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쿠로오는 시로후쿠에게 보쿠토가 쓸 새 카드 한벌을 요청했고, 다음날부터 보쿠토는 자신의 카드를 만지며 셔플에 익숙해지는데 하루에도 몇분씩 시간을 쏟았다.
하루 몇 시간이라도 방문할 것처럼 이야기하던 보쿠토의 말과 달리 그는 바쁜 퍽 바쁜 사람이었다. 마지막 수업으로부터 사흘쯤 지났을까, 놀러온다는 말은 그냥 예의상 해 본 말이었던 걸까~ 하고 넘기던 쿠로오는 서재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보쿠토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야? 오늘 수업이야!?”
“아니아니, 오늘은 그냥 자유시간!”
자유시간이라니, 여기가 학교냐? 쿠로오는 학교에 제대로 다녀본 적도 없으면서 반사적으로 그렇게 농지거리를 지껄였다. 보쿠토는 대답 대신 쿠로오가 앉은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와 상체를 철푸닥 엎드렸다. 그리고는 티 나게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데.. 쿠로오가 걱정스런 얼굴로 내려보며 어디 아픈거 아냐? 하고 묻자 냉큼 입을 열었다.
꼭 그런 소리를 해주길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지금 원로회의에서 대차게 잔소리 듣고 오는 길이야!”
“어이구 힘들었겠네요~ 그런데 원로회?”
“있어.. 꼰대들 친목회같은거.”
원로회인지 뭔지에 대해 상당히 감정히 쌓였는지 보쿠토는 불만을 쫑알댔다. 그동안 친구 없어서 이야기도 못하고 어떻게 살았나 몰라.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려주며 맞장구를 치는 사이 쿠로오는 기억을 더듬었다. 마피아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보스 아니었던가? 그 보스에게 잔소리를 한다는 원로회란 건 대체 뭘까. 쿠로오는 주로 갱들의 영역에서 살아왔기에 흑사회의 생리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물어볼까 말까.. 기분 나빠하지 않고 대답해주려나. 속으로 다섯번쯤 고민하다 질문을 던지자 보쿠토는 쿠로오의 고민이 우습도록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원로회가 보스보다 더 높은 사람들인거야? 왜 네가 잔소리를 들어?”
“음.. 이게 사실 야쿠자나 흑사회쪽 풍습이긴 한데..”
보쿠토는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하려는 것처럼 상체를 느릿하게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원로회는 전대의 실세들이야, 보스의 오른팔이었거나..”
“지금의 보스는 너인데도?”
“다 친척 어르신들이라..”
한숨과 함께 보쿠토는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고,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지금 친척 어르신들한테 잔소리 듣고 와서 이렇게 우는 소릴 하는거야?
“진정한 의미의 패밀리 비지니스네.”
“그렇지 뭐, 나름대로 백년 넘게 이쪽 업계에 종사한 거니까~”
“백년이나!?”
쿠로오는 깜짝 놀라며 그렇게 반문했다. 아무리 아는게 없어도 부엉이회가 삼년쯤 전에 갑자기 나타나 세력을 불리기 시작했다는 건 안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을 것이다. 흑사회의 분파치고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구나~ 했는데.
“흐음.. 그럼 본토에서 넘어온거야?”
“아니! 후쿠로다니회 자체는 이 도시에 쭉 있었지. 본래는 이 도시의 화교들이 만든 거라서.”
이 도시가 무법지대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50여년 전.
그 이전부터 도시를 지키던 후쿠로다니는 갑작스런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동네 주먹패 모임 정도의 알량한 세력밖에는 가지지 못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달리 체계적인 기틀이 잡혀있긴 했지만.
“뭐만 하면 이게 다 우리가 잘 해둔 탓이라느니.. 한 거라곤 쥐콩만한 건물 한채 가지고 월세받아먹기밖에 못 했으면서 말이야.”
이야기를 듣다 보니 보쿠토는 이 도시에서 태어난 토박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뭐.. 외부에 본부가 있는 큼직한 단체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쿠로오는 별다른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나저나 부엉이회의 안 쪽에서 외부 도시에서 자라고 도시로 들어온 신 세력과 이 도시에서 세력을 보존하던 구 세력으로 파벌이 나뉘어진 모양인데, 외부인에게 이런 것까지 이야기해줘도 되는 건가? 하는 순간 별 세세한 이야기까지 쫑알대던 보쿠토가 입을 다물었다.
얼굴을 보니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게 아닌가 싶은 얼굴이길래 쿠로오는 시침을 뚝 떼고 책에 귀를 기울이던 척 했다.
“뭐야, 쿠로오 네가 물어봤으면서 왜 책을 읽고 있는데!?”
“어? 이야기 다 끝난거야? 너무 길어지길래 언제 끝나나 했다.”
“하나도 안 들었지! 너무하네 정말!”
“아니 들었다니까~ 그러니까.. 백년이 넘었다며?”
“헤이헤이헤이, 완전 초반 이야기잖아!!”
보쿠토는 짐짓 마음이 상한 것처럼 투덜거리며 쿠로오가 보던 책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지만, 쿠로오는 보쿠토가 정말로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리저리 부대낀지 거의 두달이 되어가는데 모를 리가 있나. 쿠로오는 책을 덮어 그 사이 짓눌린 보쿠토의 손바닥을 아프지 않게 꾹 눌러주고-보쿠토는 엄살을 부리며 비명을 질렀다.- 낄낄 웃었다.
“그런데 무슨 책 보고 있었어? 포커에 대한 거?”
“저는 쉬는 시간에까지 자기개발에 투자하고 싶지는 않답니다~”
처음 서재에 도착해 이곳저곳 뒤져보니 포커 입문에 대한 책이 두어권 나오긴 했지만, 인쇄가 십오년도 더 전에 된 책이었다. 그걸 보니 왠지 다른 서재의 책들도 부엉이회가 아닌 이전 이 건물을 썼다는 스텔라가 채워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책등에서 핏자국을 발견하더라도 놀라지 말아야겠다.
쿠로오가 대답을 피하자 보쿠토는 책을 자기 쪽으로 슥 끌어와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기기 시작했다.
“여행 이야기네.”
“아아 뭐~ 그림 많은 책은 그런 것밖에 없더라고.”
“시로후쿠에게 동화책이라도 사다놓으라 그럴까?”
“어유 감사해라.”
쿠로오는 농담처럼 넘겼지만 그가 들고 있던 책은 사람의 손이 꽤 오래간 탄 것처럼 가운데가 쉽게 벌어졌다.
사진작가의 기행문이었는데, 말 한줄 없이 사진으로만 가득 채워진 페이지도 많았다.
인도네시아 발리, 뉴욕의 맨하탄, 그린란드의 오로라 명소.. 도시고 휴양지고 작가가 발 디뎌 이동한 대로 중구난방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보쿠토는 책 위쪽에 작게 접힌 부분을 매만지며 작게 입을 열었다.
이 책을 오래 봤을까?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을 마킹해둔건가? 쿠로오의 손길을 탄 이 책을 보자 어딘가 작은 가시가 박힌 것처럼 불편했는데, 왜 이런 느낌인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여행 가려고?”
“언젠가 갈 수 있겠지 싶어서 보는거지 뭐.”
“흐응..”
보쿠토는 혀를 굴려 본인의 볼 안을 쿡쿡 찔렀다.
그러고 보니, 쿠로오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은 단 1년 뿐이었다. 사실 처음엔 그 정도면 차고 넘치도록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야 지금까지 선생이라고 온 녀석들은 다 재미없는 녀석들 뿐이었는걸.
보쿠토는 딱히 뭐라 할 수 없는 표정으로 책을 탁 덮었다. 쿠로오는 그새 다른 책을 펼쳐들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왠지 심통이 나서 손으로 방해를 하자 순순히 책을 덮고 이쪽을 바라봐왔다.
“이렇게 산만해서야, 친척 어른들에게 더 혼나야겠는데?”
“내가 놀러왔는데 책만 보고.. 놀아줘!”
“음.. 일층에서 당구라도 칠까? 당구 쳐본 적 있지?”
“헤이헤이헤이! 그 정도는 칠 줄 알거든?”
쿠로오는 당구도 처음부터 가르쳐줘야 할 줄 알았지~ 라며 보기 좋게 웃었다.
보쿠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쿠로오가 책을 정리하는 참을 기다리지 못하고 문가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한낮의 고양이처럼 나긋하고 나른한 걸음걸이에 애가 타는 건 보쿠토 쪽이다.
처음엔 이게 포커 선생인지 신입인지 헷갈릴 정도로 험악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웃는 모습을 보고 대번에 인식이 바뀌었다.
남을 위압하려는 본인의 여유로움과 힘을 과시하는 미소와는 달랐다. 순전히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는 웃음이었는데 이 도시에 와서 자신에게 그렇게 거리낌없이 웃어주는 이를 보는건 처음이라 솔직히 기분이 아주 좋았다.
첫인상이 좋으면 다른 행동도 자연히 곱게 보이는지라 쿠로오가 어떤 행동을 해도 밉게 보이지가 않는다. 솔직히 가끔 건방지게 행동하는 것 같아도 눈치가 좋아서 금새 자제하기도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껄적지근한 뒷맛은 책정리를 마치고 걸어오는 쿠로오를 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보쿠토는 활짝 웃으며 쿠로오의 손목을 잡고 1층의 당구대로 후다닥 뛰어내려갔다. 왜 이리 서두르는 거냐고 타박하는 목소리마저 웃음이 서려 있었다.
*
“좋아, 그럼 네가 가진 핸드가 이렇게 있다고 하면, 이 상황에선 콜이야 레이즈야?”
“으으음..”
쿠로오의 손가락이 클로버 9와 K가 나란히 눕혀진 자리 위를 툭 쳤다. 족보는 얼추 외웠다지만 아직 단번에 카드의 하이로우를 가리는게 어려워 보쿠토는 조금 시간을 들였다. 리버 카드가 J나 Q둘 중 하나라도 나와주면 바로 레이즈를 부를 텐데, 아니면 수티드라도! 지금 쿠로오가 가진 카드는 하트와 클로버로 2, 7이다. 단순 계산만 해도 보쿠토 쪽이 가진 카드가 높은 패였다. 보쿠토는 자신있게 외쳤다.
“레이즈!”
“흐음, 왜?”
“음.. 일단 내 패가 좀 더 하이 카드니까. 못해도 K하이는 먹을 수 있을것 같아서.. 그리고 쿠로오가 가진 카드보다 숫자가 더 붙어있으니까!”
“스트레이트를 노렸다?”
“응!”
“그럼 카드가 오픈되었을 때 이렇게 되면?”
쿠로오가 테이블에 남은 다섯장의 카드를 모두 공개하자 보쿠토가 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결과는 쿠로오의 트리플, 보쿠토의 원 페어다.
“엑.. 너무해! 쿠로오에게 7이 하나 더 있었어?”
“보쿠토 네가 롱스택을 가진 상태라면 적당히 레이즈를 받아줘도 큰 손해는 보지 않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번 판단 하나로 단번에 알거지가 되는 수가 있어.”
“으으..”
“왠지 K라든가 높은 카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K혼자 잘나봤자 2원페어에 진다는건 잘 알지?”
“그건 알지만.. 왠지 잘 안 와닿아서.”
쿠로오는 보쿠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을 가르쳐 보는게 처음이라 보쿠토의 진도가 빠른지 느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쿠토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작은 종이에 핸드 순위를 적어가기도 하고, 휴대폰에 포커 게임 어플을 받아서 가끔 쳐본다고도 했다.
온라인상의 숏스택 게임이야 워낙에 룰을 모르고 막치는 사람이 많아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지만.
“제대로 테이블을 몇 번 돌아보면 감이 잡힐텐데.. 이 건물 와이파이 안 된다고 했던가?”
“응.. 옛날 건물이고 쓰지 않던 거라..”
노트북이라도 연결이 된다면 돈을 충전해서 적당한 온라인 카지노에 접속할 수도 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쿠로오는 아쉬운 맘을 접고는 다시 카드를 삭삭 모아 셔플했다.
보쿠토가 테이블 맞은편에서 자신의 카드를 셔플하는 연습을 하는 사이 보쿠토의 앞으로 카드를 두 장 밀어두고, 테이블 위에 카드 다섯장씩 네줄을 늘어놓았다.
“그럼 시간 될 때까지 객관식 문제를 풀어볼까? 지금 가진 핸드로 가장 높은 점수를 얻는 카드는 어느 걸까요? 카운트 다운은 30초.”
“에엑, 잠깐만!”
“25, 24, 23..”
보쿠토 자신이 가진 카드 두 장과 테이블에 놓인 다섯 장의 카드 중 세장을 골라 다섯장의 패를 만들어 그걸로 계산을 해내야 했다. 아직 카드를 보는데 익숙치 않은 보쿠토가 허둥거리는 사이 쿠로오는 느긋하게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대고 턱을 괴었다.
이제 패를 혼자 읽을 수 있으니 기본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진도는 이제 응용편으로 접어든다. 이 무법도시에서 카지노의 오너가 카드를 배워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공구리치는 녀석들 제대로 알아보고 잡으려는 거지.
‘준비물이 필요해.’
쿠로오는 테이블 위를 슥 흩어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딜러버튼과 실제로 사용되는 카지노 칩으로 꽤나 풍성해진 테이블이었지만 쿠로오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일반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후쿠로다니쪽에서 이걸 구해다줄 수 있나 모르겠네.. 괜히 잡음이 생기는거 아냐?’
제한시간인 30초를 훌적 넘기긴 했지만 보쿠토는 정답을 구해냈다.
쿠로오는 방긋 웃으며 문제를 몇 번 더 냈고, 보쿠토가 머리에 쥐가 날 것 같다고 울먹이는 소리를 내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카드를 만지는 건 금새 익숙해 졌으면서 참 귀엽기도 하지.
‘귀엽다는 건 좀 아닌가?’
쿠로오는 문득 든 생각에 자조하며 카드를 내려다보는 보쿠토의 정수리를 쳐다보았다.
마피아 보스에게 귀엽다니, 우스꽝스러운 역설처럼 느껴진다. 처음 이곳에 끌려왔을 때, 아니 다우트 스트릿에 살면서 무언가가 바닥에 털썩 쓰러지는 소리만으로 그게 시체인지 아닌지 가늠했을 때만 해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수업은 대략 일주일에 두 번에서 한 번 정도로 불규칙했다. 한창 자고 있을 때 갑자기 자신을 깨우는 손길에 눈꼽만 떼고 나간 적은 두 번, 아침을 먹고 있는 시간에 들이닥친 것도 세번 쯤.. 쿠로오가 제발 오기 전에 대략적으로라도 귀띔을 해 주면 안되냐고 물었지만 보쿠토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곳으로 오는 일은 철저히 비밀스러운 행동인 모양이었다.
보쿠토는 한번 수업을 시작하면 삼십분에서 한시간 정도 머무르다가 가곤 했다. 두번째 수업에서 보쿠토는 정말 예고한 대로 포커의 룰을 거의 까먹은 상태였지만 수업이 두 번, 세 번 진행됨에 따라서 점차 룰에 익숙해졌다.
그보다 쿠로오에게 더 심각한 것은 보쿠토가 오지 않을 때였다. 보쿠토에게 이 건물 안이라면 맘껏 돌아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맡았지만, 2층의 어느 빈 방 바닥에서 미처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을 발견한 뒤로 쿠로오의 행동반경은 극히 좁아지고 말았다.
그나마 돌아다닐만한 곳이 1층의 텅 빈 홀과 4층의 서재 정도일까.
4층의 책을 원하는대로 꺼내 읽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쿠로오는 몇몇 소설책만 끄적대며 읽고는 서재에 잘 올라가지 않았다.
애초에 인문학적 소양도 별로 없는데다가, 알파벳도 간신히 떼었는데 책을 술술 읽을 수도 없었다. 공부라도 할 겸 추리소설이나 혹은 포커에 관한 책을 꺼내 읽긴 했지만 쿠로오는 다시 지루해졌다.
보쿠토와 함께 있는 시간만이 그나마 다른 사람과 대화하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카드를 섞는 건 안 배워도 되는거야?”
“음?”
쿠로오는 갑자기 튀어나온 보쿠토의 질문에 시선을 아래로 내려 만지던 카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흐으음.. 이제 카드 욕심이 좀 나나 보네? 대답 대신 화려하게 카드를 셔플하며 보쿠토의 앞으로 카드를 한장씩 날려보내자, 보쿠토는 우와! 하고 입을 쩍 벌리며 감탄했다. 쿠로오는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묘기를 배우고 싶은 거야?”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잘 하면 멋있잖아?”
“흐음.. 하긴, 제일 쉬운 방법이긴 하지.”
“뭐가 제일 쉬운데?”
“상대방에 포커에 조예가 있는지 없는지 제일 쉽게 구분하는 방법이라고.”
“헤에?”
“아무리 칩을 잘 따도 카드를 만지는게 어색하면 바로 티가 나니까.”
그렇지만, 카드를 만지는 걸 배우는 건 그냥 요령에 가까웠다. 테이블에 얹어진 카드 뒤쪽을 살짝만 들어올려 카드를 확인하는 손놀림이라든가, 카드를 확인한다고 카드를 손에 넣어 굴리는 시늉을 하는 것 말이다.
“혹시 그 수질관리 위원회란 테이블에선 딜러가 따로 없나?”“그건 잘 모르겠어.”
“그렇다면 홀덤일 가능성이 크네. 딜러를 할 일이 있다면 카드를 셔플하는 법 정도는 배워두는게 맞긴 한데.”
“가르쳐 줘!”
“일단 홀덤 룰부터 외워야 하지 않겠어요?”
쿠로오가 놀리듯 말하자 보쿠토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쿠로오는 낄낄 웃으며 보쿠토가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일단 카드를 쥘 땐 공기 한겹이 사이에 낀 것처럼 살짝 들어 쥐는게 좋아. 그리고 한번에 위로 들어올리는 카드는 밑에 남은 카드보다 적은 양일 것.”
이런 식으로. 라고 중얼거린 쿠로오가 천천히 카드를 셔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카드를 나눠서 다시 섞는걸 컷.”
보쿠토의 손이 쿠로오의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고, 카드는 한 장 빠져나가지 않고 물처럼 흐르듯 섞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이런 식의 리플 셔플을 많이 쓰지. 이런 식으로 섞는건 테이블 셔플이라고하고..”
머신건, 오버핸드, 다양하게 카드를 섞어낸 쿠로오는 입까지 헤 벌린 채 반짝반짝한 눈으로 카드를 쳐다보는 보쿠토를 보고 씩 웃었다.
“다음엔 새 카드 한벌을 준비해 둘 테니까, 다음 시간부터는 십분씩 카드 셔플하는 법까지 배우는걸로 할까나.”
“좋아! 엄청 멋지잖아 그거!”
여유로운 얼굴로 카드를 반씩 갈라 엄지로 스프링을 만들어 양쪽의 카드를 촘촘하게 섞고 이리저리 뒤흔들어보이자 질리지도 않는지 다시 감탄사를 내뱉는다. 쿠로오는 카드를 건네주고는 어설프게 셔플을 흉내내는 보쿠토를 빤히 쳐다보았다.
걸친 정장은 의자 뒤에 걸어두고 있었지만 헤어스타일은 처음 본 대로 이마 위로 치켜올린 머리였다.
어딘가 중요한 일이 있을때만 뒤로 얌전히 넘기는지, 첫 수업 이후로 늘 저 머리란 말이지..
쿠로오는 부엉이회라는 별명이 먼저인지 아니면 저 헤어스타일이 먼저인지 늘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아, 맞다.”
쿠로오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보쿠토가 무슨 일인데?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쿠로오가 비장한 얼굴로 그렇게 묻자 보쿠토는 슬쩍 눈동자를 굴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본 건물이랑 멀지도 않은데 사람도 별로 안 오지, 분명 해가 잘 드는 남향인데 묘하게 온도가 낮지.. 다른 건물도 아닌 마피아의 건물이니 그 정도는 예상했지만 확인사살을 당하니 새삼 간담이 서늘해졌다.
“맞아. 사실 이 장원이 코로나의 분파인 스텔라의 본거지였거든.”
“음?”
“여기가 원래 보스랑 보스 애인이 사람 불러서 파티하던 별장이었는데 우연히 뒷산으로 이어지는 도주용 비밀통로를 알아내서~ 그리로 쳐들어왔어.”
“오야?”
“나중에 여길 쓰려고 벽지도 싹 바꾸고 페인트도 새로 칠했는데 이상하게 보스가 죽은 방 핏자국이 안 지워진다더라고.”
말을 들어보니 이 건물에서 죽은 게 한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평소 귀신따위 믿지 않는다며 코웃음치던 쿠로오의 안색이 대번에 헤쓱해졌다.
“피, 핏자국이..?”
“응. 밑에 애들이 무서워하길래 그냥 놔두라고 했는데.. 괜찮아 쿠로오! 그 사람 이미 죽었거든!”
죽었으니까 문제지! 아아, 진짜! 쿠로오는 괜한 것을 물은 자신을 탓하며 보쿠토의 손에서 카드를 받아들였다. 보쿠토는 순식간에 침울해진 쿠로오의 분위기에 조심스레 고개를 기울이며 슬쩍 물었다.
“혹시 피가 무서워?”
“피가 무서운게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이란게..”
“원래 피는 잘 안 지워져. 그래서 난 빨지도 않고 새 옷 사버리는데.”
아니 제발.. 셔츠에 케첩 묻은 말투로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아줘! 쿠로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으며 카드 다섯 장을 테이블 위에 한장씩 올렸다.
“무서우니까 이 이야기는 그만 할까?”
“진짜 무서워?”
“자, 자. 수업 시작합시다. 여기 리버 카드까지 포함해 이게 보쿠토 네가 가진 핸드고 이쪽이 내가 가진 핸드라고 치면~”
“쿠로오, 쿠로오. 막 무서워서 잠도 안오고 그래?”
쿠로오는 선생님의 말을 끊고 불쑥 물어오는 보쿠토에게 핀잔을 주는 대신 손에 턱을 괴고 지긋하게 눈을 마주쳤다. 노랗고 동그란 눈동자가 그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빤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섭다기보단.. 심심했지.”
“응?”
“인터넷도 전화도 쓸 수 없는 데다가 하루 대부분을 이 건물에서 혼자 지내다시피 하니까.”
“스즈메다랑 시로후쿠는?”
“바쁘게 일하시는 분들인데 외롭다고 같이 있어달라고 할 순 없잖아?”
“흐음?”
보쿠토는 정말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인지 고개를 갸우뚱 옆으로 굴리며 눈을 깜박거렸다. 원래 사람을 방에 넣어두고 가만히 놔두면 심심해서 어쩔 줄 모르는게 정상이거든요~
“차라리 아예혼자라면 모르는데...”
“외로운거 아니었어?”
“아무리 외로워도 귀신은 싫거든요!?”
질색하는 대답에 보쿠토는 뭐가 그리 웃긴지 배를 잡고 낄낄대며 웃어제꼈지만, 쿠로오는 정말로 웃을 수가 없었다. 초반의 장난 반 진심 반의 질문을 했을 때와 달리 지금은 좀 무섭다고..
한숨을 푹 쉬며 카드를 내려놓자 보쿠토가 쿠로오를 달래듯 살살 말을 걸었다.
“그러면 가끔 내가 놀러와도 돼?”
“응?”
“사실, 놀러가고 싶었는데 아카아시가 막았어! 내가 가면 오히려 불편해 할꺼라고..”
“......”
그야.. 불편하긴 하다. 가끔 자신의 위치를 까먹은 것처럼 편하게 구는데 보쿠토는 무려 이 도시를 주름잡는 무력과 권력을 가진 자였다. 바로 어제 그렇게 물었다면 쿠로오는 불편하게 있느니 차라리 심심하고 말지~라고 생각하며 매너있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이란 말이지..’
마피아들도 겁을 집어먹고 근처로 얼씬도 않을 건물에 나같은 민간인을 머무르게 하다니 너무한거 아닌가!
그런 쿠로오의 고민을 훤히 들여다 보듯 보쿠토는 짐짓 뻐기는 얼굴로 자랑스레 말을 이었다.
“나랑 있으면 귀신도 못 나올껄?”
“호오? 어째서? 혹시 퇴마 체질이야?”
“내가 그 보스 멱을 땄거든! 두 번 죽고 싶지 않으면 설마 다시 나타나겠어?”
“와.. 엄청난 자신감..”
그 보스 귀신이란게 진짜 있다 해도 저렇게 웃는 남자에게는 해코지 하지 못할 것 같다. 쿠로오는 어이없이 피식피식 웃으며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보쿠토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끔벅이는 두 눈은 시트린처럼 맑고 색이 고왔다. 저런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면 진짜로 귀신이 꼼짝 못 할지도 모르겠다.
쿠로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보쿠토가 앞으로 자주 보러 오겠다며 활짝 웃었는데, 그렇게 믿음직해 보일 수가 없었다.
시칠리아 스텔라와 흑사회 후쿠로다니의 전쟁이 후쿠로다니의 승리로 끝났으며, 그들이 관리하던 업소를 인수한 것에 대해서는 쿠로오도 잘 알고 있던 참이었다. 그 정도 정보야 비밀도 아니었으니까. 일단 쿠로오가 놀다가 끌려온 그 카지노도 지금은 후쿠로다니의 세력권 밑에 있던 곳이고.
“지금까지는 관리하던 업소가 다 고만고만한 데라서.. 사실 이렇게 큰 곳은 내가 직접 보고 해야한다고 하더라고. 직접 시찰도 하고~”
“아하..”
“그런데 지금까지 도박이라곤 룰렛이나 우노UNO같은 것밖에 안해봤단 말야.”
“우노는 도박이 아니라 보드게임이지.”
“돈 걸면 도박이지 뭐, 암튼 그래서 배우려는 것도 있고!”
그렇다면 카드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좀 배워야 하는게 아닌가? 쿠로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카드만 나에게 배우고 다른 건 다른 선생을 초빙하려는 걸지도 모르지.
쿠로오가 대충 수긍하는 모양새로 고개를 끄덕이자 보쿠토가 추욱 고개를 늘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녀석들이 카드를 쳐..”
“녀석들?”
“수질관리위원회라고, 으, 사실 이게 정식 명칭은 아닌데, 큼직한 카지노 오너들이 모이는 소규모 모임이 있거든?”
‘큼직한 카지노 오너 = 마피아 보스’ 란 공식을 순식간에 머릿속에 떠올린 쿠로오의 손이 순간 멈칫 굳었다. 보쿠토는 하아~ 하고 한숨을 푹 쉬며 투덜거리듯 말을 이었다.
“이제 나도 오너가 되어서 거기 안 낄수가 없는데, 카드를 못 치면 그 테이블에 끼워주질 않는단 말야!”
“카드 종목은 혹시 알고 있어?”
“몰라. 그냥 카드 좀 치나? 하더라고. 아카아시를 대신 보낼수도 없고.. 으으으.”
카드라고 하면 보통 홀덤, 그 다음이 세븐포커다. 족보는 크게 다르지 않고 단지 카드를 돌리고 공유하는 카드가 있는지 아닌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이렇게 세세하게 카드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털어놓을 줄은 몰랐던 쿠로오는, 다음으로 수업은 어떻게 진행하고 싶은지, 일주일에 얼마나 수업을 할 예정인지 등에 대해서도 물었다.
수업날은 그때그때 시간 날 때마다 오게 될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대답 밖에는 들은 것이 없었지만..
“그럼 마지막으로.. 예전 선생님들한테는 진도를 어디까지 나갔어?”
“기억 안 나!”
확실해서 좋네. 쿠로오는 피식 웃으며 카드를 한장 한장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클로버 10, J, Q, K, A 총 다섯장의 카드를 주욱 늘어놓자 보쿠토의 시선이 밑으로 데굴 굴렀다. 마지막 에이스까지 꾹 눌러 놓은 쿠로오가 입을 열었다.
“이게 바로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
“호오?”
“진짜 기억이 안 나나보네.. 이게 포커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강한 패야. 먼저 족보부터 배운 뒤에 카드 만지는 법부터 가르칠 테니까.”
“아냐, 이건 알아. 그러니까.. 같은 무늬에 제일 높은 카드들이 나온 거잖아.”
“맞아. 같은 무늬가 연속되어 나오는게 플러쉬에, 연속된 숫자가 나오는게 스트레이트.”
“응, 응.”
“홀덤이나 세븐포커나 일곱장의 카드를 놓고 그 중에 다섯장의 카드로 패를 맞추게 되는데..”
쿠로오는 테이블에 놓였던 카드를 다시 회수에 착착 섞고는 다시 보쿠토와 자신 앞에 카드를 놓았다.
각자 앞에 네장의 카드를, 그리고 둘 사이의 빈 공간에 다섯장의 카드를 엎어놓은 쿠로오가 날렵한 손으로 카드를 한장한장 뒤집어 무늬를 드러내보인다.
“홀덤같은 경우는 내가 가진 네장의 패 중 두장, 그리고 바닥에 놓인 다섯장의 카드 중 두장을 뽑아서 셈을 하게 되는데.. 일단 카드 받는 순서는 나중에 보고 오늘은 족보만 외워보자고.”
마침내 자신 앞의 마지막 카드까지 엎은 쿠로오는 보쿠토 앞의 Ace카드부터 한장씩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자아, 여기 보스.. 가 가진 카드를 보면.”
“보쿠토로 괜찮아.”
“좋아 보쿠토? 이거랑, 이거까지 하면.. 이게 바로 백 스트레이트 플러쉬.”
“어라? 숫자가 너무 작은거 아냐?”
“에이스 카드를 기준으로 양 옆이 가장 높은 패라고 생각하면 쉽지.”
“같은 무늬의 A, 2, 3, 4, 5가 백 스트레이트 플러쉬..”
보쿠토가 입 안으로 족보를 종알거리며 외우는 시늉을 하자 쿠로오는 씩 웃었다.
생각보다 성실한 학생인데?
“반면 내가 만들어진 패를 보면.. 에이스가 없는 그냥 스트레이트 플러쉬지. 쥘 수 있는 카드패중 세번째로 강한 패지만 백 스트레이트 플러쉬엔 지는 카드야.”
쿠로오의 목이 칼칼해지도록 족보와 카드 놓는 법을 설명하고 나자 한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보쿠토는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며 퍽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어설프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모양새가 잡혔다 싶자 뒤에서 인기척 하나 없이 시로후쿠가 불쑥 튀어나왔다.
“시간 다 되었는데요.”
쿠로오가 흠칫 놀라자 보쿠토가 아쉬운 얼굴로 카드를 내려놓았다. 벌써 수업이 끝이야? 하고 듣기 좋은 말도 한다.
쿠로오는 카드를 샥샥 정리하며 보쿠토와 메이드가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 일반적인 메이드는 아닌지 부엉이회의 보스라는 사람과 반말을 하고 있다 저 사람.
그러다 보쿠토가 뜬금없이 쿠로오에게 말을 툭 던진다.
“쿠로오, 아카아시가 컴퓨터는 넣어줄 순 없지만 4층 서재는 개방해줘도 된대.”
“네? 아, 응?”
“심심해한다고 해서.”
“아..”
쿠로오는 살짝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위로 들어 시원하게 기지개를 편 보쿠토가 하품을 쩍 하며 아쉽게 중얼거렸다.
“재밌었는데, 다음에 오면 룰 다 까먹어버릴 것 같아!”
“내가 다시 설명해주면 되지.”
쿠로오는 아카아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머리를 쓰는 일을 싫어한다 그랬던가.
“그래서.. 다음 수업은 언제쯤이죠, 학생?”
“최대한 빨리 올께! 아,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보쿠토가 장난스레 눈썹을 휙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옷, 잘 어울리네!”
“어라, 설마 이것도..?”
“그럼 다음에 봐!”
하하하 하고 호쾌하게 웃어보이더니 뒤를 따르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건물을 나서버린다. 쿠로오는 자신의 옆에서 말없이 보쿠토를 배웅한 시로후쿠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이 옷도..”
“보스가 허락했어요.”
아니, 돈도 많은 사람들이 왜 지네 보스 옷을 가져다 나한테 입히고 난리야!?
세탁실로 들어갔다는 쿠로오의 옷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매일 침대 위에 포장도 뜯어지지 않은 옷을 올려두길래 그것을 입고 있었는데 설마 그게 원 주인이 있던 것이었을 줄이야. 쿠로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약하게 투덜거렸다.
“보스 취미가 새 옷 사서 옷장에 처박아 두기인가보지요?”
“그 나이대 청년들이 입을 법한 평범한 옷이잖아요.”
“그야, 그건 그렇지만.”
“대신 입어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지긋히 처다보는 눈길은 네가 감히 기분이 나쁘다고 해? 보스의 옷인데? 하고 질책하는 느낌이 들어 쿠로오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을 수 밖에 없었다.
3층으로 돌아와 이젠 꽤 익숙해진 방으로 들어가자 미리 갖다둔 것인지 간단한 야식이 차려져 있었다. 쿠로오는 냉장고 안에서 맥주를 한캔 꺼내어 바삭한 나쵸와 건더기가 듬뿍 든 과카몰레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티비도 켜지 않고 나초 부서지는 소리를 멍하니 들으며 입에 든 것을 씹던 쿠로오의 머릿속으로 처음부터 상당히 친근하게 다가왔던 보쿠토와의 첫만남이 스쳐지나갔다.
‘친구가.. 없나?’
과하게 친근하게 다가오긴 했지. 쿠로오는 소파에 등을 푹 기대어 나뭇결이 그대로 보이는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하기사 직업(?)을 보면 또래 친구가 없을만도 하다. 그래서 그렇게 말을 낮추라고 한 걸까? 그래봤자 내가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줄 수는 없을 텐데. 쿠로오는 어쩐지 보쿠토가 약간, 아주 약간 가엽게 느껴졌다.
그래도 난 친구는 있지. 다른 도시에 있지만.. 1년 뒤면 만날 수도 있고.
입지도 않을 편한 옷을 사고, 카지노를 둘러보기 위해 카드를 배우는 선생이 동갑이란 사실에 기뻐하고, 그리고 아이처럼 웃는다.
어찌나 잘 웃는지 그 얼굴만 보자면 이 도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세력가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쿠로오가 두 눈으로 부엉이회가 만들어낸 시체를 똑똑히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닌데도.
어제 앤솔 실물을 받았으니 올려봅니다 헤헤 책도 특전도 정말 아름답고 너무 좋아요ㅜㅜㅠ마이 프레셔스.... 다시한번 앤솔을 주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사실 최면술 조금 할 줄 알아!”
하고 신젠의 주장인 오가노가 외친 것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었다.
그 은밀하고도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흥미있는 얼굴로 그를 돌아본 것은 사실 몇 명 되지 않았다. 후쿠로다니의 주장은 아직도 도둑잡기에 푹 빠져 있었고, 네코마의 주장은 그 허벅지를 베고 잠들어 있었으며 우부가와의 주장은 열정적으로 아이돌 잡지를 탐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관심을 보인 것은 억지로 붙잡혀 보쿠토의 상대를 해주고 있던 코노하와 와시오, 야쿠 정도일까.
아무도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은, 그 묘한 정적이 흐른 뒤 고라는 잡지에서 슬쩍 시선을 들어 오가노에게 ‘어떻게?’ 하고 물어 주었다.
그 질분에 오가노는 에헴, 하고 제법 건방진 목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너희 궁금하다며, 최면으로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뭐를.”
“쿠로오의 비밀.”
힐끔, 카드만 내려보고 있던 보쿠토의 눈동자가 그제서야 흥미로 반짝이며 옆으로 데굴 굴러갔다.
*
매년 여름 열리는 합숙날 밤의 카지노-라고 해봤자 종목은 우노와 도둑잡기 정도였다.-의 꼴찌에게 잔인한 형벌이 준비되어 있었다.
일명, 꼴찌의 진실이라고 불리는 벌칙이다. 사실 거창한 이름과 달리 그저 꼴찌가 된 사람은 우승자의 질문에 무조건 솔직하게 대답해야 하는 것뿐이지만. 요령있게 넘어가려면 얼마든지 얼버무릴 수 있는 벌칙이었지만 ‘어떻게 여기서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 ‘네가 진짜 사나이라면 승부에 승복하라고!’ 와 같은 묘한 열기에 휩싸여 사람들은 아홉살 때 이불에 오줌 싼 이야기며, 중학교때 좋아하던 여자애 이름 같은 것을 내뱉고 말았다. 그런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 쿠로오 테츠로라는 사실은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당연했다.
꼴찌에 당첨된 자가 입을 앙 다물고 고개를 가로저으면 쿠로오가 나섰다. 그 입담이 얼마나 무섭냐면은.. 쿠로오가 설득을 시작하면 이 자리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민주주의 국민의 당연한 의무 같은 것이라고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참고로 쿠로오는 말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잡기에도 재주가 있어 단 한번도 술래가 된 적이 없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이 방에 모든 사람들은 쿠로오에게 자신의 비밀을 한가지 이상 들킨 자들의 모임이었다는 것이다.
오가노의 말에 야쿠는 슬쩍 카드를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진짜냐..?”
“성공률은 한.. 60%정도 되려나.”
“애매한데.”
“한번 해봐서 손해볼건 없지.”
“쿠로오 깨울까?”
“아냐, 원래 비몽사몽일때 걸어야 성공률이 좋댔어.”
코노하는 쥐고 있던 카드를 바닥에 엎어버리고 보쿠토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았다. 야, 지금 이걸 하고 있을 때가 아냐.
“응? 진짜로 해보게?”
그러나 보쿠토는 의외로 흥미가 없는 모양인지,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쿠로오의 머라카락을 손으로 슥슥 쓸며 물었다. 저 자식들, 은근히 사이가 좋다니까? 하지만 지금은 둘의 우정 전선이 중요한게 아니었다.
“나는 내 첫사랑 신상명세까지 불었다고! 쿠로오 이녀석의 치부 하나쯤은 손에 쥐고 있어야겠어!”
“옳소!”
“그, 그건 그냥 벌칙이잖아!?”
“시끄러워!!”
분위기는 급격하게 달아올랐다.
3학년들은 잠든 쿠로오를 짐짝처럼 들어 벽으로 데려갔고, 보쿠토는 잠든 쿠로오의 상체를 벽에 기대어 앉힌 뒤 최면을 걸 준비를 하는 오나가를 얼빠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주변으로 네 학교의 삼학년들이 둥글게 둘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이없이 쿠로오를 빼앗긴 보쿠토는 당황하는 얼굴로 그들을 말렸다.
“야,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최면에 걸리면 그거대로 미안한 일이고, 걸리지 않더라도 기분나빠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보쿠토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기웃대자 코미가 보쿠토의 어깨를 툭 치며 짖궂은 얼굴로 물었다.
“보쿠토 너는 궁금하지도 않냐?”
“구체적으로 뭘 궁금해 하면 되는건데?”
“글쎄? 첫사랑 이름이라든가.. 만약에 쿠로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아?”
언제나 자신들 머리 꼭대기에 앉아 후후후, 하고 살랑살랑 부채를 부치며 입가를 가리고 웃는 듯한 이미지의 쿠로오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런 상황이 되면 저 녀석을 있는 힘껏 놀리고 싶은 것은 거의 본능의 영역이다.
“왠지 저 녀석, 엄청 능숙하게 연애를 하고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사실 여대생하고 만나고 있을지도.”
“진짜냐! 부럽다!”
“아니 이건 추측이지.”
보쿠토의 양 옆에서 사루쿠이와 코미가 만담처럼 말을 주고받는 사이 쿠로오는 자신에게 미증유의 위기가 닥친 줄도 모르고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쿠로오의 어깨를 약하게 흔들어 잠을 깨우자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올린 쿠로오의 눈 앞으로 휴대폰이 불쑥 솟아올랐다. 빙글빙글 묘하게 회전하는 영상이 끝없이 반복되는 화면이었다.
멍한 얼굴로 그 화면을 쳐다보던 쿠로오의 눈동자가 몽롱해지더니 네 이름이 뭐야? 하고 묻는 오가노의 목소리에 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쿠로오.. 테츠로..”
졸린 것도 그렇다고 제정신인것 같지도 않은 멍한 얼굴이었다.
그 순순한 목소리에 3학년들 사이에 가볍게 소요가 일었다. 이거 진짜 최면에 걸린거 아냐?
어.. 이렇게 쉽게? 오가노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물론 보기만 해선 최면에 걸린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걸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뭐, 질문해보면 알겠지.”
잠시간의 토론 끝에 쿠로오 테츠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으로 이번 최면의 목표를 정했다. 쿠로오의 인권을 부르짖는 후쿠로다니 주장의 외침은 다수결이라는 이름 아래 차분히 무시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응..”
오오오, 대박! 누구야!? 누구래!?
느릿하게 나온 대답에 오가노는 잔뜩 들뜬 녀석들을 조용히 시키며 입가에 검지를 가져갔다. 너무 시끄러우면 깨어나버린다고! 하고 작게 외치는 것으로 충분했다.
“흠흠.. 좋아하는 사람은 학생입니까?”
그렇게 이어 질문하자 쿠로오의 고개가 위아래로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이어 같은 학교입니까? 하는 질문에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방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눈앞에 둔 것처럼 긴장된 공기였다.
진짜 최면에 걸렸나봐! 하고 눈치없이 날뛰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방금 전 그들을 말리던 보쿠토마저 흥미진진한 얼굴로 쿠로오의 멍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타교생인가..?”
“어쩌면 매니저들일 수도 있지.”
코미와 사루쿠이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보쿠토는 그제서야 뭔가가 떠오른 것처럼 핫, 하고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이건 프라이버시 침해야! 라고 외치며 쿠로오의 앞을 막아섰다.
“우릴 배신하기냐..!”
“난 처음부터 쿠로오 편이었다고!?”
흡사 약자를 지키는 용사의 당당한 모습과도 닮아있었지만 그 상대는 마왕군이 아닌 비밀을 뺴앗긴 혈기왕성한 고등학교 3학년의 남학생들이었다.
그것도 보쿠토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들.
쿠로오에게 당하기는 제일 많이 당한 녀석이 쿠로오를 변호한다고?
그 반응이 뭔가 수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코노하 뿐만이 아니었다.
“이거.. 왠지 반응이 요상한데.”
“그렇지...?”
“넌 뭔가 알고 있냐?”
“아, 아니 모르는데! 나는 쿠로오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전혀!”
날카로운 코노하의 물음에 보쿠토는 필사적으로 변명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보쿠토의 반응에 진짜로 쿠로오가 좋아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3학년들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일단 제압해!”
“으아앗!”
와시오와 사루쿠이의 양 팔에 끌려나간 보쿠토가 필사적으로 쿠로오를 깨우려고 했지만 이내 입이 막혀 읍읍 소리만 내며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후후.. 하고 음산하게 웃은 오가노가 바로 마지막 질문을 입에 담았다. 원래 조금 더 다른 녀석들의 애를 태우다가 물어보려고 했던 것인데, 보쿠토가 시끄러워 진 이상 쿠로오가 꺠어나기 전에 얼른 끝내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쿠로오의 눈 앞에 휴대폰 화면을 살살 흔들어 눈동자를 몽롱하게 만든 오가노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이 뭐야?”
“...보..”
‘보?’ 라고!?
방 안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보쿠토를 향했다. 설마, 너냐!? 싶은 얼굴이었는데 그 시선에 보쿠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잠깐만, 그럼 보쿠토가 지금 쿠로오의 입을 막으려는 이유가..!?
“어어..?”
“설마 이거..?”
그 반응에 방안의 공기가 더욱 더 심각해졌다. 우리가 알아서는 안 되는 금단의 정보에 손을 댄 건 아니겠지!? 바짝 긴장한 그들의 시선 사이로 쿠로오의 목소리가 마저 흘러나왔다.
“...이..”
그렇게 희미하게 말을 끝맺은 쿠로오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나마 제일 가까이에 있던 오가노가 간신히 들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어라? 방금 뭐라 그랬지?”
“이? 라고 끝난 것 같은데.”
“‘히’ 나 ‘시’ 아냐?”
다시 바닥에 엎어져 도롱도롱 잠든 쿠로오를 그대로 둔 채 다른 삼학년들은 쿠로오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들을 가지고 추리극장을 펼쳤다.
수확은 없었는데, 저 드문드문 튀어나온 단어들이 이름의 앞부분인지 중간부분인지 아니면 별명인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타학교의 학생 중 이름에 ‘보’와 ‘이’가 들어가는 사람에 후쿠로다니의 매니저인 스즈메다 카오리양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나, 첫 단어가 ‘오’가 아닌 ‘보’ 나 ‘호’가 확실하다는 주장에 그 정체는 결국 미궁 속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코노하는 퍽 안심한 목소리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랐잖아, 처음에 보쿠토 이름 부르는 줄 알고 기절할 뻔 했다.”
“아- 나도!”
“쿠로오 완전 잠들었네.”
“방금 그것도 잠꼬대 아냐?”
“벌써 두시네, 이제 슬슬 자러 가자.”
결국 쿠로오의 짝사랑 상대에 대한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상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큰 수확이었다. 적당히 자리를 정리한 그들은 곧 각 학교의 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보쿠토만이 멍한 얼굴로 충격을 곱씹었다.
‘왜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
그럴 리 없는데, 분명 쿠로오가 좋아하는 건..
‘쿠로오, 날 좋아하던 게 아니었어..?’
*
쿠로오 테츠로.
네코마 고등학교 배구부의 미들 블로커였으며 현재는 자신처럼 배구부의 주장을 맡고 있다.
그는 보쿠토가 인정할 정도로 블로킹 센스가 좋은 선수였다. 그야 완전히 기세를 탄 보쿠토의 스파이크를 막을 정도의 기량과 센스를 가진 선수는 흔하지 않으니까. 같은 후쿠로다니 배구 캠프에 속하게 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쿠로오와는 같은 학교가 아니었지만 같은 운동을 하고 있었고, 같은 도쿄 배구 캠프에 속해 있어 어느 순간부터 엄청나게 친해진 사이였다.
길을 걷다가 친한 친구 다섯명의 이름을 무작위로 나열해보라고 물으면 두 번째나 세번째엔 쿠로오의 이름이 튀어나갈 정도다. 물론 그건 쿠로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보쿠토는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오의 시선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선 느낄 수 없던 묘한 위화감을 발견했다.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기엔 미묘하고 말로 설명하자니 딱히 특이할 것도 없었지만, 뭔가가 달랐다.
그건 아마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종류의 감이었다.
쿠로오와 시내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날 엄청나게 신경 쓴 옷차림을 하고 와서 자신을 머쓱하게 만든 적도 있었고, 자신이 생각조차 하지 못한 부분까지 배려하면서 신경써 주곤 했다.
연습 중에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열에 아홉은 쿠로오와 눈이 마주치는데, 그럴 때 의기양양하게 웃어주면 쿠로오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접어 소년처럼 웃어준다.
체력이 바닥났다고 버릇처럼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이 조르는 나머지 연습은 언제나 빼먹지 않고 어울려 주었고, 밤에 문자를 하면 늘 쿠로오가 먼저 잘 자라고 상냥하게 말하며 끝을 맺었다. 심지어 시합을 앞둔 자신의 컨디션 변화도 바로 옆의 감독님보다 맞은 편 관중석에 있던 쿠로오가 더 빨리 알아차려 준 적도 있었다. 감독님의 지시로 코트 밖으로 나와 이마에 해열 파스를 붙이면서 조금 감동했는데, 그 파스를 쿠로오가 사온 거라고 했을때는 정말 놀랐었지.
‘아프면 말을 했어야지!’ 하고 크게 혼나긴 했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이 조금씩 쌓여서 보쿠토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보쿠토는 바보도 아니었고 자신을 향한 호의에 둔감한 편도 아니었으므로.
쿠로오가 날 좋아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다 아냐, 착각이겠지. 하고 고개를 털어버린 적도 사실 몇 번이나 있었는데, 보쿠토가 겨우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올해 초 정월이었다.
신사에 같이 참배하러 가자! 하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 어쩌다 인원이 늘어서 결국 네코마와 후쿠로다니의 부원들이 전부 이케부쿠로의 작은 신사에 모인 날이었다. 사실 참배는 핑계고 쉬는 날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놀러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그 때 쿠로오가 입고 있던 옷이 기억이 난다. 붉은 색의 오버넥 스웨터에 검은 코트.
티셔츠에 아무런 패딩이나 걸치고 나온 자신과는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멀끔한 차림이었다.
어떻게 생각했더라.. 참배 끝내고 약속이라도 있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은 다 함께 라멘을 먹고 가라오케에 갔지만.
주머니의 동전을 죄다 털어넣고 힘차게 방울을 울린 뒤 양 손을 짝 소리나게 마주잡고 올해야말로 전국 재패! 라는 소원을 진지하게 빌었다.
목표는 전국 우승! 그리고 함께 연습한 네코마도 신젠도 우부가와도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 네 학교가 다 전국대회에 진출하는건 불가능하겠지? 퍽 시시한 쪽으로 생각이 흘러갔지만 보쿠토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소원을 빌었다. 적어도 연습으로 갈고 닦은 기량만은 전부 내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식으로.
인생 최고로 진지하게 소원을 빌고 난 뒤 감은 눈을 천천히 뜨는 순간 보쿠토는 옆에 선 쿠로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보쿠토의 뒤 어딘가 배경을 바라보거나 스치듯 눈길을 지나치는 것과는 달랐다.
‘....어?’
정면으로 향한 시선의 끄트머리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색.
그 찰나의 순간 보쿠토는 쿠로오의 눈길, 그 시선이 자신을 애틋하게 어루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반대편으로 홱 돌리고 말았다. 왠지는 모르지만 얼굴이 확 달아오를 정도로 민망했던 것이다.
‘왜, 왜 쿠로오가 날 저렇게 쳐다보지?’
왜 그 눈길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깨닫지 못한 보쿠토는 한참동안이나 그러고 서서 당황한 가슴을 진정시켰다. 뒷사람들이 웅성이며 자리를 비켜달라는 식으로 눈치를 주고 있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점괘통으로 걸어가는 쿠로오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 해, 소원 다 빌었으면 뽑기하러 가자.”
“어, 응.”
쿠로오는 왜 나를 쳐다보고 있었을까.
내가 동전을 너무 많이 넣었나? 아니면 종을 너무 세게 울려서? 소원을 비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걸까? 아니면 나와 관련된 소원을 빌었다든가..
“....아.”
보쿠토는 순간 머릿속을 관통하는 어떤 직감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과도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순식간에 그동안 쿠로오가 자신에게 보였던 상냥했던 행동들이 눈앞에 주르르륵 재생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곱씹어도 확실하다.
보쿠토는 쿠로오가 제 손에 뽑아온 점괘를 쥐어줄 때까지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서 어버버 하고 입만 뻐끔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쿠로오가 날 좋아하나봐.
*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어째서 지금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쿠로오의 행동이 새삼스러웠다.
장난을 치다가 얼굴이 가까이 있으면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자연스레 한발짝 떨어지는 행동이라든가, 짖궂게 자신을 놀린 뒤 화가 나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슬쩍 살피는 눈빛 같은 것.
다른 네트에 있다가도 자신이 무언가 행동을 하면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시선 하며... 이렇게 생각하니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쿠로오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 버리는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어쩌지..?’
쿠로오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다. 타인의 성적 취향을 가져다 남을 함부로 매도하고 싶지도 않고, 쿠로오는 그런 걸로 멀리하기엔 너무 좋은 친구였다.
바로 그게 문제다.
‘나한테 고백.. 하려나?’
고백을 받고 나서 지금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말로는 친구로 지내자라고 해도 지금처럼 스스럼없이 지낼 수는 없겠지. 자신을 볼 때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멀어질 쿠로오를 상상하면 자다가도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고 만다.
며칠간 혼자서 끙끙 앓던 보쿠토는 결국 아카아시를 불러 앉혔다. 후배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조금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아카아시라면 이런 문제에 적당한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 아카아시 학교에서 엄청 인기 많고! 일주일에도 몇번씩이나 신발장에 편지가 들어있는 녀석이니까!
두서없는 보쿠토의 설명을 모두 듣고 난 뒤의 아카아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누가 보쿠토 씨를 좋아한다는 말입니까..?”
“그, 그건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말할 수 없어.”
“..정리하자면, 보쿠토 씨는 우연히 A라는 분이 본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확실히 고백을 받은 건 아니지만 충분히 그렇게 추측할만한 근거가 있다는 말이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응, 응!”
“보쿠토 씨는 A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그만두었으면 하는 건가요?”
“그건 절대 아냐!!”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카페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슬쩍 보쿠토에게 모였다가 사라지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그냥 친구로 계속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날 조금만 덜 좋아해줬으면 좋겠어.”
“......”
쿠로오가 날 좋아하지 않는 건 싫다.
합숙이나 연습시합 때도 심심해질 거고, 쿠로오의 블로킹이 없는 스파이크 연습은 정말이지 재미가 없다. 뭔가 파악~! 하는 느낌이 없달까.
“그러니까 나를 아예 좋아하지 않게 되는 건 싫다고! 나는 그, A? 랑 이대로 친한 친구로 지내고 싶으니까! 나는 어쩌면 좋지?”
아카아시가 질린 얼굴로 욕심쟁이.. 하고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보쿠토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아시는 얼음 사이에 꽂힌 빨대를 달그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평소대로 계시면 될 것 같은데요.”
“그건,”
“보쿠토 씨가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알겠습니다. A씨가 고백이라도 해서 두 분의 사이가 어색해지는 게 싫으신 거죠.”
명쾌한 아카아시의 대답에 보쿠토는 맞아! 하고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보쿠토 본인이 그 결론을 도출하기까지는 한참이나 걸렸는데 역시 아카아시다.
“하지만 고백을 할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은 A씨에게 있어요. 그렇잖으면 A씨에게 가서 ‘나를 좋아해주는 건 고맙지만 배구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 날 포기해줘!’ 라고 말해보시던가요.”
“에.. 그건 너무 재수없잖아..”
“확실히, 재수없네요.”
제법 비슷하게 보쿠토의 말투를 따라한 아카아시의 목소리에 어쩐지 가시가 돋아있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모처럼의 휴일에 끌려나와 복에 겨운 소리를 고민이라고 늘어놓는 행동이 아카아시를 짜증나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보쿠토는 ‘재수 없다’며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아카아시의 눈길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 그럼 나는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야?”
“기다리는 것조차 그 사람의 마음이 부담된다면 아예 먼저를 인연을 끊는 수밖에 없지요. 그게 가능한 사이라면 다행입니다만..”
그건 조금 잔인하지 않아요? 하고 아카아시가 말을 마무리한 뒤 컵을 들어 입술을 축인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대답이 영 마음에 차지 않은 기색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모든 상황이 해결되는 비장의 한수 같은 게 나타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수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니.
그리고 쿠로오에게 내 쪽에서 먼저 멀어진다니 절대 사양이었다.
그런 식으로 마무리할 바에는 아카아시에게 상담도 하지 않고 그냥 쿠로오의 마음을 모르는 척 하고 말았겠지. 오히려 보쿠토는 쿠로오를 아낀 나머지, 쿠로오에게서 받은 이 애정과 온기에 어떻게든 답해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보쿠토가 시무룩한 얼굴로 컵을 만지작거리자 문득 떠오른 것처럼 아카아시가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보쿠토 씨.”
“응?”
“A씨가 보쿠토 씨를 좋아하는 건 확실한 건가요?”
“당연하잖아?”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질문한 아카아시가 민망할 정도로 당당하게 대답하는 보쿠토였다.
그러니까, 고백도 받지 않고 별다른 근거도 없는데 말이죠. 아카아시는 어쩐지 한숨을 쉬고 싶은 마음이 들어버렸다. 뭐 본인이 그렇게 판단할 근거가 있겠지만, 미리미리 배리어를 치지 않으면 대책없이 초 의기소침 모드에 들어가버릴 수도 있기에 그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A씨가 보쿠토 씨가 아닌 다른 분을 좋아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나요?”
“뭐?”
“예를 들면.. A라는 사람이 B를 좋아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B 곁에 있던 C라는 사람이 그만 A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해버리는 거죠. 그리고는 앞으로 친구로 지내자, 하고 말해버리면.. A는 상당히 얼빠지지 않겠어요?”
“내가 C라는 거야..?”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거란 말씀이에요.”
“으음..”
보쿠토는 그럴 리 없다는 듯 영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아카아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뭐, 그걸로 됐다.
잘 해야 술 석잔, 못하면 뺨 석대. 아카아시로써도 섣불리 타인의 애정전선 사이에 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그리고 다시 시점은 현재로 돌아온다.
보쿠토가 격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바로 그 시점이었다.
‘쿠로오가 날 좋아하는게 아니었다고..?’
분명 ‘보’ 까지만 해도 내 이름을 말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 라니.. ‘보쿠토 코타로’라는 제 이름자와는 전혀 연관없는 글자였던 것이다!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여봐도 고작 유튜브 영상으로 멍한 눈으로 완전히 최면에 빠진 것처럼 굴었던 쿠로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엉켰다.
다음 날, 일찍부터 잠자리에 들었던 쿠로오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묘하게 자신을 쳐다보며 실실 웃는 3학년들의 표정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는데, 느즈막하니 체육관으로 들어온 보쿠토를 보고는 그 시선들이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정신이 팔렸다. 비단 그가 자신의 짝사랑 상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보쿠토의 상태가 안 좋았다는 뜻이다.
쿠로오는 어느새 자신의 뒤로 슬쩍 다가온 아카아시에게 물었다.
“저 녀석, 대체 왜저래..?”
“저야말로 묻고 싶은데요.”
밤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물음에도 아카아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아카아시는 쿠로오 쪽이 변화의 이유를 알지 않을까 물어보려 했다는 것이다.
어제 빈 교실에 3학년들끼리 모여 놀기는 했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다. 졸리고 피곤해서 일찍 자버리기도 했고.. 그러나 숙면을 취한 쿠로오와 달리 보쿠토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하룻밤 새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내가 잠들고 나서 공포영화 상영회라도 한 건가!?
하루 정도 잠을 자지 않았다고 운동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체력이 없는 녀석은 아니라 제대로 관리하라며 코치님께 꾸중을 듣고 스트레칭에 합류하긴 했지만, 생기 없는 눈빛에 둥글게 쳐진 어깨는 아무리 봐도 ‘나 심각한 일 있소’ 하고 광고하는 듯했다. 이건 또.. 어서 와서 위로해달라는 제스쳐인가.
쿠로오는 말없이 몸을 풀기 시작하는 보쿠토의 옆으로 슬쩍 다가갔다.
“어이, 보쿠토.”
“.....!”
평소처럼 이름을 부르자 보쿠토의 어깨가 화들짝 튀어오른다. 오늘은 또 새로운 반응이네~ 하고 대수롭잖게 생각하며 상체를 숙인 상태의 보쿠토의 엉덩이를 손으로 장난스레 툭 쳤다. 그러 장난일 뿐이었는데 쿠로오는 보쿠토가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정말 몰랐다.
“무슨 짓이야!”
치한이라도 당한 것처럼 버럭 외치며 부들부들 떠는데, 체육관 안의 시선이 자신에게 일시에 모이고 말았다. 거기에 되려 당황한 것은 쿠로오였다.
그냥 평소처럼 장난쳤을 뿐인데 눈빛으로 엄청나게 비난당하고 있잖아!?
“무슨 짓이냐니?”
“왜, 왜 내 엉덩이를 허락도 없이 만지는 거야!”
그만 헛웃음이 나와버릴 것 같다. 쿠로오는 풉, 하고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자제했다. 이 타이밍에 웃어버리면 저 녀석은 백 퍼센트 의기소침 모드에 빠지고 만다.
기세 좋게 외쳐놓고는 벌써부터 스스로 내뱉은 말이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고..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쿠로오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보쿠토를 자세히 살폈다.
방금 이상하게 놀란 것도 그렇고, 밤새 잠 한숨 못잔 저 얼굴도 그렇고 아주 수상하다. 그러나 좀 더 묻기 전에 보쿠토는 쿠로오 미워! 하고 벌컥 외쳐버리고는 밖으로 두다다다 달려나갔다. 체육관에 남은 쿠로오와 남은 부원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 뒷모습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왜 저래..?”
“..꿈에서 보쿠토 선배의 고기라도 빼앗아드신거 아니에요?”
“내가 왜 그랬담.”
실없는 농담에 피식 웃은 쿠로오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보쿠토를 잡으러 코노하가 갔으니 자신이 따라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쿠로오 앞에서 도망쳤던 보쿠토는, 자신을 따라 나온것이 쿠로오가 아닌 코노하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거하게 충격을 먹었다.
당연히 자신을 따라 나와줄 줄 알았는데!
뒤늦게 연습에 합류한 보쿠토는 자신의 다시 돌아왔는데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쿠로오를 보며 주먹을 꽈악 쥐었다. 아무리 그래도, 친한 친구가 이런 반응이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줄 수는 있는 거 아냐!?
보쿠토 자신이 먼저 도망갔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채였다.
쿠로오는 또 저 녀석 나름대로 나에겐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구나 싶어 모른 척 해주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언제 쿠로오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나 싶어 힐금대던 보쿠토는 저녁을 먹을 때 쯔음엔 거의 울기 직전의 얼굴이 되었는데, 자신의 것이었던 쿠로오의 상냥함이 사실 자신에게만 국학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보쿠토를 절망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켄마, 앉지 말고 일어서서 다리 맛사지 먼저 해.”
“리~에프! 제대로 다리를 굽히라고 했지! 그렇게 해서 에이스 되겠냐!”
“잘 했어 이누오카!”
“나 주는 거야? 잘 마실게~”
쿠로오는 자신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후배, 소꿉친구, 타학교의 매니저, 그리고 타 학교의 친구들에 코치님까지..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히 신경을 쓰며 말을 걸고 있었을까.
숨이 턱끝까지 찬 상태로 부원들을 독려하다 신젠의 매니저가 냉동실에 보관했던 스포츠 드링크를 건네자 입꼬리를 올려 씩 웃고는 드링크를 꿀꺽꿀꺽 들이킨다. 보쿠토는 제 손에서 찌그러지는 물병에 아카아시가 뒷목을 잡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런 쿠로오의 태연한 행동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왠지 싫다.
자신이 함께 놀지 않아도 쿠로오는 아무렇지도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나니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쿠로오와 사이가 어색해질까봐 ‘나를 조금만 덜 좋아해줬으면 하는데~’ 하고 배부른 소리를 지껄였는데, 지금은 쿠로오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공평하게 대하고 있다는 생각하니 화가 날 것 같았다.
“쿠로오! 저녁 먹기 전에 블록 뛰어줘!”
배구공을 옆구리에 끼고 쿵쿵 발소리를 내어 걸어가자 신젠의 매니저와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 쿠로오가 웃다 말고 자신을 쳐다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우뚱 눕힌다.
“싫은데~”
짖궂은 얼굴로 그렇게 말한 쿠로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너처럼 괴물같은 체력이 아니라고 난~”
“어..”
별로 특이할것도 없는 반응이었다. 쿠로오는 늘 이런 식으로 승낙의 말 전에 한마디씩을 덧붙이며 보쿠토와 가볍게 투닥거린 뒤에야 순순히 연습에 어울리곤 했던 것이다.
특이한 점은 쿠로오가 아니라 보쿠토의 반응이었다.
쿠로오의 장난스런 반응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돌아선 것이다. 단칼에 거절당할 줄 몰랐다는 듯 완전히 시무룩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오야오야...?”
그 반응에 쿠로오는 답지 않게 당황하며 구석에 주저앉은 보쿠토의 뒤를 따랐다.
피곤하니 저녁을 먼저 먹고 이야기하자는 말에도 우울하게 무릎을 껴안은 채 고개를 쳐박고 있던 보쿠토는 결국 쿠로오가 오늘뿐만 아니라 내일도 모래도 스파이크 연습에 어울려 주겠다는 약속을 해주고 나서야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오의 시선이 온전히 자신에게 향하자 조금 기분이 나아진 것이다.
*
혹시나 쿠로오가 자신들을 놀리기 위해 가짜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을 의심한 코노하는 슬쩍 쿠로오에게 그날 밤의 일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쿠로오는 자신이 최면에 걸렸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였으며, 심지어 짝사랑하는 상대가 진짜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로 판명되었다. 오가노의 콧대는 구름까지 닿을 정도로 치솟았고, 보쿠토는 거기서 두번째의 패배감을 느껴야 했다.
차라리 그 날 쿠로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죄다 엉터리라면 좋았을 텐데..!
‘아무래도, 합숙 멤버 중에 있는 모양이야.’
‘...진짜?’
‘같은 나이 또래 타학년 학생이면 아무래도 여기가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살짝 페이크를 넣어봤거든!’
‘그, 그런데!?’
‘짝사랑 상대가 현재 합숙에 같이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더라고!’
‘......!!’
그 다음날부터 보쿠토의 감정기복은 롤러코스터보다 더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쿠로오 옆에 딱 붙은 채 떨어지질 않으려 하다가 어떤 날은 쿠로오가 곁으로 다가오기만 해도 줄행랑을 치며 피하더니 또 어떤 날은 하루종일 벤치에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과 쿠로오만 번갈아 보곤 했다.
“오오!!”
“슈퍼 리시브!”
“방금 껀 쿠로오가 잘 한거야.”
“저걸 받다니..”
한창 네코마와 우부가와의 게임 중이었다. 신젠과의 연습경기가 좀 더 빨리 끝난 덕분에 그들은 관중처럼 네트 밖에 자리를 잡고 두 학교의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코치님 말마따나 좋은 경기를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된다.
싱크로 공격으로 네코마의 블로킹을 흐트러뜨린 신젠의 공격도 훌륭했지만, 방금 전엔 그 절묘하게 내려꽂힌 스파이크를 기적처럼 되살린 쿠로오의 리시브가 엄청났다.
보쿠토도 이건 힘들다! 라고 생각했는데 몸을 던져 쭈욱 미끄러진 쿠로오가 간신히 왼손으로 공을 받아내고 엎어져, 체육관 안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나왔다.
평소였다면 나이스 리시브! 라고 크게 외치며 박수를 크게 쳤을 테지만 보쿠토의 신경은 그보다 살짝 애매한 곳에 쓸려 있었다. 심기 불편한 자세로 팔짱을 낀 보쿠토의 입술이 단단하게 맞물렸다. 이유는 터무니없다.
‘배꼽 보인다구..!’
무리한 자세로 플라잉을 한 탓에 쿠로오는 코트 위에 거의 넘어지다시피 한 상태였는데, 그대로 팔로 상체만 팟 하고 들어올려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공의 궤적을 살폈다. 하긴, 평소의 리시브라면 몰라도 저 자세에서는 아무래도 원하는 곳으로 공을 보내긴 힘들겠지!
그러나 보쿠토와 쿠로오의 걱정을 불식시키듯 바로 그 순간 쿠로오가 올린 공을 연결해 아직 블로킹이 재정비되지 않은 우부가와의 블로킹을 뚫고 득점에 성공해 네코마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벌칙을 면하게 된 쿠로오가 안심했다는 듯 상체를 바닥에 철퍽 엎드렸다가 천천히 누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허리 위까지 말려올라간 유니폼이 그대로 눌려 남자치고 얇은 허리와 탄탄한 배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 유쾌한 제스처에 다들 조금씩 웃음을 터뜨렸지만 보쿠토 혼자 시선을 엄한 곳으로 고정했다. 아니, 정확히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척 고개를 돌린 뒤 눈동자만 굴려 쿠로오를 샅샅히 살펴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의도가 없는 몸짓인데도 어쩐지 엄청 부끄러워져서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때 쿠로오를 열심히 훔쳐보던 보쿠토는 마침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린 쿠로오와 눈이 딱 마주쳤다. 보쿠토의 얼굴이 웃고 있지 않아 의아했는지 눈을 끔뻑인 쿠로오가 눈꼬리를 접어 환하게 웃었다.
이쪽이 얼마나 심난한줄 모르고 웃는 모습에 심통이 날 만도 하지만 보쿠토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쿠로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
자신이 아니라, 쿠로오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얼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멋진 얼굴이었다.
*
보쿠토의 상태가 이상하다.
아카아시는 물론이고 합숙 멤버의 모두가 알아차린 상태였지만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지에 대해선 아카아시조차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제대로 보쿠토와 대화해보려 해도,
‘난.. 나는 씨가 아닌 줄 알았는데..’
‘아카아시에게 털어놓을 자격같은거 없어..’
라고 의미를 알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응하지 않는데다 유일하게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기대한 쿠로오조차 보쿠토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블록 뛰어주기로 했으면서!!”
“곧 간다니까요~”
“쿠로오 거짓말쟁이!”
“간다니까? 아카아시가 있으니 잠깐 연습하고 있으라고?”
아카아시는 갑자기 대화에 자신을 끌어들인 쿠로오를 원망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자신과 쿠로오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는 아카아시는 토스를 올려 주잖아! 블록이 없으면 제대로 스파이크를 때리는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며 제법 조리있게 반박한다.
여기까지는 평소의 말다툼과 별다른 점도 없었다. 이렇게 가볍게 투닥거리다가 후배들의 자세를 봐준 쿠로오가 은근슬쩍 연습에 끼곤 했으니까. 그러니까 이쯤 해서 보쿠토가 못 이기는 척 쿠로오를 보내주고 나서의 이야기인데, 오늘의 보쿠토는 새로 산 장난감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다섯살난 아이처럼 가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댔다.
갑자기 우리 애가 왜 이러지요... 아카아시의 눈에는 미운 조카를 떠안기고 가는 누나의 환영이 쿠로오의 뒷모습에 겹쳐지는 듯 했다.
결국 쿠로오가 거의 도망치듯이 자리를 피하고, 씩씩대며 네트 안으로 들어간 보쿠토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스파이크를 날려댔다. 상대편 네트에 네코마의 2학년이 블로킹 연습 겸 보쿠토를 상대해주었지만 영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쿠토도 보쿠토 나름대로 심통이 났다. 오늘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쿠로오가 먼저 연습에 어울려 주겠다기에 기분이 붕 뜬 상태였는데 체육관에 도착해서는 후배들이 먼저라며 은근슬쩍 뒤로 도망쳐 버리다니!
후배가 좋아 내가 좋아!? 하고 외칠 뻔한 것을 필사적으로 눌러삼킨 보쿠토는 부글부글 끓는 뱃속을 가라앉히지도 못하고 스파이크만 바닥에 꽝꽝 날렸다.
쿠로오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사실 지금 기분이 하향곡선을 찍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나마 쿠로오가 같은 학교 후배들을 봐주러 간다기에 안심이지, 만약 타교의 후배들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면 보쿠토는 기어코 쿠로오의 뒤를 따라갔을 것이다. 쿠로오가 신경써주는 타교생이 누군지 알아내고 말겠다! 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상태였으니까.
요즘 들어선 쿠로오가 자신과 더 오래 있어주지 못하는 것도 다 그 녀석 때문이야! 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체도 모르는 그 녀석에 대한 묘한 라이벌 의식과 적대감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 사람이 쿠로오를 좋아하게 되면, 쿠로오는 기뻐하려나.’
타앙! 하고 배구공이 강하게 땅을 튕겨 올라간 순간 보쿠토는 멍하니 그 공의 궤적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짝사랑 상대라고 그랬지. 그러니까 짝사랑은 쿠로오 혼자 좋아하는 거잖아? 상대방이 쿠로오를 좋아해주면 당연히 기쁘겠지.
그리고 상대방이 누구가 되었든 쿠로오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면, 분명 기뻐할 것이다. 그야 쿠로오는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그리고 그냥 친구인 자신에게도 이렇게 상냥한데 애인에게는 얼마나 자상하겠어..
“......”
이름도 얼굴도 모를 누군가와 다정하게 있을 쿠로오를 상상하니 방금 전까지 펄펄 날아다녔던 몸뚱아리가 차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보쿠토는 멍한 얼굴로 턱에 매달린 땀방울을 손등으로 슥 닦아내곤 중얼거렸다.
“잠깐 쉬었다 하자.”
방금 전까지의 집중력은 대체 어딜 간 건지 어딘가 넋이 나간 얼굴이라, 지금 공을 올려봤자 헛손질만 하겠구나 싶은 오오라였다.
한번 연습하면 적어도 한시간은 집중하던 보쿠토 답지 않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벤치로 향했고, 보쿠토는 비척비척 걸어 체육관 밖으로 향했다.
체육관 바깥의 벤치로 가 앉아 쭈그려앉은 채 보쿠토는 방금 전 자신이 왜 그렇게 충격을 받은 건지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니, 화가 날 수밖에 없잖아! 쿠로오한테 애인이 생기면 더이상 나한테 신경을 쓰지 않을 거 아냐! 물론 지금 그렇게 신경을 써주고 있느냐 물으면 반박할 말은 없다. 나는 쿠로오의 짝사랑 상대도 아니고.. 그냥 친구인데 쿠로오가 상냥한 성격이라 나를 챙겨주었을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스스로가 비참해져서 보쿠토는 꾸물꾸물 팔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카아시의 말이 맞았다. 나는 욕심쟁이가 맞다.
쿠로오가 나를 좋아해준다고 생각할 땐 과하다고 여겼던 마음이 지금은 너무 고팠다.
보쿠토는 과거로 돌아가서 그때의 자신을 잠재워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차라리 그 때 아무것도 듣지 않았더라면 계속 착각할 수 있었을 텐데.
“어이 보쿠토, 여기 있었어?”
“쿠로오..?”
“요즘 무슨 있나봐? 영 힘이 없네~”
걱정이 듬뿍 묻은 목소리가 보쿠토의 귀를 간질이고 다정한 손길이 섬세하게 보쿠토의 이마를 쓸어올린다. 보쿠토는 멍하니 그 손길을 받아들이다가 입술을 악물었다.
그러자 쿠로오는 입술 깨물면 상처 나, 하고는 부드럽게 입술을 톡톡 쳐서 보쿠토의 턱에서 힘을 빼게 했다.
분명 후배들을 상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따라 나와 주었다..
보쿠토는 쿠로오가 자신을 걱정하는 듯이 바라보는 그 짧은 시선 하나에, 그리고 소중한 것처럼 자신을 쓰다듬은 쿠로오의 손길에 서러움을 더 참지 못하고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기서 눈물을 보이면 쿠로오가 놀랄거라는 걸 알아도, 완전히 불가항력이었다.
“뭐, 보쿠토 너 울어!?”
“흑, 이거, 이게 다 쿠로오 때문이잖아!”
“어이, 울지 마! 내가 뭘 어쨌다고..!”
장난스레 우는 시늉을 하는 걸 보며 낄낄 웃은 적은 있어도 진짜로 보쿠토가 이렇게 서럽게 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허둥지둥 바지 주머니를 뒤져 식당에서 쓰던 냅킨을 발견한 쿠로오는 상체를 숙이고 어설프게 보쿠토 얼굴에 냅킨을 가져다댔다. 질끈 감은 눈꺼풀 위로 냅킨을 꾹 누르자 뭐가 그리 서러운지 눈물이 포롱 고여 진하게 물든다.
쿠로오는 그런 보쿠토를 보며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갑자기 왜 우는건데..”
“날, 끅, 나를 안 좋아 하잖아..!!”
“뭐?”
쿠로오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든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보쿠토는 눈물을 질질 짜면서 쿠로오의 손목을 꽉 쥐어 잡아당겼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손에 힘을 준 보쿠토는 훌쩍훌쩍 코를 삼키면서 쿠로오의 손등에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날 좋아해 줘!”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단지 당황한 것 치곤 수상할 정도로 쿠로오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지만 어두워진 주변은 보쿠토의 시야를 가렸다. 이왕 쪽팔리게 쿠로오 앞에서 울게 된 거 보쿠토는 거침이 없었다. 더 이상 체면 따위가 중요하지 않게 된 보쿠토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울먹거렸다.
“나만 쿠로오를 이렇게 좋아하는건 억울, 억울하다고!”
“잠깐만, 내가 언제 너를 싫어한대!?”
“안 좋아한다며! 그렇게 웃어주고, 흐윽, 만져주고 상냥하게 주면서! 흑, 흐으, 왜 날 좋아하지 않는거야..! 으허엉!!”
“아니, 아니지! 안 싫어한다니까? 내가 널 싫어할리가 없잖아!”
“그, 그럼 좋아해..?”
보쿠토는 눈물로 젖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쿠로오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콧물 다 흘리면서 떼쓴 주제에 아이같은 얼굴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데 거기에 대고 대체 누가 험한 소릴 할 수 있을까. 쿠로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상체를 숙여 보쿠토와 눈을 가까이 맞췄다.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이봐요. 내가 너를 싫어하면, 이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응?”
“그.. 그건..”
“어디서 그런 루머를 들은 건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듣냐니.. 쿠로오 너한테서 직접 들은 건데.
보쿠토가 코를 훌쩍이며 무어라 입을 여는 순간, 보쿠토의 뒷통수로 쿠로오의 손이 가볍게 닿으며 이마가 톡, 부딪혔다.
“바보 부엉이.”
“......!!”
씩 웃으며 허리를 편 쿠로오는 다 울었으면 이제 일어나, 하고는 보쿠토의 손을 잡아 끌었다.
넋이 나간 것처럼 쿠로오의 손에 이끌려 터벅터벅 복도를 걷던 보쿠토는 앞서 가는 쿠로오의 귓가가 새빨간 것을 발견하고는 덩달아 볼을 확 붉혔다.
‘바보 부엉이래.’
쿠로오가 애칭처럼 불러준 그 단어가 새삼 설레는 것은, 그동안 보쿠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두 글자가 한 번에 들어간 단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쩌면 쿠로오는 그 날 바보 부엉이라도 대답했을지도 몰라.
역시 쿠로오는 나를 좋아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보쿠토는 쿠로오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자신의 이마 위로 올려 쿠로오의 이마가 닿았던 부분을 쓰다듬었다. 방금 쿠로오가 그랬지, 내가 제일 좋다고 그렀어!
가슴이 울끈불끈 벅차오르고 입꼬리가 제멋대로 말려올라갔다.
보쿠토는 슬쩍 손을 움직여 자신의 손을 쥔 쿠로오의 손을 마주 잡았다. 쿠로오가 슬쩍 뒤를 돌아보는 기색으로 발걸음이 멈추자 슬며시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마주 겹쳐 깍지를 낀다.
“쿠, 쿠로오. ..나를 좋아해?”
“아까부터 왠지 집요하거든요..?”
“중요한 문제라고..! 제대로 대답해줘!!”
보쿠토는 그렇게 외치면서 앞서 가던 쿠로오의 앞으로 이동해 쿠로오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옆으로 확 시선을 피하는 쿠로오의 얼굴이 귀처럼 붉어져 있어서,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헤벌쭉 웃으면서 쿠로오의 시야를 차단하듯 걸음을 옮겼다.
“난 쿠로오가 좋단 말야! 기왕이면 친구도 애인도 다 내가 하고 싶을 만큼!”
“너 자연스럽게 엄청난 소릴 하네..”
“그야 난, ”
욕심쟁이니까, 하고 말을 이으려던 보쿠토의 입술 위로 쿠로오의 입술이 꾹 내려앉았다.
기습으로써는 완벽했다. 보쿠토는 쿠로오가 눈을 감고 고개를 비틀어 진하게 입술을 문지르는 동안 완전히 멍청한 얼굴로 눈만 껌뻑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쿠로오의 혀가 보쿠토의 입술 위를 낼름 햩고는 훅 멀어진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진 보쿠토는 그 위에 덧발라진 촉촉한 감촉에 펑! 하고 귀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쿠, 쿠, 쿠로, 쿠로오..!”
“알고 있거든요? 욕심 많은 거.”
나, 나한테 쿠로오가 키스, 키스했어...!
“이건 키스가 아니라 뽀뽀지.”
“혀 썼잖아!”
보쿠토가 버럭 외치자 쿠로오가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렇게 두근거리는데 쿠로오 쪽은 어째서 그렇게 여유로운가 하고 분통을 터뜨릴 여유도 없었다. 이렇게 되면 진짜 혀를 쓰는 키스를 가르쳐주지 않을 수 없네~ 하고 웃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
“지, 진짜로?”
“일단, 사람 없는 곳으로 갈까?”
그래도 쑥쓰럽긴 한 건지 자신의 머리칼을 괜히 흐트러트린 뒤 눈을 흘기며 씨익 웃는 쿠로오의 얼굴에 보쿠토는 이번에야말로 얌전히 쿠로오를 따라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 때의 그 아무도 오지 않는 한 여름밤의 빈 교실, 열기가 내려앉은 콘크리트의 복사열과 다른 시원한 밤바람을 배경으로 한 진득하고 어설픈 입맞춤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욕심쟁이가 맞나 봐.’
적어도 쿠로오 한정으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쿠로오를 껴안고 입술을 맞대는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 조직폭력배의 묘사는 상상에 기반한 것으로 폭력&도박 등이 상당부분 미화될 수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대체, 대체 왜 마피아의 보스씩이나 되는 사람이 메이드랑 둘이서 뒷정리나 하고 있는 건데!? 그리고 그 마피아 보스한테 이래라 저래라 일을 시키는 메이드는 대체 뭐냐고!? 숨은 실력자냐? 사실은 메이드가 보스였던 거야!?
바짝 얼은 쿠로오를 보며 빙글빙글 웃던 남자는 아! 아카아시가 아침 먹기 전까진 오라고 했는데! 먼저 가볼께! 하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렸고, 쿠로오는 푸짐한 아침식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 녀석, 아니 그 분은 대체,
“대체 뭔데!?”
“버터 사브레와 에티오피아 원두로 내린 커피에요. 더 드릴까요?”
“네..”
맛있다. 정신이 없어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배가 고픈 차에 커피와 함께 내온 과자는 정말 맛이 좋았다. 쿠키를 처음 먹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부드럽고 달고 바삭바삭한 건 먹어본 적이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성당에서 몇 조각씩 받아먹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맛이었다.
입이 단맛에 물릴 때 쯔음 쌉쌀한 커피를 한모금 마시면 또 환상적이었다. 쿠로오는 큼직한 머그컵 한 잔 가득 찬 커피와 접시 위에 수북하던 쿠키를 다 먹어치우고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컵을 내려놓고 펜을 들어올리자 메이드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트레이에 빈 잔과 접시를 담아치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방을 나가버리자 넓은 방 안에 쿠로오 혼자만 덩그라니 남는다.
쿠로오 자신의 숨소리와 시계 초침 소리만 들릴 정도로 적막한 방이라는건 사실 익숙치 않다.그가 스스로를 인지한 순간부터 이 도시는 늘 소음투성이었고, 잠에 드는 순간조차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이곳에 온지 겨우 하루.
향긋한 세안제의 냄새도 햇볕의 냄새가 나는 폭신한 이불도 등이 배기지 않은 소파도 모두 낯선 것이지만 미묘하게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것은 이 공간이 적대적이지 않기 때문이겠지.
쿠로오는 아침 식사 직전, 시로후쿠라는 이름의 메이드- 그녀가 입은 옷은 스즈메다가 입은 옷과는 약간 달랐는데, 아마 메이드 중에서도 등급이 나뉘어져 있는 것 같았다.- 에게 들었던 간단한 주의사항을 머릿속으로 되짚으며 푹신한 소파에 등을 쭈욱 기대었다.
‘첫 번째, 허락 없이 이 건물과 정원에서 나가지 말 것.’
뭐, 허락을 해 준다 해도 겁없이 이리저리 싸돌아다닐 마음은 없었지만.
‘두 번째, 필요한 게 있으면 메이드에게 이야기 할 것.’
그렇지만 카드라든가 그런건 역시 직접 보고 사 와야 할 것 같은데..
‘세 번째, 보스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떠벌리고 다니지 말 것.’
역시, 비밀인 걸까..
예상이 가긴 했었다. 고작 선생 하나 불러오는 걸로 부엉이회의 이인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서질 않나, 머무는 곳은 구석진 별채에 머무는 사용인도 별로 없는 곳.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숨기고 싶어하는 것은 잘 알겠다 싶어 쿠로오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일년간 열심히 카드를 가르치고 그 뒤엔 짭짤한 보수와 함께 이 도시를 뜰 수 있게 되는 거니까.
쿠로오는 연습장 위에 시로후쿠에게 들은 저 세가지 주의사항을 꼼꼼히 적어두고는 다음 장을 펼쳤다.
숫자 1을 큼직하게 쓰고는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여 기억을 더듬어 올랐다.
내가 처음 카드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어떤 것부터 배우기 시작했더라?
실력은 나쁘진 않아도 가르치는 것은 처음이다. 하물며 그 제자가 보통 사람도 아닌 데에야, 쿠로오는 비장한 얼굴로 공들여 노트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어제 왔을 땐 그저 죽기 싫으니 잘 가르쳐야겠단 생각 뿐이었지만..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성공적으로 보스를 가르쳐 1년동안 호화롭게 지내다 깔끔하게 떠나주겠어!
*
기껏 굳은 마음을 먹은 쿠로오가 보스를 가르치게 된 건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난 뒤였다.
느긋하게 쉬는것도 하루이틀이지, 컴퓨터도 책도 없는 방 안에서 갖혀있자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르칠 내용을 정리하고자 노트를 쓰는것도 지겨워지고 이러다 쫓겨나는건 아닌가 싶은 날 저녁, 푸짐한 저녁식사를 반이나 남기자 스즈메다는 아무렇지도 않게 접시를 치우며 말을 전했다.
“삼십분 뒤에 첫 수업이니까, 준비해주세요.”
“오늘요!?”
“네. 곧 오실꺼에요.”
평소라면 긴장으로 덜덜 떨 쿠로오였지만 쿠로오는 반가운 얼굴을 숨기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사람을 만난다!
메이드는 꼭 필요할 때 외엔 어딘가로 가버렸으므로 그간 쿠로오는 몹시 외로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혼자 끝말잇기를 하거나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쿠로오는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노트와 카드를 열심히 챙기기 시작했다.
꼼꼼히 이를 닦고 혹시나 냄새가 나지는 않는지 입김을 하 불어 확인까지 마친 쿠로오는 비장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승강기 옆의 전등버튼을 눌러 불을 밝힌 쿠로오는 원형의 포커테이블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틀동안 어떻게 수업을 진행시켜나갈지 시뮬레이션을 하도 돌려놨더니 대사를 외우다시피 해둔 참이었다.
오년전에 산 낡은 카드 한벌, 그리고 노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쿠로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문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마침내 뭔가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문이 탕! 소리를 내며 힘차게 열렸다. 묘하게 익숙한 향기가 후각을 간질이고, 쿠로오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헤이헤이헤이! 쿠로오 오랜만!”
“아, 오랜.. 만입니다.”
겨우 한번 본 주제에 엄청나게 친근한 목소리였다. 보쿠토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아카아시를 발견한 쿠로오의 목소리가 한껏 조신해지며 존댓말을 사용하자 보쿠토의 눈썹이 위로 휙 들렸다.
그때 본 것과는 약간 차림새가 달랐다. 위로 치켜세운 머리가 아니라 포마드를 발라 뒤로 넘긴 머리에, 베스트와 검은 암밴드만 찬 상태로 흰 드레스셔츠 소매 끝엔 검붉은 얼룩이 묻어있었다.
이렇게 보니 처음 봤을땐 왜 몰라봤나 싶을 정도로 귀티가 흘렀다. 그나저나 저 얼룩은 으음.. 케챱은 아니겠지. 응. 어쩐지 흐릿한 피 냄새같은게 나는 것 같았지만 착각일 것이다.
※ 조직폭력배의 묘사는 상상에 기반한 것으로 폭력 도박 등이 상당부분 미화될 수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
난생 처음 가진 안락하고 편안한 잠자리에 넋이 나간 쿠로오의 정신이 돌아온 것은 새벽 다섯시, 어두웠던 창 밖의 하늘이 점차 옅어지는 때였다. 아직 아침이 밝아왔다기엔 무리가 있는 시간이었지만 쿠로오는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화다닥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 누구세요?”
“어머나. 벌써 일어나셨나요?”
쿠로오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방을 돌아다니는 어떤 인기척 때문이었다. 쿠로오는 유독 잠귀가 밝은 편이었고, 원래 살던 집에선 베개로 귀를 틀어막지 않으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간만에 조용한 곳에서 잠들었더니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깊게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방 안에 사람이 들어온걸 못 알아 차릴수가 있지!’
여기가 원래 집이었다면 침입자가 들어온 순간 머리통에 총알이 박혀도 이상하지 않다. 쿠로오는 긴장한 얼굴로 여자를 자세히 살폈다.
커튼을 열어두어서인지 방 안의 윤곽을 알아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는데, 여자는 쿠로오의 짐더미들을 정리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어깨가 봉긋하고 발목까지 오는 기장의 고풍스러운 원피스에 흰색 에이프런, 그리고 머리에 쓴 흰색의 헤어드레스까지..
“메이드..?”
영화나 만화에서나 보던 진짜 메이드? 쿠로오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중얼거리자 여자는 가볍게 웃으며 네, 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선생님의 편의를 봐드리게 된 스즈메다 카오리라고 합니다.”
“아, 네!”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고개를 마주 숙여 인사했다. 아직 부엉이회의 보스를 가르치게 됐다는 것이 실감도 안 날 뿐더러, 이런 식의 대접은 처음이라 모든것이 어색했다.
쿠로오가 쩔쩔매자 그녀는 쿠로오에게 욕실에서 씻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자연스레 그를 욕실로 밀어넣었다. 그 박력에 밀려 얼결에 뜨거운 물줄기 아래 선 쿠로오가 샤워를 마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땐, 이미 쿠로오의 짐 반 이상이 정리된 후였다.
“저.. 이 옷은.”
“아, 다른 옷들은 이미 세탁실로 보내버렸거든요. 일단 입고 계시겠어요?”
샤워를 마치고 문앞에 놓여있던 옷은 쿠로오가 원래 가지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
검은 진과 티셔츠, 그리고 아디다스 후드집업은 부엉이회의 보스를 곧 만나러 가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지나치게 가벼운 옷차림이었지만 쿠로오는 별 말 하지 않았다.
이게 실례가 된다면 사용인들이 어련히 주의를 주겠거니 싶은 것이다.
“저, 선생님께선 보스에게 카드를 가르치시는 건가요?”
“아마 그렇겠죠..? 그보다 선생님이라니 어색한데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그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쿠로오 님.”
혹시나였지만 역시, 이름을 알고 있었구나.. 쿠로오는 스즈메다란 이름의 메이드가 자신의 짐을 정리하는걸 도와주려 했지만 방해가 된다며 오히려 방 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식사는 일곱시에요. 그 전에 1층이라도 둘러보시겠어요?’
라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말이다.
짐 정리 정도는 혼자 해도 좋았지만 쿠로오는 순순히 방을 나섰다. 어젯밤 스치듯 돌아본 1층의 상태를 좀 더 꼼꼼하게 보고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1층이 쿠로오가 보스를 가르칠 ‘교실’이 될 테니까.
승강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자 3층보다 밝은 실내에 눈이 약간 부셨다. 문과 창을 닫은 대신 전등을 켜두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테이블은 이쪽으로 옮겨 주세요.”
“좋아!”
1층엔 쿠로오보다 먼저 온 선객들이 있었다. 자신의 방을 정리하는 것처럼 1층을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남자 하나에 여자 하나. 이 넓은 1층을 단 둘이서 정리하기엔 힘들어 보인다 싶었는데 남자쪽이 힘이 아주 장사였다.
메이드의 부탁에 남자는 잠시만! 하고 손바닥을 탈탈 털더니 룰렛테이블 한쪽을 번쩍 들어 여자가 가르키는 곳으로 테이블을 질질 끌어 옮겼다.
‘헉.’
막 승강기에서 발을 내딛은 쿠로오는 그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쩌억 벌렸다.
저 테이블이 나무로 만들어져 가볍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테이블 안쪽에 구슬을 뱉었다 삼키는 장치며 칩을 보관했다 쏟아내는 장치까지 있어서, 그 무게는 같은 크기의 쇳덩이만큼이나 무겁다. 저걸 저렇게 여유로운 표정으로 끌고 가다니..
역시 아무리 말단이어도 마피아는 마피아인 모양이었다. 쿠로오가 질린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자 테이블을 다 옮긴 남자가 쿠로오를 발견했다.
“응? 너는..”
“아아. 안녕하세요.”
쿠로오는 반사적으로 눈을 싱긋 접어 선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 움직였다. 저쪽의 메이드와 달리 이쪽은 아마 마피아일테니 처음부터 순순히 몸을 낮추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오늘부터 이곳에서 신세를 지게 된 쿠로오 테츠로라고 합니다.”
“...아? 아아. 당신이 이번에 왔다는 선생이구나?”
멍하니 쿠로오의 얼굴을 쳐다보던 남자가, 쿠로오가 의아한 표정을 띄울 때 쯤 말을 꺼냈다. 쿠로오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쿠로오를 알아챈 메이드는 가볍게 목례만 하고 걸레로 테이블의 먼지를 닦아내는 데에만 집중했다.
“선생님이란 호칭은 어색하니까,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그럼 쿠로오?”
“네.”
보기 좋은 팔뚝이다.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손목에서 팔꿈치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단단한 뼈대에 두터운 근육, 피부 밑에 파랗게 일어선 핏줄까지.. 팔꿈치까지 셔츠 소매를 걷어부친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얼룩덜룩하게 묻은 먼지자국조차 와일드함을 강조하게 위한 장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밤에 스치듯 봤을 때엔 상당히 넓어보였는데 밝은데서 보니 그 정도는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오십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이였다. 이정도 설비라면 카드-홀덤, 세븐포커, 블랙잭 등-는 물론이고 왠만한 카지노의 도박은 다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어때? 마음에 들어?”
“굉장히 멋지네요. 바로 영업 시작해도 되겠는데요.”
“하하하하! 그런가? 하긴~ 예전에는 그렇게도 썼다고 하던데.”
그럼 지금은 그렇게 쓰지 않는 이유가..? 쿠로오는 질문을 입 안으로 꾸욱 삼켰다. 질문이 많은 녀석이란 인상을 주고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대놓고 자신을 위아래로 흩어보고 있는데 더 경계심을 부채질할 것은 없지 않나. 시선이 볼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 날 정도의 눈빛이었지만 쿠로오는 모른 척 푸스스 웃으며 멋적은 얼굴을 지었다.
“역시.. 좀 그런가요?”
“응? 뭐가?”
“옷차림이요. 너무 캐주얼한 차림인가 싶어서.”
“옷차림이 뭐가? 맘에 드는걸 뭐. 사실 내가 입으려고 사놓고 못 입은거지만.”
“헉, 이 옷이? 실례했습니다!”
쿠로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이는 것을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됐다고 만류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차피 못 입는 옷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란다. 쿠로오는 입을 옷의 자유마저 강제하는 부엉이회의 규율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다. 이런 말단의 옷차림마저 신경쓰는 곳이었다니!
“그보다 신경이 쓰이는건 따로 있는데.”
“신경 쓰인다고요?”
“그래, 그거! 아까부터 왜 존댓말을 써? 내가 그렇게 나이가 많아보여?”
남자는 짐짓 삐진 얼굴로 입술을 뚱하게 내밀며 허리에 양 손을 올렸다.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픽,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염색한 머리인지 뿌리쪽은 검은 머리였다가, 끝으로 갈수록 독특한 은발로 변하는 색이었다. 부엉이의 뿔처럼 위로 올린 헤어스타일에, 시원스럽게 뻗어나간 눈썹, 큼직한 이목구비.
전반적으로 시원하게 잘 생긴 얼굴이었지만 제일 시선을 잡아끄는것은 역시 눈동자였다.
짐승처럼 노랗게 반짝이는 눈동자.
별의 별 인종이 모이는 도시지만 이 남자처럼 인종을 가늠하기 힘든 사람도 별로 없는데. 쿠로오는 일부러 뜸을 들이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보통 초면엔 존댓말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 그런가?”
“그렇죠.”
“에이, 그래도 카드를 가르치러 온 선생이잖아? 괜찮으니까 반말 해도 돼.”
“...그럼, 그럴까?”
쿠로오는 씩 웃으며 룰렛테이블 바에 엉덩이를 기대어 섰다.
가까이 다가가니 남자의 눈높이가 자신과 엇비슷할 정도라는걸 알 수 있었다. 나름대로 키가 큰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 보이는 것보단 키가 크다.
..생각해보니 바지를 빌려준걸 보면 다리 길이는 비슷하다는 뜻인가?
말단이긴 하지만 어엿한(!) 마피아와 말도 텄겠다, 쿠로오는 한층 여유로운 얼굴로 대화를 주도해나갔다. 덕분에 쿠로오는 남자가 밤새 한숨도 못 자다가 여길 정리하기 위해 시로후쿠에게 끌려왔으며-시로후쿠는 1층을 정리하는 단발머리 메이드의 이름이었다.- 나이는 자신과 동갑인 스물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헤에~”
“해서 반쯤 납치되듯 오긴 했는데, 막상 오니까 너무 놀랍더라고.”
“더 놀랄게 남은 거야?”
“욕실에서 무려..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던데. 흥분해서 샤워를 이십분이나 해버렸지 뭐냐.”
“푸하하핫!”
남자는 배를 잡고 웃으며 발을 바닥에 탕탕 내리쳤다. 그 사이 메이드는 1층을 벌써 거의 다 정리한 모양이었다. 슬슬 배가 고픈데 얼른 아침식사를 주지 않으려나~
“너, 진짜 재밌네! 마음에 들어!”
남자는 찔끔 흐른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는 시늉을 하며 쿠로오의 어깨를 팡팡 쳤다. 첫 인상부터가 워낙 강력해서 쿠로오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흠칫 움츠렸으나 아프진 않았다.
“지금까지 왔던 사람들하고는 느낌도 다르고.”
지금까지 왔던 사람들이라면 나 이전에 보스를 가르쳤던 사람들인가? 이승보단 저승에 가 있을 확률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쿠로오는 과장된 제스쳐로 한숨을 푹 쉬며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한데, 너보단 내가 가르칠 학생이 날 마음에 들어해야 말이지.”
“응?”
“그동안 엄청 실력 좋은 꾼들도 쫓겨났다고 하니 어쩐지 불안해져서 말이죠~”
쿠로오의 말에 남자는 눈을 동그렇게 뜨고 고개를 옆으로 갸웃 기울였다. 하늘로 치켜올린 헤어스타일과 맞물려 진짜 부엉이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따로 부엉이 흉내를 연습하기라도 하는 걸까? 과연 부엉이회..!
“이미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응?”
“아, 그러고보니 내 소개를 안 했던가?”
“......?”
쿠로오가 그제서야 뭔가를 깨달은 얼굴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니까 방금 뭐라고 했더라.. 이미 마음에 든다고?
쿠로오는 그제서야 이 남자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너무 자연스럽게 이름을 소개하는 타이밍을 뛰어넘지 않았던가? 꼭 상대방이 자기 이름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처럼..
“혹시.. 이름이?”
“난 보쿠토 코타로!”
“......”
“앞으로 잘 부탁해!”
더 이상 당당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보쿠토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약하게 툭 쳤다. 그리고 쿠로오는 건드리면 소금처럼 부스러져 내릴 것만 같은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 조직폭력배의 묘사는 상상에 기반한 것으로 폭력 등이 상당부분 미화될 수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계약서상에 명시된 기간은 1년이었다. 쿠로오는 지나치게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카아시의 생각은 달랐다. 하루 종일 고작 포커놀음 따위에 시간을 보낼 순 없지 않나.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수업시간은 열흘에 한 두 번이나 시간이 될까, 거기에 머리 쓰는걸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니 일단 시간은 많을수록 좋았다.
하지만 고작 1년간의 보수라기에 아카아시가 제시한 금액은 그 쿠로오조차도 눈이 동그래질 정도의 거금이었다.
그 금액에 마음이 혹한 것도 잠시, 쿠로오는 더더욱 긴장한 얼굴로 침을 무겁게 꿀꺽 내리삼켰다.
‘이정도 금액을 제시했다는 건.. 딴마음 먹을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네.’
쿠로오의 시선이 금액에 못박혀있자 아카아시는 눈썹을 슥 들어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그리고.. 이유가 어찌되었던 보스를 가르쳤던 분을 그냥 도시에 놔둘 순 없습니다.”
“네?”
“일단 사제관계를 맺었으니, 그 연이 부모와 같지 않겠습니까.”
“부모..요?”
‘흑사회가 중국 본토쪽의 세력이긴 했는데.’
후쿠로우다니라는 이름을 들어보면 그보단 섬나라의 야쿠자가 떠오르지만 말이다. 갑자기 고루한 말을 꺼내기 시작해 쿠로오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어올렸다.
“일단 함부로 대할 수도 없을 뿐더러 만약에 불편한 일이라도 생기면.. 남들 보기 좋지가 않죠.”
말꼬리를 흐리며 입술을 들어올리는 표정에 쿠로오는 아, 하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일단 명목상이라 해도 부엉이회의 헤드를 가르쳤던 스승이다. 상대편 조직에 납치당하기라도 하면 부엉이회는 그 인질놀이를 무시할 수 없다. 인질을 무시했다간 사제간의 연도 무시하는 무뢰배라는 치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총과 칼이 난무하는 무법지대라 해도 그것을 휘두르려면 최소한의 명분이 필요하며, 그 명분을 저버린다면 나머지 네개의 세력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까.
“..해서 교육이 끝나면 미안하지만 이사를 가 주셔야겠습니다.”
“네?”
“어디든 좋아요. 미국, 캐나다, 서유럽.. 원한다면 남아공도. 여권과 시민권도 준비해드리죠.”
아카아시의 말은, 일 다 했으면 눈앞에서 꺼져달란 소리와 다름이 없었으나 쿠로오는 홀린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지막 조건이야말로 쿠로오가 그토록 원하고 있던 것이었으니까.
그런 쿠로오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카아시는 씩 웃으며 계약서를 마저 작성했다. 쿠로오는 총 세장의 계약서를 작성하였고 한부는 쿠로오 본인이, 한 부는 아카아시가 그리고 나머지 한부는 공증을 받아 변호사 사무실에 보관될 예정이라고 했다. 어쨌든 일처리 하나만큼은 확실한 곳이었다.
난생 처음 만져보는 묵직한 만년필의 무게에 쿠로오는 손목이 주죽이 든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펜에, 난생 처음 해보는 본인의 서명까지. 멋들어진 싸인 대신 본인의 이름을 어설프게 써놓은 쿠로오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계약서를 묘한 얼굴로 품 안에 집어넣었다.
일 년.
일 년만 바짝 엎드리면 드디어 이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부엉이회의 이인자를 눈앞에 두고서도 이게 꿈이 아니길 바라다니.’
바로 몇시간 전의 쿠로오로써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변화였다.
두 장의 계약서를 챙긴 아카아시는 밤이 늦었으니 변호사를 부르는건 내일로 하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결에 함께 일어선 쿠로오는 그럼 가시죠, 하는 말에 드디어 집에 보내주는구나! 하고 환하게 반색했다.
“그럼, 보스를 만나뵈러 가시죠.”
아카아시의 말만 아니었어도 그 미소가 일초는 더 갔을 것이다.
쿠로오는 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숨을 헐떡이며 말을 더듬거렸다.
“제, 제가 보스를, 보스를요?”
“내일부터 가르쳐야 할 학생이니까요. 오늘은 늦었으니 인사만 하고 수업은 내일부터 진행하죠.”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반응에 일말의 신경도 쏟지 않으며 문을 열고 먼저 걷기 시작했다. 주인 없는 방에 혼자 남아있을 수 없는 쿠로오가 아카아시의 뒤를 따라 걷자 문 밖에 서 있던 두명의 덩치 큰 남자가 쿠로오의 퇴로를 막듯 함께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긴장으로 새하얗게 변한 안색의 쿠로오를 구원한 것은 다름아닌 그 보스였다. 분명 그, 문 앞까지 가긴 했는데- 뭣 때문인지 방문은 열리지 않았고, 심기가 불편해진 아카아시가 방 안으로 들어가보더니 한층 인상이 구겨진 채 다시 나왔다.
쿠로오가 그 이유를 추측하기엔 문 틈에서 새어나온 남녀의 신음소리 때문인 것 같았다. 하기야, 자기 같아도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는데 상사라는 작자가 침대에서 여자랑 놀아나느라 일처리 확인도 안해주면 상당히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았다..
“..인사는 내일로 미루죠.”
“하하, 전 언제든 괜찮습니다. 그럼 전 이만 집으로..”
“아무래도 당신이 본채에 머무르는 건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어려울 것 같아 별채를 준비했습니다. 지금쯤 방 준비는 다 되어있을 테니 머무르는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예?”
집으로 보내달라니까 왠 별채? 그러나 아카아시는 쿠로오가 입을 열 틈을 주지 않고 툭 내뱉었다.
“설마 집에서 출퇴근을 하실 생각은 아니었겠죠.”
그럴 생각 만반이었다.
“아니, 저.. 그래도 일단 갈아입을 옷이나 교재같은 걸 좀 챙겨야 하는데..”
“짐은 모두 옮겨져있을 겁니다. 필요한 건 사용인에게 말하면 왠만하면 구해다 줄 테니, 어려워하지 말고 말 하세요. 오늘부터 당신도 식객으로 머물게 될 테니.”
“......”
고작 포커 선생을 경호하기 위해 주요인력을 뺄 수는 없다는 뜻은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쿠로오가 계약서를 쓰는 그 짧은 시간 쿠로오의 집에서 짐을 다 가져올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단 왕복 거리만도 한시간이 훌쩍 넘는다.
그렇다면 쿠로오가 집을 떠나 도박장으로 나선 순간부터 쿠로오의 집에 침입해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짐을 옮기기 시작했을거란 이야기가 된다.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려는 입매를 꾹 참아 누르며 하하,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거절할거란 선택지를 준비해두지 않았군.’
승낙한다면 잘 된 일이고, 거절하더라도 쿠로오가 집으로 다시 돌아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버린 아카아시 대신 쿠로오를 여기로 데려왔던 남자가 쿠로오를 안내해주었다.
1층 현관으로 나가 오른편 정원에 난 사잇길로 십분쯤 걸으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벽돌 위로 아이비가 벽을 뒤덮은 꽤 고풍스러운 건물이 나타났다.
쿠로오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은 건물로 보였다. 물론 이미 먼저 온 손님들이 있을 가능성은 제로가 아니었지만.
사자 모양의 청동 손잡이를 잡고 문을 당겨 열자 어둑한 1층이 모습을 보였다. 남자는 전등을 켜는 대신 가지고 온 손전등으로 주변을 밝히며 앞서 걸었다.
쿠로오는 다른 이들보다 밤눈이 밝은 편이었고, 남자의 뒤를 따르던 쿠로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1층을 살폈다.
겉보기에도 넓어보인다 싶더니, 일반적인 방의 용도가 아닌 듯 1층은 벽하나 없이 훤히 뚫려 있었고 흰 천이 덮인 가구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저건 빌리아드 테이블인가?’
프로답게 쿠로오는 흰 천 아래 잠들어있을 것들을 한번에 알아차릴수 있었다. 저 끝엔 4구당구대와 마작 테이블이 있었고 오른쪽엔 둥근 모양의 포커 테이블이 놓여 있다. 대충 알아볼 수 있는 것만 이 정도인걸 보아하니 이 건물의 1층은 쁘띠 카지노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이쪽이다.”
쿠로오가 잠시 발걸음을 늦춘 사이 멀찍이 멀어진 남자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쿠로오를 불렀다.
평범한 은색의 엘레베이터가 아니라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고딕한 느낌의 검은색 철창 승강기였다. 내구성이 상당히 약해보였는데, 쿠로오의 염려와 달리 낡은 것은 외견 뿐인지 승강기는 아주 스무스하게 둘을 3층으로 올려주었다.
3층의 복도는 1층과는 아주 딴판인 분위기였다. 비슷한 것을 찾자면 호텔의 숙박층정도 될까, 똑같은 모양의 문을 여럿 지나 쿠로오는 복도 제일 끝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어섰다. 남자가 거기까지 쿠로오를 안내했기 때문이다.
“여기다. 내일 아침 사용인이 깨우러 올거다.”
남자는 너무 친절하지도 무례하지도 않게 툭 내뱉으며 자리를 떴다. 고작 다우트 스트릿에 사는 삼류 카드꾼 대접치곤 과했던 터라, 쿠로오는 들어가십쇼, 하고 있는 힘껏 예의를 차렸다.
“휘유~”
문 옆에서 방의 전등을 찾은 쿠로오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곳을 보고 호텔이라 생각한 게 완전히 틀린 건 아닌지 방 안은 꽤 그럴싸하게 꾸며져 있었다.
사람 둘이 자도 여유로울법한 큼직한 침대 하며 32인치 벽걸이 TV와 푹신해보이는 이인용 소파, 작달막한 행운목 화분, 반대편엔 작은 바가 있는 모던한 느낌의 부엌에.. 방 옆에 딸린 문을 열어보면 네 발이 달린 흰 욕조가 있는 욕실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 오백미리 생수 한병을 꺼내 시원하게 들이킨 쿠로오는 약간 압도당한 눈으로 방 안을 천천히 흩어보았다.
“대단한데..”
정말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머물러보지 못한 호화스런 방이었다.
천천히 다가가 침대 위에 손을 얹으면 흰 이불이 약간 단단하면서도 푹신하게 푸욱 잠겨들었다. 그 방 한가운데 불협화음처럼 툭 튀어나온 쿠로오의 짐이 아니었더라면 쿠로오는 방을 잘못 배정했나보다 하고 복도에서 밤을 샜을 것이다.
“여기서 일년을 보낸단 말이지.”
꿈만 같았다. 부디 일 년 사이 꿈의 장르가 고어 스릴러 호러로 변하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짐을 정리할까 싶었지만 쿠로오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아무런 뒷배도 없는 자신에게 이런 방이라니? 내일 당장이라도 다른 쪽방으로 쫓겨날지도 모르므로 짐은 이대로 두는게 나을 것 같았다.
대신 쿠로오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시작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욕실이라 물줄기는 세찼고 뜨거운 물도 아주 잘 나왔다. 원래 살던 집은 뜨거운 물만 틀면 수압이 소변처럼 쪼그라들었었는데.
비치된 향긋한 비누로 온몸을 닦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쿠로오는 머리카락도 제대로 말리지 않은 채 푹신푹신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베개가 좀 높은가 싶었는데 고개를 누르자 그대로 느릿하게 내려앉아 딱 좋을 때 쯔음 멈추었다.
꿈에서의 전투를 업으로 삼는 인큐버스와 달리 서큐버스는 꿈을 통해 대상을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 내면의 정보를 취하는 식으로 의뢰를 받곤 하는데, 몽마의 형태가 여성이 대부분인 꿈 속에서 남자인 자신은 그런 식의 경계를 거의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겨울과 봄 내내 집에서 빈둥댄 쿠로오는 오랜 게으름을 청산하고 간만에 옷을 신경 써 입었다.
진열장을 채운 몇가지의 향수 중 하나를 뿌리고 머리에 왁스를 발라 모양새를 다듬고 신발장에 서서 꼼꼼하게 구두를 골랐다.
오늘은 입하(立夏), 오늘부터 서큐버스로써 영업을 시작하게 되므로 간만에 생계전선에 나가는 쿠로오가 전투복을 완벽히 갖춰입는 것은 당연했다.
멀끔한 옷으로 시내의 유흥가에 섞여든 쿠로오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대며 쳐다보는 눈초리에 이미 익숙해진 상태였다.
평일 밤인데도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클럽의 옆 골목으로 슥 걸음을 옮긴 쿠로오는 쓰레기통과 담벼락으로 막힌 길에도 아랑곳않고 걸음을 옮겼다.
벽이 아니라 안개를 통과하듯 결계를 뚫고 쿠로오의 걸음이 향한 곳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 그리고 아이스블루의 네온사인이 끔벅이는 묘한 분위기의 바였다.
쿠로오가 바에 들어가 스톨에 걸터앉으면 바텐더가 그를 맞으며 얼음이 담긴 잔에 생수를 담아내밀고는 황색의 서류봉투 몇가지를 슥 꺼내들었다.
아무리 업무차 왔다지만 맥주 한번 내놓지 않다니! 쿠로오는 피식 웃으며 얼음물을 쭉 들이켰다.
“오랜만이에요, 우카이 씨.”
“겨우내 얼굴 한번 안 비치고 말만 잘하지.”
“그래서 이 뼛속까지 시원한 물은 복수에요?”
“고객들은 이미 대기중이야. 프로가 술냄새같은걸 풍기고 다녀서야 쓰나.”
말은 그렇게 해도 쿠로오가 원하면 술 정도야 얼마든지 꺼내줄 사람이었다. 그는 현재 미야기쪽 영산을 영토로 삼고 있는 까마귀텐구의 손자로, 인간의 피가 섞이긴 했지만 꽤 격이 높은 요력을 가진 혼혈이었다.
특이하게도 쓰레기통이 널린 뒷골목을 자신의 영토로 삼아 이런저런 사람들을 불러모으더니 지금은 인간과 이종들을 가리지 않고 일을 연결해주는 복합 컨설턴트 역할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쿠로오의 첫 의뢰인이기도 했다.
쿠로오는 얼음물로 입술을 축이며 우카이가 넘겨준 봉투 안을 살폈다. 대략적인 일의 개요, 착수금, 성공시 보수와 필요사항 등의 서류를 확인한 쿠로오가 일을 고르면 우카이가 의뢰인이 기다리는 룸으로 쿠로오를 안내해, 그 곳에서 자세한 일을 조율하게 되어있었다.
쿠로오가 이 일을 하게 된 지도 어느새 만으로 4년차였다. 그의 특기며 그 성공률도 이미 유명한 상태라 들어오는 일의 난이도도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쿠로오는 새로운 일에 대한 약간의 긴장감 외엔 딱히 불안할 일도 없었다. 쿠로오는 그중 제일 두둑한 보수를 약속하는 서류를 집어들었다.
방 안의 남자-의뢰인-가 비장한 얼굴로 노란 서류봉투 안의 내용물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릴 때만 해도 쿠로오는 퍽 여유로웠다.
그러나 남자가 테이블에 올린 사진을 본 쿠로오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끔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보쿠토..?”
그러니까, 의뢰 대상으로 그리운 옛 친구의 사진이 튀어나오는 상황은 4년차의 숙련된 직업 서큐버스에게도 당황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의뢰인은 쿠로오가 보쿠토의 이름을 아는 것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았다.
물론 둘이 함께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배구캠프에서 3년간 함께 실력을 다져왔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달랐겠지만, 보쿠토는 일본 프로리그 2년 연속 MVP출신으로 현재는 이탈리아에서 리그를 뛰고 있는 배구계의 슈퍼스타였다.
TV에도 자주 나올 정도의 유명인이었으니 오히려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제가 정보를 가져올 대상이 이.. 사람인가요?”
“네, 네. 그렇죠. 놀라셨겠지만 이 선수가 현재 국내 해양재벌 1, 2위를 다투는 ##사 경영진의 방계라는건 거의 알려지지 않았거든요.”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후쿠로다니 고등학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올라가는 거대한 사학재벌이었다. 얼핏 들은 이야기로는 1년치 학비만 5백만엔이 훌쩍 넘는다는 소리도 있었고.. 보쿠토네가 잘 사는 줄은 알았는데 설마 재벌가였을 줄이야.
쿠로오는 조심스러운 손으로 함께 내밀어진 서류를 들추었다.
아무리 페이가 좋아도, 그리고 아무리 요즘은 연락이 끊겨 남이나 마찬가지라 해도 엄연히 아는 사람과 생판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 친구였던 녀석의 비밀을 캐서 팔다니.. 아무리 이게 직업이라 해도 꺼려지는건 당연한 일이라 쿠로오는 의뢰인이 원하는 정보가 무엇인지부터 확인했다.
“제가 알아올 정보는 이게 다입니까?”
보쿠토의 육촌뻘, 그러니까 현 ##회장의 증손자뻘에 대한 사람의 정보였다.
사업계에서는 바람에 돛 단 듯 거침없이 세력을 확장한 사람이지만 가족에 대해서는 묘하게 박복해서 아들과 며느리는 한살 한시에 자동차사고로 사망, 동생도 암투병으로 일찍 죽고 그 외 다른 가족들도 현재 남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느 정도냐면 그 증손자가 ##재벌의 유일한 상속자나 마찬가지였는데, 몇 안남은 혈육을 보호하려는 회장의 지시로 그 정보는 베일 안에만 꽁꽁 감싸여있었다.
남자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자에 대한 정보였다. 보쿠토가 그 사람과 몇 번 접촉한 적이 있다는 기록까지 준비한걸 보면 이 사람도 ##가문과 뭔가 연관이 있는 사람일 것이었다.
물론, 의뢰인에 대한 호기심을 보일 이유는 없지만.
“물론 이것뿐입니다. 딱히 앞날 창창한 보쿠토씨에게 해를 입힐 생각은 없어요. 그랬더라면 좀 더 거친 방법을 썼겠죠. 그저 그 분의 특징이나 혹은 취미, 좋아하는 음식, 말버릇.. 어떤 정보든 알아낼수 있는 거라면 그게 뭐든지 값을 치르고 살 용의가 있습니다.”
“선수금은..?”
쿠로오는 남자가 준비한 두둑한 선수금과 정보의 유무에 따라 즉시 일정금액의 돈이 지급된다는 계약서에 혹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의 난이도에 비해 확실히 높은 금액이었고, 일년 중 단 몇달만 바짝 벌어 먹고살아야 하는 쿠로오에겐 충분히 매력적인 액수였다.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쿠토에게 딱히 해가 될 것 같지 않은 의뢰였던 것이다.
고작 보쿠토의 육촌의 인적사항 정도를 알아다 주는게 그 재벌의 후계구도에 큰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았고 그 정보가 새어나간다고 해서 보쿠토가 용의선상에 오를 것 같지 않았다.
‘잘하면 며칠만에도 끝나겠는데..?’
쿠로오는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의뢰인과 악수하고 자리를 떠났다.
*
달빛의 매혹과 그림자의 음기가 뒤섞여 탄생한 진짜 서큐버스들은 쿠로오보다 훨씬 자연스레 꿈을 통제했다. 그녀들은 꿈 속에서라면 그 어떤 사람이라도 혹할 수밖에 없는 미인이 되기도 했고, 단지 꿈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과잉된 호감을 얻을 정도로 강력한 매혹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쉽지만 쿠로오는 그정도의 능력까지 깨우치지는 못했으므로 쿠로오는 타겟이 생기면 그 주변인으로 몰래 섞여들어가는 노력을 취해야 했다.
자주 가는 카페의 직원이 된다든가, 주차요원 아르바이트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타겟과 안면을 익히고 나서야 꿈에 등장할수 있다는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퍽 위험한 것이, 쿠로오는 꿈 속에서도 외모를 바꿀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봤자 서큐버스랍시고 나타나는 꼬리와 작은 뿔, 박쥐날개를 숨겨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 정도일까.
그런 페널티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받은 의뢰들을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을 뿐더러 쿠로오를 역으로 추적하려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워낙에 사람을 다루는 요령이 뛰어나서였다.
현실에서 어느정도 안면을 익히고 꿈 속에 등장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싶은 사이가 되면 그때부터 쿠로오의 작업이 시작된다. 매혹의 능력과 언변, 그리고 적절한 스킨십을 이용해 대상자를 사랑에 퐁당 빠뜨린 뒤 원하는 정보를 얻는 것이다.
어떻게 따지면 진짜 서큐버스의 세뇌나 몽환보다도 질의 나쁘다. 그러나 쿠로오의 타깃이 된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정보를 흘렸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점차 꿈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드는 쿠로오를 안타까워했다. 그야말로 오베론이라는 코드네임에 잘 어울리는 깔끔한 일처리였다.
“하지만 보쿠토에겐 사전작업을 할 필요도 없고.”
이미 얼굴을 아는 사이인만큼 오늘 밤 당장이라도 보쿠토의 꿈으로 스며들 수 있었다. 쿠로오는 마지막으로 서류를 꼼꼼히 읽어 정보를 숙지한 뒤 수면등을 껐다.
눈을 감고 숨을 몇 번 내쉬는 그 짧은 순간이 지난 뒤 쿠로오의 의식은 훅 하고 보쿠토의 꿈결에 도착해 있었다.
‘어디보자.. 적당히 고등학교때의 일을 꿈으로 꾸는 것처럼 유도해볼까.’
의식의 안개를 헤치고 한참동안 걸어 보쿠토를 발견한 쿠로오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거의 변하지 않은 보쿠토의 얼굴을 보니 새삼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키가 좀 더 크고, 몸집이 더 다부져지고 턱선은 날카로워졌지만 노란 눈동자 하며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그대로였다.
“쿠로오..? 진짜 쿠로오야..?”
몇년만에 보는데도 어제 만났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기분이 들었건만 보쿠토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몇 년 간 연락도 없는 녀석이 갑자기 꿈에서 튀어나와 놀란 것일까, 보쿠토는 멍하니 쿠로오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그를 올려보았다.
쿠로오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시작했다.
“오야, 어제도 봤으면서 반응이 왜 이래?”
“어제..?”
“연습시합 있었잖아? 진짜로 잠이 덜깨기라도 한 건가~”
자연스레 말려가는 입꼬리와 달리 쿠로오의 눈동자가 야릇하게 빛났다. 그런 쿠로오의 눈동자를 멍하니 쳐다보던 보쿠토가 아... 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랬지.. 어제 연습시합이..”
뿌연 안개뿐이었던 보쿠토의 꿈속이 순식간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뚜렷하지 않던 쿠로오의 몸 위로 예전의 교복이 입혀지고, 바닥은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콘크리트로 변했다. 쿠로오에게도 퍽 익숙한 곳이었다. 후쿠로다니 학원 바로 앞의 큰 편의점. 보쿠토는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었고 쿠로오는 그 앞에 서서 보쿠토를 내려보았다.
‘성공했다.’
쿠로오는 내심 뿌듯하게 중얼거렸다.
타인의 꿈을 제 멋대로 조종하는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꿈의 주인에게 약간의 암시를 주어 자신이 원하는대로 꿈을 이끌어나가곤 했는데, 오늘처럼 단번에 깔끔하게 재구성이 끝나버린건 또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둘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던 시간이 많아서일까?
쿠로오는 아직도 멍하니 자신을 올려보는 보쿠토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뭐 해? 바쁜 사람 불러놓고.”
“나 왠지.. 쿠로오 너를 엄청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하하, 그게 뭐야.”
속이 뜨끔했지만 쿠로오는 씩 웃으며 보쿠토를 재촉했다. 쿠로오의 손에 비틀대며 일어난 보쿠토는 곧 쿠로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도 자꾸만 쿠로오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냐?”
“몰라, 그냥 자꾸 보게 되네.”
태연하면서도 노골적인 시선이 쿠로오의 볼을 쿡쿡 찌른다.
뭐,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 건가..
사실 보쿠토처럼 친한 녀석의 꿈에 들어가는건 처음인데,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걸까. 의뢰를 포기하고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쿠로오의 눈에 자주 가던 카페가 나타났다.
가격에 비해 빙수의 양이 많아서 자주 보쿠토에게 얻어먹던 곳이었는데, 졸업하고 곧 문을 닫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고보니 꿈에서라면 ‘아직’ 남아있겠구나.
쿠로오는 보쿠토의 어깨를 툭 치고 카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자리잡았다.
“네가 부른 거니까 네가 살꺼지?”
“응! 뭐 먹을래?”
“우유빙수, 떡 추가해서.”
빙수는 금방 나왔다. 쿠로오는 반색하며 숟가락을 들어 빙수를 가득 떠 입으로 가져갔다. 달달한 연유가 첨가된 우유얼음에 떡, 그리고 팥앙금뿐인 단순한 빙수였는데 양은 운동부 둘이 먹어도 충분할 정도로 많았다.
정말 좋아하는 빙수였는데 보쿠토 꿈에서 다시 만나다니, 횡재네!
한창 빙수를 퍼먹던 쿠로오는 보쿠토가 우물쭈물 수저를 한 번도 뜨지 못하고 있다는걸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엔 늘 경쟁하듯 빙수를 먹어치우던 녀석이었는데.
좀 컸다고 이제 식욕이 떨어졌다 이건가, 아니면 뭔가 아직 ‘부자연스러운’ 게 느껴지는 건가?
의아한 듯 자신을 쳐다보는 쿠로오의 시선을 느꼈는지 보쿠토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쿠로오 있잖아..”
“응?”
“손, 잡아봐도 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끔벅거리던 쿠로오는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보쿠토의 손등을 잡았다.
그러자 보쿠토는 기쁜 듯 환하게 웃고는 쿠로오의 손을 마주잡아 깍지를 꼈다.
어째 좀 특이한 반응인데.. 매혹이 강하게 걸렸나?
쿠로오는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보쿠토의 얼굴을 보고 마주 웃어주면서 입을 열었다.
“손 정도야 잡아줄 수 있는데, 이제 슬슬 이야기하지 그래?”
“응? 뭐를?”
“네 친척 동생에 대해서 상담할 게 있다며. 육촌이랬나..”
자연스레 그렇게 말을 꺼낸 쿠로오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보쿠토는 조금 몽롱하게 쿠로오와 눈을 맞추고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쿠로오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꿀꺽 움직였다.
“내가 그랬나..?”
“어제 갑자기 전화해서 놀랐다고.”
그러고 보니 그 친척 동생, 몇살이랬더라? 하고 유도심문을 슬쩍 하는 쿠로오의 말투는 퍽 자연스러웠지만 보쿠토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그냥 쿠로오를 만나는걸로 좋아.”
“그래..? 그럼 언제든지 얘기할 마음이 들면 말해줘. 돕고 싶어.”
“응..! 그럴께!”
쿠로오의 상냥한 말에 보쿠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쿠로오는 아쉬움을 삼킨 채 빙수를 우물우물 삼켰다.
보쿠토 녀석, 정신력이 제법이다.
고등학교때의 오락가락하는 멘탈과 달리 지금은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니 그만큼 성장한 것일까..
그래도 기회가 되는 대로 매혹을 중첩해 걸었으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호감은 올라가고 마음의 빗장은 약해질 것이다.
쿠로오는 손이 덥지도 않은지 깍지를 풀 생각을 않는 보쿠토에게 씩 웃어주었다.
결국 그 날은 빙수를 먹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예전처럼 놀다가 끝났다. 일은 허탕이었지만 간만에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