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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이 다 해준 카페일러 au(맞나.....?) 입니당u.u
끼이익, 하는 낯선 소음과 함께 가게 안으로 햇살을 받아들이는 전면창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실루엣의 바퀴는 두 개. 바퀴를 잇는 유려한 곡선의 프레임과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위에 얹힌 안장은 들판을 달리던 건강한 야생마를 떠올리게 했다.
바이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돌아볼만한 머신 위에 올라타 있던 인영은 그것을 가게 정문 앞에 아무렇게나 내버려두고서는 한 손으로 가게 문을 밀듯이 열어제꼈다.
‘주차는..?’
적어도 길 옆으로 비껴서 세워두기라도 할 것이지, 주차는 커녕 통행인들의 이동을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위치에 떡 하니 자리잡았다.
열린 문 밖으로 제대로 보이는 ‘강철로 만들어진 탈것’의 모습이 익숙하다. 어디서 봤더라. 그래. 자신이 엊그제인가 분리수거한 잡지 표지에서 본 것 같은..
“이리오너라! 크하핳하하핫!!”
더 말할 것도 없다. 가게 출입구 중앙에 선 저 거만한 사람, 아니 영령이 누구인지 정도는.
*
평소라면 세이버를 내보냈겠지만 아쉽게도 오늘 그녀는 비번이라 가게를 쉰다. 아마 마스터인 그 꼬맹이와 함께 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가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4인용 테이블에 자리잡고 거만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금발적안의 눈길이 카운터 뒤의 아쳐와 랜서를 함께 흩고 지나갔다.
안경에 가려진 궁병의 눈썹이 구겨지고 순식간에 공기가 찌뿌둥해지는 느낌에 랜서는 그래, 이게 다 내 업보다 하며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이상하게 저 영웅왕이 껄끄러워하는 궁병 녀석이 가는 것보다야 내가 나서는 쪽이 가게가 좀 덜 시끄러워질거라는 계산이었다.
“어서오십쇼~ 주문,”
“우와! 오토바이다!”
“저거 형아꺼에요!?”
누군가를 찾듯이 가게 안을 휘 둘러보는 길가메시에게 다가간 랜서가 메뉴판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순간 허리 아래쪽에서 가볍고 야단스러운 발자국이 여럿 다가왔다.
길가메시가 앉은 테이블에서 몇 테이블 떨어진곳에 앉은 주부들이 당황하며 이곳을 쳐다보는걸 보니 어머니와 함께 온 아이들인 모양이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나 되었을까, 남자아이들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문 밖에 방치당한 바이크를 가르켰다.
“저거 만져봐도 돼요?”
천연덕스럽게 튀어나온 질문에 쿠 훌린은 괜히 헉, 하고 속으로 숨을 집어삼켰다.
보통 사람이라도 꺼릴 만한 이 요청을 이 천상천하 방약무도한 영령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거기에 아이들에게 무슨 헛소리를 지껄일 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아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랜서는 스스로의 행동방침을 정리하고 급히 주변을 스캔했다. 만약 영웅왕 뒤의 공간에서 황금빛의 일렁임이 포착된다면 바로 아이들을 데리고 카운터 뒤로 뛰어들 예정이었다. 궁병의 그 방패라면 시간막기 정도는 될 것-
“하하하하! 보는 눈이 있구나! 좋다, 내 특별히 허락하지! 바이크를 넘어뜨리지만 않는다면 위에 올라타보아도 좋다!”
“와아아!!”
“고마워요 외국인 형!!”
그러나 쿠훌린의 예상과 달리 길가메시는 흔쾌히 아이들의 요청을 승낙했다. 신나는 얼굴로 바이크를 향해 달려간 아이들은 종달새처럼 재잘대다가 신기한 듯 바퀴며 핸들 따위를 건드려보더니, 곧 파리가 앉다 미끄러질 정도로 윤기나는 프레임 위에 단풍잎같은 아이들의 손자국이 찰싹찰싹 찍혔다.
“...훗.”
“......”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길가메시는 퍽 부드러워보이는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본의 아니게 그런 영웅왕의 표정변화를 낱낱히 확인하게 된 랜서는 속으로 약간 당황했다.
아니, 당황보다는 의외라고나 할까.. 저 성격파탄자가 오늘 기분이 좋은가? 하고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어떻게든 받아들이려 하는데 생각해보니 이 녀석, 예전부터 묘하게 아이들에게만은 관대했다.
평소의 행실로는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지만 길가메시는 고대 우르크에서 현왕으로 떠받들여질 정도의 치세를 펼쳤다고 했었지..
‘아니, 그래도 역시 이상해.’
아이들에게 관대한 만큼 성인인 인간에게도 관용을 조금 베풀 수는 없단 말인가? 인간은 싫다 하면서 인간의 문명은 가치가 있다느니 하는 평소의 헛소리를 생각하면 뭐 다정해봤자 얼마나 더 상냥해지겠냐마는..
우연히 발견한 것이지만 이런 인간적인 면모는 싫지 않다. 그 영웅왕이라곤 해도 아이들은 귀여워한다? 무릇 어린이는 보호받아 마땅한 존재라 이거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영웅으로 떠받들어질 정도의 인간성은 있다는 게 아닌가!
랜서는 씩 웃으면서 길가메시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평소의 세일즈 미소보다는 약간 더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왜 그리 실없이 웃고 있느냐? 기분이 잡치는군!”
“....주문이나 하셔.”
그러나 길가메시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랜서의 미소를 무참히 깨부수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현왕은 무슨. 뒷주머니에서 빌지와 볼펜을 꺼낸 쿠훌린이 딸칵, 소리와 함께 볼펜 뒤를 누르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한 손으로 테이블 위에 메뉴판을 떨구듯 내동댕이 친 길가메시는 소파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치고 턱을 치켜올렸다.
“흥, 이딴 곳에 내 혀를 만족시킬만한 진미가 있을 리가-”
“예에, 샌드위치 정식이요. 커피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기다려라 잡견! 나는 샌드위치따위 시킨 적이 없다!”
“그래봤자 매일 오늘의 추천 메뉴같은것만 시키잖아, 너? 오늘 샌드위치는 저 빨간 궁병의 작품이라고. 점심때가 지나면 재료가 다 떨어져서 팔지도 못 해.”
“하, 페이커가 만든 음식 따위!”
“네에, 커피는 블랙이시라고요.”
“오노레-!!”
뒤에서 가게 지붕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는데도 컴플레인 하나 없다니, 이 상가의 손님들은 다들 너무 순해빠졌다. 빌지 윗부분을 뜯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카운터로 돌아가 아쳐에게 영수증 아랫부분 빌지를 내밀었다.
기분나쁜 기색으로 영수증을 받아든 궁병은 거기에 적힌 글씨를 아주 주의깊게 읽는 것처럼 내려다보았다. 아쳐의 시력이니만큼 글씨가 보이지 않는 건 아닐 테고, 음식에 무슨 독을 타야 제일 감쪽같은지 궁리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닐지?
“주방에 들어가겠다. 카운터를 부탁하지.”
“맡겨두라고.”
물론 요리에 관해서는 프로인 남자라, 자신의 작품에 그런 짓은 하지 않겠지만.
동시에 랜서는 기계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컵을 준비했다. 쟁반에 스틱형 설탕과 작은 액상크림을 던져두는 사이 테이블을 두시간째 차지하고 책을 읽던 손님이 계산을 하고 가게를 떠났다. 현명한 선택이다. 길가메시가 이 가게에 자리잡고 있는 한은 평안한 독서를 위한 환경과는 거리가 좀 멀어질 테니까.
“형, 그럼 진짜 최고속도가 170이 넘어요?”
“제대로 된 로드 레일이 아니라면 그 정도 속도까지는 낼 수가 없다! 하물며 그 짧은 팔다리로는 제대로 핸들을 쥘 수도 없지 않느냐.”
“에이, 나 말고 형이 운전할때요! 사촌 형이 가진 바이크보다 훨씬 크고 멋있게 생겼는데!”
“음하하하하하하핫!!”
실컷 바이크를 구경하고 돌아온 아이들은 길가메시 주변에서 왁자지껄 떠들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들의 위력이란거 진짜 놀랍구만.
손님이 앉았던 자리를 치우고 걸레질을 하는 동안 저 영웅왕이 아무런 시비도 걸지 않다니! 가게에 매일같이 아이들이 넘쳤으면 좋겠다.. 아니, 아예 점주에게 키즈 카페로 업종을 바꾸는 것을 권유해보는 것은 어떨까.
테이블을 정리하고 빈 컵을 수거해 카운터로 돌아가자 아쳐가 쟁반 위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막 세팅한 참이었다.
“맛있게 드십쇼~”
그 쟁반을 서빙하는 것도 자신이 할 일이다. 최대한 신속하게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포크며 냅킨을 삭삭 셋팅한다.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와 커피가 앞에 차려지는걸 뚱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길가메시는 서빙을 마치고 휙 뒤돌아 발걸음을 내딛는 랜서를 향해 손을 뻗어 꼬리처럼 뒤에서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기다려라!”
“켁!”
길가메시는 그 그립감이 퍽 마음에 들었다.
금속 재질의 장신구로 가지런히 모인 머리털이 마침 딱 잡기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졸지에 기습같은 공격을 받아 허리가 뒤로 꺾인 랜서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척추가 부서졌을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이냐, 네녀석!!!”
“나이프가 없군. 가져와라.”
“샌드위치를 먹는데 무슨 나이프가 필요하다고!?”
랜서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얼얼한 뒷통수를 어루만지며 버럭 외쳤다. 근력B랭크의 힘으로 잡아당겨진 머리털이 죄다 빠져버리지 않는게 용했다.
손에 든 쟁반이 플라스틱이 아니라 스테인리스만 되었어도 이걸 저 영웅왕의 정수리에 내리찍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가로가 아닌 세로로)
쟁반을 나붙이처럼 쥐며 으르렁거리자 길가메시는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흥! 이 가게는 손님의 요청을 마음대로 거절하는 곳인가?”
“크으윽..”
진짜 치사하게 더럽게도 이럴 때만 손님이지..!
말문이 막혀 분한 기색으로 이를 갈자 길가메시는 하.. 하고 나른하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상대방을 내려다보는 것이 마음에 든 표정이라, 랜서는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영웅왕의 그 뻔뻔한 안면을 빤히 쳐다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수개의 다종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거쳐온 랜서의 멘탈은 이정도의 진상 손님은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을 쌓은 것이다!
“자! 여기 있습니다 손님! 받으시죠!”
그래도 마냥 길가메시의 횡포를 참아줄 만큼 여유로운 것도 아니라, 랜서는 카운터에서 나이프를 가져와 탕!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테이블 위에 내던졌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튕겨오른 나이프를 가볍게 잡아챈 길가메시는 한쪽 눈썹을 휙 들어올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무례하기 짝이 없군..!”
“호오.. 자기소개 하셔?”
두 붉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쳐 스파크를 방전시키는 듯한 풍경이었다.
가게에서 유일하게 둘의 신경전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마력의 흐름을 알아챈 아쳐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고 곧 파손될 예정인 가게의 물건들을 투영하기 위해 주변을 가볍게 스캔했다.
호전적인 둘이 여기까지 와서 무기를 꺼내들지 않는 게 용하다, 고 생각했다.
“...흥.”
“쳇!”
하지만 둘은 뭔가 타협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홱 돌리며 신경전을 끝냈다. 둘을 주시하던 아쳐가 팔짱을 낀 채 투덜거리며 다가오는 랜서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
뒷통수를 매만지며 인상을 쓰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은 언짢아 보이지만, 생각보다 전의에 불타고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랜서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궁병의 눈길에 짜증스레 반응했다.
“뭔데?”
“아니, 머리카락이 방해가 된다면 그걸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이걸 잘라버리라고?”
“아까운 소릴 하는군. 앉아봐라.”
순식간에 까만색 참빗을 투영해낸 아쳐가 스툴을 가르키며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잠시 흩은 랜서는 냉큼 스툴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가사 전반에 대해서는 믿음직스러운 녀석이니까, 어떻게든 해주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
딱히 거창한 뭔가를 해 주려던건 아니었지만, 의외로 순순히 등을 보이고 돌아앉은 랜서를 내려다보는 아쳐의 눈빛이 조금 복잡해졌다. 대체 이 서번트는 어째서 이렇게..
“이 머리장식, 잠깐 풀겠다.”
“아. 괜찮아.”
사투를 벌였던 영령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온단 말인가.
그 세이버조차 자신의 영역에 허락도 없이 다가오는 영령에게 있어선 긴장을 풀지 않는데, 그렇다고 그가 아예 스스럼없이 약점을 내보이고 있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과 달리 손은 멈추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달칵,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머리장식이 풀리자 서늘한 감촉의 머리카락이 손바닥 가득 잡힌다. 촘촘한 참빗으로 한번 빗었는데 걸리는 곳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머릿결이었다.
“......”
반사적으로 머리에 대한 칭찬을 내뱉으려던 궁병은 입술 안으로 말을 꾹 삼켰다. 여성도 아니고, 아일랜드의 대영웅이나 되는 남자에게 그런 칭찬은 조금 부적절한것으로 느껴졌다. 딱히 머리카락 말고도 그를 수식하는 멋진 말들은 잔뜩 있지 않은가.
그래도 이 창병의 머리카락을 이렇게 가까이서 만질 수 있는 날이 올거라고는..
신화 속의 영웅을 동경했던 남자로써 제법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오, 끝났어?”
“별 것 아니었다.”
중구난방인 머릿속과 달리 입밖으로 나오는 말은 차분했다.
그리고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뒷통수 정중앙에서 모아 묶은 머리를 조금 옆으로 옮겨 머리카락을 앞으로 넘기기 쉽게 만들었을 뿐 딱히 솜씨가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호오.. 하고 소리내어 감탄한 랜서는 거울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만족스레 웃었다.
“음! 맘에 든다! 이제 뒤에서 누군가가 함부로 머리를 잡아당기는 일은 없겠지!”
“훗.”
“내일도 좀 부탁한다고?”
“스스로 해라.”
내일도 랜서의 머리카락을 만질 수 있다니.. 라고 들뜨기 시작한 속내와 달리 싸늘하게 나간 대답에도 랜서는 사람 좋게 웃으며 그래, 그래! 하고 대충 대답하며 아쳐의 어깨를 두들겼다.
*
찰싹 달라붙어 노닥거리는 둘을 꼴 보기 싫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길가메시가 커피잔을 막 들어올린 순간이었다. 손가락에 얇게 감긴 푸른색 실타래를 발견한 그는 커피를 내려놓고 손을 눈 앞으로 들어올렸다.
얇은데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선명한 푸른색. 실이 아니라 손바닥에 남은 누군가의 머리카락이란 걸 깨달은 영웅왕은 손을 털어내려다 잠시 멈췄다.
자연스레 인간들 사이에 녹아든 남자라 그리 보이지 않지만, 사실 푸른색은 자연적으로 발현하기 힘든 색이다. 염료로 푸른색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도 겨우 중세에 들어서였고 그 전까지 푸른색은 왕후장상에게만 허락된 고귀함의 상징이었다. 꽃이나 동물중에서도 푸른색을 지닌 것이 없는데 하물며 평범한 인간이 푸른색의 체모를 가질 수 있을 리가.
이 머리카락이 아마도 그가 가진 수많은 반신의 증거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 같잖아졌다.
손가락에 감긴 머리카락을 다른 쪽 손가락으로 떼어내 들어올린 순간, 하하하! 하고 경쾌하게 웃는 웃음소리가 가게 안을 메웠다 금새 사라졌다. 웃음을 뚝 멈춘 랜서는 궁병의 어깨를 팡팡 두들기며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폼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흐음..”
말로는 앙숙이니 악연이니 하지만 깨닫고 보면 열에 다섯번은 둘을 동시에 발견한다. 저런 녀석과 딱 달라붙어 다니다니 비위도 좋지, 적응력만큼은 놀랍다. 어쩐지 기분이 언짢아진 길가메시는 손가락으로 잡고 있던 푸른 머리카락 한 올을 허공으로 떨어뜨렸다. 가게 바닥이 아닌 금색으로 빛나는 공간의 틈새에 삼켜진 머리카락을 확인한 길가메시는 랜서가 보았다면 일단 뒤로 한보 물러날만한 얼굴로 웃으며 어깨를 의자에 기댔다.
이 것으로 저 잡견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열가지는 된다.
딱히 복잡한 수를 쓰지 않더라도 충분히 곤란하게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그래서야 재미가 없지. 저 주제도 모르는 광견이 먼저 무릎을 끓고 빌게 만드는 일이라든가.. 아니면 꼬리에 불이 붙은 모양새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꼴이라든가..!
“후후.. 하하.. 하하하하하핳하하!!!!”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영웅왕을 수상한 눈으로 바라본 창병과 궁병은 소음을 참지 못하고 슬슬 자리를 뜨려고 하는 손님들을 바라보며 서로를 찔러댔다.
“왜 갑자기 웃지..? 야. 조용히 좀 시켜봐.”
“갑자기 세이버의 얼굴이라도 떠올린게 아닐지? 네가 먼저 가라 쿠 훌린.”
“저거 지금 칼 들었다고!”
“그 칼을 가져다 준 게 본인이 아닌가!”
“빌어먹을..!”
커플링적인 텐션이 너무 없는 글 같지만... 제 양심은 에미야밥에서 랜서가 그런 가슴으로 나온 순간 사라져버렸으니까요u.u)*
[궁창] 천리안 C. 3 (0) | 2018.0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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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과 5편 사이에 19금부분이 있으나(편집하다가 뒷부분에 있던게 앞부분으로 이동함) 웹공개하지 않습니다.
냥온에서 나오는 신간에서 완전판(?)을 읽어주세요.ㅠㅠ
보쿠토의 느닷없는 방문은 그로부터 몇번이나 더 이어졌다.
2학년때 이후 거의 하지 않던 섹스도 보쿠토가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에 얼결에 몇번이나 해치웠다.
엊그제는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무단침입을 해가지고는, 아침에 이상하게 머리가 뜨끈해서 봤더니 머리맡 베개에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여름이라 창문을 살짝 열어두긴 했는데 방충망은 대체 어떻게 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심심해서 이러는 건가?’
처음 한두번은 대체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했는데 꾸준히 이러는걸 보니 그냥 귀염받는게 좋아서 이러나 싶기도 했다.
보쿠토의 어리광을 이대로 받아줘도 되는 건가, 아니면 이 버릇없는 부엉이를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 하나.
쿠로오는 모니터에 틀어진 액션영화에 흠뻑 빠진 부엉이, 아니 보쿠토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가 날개 아래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올렸다.
깃털로 부풀어 있다지만 사이즈가 사이즈라서 꽤나 묵직하다.
“얌마.”
“호우!?”
무릎에 이 버릇없는 솜뭉치를 턱하니 기대어놓고 일부러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보쿠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다 심상찾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퍼덕이던 날개를 바로하고 눈을 느리게 끔벅거렸다.
문제는 저 반질반질한 유리구슬같은 눈동자가 빤히 쿠로오를 쳐다보면 그는 도저히 표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핫!’
잠시 이성을 잃은 사이 저도 모르게 부엉이의 포근포근한 몸뚱이를 잔뜩 쓰다듬어 버리고 만 쿠로오가 퍼뜩 눈을 치켜떴다. 팔자 좋게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날개를 슬쩍슬쩍 파닥거리는게 얄밉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깃털 보송한 부엉이의 귀여움을 쿠로오는 그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알아버렸으니까!
*
“보면.. 쿠로오는 사람일 때 나보다 부엉이일때 나를 훨씬 귀여워하는 것 같아.”
보쿠토는 카페에 앉아 에이드의 빨대를 입에 물며 불쑥 그렇게 중얼거렸다.
보기로 한 영화가 매진이라 쇼핑이나 할까 하던 참에 불쑥 호텔에 가자길래 단칼에 거절했더니 저런 얼굴이다.
“? 객관적으로 부엉이인 쪽이 훨씬 귀엽잖아?”
“너무해!”
쿠로오의 말에 보쿠토는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충격먹은 얼굴로 양 뺨을 감싸쥔다.
보쿠토 본인도 부엉이일때의 자기가 귀여운거 알고 엄청 써먹고 다니지 않나? 새삼스레 왜 이런 반응인가 싶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쿠로오 너는 사람일때의 내가 더 귀엽다고 해 줘야지!”
“내가? 왜?”
“힘세고 오래가는 코타로가 귀엽다고 했잖아!”
“다 닥쳐...”
보쿠토의 말에 쿠로오는 민망한 얼굴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요즘 너무 자주 보쿠토랑 잤나..? 횟수나 빈도를 좀 줄여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보쿠토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쿠로오 뭔가 안 좋은 생각 하는 거 같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귀신같은 자식.
“힘세고 오래가는 코타로여도 오늘은 안 돼.”
“치이. 쿠로오는 안 쌓였어?”
“쌓이기도 전에 네가 달려들어서 말이지.. 솔직히 피곤해.”
쿠로오가 단호하게 보쿠토의 말을 자르자 이번에야말로 축 처져서는 책상에 엎드린다. 이쪽은 누구처럼 체력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니거든?
“으.. 대신 나중에 하고 싶으면..”
“응?”
“꼭 나한테 연락해야 돼.. 다른 사람이랑 하면 안 돼..?”
울먹이는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보쿠토의 얼굴은 퍽 귀여웠다.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단 쇼핑이나 좀 할까? 테이핑용 플라스타가 다 떨어졌거든.”
“쇼핑 하고 우리집 갈래?”
“오늘은 안 된다고 했다.”
“칫.”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드는 보쿠토의 말을 간단하게 블록한 쿠로오는 얼음만 남은 플라스틱 컵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합적인 의미로, 쿠로오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우선순위라는게 있었다.
***
기말고사가 끝난 직후의 주말합숙이었다. 본격적인 여름방학 합숙 전의 워밍업 같은 느낌이었는데, 기말고사 낙제는 보충수업 때문에 합숙에 참가하지 못했으므로 다들 시험지 답을 맞춰보며 자신의 성적을 한탄하기 바빴다.
“영어가.. 영어가 아슬아슬해요!”
“우와 리에프 너, 외국어 달인처럼 생겨서는.”
“제 영어 실력은 워킹데드에 나오는 좀비 수준인걸요..”
“심각하잖아!?”
금요일 오후부터 시작된 합숙은 토요일 친선경기를 마치고 끝나는 일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합숙에 참가한 것은 후쿠로다니와 네코마, 그리고 신젠이었는데 우부가와는 기말고사 일정이 늦춰져 여름방학합숙부터 참가하게 되었다.
단 이틀뿐인 합숙이었지만 쿠로오의 가방은 상당히 묵직했다. 속옷과 양말을 네 장 챙기고 갈아입을 옷을 세 벌 챙기면 아무리 여름옷이라도 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찬물에 빠지면 고양이가 되는 주천향의 저주는 쿠로오의 생각보다 범위가 넓었는데, 아무래도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는 상황에 더 자주 처하는 것까지 포함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최근 일 년간 실수로 찬물에 맞은 횟수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길바닥에서 넘어진 횟수를 훌쩍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사람으로 등교해 고양이가 되어 하교하는 일이 생기니 배구부는 물론이고 같은 반 같은 학년 중에 쿠로오가 이런 특이체질을 가졌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차라리 보쿠토처럼 날아다닐 수 있는 동물로 변하면 좋을 텐데. 집까지 날아가서 다시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가지러 오면 되니까. 고양이로 변할 때마다 켄마에게 신세를 지는 것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먀아.(젠장.)”
쿠로오의 예상은 거의 맞아 떨어졌다.
첫째 날은 보쿠토와 장난치다가 미끄러져서 한 번, 그리고 저녁 먹고 식당에서 정수기 컵이 무너지는 바람에 두 번. 둘째날에는 지나가다 개수대 수도꼭지가 튀어나가서 한 번에 학교가 빈 줄 알고 3층에서 화분 물을 그냥 내다버린 원예부의 테러에 두 번.. 단 이틀만에 네 번이나 고양이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젠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젖은 옷 위에 그대로 주저앉아 물에 젖은 앞발을 할짝이는 쿠로오의 귀가 아래로 축 처졌다.
위에선 죄송해요!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하고 성의없이 외치곤 교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고.. 옆에서 시바야마가 어쩔 줄을 모르고 있길래 슬쩍 일어나 옷 위에서 비키자 얼른 젖은 유니폼을 들어올렸다. 물기를 짠 뒤 비닐에 넣어서 가방 안에 넣어주는 것은 네코마의 배구부원이라면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젖은 털을 푸르르 털고 힘없이 체육관으로 네 발을 옮겼다. 합숙 마무리를 하는 시간이니까 다들 모여있을테고 말없이 땡땡이를 칠 수는 없으니 가서 변한 모습이라도 보여야 했다.
“어라? 왜 또 변했어?”
벤치 위에 올라가있던 시야가 갑자기 쑤욱 높아지며 보쿠토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쿠로오의 목덜미를 잡고 번쩍 들어올린 보쿠토는 헝겊인형처럼 축 처진 고양이를 약하게 탈탈 흔들었다. 아직 축축한 검은 고양이는 자신을 들어올린 손이 불편한지 짜증스러운듯 올려다보며 목을 울린다.
“2층에서 화분 물 버리다가 쿠로오 머리 위로 쏟았대.”
“또? 어쩐지 자주 당하네 쿠로오는.”
“먀앜.(남말하네.)”
자신이 목격한 것만 해도 보쿠토는 이번 합숙에서 세번이나 부엉이로 변했다. 차이점이라면 보쿠토는 스스로 찬물에 기어들어갔다는 것 정도일까. 어쩌면 이거, 피하면 피할수록 더 집요하게 찬물에 맞게 되는건 아니겠지..?
어쩐지 신빙성 있는 추측에 몸을 부르르 떨자 보쿠토가 쿠로오를 품에 끌어안았다.
“추워?”
“냐-(아니.)”
“여분 옷은 있고?”
“냐아-!(없어!)”
옷은 커녕 속옷도 없어서 노팬티 차림으로 마르다 만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가게 생겼다.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하악질하자 보쿠토는 고양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주며 쿠로오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짜증났구나? 그럼 우리집 가면 되잖아. 네 속옷도 있고.”
“왜오옹?(지금?)”
“이렇게, 나랑 같이 전철타면 되지. 오늘저녁에 약속 있어?”
합숙 끝나는 날에는 왠만하면 약속은 잡지 않으니까 상관 없지만..
인상 더러운 검은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보쿠토는 쿠로오를 으쌰 들어올려 져지 안에 넣고 지퍼를 올렸다. 보쿠토의 가슴 즈음에 얼굴만 비죽 내놓은 쿠로오가 낼름대며 혀로 코를 햩고는 왜옹왜옹 하고 소리를 냈다.
“웅냥웅앵..!(가방 챙겨야 하는데.)”
“알았어. 쿠로오 네 가방이 이거야?”
쿠로오의 속옷이 왜 댁에 계세요? 라고 차마 묻지 못하는 켄마가 소태를 씹은 표정으로 쿠로오의 가방을 건네자 보쿠토는 그것을 자신의 빈 어깨에 걸쳐매고 히죽히죽 웃으며 고양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긁었다.
아주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이다.
지하철에서 온갖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보쿠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폴짝 뛰어내린 쿠로오를 보며 퍽 아쉬운 티를 냈다. 기왕 귀엽게 변한거 예전처럼 좀 더 오래 고양이로 있어도 좋을텐데.
핫초코에 퐁당 들어간 마쉬멜로우처럼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쓰다듬어 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애우웅..”
“알았어, 앞에다가 속옷이랑 놔둘 테니까 샤워하고 와.”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욕실 앞에 간 쿠로오가 보쿠토를 뒤돌아보자 보쿠토는 쿠로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것처럼 대답했다.
욕실 문을 뒷발로 밀어 닫은 쿠로오는 욕조 턱 위로 폴짝 뛰어올라 앞발로 온수 레버를 움직였다. 의외로 뻑뻑해서 한참동안이나 레버를 밀고 샤워기를 켜자 차가운 물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
반사적으로 털을 세우고 펄쩍 뛰어올랐다가 욕조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이 온수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문 밖에서 보쿠토가 ‘속옷이랑 갈아입을 옷이랑 놔뒀어!’ 하고 외치기도 전에 쿠로오는 이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확실히 보쿠토가 편하기는 해.’
하루에 몇 번이나 물을 맞아 비린내가 나는 듯한 머리카락 위에 샴푸를 잔뜩 펌핑해 문질렀다. 따뜻한 온수에 우리집도 아닌데 익숙해진 욕실, 무엇보다 샤워를 마치면 보송보송한 새 옷이 준비되어 있다는 점이 마음을 평화롭게 했다.
부엉이일 때가 아니라 사람일 때인데도 내가 뭐라고 말하는지 딱딱 알아듣다니, 보쿠토는 어쩌면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에도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부엉이가 할 말이 있다는듯 눈을 또랑또랑 마주보며 호우호우 울거나 답답한듯 날개를 퍼덕거려도 시끄럽거나 귀여울 뿐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못 알아듣겠던데 말이지.
‘...아니, 사람이 동물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당연한 건데.’
생각해 보면 내가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건 찬물을 뒤집어썼을 때 뿐이잖아? 그럼 보쿠토도 고양이일때의 내 말을 못 알아들어야 하는게 맞지 않나? 샤워타올을 정리하고 몸을 깨끗이 헹군 쿠로오는 수건을 머리위에 올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보쿠토는 대체 언제부터 고양이인 내 말을 알아들은 거지?’
*
보쿠토가 준비한 옷을 입고(어쩐지 익숙한 속옷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보쿠토의 방에 도착해 문을 벌컥 열었다.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보쿠토 눈이 노랬나 싶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가 보쿠토의 양 볼을 손으로 잡고 눈을 자세히 살폈다. 당황한 듯 깜빡거리는 눈동자가 꼭 부엉이일 때의 그 독특한 눈동자를 닮은 것처럼 보였다.
“왜, 왜 그래?”
“조용히 좀 해봐.”
보쿠토 이 녀석, 원래 눈동자 색이 노랗기는 했는데 예전과는 좀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하던 보쿠토는 설레는 표정으로 눈을 살포시 감고 입술을 주욱 내밀었다. 그제서야 쿠로오는 미간의 주름을 풀고 피식 웃으며 보쿠토의 얼굴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장난하는거 아니거든요?”
“뽀뽀하려는거 아니었어!?”
“뭐가 예쁘다고 뽀뽀를 해 줘.”
이 정도면 이쁘지 않냐고 투덜대는 보쿠토를 두고 쿠로오는 침대 아래 방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쿠토 너 평소에 부엉이로 얼마나 변해있어?”
“응?”
“언제부터 고양이인 내 말을 사람일 때부터 알아듣게 된거야?”
“잘 모르겠는데..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봐?”
“얼른 대답해봐.”
단호한 쿠로오의 말에 보쿠토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젓다가도 퍽 성실하게 대답을 했다. 눈동자를 데구르르 위로 굴려서 뭔가를 가늠하더니 느릿하게 입을 연다.
“어.. 일주일에 네, 다섯번쯤..”
“등하교 할때만?”
“주말에는 하루 종일 변해있을 때도 있고..”
“하루 종일!?”
“연습 없는 날만이야! 나 요즘 기록 갱신중이거든.”
“무슨 기록을..”
“수리부엉이가 시속 20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다길래, 그만큼 속도는 내고 싶어서 열심히 연습하고 있지!”
연습이 없는 날에도 연습을 만들어서 하고 있다니.. 쿠로오가 얼빠진 표정으로 보쿠토를 내려다보자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겐 비밀이야! 라고 속삭이며 뿌듯한 얼굴로 코끝을 슥 문질렀다.
“대체 왜?”
“그야, 너희 집에 갈 때 빨리 날아가고 싶으니까!”
“하아?”
쿠로오가 뜨악한 눈으로 보쿠토를 돌아보자 양팔로 쿠로오의 어깨를 덥썩 안고는 어리광을 부리듯 이마를 어깨에 문질렀다. 반사적으로 그런 보쿠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던 쿠로오는 아차 하는 얼굴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보쿠토가 언제부터 이렇게 스킨십이 많아졌지?’
보쿠토와 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기는 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하루종일 찰싹 붙어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냐고 물으면 그건 둘이 주천향에 빠진 다음일 것이다. 아니 왜, 귀여운 동물한테는 프라이빗한 거리감이라는게 거의 사라지니까 말이지.. 부엉이일때 하도 자연스레 쓰다듬고 만졌더니 그게 사람일때도 크게 어색해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자연스레 보쿠토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쓰다듬는 본인 생각은 하지 못한 쿠로오가 얼떨떨한 눈으로 자신의 옆에 찰싹 붙어앉은 보쿠토를 복잡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건 단순히 섹스를 하는 것과는 약간 다른 종류의 스킨십이다.
그렇고 그런 의도가 담겼다기 보다는 주인님에게 치대는 애완견 같은 느낌..? 지금은 두 팔 두 다리 다 있는 사람인데도 거의 부엉이일때와 다를 바 없을 정도의 치근덕거림이었다. 무의식중에 쓰다듬을때는 몰라도 깨닫고 보면 친구사이, 아니지 동년배의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라기엔 좀 과했다.
‘이거 혹시.. 저주가 점점 강해지는건 아니겠지?’
문득 어떤 가정을 떠올린 쿠로오의 손길이 느릿해졌다.
지금은 뜨거운 물에 닿아 겉모양은 사람으로 변했지만 ‘머리’쪽은 완전히 사람이 되지 않은 거라면? 주천향의 저주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져서 언젠가는 사람이 되지 않고 영영 동물로 변해버리는건 아닐까?
자신은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보쿠토만 이렇게 애교가 넘치는 성격으로 변한걸 보면 평소에 얼마나 동물로 변해있느냐에 따라 저주의 강도가 달라지는 걸지도 모른다. 만약 어느 순간 보쿠토가 사람이 되기 위해 뜨거운 물에 들어갔는데 사람으로 두 번 다시 변하지 않는다면..
쿠로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빠졌다.
“보쿠토!”
“응?”
쿠로오는 보쿠토의 양 어깨를 단단히 잡고 비장하게 외쳤다.
“너 이제 되도록이면 부엉이로 변하지 마!”
“엥? 갑자기 왜 그래, 쿠로오..?”
“그..”
심각성이라고는 쌀 한톨 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보쿠토의 목소리에 쿠로오는 언성을 높이려다 말을 꿀꺽 삼켰다. 보쿠토가 점점 부엉이처럼 단순해진다는 건 아직 가정일 뿐 확실한 것도 아니다. 괜히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했다가 보쿠토 이 녀석, 잠도 못자고 안절부절하거나 그때처럼 펑펑 울면 대신 달래줄 사람도 없고.. 뭣보다 사서 걱정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쿠로오는 자신을 말똥하게 쳐다보는 보쿠토를 보며 내뱉으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대신 외쳤다.
“보쿠토. 우리 꼭 저주를 풀자.”
“뭐어...”
“그것만큼은 내가 책임질테니까!”
쿠로오의 비장한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건지, 보쿠토는 응! 하고 민들레처럼 환하게 웃으며 쿠로오의 어깨에 얼굴을 치댔다.
주먹을 불끈 쥔 쿠로오는 결연한 얼굴로 시선을 위로 향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맑거나 흐린 하늘이 아니라 보쿠토 방 천장에 매달린 전등뿐이었지만 나름대로 진지했다.
옛말에 결자해지라고 했었지.. 보쿠토를 이런 웃기는 체질로 만든 책임을 방기할 생각은 없었다. 본인이 이렇게 부엉이로써의 삶을 즐기느라 원래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면 보쿠토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었다.
‘일단은 부엉이로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해.’
쿠로오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마침 적당한 조력자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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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까지 웹공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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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 늘어지게 늦잠을 자던 쿠로오는 뭔가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인상을 쓰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툭툭툭, 빗방울 소리 같기도 하고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한게 묘하게 자꾸 신경을 긁었다.
‘으으..’
그래도 당장 잠에서 깰 정도의 소음은 아니었다. 눈을 감고 버틴 보람이 있는지 어느새 소음은 멎었다. 그러나 다시 서서히 잠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쿠로오를 비웃듯, 바닥에 놓인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하며 전화의 착신을 알렸다.
“여보세.. 켄마? 왠일이야?”
[쿠로, 일어났어?]
“자고 있었는데.. 왜?”
[창문. 확인해봐.]
창문? 쿠로오는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졸음이 채 떨어지지 않은 얼굴로 비척이며 책상 위 창문으로 다가가자 어쩐지 익숙한 실루엣이 불쑥 튀어나왔다. 퍼덕퍼덕하고 낯익은 날갯짓 소리는 덤이다.
“호우우-!”
“뭐야.. 아까 그거, 너였냐.”
쿠로오의 창문을 두들겨 댄 것은 도심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수리부엉이었다.
덩치도 왠만한 강아지 저리 가라 할 만큼 큼직해 위협적일 법도 한데, 동그란 눈 하며 깨끗하고 보송보송한 깃털, 그리고 목에 맨 스카프가 아주 깜찍했다.
..사실 스카프를 두른 건 단지 귀여움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비교적 흔한 동물인 고양이가 되는 쿠로오와 달리 보쿠토는 부엉이로 변해버리게 되는데, 왠 수리부엉이가 주택가 근처에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천연기념물을 보호한답시고 119가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즉 저 스카프는 사람이 키우는 티를 내어 함부로 야생동물 보호센터에 전화하는 것도 막을 뿐더러 불시에 사람이 되었을 때도 꼭 필요한 부위만큼은 가릴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갑자기 여긴 왠일이야?”
창문을 열고 보쿠토를 안으로 들이자 녀석은 꼭 사람처럼 두 발로 저벅저벅 걸어 책상 위로 자리잡고 앉았다. 또 전철타기 귀찮다고 변해서 온 거겠지. 전에 이 녀석이 벗어두고 간 옷이 있으려나... 아직 세수도 하지 못한 얼굴로 그렇게 묻자 보쿠토는 작게 호우웅.. 하고 울더니 침대로 폴짝 점프했다.
쿠로오는 더 묻지 않고 보쿠토를 덜렁 들어 품에 안은 뒤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따끈따끈하고 보송보송하다. 좋은 향기가 나는 보드라운 가슴 깃털을 뭉개듯 손가락을 넣어 슬슬 긁어주자 기분이 좋은지 눈이 감겨서는 소리 없이 부리를 열었다 닫았다 한다.
‘요즘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보쿠토가 단순하긴 해도 이유 없이 어리광을 부리는 녀석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동물로 변하는 체질을 공유하는 사이인만큼, 남들은 알기 힘든 여러 애로사항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당사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보쿠토의 행동은..
열에 아홉은 스트레스 때문이다!
동물로 변하게 되면 사고가 단순해진다는 건 유경험자인 보쿠토와 쿠로오가 동시에 인정하는 사실이다. 내가 쿠로오 테츠로이며 사실은 사람이고 잠깐만 이런 몸이 되었다는 인식이 사라지는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식욕이나 다른 단순한 충동을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가만히 있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서 고양이가 어째서 밤마다 우다다 날뛰곤 하는지 본의 아니게 체감하고 있었다.
물론 그에 따른 장점도 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생각이 복잡해질 때 동물로 잠깐 변했다가 돌아오면 잡생각이 깊게 가라앉고 오래 명상이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명료해지는데 그건 꽤 쾌적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뒹굴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고양이로 변한 채로 기분 좋은 부분을 잔뜩 맛사지받고 노골노골 해져서 하릴없이 골골거리고 싶을 때라든가.
하지만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이렇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것도 서로에게 뿐이라, 쿠로오는 보쿠토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 묻는 대신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가슴팍의 포근한 솜털을 실컷 매만지고는 양쪽 날갯죽지 안쪽을 손가락으로 주물주물 맛사지 해주다가, 깃털이 난 방향으로 길게 긁어주자 부엉이는 갓 찜통에서 나온 찹쌀떡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렸다. 쿠로오의 가슴 위에 엎어져서는 양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 새액 새액 잠든 부엉이를 만지작대던 쿠로오도 어느새 눈을 감고 수마에 몸을 맡겼다.
품 안에 이렇게 따끈하고 부들부들한 것을 안고서는 더 버티는 것도 무리였다.
*
“으.. 보쿠토..?”
“헤이헤이헤이!”
쿠로오는 퍼덕이는 날갯짓에 눈을 감고 얼굴을 세차게 지나는 바람을 마주했다. 베개 위에 앉아 발가락으로 요령 좋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사람을 깨우는 게 완전 부엉이가 다 된 모양이다. 날갯바람이 그치고 나서야 쿠로오는 침대를 빠져나왔는데,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전 열시가 훌쩍 넘은 상태였다.
“나 좀 씻고 올께..”
늘어지게 하품하며 그렇게 말하자 보쿠토는 얼른 쿠로오의 목깃에 달라붙어 화장실까지 그대로 따라들어왔다. 떼어내지 않은 건 보쿠토가 왜 욕실로 가고 싶어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입에 물고 샤워기를 드니 욕조 안에 얌전히 들어선 보쿠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쿠로오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
“호, 호우!”
그 반질반질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순간적으로 옛날 할머니댁 마당에 있던 검은 눈의 순한 강아지가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쪼그려 앉아 욕조 바닥에 앉은 부엉이의 머리를 쓰담쓰담 문지르자, 보쿠토는 그 손길을 옆으로 피하며 불만스레 부리를 딱딱 부딪혔다.
“재촉하긴.”
피식 웃으며 온수로 레버를 조정해 샤워기를 틀자, 귀여웠던 부엉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익숙한 얼굴이 쪼그려앉은 눈높이까지 불쑥 솟아올랐다. 물에 젖어 축 처진 머리를 한 보쿠토에게 샤워기를 건네주었더니 넉살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기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바스 타월에 바디샴푸까지 펌핑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물에 젖은 김에 샤워까지 하려는지 아주 여유 만만이다.
보통 사람이 보았다면 꿈이겠지 하며 자신의 볼을 꼬집었을 기상천외한 상황인데도 둘은 태연하기만 했다. 사실, 이런 체질이 된지 1년이 넘어가는데 찬물을 맞을 때마다 놀랐다가는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쿠로오, 나 옷좀 빌려줘!”
“조이따 끄애우애(조금 있다가 꺼내줄께.)”
치약거품을 볼 한가득 머금은 쿠로오가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하며 시선을 세면대로 고정했다. 먼저 씻고 싶었는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욕실을 점령해 버렸다.. 이를 닦고 방에 돌아와 서랍을 뒤졌다. 분명 예전에 저 녀석이 벗어두고 간 속옷이 있었는데? 자신의 것과 섞일까봐 따로 놔두었는데 찾아보니 내 속옷인 것마냥 다른 것들과 함께 얌전히 접혀있었다. 감쪽같아서 깜빡 입어버릴만큼 기똥찬 은신술이었다.
적당한 옷을 찾아 욕실 앞에 놔두러 왔더니 어느새 샤워를 끝낸 보쿠토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고 있었다.
“어? 내 팬티 가지고 있었어?”“뿐만 아니라 깨끗히 빨아 말려서 고이 간직하고 있었답니다?”
“나도 잘 보관하고 있어!”
태연히 튀어나온 보쿠토의 대답에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던 쿠로오는 슬그머니 치솟는 위화감에 눈썹을 약하게 찌푸렸다. 보쿠토야 워낙에 자유로운 영혼이니까 그렇다 치고.. 내 속옷이 보쿠토의 서랍에 잠들어있을 이유가 뭔데!?
“내 속옷이 너한테 있다고?”
“응. 전에 비에 젖은 체육복 우리집에서 세탁했었잖아.”
“돌려받았는데?”
“속옷 따로 빨아두고 전해주는걸 깜빡 잊었어!”
흠, 그랬던가? 몇달 전 일이라 사실 건네받은 쇼핑백 안에 팬티가 포함되어있었는지 여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비용으로 하나쯤 둬도 나쁘지 않겠지 싶어 쿠로오는 별 말 없이 어깨를 으쓱 올리고 말았다.
보쿠토는 욕실 문을 닫지도 않고 쿠로오 앞에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사실 서로의 알몸에 익숙해진지는 꽤 됐지.. 아니 이렇게 말하니까 조금 어감이 이상한데.
순식간에 기분이 미묘해진 쿠로오를 아는지 모르는지 보쿠토는 수건을 목에 걸고는 활짝 웃었다.
“쿠로오 네 샴푸냄새다~”
“오야, 집착하는 남자친구는 싫은데~”
“푸하하핫!!”
내 샴푸 냄새를 기억하는건 둘째치고 저런 소리를 자각 없이 태연하게 하는 것도 정말 능력이다. 쿠로오는 보쿠토를 제 방에 밀어넣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자자, 그럼 쿠로오 씨의 샴푸냄새를 음미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씻고 나올 테니까.”
“알았어!”
느긋하게 씻고 방으로 돌아온 쿠로오는 순간 자신이 방을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자기 방인 것처럼 태연하게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던 보쿠토 때문이다. 얼굴만 돌려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보쿠토 옆에 주저앉자 보쿠토는 자연스레 수건을 들어 쿠로오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쿠로오, 배 고프지 않아?”
“그러게. 슬슬 뭣 좀 먹어야 하는데.”
“배달시킬까? 전단지 있어?”
“함부로 배달음식 시켜먹으면 어머니가 싫어해. 으음.. 라면으로 타협하자.”
아침도 못 먹은 참이라 둘은 라면 다섯개를 끓여서 배가 터지도록 먹어치웠다. 큼직한 국냄비에 계란도 네개나 풀었다.
잠도 재우고 씻겨주고 밥까지 먹였으니 슬슬 요즘 어떤 고민이 있는지 말할 차례다. 아직까지 말을 꺼낼 기미가 보이지 않는걸 보면 꽤 심각한 이야기인가 본데.. 하고 슬쩍 운을 띄우던 쿠로오는 저녁이 되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벌떡 일어나는 보쿠토를 보며 속으로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 진짜 가게?”
“나도 자고 가고 싶은데.. 교복을 안 가져왔어.”
진심으로 아쉬운 얼굴로 그리 말하는 보쿠토에게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가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이대로 가려는게 맞냐는 소리였는데.
보쿠토는 욕실 앞에 입고 있던 옷을 차곡차곡 잘 개어두고 샤워기를 켰다.
순식간에 물에 젖은 수리부엉이로 변한 보쿠토가 축축해진 몸뚱이에 달라붙은 물방울을 푸르르르 털어내자 쿠로오가 수건을 들고 욕실 밖에서 기다리다 부엉이를 주물주물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호우우우-!”
“야, 야. 스카프 매고 가.”
다행히 계절이 계절이라 부엉이 깃털은 금새 말랐다. 으쌰, 무릎 위에 있던 녀석을 책상 위에 올리자 다각하는 소리와 함께 부엉이의 꽤 위협적인 발톱이 책상에 닿아 약하게 스크래치가 생겼다. 아 맞다. 부엉이는 발톱을 못 넣지. 발톱을 빤히 쳐다보다 자신의 발과 스크래치가 생긴 책상을 번갈아 쳐다보던 보쿠토는 변명하듯 몌엫... 울고는 쿠로오의 눈치를 슬금 살피기 시작했다.
“괜찮아, 어차피 1년만 쓰고 갖다 버릴 책상이라.”
“호, 호우!”
침대 어딘가에 널부러져 있던 스카프를 목에 둘러주고는 고양이로 따지면 귀가 있을 자리에 불쑥 솟은 깃털을 슥슥 매만져 세웠다. 눈을 끔뻑이며 단장이 끝내길 기다리던 보쿠토는 슬쩍 옆을 돌아 거울 안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부리를 달각거렸다.
“뭐.. 잘 가라.”
창문을 열어주자 보쿠토는 날렵하게 허공을 날아 순식간에 멀어졌다. 솔직히 보쿠토가 하늘을 나는 감각을 이야기 할 때마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긴 했다. 지하철로 10분은 걸리는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할 만큼 빠르고 높게 나는 그 감각 말이다.
“그나저나.. 결국 여긴 왜 온거야?”
실컷 어리광만 부리다가 가고 말이야, 저 녀석.
마침 이쪽이 약속이 없어서 망정이지 내가 아침 일찍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릴없이 창 밖에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을 텐데.
쿠로오는 휴대폰을 들어 아카아시에게 메일을 보냈다. 보쿠토에게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는 요지의 글이었다.
큽.. 대운 마감에 실패해서 아마 냥온에 신간으로 나올 것 같아요...(머리팍팍
붱냥 진짜 유전자에 새겨진 레벨로 너무 좋아해서 큰일이에요 이종교배를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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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죽겠다!”
“여기 찬물 있어요~!”
오전 연습이 마무리되는 시간, 다섯 학교의 배구부원들은 땀투성이 몸을 이끌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차피 정규 수업이 아닌 합숙이라 점심시간도 길어서 다들 식당으로 가기보다는 조금 쉬다가 천천히 밥을 먹으려는 것이다.
“눕지 말고 일어나.”
시원한 바닥에 널부러진 카라스노 배구부들을 한명씩 챙겨 앉히는게 주장이 아니라 꼭 잔소리하는 엄마 같다. 쿠로오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이치에게 다가갔다.
“좀 쉬다가 식당 갈꺼지? 점심시간 두시까지니까 그 전까지만 오면 돼.”
“이 옆건물 2층이랬나?”
“맞아. 샤워실도 개방되어 있으니까. 여분의 옷이 있으면 씻고 옷 갈아입어도 되고..”
“아하.”
“쿠로오~!! 샤워하자!”
“싫,”
쿠로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 위로 패트병을 기울인 보쿠토가 호탕하게 웃었다. 다이치는 곤란한 얼굴로 웃으며 제 발치까지 쪼그라든 쿠로오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분명 싫다고 하지 않았나..?
“같이 멱 감자!”
거절당할거라 생각하지도 않는지 먀아옹.. 하고 울며 유니폼 사이를 빠져나오는 고양이의 뒷덜미를 덥썩 들어올린다. 다이치에게는 조금 있다가 보자! 하고 손을 흔들며 쿠로오와 함께 수돗가로 가더니 져지와 티셔츠를 훌렁훌렁 벗어제끼고 찬물을 뒤집어 써 부엉이로 변했다.
수돗가에서 시원한 물을 맞으며 목욕하는 두마리 짐승을 보니 이곳이 지금 도쿄가 맞나 싶었다.
“아, 고마워요..”
“뭘~”
발치에 널부러진 쿠로오의 옷가지를 주워올리고 있자니 네코마의 세터가 다가와 그것을 받아들고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켄마라고 했던가..? 그는 할말이 있는 듯 바로 떠나지 않고 살짝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별로 놀라지 않네요.”
“응?”
“쿠로오.. 주장이 저렇게 변하는 거요.”
켄마의 시선은 수돗가를 점령하고 멱을 감는 고양이와 부엉이를 향해 있었다.
수돗물을 틀어놓고 그 밑에서 날개를 퍼득거리며 부리로 안쪽을 긁더니 호우호우 하고 짧게 우는 보쿠토 옆에서 쿠로오가 추임새를 넣듯 웨오옹 하고 울었다.
겉만 고양이라는 듯, 시원한 물 위에 느긋하게 잠겨 그루밍을 하는 게 그렇게 편하고 익숙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한참 그렇게 씻던 둘은 슬슬 지루해졌는지 거의 싸우는 것처럼 격하게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는데, 제법 사나워 보이지만 이미 둘이 진짜로 투닥거리는걸 본 뒤라 그저 귀여워 보이기만 했다.
“뭐, 우리 삼촌도 반년째 비녀로 변해계시는걸. 앞으로 2년은 더 남았어. 오히려 저 정도면 귀여운 저주 아냐? 단순히 좀 특이한 체질일 뿐이잖아?”
“아.. 삼촌분은 괜찮으시구요?”
“괜찮아, 업무상 재해로 처리되어서 보험금도 나왔고.”
“다행이네요.”
“하하, 그런데 저 둘 저 상태로는 말이 통하는 건가? 꼭 대화하는 것 같네.”
“대화 된다던데요. 쿠로오 말로는. 우리 말도 다 알아듣구요.”
“오.. 그렇구나.”
대화하는 와중에도 보쿠토와 쿠로오의 물장구는 점점 더 격해졌다. 어라.. 분명 처음엔 귀여웠는데 슬슬 말려야 하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가 되자 다이치는 초조한 얼굴로 켄마를 돌아보았다. 이미 수돗가엔 아직도 보쿠토와 쿠로오가 신기한 1학년들이(대부분이 카라스노였다)옹기종기 모여 그 둘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저거, 진짜 싸우는 것 같은데..”
“아.. 동물로 변하면 활동량이 많아져서 더 활발해져요.. 피가 날 정도로 할퀴는게 아니면 괜찮아요.”
“그, 그렇구나..”
그런 다이치를 안심시키듯 둘은 금새 싸움을 멈추고 몸을 부르르 떨며 물기를 털어냈다. 눈치 빠른 네코마의 1학년 리베로가 수건을 가져다주자 두 짐승, 아니 두 사람은 거기에 몸을 파묻고는 찰싹 붙은 채 햇볕 아래에서 고롱고롱 낮잠을 즐기기 시작했다.
와.. 저건 부럽네.
“점심 먹으러 안 가세요?”
“아.”
저 둘을 구경하느라 점심시간이 30분이나 지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다이치는 그제서야 체육관에 남아있던 부원들을 챙겨 식당으로 이동했고, 켄마는 그 뒤에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수돗가로 걸음을 옮겼다. 쿠로오에게 가는 것 같았다.
*
“저, 궁금한게 있는데요.”
문화충격과 상식파괴의 골든위크 합숙 이후, 카라스노는 후쿠로다니 배구 캠프 여름 합숙에서도 여전한 둘을 만나고 그게 꿈이 아니었구나.. 하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들은 여전히 배구를 열심히 하고 있었고 또 찬물을 맞으면 고양이나 부엉이가 되곤 했고 다른 네 학교의 학생들은 그걸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 넘기고 있었다.
“흐음? 꼬맹이는 어떤 질문을 하려나?”
“뭔데? 뭔데?”
쿠로오는 물병만 받아든 채 마시지도 않고 긴장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히나타를 보며 제법 상냥한 얼굴로 웃었다. 카라스노의 1학년들은 궁금한게 많기도 하지.
그만큼 욕심도 많아서, 밤 늦게까지 남아 하는 연습에도 눈을 빛내며 참가하는게 사실 기특해보였다.
“찬물에 들어가면 변하는 체질,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구만.”
보쿠토는 푸핫, 웃으며 그런게 왜 궁금하냐고 물었지만 히나타는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크게 치켜뜨며 그치만 궁금해요! 하고 솔직하게 외쳤다. 뭐,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당연히 배구에 관련된 질문일꺼라 생각했는데 의외랄까..
“완전 편해! 재밌고!”
“아무래도 힘들지~”
둘은 동시에 대답하고는 또 놀란 눈으로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설마 쿠로오가 그런 대답을 할 줄 몰랐다는 듯 충격 받은 얼굴이었다. 꼭 배신이라도 당한 얼굴인데 저거?
“쿠로오 설마 지금까지 힘들게 지내왔단 말야!? 어째서!?”
“너야말로 이런 체질 싫다고 펑펑 울어댈 때는 언제고 좋대?”
쿠로오의 놀림에 보쿠토의 얼굴이 쉽게 달아올랐다. 입술을 깨물며 우물거리는게 확실히 부끄러운 기억이긴 한 모양이다.
“그, 그래도 지금까지 나한테 불편하다는 얘기 한번도 한 적 없었잖아!”
“물어는 봤냐.”
“아니면.. 어.. 혹시 자주 고양이로 변해있지 않아서 장점을 깨닫지 못한 건 아닐까?”
“흐음?”
“나도, 부엉이로 변해서 나는 법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별로 재미없었거든!”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 올리자 보쿠토는 안절부절하는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그리고 난, 이 체질로 변하고 나서 지각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우와! 대단해요!”
뭐가 그리 놀라운지 히나타가 펄쩍 뛰어올랐지만 쿠로오와 아카아시는 거의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당당하게 얘기한다 해도.. 딱히 그 체질이 아니어도 지각하지 않을 수 있잖아!?
“막, 학교까지 날아올수도 있나요!?”
“엣헴, 교과서는 미리 사물함에 두고 캐비넷에 교복이랑 유니폼을 미리 갖다두면 맨몸으로 날아와도 문제없어!”
“그럼 얼마나 걸려요?”
“음.. 비만 오지 않으면 3분! 그날 바람이 별로 좋지 않으면 5분 정도!”
“우와아아... 대단해요! 부엉이 너무 멋져요!”
그의 반짝반짝한 눈동자 세례를 받은 보쿠토는 잔뜩 들뜬 얼굴로 헤이헤이헤이! 외치며 히나타와 함께 방방 뛰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쿠로오 앞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쿠로오 너도 등교할때 변해서 오면 편하지 않아?”
“고양이가 달려 봤자 전철보다 빠르겠냐.”
“앗.. 어.. 음.. 고양이가 되어서 전철을 타면!?”
“그럼 고양이로 변하는 건 좋은 일이 하나도 없어요?”
급했는지 아무말이나 지껄이는 보쿠토 바로 옆에서 히나타가 어쩐지 서운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어쩐지 히나타 뿐 아니라 츠키시마와 리에프마저 궁금한지 옆에서 기웃대는 통에 아무거라도 좋으니 좋은 점을 쥐어짜내야 했다. 잠시 손가락을 턱에 대고 으음.. 뜸을 들인 쿠로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잠 잘 때 좋아.”
“네?”
“사람의 삼십분은 짧지만 고양이의 삼십분은 꽤 길거든. 빈 교실에서 햇살 받고 있으면 따끈따끈해서 엄청 기분 좋고~”
“낮잠을 자요? 어쩐지 의외네요.”
“고양이는 사실 엄청나게 잠이 많은 동물이더라. 나도 이 체질이 되고 나서야 안 거지만.”
“헤에.”
“확실히 교탁에 엎드려 자는 거랑은 수면의 질이 다르다니까. 아~ 자고 나면 꽤 컨디션이 좋아져서, 요새는 일부러 시간도 내고 그래.”
“헤이헤이헤이! 거 봐! 역시 좋은 점이 있다니까?”
어쩐지 안심한 얼굴로 그렇게 외치는 보쿠토를 보며 피식 웃고 만 쿠로오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체육관 안의 인원들을 쭈욱 둘러보았다. 그렇게 흩어봤자 본인을 빼면 고작 다섯일 뿐이지만.
“그건 그렇고.. 이제 쉴 만큼 쉬었지?”
“윽.”
“오야? 리에프 넌 리시브 연습이다.”
“왜 저만요! 저도 블로킹 연습 하고 싶은데!”
“그건 네가 네코마의 1학년이기 때문이지?”
웃는 얼굴로 리에프의 귀를 잡아당긴 쿠로오가 제3체육관 한 구석으로 리에프를 잡아끌자 아카아시는 피식 웃으며 배구공을 쥐었다. 적어도 한시간은 더 보쿠토에게 토스를 올려주어야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카라스노의 두 일학년들도 보쿠토의 스파이크를 막기 위해 네트에 서서 긴장한 얼굴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
어째서인지 그런 보쿠토의 신경은 온통 네트 뒷편의 쿠로오에게 쏠린 상태였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2년동안 보쿠토 옆에서 그를 봐온 아카아시 뿐이었다.
‘또 뭐가 문제지?’
방금 대화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지 평소답지 않게 쭈뼛대는 기색이었다.
뭐가 그리 신경쓰이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아카아시는 속으로 고개를 가로질렀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저런 기색이면 적어도 삼십분은 어르고 달래야 본론이 나올 것이다.
“시작합니다.”
“어? 어.. 으응..”
아카아시는 ‘이번’에는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 같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티가 나는 사람이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리고 약 한달 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에 그 머릿속을 낱낱이 내뱉어 놓으라고 추궁했을 텐데 하고 깊은 후회를 하게 된다.
마감에 성공하면 1월 부산붱온에 책을 들고 갑니닷~!
실패하면 1월 대운으로 미뤄집니다...ㅠ0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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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을 뒤집어쓰면 부엉이랑 고양이가 되는 보쿠로이야기입니닷 >.<)9
쿠로오는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여권을 내려다보았다.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찍힌 증명사진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는데 설레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재밌겠다, 켄마. 그렇지?”
“별로..”
켄마도 마찬가지로 처음 외국에 나가보는 것이었지만 별로 기대되지 않는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에게 있어서 이건 즐거운 여행이라기보다는 갑갑한 수련회에 가까울 것이다. 후쿠로다니 학원이 주축이 된 배구 캠프에서 전원의 합숙 겸 수학여행으로 중국행을 제의해 네 학교의 배구부 전원이 움직이는 터라 네코마의 3학년도 빠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연습조차 나오지 않으면서 이럴 때만 빠지지 않지. 치밀어오르는 욕지기 대신 입술만 질겅질겅 씹은 쿠로오는 뚱한 얼굴로 게임기만 내려다보는 켄마에게 대수롭잖게 말했다.
“너무 걱정 마. 학년끼리 따로 노느라 바빠서 별 터치도 없을껄.”
“응..”
“그보다 짐 챙겨야지!? 환전도 해야 한다고.”
의욕적으로 자신을 이끄는 쿠로오의 손에 매달려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얌전히 게임기를 끄고 주머니에 넣는다. 내심 기대가 되기는 되는구나 싶어 쿠로오는 속으로 조금 웃고 말았다.
새벽같이 학교에 모여 대절한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전날 밤 설레서 잠을 좀 설쳤더니 버스에서는 거의 기절하듯 잠든 상태였다. 코치님의 통솔에 맞추어 탑승 수속 카운터에 모여 있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흰색 져지와 누군가의 신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헤이헤이헤이! 저런 기합을 지르는 녀석은 아마 도쿄 전체를 뒤져도 저녀석 혼자뿐일 꺼다.
후쿠로다니도 네코마와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아서, 다들 졸음이 눈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보쿠토는 부은 눈꺼풀을 하고서도 오른손에 여권을 꼭 쥐고 쿠로오에게 종종 걸어왔다.
“쿠로오, 쿠로오! 여권 새로 만들었지? 보여주라!”
“오야. 갑자기 그건 왜?”
“사진 궁금해!”
뭐 별달리 숨길일도 아니라 쿠로오는 가방 겉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들었다. 보쿠토는 대신이라는 듯 자신의 여권을 쿠로오의 손에 쥐어주더니 쿠로오의 여권 사진을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머리 넘기니까 모범생 같아.”
“너는 늘 머리를 넘기고 있으니까 별 차이 없겠네.”
그렇게 대꾸하며 여권을 이리저리 펼쳐본 쿠로오는 내심 놀랐다. 여권 사진이라 해서 최근 사진일줄 알았는데 아직 보쿠토가 초등학생일 때의 사진인지 조그맣고 눈이 큰 아이의 사진이 여권에 붙어있었다. 비자란이 거의 꽉 찰 정도로 도장도 잔뜩 찍혀있었는데 여권 만료일이 곧인걸 보면 어렸을 때 만든 여권인 모양이다. 쿠로오는 여권 사진속의 귀여운 꼬맹이와 눈이 퉁퉁 부은 현재의 보쿠토를 번갈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윽, 그렇게 쳐다보는거 왠지 낌새가 안 좋은데.”
“보쿠토 너 어릴때는 엄청 귀여웠구나..”
“뭐야 그거! 지금은 안 귀엽다는 뜻!?”
“뭐어..”
그것보다는 역시 어릴 때가 더 귀엽달까. 쿠로오가 빤히 여권을 쳐다보고 있자 보쿠토는 불퉁한 얼굴로 여권을 빼앗으려 들었다. 이리저리 피하면서 보쿠토를 약올리는데, 아마 나머지 두 학교가 때맞춰 공항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보쿠토는 단단히 토라져서 아마 사흘동안 쿠로오에게 말도 걸지 않았을 것이다.
비행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쿠로오는 그 짧은 사이에 보쿠토의 토라짐을 완전히 풀어버렸다. 아마 집과 학교를 떠나 낯선 곳으로 간다는 설레임도 한몫 했을 것이다. 홍콩은 가본 적이 있어도 중국은 처음이라는 보쿠토는 공항에 도착해 낯선 공기를 맡고는 방방 뛰다가 코치님께 지적을 받고 나서야 조금 얌전해졌다. 운동부 남학생들을 그것도 네 학교의 인원이나 관리감독해야 하는 코치님들의 신경도 조금 예민해진 것 같았다.
여행사 직원은 푸짐하고 인상이 좋은 아저씨였는데, 중국인이었지만 일본어 실력도 나쁘지 않아서 말을 의사소통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해 짐을 풀고 식사를 하는 별것 없는 스케쥴이었는데, 기름 쩐내나는 만두 하며 요상한 향신료 맛이 나는 야채볶음은 도저히 못 먹어줄만한 것이었지만 밤에 컵라면 까먹을 계획을 짜며 시시덕거리기 바빴다. 학교별로 조를 나누긴 했지만 딱히 엄하게 나누어 관리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네 학교의 학생들은 적당히 나이가 맞거나 친한대로 조를 바꿔 붙어 앉을 수 있었다.
사건은 중국을 떠나기 전날 일어났다.
“오오. 여긴 어디야?”
“주천향이래. 가이드북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지역주민들이 자주 구경오는 관광지라는데.”
“경치 엄청나네. 신선이 사는 곳 같아.”
“정말 멋진 곳이죠? 각 연못마다 하나씩 전설이 내려오고 있답니다~”
워낙 큰 나라라 그런지 도시 외곽의 공원도 엄청나게 넓었다. 이 정도 규모면 일본에서는 국립공원이나 수목원으로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산자락에서 뻗어져나온 야트막한 언덕과 너른 평지에는 수백개는 될 법한 연못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산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고인다더니 그래서인지 연못물은 안이 훤히 비쳐 보일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관리되지 않은 연못에서 나는 물비린내도 전혀 없고.. 왜 유명하지도 않은 곳을 보러 아침 일찍 이동해야하나 했는데 다른 관광객의 방해 없이 새벽의 물안개와 이런 풍경을 즐길 수 있다면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것 정도는 감수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한참동안 가이드를 따라 주변 풍경을 구경하며 거닐던 쿠로오는 졸려 죽겠다는 얼굴로 하품을 쩍 하는 보쿠토를 발견하고는 장난기 가득한 눈을 반짝 떴다.
“오야, 어제 잠을 잘 못 잤나봐?”
슬쩍 다가가 물으니 보쿠토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어리광을 부리듯 쿠로오에게 잠자리가 불편했다며 칭얼거렸다.
“어떻게 알았어? 첫날이랑 이틀째에는 괜찮았는데 어제는 베개가 너무 납작해서 잠이 안왔어..”
우와 진짜냐. 돌베개를 베고 자도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보쿠토에게 이렇게 섬세한 면모가 있었을 줄이야. 쿠로오는 아 그런 거였구나.. 난 또.. 하고 의미심장하게 말꼬리를 늘리며 보쿠토를 힐끔 살폈다. 예상대로 보쿠토는 왜? 무슨 일이야? 하고 반문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이건 어제 우연히 들은 이야기인데 말야.”
아마 현대가 아닌 중세에 태어났다면 쿠로오는 이야기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쿠로오가 제일 자신있는 분야는 바로 괴담이었는데 네코마 고교 1학년 시절의 쿠로오는 수련회날 같은반 아이들의 절반이상을 밤을 설치게 만든 주범이었다. (2학년때는 너도나도 피하기에 바빴다.)
차분하게 목소리를 내리깐 쿠로오는 표정을 심각하게 다듬었다. 괴담이란건 특히 화자의 연기력이 중요했다.
“우리 숙소가..”
“숙소 왜? 바퀴벌레 나왔어?”
심각한 얼굴로 물어보는 내용 때문에 웃음이 터져나올 뻔 했다. 쿠로오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끌어앉히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숙소에 십년 전.. 아니다. 역시 말하지 않는게 낫겠어.”
“왜, 왜왜!? 무슨 일인데 그래!”
묘한 분위기를 깔고 말할 듯 말듯 애를 태우니 보쿠토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쿠로오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일행을 통솔해 앞에서 주천향의 전설에 대해 설명해주던 가이드의 목소리를 비지엠삼아 쿠로오는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우리 숙소 엄청 낡았잖아? 원래는 철거하고 새 건물을 올릴 예정이었다는데 숙소로 리모델링 된 이유가 있다더라고.”
“뭐, 뭔데..!?”
보쿠토에게만 말해주듯 속닥거려도 그 목소리가 옆사람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어느새 귀를 쫑긋 세운 채 쿠로오 주변으로 슬쩍 다가온 배구부원들이 숨을 죽이고 그 목소리에 집중하느라 쿠로오 주변만 유독 조용해진 상태였다.
숙소 건물은 지은 지 삼백년도 넘은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겉은 고풍스러운 옛날 중국식 나무 건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방 안은 현대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단지 수도관을 매 방마다 설치할수는 없어서 화장실과 욕실은 한 층에 하나씩 있는 구조였는데, 화장실이 조금 낡은것이 합숙 인원들의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건물을 철거하려고 하면 자꾸 사고가 생겼다나봐.”
“헉, 설마 귀!”
“쉿! 조용히 해. 귀신들은 자기 이야기 하면 이야기하는 줄 알고 가까이 온다잖아.”
쿠로오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자 보쿠토는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히익 기겁하며 쿠로오 옆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무섭긴 한데 호기심이 그보다 더 앞서는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그, 그래서? 하고 더듬더듬 입을 열어 묻는다.
이건 뭐 껌이구만~
쿠로오는 속으로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해서 당시 점쟁이가, 비단을 제물로 바쳐서 제사를 지내면 사고가 멎는다고 했다나봐.”
“그, 그걸로 끝인거야?”
“음.. 사고는 멎었지만 건물을 철거하려고 하면 주변 들짐승이 죽고 불길한 일이 자꾸 생겨서 결국 뼈대는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대.”
“으아악, 괜히 들었어!!”
보쿠토는 귀를 막은 채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꽥 질렀다. 이 녀석 원래 괴담에 약한 타입이었던가? 이렇게 통통 튀는 반응이라니 진짜 놀릴 맛이 제대로 나서 더 의욕이 생긴다. 쿠로오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작게 한 뒤 스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밤 열두시 정각만 되면 숙소 화장실 어딘가에서 사르륵 사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다는거야.”
누군가가 꿀꺽, 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정도로 다들 쿠로오의 이야기에 집중한 와중에 거의 숨이 넘어갈 것처럼 초조한 얼굴을 한 보쿠토가 팔로 스스로를 감싸안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게 딱 열두시라는 건 십년 전 이곳에서 일하던 종업원이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챘어. 사실 예전에는 전기등을 쓰지 않아서 밤 열두시면 정말 한밤중이잖아?”
“으으..”
“처음엔 자신이 잘 못 들은줄 알았지.. 하지만 어느날은 2층, 어느날은 3층에서.. 달빛마저 사라지는 어두운 시각이면 꼭 그렇게 뭔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어느날 종업원은 깨달은 거야.”
“뭐, 뭘..?”
“그 소리가 꼭 비단 스치는 소리 같았대. 귀신에게 바친 바로 그 비단 말이야..”
“히이익...!”
이제 곧 클라이막스다. 즉석에서 지어낸 괴담 치고는 다들 리액션이 나쁘지 않아서 쿠로오는 내심 뿌듯해졌다. 쿠로오는 긴장한 낯빛의 주변을 스윽 흩어보고는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그 종업원은 고민하다가.. 그 소리가 들려오는 화장실 칸을 열어보기로 마음먹었어.”
“아, 안돼애..!”
“다행히 여러개의 칸 중 어떤걸 열어봐야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대.”
“왜!?”
“왜냐면.. 보였으니까. 화장실 칸 밑으로 사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비단이..”
윽. 쿠로오는 시선을 발등으로 향해서 입꼬리를 꾸욱 일그러뜨렸다. 울듯 말듯 일그러진 보쿠토의 표정이 너무 웃겨서 저 얼굴을 보면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결국 종업원은 옆 칸에 들어가서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기로 했어.”
“......”
보쿠토는 앞서 걸어나가는 일행을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꿀꺽 침을 삼키며 손으로 팔을 쓸었다. 기분 탓인지 쿠로오의 눈동자가 아까부터 묘하게 서늘하고, 심지어 왠지 조금 추워진 것 같기도 했다..! 주천향에 대한 설명이 끝났는지 가이드는 본격적으로 공원 안쪽까지 안내해 연못에 읽힌 이야기를 얘기해주고 있었으나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작은 사다리를 디디고 일어서서 안쪽을 내려다보았어. 거기엔..”
클라이막스 직전에 말을 끊는다. 그리고 보쿠토가 눈을 마주쳐 오는 순간 쿠로오는 보쿠토의 팔을 덥썩 잡으며 와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주변 사람들도 흠칫 놀랄 정도였지만 보쿠토는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기겁하며 제자리에서 거의 오십센치 정도를 펄쩍 뛰어 올랐다. 과연 에이스 스파이커다운 점프력!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다음이었다.
보쿠토의 경망스러운 비명에 쿠로오가 배를 잡고 웃는 사이 보쿠토는 펄쩍 뛴 그대로 바로 뒤에 있던 연못에 빠져버린 것이다. 풍덩! 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시야에서 사라진 보쿠토에 쿠로오가 깜짝 놀라 연못가로 달려가자 물 속에서 갈색의 무언가가 요란스레 튀어나와 쿠로오의 얼굴과 거하게 박치기를 했다.
“으앗!?”
솜뭉치인지 곰인형인지 모를 것에 얻어맞은 반동으로 보쿠토가 빠진 연못 옆에 사이좋게 풍덩 빠져버린 쿠로오는 생각보다 깊은 연못에 당황했다. 물이 맑아 몰랐는데 키가 큰 편인 자신도 발에 땅이 닿지 않는 정도였다.
허우적대며 무어라 외치고 싶은데 물은 자꾸만 입으로 들어오지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지, 젖먹던 힘을 다해 간신히 소리를 질렀지만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처참하기만 했다.
“캬아아아옹!!!”
“몌에엫!!”
쿠로오, 아니 쿠로오였던 검은 고양이가 물에 빠진채 허우적대고 그 옆에선 부엉이가 젖은 깃털을 허우적대며-꼭 걷는 법을 모르는 부엉이 같았다- 쿠로오가 빠진 연못 주변에서 푸닥거렸다. 모두가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굳어있는 사이 들고 있던 게임기를 바닥에 떨군 켄마가 달려들어 쿠로오를 건져 올리자 물을 잔뜩 먹은 검은 고양이가 바들바들 떨며 켄마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보쿠토가 빠졌던 연못에서 주인 없는 옷가지만 둥둥 떠있는 걸 발견한 사람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보쿠토가 부엉이가 되어버렸어!?”
“쿠로가..”
모든 사람들이 경악하는 와중 주천향을 안내하던 가이드가 대수롭지 않게 쿠로오가 빠졌던 연못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오, 이 분이 빠진 곳은 묘익천이라는 곳이다 해. 삼천년 전 고양이가 빠져죽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저 물에 들어가면 고양이가 되어버린다해!”
“그럼 보쿠토가 빠진 곳도..!?”
“저곳은 삼천년 전 부엉이가 빠져죽은..”
“그럼 어떻게 해요!? 둘 다 이대로 영엉 동물로 변해버리는 거에요??”
중국 5천년 역사의 신비로움을 이런 식으로 체험하게 될 줄 몰랐던 배구부원들은 완전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눈 앞에서 멀쩡한 두 사람이 고양이랑 부엉이로 변해버렸으니 충격이 오죽하겠느냐만은, 가이드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그들을 공원 초입의 관리사무소로 이끌었다.
“이렇게 하면 원래대로 돌아오게 된다 해!”
가이드가 한 일은 아주 간단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욕조에 부엉이와 고양이를.. 그러니까 보쿠토와 쿠로오를 첨벙 던져버린 것이다.
“푸아!”
“뭐, 뭐야 이게!”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을때 둘은 다시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 연못이 수천년동안 내려오는 저주가 걸린 곳이며, 찬물을 뒤집어쓰면 다시 고양이가 되어버린다는 가이드의 말에 쿠로오는 아직도 현실감이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약간 넋이 나간 얼굴로 따끈따끈한 물속에 잠긴 손을 멍하니 들여다보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할 거냐는 감독님의 항의에 분명 주천향에 오기 전에 설명했으니 주천향에서 책임질 의무는 없다는 가이드의 말소리가 욕실에서 왕왕 울렸다.
“진정하라 해. 일상생활에 별 문제는 없다 해.”
“아니, 지금 저 꼴을 보고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나.. 진짜로 고양이가 되었던 거야?’
방금 전 분명 이 손 대신 까만 털에 뒤덮인 앞발이 있었는데.. 답지 않게 방황하는 쿠로오의 현실감을 일깨운 것은 비명처럼 내질러진 보쿠토의 외침이었다.
“나, 나 그러면 앞으로 바다도 놀러 못 가는거야!?”
“뭐?”
“찬물을 맞으면 부엉이가 된다며! 이러면 여자친구랑 물놀이하러 갈 수도 없잖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겁하며 한다는 말이 저거였다.
아니, 이상한 체질로 변해버려서 심난해 죽겠는데 제일 먼저 나온 말이 바다? 여자친구? 쿠로오는 어쩐지 어이가 없어져서 피식 웃으며 비꼬았다.
“하아? 그건 여자친구를 먼저 만들고 나서 고민할 문제 아냐?”
“우씨, 쿠로오 너.. 너 때문이야! 왜 거기서 그런 장난을 쳐서!”
“윽.. 그건 미안한데, 나도 너 때문에 빠져서 이렇게 된 거거든!?”
“그건, 그건... 흐윽, 흑... 난 이제 장가도 못 갈꺼야!!”
“야, 잠깐.”
씩씩대던 보쿠토는 울음을 참듯 이를 악물고 한방울 두방울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 얼굴이 눈물에 완전히 젖고 나서야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내일모레 세상이 망할 것처럼 울어대는 보쿠토를 바라보는 쿠로오의 표정이 영 불편했다. 사실, 그런 식으로 보쿠토를 놀리지만 않았어도 이 사단이 일어나진 않았을 거란 건 쿠로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쩔 줄 모르다가 보쿠토의 어깨를 위로하듯 툭툭 두들기자 더 서럽게 울어제낀다. 후쿠로다니 1학년과 2학년들은 그런 보쿠토를 위로하겠답시고 눈시울을 붉힌 채 달려와 보쿠토를 둥글게 감싸안고 괜찮아! 괜찮아!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
참고로 욕실에 빠진 둘은 알몸이었고, 알몸의 두 남자를 둥글게 감싸안고 빙빙 도는 짓은 원시부족의 샤먼의식을 보는 듯한 괴기함마저 맴돌았다.
“쿠로, 여기.”
쿠로오는 켄마에게서 수건을 받아들고 나서야 그 원의 중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서럽게 울어대는 보쿠토와 다르게 그의 얼굴은 떨떠름해 보일 뿐 크게 당황한 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아?”
“어째 너는 침착하네.”
“저 녀석이 옆에서 저러니까 놀란 것도 쑥 들어가버려서.”
욕조에 잠긴 채 눈물이 퉁퉁 부어버린 눈으로 딸꾹대는 보쿠토의 모습을 힐긋 쳐다본 쿠로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쿠로오 너 때문이야! 하고 울먹이던 보쿠토의 목소리가 어쩐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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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마1/2 au보쿠로입니다>.<!
찬물에 닿으면 그렇게저렇게 변해버리는 이야기에요!!
“오오, 저것, 저것은 혹시 스카이 트리?!”
“그럴 리가 있냐.”
도쿄 외곽에 정차한 버스에서 내린 카라스노 고교의 배구부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미야기와는 다른 도쿄의 공기를 마시고 눈을 빛냈다.
미야기와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교외의 풍경인데도 단순히 도쿄라는 것에 흥분했는지 눈동자를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보는 게 꼭 처음 가는 길로 산책을 나온 강아지 같아 산만해 보이기보다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교문 밖으로 뛰쳐나갈 기세의 니시노야와 타나카의 뒷덜미를 잡아 진정시킨 다이치는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가르쳐준 곳은 분명 이 곳이 맞는데 아직인가?
방금 전까지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곧 데리러 나오겠다고 했던 쿠로오 테츠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별처럼 반짝반짝한 눈동자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히나타가 오른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저희는 어디로 가요?”
“아, 잠깐 기다리면..”
“먀아-”
조금 기다리면 네코마의 주장이 데리러 올 것이다, 라고 말하려던 다이치 대신 왠 고양이가 불쑥 대답했다. 히나타와 야치가 꼭 쌍둥이처럼 똑같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발그레한 볼로 고양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앗, 하는 얼굴로 뒤늦게 시미즈가 야치의 뒤를 쫓았다.
“고양이~ 귀여워라!”
“......!?”
그러나 바로 고양이 앞에 주저앉아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하는 야치와 달리 히나타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흠칫 놀라더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로봇처럼 빳빳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왠 고양이람?”
“왜 그래 히나타?”
심상치 않은 히나타의 반응에 다이치와 스가마저도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워올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보다 먼저 앞서 달려간 타나카와 노야가 고양이를 발견하더니 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심지어 그 츠키시마마저 당황한 얼굴로 안경을 슥 들어올렸다.
“아니 이 고양이.. 너무..”
“헉.”
“너무.. 닮았는데요.. 그 분이랑..”
“웨옹~”
히나타의 말에 긍정하는 뜻인지 아니면 반박하는 뜻인지 고양이가 길게 울었다. 다이치는 얼빠진 얼굴로 고양이를 내려보며 입을 벌렸다.
대체 누구와 닮았다는 건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니, 이건 못 알아볼 수가 없겠는데!?
그 독특한 헤어스타일에 사람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초리까지.. 네코마 배구부의 주장, 쿠로오 테츠로를 쏙 빼닮은 검은 고양이는 경악에 빠진 카라스노 일동의 앞에서 여유롭게 애~옹 하고 길게 울었다.
“하필 검은(쿠로) 고양이..”
“앗, 움직인다.”
고양이는 꼭 무어라 말하듯 그들 앞에서 웨옹애옹하고 웅얼거리니 찬찬히 학교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직 충격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다이치가 그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꼬리를 탁탁 양쪽으로 치더니 어서 따라오지 않고 뭐하냐는 듯 뒤를 돌아보고 재촉하듯 울음소리를 냈다.
“뭐지..?”
“따라오라는거 아니에요?”
“그런 것 같긴 한데.”
‘고양이의 보은’도 아니고 고양이를 따라가서 대체 뭘 어쩌라고? 하지만 그 고양이의 제스처는 너무나 명확해서 도저히 다른 걸로 착각할 수가 없었다.
당황한 다이치의 반응에 스가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턱을 까딱 움직였다.
“일단 가보자. 가봤자 학교 안인데 뭐. 이상하면 다시 돌아오면 되고.”
“그리고 뭣보다 애들이 고양이를 다 따라가버렸어.”
“아앗! 일학년들이 어느새!?”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홀린 어린이들도 아니면서 그새 고양이를 따라 1학년들과 2학년들이 저 멀리로 멀어져버렸다.
다행히 고양이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닌 종종걸음으로 막힘없이 코너를 꺾고 건물을 가로질러 가는데 사람 걸음으로 따라 걷기 딱 좋은 속도였다.
그렇게 학교 안쪽 체육관에 도착한 고양이가 먀아~ 하고 길게 울며 카라스노 배구부 일동을 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어, 진짜 체육관..?”
“배구공 소리가 나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둘러보자 합숙에 참가하는 각 학교의 배구부들이 워밍업을 하는 중인지 서로 자유롭게 공을 만지고 있었다. 네코마 감독님과 코치님을 만나러 간 우카이 코치님도 없이 어색하게 쭈뼛대는 그들을 발견한 건 네코마 배구부의 부주장을 맡고 있는 카이 노부유키였다.
슬슬 그들이 도착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서 와. 쿠로오와 만났지?”
“아, 안녕! 그런데 쿠로오는 못 만났는데 어쩌지..?”
“응?”
카이가 무슨 소리냐는듯 고개를 갸웃 움직이자 다이치가 황급히 뒤를 이어 말했다.
“쿠로오가 데리러 나오겠다고 했는데 우리가 그냥 와버렸거든. 역시 엇갈린 건가!”
“어라, 그럼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그건요! 여기 이 고양이가, 앗! 없어졌어!”
“아아~ 그럼 괜찮아.”
카이는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싱긋 웃었지만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고양이가 언제 사라졌는지 왜 알아채지 못했냐며 투닥투닥 다투기 시작했다. 스가가 소매를 걷고 나서 그 둘을 떼어놓자 카이가 간단하게 합숙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후쿠로다니 배구캠프는 관동의 학교 네곳이 연합해서 모인 곳이야. 우리 네코마 고교와 후쿠로다니 학원, 신젠, 우부가와..”
워밍업이 끝난 뒤에는 돌아가면서 게임을 하고, 진 팀은 벌로 플라잉으로 코트 한 바퀴.
네 개의 학교 모두 최근 5년 안에 전국대회 진출 경험이 있는 강자들이며 특히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에이스 스파이커인 보쿠토 코타로가 있는 후쿠로다니 학원은 전국 레벨의 강팀이었다.
“우와, 저 사람이 바로..!”
“우시와카랑 같은 레벨의 스파이커!”
“우시지마는 세 손가락이잖아, 바보야!”
세터가 올린 공을 시원하게 내려치고 신기한 구호를 외치면서 -헤이헤이헤이!!- 어깨를 가벱게 휘두르는 것만으로 뭔가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박력이 있었다. 가볍게 내리친 것 같은데 공이 부딪힌 바닥에서는 히나타가 있는 힘껏 내리쳐도 나지 않는 소리가 났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카라스노 배구부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펄쩍대며 뛰던 보쿠토가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을 밟고 앞으로 쭉 미끄러졌다.
“에엑!?”
무슨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지는 만화 속 인물처럼 우당탕 넘어져 벤치에 올려두었던 물병들이 그 위로 우르르 쏟아졌다. 하필 물에 적신 수건을 냉장고에 넣어두기 위해 물병 뚜껑을 죄다 열어둔 상태라 보쿠토 코타로는 엎어진 상태 그대로 찬물을 왕창 뒤집어써야 했다.
이럴 수가! 십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콩트적 슬라이딩이라니! 거기에 물까지 뒤집어썼다. 아프지 않을까 걱정되기 보다는 그 체면을 어쩌면 좋지 싶은 마음에 다들 어쩔 줄 몰라하는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보쿠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으악! 하고 외치자 왠 부엉이가 푸드덕 날아오른 것이다.
츠키시마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깊은 산 속도 아니고 이런 도심에서, 밤도 아닌 낮에 부엉이라니!?
“아악! 또 변했어!”
“보쿠토 날지 마! 깃털 떨어지잖아!”
“호우우-!!”
거기에 저 부엉이를 보쿠토라고 부르고 있잖아!? 다이치가 대체 무슨 상황이냐는 듯 카이를 쳐다보자 카이가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곤란한 얼굴로 말을 골랐다.
스가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람이 부엉이가 됐어..!?”
“대, 대단하다! 역시 다섯 손가락..!”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하하하, 신기하지?”
그때 뒤에서 느긋한 목소리의 미성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렇게 기다렸던 쿠로오 테츠로가 문가에 서서 웃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젖어서 축 내려앉아 있었는데 평소의 닭벼슬 머리와는 다른 위압감이 있었다. 야치가 슬그머니 시미즈의 뒤로 숨자 쿠로오는 꼭 아는 사람 대하듯 한 손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정말 성격 좋구나 이 녀석.
다이치가 몰래 혀를 내두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쿠로오는 느긋하게 보쿠토를 턱짓으로 가르키며 말을 이었다.
“작년에 중국에 갔다가 저주를 받았거든. 그래서 찬물만 뒤집어쓰면 저렇게 되어버려.”
“저렇게라면.. 부엉이로 변한단 말이야?”
“신기한 저주네.”
“아~ 그랬구나. 힘들겠다.”
“우리 삼촌도 저주에 걸려서 반년째 부채로 변해계신데..”
“헤엑, 진짜요!? 몰랐어!”
체육관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부엉이는 마침내 붙잡혀 후쿠로다니 배구부 매니저의 손에 제압당했다. 날지 못하도록 날개를 꾹 누르고 있는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부엉이가 가슴털을 부풀리며 억울하다는 듯 호우호우 하고 울었다. 그 틈에 열심히 빗자루를 쓸면서 보쿠토가 뿜어낸 깃털을 치우는 후쿠로다니 배구부를 보던 카라스노 배구부들은 ‘저주에 걸리면 주변인들이 힘들지~’ 라고 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는데, 쿠로오는 그 모습을 보며 재밌다는듯 킥킥 웃었다.
그때 문가에 서있던 새로운 인물들을 알아차린 듯 부엉이의 목이 휙 돌아가더니 동공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세로꼴로 또 느릿하게 좁아들었다. 부리부리한 새의 눈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도 엄청난 박력이라 야마구치와 야치는 동시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뭐, 저주 치고는 귀엽지만 말이지.”
“일상생활에 무리는 없대?”
“뭐, 예고없이 찬물을 뒤집어쓰는 상황이 얼마나 있겠어~”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을 잇는 쿠로오가 방심한 사이 부엉이, 아니 보쿠토가 자신을 들고 있던 매니저에게서 벗어나 푸드득 하고 날아올랐다. 아 좀! 하고 짜증내는 부원들을 무시하고 페트병 하나를 하나 낚아챈 뒤 순식간에 다가오는데 멀리서 볼때에는 작다고 느꼈던 것이 날개를 펼치니 무슨 독수리도 아니고, 엄청나게 커서 날갯짓 한번으로 단숨에 저 넓은 체육관을 가로질렀다. 그야말로 눈 한번 깜빡할 새에 문가에 도착한 부엉이는 꽥! 하고 기합 비슷한 소리를 내지르더니 그대로 쿠로오의 머리 위로 페트병을 내던져 찬물을 부어버렸다.
어찌나 날렵한지 미처 쿠로오가 피할 틈도 없었다. 다이치는 물에 빠뜨린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쪼그라든 쿠로오를 보며 비명처럼 소리를 악 질렀다. 물에 젖어 널부러진 옷가지 사이로 작은 앞발과 익숙한 고양이의 얼굴이 그 안에서 쏙 튀어나왔다.
“너, 너도냐!?”
“아앗, 아까 그 고양이!!”
“하하하, 꼭 남얘기하듯 말하네 쿠로오는.”
이젠 놀랍지도 않은 카이가 하하 웃자 몸을 부르르 털어 물기를 뿜어낸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빳빳히 세우더니 부엉이를 향해 하악질을 했다. 그러자 부엉이는 그에 대답하듯 창가에 앉아 뻐기는 표정으로 날개를 퍼득거렸는데, 잽싸게 카이를 타고 올라간 쿠로오가 점프해 달려들자 몌에엫! 하고 비명을 지르며 쿠로오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난데없이 시작된 맹금류의 부리와 고양이의 발톱이 난무하는 자연 생태계의 다큐멘터리! 두 사람, 아니 두 마리 다 덩치가 큰 맹수는 아니었지만 그 기세가 제법 사나워 저대로 둬도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히나카가 넋이 빠진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과, 과연 도쿄..! 대단하다!”
“아니 이 경우엔 도쿄가 대단한게 아니지!”
“싸우고 있어!”
“앗, 날아올랐다. 저러면 쿠로오 씨가 불리한거 아냐?”
바닥에 널부러진 쿠로오의 옷을 정리하는 카이를 도와 얼른 쿠로오의 신발을 주워든 다이치가 그것을 카이에게 건넸다.
고마워, 하고 가볍게 응답한 카이가 운동화를 받아들며 씩 웃자 다이치는 그새 깃털을 정리하고 연습을 재개한 체육관 안쪽을 쳐다보았다.
“다들 익숙한가보네. 별로 놀라지도 않는걸 보면.”
“작년 후쿠로다니 배구 캠프 MT에서 저렇게 된 거거든. 둘 다.”
“원래대로, 그러니까 사람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
“전혀? 금방이야.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면 바로 돌아오는걸.”
“아하.”
특이한 저주다. 불편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우리를 체육관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겉모습은 바뀌어도 속은 그대로인것 같은데 말이지.
부엉이와 고양이의 혈투는 후쿠로다니 배구부 부주장이 나와 그 둘의 뒷덜미를 들어올리고 나서야 종식되었다. 카이는 벤치에 쿠로오의 옷과 신발을 올려두고는 카라스노 배구부에게 손짓했다.
“저 둘을 샤워실에 밀어넣고 나서야 본 연습이 시작될 테니까, 그 틈에 짐정리 하고 체육복으로 갈아입는게 좋을거야. 탈의실로 안내해줄께.”
“오, 고마워.”
“히나타! 이쪽이야!”
멀어지는 두 야생짐승들을 쳐다보던 히나타가 후다닥 달리며 이쪽을 쳐다보던 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켄마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는 벤치에 축축하게 놓인 쿠로오의 옷에 시선을 고정했다.
쿠로오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면 고양이로 변하는 웃기는 체질이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 생각치도 못했던 일이 발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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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에 빠졌던 쿠로오는 손에 자꾸 땀이 차는 감각에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보쿠토 이 녀석은 왜 갑자기 내 손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고 있는 거지?
그때 쿠로오가 깨어난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보쿠토가 쿠로오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꿈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아있던 의식이 서서히 올라오고, 잠든 것도 깨어난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서의 부름이었다.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 사소한 게으름의 댓가는 규칙적인 숨을 내뱉으며 자는 쿠로오의 입술 위로 내려앉은 보쿠토의 입술이었다.
‘???’
눈을 감고 있었지만 콧날과 마주닿는 보쿠토의 코와 축축한 감촉으로 미루어 보아 입술이 확실했다. 발바닥의 모래처럼 끈질기게 남아있던 선잠이 순식간에 달아나고 눈이 번쩍 뜨였다.
아쉽게도 쿠로오가 눈뜨기 직전에 보쿠토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했는지 방 밖으로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아주 웃긴 얼굴을 볼 수 있었을텐데 현장을 잡지 못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이 닫히고 쿠로오는 침대 위에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대체 뭐지?’
그냥 호기심인가? 아니 그보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을 이런 식으로 날리게 되다니.. 보통 사람이 자고 있으면 깨워서라도 물어봐야 할 중대한 사안 아닌가 이거?
잠시 눈썹을 찌푸린 채 보쿠토에게 한소리를 하기 위해 기다리던 쿠로오는 시간이 꽤나 지나도 보쿠토가 돌아오지 않자 긴장을 풀고 침대에 편히 누워버렸다.
졸리고 목이 결리다. 매일 보쿠토가 자는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자기는 미안하니 대신 이불을 끌어안고 거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간신히 진정한 보쿠토가 돌아왔을 땐 이미 쿠로오가 다시 잠든 뒤였다. 쿠로오의 달라진 자세에 흠칫 놀랐지만 잠결에 자세를 바꿨는지 아직 잠에서 깨진 않았다. 보쿠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슬쩍 침대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잠든 님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을 때.. 라고 하기엔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혹여나 쿠로오가 깰까 컴퓨터에서 나오던 영화도 꺼버린 보쿠토는 삼십분 뒤 꾸물꾸물 쿠로오의 옆자리에 자리잡고 누웠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쿠로오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보쿠토, 지금 몇 시야?”
“응? 으으... 잠깐만.. 휴대폰이.”
“하아암.. 벌써 아홉시 넘었네.”
야식 겸 저녁으로 돈까스 배달을 시켜 먹고, 플스로 게임을 하다가 다시 새벽에 잠들 때까지 쿠로오는 보쿠토의 도둑키스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보쿠토의 침대 아래 이불을 펴고 잠들기 직전에서야 문득 그것이 떠올랐는데, 이미 잠든 보쿠토를 깨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쿠로오는 그저 궁금증을 가지고 잠들 수 밖에 없었다.
‘착각했나..? 아니면 꿈이라든가.’
착각이라면 민망하고, 꿈이라면 더 어이가 없다. 쿠로오는 속으로 피식 웃다가 그것을 머리 한구석에 치워놓고 베개를 끌어안았다.
만약 그게 진짜라면 보쿠토 쪽에서 반응이 있겠지. 뭐든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쿠로오의 그때 그 기억이 착각이나 꿈은 아니었다.
증명하고 말것도 없이 눈을 감고 누워있으면 보쿠토가 다시 뽀뽀를 했다.
보쿠토 이 자식.. 생각보다 뻔뻔한 녀석이잖아..?
거의 상습범 수준으로 몰래 입을 맞추는 것도 꽤 대담해져서는 자는 사람의 입술을 우물우물 빨아대질 않나, 판판한 가슴 위에 손을 올려서 주물러대질 않나 놀람의 연속이었다.
두번째인가 세번째의 도둑뽀뽀때에는 입술을 깨물길래 반사적으로 눈썹을 찡그렸더니 우당탕탕 넘어져서는 거의 한시간동안 방에 들어오질 못했는데.. 요새는 아주 마당에 파묻은 개껌을 찾아 씹는 리트리버처럼 전투적인 자세였다.
이대로라면 아주 혀도 넣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로오가 보쿠토의 집으로 다시 찾아들어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미 전기세 걱정 없이 펑펑 틀어지는 에어컨의 맛을 본 다음에 그 만두찜통-이라고 쓰고 집이라 읽는다.-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는것도 정말 못 할 짓이었다.
두번째 날에도 씻고 나른하니 잠에 들었는데, 또 자는 이의 동의를 구하는 그 어떤 행동도 없이 보쿠토가 뽀뽀를 했다. 머리를 뉘인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이걸 대담하다고 해야 하나 생각도 없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반쯤 들었던 잠도 번쩍 깬 쿠로오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보쿠토의 멱살을 잡아채지 않은 것은 꽤 단순한 이유였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일어나서 뭐라고 말하지? 왜 뽀뽀했냐고 물어봐야 하나? 왜 그동안은 얌전히 있었냐고 물으면 또 거기에는 뭐라고 대답하지? 아니 그보다 딱 잡아떼면.. 딱히 증거도 없고..’
그렇게 첫번째와 두번째를 그냥 넘겼더니 세번째 쯤 되어서는 새삼스럽게 일어나서 따져묻기도 뭐하게 됐다.
‘에라, 몰라. 전기세 대신이라고 치지 뭐.’
더 생각하기도 귀찮고, 별다른 변화 없이 단지 자는 사이 몇 번 입술을 문대는 것으로 친구사이를 파토낼 정도로 쿠로오는 야박하지 않았다.
의외로 보쿠토의 반응은 평소와 같았고 대신 에어컨이 오기까지의 3주간, 거의 보쿠토네 집에 세들어 사는 수준으로 들락거리면서 점점 과감해지는 보쿠토의 도둑뽀뽀만 속으로 카운트하고 있었다.
다행히 집에 에어컨이 설치될 날은 점점 다가와서, 이 페이스 대로라면 혀를 집어넣기 전에는 집에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혀를 넣으면 이렇게 모른 척 하기도 힘들다고.’
*
“아, 더워..”
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고, 입구쪽에 걸린 둥근 시계는 밤 아홉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열대야인지 해가 자취를 감춘지가 오래인데도 땀은 식을 줄을 몰랐다.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체육관의 2층 불이 꺼지며 어두워진다. 입구 옆의 비상등만 켜진 채 어두워진 체육관에 앉아 있자니 어쩐지 이대로 자라고 해도 잠들 수 있을 것 처럼 나른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잠시 쉬자.
계단을 두칸씩 밟아 내려오는 보쿠토의 발소리를 들으며 쿠로오는 그대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달이 아주 크고 밝았다. 이제는 불 꺼진 체육관 안보다 바깥이 밝아 그림자가 거꾸로 만들어진다. 눈을 감고 있자니 아예 바닥으로 전해지는 발걸음의 진동이 더 크게 느껴졌다. 창문이며 비품실까지 체육관 전체의 문단속을 마치고 쿠로오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던 보쿠토는 설마 벌써 자는건 아니지!? 하고 외치면서 얼굴 옆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뭐야~ 오늘도 완전 방전됐네.”
“바람이 시원해서.”
“밤이라 그런가봐. 낮에는 바람도 더운데.”
공기도 오랜 더위에 지쳤는지 축 처져 묵직했지만, 누워있다보면 아주 미약하게 바람이 불어서 머리카락 끝이 약하게 살랑거렸다.
“덥다가 시원해지면 뭔가 몸이 나른~ 해지잖아.”
“그래서 우리집에 와서 맨날 자는거야?”
“봐주라, 진짜 불가항력이거든.”
“블로킹 연습도 한시간밖에 안 해줬으면서~!”
그렇게 자는 사이 사리사욕도 잔뜩 채웠으면서 놀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것 마냥 웃음이 나왔다.
물론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티를 낼 수는 없지만. 쿠로오는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손을 휙휙 흔들고는 딱 5분만 누워있겠다고 중얼거렸다.
손을 옆으로 옮겨 더듬더듬 보쿠토의 종아리를 더듬다 그 위로 머리를 올리자, 아예 다리를 쭉 뻗고 상대적으로 살집이 있는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준다. 너무 높은데다가 베개에 비하면 딱딱했지만 지금은 딱히 까다롭게 굴고 싶지 않았다.
더위에 달아오른 몸이 적당히 식어가고, 바람은 딱 좋게 불고 보쿠토는 조용하고 아주 완벽한 상황이었다.
난데없이 이마에 내려앉은 보쿠토의 습격, 그러니까 쿠로오가 잠들었다고 생각한 대담한 도둑 뽀뽀만 아니었어도 어쩌면 그대로 잠들어버릴 수도 있을 만큼이나 편안했다.
“.....어?”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평소처럼 모른척 눈을 감고 있지 않았던 건 장소가 장소였기 때문이다. 아니, 아무리 밤이라 해도 학교는 좀 아니지?
보쿠토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차 한 것도 사실이었다.
동그랗고 노란 눈동자와 마주한 쿠로오가 예상한 보쿠토의 반응은 첫째, 더듬거리면서 변명하다가 도망친다. 둘째, 안색이 새파래져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셋째, 벌떡 일어나서 바닥에 머리통과의 충돌을 선사한다 정도가 있었는데, 보쿠토는 전혀 의외인 반응을 해왔다.
생각해보면 의외성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몰래 뽀뽀를 해 대면서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자신을 대하던 것도 그렇고, 애초에 첫번째부터 이마도 아니고 입술에 도둑뽀뽀를 한 것 자체도 의외였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은 왜 몰래 이러고 있었지?
“잠 깼네?”
보쿠토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해왔기 때문에 쿠로오는 말을 잃었다. 달빛에 비친 음영이 드리운 그 얼굴이 꽤 잘생겨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잠깐만, 말을 잃을 정도의 미모라는 뜻이 아니라 정신 산만한 부엉이같은 리액션을 기대했던 터라 말문이 잠깐 막혔던 거다.
“어어.. 확 깼다.”
멍하니 대답하고 부스스 일어나 앉자 보쿠토가 실실 웃는 낯을 풀지도 않고 엉덩이를 바짝 붙였다. 퍼스널 스페이스를 대담하게 침입해오는 기색에 언짢은 얼굴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 보쿠토의 오른손이 쿠로오의 턱 아래를 살짝 받치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쯥, 하고 약하게 입술을 빨아올리는 감각에 눈꺼풀을 움찔 떨자 고개를 옆으로 틀어 능숙하게 아랫입술을 물었다.
‘어?’
보쿠토는 그동안 쿠로오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은게 분명했다. 얌전한 쿠로오의 반응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이 녀석이 그래서 날로 대담해졌구나. 입술을 이렇게 물고 빨면서 어떻게 내가 잠에서 깰 거란 생각도 못 하지? 가 아니라 쑥쓰러워서 눈 감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는거 아냐!
이 자연스러운 손동작은 쿠로오가 자신의 키스를 피하리라고는 생각치도 않는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쿠로오는 늘 생각이 많은 타입이었지만 보쿠토의 얼굴이 반대쪽으로 기울어 더 가까이 왔을땐 더 생각을 잇지 못했다.
방심해 벌어진 잇틈 사이로 혀가 낼름 들어와 젖은 살덩이를 이리저리 굴리고 빨았다. 쪼옥, 쪼옥 하고 남사스런 소리가 나면서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혀 밑에서 자꾸만 침이 솟는 느낌이 들어 침을 꼴깍 삼켰더니 보쿠토는 아예 양 손으로 쿠로오의 양볼을 감싸쥐고 쿠로오의 혀를 제 멋대로 씹었다.
“후, 하...”
어느새 감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마찬가지로 볼이 상기된 보쿠토가 젖은 입술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눈을 마주치다가 씩 웃었다.
“잠 깼으니까 여기서 조금만 더 있다 가자.”
“...그럴까.”
불 꺼진 체육관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키스를 했다. 혀를 쓰기 시작했으니 뽀뽀라는 귀여운 어감으로 부를 수는 없고, 입맞춤이라는 점잖은 단어도 어울리지 않았다.
보쿠토는 쿠로오와 마주보듯 옆으로 누워서 종아리로 한창 장난을 치다가 슬금슬금 허벅지 위의 유니폼 바지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말랑한 엉덩이살을 손으로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손길은 파렴치한 주제에 누가 봐도 기대감에 가득 차있는 얼굴이라, 쿠로오는 그 얼굴을 보고 속으로 망했다.. 하고 중얼거릴 수 밖에는 없었다. 예감이 딱 왔다. 앞으로 이 녀석에게 단단히 코가 꿰이고 말 거라는 그런 예감 말이다.
쿠로오의 집 거실 에어컨은 다음날 바로 설치되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갈때 댈 조악한 변명거리도 없어졌지만 쿠로오는 뺀질나게 보쿠토의 집을 드나들었다. 왜냐하면 거실 한복판에서 보쿠토와 쪽쪽대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으니까. 비단 상대가 보쿠토가 아니라도 그건 부모님께 큰 실례다..
더위를 핑계로 쿠로오가 현관문을 두드리면, 에어컨을 미끼로 쿠로오를 제 구역으로 끌어들인 보쿠토가 의기 양양한 얼굴로 그를 덥썩 붙잡아 볼에 쪽쪽 뽀뽀를 했다.
만족스러울 만큼 이마와 볼과 코에 뽀뽀를 내려앉히면 싫은 것처럼 얼굴을 피하지만 적극적으로 밀어내지 않는 쿠로오를 양팔로 꼬옥 끌어안는다.
‘일년에 사계절이 모두 여름이면 좋겠다. 그럼 매일 우리집에 올 텐데.’
그런 귀여운 욕심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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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앞두니 글쓰는것도 재밌고 게임도 재밌고 화장실청소도 재밌네요 젠장....(....)
호로록 써서 마무리는 ? 싶은 느낌의 글이지만... 가볍게 읽어주세요 ㅎㅎ
[보쿠로] 붱냥 1/2 !! -2- (0) | 2017.1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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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로] 붱냥 1/2 ! -1- (0) | 2017.11.12 |
[보쿠로] 약해지는 계절 上 (0) | 2017.10.22 |
[보쿠로] 오베론 5. (0) | 2017.09.12 |
[보쿠로] 오베론 4. (0) | 2017.08.15 |
“미친.. 6월인데 이렇게 더울 일인가.”
“올해 평균 기온이 예년보다 높대요.”
“한여름 같아!”
어쩌면 늦봄이라고 볼 수도 있는 계절이었지만 공기는 푹푹 찌기만 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 좋은 봄비가 내렸었는데 지금이 되니 남은 습기와 더위가 만나 숨막힐 정도로 찌는 공기가 체육관 안을 메웠다.
도립 네코마 고등학교는 적어도 칠월은 되지 않으면 체육관에 에어컨을 켜주지 않았고, 이 찜통 더위에 그대로 노출된 두 학교의 배구부 학생들은 일찌감치 혀를 내물고 나가떨어졌다.
보쿠토 저 녀석은 덥지도 않나?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움직였으면서 다시 공을 주워드는 모습은 방금 운동을 시작한 사람처럼 쌩쌩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체육관 바닥에 털썩 주지앉은 쿠로오는 허벅지에 시원하게 닿는 바닥의 감촉에 꿍얼꿍얼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그대로 상체를 눕혔다.
게임으로 치면 디버프,.. 아니지, 계속해서 체력이 깎여나가는 중독에 걸린 느낌이었다.
“더워.. 힘들어어..”
소나무처럼 늘 고고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던 쿠로오의 타락에 적잖이 충격받은 두 학교의 후배들이 놀라건 말건 쿠로오는 차가운 바닥이 금새 뜨끈해지는 감각에 진저리를 쳤다.
“헤이헤이헤이~ 쿠로오! 뭐야, 벌써 지쳤어?”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덥다..”
신나게 배구할 때는 더운 것조차 몰랐는데 아드레날린이 가라앉고 열기가 뇌에 훅 끼치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렇잖아도 기상과 더위에 약한 저혈압 체질인데 옆에 하이 텐션의 보쿠토가 맴도는 것만으로 생명력이 쭉 빨리는 느낌이었다.
보쿠토는 유독 맥을 추지 못하는 쿠로오가 신기한지 쿠로오의 겨드랑이 아래 손을 넣어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우곤 앞뒤로 쿠로오를 탈탈 털었다.
“왜, 왜 이렇게 시들어 버린거야!?”
장난 삼아 털어댔는데 맥아리없이 흔들리는 게 꼭 증기 안에서 오분쯤 익어 흐물흐물해진 배추 꼴이다. 보쿠토는 축 처진 쿠로오의 이마가 자신의 어깨에 힘없이 닿는 감촉에 깜짝 놀랐다.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더워서 그런 거야!?”
“에어컨 없는 집으로 들어가기 싫어..”
다 죽어가는 병자 흉내를 내며 에어컨을 찾는 걸 보니 아직은 살만 한 모양이다.
막상 쿠로오는 보쿠토가 자신을 흔들며 호들갑을 떠니 살짝 제정신이 돌아왔는데 보쿠토의 얼굴은 심각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여름 합숙때도 멀쩡했는데..!”
“신젠은 시원하고 후쿠로다니랑 우부가와는 에어컨이 빵빵하니까.”
“어라? 멀쩡해진 것 같다?”
“아아 어지러워라..”
멀쩡한 듯 대답하다가도 다시 가녀린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널부러지는 쿠로오의 모습에 보쿠토가 키들키들 웃으며 그 옆에 앉아 무릎에 팔꿈치를 디디고 턱을 괴었다.
약한 척 하는 모습은 아닌 것 같은데 평소와 달리 약간 나사가 풀린 것 같아서 귀엽다.
보쿠토는 방긋 웃으며 최대한의 호의를 담아 외쳤다.
“많이 더우면 우리 집에 올래? 에어컨 켜줄 테니까!”
“후읏.”
그 믿음직한 얼굴에 쿠로오는 감격하며 숨을 뱉었다. 세간에서 비웃음이라고 부르는 소리와 아주 흡사한 소리였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쿠로오는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는 귀부인처럼 호호 웃는 시늉을 하며 보쿠토를 장난스레 흘겼다.
“오야오야~ 이 쿠로오씨가 그런 일차원적인 플러팅에 넘어갈 것 같나요?”
“플..! 아니거든!? 난 그냥 쿠로오가 더워하니까!”
어쩐지 정곡을 찔린 얼굴을 한 보쿠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쿠로오는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빙글빙글 웃었다.
“어라~ 나를 집에 데려가서.. 뭘 하려고?”
“우우~!!”
“응큼하네, 맹금류 대장!!”
“아냐 그런거! 손끝 하나 안 댈께!!”
“푸, 푸하하하!”
보쿠토의 과민반응에 쿠로오뿐만 아니라 체육관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보쿠토는 그제사 자신이 놀림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방 뛰었지만 이미 일학년들이 우다다 달려들었다.
“저! 저 보쿠토 선배네 놀러가고 싶어요!”
“저도요! 도쿄 시내의 대저택이라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그건 루머입니다.”
반짝반짝한 눈빛 공격에 보쿠토가 당황해서 너희 모두를 초대할 수는 없어! 하고 패닉한 사이 쿠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쿠토를 내버려두고 슬슬 체육관 밖으로 도망쳤다. 아직은 견딜 만 한 봄의 끝물이었다.
*
어느 날 쿠로오는 꿈을 꾸었다. 찜통안에 든 만두가 되어 불투명한 만두피가 서서히 투명해지도록 쪄지는 꿈이었다. 뿌연 증기는 살인적인 열기를 담고 만두 속까지 뜨겁게 달구어 만두소의 육즙을 낸다.
찜통의 뚜껑이 열리길 애타게 기원하는데 문득 꿈에서 깨어 보니 자신은 쿠로오 테츠로가 아닌가. 이는 대체 쿠로오 테츠로인 자신이 꿈속에서 만두가 된 것인가 아니면 만두가 꿈에 쿠로오 테츠로가 된 것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미치겠다..”
때는 7월의 중반, 살인적인 더위의 한창이었다.
왠일로 부모님이 이 더운 날에 여행을 떠나시나 했다. 빈 집에 부활동도 없겠다, 이 더운 날엔 쾌적한 집에서 에어컨을 켜두고 뒹굴거리는게 최고의 피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동안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잠만 자곤 했더니 오래된 에어컨을 작년에 버렸다는 것은 완전히 까먹은 상태였다.
그리고 뒤늦게 주문한 에어컨은 삼주 뒤에나 설치가 가능하댄다.
부모님들이 괜히 피서를 가신 게 아니었다. 진짜로 더위를 피해 도쿄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찜통해서 탈출해 버리신 거다. 여름 합숙이 예정되어 옴짝달짝 하지 못하는 쿠로오는 그저 낡은 선풍기를 꺼내 바람세기 버튼을 강으로 올리는 것으로 더위에 반항심을 표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바람에 살갗이 닿는 부위만 약간 시원해지고 바람의 영향권이 아닌 부분은 마치 낡은 컴퓨터의 본체처럼 이글이글 열기를 피워올렸다.
현재 기온은 섭씨 38도, 인간의 체온보다 높은 온도였다.
“피난.. 은행으로..? 아니 백화점..”
괜히 찐만두가 되는 악몽을 꾸며 일어난게 아니다. 차라리 에어컨이 빵빵한 후쿠로다니 고교의 체육관이 그립다. 거기서라면 리에프 열다섯명에게 한꺼번에 리시브를 가르치라 해도 기꺼이 그렇게 할 수도 있을 만큼!
벌써부터 이렇게 더우면 여름방학의 합숙은 대체 어쩌면 좋을까 싶을 정도로 더웠다.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공기의 온도 자체가 가열된 것 같다!
이대로 있으면 미지근한 물 속의 개구리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익어버리는것 아닐까!?
만일 내가 찜통 속의 만두라면? 어떤 미친 과학자가 거기에 전기충격을 주고 있는 거라면?
더운 육체에서 탈출해 멘탈이 안드로메다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때 쯤 발열을 이유로 멀리 떨어뜨려두었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혹여나 앞 스케쥴이 캔슬된 에어컨 설치기사가 아닐까 생각한 쿠로오가 전광석화같은 손놀림으로 휴대폰을 낚아챘다.
B [쿠로오, 뭐해?]
B [내일 눈마새 개봉하는거 알지? 보러 가자!]
K [뭐야 너냐.]
쿠로오는 손가락 끝으로 자판을 톡톡 느릿하게 쳤다. 이 더운날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영화관으로의 외출은 반갑지만 그 영화를 위해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서 직사광선을 받으며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나친 더위로 인한 체력고갈 상태라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해진 것 같기도 했다.
K [더워서 폰 만지기도 ㅅㅣㄹㅓ. .. ,]
B [밖이 그정도로 더워? 방에만 있어서 몰랐어!]
K [방?]
B [응. 계속 에어컨을 켜둬서..]
K [지금 간다.]
B [어? 어디? 쿠로오? 헤이헤이헤이!]
B [영화관이야? 아, 우리집?]
B [테츠?]
쿠로오의 이성이 끊기는데에는 보쿠토의 그 짧은 문자 한 통이면 충분했다.
*
밖이 그렇게 덥냐는 문자, 본인은 더위로 인한 불쾌감 따위 느끼지 않고 있다는 문자에서 익숙한 에어컨의 향기를 맡은 쿠로오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니 이미 지하철 안이었고 시원한 지하철의 공기에 정신이 돌아온 뒤에야 핫, 하고 가방을 확인했다.
“음.. 준비는 완벽하네.”
갈아입을 옷과 속옷에 칫솔, 휴대폰 충전기까지 짐은 완벽하게 챙겨두었다.
마침 운이 좋게도 전철역에서 내린 뒤 보쿠토의 집 근처로 가는 버스도 바로 왔다. 평소엔 걸어다니는 거리지만 지금은 버스비가 아깝지 않은 기온이었다. 주말의 낮이었지만 살인적인 더위에 다들 움직이지 않는지 버스는 거의 비어 있었다.
“어서 와!”
“향긋한 에어컨의 냄새...”
보쿠토는 쿠로오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냉큼 문을 열어주었다. 반쯤 정신 나간 얼굴로 현관에 선 쿠로오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주위를 살폈다.
“어? 왜 안 들어와?”
“아니, 너희 부모님은? 인사를 드려야..”
“아! 두 분 나가셔서 안계셔. 들어와 들어와~”
그렇다면 사양않고 들어가야지. 쿠로오는 씩 웃으며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크게 외쳤다.
보쿠토가 부엌 쪽에서 뭔가를 달그락거리고 있었지만 그보단 샤워가 급하다. 욕실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쿠토에게 대충 양해를 구하고 샤워를 시작했다.
정수리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올 것 같은 날씨에도 찬물로는 씻지 못하는 타입이라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오니 폐 속까지 청량해지는 시원한 공기가 쿠로오를 반겼다.
이 정도 되면 저절로 탄성이 새어나온다. 온몸이 후끈후끈한데 살갗에 닿는 공기는 차가워서 엄청 기분이 좋고.. 인류 발전의 혜택을 만끽하는 기분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다.
“거실 어지르면 안되니까 내 방에서 놀자!”
“응.”
쿠로오는 익숙한 보쿠토 방의 침대에 앉아서 흐물흐물해졌다. 여름이불의 약간 사각거리는 감촉과 피부에 닿는 차가움이 너무 좋다.
약간 넋이 나간 채로 보쿠토의 이불을 움켜쥔 쿠로오가 뒤늦게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고맙다. 신세지네.”
“헤이헤이헤이! 그럼 다음에 블록 뛰어주라! 세시간!”
“날 죽일 셈이냐?”
내일 볼 영화라든가 에어컨의 소중함에 대해 몇마디 떠들다 보쿠토가 예쁘게 접시에 담아 내온 주전부리 따위를 주워먹으며 만화책을 읽었다.
하지만 땀도 잔뜩 흘리고 뜨거운 물에 샤워까지 한 뒤였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감각에 쿠로오는 만화책을 보다 말고 불편한 자세로 깜빡 잠이 들었다.
왠만하면 다른 사람 집에서 쉽게 잠드는 타입이 아닌데 폭염과 샤워, 에어컨의 삼단콤보는 쿠로오의 높다란 경계심을 단번에 허물어뜨렸다. 옆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보쿠토라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쿠로오..? 자?”
곤히 자는 쿠로오의 얼굴 앞으로 보쿠토의 손바닥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쿠로오는 굽은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만화책을 쥔 상태 그대로 깊게 잠에 빠져 있었다.
조심스레 쿠로오의 손에서 만화책을 빼내자 저항 없이 손이 스륵 무너진다.
보쿠토는 괜히 침을 꿀꺽 삼키며 쿠로오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손을 잡은게 처음이 아닌데도 괜히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웠다. 그야, 이런 식으로 손을 잡은 적은 처음이니까!
게다가 짝사랑 상대가 샤워를 하고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 자고 있다니?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쿠로오의 손을 실컷 만지작거리던 보쿠토의 얼굴에 돌연 비장한 표정이 떠올랐다.
‘뽀뽀하자!’
이건 일생 일대의 기회였다.
눈치채셨겠지만 원래 여름에 써둔 글입니다.. 금방 마무리할수 있을 것 같아서 마감하다 기분전환용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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