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으음?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갸웃 기울였다. 연습 중 휴대전화를 많이 만지는 편이라 물으면 보쿠토의 대답은 아니오, 다. 아예 탈의실 캐비닛에 휴대전화까지 처박아놓는 편이고 그건 쿠로오도 마찬가지다. 아니, 분명 마찬가지인 줄 알았는데..
“주장, 이번엔 우리 팀이 스코어야.”
요즘 휴대전화 자주 만지네?
네 학교, 아니 다섯학교가 합세한 이번 합동연습은 네 팀이 게임을 할 동안 다른 한 학교는 그 학교들의 스코어나 주변정리를 돕는 식이다. 보쿠토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팔 위에 입고 있던 조끼를 벗었다.
“카라스노는 또 페널티~?”
“상대할땐 묘하게 까다롭지만 결정적인 뭔가는 없는 느낌이지?”
코트 위를 양보하고 수분보충을 하면서 코트의 네트를 점검한다. 패배한 팀이 플라잉 코트로 체육관을 반 정도 돌았을 때 쯤이었다. 보쿠토는 옆에서 들려오는 부원들의 목소리를 다른 쪽 귓구멍으로 질질 흘리면서 쿠로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쿠로오가 재미난 농담을 듣기라도 한 건지 입을 벌리고 고개를 젖혀 크게 웃고 있었다.
쿠로오 변했어. 웃는 모습도, 뭔가 예전하고 달라.
보쿠토는 제 옆에서 카라스노의 벌칙을 구경하던 아카아시의 팔을 툭 쳤다. 저기 있잖아.
“요새 쿠로오 뭔가 변하지 않았어?”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엑, 그래??”
그렇게 크게 놀라놓고서는,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데요? 라고 묻는 아카아시의 물음에는 그냥.. 이것저것 바뀌었잖아? 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소리밖엔 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자주 만지고, 자주 웃고, 그리고 웃는 모습이 예전하고 묘하게 달라졌는데. 그걸 또 어떻게 달라졌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고 말이지.
*
모처럼 연습이 없는 주말에 보쿠토는 꽤 이른 시각부터 집을 나섰다. 집에서 삼십분 거리, 도쿄역에 가까운 커다란 메가플렉스 쇼핑몰이 새로 생겼는데 스포츠웨어 가게들이 아울렛처럼 크게 입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덕이었다. 부원 몇몇과 함께 새 배구화를 보러 갈 생각에 잔뜩 들뜬 보쿠토는 문득 가보고 괜찮으면 쿠로오와 다시 오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런데 왜 오늘이 아니라 다음이지?
반사적으로 떠오른 질문에는 곧 자연스레 그 대답이 뒤따랐다.
그야, 내가 리드하는 편이 멋지니까?
어째서 쿠로오에게 멋지게 보여야 하는지- 라던가, 그런 의문은 채 머릿속에 떠오를 새가 없었다. 거기 괜찮은 식당도 있으려나? 어느새 쿠로오와 거기 가서 밥도 먹고 쇼핑도 하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만 몽실몽실 떠올랐다.
약속장소에 제일 먼저 도착해 있던 것은 아카아시였다. 코노하와 와시오는 약속시간에 조금 늦었고 대신 그 둘이 밥을 사기로 했다. 어차피 점심시간이 되려면 두시간도 더 남았고, 신발을 둘러볼 시간은 충분했기 때문에 보쿠토는 제법 느긋한 걸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식스 여기 들어가볼까?”
“20%할인중이래. 가보자!”
어차피 최신 디자인은 할인품목 제외 아닌가? 보쿠토는 현재 자신의 배구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
들어가보지 뭐. 가게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보쿠토가 입구에 커다랗게 걸린 거울에 시선을 슥 옮긴 순간이었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에서 홱 하고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급히 뒤를 돌아보는 보쿠토의 행동에 아카아시가 저도 모르게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깜짝 놀랐잖아요. 뭡니까?”
“저거 쿠로오 아냐?”
“예?”
“맞는 것 같아.”
안 들어오고 뭐 하냐며 가게 안에서 저를 돌아보는 코노하에게 뭐라 얘기할 틈도 없이 보쿠토는 쌩하니 달려나갔다. 미처 아카아시가 아닌 것 같은데요! 라던가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라고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운동화, 보고 계세요.”
저 녀석 어디 가냐는 표정으로 보쿠토의 등을 쳐다보던 코노하에게 대충 그렇게 말하고는 아카아시는 벌써 저 멀리 뛰쳐나간 보쿠토의 뒤를 따랐다. 그 걸음걸이마다 진한 한숨이 묻어나오는 것만 같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쿠토의 입가엔 히죽 웃음이 걸렸다. 거 봐! 역시 쿠로오 맞잖아?
저 비죽비죽한 머리도 그렇고, 뭣보다 내가 쿠로오를 못 알아볼 리 없지!
쿠로오는 기둥에 등을 기대어 서 있었는데, 하필 보쿠토에게 등을 보인 위치였다. 일부러 뛰던 발걸음을 멈추고 흠흠 숨을 가다듬은 보쿠토는 이내 여! 하고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쿠로오!”
너는 웃을까? 아니면 놀랄까? 어떻게 주말까지 얼굴을 보냐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을까? 곧 볼 표정인데 그 얼굴을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것만으로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걸렸다.
제 목소리를 들은 건지 어깨가 움찔 하며 쿠로오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사실 그리 천천히 돌린건 아닌 것 같은데. 분명 쿠로오는 평범하게 뒤를 돌아보았을 뿐인데.
마치 네트 너머로 스파이크의 궤적을 쫓을 때처럼 쿠로오의 머리카락 하나 하나가 선명하게 박혀들어왔다.
늘 반쯤 내리깐 채였던 눈꺼풀이 곱게도 접혔다. 블로킹에 성공한 뒤에 좋다고 웃던 그 입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입술이 꽃잎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제 눈 깜빡이는 것도 잊고 보쿠토는 멍하니 그런 쿠로오의 얼굴에 넋을 빼앗겼다.
와.
이건.
쿠로오는 이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키세?”
처음 듣는 이름과 함께 뒤를 돌아본 쿠로오의 표정이 금새 당혹감에 물들었다. 마치 방금 전의 웃음이 착각인것만 같아서 보쿠토는 손등으로 눈꺼풀을 비볐다.
어라. 내가 뭔가 잘못 봤나. 이거 아무리 봐도 평소의 쿠로오인데.
“보쿠토? 뭐야 너였냐. 여긴 왠일이래?”
“아, 부원들하고 신발보러 왔는데 네가 있길래. 혼자야?”
“여길 혼자 왔겠냐~”
“쿠로씨 지금 훌륭하게 혼자 아닙니까? 그렇게 부끄러워 할 것 없는데~”
“진짜야. 아쉽지만 선약이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 올린 쿠로오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뭐야. 내가 반갑지도 않은가? 괜히 툴툴대고 싶은 마음에 입술을 비죽 내미는데 쿠로오의 뒷통수 옆으로 왠 처음 보는 남자의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쿠로오와 마주보고 있던 탓에 그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보쿠토는 스냅백에 선글라스까지 챙겨쓴 그 남자가 렌즈 너머로 자신에게 찡긋 윙크를 하는 것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곧 그 표정은 남자가 두 손으로 쿠로오의 눈을 가리고 그 귓가에 속삭이는 걸 본 순간 딱딱하게 굳고 말았지만.
“누구게요?”
“풋, 재밌습니까? 키세 군?”
쿠로오는 그 장난이 익숙한지 손을 올려 눈을 가린 손을 떼려고 하지도 않고 피식 웃었다.
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입매와 턱선이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수려한 남자였다. 모자 아래로 비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은 심지어 반짝이는 금발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키도 쿠로오보다 약간 더 크고... 무, 물론 나도 아직 성장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남자는 쿠로오의 귓가에 키득거린 웃음을 남기곤 다시 보쿠토와 눈을 마주쳐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안녕하심까, 키세 료타라고 함다. 쿠로상 친구?”
“어어. 나는 보쿠토 코타로. 쿠로오, 여기는..”
“쿠로상 친구면 3학년이시겠네여! 혹시 배구 하심까?”
“응. 맞는데-”
“내가 말했잖아. 늘 연습 같이한다는 타교의.”
“아아! 그 에이스 스파이커! 얘기 많이 들었슴다!”
쿠로오가 내 얘기를 했다고? 괜히 그 한마디에 보쿠토의 입가가 헤실 풀어졌다.
남자는 꽤 호들갑스럽게 보쿠토와 악수까지 끝내고는 쿠로오의 어깨에 제 팔을 걸쳤다. 어깨동무라도 하는 과장된 동작에 쿠로오가 아 무겁다니까, 짜증을 내면서도 그의 팔을 치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뭐, 그럼 다음 연습때 보자. 먼저 간다.”
“어, 응? 갈꺼야?”
“너도 일행 있잖아?”
나 그 일행 버리고 너한테 온건데. 보쿠토가 망연한 표정으로 가볍게 말하는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그, 그런데 누구야? 그.. 키세라고 했던가? 친구?”
친구냐는 물음에 남자의 입가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빡칠 정도로 잘생겨서 괜히 속이 안 좋았다. 뒤로 타박, 하고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보쿠토는 돌아보지 않고서도 그게 아카아시의 발소리란걸 알아챘다.
“친한 후배야. 어라? 아카아시도 있었네.”
“안녕하세요.”
“쿠로상, 지금 안 가면 늦겠슴다.”
“아. 이런. 벌써 시간이.. 그럼 너희도 재밌게 놀아. 간다?”
남자의 재촉에 쿠로오는 휴대폰 액정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봐요. 가볍게 대답하는 아카아시와 달리 보쿠토는 조금 넋을 뺀 것처럼 손을 마주 흔들었다.
가죠. 아카아시가 가볍게 돌아섰지만 보쿠토는 그 자리에 누군가 시멘트를 부어두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쿠로오의 어깨를 두르던 남자는 그 둘이 손가락만하게 작아졌을 때 어깨를 풀고 쿠로오의 손을 잡았다. 어깨를 닿을 것처럼 가까이 한 채, 쿠로오는 얌전히 그의 손에 제 손을 마주잡고 걸었다. 보쿠토는 쿠로오의 손을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배구연습에 거칠어진 손등과 길쭉한 손가락. 손톱은 늘 짧고 손등엔 보기 좋게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저도 쿠로오의 손을 저것처럼 마주잡아본 적은 없었다.
“안 갑니까? 선배들이 기다려요.”
쿠로오가 변한 건 저 사람 때문일까. 그 문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선득해졌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어쩐지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거려서, 그리고 방금 전 본 쿠로오의 웃는 모습이 어째선지 지워지질 않아서.
보쿠토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더랜다.
평소랑 똑같이 웃는 쿠로오인데 보쿠토만 그게 변했다고 느꼈으면 그건 쿠로오가 아니라 보쿠토가 변한 건데..
야쿠의 능력으로 보쿠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옴과 동시에 쿠로오는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엎드렸다. 곧 등 뒤로 화끈한 열기가 폭발했다.
“크으.. 화끈하구만.”
“아야야, 수류탄을 터뜨릴꺼면 미리 말을 하라구요!”
땅 아래에서 뒤따라 솟구친 야쿠가 투덜거렸다. 켄마와는 다른 타입의 이동능력자였다. 이동거리가 길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장애물을 무시하는 그의 능력은 네코마의 특급 암살대원답게 은밀했다.
쿠로오는 미리 말할 여유가 없었다는 대답 대신 천으로 자신의 팔을 동여맸다.
“그런데 저거, 죽지는 않겠죠?”
“설마.”
이어커프 안에서 기대하던 기계음은 들리지 않았다. 1K를 버는건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설마 기절조차 안 할 줄이야.
그럼 저걸 잡으려면 USAS-12라도 갈겨야 하나. 아니면 박격포? 아쉽게도 현재 네코마 부대에는 저걸 무력화시킬 정도로 공격적인 능력자가 없었다. 쿠로오는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리에프에게 1년, 아니 반년만 더 시간이 있었어도..
쿠로오가 다친 팔을 천천히 쥐었다 펴자 야쿠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곧 시야가 어두워지며 몸이 둥실 뜨는 감각과 함께 근처의 작은 바위로 이동했다. 수류탄의 연기가 여기까지 맡아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지만 더 멀리 갈수 없었던 이유는 은색의 서류가방을 껴안고 있던 리에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장! 야쿠 선배!”
“조용. 곧 여기로 후쿠로 부대들이 몰려올꺼야. 무사히 도망치는 것만 생각해.”
방금 전 창백했던 얼굴과 달리 멀쩡하게 걷고 있지만 더이상의 출력은 힘들 것이다. 쿠로오는 멀쩡한 팔로 리에프에게서 가방을 건네받았다.
[남은 인원은?]
[대략 열셋입니다.]
쿠로오는 통신기로 들려오는 카이의 목소리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전력 차이가 너무 나잖아.
“일단 무사히 도망쳐 베이스캠프로 모이는 것만 생각하자고?”
[야쿠, 수고했다.]
[대장, 몸은 괜찮은가요?]
그때였다. 고오오- 하고 맹수의 으르렁거림과도 닮은 낮은 주파수의 울림이 숲을 울렸다. 뒷목 서늘해지는 그 감각에 쿠로오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뒤로 돌려 위를 쳐다보았다. 왜 위인지는 모르겠는데, 그저 반사적으로 무언가에 이끌리듯 쳐다본 하늘은 수류탄 때문에 거뭇하게 올라오는 연기로 더럽혀져 있었고-
“미친..”
보쿠토 코타로가 자신을 사냥하기 위해 날고 있었다.
*
수류탄을 맨몸으로 받아낸 보쿠토의 입에서 쿨럭, 하고 검은 연기가 튀어올랐다.
공기를 자글자글 태우는 열기에 보쿠토의 방어복이 군데군데 부서져 흩어졌다.
코노하의 목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제 목에서 흘러나오는 분노를 닮은 으르렁거림이 자신의 것 같지 않아 입을 다물었지만 곧 그 판단을 내릴 이성이 허물어내렸다. 보쿠토는 다시 이빨을 드러냈다. 금색 눈동자가 그의 두 손을 내려보았다.
“잡았는데에-”
내 양 손에 그 팔을 분명 잡았는데, 다 잡은 사냥감이었는데..
엄마 젖이라도 더 빨고 와, 체리보이?
그렇게 웃으며 엄지를 바닥으로 척 내린 쿠로오의 모습이 보쿠토의 머릿속을 채웠다. 빙글빙글 웃는 모습 진짜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보쿠토의 숨이 거칠어진다. 그의 눈동자의 홍채가 일렁이더니 동공이 세로꼴로 열렸다.
짜증나. 짜증나. 짜증난다고-!!!!!!
“쿠로오 테츠로오오-!!!!!!!!!!!!!”
둥글게 굽힌 등에서 피륙이 찢기는 소리가 나더니 한 쌍의 날개가 솟구쳤다. 갈색과 회색이 섞인 깃털이 달린 날개가 홰를 치자 겉에 묻었던 핏물이 튀었다.
“미친! 보쿠토 대장!! 침착해요!!!”
[아카아시 부대장! 대장이..!!]
[훈련을 중지해야 합니다!!]
쿠로오 테츠로. 어디야. 어디 있어.
보쿠토의 발이 땅을 박차고 그대로 날아올랐다. 그 등에 솟아난 날개는 단단하고 날카로워 공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그저 위로 솟구쳐 올라 아래를 샅샅히 흩었다. 킁, 하고 코를 움직였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나무 타는 냄새, 그리고 그 사이로 섞인 그 고양이의 냄새.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움직인 보쿠토의 눈에 마침내 은색의 무언가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그, 은색 케이스.
공중에서 날개를 움직여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오 테츠로와 눈이 마주친다. 그 여느때보다 광기에 젖은 보쿠토는 쿠로오의 눈에 얼핏 떠오른 공포를 날카롭게 알아차렸다. 반사적으로 웃는다.
[..입니다! 훈련이 중지래요!]
[-네코마 부대 및 후쿠로다니 부대는 지금 즉시 훈련을 종료하고 훈련소로 집합해주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네코마 부대 및-]
쿠로오는 하늘 위로 고개를 들어올린 채로 제 귀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통신기를 빼내 부츠로 밟아 부쉈다. 방해된다.
야쿠의 품에 서류가방을 밀어놓고 장갑을 벗었다.
“야쿠, 리에프를 데리고 훈련소로 복귀해.”
“뭐? 대장, 설마 저걸 상대하게요?”
“쿠로오 대장!!”
“지금 등을 보이고 도망치면 진짜 죽어.”
보쿠토의 등 뒤로 비치는 햇살때문에 눈이 시려 뜨고 있기 어려웠지만 보쿠토가 지금 제게 덤비지 않는 이유가 아직 눈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부러져 부어오른 팔이 욱신거려 해피르핀 생각이 간절해졌다. 젠장, 하나쯤 삥땅쳐둘껄.
그 순간, 위로 살짝 상승한 보쿠토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아래로 활강해왔다.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똑바로 이쪽을 향하는 움직임에 쿠로오가 멀쩡한 왼팔을 들어올리고, 리에프가 그런 쿠로오의 앞을 막아서듯 나서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대장, 피해여!!”
쿠웅!!
보쿠토의 신형이 나무 아래로 쳐박혔다. 수령이 백년은 될법한 나무가 기울어지고 가지가 우지끈 꺾였다. 리에프의 코에서 코피가 주륵 흘렀는데 리에프는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목에 핏줄을 세웠다. 땅이 내려앉았지만 보쿠토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처럼 몸을 일으킨다. 날개가 푸득, 가볍게 홰를 쳤다. 고작 머리카락만이 아래로 가라앉아 그가 리에프의 중압 안에 갖혀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탁한 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금색 홍채는 평소와 달랐다. 가느스름하게 좁혀진 그 눈꺼풀이 크게 치켜떠진 것과 동시에 쿠로오는 제 방어막을 최대로 전개했다.
희뿌옇게 변한 배리어가 쿠로오를 중심으로 둥글게 피어올랐다.
쩌엉-!
사람의 육체에서 나올 리 없는 충격음이 쿠로오의 손바닥 위에서 쨍하니 울려퍼졌다.
“가!!!”
보쿠토의 눈동자는 자신을 거슬리게 만든 게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손등으로 거칠게 코피를 문질러 닦은 리에프를 향해 보쿠토가 다시 한번 팔을- 아니 손톱을 휘둘렀다.
야쿠가 리에프의 뒷덜미를 잡고 땅으로 쑥 꺼져내린 공간이 날카롭게 찢겼다.
“어라라. 신체 강화가 아니었던 거야..?”
“.......”
“오싹오싹한데.”
쿠로오는 떨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치켜올렸다.
신체변형 사이커였나. 어쩐지 단순 신체강화 능력자 치고 너무 강하다 했어.
아직 능력자들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았을 무렵 고대 이집트와 남미에서는 신체변형의 능력자들을 신이라고 불렀다. 그 정도로 강력한 사이커다. 쿠로오는 SPCT가 어째서 제 능력도 컨트롤하지 못하는 능력자를 기어이 부대의 대장에까지 앉힌건지 알만하다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쿠로오 테츠로..”
“오빠 불렀냐?”
보쿠토의 발이 땅을 파헤치듯 박차고 손을 휘둘렀다. 쩌엉! 순도 높은 광석을 내리칠때처럼 맑은 소리가 났다. 쿠로오의 워커가 흙바닥에 밀려 발자욱을 길게 남기고 뒤로 밀렸다. 폐가 짜부러지는 느낌에 쿠로오의 잇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쿠로오오!!!!”
그 순간 위로 솟구친 보쿠토가 그대로 신형을 반전해 아래로 내리꽂혔다. 쾅! 둔중한 해머로 땅을 내려친듯한 충격파에 옆으로 데굴데굴 구른 쿠로오의 주변으로 배리어가 깜박거렸다.
채 중심을 잡기도 전에 흙먼지를 가르고 보쿠토의 날개가 쿠로오의 신형을 그대로 갈겼다. 배리어 채로 뒤로 날아간 쿠로오가 나무에 등을 부딪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제기랄!”
보쿠토의 목울음에 쿠로오는 손등 위로 진공을 두어개 더 피어올렸다. 그러나 지금의 보쿠토는 그 배리어를 마치 진짜 비눗방울이라도 된 것처럼 취급하며 그대로 몸으로 터뜨려 돌진해왔다.
*
쿠로오 테츠로가 처음 자신의 능력을 각성한 것은 그가 딱 열살이 되던 해였다. 그의 소꿉친구였던 켄마는 그보다 한달 늦게 자신의 능력을 깨달았다.
“내 능력, 멋 없어. 켄마 넌 좋겠다.”
“별로.. 난 잘 모르겠는걸.”
“멋지잖아! 슈슉! 슈슉 하고!”
켄마의 동그란 눈이 비스듬히 쿠로오를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깜박여 말을 고르듯 눈꺼풀을 움직였다.
“나는 도망치기밖엔 할 수 없어.”
“어...”
“남들을 지키는 쿠로오의 능력 쪽이 더 멋져.”
처음엔 손바닥 위에 비누방울처럼 작게 피어오른 막이었다. 그것은 배리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여리고 약해서, 작은 충격에도 금새 소리없이 부서졌다.
‘연습하면, 어른이 될 때쯤엔 쓸만한 능력이 될꺼야.’
어느덧 그 작은 면적의 막을 몸 전체에 두를 수 있게 되었다. 쿠로오의 키가 자랄수록 그 막은 점점 더 견고해졌다. 투명한 비눗방울이라고 놀림받던 쿠로오의 배리어는 이제 가볍게 탄환을 막았다. 쿠로오가 제 몸이 아닌 다른 곳에 배리어를 생성할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SPCT에 들어와 2년째가 되던 해의 여름이었다.
일반 군인이라면 소년병이었을 나이였지만 여기선 SPCT의 어엿한 정식 대원이었다.
쿠로오가 그 배리어를 움직이는 법을 터득했을 때, 네코마 부대에 발령받았다. 켄마가 말한대로 쿠로오의 능력은 지킬 수 있는 능력이었다.
부대원의 몸뚱이를, 자신의 생명을, 그리고 알량한 자신의 양심을.
내 능력은 남을 해치기 위한 게 아니니까. 그저 우리 부대를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라이트 키퍼로써 전장의 후방을 지키다가 처음 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지키기 위한 배리어로 공격기를 개발했을 때 그 사실을 들은 켄마의 눈동자가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게 있어 다행이다. 왜냐하면.. 저 건방진 부엉이 새끼를 때려줄 방법이 이것뿐이니까!
*
“무지하게 단단한 몸뚱이네!!”
쿠로오는 진공이 보쿠토에게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략을 바꿨다.
안개처럼 뿌연 배리어의 면적이 줄었다. 쿠로오의 손바닥과 상체만을 가릴 정도로 압축된 배리어는 견고한 방패처럼 보쿠토의 발톱을 막았다.
주먹만한, 혹은 사람 머리통만한 진공이 보쿠토의 발밑에서 폭발해 도움닫기하는 움직임을 묶었다. 나무를 부숴 보쿠토의 시야를 가렸다.
나무 뒤로 뛰어 보쿠토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어김없이 나무가 잘려나갔다. 장애물의 의미가 없다. 나무 파편을 막을 여유가 없어 제 얼굴로 쏟아져내린 파편에 눈을 질끈 감고는 왼팔을 쭉 뻗었다. 텅!
부연 안개처럼 진해진 배리어 너머로 보쿠토의 얼굴이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헉, 하고 쿠로오의 입에서 단내가 났다. 이렇게 오랫동안 뛰어본 게 얼마만이더라..?
그때 아래에서 위로 후려치는 날개를 미쳐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나뒹굴었다. 쿠로오가 반사적으로 두른 배리어가 두어차례 깨져나갔다. 그새 바닥에 박힌 돌에 얼굴을 부딪혀 관자놀이가 피투성이가 되었다.
“위험해, 진짜..”
웅크리고 버티다 보면 반격의 기회는 온다.
늘 그렇게 말했지만 이렇게 무력하게 웅크리기만 한 적은 없었는데. 쿠로오는 보쿠토에게 잡혀 으스러진 오른팔이 아닌 그저 막아내기만 했을 왼팔에도 시큼한 통증이 내달리는 감각에 흐릿하게 웃었다.
진짜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쿠로오 대장, 물러나세요!!!”
그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쿠로오는 보쿠토의 손에 그대로 제 목줄기를 내어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퍼뜩 옆으로 몸을 굴린 쿠로오의 뒤쪽으로 나무는 뿌리뽑히고 바위는 부서졌다. 제가 만들어낸 진공이 터지는 소리와 보쿠토가 부수는 숲이 우는 소리가 고막을 겅겅 울려 이제 작은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위에서 아래로, 쿠로오를 반쪽내듯 흉포하게 할퀴어진 손톱을 배리어로 간신히 막아내고 뒤로 튕겨나가듯 주저앉았다. 곧장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쿠로오의 몸은 무력하게 다시 주저앉았다.
까아아아-!!!
인간의 감청영역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초음파가 보쿠토의 등을 때렸다. 처음으로 보쿠토가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배리어를 발동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쿠로오 쪽의 데미지가 훨씬 컸을 것이다.
곧이어 빛의 탄환과 총알이 보쿠토의 등에 쏘아졌다. 보쿠토는 귀찮은듯 날갯바람으로 총알을 튕겨내고 목구멍을 울려 언짢은 심기를 드러냈다.
숲 안쪽에서 중무장을 한 대원들이 총구를 보쿠토에게 겨누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실탄이 아닌 마취제였지만, 탄환과 나이프로도 뚫을 수 없는 보쿠토의 질긴 피부를 고작 주사바늘로 뚫을 수는 없었다.
쿠로오는 주저앉은 제 다리 사이로 푹 박힌 주사기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배리어를 유지할 기력도 없다. 이대로 보쿠토가 다시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면.. 죽나?
그때 자신의 사냥을 방해받는다 생각한건지 보쿠토가 날개를 위협하듯 크게 펼쳤다. 그 그림자에 완전히 먹혀든 것처럼 쿠로오는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주위를 완전히 이쪽으로 돌려!”
“진짜, 손이 많이 가는 대장이라니까!!”
지끈지끈 골을 울리는 통증이 숫제 머리를 빠개어버릴 것처럼 골 안을 두들겼다.
차라리 죽는게 나을 정도의 통증이다. 이대로 죽으면 산재처리는 제대로 되려나? 쿠로오는 작년 이맘때쯤 쓰고 갱신하지 않은 자신의 유언장 내용을 곱씹으며 두 팔을 땅 위로 무기력하게 떨어뜨렸다.
“쿠로오.”
그때 분명 아무더 없던 등 뒤에서 익숙한 손이 쿠로오의 어깨를 살짝 감싸안았다. 피가 굳고 거센 압력에 짓눌려 멍해진 볼 위로 머리카락이 살랑 닿았다.
“수고했어. 이제 쉬어.”
켄마.
쿠로오의 눈동자 안으로 울컥 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깜빡 눈을 뜨자 보쿠토의 날개가 일으켜낸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처음 본 순간인 것처럼 쿠로오의 눈동자와 보쿠토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리고 곧 형형한 눈빛이 쿠로오의 목줄기를 뜯어낼 것처럼 보쿠토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쿠로오오-!!!!!!!”
그리고 보쿠토의 손톱이 켄마와 쿠로오에게 닿기 전에 공간이 잘렸다. 텅 비어버린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보쿠토의 등 뒤로 그물이 하늘을 뒤엎었다.
*
몽롱한 기분으로 쿠로오는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해피르핀을 투여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금새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두통 하나 없이 눈을 뜰 수 있을리 없다.
눈꺼풀 위로 눈곱이 잔뜩 낀 것처럼 시야가 답답했다. 아아. 시야가 답답한 이유는 따로 있었나? 쿠로오는 멍한 머리로 자신의 왼쪽 눈 위로 덮인 안대를 깨닫고는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아니, 들어올리려고 했다.
“.......”
양 팔 깁스... 씨발.. 누워있다가도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아 쿠로오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치유계 사이커가 상주하는 곳이니만큼 깁스를 할 기간이 길지는 않을 테지만, 어깨에서 손가락 끝까지 석고로 사람레고를 만들어 둔 꼴을 보니 억울함이 솟구쳤다.
“그 미친 부엉이 새끼 때문에..”
“멀쩡한가보네.”
드륵, 하고 문이 열리며 켄마가 성큼 발을 내딛었다. 왔어? 멀쩡히 대답했지만 쿠로오의 눈매는 약에 취한듯 흐리멍텅해서, 켄마는 더 묻지 않고 침대 옆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바이탈 사인도 뇌파도 심전도도 모두 안정적이었다.
“쿠로오.”
낮게 깔린 켄마의 목소리에 쿠로오가 시선을 돌려 응? 하고 웃었다. 그 입매도 평소와 달리 느슨했다. 웃는 게 아니라 그저 입을 걸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켄마가 무어라 말하기 위해 길게 쿠로오의 이름을 베어문 뒤, 켄마가 들어왔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저와 똑같이 의무실 환자복은 입은 보쿠토가 깁스 하나 하지 않은 쾌적한 몸뚱아리로 쿠로오의 안정을 와장장 깨부쉈다.
“여어! 쿠로오!”
“......”
살짝 고개숙인 켄마가 짜증난다는 눈빛으로 보쿠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번 싸악 흩었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도 보쿠토는 개의치 않고 쿠로오의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와 섰다.
“뭐야! 아직 누워있는거냐!”
“이건 해피씨로도 구원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인데.. 켄마. 어떻게 생각해애? 응?”
“너 대단하더라! 지금까지 너처럼 오래 버틴 사람이 없었다고? 간만에 속 시원히 싸워서,”
“쿠로오. 치워줄까?”
“응.”
켄마가 보쿠토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자 순식간에 둘의 신형이 사라졌다.
곧 다시 쿠로오의 침대 옆으로 가볍게 나타난 켄마가 쿠로오의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주자, 병원 밖에서 쿠로오!! 하고 금수 짖는 소리와 함께 콰장창 하고 창문이나 출입구 비슷한 것이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쿠로오의 눈꺼풀이 경련하자 켄마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미안. 섬 밖으로는 갖다 둘 수가 없어서.”
“이거 설마 신종 이지메일까나..”
약에 취한 쿠로오의 말꼬리가 제멋대로 늘어나더니 이내 쿠로오의 눈이 까무룩 감겼다.
곧 쿠로오의 병실로 다시 들이닥친 보쿠토는 쿠로오가 다시 잠들었으며, 그가 몇주간 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라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다.
“저 녀석 회복이 너무 느린 거 아냐!?”
“쿠로오씨는 인간 평균 이상입니다.”
그는 훈련기간이 끝나기 전에 쿠로오와 친분을 다지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린 것처럼 의무실의 의사와 치료계 사이커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사이커 본인의 자체 면역력때문에 사이킥 능력으로 완벽하게 치료할 수 없는 부상이란게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설명해도 보쿠토는 고집불통이었다.
그의 기분이 지나치게 하이해진 것은 폭주 후 늘 몸을 짓누르는 앙금같은 잔열 대신 모든 걸 죄다 시원하게 뿜어낸 듯한 컨디션 때문이었다. 자신을 막아서는 자가 있다는 것이, 아무리 공격해도 쓰러지지 않는 적이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짜릿할 줄이야!
“그래서 외간남자의 방에 제멋대로 쳐들어오고 말이지, 보쿠토 대장?”
“하하, 대장은 무슨! 그냥 보쿠토라고 불러!”
일정과 달리 길어진 훕련일정-이라고 쓰고 쿠로오의 회복기간이라고 읽는다.- 마지막 날, 쿠로오는 허락도 동의도 없이 제멋대로 제 방 문을 열고 들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보쿠토를 흰눈으로 쳐다보았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여긴 완벽한 내 사적인 공간일 텐데?”
“하하, 뭐 그런 걸 다 신경쓰고 그래! 우리 사이에!”
무슨 사이..? 쿠로오는 후쿠로다니의 대장이 저와 나를 한데 엮어 우리라고 부르는 이 상황이 못내 어색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우리 피터지게 싸우고 상호간에 나란히 입원한 사이 아닙니까? 물론 쿠로오 본인이 받은 데미지가 훨씬 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보쿠토가 입원한 것은 고작 폭주 후유증 검사와 혈중 마취제 잔여량검사 때문이었고 자신은 양 팔이 수수깡처럼 또각 부러지고 갈비뼈와 쇄골뼈에 금이 가고 옆구리에 내출혈이 생기고 왼눈 흰자 실핏줄이 터진... 아 제기랄. 생각하다 보니 점점 화가 난다. 참고로 갈비는 아직도 욱씬거린다.
쿠로오는 간편히 꾸린 자신의 짐가방을 한번 책상 위에 쾅, 올리고 생긋 웃었다.
큰 소리에 보쿠토의 고개가 쿠로오를 향하더니 그 미소에 바보처럼 벙긋 따라 웃었다.
“그, 네 웃음 말이야.”
“흐응?”
보쿠토 본인이 열받는 웃음이라 친히 평가했던 그 눈웃음질이었다. 쿠로오는 지금와서 보쿠토가 새삼 다시 열받아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 볼땐 엄청나게 짜증났는데-”
“오야, 지금은요?”
보쿠토의 눈이 쿠로오가 한번도 본적 없는 모양새로 반짝였다. 새삼 그 큰 눈동자가 빛을 받으면 얼마나 밝게 빛나는지 깨닫게 된 때이기도 했다.
“무지 이쁘네.”
“..하?”
뇌에 부끄러움이란 걸 느끼는 기관이 괴사하기라도 한 건가. 쿠로오는 겁도 없이 눈을 마주치며 도발하던 제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급히 눈을 피했다.
지금 저 부엉이 대장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해석좀 해 줄 사람? 잠시 시선을 피했던 쿠로오가 정면으로 보기 어려운 것을 간신히 쳐다보는 것처럼 보쿠토를 흘긋 쳐다보았다.
“음.. 혹시 상대와 죽일 듯이 싸우고 나서야 우정이 샘솟는 타입?”
“그런데 그렇게 웃는거, 진짜로 싸우는 상대한테만 그렇게 웃는거야?”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다기엔 맥락도 앞뒤도 맞지 않는 소리였다. 쿠로오는 보쿠토가 제 말을 듣는 대신 자신의 질문을 연달아 퍼붓고 있었다는걸 눈치챘다. 아무래도 거기에 대해 대답을 들을 때까지는 귀머거리 흉내를 낼 모양이지.
“뭐~ 그렇죠. 상대방이 열받아하는 걸 보면 기분이 좋거든.”
“그럼 다행이다!”
“뭐가요?”
“그 웃음을 보고 살아있는건 내가 유일한거지?”
아 들어봐-! 너랑 싸울때 진짜 재밌었어!! 방어 능력자라고 들었는데, 꽤 아프게 때리더라!?
고개를 잔뜩 기웃거리며 흥분한 손으로 책상을 내려치는데, 그 텐션 높은 공기를 마주하는 와중에도 쿠로오의 뒷목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자신과 싸운 상대는 다 죽여버렸다는 식의 간접적인 고백인 건가. 나 정말로 요단강에 한 발 걸치고 있었구나.
시끄러운 녀석. 재수없는 녀석. 그리고 조금 무서운 녀석. 보쿠토와의 첫만남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껄쩍지근했다.
둘의 첫만남이었던 제 파트가 끝났습니다 !!! 탐미따따님이 이후 보쿠로 이야기를 써주셨어요ㅠㅠ!!
일단 용병회사의 거죽을 뒤집어쓴만큼 그들이 입은 옷은 군복과 크게 다를바 없었다. 단단한 굽이 있는 전투화와 질긴 천으로 만들어진 전투복, 방탄조끼를 닮은 디펜시브 웨어까지.
훈련소 뒤로 섬 면적의 90%를 차지하는 열대의 밀림이 이번 훈련장소였다.
“조끼와 헬멧에 있는 타격센서도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쿠로오의 말이 끝나자 서로가 서로의 머리를 후려치는 아름다운 광경이 잠시 연출되었다.
생명력 탐지기능이 있는 본부의 사이커와 켄마, 그리고 치유능력의 사이커가 움직이며 치명상을 입은 대원을 구한다고 하지만 실전훈련인만큼 격렬한 싸움에 부대원이 사망하는 경우는 매해 발생했다.
사고위험을 줄이고자 조끼와 헬멧에 타격센서와 생체스캐너를 달아 일정량 이상의 충격을 받으면 기절판정이나 사망판정을 출력하는 첨단 기술력의 집합체와도 같은 기기였는데, 첨단기기답게 고장이 몹시 잦았다. 어쨌든 책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다른 모든 쓸데없는 발명품처럼 이것도 쓸데없기는 마찬가지였다.
“3인 1조, 무슨 일이 있어도 최소 2인1조는 유지하는걸 잊지 마. 운이 좋아 무투와 이론평가에 아슬아슬하게 앞섰지만 저쪽은 코드 오렌지를 네번이나 겪은 베테랑들이다. 전장경험도, 공격력도 저쪽이 위야.”
쿠로오의 말에 부대원들의 입이 조용히 다물렸다.
“이기지 못할것 같으면 도망쳐라.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협공해라. 전장은 단순 싸이킥 능력으로 결정되는 곳이 아니야. 웅크리고 버티다 보면, 반격의 기회는 온다.”쿠로오는 백사장 위에 모인 대원들을 한번 슥 흩어보고는 지도를 펼쳤다. 섬 어딘가에 각자 상륙해, 숲 어딘가에 있는 보물(SPCT의 로고가 새겨진 물건)을 찾아 각 진영으로 옮겨야 했다.
네코마 부대에게 떨어진 본진은 사방이 트인 백사장이었다. 본진을 사수하기엔 너무 개방된 곳이지만 반면 상대방도 은신할 수 없는 지형이었다. 최상급의 방어능력을 가진 쿠로오라면 보물을 회수한 뒤 일인농성하며 다른 부대원들이 뒤에서 야금야금 후쿠로를 갉아먹는 전략도 가능할지 모른다.
“뭐 익숙하겠지만~ 다른 훈련처럼 포인트 득점으로 계산하는 방식. 득점기준은 모두 숙지했겠지? Kill/Faint/Assist로 누가 몇포인트를 득점한건지 이어커프로 중계된다. 즉, 득점자는 왠만하면 위치가 노출된다는거지. 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신경을 곤두세워.”
평소와 달리 웃음기 없는 진지한 목소리로 프레젠테이션하던 쿠로오는 문득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부대원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라? 왜 이리 진지해들?”
“뭐에요.. 이기지 못하면 죽여버릴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왜 그런답니까!?”
억울한듯 터져나온 목소리에 쿠로오가 푸핫 웃으며 손바닥을 휘저었다. 뭐, 그거야 이 대장님이 조금 흥분해서 그런 거고요~
“오야오야, 무서우면 이 대장님 품으로 기어들어오라고?”
“우웩.”
“대장! 저 그럼 대장이랑 같이 다닐래여!”
“야, 이새꺄! 새치기 하지 마!”
기다렸다는듯 번쩍 손을 들어올린 리에프의 옆에서 토라가 버럭 외치며 리에프의 팔을 잡아당겼다. 와글와글 긴장이 좀 풀린듯한 대원들의 모습에 씩 웃으며 시간을 확인한 쿠로오가 지도를 돌돌 말아 품안에 넣고 헬멧을 푹 눌러썼다.
“후쿠나가. 너만 믿는다. 절대 후쿠로 부대와 정면대결은 피해.”
“옛.”
자신이 딛은 발을 중심으로 일정 반경의 물건의 형태를 파악하는 후쿠나가의 능력은 이런 식의 임무에 특히 유용하게 쓰였다. 곧 쿠로오의 손짓과 함께 네코마 부대의 신형이 숲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실전의 시작을 알리는 노란 연기의 조명탄이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
*
“저희가 무투평가와 이론평가에서 네코마 부대에 뒤진건,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며 부대원을 한번 스윽 흩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절벽 아래의 분지는 모두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은신하기도 농성하기도 최적의 포인트다. 아카아시는 이 유리한 고지가 지도부에서 신경쓴 상대방의 페널티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거기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임무 성공률 92%. 최근 5년내 임무성공률이 9할을 넘어가는 부대는 네코마가 유일하죠. 눈에 띄는 능력자가 없다 할지라도 부대장 쿠로오의 지휘 아래 유연하게 움직이는 부대원들의 은밀기동력은 SPCT에서도 수위. 실질적 전시인 코드 레드를 제외하면 사실 우리 부대와의 실전경험도 크게 차이나지 않을 겁니다.”
평소와 달리 착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인가, 아카아시는 평소보다 유독 날선듯 가라앉은 부대원들의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기에 최상급의 방어능력자 쿠로오 테츠로 대장의 능력은..”
그 이름이 불리고 보쿠토가 앉아있던 자리에 우지끈 하고 생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부대원들은 거기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카아시의 입에서 금싸라기라도 떨어질 것처럼 무섭도록 집중한 모양새였다.
“본인뿐만 아니라 일정 범위내 아군에 대한 절대적인 방어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비전투 사이커로 대장이란 자리에 오른건 지금까지는 그가 유일해요. 그를 만나면 제압보다는 그의 발을 묶는걸 최우선으로 염두에 둬야...”
“그리고 날 불러.”
보쿠토의 말에 부대원들의 고개가 일시에 홱 돌아갔다. 대장..? 그렇게 발리고 또 덤비시게요?
“누가 발려! 그건 내가 방심한거야!”
“이번에도 지면 아카아시가 못 달래줘요.”
“대장을 버리고 타부대로 가버릴껄요?”
“우리 부대장 괴롭히지 마라!!”
“악!! 이번엔 진짜로 안 져!!!”
“우리 부대장~ 이거 누굽니까 당장 나와서 머리 박으십쇼.”
아카아시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검은 빡빡머리의 부대원이 똥 씹은 얼굴로 어기적 걸어나와 순순히 머리를 박았다.
“절대 방심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우리가 먼저 타겟을 획득해야 합니다.”
“어라 왜? 그쪽이 먼저 손에 넣어도 다시 뺏으면 되잖아.”
“농담 마세요. 네코마 부대, 그러니까 쿠로오 대장의 손에 타겟이 들어가면-”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 그의 대장인 보쿠토를 다시 빤히 바라보았는데, 묘한 기대감이 깃들어 있는 것 같기도, 혹은 보쿠토가 응당 그럴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 방어를 누가 뚫는답니까.”
곧 노란 조명탄이 하늘을 갈랐다.
*
.
.
[보쿠토 코타로 - 1K포인트.]
[아카아시 케이지 - 1A포인트.]
[쿠로오 테츠로 - 1F포인트.]
[보쿠토 코타로 - 1F포인트.]
[아카아시 케이지 - 1A포인트.]
[보쿠토 코타로 - 1K포인트.]
[하이바 리에프 - 1K포인트.]
.
.
.
섬 어딘가에서 땅이 파헤쳐지고 돌이 부수어지는 굉음이 나기도 했고, 소리없이 은밀하게 포인트를 얻는 팀도 있었다. 쿠로오는 귓가에 울리는 여자의 무감각한 기계음을 들으며 보쿠토의 위치를 가늠했다.
음파와 진동을 조절한다는 부대장이 있지만 저쪽은 숨을 생각을 않는다. 아니, 오히려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도발하는 것 같다.
[부엉이 대장, 마틴하고 클레어가 교전중.]
“우와. 저쪽 대장은 아주 폭주 기관차네요.”
“마틴과 클레어라.. 상성이 별론데. 어쨌든 그쪽은 늘 힘이 넘쳐보이기는 했어. 웃차~”
쿠로오가 입으로 으쌰 한번 소리를 내고는 축 처진 후쿠로부대의 대원을 질질 끌어 나무에 세워두었다. 실전연습이 끝나면 의료반이 수거하러 올 것이다.
리에프는 제 손으로 1K를 따냈다는 사실이 못내 좋은지 실실거리며 워커를 가만히 두질 못했다. 흥분을 못이겨 새 신발을 흙투성이로 만드는 리에프에게 무어라 잔소리를 시작하려던 찰나,
[대장. 찾았어요.]
귓가로 후쿠나가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렸다. 아마 카이도, 리에프도 들었을 것이다. 리에프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어깨를 끌어당겼다. 헉, 저희 이겼어여!? 이기는 거에여!? 시끄러워.
[위치는?]
[섬 중앙 봉우리에서 남서쪽 1.2km지점. 단지 문제라면.. 지금 후쿠로팀이 타겟을 수거중입니다.]
[제길, 그쪽이 근소하게 앞섰나보네.]
[조명탄 쓸께요.]
[뭐? 지금?]
[후쿠로 대장, 보쿠토 코타로가 이쪽으로 빠른 속도로 접근중이거든요.]
[망할..]
“쿠로오 대장! 대장이 막을 수 있죠!?”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쎄! 그렇게 외치는 미취학 아동처럼 리에프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이어커프를 끼지 않은 쪽 귀와 낀 귀가 시간차를 두고 울리는 리에프의 목소리에 괴로움을 호소했다. 쿠로오는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이..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대장이 막아야지 누가 막아요?]
[그 체리보이 콧대를 이번에도 아주 뭉개버려요! 물리적으로!]
[이 새끼들 제대로 은신 안하나..]
쿠로오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도 막아줄 꺼죠!?
얼핏 네코마부대 상하질서의 몰락으로도 보이는 이 난리법석에서 쿠로오는 그게 자신의 부대원이 자신을 믿기 때문임을 알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쿠로오 테츠로는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켜냈으므로. 뭐 그래도 부대원들이 이렇게 원하는데 가 줘야지. 기어이 이 연약한 대장을 달리는 폭주기관차에 던져넣다니 나쁜 새끼들.
[후쿠나가. 조명탄. 그리고 나머지 대원들은 야쿠의 지시를 따라 히트 앤 런이다. 타겟을 획득하고 산개해. 그쪽 대장과 부대장은 우리가 상대한다.]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제 앞에서 긴장한 리에프와 평소처럼 싱긋 웃고 마는 카이를 눈으로 담았다.
“가자.”
후쿠나가의 조명탄이 하늘색 연기를 피어올려 쏘아지고 곧 후쿠로 부대에 1K가 추가되었다. 비전투 사이커인 후쿠나가가 그 상황에서 조명탄을 제대로 쏘아 올린것만으로 용하다.
“쿠로오오-!!!!!!!”
그게 저를 부르는 신호란걸 알았는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울린다. 오싹오싹, 피부 안쪽까지 떨리는 진동에 쿠로오가 반사적으로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리자 카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동쪽, 4시방향으로 약 0.9km.”
멀지 않다. 지금쯤 후쿠로부대 대장은 이미 타겟을 손에 넣었으려나. 어쩌면 해당 팀의 적당한 사이커가 타겟을 획득하고 대장이 시선을 끌고 있는걸지도.
물론 이틀새 그 녀석이 귀머거리가 된 것만 아니라면 충분히 가지고 놀 자신이 있었다. 쿠로오의 주먹이 꽈악 쥐어졌다. 그때였다. 방금 전 보쿠토의 고함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진동이 쿠로오의 뒷목을 짜르르 울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카이의 입이 무어라 크게 들썩였지만 마치 귓가에 물이라도 찬 것처럼 먹먹했다.
“산개해!!!!”
그렇게 외치는 쿠로오 자신도 스스로가 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카이와 리에프의 판단을 믿고 쿠로오는 그대로 위로 뛰어올랐다.
둥글고 투명한 막이 쿠로오의 발밑에 생겼다가 비누거품처럼 터져나갔다. 땅이 부서지고 나무가 부러져 튀어올랐지만 쿠로오에게 닿지 못하고 솟구쳤을 때처럼 떨어졌다. 배리어. 그게 바로 쿠로오의 능력이었다. 속이 빤히 비칠 정도의 투명한 막으로는 보쿠토를 막을 수 없다. 대신 동시에 여러겹의 막이 거의 동시에 생성되고 동시에 터져나간다. 그 반동으로 보쿠토의 돌진을 피해낸 쿠로오는 용케도 쓰러지지 않은 나무의 가지를 손으로 잡고 매달렸다. 몸 주변의 뿌연 막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대체 어떻게!? 분명 저 멀리서 보쿠토의 목소리가..!
쿠로오는 오싹거리며 숫제 몸 전체를 뒤엎을 것처럼 솟아오르는 소름을 꾹 눌러참았다. 목 밖으로 신음이 튀어나와버릴 것 같다.
“미친. 저걸 사람 몸으로..”
쿠로오가 있던 자리는 마치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처럼 엉망으로 변했다. 단지 달려왔을 뿐이다. 그런데 나무가 부서지고 땅이 헤집어질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축축한 숲의 땅을 헤집어 기어이 흙먼지를 내놓은 가운데 보쿠토가 굽은 어깨를 펴고 다시 외쳤다.
“나와!! 쿠로오!!!!”
그의 목청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아는 쿠로오는 미리 귀를 손으로 막았지만, 이어커프 안에서 리에프가 윽, 하고 작게 신음했다.
다행히 고작 나무 하나를 엄폐물 삼았을 뿐인데 저쪽에선 여길 발견하지 못했다. 쿠로오는 보쿠토가 있는 쪽에서 저벅, 하고 자갈 밟는 소리를 들으며 이어커프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부엉이와 교전 시작. 카이는 부대장을 맡아.]
부대장은 어디쯤일까. 나뭇가지를 발로 밞아 일어선 쿠로오가 주변을 살폈다. 파동형 능력자가 으레 그렇듯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그때 서쪽에서 지이잉- 하고 공기가 떠는 파동이 느껴졌다.
“카이!?”
[올빼미 부대장 발견. 타케토라와 협공해 교전 시작하겠습니다.]
[대장! 여긴 맡겨두시고 부엉이 대장을 맡아요!]
사이커 그 자체의 역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손에 닿은 모든 매질의 운동량을 강제로 0으로 만드는 카이의 능력이라면 후쿠로의 부대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쿠로오가 자신도 모르게 카이의 이름을 외친 순간을 보쿠토가 놓칠 리 없었다.
“거기냐!!!”
어떻게 뭔가를 판단할 틈도 없이 쿠로오는 나무를 박차고 숲으로 뛰어들었다. 일부러 투명하게 만든 일곱 겹의 배리어가 거의 시간차 없이 터져나갔다.
[여기는 저한테 맡기세여!]
“뭐!? 리에프 너-!!”
카이가 후쿠로의 부대장을 완전히 제압하고 지원하러 올 때까지 보쿠토를 정면상대할 마음이 없던 쿠로오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쿠로오가 서있던 나무를 보쿠토가 두동강낸 덕분에 훤히 트인 시야 안으로, 쿠로오에게 달려들던 보쿠토의 무릎이 땅에 푹 박혀들었다.
푹 숙여진 보쿠토의 고개가 번쩍 들려 어정쩡하게 뒤를 돌아본 채인 쿠로오와 눈이 마주쳤다.
희번뜩한 금색 눈동자가 쿠로오를 할퀼 것처럼 샅샅히 흩는데, 쿠로오가 반사적으로 그에 눈을 접어 웃었던 것은 그동안의 반복적인 신경전이 버릇이 되었기 때문이다.
“헤이헤이, 설마 도망치는거냐!?”
“아? 혹시 전략적 후퇴라는 단어 처음 들어봐..?”
“도망가도 소용 없을껄!? 이번엔 내가 이긴다..!!”
“이론평가 14점의 주인공인데 모를 수도 있겠다 싶네.”
뿌드득, 소리가 나며 보쿠토의 굽혀진 상체가 서서히 치켜올라갔다. 보통 인간이라면 으깨진 토마토 꼴이 될만한 중압을 견뎌내면서도 그 입가엔 사나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쿠로오는 지지 않고 이를 드러내 웃으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겼다.
“꽤나 머리를 썼네? 깜빡 속을뻔했어.”
“하핫! 오모나가의 작품이다!”
오모나가(긴 얼굴)? 그런 웃기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단 말야? 쿠로오는 그 이름을 기억해두며 리에프의 상태를 살폈다. 보쿠토의 저항이 거세지자 리에프의 얼굴이 전에 없이 굳어있었다. 곧 보쿠토가 완전히 상체를 세워 일어나자 리에프가 이를 악무는 소리와 함께 보쿠토 반경 1미터 가량의 땅이 다시 한번 움푹 내려앉았다.
“리에프, 힘을 효율적으로 써! 이런 식으로 힘을 분산시키지 말고 상대의 발목과 무릎에-”
“으아아아!!”
콰드득, 하고 압축되어 돌보다 단단해졌을 흙이 보쿠토의 발을 잡아놓지 못하고 깨져나왔다. 들썩, 하고 다른 쪽 무릎마저 땅을 방찰 것처럼 튀어오른다. 큭..! 깨문 입술에 핏물이 베이도록 이를 악문 리에프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쿠로오는 그 사실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리에프에게로 달려나갔다. 실전 탓인지, 아니면 보쿠토를 만나 긴장한 탓인지 리에프의 타이업이 평소보다 빠르다. 이마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리에프의 어깨를 쿠로오가 잡아 자신의 품에 껴안고 바닥을 구른 것과 쿠로오의 배리어 위로 뾰족한 쇳조각들이 튕겨나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오오, 풀렸다!!”
“고양이 대장을 잡는다더니 대체 뭘 하는거야!?”
“코노하!”
이런. 안 좋은데. 쿠로오는 혀를 쯧 찼다. 그가 우뚝 버티고 선 자리 뒤로 완전히 지쳐 헉헉대는 리에프가 나동그라졌다. 땅을 짚은 그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확인한 쿠로오가 리에프를 전력에서 제외시켰다.
코노하라고 불린 잿빛머리의 남자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쇠구슬을 잘그락 놀렸다. 그 구슬과 발치에 떨어진 흉악한 가시가 돋은 쇳조각을 바라본 쿠로오가 머릴 굴렸다.
‘금속의.. 변형? 외향만? 성분도?’
그때, 건조한 기계음과 함께 침착한 카이의 목소리가 울린다. 쿠로오는 눈을 가늘게 뜨곤 고개를 작게 저었다. 오지 마.
[카이 노부유키 - 1A포인트.]
[야마모토 타케토라 - 1K포인트.]
[부대장 제압. 지원가겠습니다.]
[야쿠. 타겟이 여기 있어. 타겟을 확보하고 바로 리에프를 데리고 가.]
장갑으로 입을 가린채 빠르게 중얼거린 쿠로오는 머리카락에 묻은 나뭇잎을 털어내는 보쿠토에게 씩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명백한 도발의 의미였지만 보쿠토는 그때처럼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쿠로오는 새로 나타난 남자의 무기로 보이는 쇠구슬보다 그가 옆구리에 낀 가방에 시선을 주었다. 나무 위에 서있던 남자가 땅으로 가볍게 착지해 보쿠토와 나란히 서 씩 웃었다. 다 잡은 사냥감이란 것처럼 서두르지도 않고 천천히 걸어온다. 그래. 더 가까이 걸어오라고.
“이제 공격수단은 다 떨어진 건가~?”
“끼어들지 마. 저 자식은 내가 잡는다.”
“나는 이럴 때가 제일 좋더라~”
음? 보쿠토의 눈썹이 홱 들렸다. 도망칠 수도 없고 맞서 싸울수도 없는 상황인데 쿠로오의 미소는 평소와 같았다. 네코마 부대의 유일한 사이코키네시스가 무력화된 지금 저 고양이 요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제 배리어 뒤로 숨어 거북이처럼 웅크리는 것 뿐인데.
‘그리고 웅크린 거북이는 뒤집어 버리면 돼.’
배를 보이면, 잡아먹는다.
그렇지만 저 웃음이 자꾸만 거슬렸다. 눈을 감아도 망막에 저 실실 웃는 얼굴이 끈질기게 따라붙어 보쿠토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만 같은 그런.
쿠로오의 손짓을 따라 쌀알만큼 작게 만들어졌던 배리어가 사람 얼굴만한 크기로 둥글게 부풀어올랐다. 자신 주변에 서너개의 둥근 배리어 구슬을 띄운 쿠로오의 모습은 때에 맞지 않게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 것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곧 공기중에 녹아버릴 것처럼 투명한 구슬이 쿠로오의 손짓에 따라 둥실거리며 코노하와 보쿠토에게 접근했다. 느려터진 공격이지만 마주 공격하기엔 저 능력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렇게 파악한 코노하는 뒤로 물러났고 보쿠토는 고개를 숙여 어렵잖게 구슬을 피해냈다.
“어라라? 혹시 피했어?”
쿠로오가 피식 웃자 보쿠토가 울컥하며 두번째의 구슬에 손을 휘둘렀다. 바보냐! 하고 외치는 코노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보쿠토의 자신감은 타당했다. 지금 날아오는 것이 구슬이 아니라 탄환이라 해도 보쿠토의 손은 멀쩡할 것이기에. 그 모습에 쿠로오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걸린다.
배리어의 안쪽은 진공. 그 외엔 아무런 위력도 없는 작은 배리어일 뿐이다. 억지로 고정시켜 작은 충격에도 쉽게 터진다는 특징이 있다 그것뿐. 단- 배리어가 터지면서 일시에 진공으로 공기입자가 몰려들고, 일시에 집중된 공기는 곧 분자끼리 충돌을 일으켜- 사람의 팔다리 정도는 우습게 부러트릴 정도의 위력이 나온다.
퍼퍼펑!!
“보쿠토!!”
코노하는 가볍게 터지며 나무의 옆구리를 움푹 잡아먹는 구슬에 기겁하며 물러났다. 네코마 대장, 순수한 방어계라더니 말이 다르잖아!
방심한 보쿠토의 손부터 다리, 뒷통수에 어느새 수십개의 구슬이 달라붙어 터졌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폭음에 보쿠토의 신형이 뒤로 주춤 흔들린다. 나무에서 튀어나온 팔이 코노하의 목줄기를 쥐어틀고 입을 막은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제길!”
양 팔로 제 얼굴을 교차해 눈을 지킨 보쿠토가 고개를 들어올리자, 한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든 쿠로오가 나머지 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보쿠토의 목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어때, 자기? 짜릿해?”
“헤이, 헤이- 이거 진짜 재미있는데..?”
그 손 위로 떠오른 것은 쿠로오 본인의 신장보다 커다랗게 부푼 진공의 구슬이었다.
보쿠토가 미리 걸리적거리던 나무를 청소해둔 덕에 보쿠토와 쿠로오 사이의 장애물은 없다. 고작 얼굴만한 구슬이 이런 위력이 나오는데 저런게 터졌다간 왠만한 폭탄을 씹어먹는 파괴력이 나올 것이다. 혀로 낼름 입술을 햩은 보쿠토가 코노하를 불렀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온 대답은 그가 기대했던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코노하!!”
“젠장, 타겟을 빼앗겼어!!”
“뭐!?”
“와시오! 찾아! 멀리 가지 못했..!”
그 순간이었다. 리에프의 신형이 땅으로 쑥 꺼진것을 확인한 쿠로오가 배리어를 없애고 연막탄을 자신의 발치에 냅다 집어던졌다.
푸슈슛! 하고 진한 흰색의 연기에 보쿠토가 당황하는 순간 허벅지에 찬 홀스터에서 나이프를 뽑아든 쿠로오가 그대로 보쿠토에게 달려들었다.
“큿!”
소름끼치도록 날카로운 공격이 보쿠토의 턱 아래 대동맥을 단번에 그었다. 잘 벼려진 칼날이었지만 보쿠토의 강화된 피부 한겹을 뚫을 수 없었다.
보쿠토는 그것을 피해내는 대신 기꺼이 목에 생채기를 내어주고 쿠로오의 팔을 움켜잡았다. 우유처럼 진한 연기가 흔들리며 가까이 붙은 쿠로오의 턱선이 얼핏 보일듯 말듯 일렁거렸다.
“잡- 았- 다-.”
“오야오야, 집착 심한 남자는 인기 없어요?”
보쿠토는 씨익 웃으며 제 손아귀에 잡힌 쿠로오의 팔을 꾹 쥐었다. 뿌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부르르 떨린 쿠로오의 손에서 나이프가 툭 떨어졌다. 제 발치에 떨어진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보쿠토는 그 팔을 자신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그리고 잡혀준 건 이쪽.”
무력하게 딸려올거란 기대는 않았지만 보쿠토는 자신의 가슴팍에 검은 수류탄을 사뿐히 내려놓는 쿠로오를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지막 발악인가? 핀은 이미 빠져있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진 쿠로오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꽈악 덮었다.
“가기전에 선물 하나 더 주자면, 사실 나 그렇게 큰 진공은 아직 못 만든다?”
“헤이, 누가 보내준-”
채 보쿠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쿠로오의 몸이 마치 액체처럼 무너지며 아래로 쑤욱 가라앉았다. 보쿠토의 손아귀에 잡혔던 그 질량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라-!?
보쿠토가 자신의 발 아래를 쳐다본 것과 동시에 떨어진 수류탄이 보쿠토의 워커 위로 통, 부딪혔다.
네코마 지부의 강당보다 두배는 더 넓은 강당에 앉아 대기하자 문이 열리며 후쿠로부대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앞장서 걸어오는 후쿠로부대 대장을 발견한 쿠로오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예상대로 빡친 얼굴의 보쿠토가 벌떡 일어나 다가오려다 옆자리의 부대장에게 뒷덜미가 잡혀 씩씩거리는 모습이 꽤나 볼만했다. 쿠로오가 목 안으로 크큭, 소릴 죽여 웃자 카이가 그게 그리 재밌냐는 눈으로 쿠로오를 쳐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합동훈련, 합동평가라곤 하지만 사실 예산전쟁이라고 하는 편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지도 모른다. 부대에 편성되는 예산은 보통 임무 성공률에 따라 달라지는 편이었고, 네코마 팀은 확실히 다른 부대에 비해 예산편성이 적은 편이었다. 암살, 요인경호 등 자잘한 임무가 잦은 것이 그 때문이었는데, 합동평가에서 나쁜 성적을 거두면 그 쥐꼬리만한 예산조차 절반 이상이 뭉텅 잘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앞에서는 중년의 남자가 합동훈련의 커리큘럼을 소개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미 대장에게 배부된 유인물로 왠만한 사항은 파악하고 있었다.
앞의 이틀간 이루어지는 이론평가는 패스. 실전위주의 저 팀에게 질거란 생각도 들지 않고 이긴다 해도 점수배정이 크지 않다. 중요한건 그 뒤 이틀동안 이어지는 무투&사격훈련펑가에 마지막 이틀을 장식하는 실전평가다.
무투와 사격은 우리 부대도 꾸준히 훈련하고 있다. 물론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겠지. 실전훈련에서 제일 중요한건 개인이 아니라 팀 단위의 전략. 앞선 닷새간의 평가에서 최대한 상대 부대의 능력을 알아내고 대비하고 그에 맞는 작전을 짜려면.. 쿠로오는 벌써부터 지끌거리려는 관자놀이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다행히 유명세에 비해 단순한 사람 같은데 말이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겨있던 쿠로오의 눈동자가 데굴 옆으로 굴러가 보쿠토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리곤 그의 호박색 눈동자와 눈이 딱 마주쳐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치켜뜨고 말았다. 곧 여유롭게 웃으며 입술을 내밀어 키스를 날려주고, 그에 보쿠토의 얼굴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바뀌는 걸 보며 키득거렸지만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을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지? 그리고 왜 내가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거지? 쿠로오의 목 뒤로 식은땀이 비죽 솟았다. 괜히 후쿠로 부대로 불리는게 아닌건지, 마치 어둠속에서 사냥감을 물색하는 부엉이처럼 오싹한 시선이었다. 소리없는 날갯짓에 흔적없는 시선. 쿠로오는 부러 시선을 강단 위로 고정시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쉬울 리 없지.’
방심할 수가 없었다.
*
“웨이~”
“크으윽..!”
훈련 사흘째. 앞선 이론평가 결과를 확인한 두 대장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일반상식, 응급의료, 생존지식 등 몇가지 과목의 각 부대별 평균점수는 120점 만점에 84.3점vs37.1점이라는 두배에 가까운 점수차이로 네코마 부대의 압승이었다. 실전평가에 비해 배점이 낮다지만 이렇게 차이가 나면 무투평가에서의 근소한 차이 정도는 커버가 가능할 정도였다.
확연히 기분이 좋아보이는 쿠로오의 미소에 네코마 부대원들은 나직하게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 이틀간 훈련소를 매운 두 대장들의 기싸움은 조금 섬세한 부대원들이 신경쇠약을 호소할 정도로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실실 웃으며 턱을 올려 보쿠토를 내려보던 쿠로오의 얼굴이 굳은 것은, 주먹쥔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씩씩거리던 보쿠토가 이내 우오! 하고 기합을 빡 내지르며 외친 소리 때문이었다.
“헤이헤이헤이! 기죽지 마! 실전에서 만회하자고!”
“어라, 원래 꿈을 크게 갖는 타입? 귀엽네.”
“하아? 뭐, 틀린 말도 아니지 않나?”
“무슨 말이신지.”
“뭐어. 네코마 부대의 공격력이 SPCT미달이라는 것 정도? 애초에 몇년간 코드 오렌지를 한번도 겪지 않은 부대는 그쪽밖에 없다고 하고?”
쩌억, 하고 쿠로오를 비롯한 네코마 부대원들의 자존심에 균열이 갔다. 크리티컬이다. 즉시 흉흉해지는 분위기를 알아채지도 못한 건지 보쿠토는 제법 과장하는듯한 포즈로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뭐어~ 켄마라는 사이커 없이 네코마 부대가 얼마나 굴러갈 수 있을지 궁금하긴 한데!”
후쿠로 부대에서 피식 하는 웃음소리와 야유가 튀어나왔다. 보쿠토가 그에 호응하듯 크게 웃어제끼고, 쿠로오는 한걸음 성큼 걸어 보쿠토의 정면에 마주보고 섰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치켜올린 채였다.
“어라라? 벌써 해피에 취하기라도 한 거 아냐? 지나치게 행복한 꿈을 꾸는데?”
얌전하고 부드러운 내용을 담았지만, 쿠로오의 목소리는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마냥 낮게 깔렸다. 듣는 귀가 오싹해질 정도다. 보쿠토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의 쿠로오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섰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붙자 훈련소 내의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보쿠토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씨익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쪽이야말로 첫날 오른손에, 멍 들었지?”
보쿠토의 오른손이 까딱 움직이고, 짐승처럼 번들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쿠로오의 오른손을 흩었다. 검은 장갑 안에 감싸인 쿠로오의 손이 움찔 떨렸다.
흐응~ 하고 묘한 웃음소릴 낸 보쿠토의 눈이 가늘어졌다. 짧은 휴식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고, 보쿠토는 먼저 걸음을 옮겨 부대원들과 함께 무투평가장으로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첫날의 수모를 되갚아 준게 신나는지 히죽히죽 웃는 얼굴을 숨기지도 않은 채였다.
“......”
팔짱을 낀 그 상태 그대로 망부석처럼 남은 쿠로오의 뒤에서 부대원들이 작게 웅성이다 곧 야쿠가 리에프의 등을 떠밀었다.
싫어여! 무섭단 말이에여! 가서 상태만 좀 보고 와!
“저기.. 쿠로, 씨, 딸꾹.”
억지로 떠밀려 쿠로오의 팔을 툭 치며 그의 얼굴을 확인한 리에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심지어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하는게, 사람이 아니라 메두사를 처음 본 호메로스라도 되는 반응이었다.
쿠로오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는 분명 평소와 같은 톤으로 말을 내뱉었는데,
“하하.. 이번 무투평가. 결과 봐서 개인훈련으로 입원하기 싫으면.. 알지?”
“예!!!”
그 여느 때보다 절박하고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
무투평가 마지막 날, 훈련 나흘째의 아침이었다.
두 대장이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하는데 밑의 부대원들이 하하호호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 부대처럼 아침부터 식당을 뒤엎으며 패싸움을 시작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쿠로오 테츠로의 스타일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타케토라! 묵사발을 내 버려!”
“제이크! 너만 믿는다!”
우우우! 사이킥 능력을 배제한 무투시합일 뿐인데 링 바깥을 둘러싼 관중들의 열기는 뜨겁다 못해 열렬할 정도였다. 책상에 앉아 시험지나 깔짝일 때와 달리, 몸으로 하는 무투평가기간이 되자 두 부대의 분위기는 뜨거운 냄비처럼 과열되기 시작했다.
슬슬 훈련소의 의료팀이 바빠지는 시기도 이때부터다.
1:1 무투대련에 타케토라의 상대로 나선 것은 레게머리를 가진 중동쪽의 부대원이었다. 쿠로오는 몇미터 떨어진 곳에서 박스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그 시합을 보다 제쪽으로 다가오는 보쿠토를 발견하고는 버릇처럼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라? 실전부대 대장님 아니십니까?”
보쿠토는 뭔가 초조한 표정으로 그 얼굴을 쳐다보더니, 젠장, 하는 소리와 함께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그, 너 말이야!”
무슨 소릴 하려는 건지 삿대질까지 하며 자신을 가리키는 그의 행동에 쿠로오는 정면의 대련-을 빙자한 싸움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쿠로오.”
“엉?”
“쿠로오, 혹은 차라리 네코마 대장이라고 불러주시죠. 이름 없이 부를 정도로 친하지 않잖아요? 보쿠토 대장님?”
그렇게 딱 잘라 말하며 쿠로오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보쿠토는 눈썹을 찡그려 위로 들어올리곤 불퉁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그럼 쿠로오. 넌 화도 안나? 적 앞에서도 그렇게 웃어?”
“흐음?”
“그렇게 열받게 웃고 다니는거 말이다! 여유로워보여서 마음에 안 들어..!”
“오야, 이 상냥한 미소를 보고 열이 받다뇨?”
“애초에! 내가 그런 식으로 말했는데 덤비지도 않고! 실실 웃기나 하고!”
그 말에 쿠로오의 미소가 찌그러졌다. 덤벼? 덤비라고 그딴 소릴 지껄인 거였단 말인가.. 그럼 전세계에서 탑클래스인 신체강화 능력자한테 주먹이라도 쥐고 덤벼줘야 했다는 건가. 대체 누구 좋으라고?
쿠로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고는 양 손을 어깨 위로 살짝 들어올렸다.
“제가 상냥한건 하루이틀일이 아니랍니다.”
게다가 진짜 적도 아니고 단순한 합동훈련일 뿐인데 일일히 열받는것도 웃기지 않나? 이어지는 쿠로오의 말에 납득이라도 한 건지, 보쿠토는 하. 하고 숨을 내뱉고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가 무어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쿵 하고 제이크의 인영이 무너지면서 타케토라가 우오오오!! 다음!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링 주위의 네코마 부대원들에서 으어어! 하는 괴성과 함성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어느새 귀신처럼 나타난 의료반이 콧등이 내려앉아 안면에 피칠갑을 한 제이크를 데리고 이동하고는, 후쿠로 부대에서 한 남자가 나오려다가-
“잠깐, 내가 나간다!!”
쿠로오는 바로 옆에서 빼액 내지른 보쿠토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다.
능력이 신체강화라더니 목청도 커지나!? 쿠로오의 시선은 물론이고 대련장에 있던 두 부대원들의 시선이 보쿠토에게 꽂혔다. 쿠로오는 어째 꽤 재미있어질꺼라 생각하며 다리를 한번 꼬았다.
‘능력을 제한하고 무투로만 싸우는것도 자신이 있다 이건가.’
타케토라의 능력도 신체강화계였다. 다만 그 수준이 보쿠토에 미치지 못했고 그 능력을 제대로 써먹기 위해선 인간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쓰러뜨리는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타케토라의 무투실력은 네코마 부대내에서도 한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때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하던 쿠로오의 손목이 확 당겨졌다. 방심하던 차에 얼결에 링 위로 끌려온 쿠로오가 당황한 얼굴로 링을 둘러보자 어느새 링밖으로 나간 토라가 팔찌 한쌍을 내밀며 기합을 내질렀다.
“네코마! 필승!”
“갑자기 내가 왜 링 위에 올라오게 된 걸까나.”
“대장님! 꼭 이기십쇼!!”
“쿠로씨! 화이팅이여!”
“하아..”
방심한 사이 끌려나와 난데없이 대장전이었다. 쿠로오는 반쯤 체념한, 반쯤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로 양 팔에 팔찌를 철컥 찼다. 곧 작은 기계음과 함께 팔찌는 손목에 딱 맞게 줄어들었고, 붉은 램프가 깜박이며 머리가 약간 답답해져왔다.
특수자기장이 흐르는 링 위에서 이 팔찌를 끼면 일시적으로 사이킥 능력이 제한된다. 물론 그 시간은 채 한시간도 되지 않을정도로 짧았지만 대련을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두통을 떨쳐낸 쿠로오가 뒤를 돌았다.
“갑자기 왠 대련이신지?”
“처음엔 짜증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리 못돼먹은 녀석은 아닌거 같아서 말야! 대련 한판으로 깔끔하게 정리하자!”
쿠로오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싫은 타입이네? 제멋대로에 자기중심적이고, 뭣보다 저 눈동자가 마음에 안 든다. 일방적으로 갈등과 화해를 얘기하는 주제에 저 눈동자는 마치 속을 꿰뚫는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나도 그랬던가 납득해버리는 묘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인간관계든 임무든 은밀하고 부드럽게 상황을 조절하는게 익숙한 쿠로오에게는 정 반대의 타입이었던 것이다.
“보쿠토 대장!! 뭉개버려요!!”
“능력 못쓰는 강화능력자는 *밥이지! 쿠로오 대장!!”
링을 둘러싼 열기가 어느때보다 뜨거워진 가운데 자신만만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선 보쿠토가 오른손을 까딱 움직였다. 명백히 한 수 양보하겠다는 제스처다. 체급 차이도 그리 나지 않는데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선공 양보?”
“아아. 뭐 이 정도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달려든 쿠로오의 손에 보쿠토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찰싹- 하고 가볍고 경쾌한 소리가 나고, 보쿠토는 멍하니 자신의 볼에 손을 올렸다. 아프진 않았다. 아프지는 않았는데-
“양보 고마워, 체리.”
얄밉게 웃으며 손가락을 살랑 움직이는 쿠로오는, 막 뺨싸대기를 맞은 보쿠토에게서 한발작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네코마 부대 쪽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온다. 역시 도발의 달인! 체리보이! 혹시 우는 거냐!! 푸하하학!!! 와 진짜 빡치겠닼ㅋㅋ!!!!!
옆으로 돌아갔던 보쿠토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 쿠로오의 정면을 바라본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자신을 쳐다보는 기세에 쿠로오는 방금 전 보쿠토의 흉내를 내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와 보시던가? 그리고 제대로 열받아 직선으로 내질러오는 보쿠토의 주먹을 가볍게 피하며 쿠로오는 이빨을 드러내 웃었다. 오야, 이 판 이겼네.
*
“빌어먹으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제 앞의 펀치머신을 압축기에 짓눌린 폐품꼴로 만들어버린 보쿠토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버럭버럭 악을 썼다. 쾅쾅, 보쿠토가 발을 바닥에 내려칠 때마다 특수합급으로 만든 타일에 균열이 갔다. “보쿠토 대장, 그만두세요. 훈련소 기물파손으로 예산 깎여요.”
“젠장할!! 그 요괴 고양이가!!!”
보쿠토는 입 밖으로 괴성을 내지르면서도 예산삭감이 무섭긴 한 건지 발을 구르던 행동을 멈추고 대신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폭주하지 않는게 용하다 할 정도로 보쿠토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사실 지금도 눈동자가 희번뜩한게 상태가 그리 좋지만은 않아보인다. 아카아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팔 안에서 얇은 노트북을 꺼냈다.
“너무 분해하지 마십시오. 쿠로오 대장은 확실히 강했으니까요.”
“내 앞에서 그녀석 이름 꺼내지도 마!!”
버럭 외치며 아카아시에게 삿대질한 보쿠토는 이내 다시 분에 못이겨 몸부림을 쳤다. 내가, 지다니, 그 요괴 고양이한테..!!!
“그건 반칙이야!!!!”
“시끄러워요. 대장.”
노트북의 전원을 키고 영상을 띄운 아카아시가 다시 보쿠토를 불렀다. 대장, 대련영상 확인하시겠습니까? 싫어-!!!!!
아카아시의 고막을 터뜨릴 작정인지 버럭 외친 보쿠토가 씩씩 숨을 내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거 보면, 진짜 못 참을것 같다고..!
이러다 없던 고양이 알레르기라도 생길 것 같은 거부반응에 아카아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대장. 사이킥을 제외한 쿠로오 대장님의 벤치프레스 기록은 140kg입니다. 제 말뜻 아시겠습니까?”
“제길, 어? 어.. 그거밖에 안 돼?”
보쿠토는 멍한 얼굴로 고갤 들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키는 자신이 조금 작았지만 몸은 확실히 자신에 비해 호리호리하긴 했다. 대신 그 큰 키에 비해 굉장히 유연했고 반응이 재빨랐다. 확실히, 공격이 묵직하다기보단 날카로운 느낌이 더했던 것 같기도..
“보쿠토 대장의 기록보다 20kg가량 못 미쳐요. 순수근력으로 따지면 대장이 위. 그뿐만 아니라 다른 대련기록을 보면 쿠로오 대장의 기술이 훌륭하긴 하지만 그렇게 일방적으로 대장을 가지고 놀 정도는 아니에요.”
“그럼 뭐야.”
“대장이 흥분해서 앞뒤 가릴 것 없이 날뛰었다는 뜻이죠.”
“큭...”
보쿠토는 입술을 깨물고 끙 앓더니 이내 아카아시의 옆자리에 털썩 와 앉았다. 제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도발에 그대로 홀랑 넘어가 무대포로 공격하다 관절기에 당하고 간신히 벗어났지만 발차기 한방에 그대로 넉다운. 제대로 된 공격 한번 성공시키지 못하고 당해버렸다. 덕분에 이후 부대의 분위기는 완전 반전되어, 무투평가의 결과도 네코마 팀이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가져갔다.
“실전평가에서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어요. 보쿠토 대장, 이대로 지고만 있을 겁니까?”
“아니! 그 자식은 내가 잡는다!”
“그럼 영상 재생하겠습니다.”
역시 대장 부엉이 조련에는 부대장이 최고라니까! 그렇게 웃는 부대원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키보드를 다닥 조작해 영상을 틀었다.
선공을 양보한답시고 여유를 부리다가 싸대기를 맞는 장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 핏줄을 세우고 이빨을 갈았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아카아시가 분석하는 요괴 고양이-쿠로오-에 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함이었다.
“이후 대장의 공격이 완전 단순해졌잖습니까. 쿠로오 대장님이 보이는 빈틈에 그대로 따라붙고, 봐요. 대비한 것처럼 팔 걸어서 무릎 뒤를 가격하는게..”
“끄응..”
“이때도. 평소라면 보쿠토 대장 이렇게 훤히 보이는 페이크에 걸려들지 않죠. 그런데 이때 쿠로오 대장이.. 어라, 뭐라고 말한건가? 여기선 잘 들리지 않는군요.”
“체리라서 그런지 공격에 힘이 없다고.. 적당히 꼭지 따줄테니까 항복하라고..”
“그래서 그 도발에 그대로 돌진하신겁니까..”
“짜증나잖아!!!”
“하아.. 예에.”
쿠로오는 그대로 달려든 보쿠토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다리를 끼워넣고, 반보로 가볍게 보쿠토의 뒤로 돌아 보쿠토를 쓰러뜨려 물 흐르듯 완벽하게 암 트라이앵글 초크로 보쿠토의 대동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교과서에 실려도 될 정도로 깔끔한 기술이었다.
팔로 보쿠토의 목과 팔을 감싸 자물쇠로 잠그듯 압박하자 화면 속의 보쿠토의 얼굴이 붉어지며 이마에 핏줄이 불뚝 일어선게 보였다. 한쪽 팔은 쿠로오의 허벅지에 눌려 바닥만 쾅쾅 때리고 있었고, 그 영상을 보는 보쿠토의 주먹에 뿌득 힘이 들어갔다.
“이 기술도, 평소라면 금새 풀어낼 수 있었을겁니다. 벤치 프레스 기록이 차이가 나니까요. 그런데 한참동안 갈피를 못잡고 허우적거렸죠. 이때 이미 데미지가 누적되어 버린거에요.”
“......”
화면 속에서 쿠로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보쿠토는 영상 안의 자신의 팔찌가 점점 빨리 명멸하는 것을 확인하고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저때 팔찌가 없었다면 그대로 날개를 꺼내버릴 뻔 했어. 쿠로오의 말을 들은 직후, 보쿠토가 괴성을 지르며 쿠로오의 초크를 떨쳐냈고, 데굴 구른 쿠로오가 날렵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낭패한 얼굴로 팔을 털었다.
아, 저때 자신이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보쿠토의 주먹이 꽈악 쥐어졌다. 지금 보니 쿠로오의 헛점도, 자신의 바보짓도 훤히 보였다.
보쿠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릴 한번 털어낸 후 그대로 쿠로오에게 돌진해 태클을 걸었다. 물론 쿠로오는 순순히 잡히지 않았지만 마침내 손아귀에 쿠로오의 팔을 잡아채는데 성공했다. 저때, 보쿠토는 방심하고 있었다. 벤치프레스 수치를 듣기 전이지만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완력이 약한 상대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중심을 잃어 휘청대는 쿠로오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다른 손으로 주먹을 쥐고 이겼다! 라고 생각한 순간-
보통 킥이란 건 펀치에 비해 리치가 긴 기술이다. 강력한 만큼 초근접거리에선 쓸 수 없는 기술인 것이다. 그래서 보쿠토는 쿠로오의 한 팔을 봉인하고 한 팔을 무효화시킨 뒤,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려들어온 쿠로오의 발차기에 방심해 그대로 턱을 내 줄 수밖에 없었다.
“이건 태권도입니다. 합기도나 무에타이와는 다른 기술이에요. 타격점을 머리 위로 잡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초근접 킥이죠. 보시다시피, 제로거리에서도 이정도 위력이 나옵니다.”
이미 쿠로오의 관절기에 당해 제 컨디션이 아니던 보쿠토는 쿠로오의 그 발차기에 그대로 넉다운이 되어버렸다.
풀썩 쓰러진 보쿠토를 두고 뒤로 가볍게 뛰어 어깨를 으쓱인 쿠로오가 천천히 엄지를 들어올리더니 척, 하고 엄지를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화면 안의 씩 하고 그 특유의 얼굴로 눈웃음치며 무어라 빈정거리는 얼굴에(주변에서 튀어나온 환호성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보쿠토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그대로 앉은 벤치를 퍽, 하고 내리쳤다. 의자가 부서지지 않는 게 용했다.
“내일 실전훈련.. 고양이는 내가 잡는다!”
“예, 예.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처럼 흥분해버리면 될 것도 안될꺼라구요.”
“두번 실수는 안 해.”
보쿠토는 그렇게 말하며 아주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딴에는 침착하고 여유로운 얼굴인 척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나 흉흉하게 빛나는 눈이 도무지 제정신으로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제 할말만 하고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버리는 보쿠토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쉬던 아카아시가 노트북을 챙겨 일어나자 앉았던 긴 벤치가 와르르 소리와 함께 무너져내렸다.
흐아암. 소릴 죽일 생각도 없어 입 밖으로 거하게 하품을 한 쿠로오는 언제나처럼 이 시간에 문을 열고 나오는 켄마의 반질반질한 뒷통수를 보며 인사했다.
“안녕, 켄마.”
“응.”
긴 다리로 성큼 걷자 금새 켄마와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옆으로 가 서자 평소보다 엉망으로 뻗친 머리카락을 확인하듯 힐끔 눈길이 얼굴에 닿는다. 데구르르 구른 눈동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밤새 잠을 잘 못잤어? 라든가, 혹은 머리카락이 왜 그래? 라든가.
하지만 이내 귀찮다던가 혹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다든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말겠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적부터 켄마와 지내왔던 고로 그걸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복도는 한적했다. 다국적 SPCT 소속 대능력자부대 네코마 지부의 인원이 적지 않다는걸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지만, 그들이 걷는 복도는 지하 7층. 조교(정식 명칭은 부대 관리행정겸원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인 켄마와 부대의 대장인 쿠로오, 그리고 몇 없는 행정직원과 4급고위직들의 숙소만 있는 곳이었다.
지하 6층의 식당을 지나 5층으로 가야만 부대원들의 숙소가 나오므로 아침훈련시간의 복도는 여즉 고요했다.
“여 대장!”
“오늘 아침 메뉴 꽁치에요!”
“켄마씨 좋은 아침~”
6층으로 진입하자마자 봇물이 터지듯 와르르 하고 소란스러운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놀라운 과학력 놀라운 방음기술이로다.
지하임에도 탁하지 않은 공기와 높은 천장, 밝은 내부는 이 지부에 윗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때려박았는가를 전적으로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였다. 물론 그 돈의 8할이상은 보이지 않는 곳에 주로 처발렸지만 말이죠.
어김없이 쿠로오의 입에서 잔소리가 튀어나갔다. 옆 자리에 앉은 부대장 카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닥 움직여 인사했다. 거봐, 카이도 역시 저 아침밥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아뇨. 딱히.
“아침은 황제처럼 먹으라잖아~? 적어도 밥이라도 먹어. 시리얼로는 필요한 포도당이 모자르다고!”
“싫어.”
아침 식사 시간에 으레히 벌어지는 일이었고, 별달리 특이한 점도 아니었다. 아침기도라도 챙기듯 쿠로오는 늘 켄마에게 제대로 아침밥을 먹으라 잔소리를 하곤 젓가락을 들곤 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본 쿠로오는 모든 대원이 식당에 와있는걸 확인하고는 가볍게 주위를 환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자! 주목!”
그렇게 외치며 박수를 한번 짝. 크지도 않는 소리였지만 그 행동 하나에 식당 안의 말소리가 멎었다. 흠. 쿠로오는 제법 만족스런 얼굴로 비죽 웃은 뒤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정규일정 전에 강당에서 프리젠테이션 생겼습니다~ 지각하거나 불참하면 이 쿠로쨩이 스물 네시간동안 화끈하게 데워줄꺼야?”
뼈가 삭고 근육이 파열된다는 탈 인간급 개인훈련을 지나치게 감미로운 단어로 포장하는게 아니냐는 종류의 항의가 욕설과 함께 쿠로오에게 빗발쳤으나, 쿠로오는 여유롭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에여? 오늘 무슨 일 있어여?”
발랄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으며 켄마의 옆자리에 앉은 것은 팀에 합류한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신입의 목소리였다.
네코마 부대본부의 위치가 동아시아인 탓에 팀내 인종의 80%가 아시아인이었지만, 개중 리에프는 드물게도 녹색 눈의 슬라브족 유전자를 진하게 타고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혼혈이라는데, 아시아쪽 유전자를 잡아먹기라도 한건가.
아? 그러고 보니 오자마자 험한 꼴 보게 생겼네. 쿠로오는 말없이 눈을 접어 웃으며 옆자리의 카이에게 말을 툭 던졌다.
“오늘 신입 제대로 간수해 와?”
“네, 네.”
“어라 뭐에여? 질문한건 난데 왜 대답은 카이 씨한테!?”
*
아침식사는 오전 8시에 종료된다. 30분의 준비시간 뒤 보통 8시 반부터 정규훈련시간이 시작되곤 했는데, 오늘은 영화감상이나 연말 망년회에서나 개방되던 강당으로 팀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켄마와 쿠로오는 단상 위 벽을 가득 채운 거대 모니터에 노트북을 연결하며 하나둘씩 들어오는 팀원들을 일일히 확인했다.
“이누오카는?”
“배탈나서, 의료실 들렀다 온답니다~”
“어이고야.”
마지막으로 이누오카가 엉거주춤 강당으로 들어서자 이내 헤드셋 마이크를 쓴 쿠로오가 뇌쇄적인 포즈로 강당 위에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참고로 키 187의 건장한 근육질 남자가 그런 포즈를 취해봤자 지각자 입장에선 지옥의 문지기 이상으로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네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탓하는건 아니니까 얼른 앉아.”
마이크를 켠 채로 말하는 바람에 강당 안의 대원들이 대놓고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제껴 이누오카의 귀가 새빨개졌다. 마지막 팀원마저 제대로 앉은걸 확인한 쿠로오는 씩 웃으며 손에 든 리모컨을 깔짝 움직였다.
간밤에 쿠로오를 수면부족으로 몰아간 이유가 드디어 팀원들에게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화면이 일렁이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짧은 글자가 모니터를 채웠고, 이내 강당은 아까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통한과 절규에 휩싸였다.
“으아악!”
“어쩐지 이번 분기에 조용히 지나간다 했다!”
분노와 광란의 도가니에서 마치 태풍의 눈처럼 유일하게 조용한 곳은 켄마와 카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버리한 신입 리에프가 앉은 곳 뿐이었다. 뭐에여? 무슨 일이에여? 다른 팀원들의 격한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리번거리던 리에프가 켄마에게 물었다.
“합동훈련.”
“그리고 합동평가지.”
별다른 정보도 없는 짧은 한마디에 카이가 얼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합동.. 훈련 평가?”
리에프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자 삐이- 하고 마이크와 스피커가 튀기는 소리가 작게 나더니 곧 쿠로오의 낮은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자. 다들 신나서 들뜬 건 알겠는데 이러다 이 대장 벌써부터 가는 귀가 먹겠어~(우 하고 야유하는 소리.) 조용, 조용. 지금 방금 예쁜 손가락 한 새끼들은 조금 있다가 나랑 오붓한 개인훈련을 가진다. 일단 중요한건 보다시피 이번 분기의 제물로 우리 팀이 뽑혔다는거지? 으응? 우리 팀은 뭐, 평소대로만 하면~ 문제없지만?”
유들유들한 쿠로오의 목소리에 팀원들이 의자나 책상을 두들기며 환호나 욕설 등을 내뱉었다. 피식 웃고 만 쿠로오는 이내 키보드를 두들겨 다음 화면을 모니터에 출력했다.
“그래도 일단 우리와 함께 불운한 상대팀 정보를 한번 긁어봤다. 후쿠로우다니. 일명 후쿠로(올빼미) 부대.”
이내 화면이 전환되고 검은 바탕에 올빼미의 갈색 얼룩깃털을 닮은 앰블럼이 둥실 떠올랐다. 상대팀의 정보라는 소리에 강당은 금새 조용해졌다. 같은 SPCT 소속이라지만 의료부대나 지원부대가 아닌 같은 대능력자부대와는 이런 식의 합동훈련이나 몇 없는 합동임무, 혹은 본인이 특이한 능력자라 다른 팀으로 파견임무를 가야할 때 외엔 마주할 일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능력자들의 자세한 능력은 본인과 상부를 제외하면 기밀에 부쳐진다지만 사람 사는 곳에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훈련 전에 알음알음 상대팀의 정보를 모아 대비하는 건 이 부대에서 각 팀 대장들의 능력의 척도로도 평가되곤 했다.
“예전에 이 팀이랑 합동훈련 해본 적 있는 사람?”
쿠로오의 말에 몇몇 대원들이 웅성이며 거수했다. 2년 전 쿠로오를 중심으로 부대를 재정비하기 전부터 있었던 노련한 부대원들이었다.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이 팀도 몇년 새 팀원이 꽤 많이 바뀌었어. 능력자들도, 팀 분위기도 확 바뀌었지. 요새 실적표 보면 알잖아?”
그리고 이어 화면에 출력된 것은 SPCT의 부대별 임무실적표였다. 참고로, 외부반입은 물론이고 팀원들에게도 공개가 불가능한 자료였지만 쿠로오는 거침이 없었다. 화면이 나옴과 동시에 헛기침을 하며 CCTV에 대고 먼지털이를 털어대기 시작한 청소직원의 협조 덕분이었다.
“우리 팀이 요인경호, 암살, 백업 등에 특화된 것과 달리 이쪽은 정면돌파를 위주로 하는 공격력 강한 팀이다. 자아 봅시다~ 요 2년새 이 부대가 거쳐간 코드 오렌지가 네 번! 돌파, 몰살, 인질구출, 그리고.”
‘섬멸.’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만 본다면 네코마 팀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경험치를 가진 팀이었다.
집중하는 팀원들의 표정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쿠로오는 신이 나서 키보드를 움직였다.
“팀 분위기가 바뀐 건, 2년전 사이커들이 대거 교체되면서. 아마 우리 팀에서도 최근에 이 팀하고 몇 번 합동임무라던가 나간 사람 있지?”
그 말에 켄마를 비롯한 몇몇이 손을 들어올렸다. 우와! 진짜에여!? 리에프가 눈을 반짝이며 켄마에게 상체를 훅 숙이다가 카이에게 주의를 받고 얼른 자세를 바로했다.
“후쿠로부대 대장이 꽤 유명인사지. 뭐, 왜 이런데서 썩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알려진 능력은 신체강화. 단, 일반적인 신체강화를 떠올리고 대응하면 당한다. 거기 리에프!”
갑작스런 쿠로오의 지적에 리에프가 힉! 하고 어깨를 움츠리며 하악질하는 맹수처럼 눈을 치켜떴다. 또 뭔가 싶어 리에프에게로 강당의 시선이 죄 쏠렸다. 나, 나 아무 짓도 안했는데여!?
“네 염력으로 강철을 찢을 수 있겠어?”
“에? 찢는다고요?”
얼떨떨하게 제 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르킨 리에프가 고민하더니 다시 물었다.
“어.. 훈련할때 쓰이는 철근중에 제일 큰 사이즈 기준으로요?”
“아아. 그거.”
참고로 리에프가 말하는 것은 콘크리트 고층건물을 지을때 건축자재로 사용하는 H빔이었고, 미터당 무게만도 300킬로에 버금가는 녀석이었다. 리에프는 염력으로 구부리는건 가능한데 찢는건 좀.. 이라며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하기 힘든 일이란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팀 대장은 준비운동 없이 한번에 훈련빔 2개를 찢어낸다. 보통 근거리 신체강화능력자라면 원거리 싸이코키네시스에게 약하다는 편견이 있지만 이놈이 모가지를 딴 테러리스트 숫자를 생각하면 생각이 바뀔껄? 최대한 접근하지 않도록 공략해야 할꺼야.”
그리곤 시선을 아래로 내려 묘하게 불퉁해진 리에프를 보며 씩 웃어보였다.
“갓 태어난 새끼고양이 주제에 올빼미 대장을 잡는다는 기대도 안한다. 단, 우리 팀의 유일한 싸이코키네시스인만큼 한번 정도는 정면충돌하게 될 수도 있다는걸 염두에 두라고.”
“이어서 그쪽 넘버 2. 이 사람도 위험하지. 사실 대장이 그렇게 활개를 칠 수 있는게 바로 이 부대장의 능력 때문이야. 혹시 같은 임무 뛰어본 사람?”
쿠로오의 말에 켄마를 비롯한 몇몇이 어물어물 손을 들었다. 그러나 방금 전과 달리 거수한 손에 힘이 없는게, 이유를 묻자 함께 임무를 하긴 했는데 무슨 능력인지 정확히 파악이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 역시 장난 아니라니까. 켄마. 혹시 파악했어?”
“진동. 음파.”
“이야. 흔한 능력은 아니지? 심지어 어떤 식으로 능력이 발현되는지도 모르는데. 단지 방출형이라 한번에 다수를 무력화시킨 전적도 있다고 하니, 최대한 조심할 수밖에.”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리에프의 옆에 앉은 카이에게 눈을 맞추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는다. 진동파를 조절하는 능력자라면, 카이의 능력과 상성이 좋다.
쿠로오는 두어명 가량의 능력자들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사흘 뒤 합동훈련을 대비하기 위한 단기 집중코스-참고로 강당 안은 지옥도 예고편이라는 중얼거림으로 가득 찼다.-에 돌입함을 당당하게 선언했다.
“리에프. 그리고 아까 그 놈들. 그리고 소대장들도 남아서... 어허. 거기 저새끼 저거 도망치네? 카이. 잡아와.”
으악! 나 아니라고! 하는 처절한 목소리와 함께 카이의 손에 뒷덜미가 잡혀 질질 끌고오는 대원을 본 쿠로오의 입가에 성격 나빠보이는 특유의 미소가 씨익 하고 걸쳐졌다.
“마침 잘 됐다. 네가 리에프 상대 좀 해야겠다.”
“네? 저요?”
리에프는 갑자기 튀어나온 저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카이의 손에 매달린 타케토라의 입에서는 앓는 한숨이 터져나왔다. 합동훈련 D-3일째의 아침이었다.
*
SPCT는 세상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초능력자들의 부대였다. 처음의 설립목적은 초능력을 이용한 범죄와 전쟁의 억제였으나 애초에 기업재단에서 차출한 자본이었다.
전쟁억제도구의 탈을 쓴 사이커 집단이 단지 겉모습을 빌릴 뿐인 용병회사 그 자체로 변해버리는데는 채 몇년의 기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초능력자든 일반인이든 의뢰인이 누구라도 돈만 있으면 가리지 않고 일을 받는다. 제멋대로 태어나는 사이커들을 모아 만든 부대, 일반 군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화력의 그들이 몸값이 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응 뭐. 일단 월급이 빵빵하니까 말이지.’
두시간 가량의 짧은 비행이었다. 착륙장 너머로 보이는 사파이어빛 바다를 보고 감탄할 틈도 없이, 마치 여름을 방불케 하는 강한 햇살에 쿠로오는 눈썹을 찡그렸다. 거의 적도 가까이로 내려온 것 같은데.. 지도상엔 별다른 이름이 없을 이 섬에는 SPCT의 최첨단 실전훈련건물과 장비가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야쿠씨, 짐 너무 적은 거 아니에여!?”
“너야말로 고작 일주일 묵는데 짐이 왜 그리 많냐. 어차피 실내복이라던가 생필품은 기본제공된다고.”
“아 그건 아는데..”
“그럼 무슨 짐을.. 만화책!? 돌았냐!?”
너 지금 수련회로 착각하는거 아냐!? 뒤에서 야쿠의 손에 리에프가 귀를 잡히고 힝힝 앓는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야단스러운 소리를 귓드응로 흘리며 앞으로의 훈련을 담당할 직원에게 간단히 스케쥴을 확인받고 팀원들을 숙소로 밀어넣었다. 참고로 켄마는 합동훈련대상이 아닌, 훈련 서포터 업무를 배정받은고로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다른 층의 숙소로 이동했다.
순간이동능력자인 켄마의 경우 평소엔 네코마 부대 소속으로 되어 있지만, 일년의 삼분지 일은 타부대로 파견을 갈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까지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능력자는 세계에서도 몇 없을 능력이다. 암살임무에 있어선 무엇보다 귀중한 능력이었고, 그가 부대에 소속된 것 만으로도 임무의 위험도가 달라지는 사이커였지만 그런 만큼 이런 합동훈련시엔 서포터 업무로 빠져버리곤 했다. 상대팀의 페널티가 지나치게 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 켄마가 없으니 외로운걸.”
부대의 대장이라는 특혜라봤자 연봉이 조금 더 높고 이럴 때 독방을 쓰는 것 뿐이었다. 특실이랍시고 제법 넓은 화장실과 응접실이 준비된 방에 쿠로오는 휘익, 짧게 휘파람을 불고는 가져온 몇 안되는 짐을 대충 풀었다. 어차피 훈련은 일주일, 오래 있지도 않을 것이고 매일 일과가 끝나면 두통에 절어 기절하듯 잠들기밖에 더 하겠나 싶었다.
훈련소에서 준비한 훈련복은 당연하지만 쿠로오의 사이즈에 정확히 맞았다. 아마, 쿠로오의 발톱이 자라는 속도조차 쿠로오 본인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겠거니 싶다. 오. 이거 우리 팀 컬러잖아.
그래봤자 기본제공되는 디펜시브 훈련복에 왼쪽 가슴에 팀 앰블럼을 달아둔 것 뿐이지만, 뭔가 이런 걸 입으면 진작에 다 소진된 줄 알았던 승부욕이라는 녀석이 꿈틀거리는 것이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야외 연병장에 하나둘씩 흩어져 벌써부터 훈련을 시작하는 녀석들을 모아 집합시키자 탁 트인 착륙장에 막 소형 여객기 하나가 착륙하고 있었다.
귓가를 때리는 쩡쩡한 데시벨에 누구 한명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막을 법도 한데 쿠로오나, 혹은 다른 팀원들은 거기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 녀석들이 그 유명한 후쿠로 부대라 이거지. 사흘간 관자놀이가 빠개질 정도로 혹사당해, 훈련을 빙자한 괴롭힘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 리에프의 눈동자에 잔뜩 긴장한 기색이 너울거렸다.
“헤이헤이헤이!”
고요하리만치 긴장한 네코마 부대의 분위기를 산산조각 낸 것은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고무공처럼 통통 튀어오른 한 남자였다.
“오옷!? 바다잖아!? 해수욕 할 수 있으려나-!?”
“저흰 여기 관광온게 아니라 훈련하러 온 겁니다. 보쿠토 대장.”
“모처럼 임무도 아닌 곳에서 바다에 온건데 너무 깐깐한거 아냐!?”
회색인지 흰색인지, 거뭇한 머리카락이 섞인 머리를 힘껏 세워올린 남자는 분명 대장이라고 불렸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쿠로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게 ‘그’ 부엉이란 말이지..”
작지 않은 목소리라 쿠로오 곁의 팀원들도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찌 보면 대놓고 들으라 말하는 것도 같았다.
어째, 조금 별론데? 이쪽은 합동훈련이랍시고 잔뜩 긴장해왔는데 임무도 아닌 훈련에 긴장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나오면 말이지~
진짜로 기분이 나쁘긴 한건지, 평소와 같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웃는 쿠로오의 목소리에 팀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라? 이 쪽이 이번에 우리 상대인가?”
부산스레 짐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던 후쿠로의 대장이 각 맞춰선 쿠로오와 네코마 부대를 발견한건 금방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와 쿠로오를 발견하고는 탐색하듯 눈을 반개해 눈썹을 쓱 들어올렸다.
“어라~”
“오야오야~”
그 짧은 사이에 뭐가 통한건지 둘의 눈동자 사이로 전류가 통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느라고, 그 당시 옆에 있던 대원은 그렇게 증언했다.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내가 후쿠로다니 부대의 대장, 보쿠토 코타로다!”
“이쪽은 네코마 부대의 쿠로오 테츠로라고 합니다.”
거만하게까지 보일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남자가 힘차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날을 세워 팔꿈치 아래로 낮추고 앞으로 내미는 그 자세는 만국공통으로 통용되는 제스처였고, 쿠로오는 거의 반사적으로 웃으며 오른손을 마주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
여유롭게 흘러나오던 쿠로오의 목소리가 멈췄다. 손아귀를 부술 듯 전해져오는 힘에 뿌득. 쿠로오의 턱과 어금니에서 뭔가 수상쩍은 소리가 난다 싶더니 보쿠토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이것 봐라?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그 표정에 쿠로오의 승부욕에 화악 불길이 일었다. 그러나 보쿠토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눈 앞의 이 검은 고양이처럼 유연한 남자가 싸우는 방식이 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쿠로오는 어깨를 움츠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봐도 아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야야..! 신체강화계가 너무한데?”
“엇,”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빼낸 쿠로오가 다분히 과장된 얼굴로 오른손을 털었다. 진짜 조금만 더 버텼으면 손가락 뼈가 나갔을지도 모르겠다며 우는 소릴 했다. 어째 징징거리는 것 같은데 어색하지도 않고 참 자연스레 말을 뱉는다.
쿠로오는 보란 듯 보쿠토의 손자국이 벌겋게 남은 손을 얼굴 위로 들어올렸다. 이렇게 솔직하게 아파할줄은 몰랐던건지 후쿠로의 대장, 보쿠토 코타로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미, 미안!”
“뭐~ 괜찮습니다. 설마 대장이나 되는 사람이 제 능력 하나 조절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능력을 휘둘러 대는 건 아닐테고?”
보쿠토의 사과가 튀어나오자 아픈 척은 어디로 갔는지 이를 드러내고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는 쿠로오의 앞에서 어쩔 줄 모르던 보쿠토의 얼굴이 쩌적 굳었다. 우와. 우리 대장님 완전 악역 같아여.
“이 넘치는 혈기는 아꼈다가 훈련할때나 쓰는게 좋을 것 같네~”
보쿠토가 어버버 말을 더 잇지 못하는 사이 쿠로오는 싱긋 웃으며 보쿠토의 볼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고는 팀을 인솔해 한발 먼저 훈련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얄밉게도 먼저 갑니다? 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뭐, 뭐...!”
“흐음. 저 사람이 그 유명한 네코마의 대장이군요.”
“뭐야 저거어~!!”
뒤늦게 뒤에서 버럭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쿠로오는 담 약한 사람의 심정지를 유발할 수 있는 얼굴로 후후 웃을 뿐이었다.
보쿠토는 뒤늦게야 그 아픈 척이 연기인데다가, 제 능력 조절도 못하는 얼간이 사이커라는 욕을 들었다는 걸 깨닫고 방방 뛰었지만 이미 떠난 버스였다.
의국으로 돌아온 쿠로오는 리에프를 호출해 아주 그냥 불판 위의 오징어가 되도록 자글자글 태웠다. 차트 좀 제대로 확인해. 이 약은 무슨 생각으로 처방했어? 혈액 검사를 했으면 피드백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오야, 이 환자분 폐렴끼 있다는 말을 어제도 들었는데 아직도 x-ray 처방을 안냈습니까? 무슨 배짱이야 응? 당직이 뭘 하는게 있어야 의국을 맡길 거 아니겠냐. 그렇지?
영혼의 탈곡기에 털린 것처럼 초췌해진 리에프가 비틀거리며 의국을 나서자 그와 교대하듯 보쿠토가 파일을 들고 쿠로오에게 다가왔다. 고갤 돌려 리에프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보쿠토가 짖궂은 얼굴로 이죽거리며 말했다.
“와- 리에프 장난 아닌 표정인데?”
“뭐가 말입니까아..”
“유서에 쿠로오 네 이름 쓰고 자살하러 갈 얼굴이야.”
“헛소리 하지 마..”
“진짜 피곤한가보다? 말꼬리를 다 늘리고.”
보쿠토는 의자 등받이를 앞으로 해 팔꿈치를 괴었다. 그대로 쿠로오의 얼굴로 손을 뻗는다.
듀오백 위에 몸을 길게 늘리고 고개를 뒤로 넘겨 흐물흐물해진 쿠로오의 눈꺼풀 위로 보쿠토의 손가락이 따스하게 닿았다. 피곤한 눈에 온기가 닿자 어쩐지 눈이 풀리는 느낌에 쿠로오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그 환자 조금 대하기 어려워서.”
“화풀이야? 너무한 선배네!”
“새벽 두시에 수술끝난 환자 진통제를 새벽 다섯시에 처방냈더라고.”
“아아. 그건 어떻게 쉴드쳐줄 수가 없다! 잠시나마 너의 인성을 의심한 내가 나빴어!”
“미안하면 눈 더 만져줘.”
“아. 응.”
쿠로오는 눈꺼풀 위를 떠난 체온에 짐짓 투정을 부리듯 그렇게 말했고, 보쿠토는 평소처럼 깐죽대지 않고 얼른 쿠로오의 눈 위를 손으로 덮었다.
보쿠토의 손은 큰 편이었고, 언제나 활력이 넘치는 것을 증명하듯 체온도 높은 편이었다. 보쿠토는 쿠로오가 앉은 의자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의자 바퀴가 끼릭, 하고 울면서 용케 움직인다. 보쿠토는 손을 그대로 쿠로오의 눈 위를 덮은 채 그의 어깨에 턱을 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12층 그 환자 말하는거 맞지?”
이제 입을 여는것도 귀찮아진 쿠로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감기니 저절로 졸려진다. 원래 레지던트라는 것이 눈 감을 시간만 있다면 고꾸라져 자는 직종이라지만 지금은 자면 안 되는데..
“방금 수술 동의서 받아왔는데, 직종에 비해 어.. 점잖은 사람인것 같던데. 많이 피곤하게 해? 어차피 OS수술도 있는데 전과시킬래?”
간손상 환자를 OS로 전과시키라니 제정신이냐. 게다가 넌 속고 있어. 그 남자는 점잖은 게 아니라 점잖은 척 하는게 몸에 배인 것 뿐이랍니다. 이 쿠로오님의 촉은 틀린 적이 없어요.. 그 말을 하려고 막 입을 여는 순간 보쿠토가 사실은 그 환자 따위 상관없다는 듯 곧장 다시 물어왔다.
“근데 쿠로오. 나 졸린데 우리 알람 맞춰놓고 한시간만 자자.”
쿠로오는 하. 눈을 뜨고 심각한 표정으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그거 완전 좋은 생각이야.”
*
쿠로오는 자신이 위태로움을 즐기는 성격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이 남자와의 대화는 몇 번 나눠보지도 않았는데 아슬아슬했다.
7호실의 마츠카와 환자는 늘 교수님의 회진을 거절하고, 인턴들이 순회하는 상처부위 드레싱도 거절하기로 유명했다. 물론 그가 진짜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지만(직업이라든가 직업이라든가 직업이라든가) 오직 점심시간 이후 주치의인 쿠로오 테츠로에게만 드레싱을 맡기는데, 다른 환자라면 특별취급이라며 말이 많을만도 하건만 환자 주변을 호위하듯 포진한 험악한 남자들 덕분에 쿠로오만 병원 내의 불쌍하단 시선을 한몸에 모으게 됐다.
“그런데 선생.”
“에?”
“왜 엑스레이를 매일 꼭두새벽에 찍으러 가게 하는건가 해서. 혹시 내 관심 끌고 싶어서 못되게 구는거야?”
쿠로오는 한쪽 볼에 밀어넣었던 아이스크림을 빼고 보란 듯이 피식 비웃었다. 이러나 저러나 근 일주일을 입원한 환자라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젠 환자가 권하지 않아도 소독을 마치면 냉동실 문을 열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 다 먹을 때까지 환자의 말상대를 했다. 물론 소독 시간이 되면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문 밖으로 몽땅 나가버리는 어깨들이 없어 편히 풀어진 이유도 있었다.
“저기요 환자분. 나를 지나치게 깜찍하게 보고 있는데.. 아홉시부터는 외래환자때문에 영상실이 붐벼요. 게다가 일찍 사진을 찍어야 교수님 회진때 사진을 보고 판독을 할 거 아닙니까.”
“흐응.”
“흐응은 무슨. 살다살다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환자 처음 보고요?”
“이렇게 잘생긴 환자가 처음이라고?”
마츠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쿠로오가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의 손잡이를 잡고 쓱 빼내버렸다. 타블렛을 확인하던 쿠로오의 입밖으로 반쯤 씹힌 아이스크림이 투둑 떨어지자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는 얼굴에 보란 듯 쿠로오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는다.
당황해 말문이 막힌 쿠로오의 얼굴에 대고 놀리듯 피식 웃으며 자신을 빤히 보는 눈길.
이제 어쩌려고? 쿠로오는 가끔 이런 식으로 자신의 반응을 즐기듯 돌발행동을 하는 환자의 모습에 늘 오기가 치미는 것이었다.
눈가를 가늘게 접은 쿠로오는 입술을 달싹이며 잠시 말을 골랐다.
그쪽이 원하는게 뭔지는 알겠는데, 그걸 내가 꼭 기대에 부응해 줄 필요는 없잖아?
“먹던 걸 뺏는게 제일 치사한 짓이라 하던데.”
“이제 막 금식이 풀린 참이라.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싶은걸 참고 있다고.”
남자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마치 담배연기처럼, 분명 해로우나 중독되어 끊을 수 없는 종류의 매혹이 쿠로오를 감쌌다. 흡연자도 아니면서 무슨 비유냐 물으면, 학창시절 담배를 끊은 뒤 그와 이야기할 때처럼 담배가 절실한 적이 없다 대답해야겠다. 애초에 군것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가 꼬박꼬박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어 허전한 입을 달래는 이유가 그것이었던 바에야.
쿠로오는 손을 천천히 남자의 옆구리 위에 올렸다. 피주머니를 제거한지 얼마 안 되어 이대로 꾹 누르면 다시 상처가 터지고 핏물이 고일 것이다. 짐짓 위협하듯 살짝 체중을 실어 상체를 남자 위로 기울였다. 남자의 입에 물린 막대기에 겨우 한입이 될까 말까 하는 아이스크림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우려는 것처럼 쿠로오의 입이 마츠카와 얼굴 앞에서 살짝 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knock, knock.
그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둘은 키스했을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어라, 쿠로오 선생님?”
“오야오야. 보쿠토 선생이 여긴 왠일이야?”
쿠로오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자연스레 상체를 일으켜 세워 보쿠토를 맞았다. 보쿠토의 시선이 침대 옆 선반에 놓인 디셋에 가 머물렀다가 다시 쿠로오의 얼굴로 이동했다. 쿠로오는 싱긋 웃으며 가운에 두 손을 쑥 집어넣고 보쿠토에게로 몇걸음 옮겼다.
“수술실에서 뵙고 다시 뵙네요. 왼팔 수술을 집도한 보쿠토 코타로라고,”
“쿠로오.”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하던 보쿠토의 목소리를 끊고 남자의 목소리가 쿠로오의 어깨를 잡아챘다.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미묘하게 들어올렸다. 아니 둘이 있을 땐 선생소릴 잘만 하더니 갑자기 왠 이름?
“이거.”
그리고는 자신의 입에 매달려 있던 아이스크림의 막대를 내민다. 가져가서 먹으라는 건지 버리라는 건지, 일단 그의 손에서 그걸 받아든 뒤 휴지로 감사 쓰레기통에 던지자 기껏 양보했는데 너무하는군. 따위의 소리가 들려온다.
“마츠카와 환자분 너무하시네~ 설마 먹던 걸 주려고?”
“......”
남자는 대답 없이 목을 울려 웃었고, 쿠로오는 시선을 다시 보쿠토에게 던졌다. 그 눈에 응답하듯 보쿠토는 xray 사진을 들어 왼팔 상태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 팔을 고정한 철심을 6개월 뒤 제거해야 하니 퇴원 전에 수술날짜를 미리 확정짓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쪽도 적어도 한달에 한번씩은 f/u와야 하는데. 그럼 우리 교수님 일정하고 같이 맞추지? ”
“아아. 사실 네코마타 교수님께는 말씀 드리고 온거야. 네가 여기 있을줄은 몰랐지만.”
“입원 해야겠지?”
“당연, 아. 철심제거 수술도 꽤 큰일이라 이틀은 입원해야 할 겁니다.”
“쿠로오 네가 알아서 해줘.”
마츠카와는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는 얼굴로 비스듬히 세워진 침대에 상체를 기대어버렸다.
진짜 알아서 해? 징검다리 스케쥴로 병원에 들락거리게 해 버릴까보다. 쿠로오는 네네 그러지요, 하고 쌈박하게 대답하곤 병실을 나섰다.
함께 병실을 나온 보쿠토의 시선이 볼에 끈덕지게 매달려온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기웃거리며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꼴이 분명 제가 먼저 무슨 일이냐 물어오길 바라는 눈이라 쿠로오는 한숨을 꾹 참고 또 뭔데? 하고 보쿠토에게 말을 텄다.
“저 환자랑 많이 친해졌나봐?”
“뭐 내 환자니까. 라포 형성은 해야지.”
사실 직업적 라포형성이라기엔 조금 많이 친해졌나..? 적어도 매일 먹을 걸 받아먹었던 환자는 저 사람이 처음이다. 그건 확실했다.
“그치만! 환자가 널 이름으로 불렀다고?”
“몰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신지.”
네가 들어오니까 갑자기 이름으로 부르고 난리.. 어라. 쿠로오가 묘한 얼굴로 보쿠토에게 힐끔 시선을 돌렸다.
있잖아. 내가 방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데.. 차마 그렇게 말을 내뱉지 못하고 쿠로오가 입 안에서 혀를 굴리는 사이 보쿠토가 푸핫 웃으며 작게 외쳤다.
“저 환자 은근히 귀엽네?”
“저 사람이 귀엽다고? 안과 협진 넣어줄테니까 가봐라.”
“걱정 마. 네가 더 귀여워.”
“진짜 눈 나빠 너..”
쿠로오와 보쿠토는 그렇게 한참을 투닥거리며 의국으로 돌아왔다. 슬슬 내일 처방을 내 둬야 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가운을 벗어 의자에 거는데 문득 떠오른 것처럼 보쿠토가 물었다.
“그런데 그거 진짜야?”
“뭐가.”
“저 환자 드레싱 네가 다 한다며?”
“아아. 그거? 걱정 마. OS드레싱은 너 하는거 주구장창 봐서 그럭저럭 하니까.”
“물론! 그건 걱정없지!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엉?”
“너 이번주에 워크샵 있잖아.”
너 가면 누가 드레싱 해? 혹시 까먹고 있었어? 라고 묻는 보쿠토의 말에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 위에 주먹을 내리쳤다. 완전 잊고 있었다.
*
“산책은 좀 하고 계신가요.”
“응? 움직여도 되는 건가?”
“그저께 이제 움직여도 되니까 슬슬 걸어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불성실한 환자분이네~”
디셋 뚜껑을 탁 덮으며 쿠로오가 입꼬리를 비죽 들어올려 웃었다. 분명 능력 좋은 의사인데 다른 환자로 하여금 조금 위험한 어둠의 의사같은 건가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드는 미소였다.
쿠로오의 웃음기 서린 대꾸에 마츠카와의 기색이 묘하게 들떴다. 당황.. 했나? 쿠로오가 악어 입에 맨손을 집어넣은 것과 비슷한 강도의 긴장감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자 마츠카와가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졌다. 웃음이나, 그런 걸 숨기려는 의도로 보였다.
“이거 참..”
“네?”
“기분이 괜찮은데.”
“엥?”
마츠카와는 입가를 매만지던 손을 뻗어 쿠로오의 손목을 잡고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배에 빵꾸가 났던 환자라곤 생각되지 않는 힘에 침대 위로 털썩 주저앉자 서늘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안에 쿠로오의 옅은 빛 동공이 겹쳐진다.
“원한다면 잇세이라고 불러도 좋아. 테츠로.”
“무, 요비스테 하자는게 아니거든요!?”
“새삼 학창시절이 떠오르는군. 환자복 두번째 단추라도 줄까..”
“저는 환자분이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이 더 놀랍습니다!”
쿠로오는 손목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뒷목을 거칠게 쓸었다. 민망함과 당황함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묘한 패배감만 덩그러니 남았다. 당황한 자신을 보며 목 안으로 키들거리는 마츠카와를 보자 그 억울함이 배가 되었다.
담에 보지. 웃음기 섞인 인사를 뒤로하고 쿠로오는 병실 밖으로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던 험상궂은 남자들이 쿠로오를 보고 어이구 선생님. 하고 깍듯하게 90도 인사를 한다.
언젠가 밖의 남자들이 너무 위협적이지 않냐며 지나가듯 마츠카와에게 말한 이후 갑자기 인사성이 함양된 야쿠자들에 대하여 서술하시오.(서술형, 10점)
답안지 :병원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이 한층 더 묘해졌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쿠로오는 어색하게 아 예. 라고 대답해주곤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마에서 눈썹으로 이어지는 긴 흉터가 있는 남자가(저건 둔기열상이 분명해.) 조심스레 쿠로오에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대장님 경과가 어떻습니까? 퇴원은 언제쯤..”
“대장? 아. 마츠카와 환자분 말인가요.”
“예, 맞습니다! 저희 행동대 대장님이요!”
자신의 대장님에 대한 뿌듯함이 넘치는 남자 덕분에 쿠로오는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 하나를 습득했다. 와.. 대장님이셨구나.. 행동대.. 하하. 처음 응급실에서부터 몸이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근육이 꾸준한 운동과 헬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됐다.
“일단 헤모박을 제거한지 얼마 안된데다가 현재 들어가는 약이 좀 독한거라.. 솔직히 이런 부상이면 두달은 입원해야 합니다.”
“두달.. 끄응.. 알겠습니다.”
“그럼 더 궁금하신 건 없으신가요?”
그린 듯한 미소를 베어물고 웃으며 그렇게 묻자 남자는 괜찮다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병실 안으로 냉큼 들어간다. 행동대장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쿠로오가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우르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다른 선량한 환자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광경이었다.
*
다음날, 회진을 마치고 CT를 찍은 환자의 검사결과를 체크하는 리에프의 옆으로 쿠로오의 늘씬한 그림자가 기울어졌다. 키도 덩치도 보통이 아닌데 이상하게 쿠로오의 발자국은 소리가 옅었다. 리에프가 입밖으로 심장을 토할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이유도 바로 그 소리없는 접근 뒤의 날벼락 같은 호통 때문일 것이다.
“리에프. 너 워크샵 갈래?”
“에..엣.. 왜여..?”
쿠로오의 상냥한 미소를 마주한 리에프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으로 주춤 물러났다. 꼬박 이틀동안 하드한 병원생활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렇다고 냉큼 물기엔 리에프는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일단 가려면 내 환자들을 쿠로상에게 인계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무진장 혼날 테고..
“왜. 간 김에 교육좀 받고 좀 쉬다 오지?”
“너무 갑작스럽네여!?”
“흐응. 평소라면 좋다구나 하고 달려들 녀석이.. 너 숨기는거 있냐? 타블렛 내놔.”
숨기는게 아니라 요새 쿠로상 너무 무섭다구여!! 리에프는 그렇게 울먹이면서 기어코 타블렛을 빼앗겨 담당 환자들의 차트를 낱낱히 공개하는 수밖에 없었다.
리에프는 억울했다. 일주일 전 ER환자를 쿠로오상 담당으로 올린 뒤 선배에게 불합리하고 무자비하게 태워지고 있었다. 다이치 선배에게 살려달라며 하소연했지만 그는 그저 웃으며 덕분에 실수가 줄었잖아~ 하고 넘어가버린다.. 이 병원 어디에도 제 편은 없어여!
쿠로오가 리에프의 실수를 발견할 때마다 사정없이 쥐어박는 통에 회진시간에 교수님께 정강이를 걷어차이는 횟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대신에 리에프는 쿠로오의 그림자만 보아도 심부전증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리에프. 이 환자 pre OP처방을 이따위로 내면 어쩌라는 거야.”
“엣..”
“chemo port제거는 따로 협진 받을것도 없잖아. OR확보가 먼저야. 스케쥴 잡히자 마자 확인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 시작했다..! 리에프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하는데 타이밍 좋게도 다이치가 뒤에서 턱 하고 쿠로오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쿠로오, 12층에서 콜왔어. 리에프 처방은 내가 봐주고 있을께.”
“아. 땡큐. 지금 전화 아직 살아있어?”
“아니. 그냥 네가 간다고 말해뒀고.. 그리고.”
“응?”
“이번 워크샵, 네코마타 교수님이 특별히 너 지명한거 아냐? 전문의 과정 밟을꺼잖아?”
다 듣고 있었냐. 쿠로오가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쓸었다. 역시 다이치 선배! 짱 쎄여..! 리에프의 눈동자에 선망의 빛이 울망울망 들어찬다. 다이치는 40대 이상 중년 여성에게 유독 강력하게 어필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쿠로오의 등을 다시 한번 가볍게 쳤다.
“그 환자 때문에 그래?”
“응?”
“까다로운 환자라며? 지금도 그 환자때문에 콜 온거 같던데. 드레싱은 내가 맡을테니까 너무 걱정말고 다녀와.”
다이치의 호의어린 토닥임에도 쿠로오는 내심 마음 한구석이 껄쩍지근했다. 내가 이런 말 하면 진짜 웃길 거 같은데.. 그 환자 나랑.. 그.. 썸을 타는 것 같거든..?
응급실은 병원 후문쪽에 위치해 있었다. 내려간 김에 응급실 당직실에 늘어져있던 보쿠토의 뒷덜미를 들어올려 자판기로 이끌었다. 바짓단을 걷어올린 슬리퍼 차림에 가운은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보이지도 않고, 마스크를 턱 아래 대충 고정한 모양이 교수님이 보았으면 기어코 한소리 들었을만한 불량한 모습이었다. 하품을 하며 턱을 긁는 모습이 전반적으로 구렸다.
쿠로오는 분명 이틀동안 몸뚱이에 물 한방을 묻히지 않았을 보쿠토의 상태를 보며 쯧쯧 고개를 저었다.
자판기에서 포카리를 뽑아 그에게 건네는 쿠로오의 몰골도 물론 보쿠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하던가.
“오늘 ER 아카아시 아니었냐.”
“아- 일이 생겼대서.”
“쯧쯧. 안됐구만~”
“너마저 날 두고 가지 마!”
복도에 미적거리며 집에 가려면 자신도 함께 데려가라던 개논리를 펼치던 보쿠토는 결국 처방 주셔야죠! 라고 외치는 ER간호사의 출동으로 쿠로오를 놔 줄 수밖에 없었다. 하아. 피식 웃으며 닫히는 응급실 문을 바라본 쿠로오는 기지개를 쭉 피며 하품을 쩍 했다.
집에 가면 목욕부터 하고 자야지. 그럼 내일 오전 7시 교수님 회진시간까지.. 한 여섯시간은 잘 수 있겠다. 시계를 확인한 쿠로오가 이내 가볍게 발걸음을 내딛으며 병원 후문을 벗어나는 순간, 가로등 밑의 한 인영이 눈에 박혀들었다. 딱 보니 정상인의 발걸음은 아니었다.
‘취했나?’
응급실에 실려오는 갖은 꽐라들의 진상짓을 보다보면 내성이라는게 생길 법도 한데, 개지랄은 아무리 익숙해져도 개지랄이라 싫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회사원인지 검은 양복을 입은 채 비틀비틀 병원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며 막 휴대폰과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뒤에서 털썩 하고 사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방금 지나친 그 남자가 주저앉은 것도 아니고 아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봐요!”
깜짝 놀라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 남자의 어깨를 잡고 흔든 쿠로오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망할. 어째서 방금 전은 모르고 지나쳤나 싶을 정도로 비린 피냄새가 진하게 난다. 지금 보니 남자가 지나온 보도블럭 위에도 핏방울이 점점히 떨어져 있었다. 미친, 실혈량이 엄청나잖아. 지금 이 상태로 멀쩡히 걸어왔다고!? 인간이야?
의사! 아니 내가 의산데, 앰뷸런스! 미친 여기가 응급실이잖아!
잠시간의 자아분열로 혼란스럽던 쿠로오가 제정신을 차리고 축 처진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피가 나지 않은 쪽 팔을 목에 걸어 그를 거의 업다시피해 들어올린 쿠로오의 머릿속엔 피투성이가 되어버릴 그의 상의에 대한 걱정은 들어있지도 않았다.
“긴급환자야! 복부에 자상! 라인부터 확보해!”
“쿠로오 선생님!? 퇴근하신거 아니었어요!?”
“보쿠토! 처방 좀 내줘!”
쿠로오가 남자를 업고 응급실로 뛰쳐들어오자 곧 눈치 빠른 간호사가 간이침대에 방수포를 깔고 바퀴를 드륵 밀어 남자를 그 위에 눕혔다. 트레이에 실린지를 가져온 간호사가 팔꿈치에 라인을 잡는 사이 쿠로오는 혈액검사 통을 잡히는 대로 손에 쥐어 가져갔다.
“헉. 쿠로오 혹시 아는 사람이야!?”
“설마. 이 앞에서 쓰러져 있길래 데려온거야.”
“지인 아니에요!? 접수해야 하는데!”
입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보쿠토는 가위로 남자의 옷을 자르며 상처부위를 드러냈고 간호사들은 혈압을 재고 소독셋을 준비했다.
남자의 상태는 퍽 심각했다. 얼굴도 피와 작은 상처들로 엉망, 오른쪽 옆구리는 칼 같은 것으로 적어도 두번은 찔렸고, 피가 멎지 않았다. 가위로 남자의 정장을 자르던 쿠로오는 퉁퉁 부어있는 남자의 팔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조심스레 팔을 다시 침대에 내려놓는 순간 남자의 미간이 움찔 찌푸려진다. 쿠로오가 남자의 귓가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외쳤다.
그렇게 묻는 간호사의 말에 쿠로오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보호자라니! 나 저 사람 초면이야!
“지금 보쿠토 선생님 OR[각주:5]에서 전화온거 받고 계시단 말예요! 보호자 동의 없인 수술 안되는거 알잖아요! 원래 최초발견자는 보호자 노릇까지 해야 한다구요!”
그때 또다른 간호사가 혈액운반 박스를 들고 헐레벌떡 들어왔다.
“아, 마침 잘됐다. 쿠로오 선생님. 환자분 수혈있어요. 전혈이에요.”
“아악...!”
쿠로오는 짜증내며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혈액통을 받아들였다. 오늘따라 눈에 채이는 인턴들도 하나도 안 보이고, 보쿠토와 다른 의사들은 지금 사진 처방내고 OR스케쥴 조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잉여인력이라곤 쿠로오 본인뿐이다. 나는 이만 퇴근할께요~ 라고 말하기엔 쿠로오가 데려온 환자라 차마 그럴 염치가 없다. 혈액팩에 라인을 꽂고 쭈욱 공기를 내보내 남자의 팔꿈치와 연결된 쓰리웨이에 연결한다.
남자의 안색은 창백했고, 거즈와 붕대로 응급처치한 옆구리는 벌써 벌건 핏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짧은 곱슬머리가 이마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있었다.
등짝을 화려하게 수놓은 문신만 봐도 알겠지만 아무리 봐도 주먹 쓰는 형씨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만 가면 유흥가가 있어 응급실에서 이쪽 사람을 보는게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남자만큼 잘생긴 조폭은 보지 못했다- 라고 때에 맞지 않는 감상을 늘어놓고 있는데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쿠로오는 자연스레 수혈팩을 확인하는 척 고개를 들어올렸다.
“..누구야.”
“의사랍니다. 환자분, 정신이 좀 드시나요?”
“...사복이라 놀랐잖아.”
그리고 남자는 다시 기절했다, 진짜 기똥찬 능력이네. 쿠로오는 쯧 혀를 차고는 결국 남자가 수술실로 들어갈 때까지 응급실에서 손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흐아아암~”
“쿠로오 선생님. 오늘따라 머리가 강렬하네요.”
“아. 다이치 선생님.”
하품을 쩍 하며 가운을 걸치던 쿠로오는 다이치가 건네주는 종이컵을 받아들곤 입술에 가져갔다. 뜨거운 믹스커피에 입술만 적시고 컵을 내려놓자 식혀서 드릴껄 그랬나봐요, 라고 웃으며 자연스레 의국 문을 열고 쿠로오가 나올때까지 문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카라스노대병원 소화기내과 3년차 레지던트였다. 현재는 이 병원에 연구차 와있었고, 함께 네코마타 교수님 아래에서 전문의가 되기 위해 수학하는 사이였다.
“간만에 집에서 잤더니 머리카락이 좋다고 난리네요.”
“아아. 역시 의국 베개는 별로인가보네요.”
보통 오전 여섯시에 모여 간단히 담당 환자들 수술 일정과 사례들을 발표하고 일곱시 가량부터 회진이 시작된다. 회의실 앞에서 담당 환자들의 스케쥴을 체크하던 쿠로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환자목록 제일 위쪽 하늘색 표시가 되어있는 환자의 이름이 익숙했다.
‘마츠카와 잇세이.’
이 환자가 왜 나한테 와있어?[각주:6]타블렛을 터치해 환자정보를 보니 어제 응급실 통해 입원, 자상으로 인한 간손상, 복막손상, 맹장.. 아 어제 아예맹장까지 제거했구나. 수술경과를 보니 왜 소화기로 전과한건지는 알겠군. 그런데 분명 어제 소화기내과 당직이 리에프였을 텐데 왜 이 환자가 나한테 와있지. 게다가 지금 남는 병실 없을텐데. 병실을 확인하자 병원 동관 12층 VIP병동의 1인실이었다. 아아. 1인실은 이야기가 다르지..
다친 왼팔 때문인지 OS의 보쿠토에게 협진까지 처방되어 있는 상태였다. 좀 더 차트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네코마타 교수님의 등장으로 타블렛을 덮고 회의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리에프.”
쿠로오는 함께 온 다이치에게 양해를 구하고 리에프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 그래도 희멀건 녀석이 어제 밤을 샜는지 눈밑이 시꺼먼게 저승사자가 형님 하고 찾아올 정도로 안색이 퍼랬다.
“쿠로상..”
“어제 ER로 온 환자 기억해?”
“어.. 아, 쿠로상이 데려왔다는 환자 말이죠?”
쿠로오는 타블렛을 움직여 다이치가 발표하는 환자의 정보를 화면에 띄웠다. 귀로는 리에프의 말을 듣는 채였다.
“원래 제가 맡으려고 했는데, 환자분이 주치의 쿠로상 지명했다는데요. 그래서 ER에서 아예 쿠로상 환자로 위에 올렸다고..”
“지명? 여기서 호스트바냐 지명하게.”
“암튼 그렇다구요.. 제가 넘긴 거 아니에여.”
양복 꽤 비싸보였는데, 설마 내가 멋대로 옷 잘라버렸다고 손해배상 이야기 꺼내는건 아니겠지? 쿠로오는 잠시 그리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12층 환자는 귀찮은데. 일단 소화기병동인 본관 8층에서 왔다갔다 하기에 동선이 꼬이는데다 비싼 병실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만큼 걸핏하면 콜이 걸려와 오라가라 말이 많았다.
“하아.. 이몸의 인기란. 하여튼 죄많은 남자라니까.”
“죄는 그 환자가 더 많아보이던데요..”
네가 잠이 덜 깼구나. 쿠로오는 리에프의 목에 팔을 감고 그대로 체중을 꾸욱 눌렀다. 그러다 다이치의 상냥한 눈과 마주쳐 슬금 암바를 풀고 눈치만 보게 되었지만.
당연하지만 회진도 VIP병동부터 순회를 하게 된다. 8시면 막 병실에 아침식사가 나올 시간대였고, 전문의, 레지던트, 그리고 인턴들이라는 열명에 가까운 인원이 한분의 교수님 뒤를 쭐래쭐래 쫓아 환자와 차트를 비교하며 환자 앞에서 교수님께 대차게 까이는 순간이었다. 본격 환자 앞의 수치플레이랄까. 그러나 12층에 도착해 엘레비이터에 내렸을때, 쿠로오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스테이션의 간호사들이 소화기내과다! 왔어! 라고 작게 외치며 벌떡 일어나는 모습은 이 병원에서 일한 뒤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7호실 마츠카와 환자분 회진 오신거 맞으시죠..!?”
낯선 이름인지 네코마타 교수님이 갸웃하며 차트를 팔랑 넘겼다. 쿠로오는 교수님이 환자의 주치의를 확인하기 전에 먼저 나섰다.
“맞는데요. 무슨 일입니까.”
“아뇨, 환자분이 회진을 기다리고 계셨거든요! 이쪽이에요!”
쿠로오는 간호사의 변화에 일조한 것이 복도를 망보듯 두명씩 짝지어 드문드문 서있는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란 것을 어렵잖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병원인데, 너무하잖아. 아직 제대로 일면식도 없는 남자의 호감도가 야금야금 차감되는것을 느끼며 쿠로오는 교수님을 7호실로 안내했다. 가볍게 노크하자 인간보다는 고릴라의 생김에 가까운 덩치가 슬쩍 문을 열고 입을 열었다.
“뭐요?”
“...마츠카와 잇세이 환자분 병실 아닙니까. 회진입니다.”
남자는 뭐 어쩌라는 표정으로 쿠로오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번 슥 흩더니 힐끔 눈초리를 좁혔다. 기가 막혀서. 쿠로오는 제 뒤의 의사들이 벙찐 표정일꺼라 확신했다. 무슨 평일에 초인종 누르는 기독교 전교사같은 취급이냐.
“형님 주무시오. 낮에 다시 오쇼.”
“잠깐...!”
울컥한 쿠로오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문이 쾅 닫혔다. 쿠로오의 볼에 핏줄이 불뚝 섰다. 뭐 이런 진화 덜 된 새끼가..!
“그럼 다음 환자 가지.”
네코마타 교수님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차트를 팔랑 넘긴다. 쿠로오는 병실 문을 뒤돌아보며 홀로 짜증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탕, 하고 거칠게 식판을 내려놓는 쿠로오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점심 메뉴로 좋아하는 꽁치구이가 나온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이랄까. 쿠로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젓가락을 집어드는데 헤이! 하고 어깨가 붙들리며 옆자리로 누군가가 자릴 채운다. 쿠로오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실없는 소릴 하던 보쿠토는 식판 위의 꽁치를 들어 쿠로오의 식판에 턱 올렸다. 어멋! 이게 웬 떡이람! 쿠로오가 깜찍하게 외치며 보쿠토를 쳐다보자 나 생선은 별로야. 라고 대답하며 대신 쿠로오의 식판에 있던 감자샐러드를 숟가락으로 싹 긁어갔다. 어머 이게 웬 개떡이람.
“너 어차피 샐러드보다 꽁치 더 좋아하잖아! 아 맞다. 쿠로오, 어제 그 환자 있잖아?”
“생선만 먹으면 좀 짜단 말이지~ 그런데 그 환자라니?”
“네가 데려온 그 환자, 진짜 모르는 사람이야?”
쿠로오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제서야 보쿠토의 얼굴로 고갤 돌려 그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제 응급실 그 환자? 문신한? 응.
“진짜 몰라. 그냥 응급실 앞에서 쓰러지길래 데려온건데. 왜?”
“아. 그 사람이 너 찾았거든.”
쿠로오의 머릿속에 병실 앞을 지키던 험상궂은 남자들의 모습이 순간 스쳐지나갔다. 내가 어제 그 환자한테 뭐 어떻게 했더라. 정신차리라고 뺨이라도 때렸던가? 생각해보니 두번정도 때렸던 것도 같다.
“왜!?”
“몰라. 그냥 너 어디갔냐고 묻길래 퇴근했다 그러니까 이름 물어봤어.”
“그래서 대답해줬냐.”
“응.”
뭐 문제라도? 태연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뜬 보쿠토의 면상에 꽁치 머리를 던져버릴뻔 한 쿠로오는 한숨을 턱하니 내쉬었다. 어쩐지 리에프가 지명 운운 하더니만 보쿠토한테서 내 이름을 들었군..
뭐, 상관없지. 쿠로오는 이 생산성 없는 고민을 털어내버리기로 결정했다. 그 환자가 내 환자면 어떻게 리에프 환자면 어떠리. 어차피 리에프의 환자가 되었더라도 뒷감당은 죄다 자신이 해야 했을 것이다.. 애초에 쓰러진 남자에게 먼저 손은 내민건 자신이고 이제와 관련되기 싫다느니 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그 남자를 병원에 데리고 온 이상 빠르나 늦으나 그 환자 귀에 내 이름은 들어갔을 것이다.
“그보다 환자 왼팔골절, 어쩔꺼야? 그냥 깁스?”
“아아. 사진 보니까 수술해야 돼. Post op[각주:7]경과 보고 정하려고 했는데 환자 상태는 어때?”
쿠로오는 말없이 타블렛을 꺼내 환자의 차트를 내보냈고, 보쿠토는 더 금식시키지 말고 왠만하면 얼른 끝내버리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명 식판은 제가 먼저 퍼 온것 같은데 보쿠토는 빨리도 식판을 비웠다. 빈 식탁을 앞에 두고 옆에서 떠나질 않는 것이 혼자 밥먹는걸 좋아하지 않는 저를 배려한 거란걸 아는 쿠로오는 얼른 밥을 목구멍 안으로 우겨넣었다. 안그래도 바쁜 녀석인데 오래 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수술일정 잡히면 연락 줄께! 라고 외친 보쿠토와 헤어지고 쿠로오는 곧장 서관 1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주무시는 형님 지금쯤이면 잠 깨셨겠지.
병동으로 올라가자 마치 저만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간호사가 벌떡 일어났다. 오야? 왠일로 이렇게 적극적인..
“7호실 환자 맞으시죠!? 오신 김에 드레싱[각주:9] 좀 해주세요! 오전에 쫓겨났어요!”
이렇게 적극적인.. 떠넘기기가..
쿠로오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간호사가 내민 D-Set[각주:10]을 들고 인턴들은 어쨌냐고 물었다. 간호사는 그저 병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났다며 투덜거렸다. 어쩐지 점심때 헤모박[각주:11] 삼출물이 몇CC나왔는지 차트에 안 올라와 있더라니..
쿠로오는 예상대로 피곤한 환자라고 생각하며 병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얼핏 들어와.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어제 그 의사로군.”
이마엔 붕대, 볼에는 거즈, 왼팔은 깁스로 고정하고 구멍난 배엔 관이 연결되어 있는데다 멀쩡한 오른팔로는 세개나 되는 수액을 맞고 있는 목소리 치곤 지나치게 멀쩡했다.
“주치의인 쿠로오 테츠로라고 합니다. 초면은 아니죠?”
“아아. 솔직히 어제 봤을땐 진짜 의사 아닌 줄 알았는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더니 배가 아픈지 눈살을 잠시 찌푸렸다.
“가운 입은 모습도 의외로 잘 어울리네.”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쿠로오는 유들유들하게 받아치며 디셋을 환자 옆에 올려두고 커텐을 쳤다.
그 험상궂은 형님들은 점심시간이라고 나간 건지 병실 안은 이 환자 뿐이었다. 이래뵈도 꽤나 중환자인데, 여고생마냥 우르르 몰려다니지 말고 한명쯤은 붙어있으란 말이다..
남자의 눈썹이 제법 순박하게 아래로 쳐진데 반해, 눈매는 몹시 매서웠다. 의사와 환자로 만나 정면으로 얼굴 보지 길거리였다면 음 분명 내가 먼저 시선 피했다 싶을 정도로 살벌한 눈이었다. 쿠로오 본인의 인상도 몹시 사나워 길거리에서 무작위로 발생하는 눈싸움 따위에 단 한번도 시선을 피해본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붕대를 풀고 수술 부위를 새로 소독하며 거즈를 갈았다. 피주머니를 비우고 안에 찼던 핏물을 체크하고, 접합부를 다시 한번 거즈로 감싼다. 통증과 상처에 익숙한지 일련의 과정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쳐다보지 않던 남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어제, 날 데려온게 선생이라며.”
쿠로오는 마지막으로 남자의 배에 다시 새 붕대를 감고 테이프로 고정했다. 흐음.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다. 조용했지만 왠지 귓속에 직접적으로 꽂히는 목소리. 자신의 볼에 와닿는 남자의 시선에 어쩐지 담배가 고파질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뭐 감사받을 일이라고.”
“운 좋은 줄 알아. 내 얼굴에 손대고 멀쩡한 사람은 침대 안에 들어온 녀석들 뿐이거든.”
쿠로오는 허 하고 작게 웃었다. 대놓고 비웃을 수 없는 것은 그래도 이 남자가 아직 저의 환자이기 때문이다.
“환자분이야말로 운이 좋습니다. 저도 제 옷을 피범벅으로 만든 사람을 왠만하면 용서 못하는데, 환자는 예외거든요.”
“아하.”
환자복 상의를 대충 추스리는 남자를 뒤로하고 커텐을 열었다.
“그런데 아침잠이 많은 편이십니까? 매일 오전 8시경에 교수님이 오시는데, 기왕이면 얼굴 좀 보여주시는게 좋지 않을까요.”
오전 여덟시? 남자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시계로 시선을 올렸다.
“아아. 밤새 아파서 잠을 못 잤어. 새벽에 진통제 맞고 잤는데, 왜. 회진 오셨다가 쫓겨나기라도 했나?”
“..진통제 처방이 새벽에나 났습니까?”
리에프..! 쿠로오는 타블렛으로 환자의 지난 처방을 확인했다. 그의 말처럼 새벽 다섯시에 prn[각주:12]페치딘[각주:13] 처방이 나와 있는걸 보니 졸다가 새벽에야 일어나 부랴부랴 처방을 내린게 분명했다. 까다로운 환자였으면 진통제 안 주냐고 스테이션을 뒤집어 엎어도 할 말이 없을 일이었다. 쿠로오는 여기서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 그런데 회진이란 거 꼭 받아야 하나.”
“뭐, 입원했는데 교수님 얼굴은 봐야죠.”
“난 선생 얼굴이면 충분해.”
“하긴 제가 미남이란 소리는 많이 듣긴 합니다.”
쿠로오 딴엔 농담으로 던진 말에 남자는 입술만 끌어당겨 웃으며 눈으로 쿠로오의 얼굴을 샅샅히 흩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만져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나란 남자는 정말 죄많은 남자라니까.. 하고 웃어 넘기기도 힘들다 이런 눈은.
부러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얼굴을 돌리며 어디 불편한 곳은 없냐 물었는데, 남자는 턱끝으로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냉장고.”
“......”
의사는 네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이 환자 자식아. 그러나 결국 몸이 불편한 환자더러 일어나 냉장고로 가라 할 수 없어 쿠로오는 입가를 씰룩이며 냉장고로 걸어갔다.
“냉동실.”
냉동실.. 얼음팩이라도 대고 있으려는 건가. 미열이 좀 있긴 했는데 아이스팩을 댈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런 쿠로오의 염려와 달리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운것은 병원 지하 편의점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사온게 분명한 아이스크림 창고였다. 이정도 양이면 못해도 삼분지 일은 털어왔을 것이다.
쿠로오는 고갤 뒤로 돌려 제법 엄하게 환자를 다그쳤다.
“금식이란 말 못들으셨습니까?”
“내가 먹으려고 산 건 아냐. 더운데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가.”
“하하. 말씀은 고마운데.”
“어차피 내 주치의잖아. 먹으면서 이야기 하자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리 길게 하려고? 힐끔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를 확인한 쿠로오는 더 거절하지 않고 아이스크림 하나를 집어들어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묻고싶은 거라도 있으십니까?”
“물은 언제부터 마실 수 있는거지?”
“일주일은 꿈도 꾸지 마시죠. 그래도 수액이 지속적으로 들어가니까 갈증은 심하지 않을 텐데요.”
“아아.. 입이 건조해지는 느낌이라.”
“간호사한테 거즈 몇장 얻어서 물에 적셔 물고 있는 정도는 괜찮습니다. 대신 목마르다고 물 빨아마시면 안되시고..”
아드득 하고 아이스바를 깨물어 먹으며 쿠로오가 이어 말했다. 호기롭게 아이스크림을 먹긴 하는데, 이거 금식하는 환자 앞에서 괜히 염장지르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남자는 조용히 아이스크림을 씹어먹는 쿠로오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웃음 비슷한 소릴 냈다. 원래 많이 웃는 편인가 아니면 저런 웃음인지 으르렁거림인지 하는 목울림은 버릇인 것인가. 참 생긴 것에 어울리는 살벌한 버릇이란 생각이 들었다.
“맛있게 먹네.”
“음식을 남기면 벌받는다고 배웠거든요.”
남자는 대답 없이 입꼬리만 묘하게 치켜 올리고 상체를 뒤로 비스듬히 눕혔다. 분명 이쪽의 시선이 위에 있는데 어쩐지 내려보는 느낌이 든다.
“벌 받는거 싫어하나봐..?”
하. 쿠로오는 뒷목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벌도 벌 나름이지.”
명백히 섹슈얼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 말투에 쿠로오는 대답 없이 다 먹은 아이스크림의 막대를 휴지통에 가볍게 던져넣었다.
탕, 하고 가벼운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쿠로오는 분위기를 환기하듯 아. 하고 막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왼팔 수술해야 하는건 이야기 들으셨나요?”
“처음인데.”
“뼈가 못나게 부러져서 철심 박아야 합니다. 아마 내일쯤 수술할텐데, 저녁 전에 동의서 받으러 사람 올테니 보호자랑 대기하고 계시죠.”
“그럼 선생도 같이 오겠네.”
“예?”
“어제부터 내 보호자였잖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비죽 웃었다. 쿠로오는 상냥하게 방긋 웃으며 대답 없이 나가 문을 쾅 닫았다.
남자는 손을 들어 이마를 한번 쓱 훔쳤다. 머리를 세워 시원하게 드러낸 이마엔 벌써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때는 봄, 아직 초여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날씨였지만 번쩍번쩍 빛나는 은색의 판금갑옷을 갖춰입고 건틀렛과 망토까지 차려입은 모습으로는 확실히 더울 만한 날씨였다.
흰색과 검은색의 모발을 한껏 세워 올린 남자는 손에 들고 보던 양피지를 둘둘 말아 허리춤에 찬 가죽가방에 집어넣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슬슬 마을이 나와야 하는데..
“오오!”
울창한 숲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만 빙 돌던 남자는 이내 사람 여럿이 다닐만한 길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여기가 그 마을이구나!”
“파아-! 이거 물이 정말 시원하군!”
“어이구, 기사님이 이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로..”
마을에 들어선 남자는 마을 주민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과 허리에 멋드러지게 찬 장검, 그리고 윤이 나는 망토는 남자의 신분이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왕국 근위기사단의 제 2기사단장인 보쿠토 코타로는 잔뜩 주눅든 마을 촌장에게 시원하게 웃어보였다.
“하하, 그야 자네들이 영주님에게 탄원서를 올렸지 않나!”
“예? 예, 물론 그랬습죠!”
“근위기사단들은 몇년에 한번씩 무사수행을 가야 해. 마침 이쪽 지역으로 왕국민을 도우러 온 김에 영주님의 부탁을 받고 내가 온거야. 대체 이 평화로운 마을에 대체 무슨 고민이 있지?”
그 말에 촌장집에 모여있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상에! 왕궁의 기사님이 직접 오시다니! 촌장댁의 낡은 창틀 밖에서 기사님을 훔쳐보던 악동들은 잔뜩 신나서 전쟁놀이를 하기 위해 나무막대기를 주웠고 기사님의 훤칠한 생김에 마을 처녀들의 가슴에 봄바람이 불었다.
“듣자 하니 사악한 마법사가 있다지?”
“예, 저기 숲 안쪽으로 성이 보이십니까?”
“호오..”
보쿠토는 촌장의 굽은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짙은 수해 너머로 뾰족한 성의 지붕이 튀어나와 있었다. 숲 한가운데에 지어졌다 생각되어지지 못할 정도로 크고 웅장해보이는 성이었다.
“저기엔 무서운 마법사가 살고 있습죠.. 그동안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다만은..”
그러나 몇달 전부터 숲속에서 검은 큰 짐승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때마침 마을의 몇 없는 가축들이 야생동물에게 습격을 당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달 전에는 밤마다 짐승 우는 소리가 들리고 불을 뿜으니 마을 사람들이 무서워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사흘 밤을 꼬박 걸어가 영주에게 탄원을 넣었다.
“다행히 요즘은 밤중에 우레가 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말입니다.. 종종 닭이나 병아리들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요.”
“그렇군!”
보쿠토는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차림 음식 중에서 제일 가까이 있던 빵을 크게 이로 베어물었다. 평소 먹던 부드러운 빵과는 달리 거친 식감에 목넘김도 좋지 않았지만 시장이 반찬이었다. 염소젖으로 만은 퀴퀴한 치즈와 빵으로 대충 배를 채운 보쿠토는 촌장이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들고 숲에 난 길로 떠났다.
“아이구, 미치겠네. 자고 내일 떠나라고 할 때 그러마 할껄 그랬나.”
그리고 현재 보쿠토는 숲 한가운데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가죽 물통의 마개를 따고 있었다. 마을에서 봤을때는 상당히 가까운 성인줄 알았는데, 굽이굽이 난 숲길을 가서 그런지 아직도 성은 멀기만 했다. 밤중에 숲을 걸을 기술도 용기도 없으니 이곳에서 밤을 지내야 하는데 보쿠토는 아무런 도구도 없었다.
아무리 왕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라 해도 자는 동안 산짐승의 습격을 받으면 위험한 것이라, 보쿠토는 슬슬 본격적으로 밤을 지샐곳을 알아보야야 했다.
“가진 건 부싯돌 정도인가..”
급한대로 나뭇가지와 손수건을 이용해 횃불을 만들었다. 적당한 바위나 굴이라도 좀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숲길을 이탈할 수 없으니 길을 따라 죽 걷는다. 수도와 달리 이 울창한 숲은 아직 해가 채 지기도 전인데도 벌써부터 짙은 음영을 드리웠고, 밤을 사는 짐승들의 활발해진 소리가 조용한 숲 사이에 나직하게 울렸다.
“이거 조금 위험한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지만 횃불에 미친 기사의 눈동자는 금색으로 번뜩이며 주위를 날카롭게 흩었다.
사람의 눈동자는 야행성 동물에 비해 안광이 강하지 않다고 하는데, 남자를 보면 꼭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밤의 숲이 무섭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그는 곧 숲 안에서 작은 불빛을 발견하고 어..? 하며 눈을 깜빡깜빡 움직였다.
“헤이헤이헤이! 이봐!”
숲길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었다. 보쿠토는 무성히 자란 덤불을 제치고 성큼성큼 걸었다. 곧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공터와 함께 작은 나무 오두막이 나타났다. 작은 불빛은 바로 그 집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혹시 사람 있나!? 잠깐 나 좀 도와줘!”
보쿠토가 주먹으로 나무문을 막 두드리기 전에, 먼저 문이 끼익 열렸다. 보쿠토는 횃불을 들지 않은 손을 어정쩡하게 올리고 집 안에서 나온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런 시골 촌구석 숲 속의 오두막에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멀끔한 남자였다. 키는 보쿠토와 비슷하거나 조금 큰 것 같았지만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닌지 피부는 흰 편이었고 조금 마른 편이었다.
입고 있는 검은 옷은 시골에서 흔히 입는 아마색이나 갈색의 저렴한 천이 아닌지 약간 광택이 나고 있었다. 남자는 서늘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이 마치 자신을 비난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구?”
남자의 저음은 깜짝 놀랄 정도로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보쿠토는 살짝 열린 문 틈으로 반만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다 퍼뜩 대답했다.
“숲에서 맨몸으로 밤을 새게 되었거든! 헛간이라도 괜찮으니 좀 빌려줄 수 있어? 사례는 할 테니까.”
“흐음.. 들어와.”
보쿠토는 들고 있던 횃불을 바닥에 비벼 끄고 남자를 따라 문 안으로 몸을 옮겼다.
집 안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어보였다.
“현관에서 먼지 털고 들어와.”
막 안으로 발을 내딛은 보쿠토는 머쓱한 얼굴로 갑옷과 부츠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나뭇잎이 잔뜩 묻은 망토를 벗어 문 옆의 옷걸이에 걸었다. 아마도 저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외투 옆이었다.
보쿠토는 자신도 모르게 콧잔등을 킁, 하고 약하게 씰룩거렸다. 향긋한 약초 냄새에 섞여 정제되지 않은 기름 냄사와 아교 냄새같은게 섞여 묘한 향이 집안을 메우고 있었다.
남자가 손바닥만한 화로 안에 향료로 보이는 마른 풀을 넣고 뚜껑을 닫자 향긋한 냄새가 짙어졌다. 그는 보쿠토의 허리에 매달린 장검을 보고 물었다.
“흐음.. 기사님?”
“응. 맞아. 너는 이곳에서 사는건가?”
“보다시피. 뭔가 요깃거리라도 좀 드릴까나?”
“오오. 부탁해!”
남자의 집 안은 신기한 것이 많았다. 벽에 사슴 박제 따위가 걸려있는 걸 보니 사냥꾼인가 싶었지만 그런것 치고 활이나 올가미 따위의 도구는 보이지 않았고 가지런한 선반이나 낡았지만 꽤 화려만 무늬의 양탄자 따위가 집 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너무 집을 힐끔거리지 않으려 했지만 유리로 만든 램프며, 정체모를 것들이 잔뜩 든 병들을 보니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데 너는 사냥꾼인가?”
남자는 부엌의 화덕에서 검은 솥의 뚜껑을 열었다. 진한 우유 냄새가 나 그곳을 돌아보니 남자는 낡은 그릇에 야채와 고기가 듬뿍 든 스튜를 덜고 있었다.
“아니, 내가 사냥꾼으로 보여?”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숲에서 사는 자들은 사냥꾼들 아닌가?”
“내가 이곳에 사는건 이 숲의 약초 때문이야.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질 좋은 약초가 많거든.”
오오! 약초꾼이었구나. 보쿠토는 그렇게 납득하고는 이내 남자의 정체에 대해 궁리하던 것을 머리에서 날려버렸다.
남자는 식탁에 푸짐한 스튜 한그릇과 밋밋한 맛의 비스킷을 차렸다. 보쿠토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수저로 크게 한술 떠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음식을 집어삼켰다.
따뜻하고 기름진 음식이 위장에 닿자 몸에 활력이 돌았다. 작은 식탁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보쿠토에게 등을 보이고 화덕에 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였다.
“기사가 아니라 걸인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흠흠, 사실 배가 많이 고팠거든. 고마워.”
남자가 끓는 주전자 안에 찻잎을 넣고 보쿠토의 맞은편에 앉았을 때 보쿠토는 이미 스튜 한그릇을 거의 다 비운 뒤였다. 남자는 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찻잔 두개를 가져와 식탁에 올렸다. 이런 시골에서 보기엔 꽤나 고급스런 잔이었다.
“아니 정말로, 마을 촌장이 대접했던 빵은 먹기가 너무 힘들었거든.”
“아항.. 귀족 도련님인가 봐?”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기색은 애송이를 보는 눈빛과 비슷해서 보쿠토는 울컥 인상을 찌푸렸다.
“도련님이라니 실례야. 이래뵈도 왕궁 제 2근위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몸이다.”
“호오? 정말? 놀랍네. 거긴 실력 좋은 기사들만 입단할 수 있다는 곳 아냐?”
“으흠흠. 그렇지. 아, 자기소개가 늦었네. 나는 보쿠토 코타로라고 한다.”
“쿠로오라고 불러줘.”
남자, 그러니까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곤 찻물을 따라 보쿠토에게 건넸다. 찻잔을 쥔 보쿠토는 기대 이상의 향기에 찻물을 들고 눈을 감았다. 쿠로오도 보쿠토처럼 잠시 눈을 감고 차향을 음미하고는, 입으로 차를 머금어 숨을 한번 내쉬고는 작게 목울대를 넘겼다.
“그럼 기사님?”
“보쿠토로 충분해.”
“그럼 보쿠토씨. 이곳엔 무슨 일로 온거야?”
빙글빙글 웃으며 그렇게 웃는 남자의 모습을 본 보쿠토는 살짝 놀랐다. 수도에서 온 기사라는 것에 벌벌 떨던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약초꾼이라고 하지만 수도에서 정식으로 약학을 배우기라도 한 걸까..
“나는 숲쪽 성에 사는 마법사에게 볼일이 있다.”
“오야?”
“그래서 말인데, 저 성까지 길안내를 좀 부탁해도 될까?”
보쿠토는 일단 그렇게 묻고는 슬쩍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혼자 가기엔 숲길도 흐릿해지고, 이 깊은 숲속에 종자 한명 없이 달랑 들어가는것도 불안했다. 약초꾼이라면 이 근방 지리는 잘 알겠지.
“마법사에겐 무슨 일인데?”
“그건.. 저 성에 도착하면 알려주지.”
사악한 마법사를 퇴치하러 왔다고 하면 지레 겁먹고 도망쳐버릴 수도 있다. 보쿠토는 눈 앞의 이 남자가 겁먹은 모습이 잘 상상되지는 않았으나,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리고는 그렇게 납득했다.
“흐응.. 물론 보수는 지급하는 거지?”
“물론이지!”
“그럼 좋아. 내일 아침 출발하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또 싱긋 웃었다. 웃는게 버릇인가? 웃을 땐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부드러워지는 눈매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보쿠토는 오른손을 쭉 내밀며 쾌활하게 외쳤다.
“그럼 잘 부탁한다!”
“으응 뭐.”
쿠로오는 악수하기 위해 내밀어진 보쿠토의 손등을 한번 톡 치고 이내 그릇을 치웠다. 악수가 거절당했는데도 이상하게 면구스럽지 않은 제스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