의 다리 사이가 절로 움츠러들 정도로 짜릿했다. 자신이 여자도 아닌데 가슴으로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대위가 안간힘을 쓰며 느끼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입으로는 잔뜩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흐읏.. 서, 선생님..” 헐떡이는 목소리는 평소 자신의 목소리답지 않게 물기에 젖어있었다. 이미 한대위의 양쪽 젖꼭지는 Q의 침에 잔뜩 젖어 있었고 분홍색으로 물들어 발딱 서 있었다. 쭙, 하고 Q가 한대위의 유두를 강하게 빨아올리면 한대위는 바르르 떨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들어 Q에게 가슴을 더 들이댔다. 그러면 Q는 피식 웃으며 긴장한 한대위의 등줄기를 손가락으로 주욱 그려내렸는데 그것은 본능과도 같은 게임의 시스템이라 한대위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라고 일단 한대위는 생각했다. 한대위는 고작 Q의 키스와 애, 애무.. 그 단어를 떠올린 한대위는 잠시 죽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Q가 가슴을 빨아주는 것 만으로 사정감이 강하게 올 정도로 느껴버린 자신의 몸뚱이를 저주했다. 필사적으로 다리를 꼬았지만 점점 흥분이 극에 다다르고 있었다. “흐음. 가슴 빨아준 것만으로 이렇게 흥분한거냐?” “흐읏..!” 순간 Q의 손이 예고없이 한대위의 다리 사이를 텁 눌렀다. 그 바람에 찔끔 속옷에 약간 정액을 토해낸 한대위의 눈꼬리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쉿. 울지 말고. 못 참겠으니까.” 울지 말라면 더 울고싶어지는게 사람의 심리였다. 한대위는 이를 악물고 사정을 참기 위해 손등을 깨물었으나, 유두를 아프게 깨물며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기둥을 강하게 문지르는 Q의 손에 사정해버리고 말았다. 안간힘을 써 참고 또 참다가 사정해버려서인지 한대위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고 생리적인 눈물 한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베개로 또르르 흘렀다. ‘쌌어..!’ 그것도 Q손에! 가슴 빨리면서..! 한대위의 남자로써의 자존심 비슷한 것이 우르르 무너져내렸다. 억울한 건 그게 너무 좋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야한 비디오나 잡지같은걸 보면서 자위한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좋지는 않았다. 원래 남이 해주면 이렇게 좋은건가 싶었다. 한대위가 자괴감에 입을 꾹 다물고 있자 Q는 보란 듯 한대위의 정액에 젖은 손을 꺼내 휴지로 손을 닦았다. “바지 벗지?” “네!? 왜, ㅇ왜요!?” “속옷은 어쩔수 없지만 바지까지 젖게할 수는 없잖아.” Q에게서 휴지를 받아든 한대위는 주춤주춤 다리 사이를 닦아냈다. 뒷처리를 남이 보는 앞에서 하는건 처음이라 너무 부끄럽고 민망했는데 Q는 자리를 비켜달라는 소리를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어차피 내가 보고 주무른 곳인데 새삼 부끄러워하긴. 너 지금 내외하냐?” “....아니에요..” 도저히 말빨로는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한대위는 바지를 벗고 푹 젖어버린 속옷을 얼른 벗어냈다. 신성한 배움의 터에서 노팬티라니 너무 어이없고 억울했다.. 바지를 입고 셔츠의 단추를 마저 잠그는데 발딱 일어선 유두를 어찌나 세게 깨물어 댔는지 셔츠에 스치자 따끔하게 아팠다. 한대위가 곤란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보자 Q가 서랍을 뒤져 정사각형 모양의 밴드를 꺼내주었는데, 한대위는 크게 수치스러워하며 그 밴드를 유두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셔츠에 유두가 스쳐서 조금씩 느껴버리는 것보단 나았다. “왜 그리 한숨이야?” “부끄러워서요..” “고민은 사라진 모양이네.” 개운한 얼굴로 그리 말하는 Q의 얼굴을 본 한대위는 이독제독이라는 속담을 떠올렸다. 고민을 피하기 위해 더 큰 고민을 얻는다는게 해결책이라는건가 이 사람은.. 어쩔 땐 어른 같으면서도 어쩔땐 한없이 유치한 사람이었다. 젖은 속옷과 휴지를 양호실 휴지통에 통째로 버려버린 한대위는 수업시간이 끝났다는 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후다닥 양호실을 탈출하려다가 그대로 Q위 손에 뒷덜미가 잡혔다. “어딜 가려고.” 나직하게 한대위의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한대위는 등에 소름이 돋는다는 것이 뭔지 사전적으로 확실히 깨달았다. 정말 드물게도 한대위는 말을 더듬거리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수,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요..!” 평소 행실이 불량하기로 유명한 한대위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Q는 더 괴롭히지 않고 한대위를 놔주기로 했다. 어차피 어디 갈 일도 없겠다, 이렇게 감도 좋은 몸을 하고 얌전히 있을 수 있나 싶은건 둘째치고 말이다. Q는 팔과 벽 사이에 한대위를 가두고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수업 몇 교시냐.” “어.. 7교시요.” “수업 마치면 양호실로 와. 나머지 공부 시켜줄 테니까.” “.....” Q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달리 한대위의 얼굴은 본인이 감내할 수 없는 커다란 심적 부담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돌아버리겠다.. 미라미라는 새로운 이벤트 예감이에요! 라고 포르르 날아다니기 바빴지만 Q의 목소리를 들은 한대위는 발밑에 지옥행 특급게이트라도 열린 것처럼 절망스러워졌다. “알바가야 되서 그건 좀..” “그래? 그럼 알바 끝나고 데리러 갈까? 몇시에 끝나는데?” 저기요. 이러시면 굉장히 부담스럽거든요. 한대위는 은근하게 더 얼굴을 가까이하는 Q를 피해 문을 열고 후다닥 달려나갔다. Q는 이번에는 한대위를 잡지 않고 양호실 문에 기대 배부르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