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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영화 au
두릅님이 쓰신 This Means War 極上편에서 이어집니다.
두릅님의 글 주소 >> m-jpeple.tistory.com/65 <<
그 말을 끝으로, 보쿠토는 그에게 더 몸을 밀착한 채 멍하니 벌려진 쿠로오의 입 안으로 다짜고짜 자신의 혀를 집어 넣었다. 헉! 하고 당황한 쿠로오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무는 것을, 오른손으로 쿠로오의 턱을 붙잡아 막았다. 얼결에 벌어진 입 안을 혀로 쓸고, 약간 거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완전히 포개어 겹쳤다. 쿠로오의 눈꺼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르르 떨린다. 아. 왠지 기분 좋아. 언제나 여유로운 쿠로오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내보이는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속눈썹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보쿠토는 눈을 감지 않고 그 눈동자에 자신의 눈을 빤히 겨눈다. 당황해 잔뜩 웅크려든 쿠로오의 혀를 자신의 혀로 잡아채 쭈욱 빨아올렸다. 벤치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쿠로오가 화들짝 몸을 튕겨올려 보쿠토의 어깨를 밀치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느꼈다기보단 그제서야 상황을 깨달았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보쿠,” 보쿠토는 간신히 고개를 뒤로 빼내어 혀를 움직일만한 공간을 만들어낸 쿠로오의 간격을 먹어치웠다. 남은 한 손으로 쿠로오의 뒷목을 콱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고, 오른쪽으로 기울었던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며 쿠로오의 아랫입술을 질척하게 빨아올렸다. 당황해 제대로 호흡조차 가누지 못하고 얕은 숨만 내뱉는 그 입김마저 먹어치울 기세로 물고 빨고 햩아 거칠게 키스했다. 쿠로오의 숨소리에 섞인 끓는 듯한 신음에 보쿠토의 눈이 위험하게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키스해서, 쿠로오, 이렇게 헐떡거리고..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양 귓가에 불이라도 붙은 것마냥 홧홧해졌다. 마무리로 쿠로오의 혀를 자신의 혀로 감싸고 약하게 깨문 뒤, 입술을 오므려 멍하니 벌려진 쿠로오의 입술 위로 쪼옥, 깊게 뽀뽀했다. 발버둥치는 쿠로오를 제압하느라 완전히 겹쳐진 상체는 벤치 위에 쿠로오의 몸을 완전히 가두고 있었다. 기분 좋아. 보쿠토는 벌건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 했으면.. 권총 치워.” “응?” 키스 후, 사랑의 속삭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소릴 들을 줄 몰랐던 보쿠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사적으로 품에 손을 집어넣자 텅 빈 홀스터만 잡힌다. 아차. 집에서 정신없이 나오느라 총도 안 챙겼었다. “나 권총 안가져왔는데?” “뭐?” 어느 순간 얌전하더니, 내가 쿠로오한테 함부로 총을 겨눌거라고 생각했단 말야? 보쿠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힘으로 쿠로오를 짓눌러 다짜고짜 입을 맞춘 제 생각은 하지 못하고 보쿠토가 무어라 투덜대려던 찰나, 쿠로오는 굳은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그럼, 지금 내 배에..” “아.” “......” 아, 는 무슨 얼어죽을 아. 냐! 이 미친 부엉이 새끼야! 쿠로오는 제 배를 찌르고 있던 것이 보쿠토의 그 권총이 아니라 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장전된 네오 암스트롱 싸이클론 제트 암스트롱 포라는 사실은 깨달은 후 눈을 질끈 감았다. 바지를 찢어버릴 듯 팽팽히 일어선 보쿠토의 다리 사이를 더이상 눈에 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 갑자기 왜 세우.. 아니, 아니다.” “에, 그게, 그러니까..!” 보쿠토는 완전히 시뻘개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허둥지둥 벤치에서 일어나 몇걸음 뒤로 물러났다. 사람이, 키스하다보면 조금 설 수도 있지! 라고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기엔 찔리는게 너무 많았다. “쿠로오,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닥쳐. 설명하지 마. 변명도 하지 말고 그냥 꺼져.” 보쿠토는 흐윽, 하고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입을 꾸욱 다물고 쿠로오의 눈치만 살폈다. 그야 화 났겠지. 한창 좋은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데려와서 키스해버리고.. 보쿠토의 주먹에 질끈 힘이 들어갔다. 그 여자랑도 키스했을까? 도청기로 들었던 쿠로오의 신음이 떠올랐다. 했겠지. 그리고 그보다 더한 걸 하려던 거 아냐. 쿠로오가 다른 사람과 섹스한다는 사실을 안게 오늘이 처음도 아닌데, 그 생각을 하자 마자 구역질이 날 정도로 속이 뒤집혔다. “쿠로오.” “부른 용건이 끝났으면, 난 간다. 또 방해하면 죽여버릴테니까 알아서 해.” 쿠로오는 제 말만 내뱉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여자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보쿠토는 서슬 퍼렇게 튀어나온 쿠로오의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떨고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쿠로오를 잡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달려가서 쿠로오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염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대로 거기로 가지 말라고 마트에서 땡깡부리는 어린애처럼 누워 팔다리를 바둥거리는 것은 보쿠토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 아래가 땡길 정도로 단단히 솟아오른 그의 주니어가 이제 그만 해방시켜 달라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기 때문이다. 변태도 아니고 아래를 벌떡 세운 채로 운전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보쿠토는 근처 공중화장실에 들어가 해결을 할 수밖에 없었다. 휴지를 뜯어 손에 감고 몇 번 흔들어주지도 않았는데 어이없을 정도로 빨리 사정해버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쿠토는 충격에 빠졌다. 본인의 지속시간 증감률 따위의 고민이 아니라, 여자의 젖가슴이나 탱글한 엉덩이가 아닌 제 밑에서 헐떡거리던 쿠로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쉽게 절정에 이르렀다는게 충격이었다. 야.. 했어. 쿠로오 원래 생긴게 좀 야하긴 하잖아. 응. 신음소리도 섹시하니까. 그러니까.. 그래서, 반한 건가? ♢ 다음날, 평소보다 퀭한 상태의 보쿠토는 마찬가지로 상태가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 쿠로오의 안색을 보고 속이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가서 둘이 섹스 했나보네. 완전 잡아 먹힌 얼굴이잖아. 딱딱하게 굳은 보쿠토의 표정을 본 쿠로오는 보쿠토의 얼굴에서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슬쩍 쿠로오에서 시선을 돌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보쿠토를 바라본 사무실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늘 출근해서 서로를 발견하면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사무실을 요란하게 만들던 둘이었기에 둘의 변화는 금새 눈에 띄었다. “두 분 싸우셨어요?” “......아니이..”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표정은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아카아시는 제 사수였던, 그리고 직속 선배인 보쿠토의 책상 위에 파일을 올려두고는 흐음 목을 울렸다. “그렇군요.”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줘!” “하아.. 무슨 일이십니까.” 아카아시는 책상에 널부러진 보쿠토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는것을 보고 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이 묘하게 멘탈 불안정한 자신의 선배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죽고 못살던 단짝인 쿠로오 요원마저 상태가 좋지 않은걸 보면 분명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긴 했을텐데, 아카아시는 유력한 용의자로 눈 앞의 제 선배를 꼽았다. 일단 사고를 쳤다면 이 사람이 쳤겠지. 아카아시는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쳐앉고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보쿠토를 내려보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한번 더 재촉하자 어렵사리 그 입이 열린다. “말 못해.” “저기요.” 진짜 짜증난다.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험한 소릴 내뱉을 뻔한 자신의 입매를 추슬렀다. 참자.. 이래도 선배니까.. 참자, 참아. 일 이야기나 하자. “쿠로오씨가 요청한 파일입니다. 저번 마약상이 접촉한 마약 카르텔에 대한 자료에요.” “응? 쿠로오가?” “예. 이번에 모자장수가 보석금으로 풀려났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죠.” 보쿠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모자장수는 보쿠토와 쿠로오가 직접 체포에 감방에 집어넣은 마약상의 별명이었다. 그의 별명이 모자장수인 이유는 그가 팔던 마약을 앨리스라고 불렀기 때문이고.. 아무튼 그 정보는 예전에 쿠로오가 정보부에게서 들은 정보라며 말해준 적이 있었다. “선이 어떻게 닿은 건지 남미쪽의 과격파 카르텔과 접촉했던데요. 조사해보니 당분간 몸 좀 사리고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쿠로오한테 얘기해줘야겠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보던 아카아시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쿠로오 선배님과 싸웠다면 지금은 쿠로오가 그랬던가.. 하며 꿍얼거리는 반응을 보여야 맞을 텐데? 싸운게 아니라면 둘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부산스레 쿠로오를 찾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박차고 나간 보쿠토의 뒷모습을 보던 아카아시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일이 있든 이 둘 사이에 끼면 고래 싸움에 등쌀 터지는 새우에게 빙의합체하는 기분을 만끽하게 된다. 거진 십년간의 경험으로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던 아카아시는 그만 이 일에서 발을 빼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무작정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두리번거리던 보쿠토는 이내 그 낡은 커피 자판기 앞에서 쿠로오를 발견했다. “쿠로오!” “어? 음.. 커피 마실래?” 눈이 마주치고, 어색하게 시선을 돌린 쿠로오가 자판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렇게 물었다. 보쿠토는 반사적으로 응, 하고 대답하고는 쿠로오의 손가락이 밀크 커피의 버튼을 누르는 것을 눈으로 따랐다. 커피 받고, 마시다가, 쿠로오랑 눈 마주치면 이야기해야지. 쿠로오가 건네주는 커피를 쥔 손가락에 괜히 시선이 갔다. 종이컵을 받아들고는 슬쩍 스친 그 손가락에 왠지 진정이 되지 않아 커피를 확 들이켰다가, 보쿠토는 크헣허거! 하고 폐부에서 쥐어짠듯한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원샷한 대가였다. “하, 뜨, 뜨-!” “푸핫, 뭐하는거야!” 자판기에 손을 넣어 블랙커피를 꺼내든 쿠로오가 펄펄 뛰는 보쿠토를 보며 낄낄댔다. 오늘따라 커피가 더 뜨겁기라도 했답니까? 빙글빙글 웃으며 그렇게 말한 쿠로오는 어느새 평소처럼 보쿠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후- 하- 후- 하-! 시뻘겋게 데인 입안을 식히려 크게 숨을 몰아쉬면서, 보쿠토는 짐짓 억울한듯 눈썹을 추욱 늘어뜨렸다. “진짜 뜨거워어..!” “대체 일주일에 입을 몇번이나 데이는 거야.” 키득 웃으며 커피잔에 입김을 불어 여유롭게 커피를 식힌다. 보쿠토는 동그랗게 모아진 쿠로오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다 손에 쥐고 있던 빈 종이컵을 우그러뜨렸다. 키스 하고 싶은데, “괜찮냐?” “아니이..” 쿠로오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쁘게 웃는지 모르겠다. 보쿠토는 하려던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리며 쿠로오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 보쿠토는 자신이 쿠로오를 생각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그게 어느정도의 범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쿠로오랑 하는 키스 엄청 기분 좋았지. 그리고 지금도.. [읏, 하아..]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보쿠토가 이를 악물자 턱이 불끈 움직였다. 제 아랫도리를 흔드는 오른팔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질끈 감고 스피커에 집중하자, 쿠로오가 하아.. 하고 낮게 숨을 내쉬는 소리와 함께 쪽쪽거리는 소리가 어두운 방 안을 메웠다. 바로 며칠 전 여자의 집에서 도청했던 그 녹음 파일이었다. 사실은 쿠로오가 여자에게 입맞추는 그런 소리였지만, 보쿠토의 감긴 눈꺼풀 안에선 보쿠토 제가 쿠로오의 목덜이와 가슴에 입술을 부딪히고 있었다. 그럼, 쿠로오는, 억지로 키스당했던 그 날처럼 당황하고, 숨도 제대로 못 쉬어서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하겠지. 쿠로오의 반듯한 쇄골을 깨무는 상상을 하며 보쿠토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검붉게 달아오는 자신의 성기에서 쿠퍼액이 찔끔 세어나온다. 쿠로오가 기술이 나름 괜찮기는 해도 악력은 제가 위니까, 아프다고 밀어도 순순히 밀려 주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남자치곤 얄상하게 빠진 허리를 잡고 밀어붙이면 그때처럼 당황해서 눈꺼풀을 파르르 떨까. 그리고는 간신히 고개를 뒤로 빼내선 제 침으로 번들번들 젖은 입술을 벌려서- ‘보쿠, ’ 귓가에 쿠로오의 신음과, 그날 쿠로오가 내뱉었던 자신의 이름이 동시에 들렸다. “하아, 하아..” 보쿠토는 멍하니 제 손을 더럽힌 액체를 바라보다가, 이내 휴지로 그것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확실히, 요즘 자위할 때도 쿠로오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쿠로오를 생각하면 발정이 오는 건가? 나 진짜 아카아시랑 쿠로오 말처럼 진화가 덜 됬나? 쿠로오랑 섹스할 때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쿠로오와의 섹스라는 단어를 떠올린 순간 보쿠토의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리곤 누가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양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정해 축 늘어졌던 아들내미가 섹스! 하고 외치면서 다시 기립하는데 보쿠토는 얼굴을 제 양손에 파묻고 앓는 신음을 흘렸다. ‘보쿠토 코타로! 정신 차려!’ 키스정도야 친구사이에 조금 흥분해서 그렇다 하더라도, 차마 그 쿠로오에게 섹스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렇잖아! 섹스는 좀 그렇지! 쿠로오가 남자를 성불구자로 만드는 일흔여덟가지 방법에 통달한 인재여서가 아니라, 쿠로오는, 보쿠토 코타로의 제일 친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물풍선에 물을 넣으면 동그랗게 부푼다. 네모진 통에 물풍선을 넣고 물을 넣으면, 네모진 칸 위로 볼록하게 튀어나오게 된다. 네모진 틀 안에 갇힌 것은 일부분이고 어디로든지 부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이 차니까. 그러니까 보쿠토 코타로가 쿠로오의 집에 도청기를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비단 그가 이상성욕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쿠로오에게 품기 시작한 욕구를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렇게 변명하고 있지만 보쿠토가 하는 짓이 인간 쓰레기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은 본인도 아카아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쿠로오 있잖아..’ ‘네?’ ‘자위는 어디서 할까? 욕실? 역시 욕실인가? 아니면 침실?’ ‘..그게 선배랑 무슨 상관입니까?’ ‘어! 그러니까, 쿠로오가 아무래도 가장 무방비 할때가! 그때가 아닐까 싶어서!’ 안하니만 못한 변명이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자신을 세슘 137[각주:1]보듯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으나 입이 열 두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쿠로오는 정규 요원이었고, 저의 어설픈 솜씨로 설치한 도청기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싹 수거되고 말 테니까. 쿠로오가 출장을 간 사이 그 빈 집에서 아카아시는 똥 씹은 표정으로 도청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보쿠토의 요청에 의해 침대, 소파, 욕실 주변에 특히 많은 수의 도청기를 숨기면서, 마피아 카르텔이 쿠로오의 집에 못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저 어설픈 변명에 넘어간 자신을 욕하고 있었을 것이다. 보쿠토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헤드셋을 뒤집어썼다. 샤워중인지 쏴아아 하고 물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별 특이할 것도 없는 사운드였지만 보쿠토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찰박찰박 샤워타올로 몸을 문지르는 소리와 자잘한 소음에 보쿠토는 침을 꿀꺽 삼키고 숨을 죽였다. 곧 헤드셋 안에서 흥흐응~ 하고 나직한 쿠로오의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우와아, 샤워하면서 콧노래 부르는 타입이었어? 귀엽잖아! 그와 알고 지낸 시간이 10년이 넘어가는데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보쿠토는 괜히 파닥파닥 얼굴을 부채질하며 손을 올려 헤드셋을 꽉 쥐었다. 스피커가 아니라 헤드셋을 끼니까, 귀 바로 옆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진짜 옆에서 샤워하는걸 훔쳐듣는 느낌이 든다. 물을 맞으며 샤워하고 있을 쿠로오의 알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어쩐지 성감이 곧추서서, 보쿠토는 바지 사이로 자신의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나, 어쩐지.. 쿠로오랑 섹스 해도 제대로 흥분 할수 있을 것 같은데. 남자랑 섹스하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임무 때문에 남자를 꼬신 적은 있어도 호텔 방에 얌전히 기절시켜두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쿠로오가 만약 자신 앞에서 다리를 벌려준다면.. 윽.. 보쿠토는 자신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햩았다. 그저 어떨까 상상해본 것 뿐인데 일년 전 임무 때문에 빅코리아 시크릿 모델과 침대 위에서 헤어졌을 때보다 더 아쉬워졌다. 보쿠토는 휴지를 뜯어 손에 묻은 자신의 것을 닦아내고 헤드셋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쿠로오의 숨소리가 일정해져 잠에 들 때까지. ♢ “어라? 쿠로오는?” “오늘 오전까지 출장달아놓으셨어요.” “그래?” 보쿠토는 제 앞의 깨끗한 책상을 바라보곤 아쉽게 혀를 찼다. 쿠로오 보고 싶다. 보쿠토는 쿠로오가 오늘이 아닌 어젯밤 이미 일을 다 마치고 집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팀장님이 오늘까지 하라고 한 일을 어제 다 끝마쳐서 좀 쉬겠다는데, 그걸로 깐깐하게 굴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쿠로오가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도 떳떳하게 안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쿠로오가 자리를 비운 동안 보쿠토는 나름대로 열심히 업무를 처리했다. 요 며칠 정신이 콩밭에 가 있느라 밀린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윽, 저번 출장 보고서 어제까지였잖아! 부산스레 종이를 끌어다 앞에 놓고 쓰다 만 파일을 켜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러면서도 머리 한 구석은, 어제 그 짜릿했던 도청의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역시 자동차에도 설치해야겠지.’ 그 여자, 드라이브 좋아하니까. 예전 쿠로오가 뻐기듯 자동차 수납함에 콘돔은 기본이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낮게 신음하는 쿠로오의 신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게 되었다. 점심으로는 건물 밖 핫도그 트럭에서 핫도그를 세개 사왔다. 두 개는 오는길에 먹어치우고 남은 하나를 종이봉투에 넣어 달랑달랑 들고 오자 사무실 맞은편 책상에 쿠로오의 노트북이 올려져 있었다. 어, 쿠로오 돌아왔나? 눈을 반짝 빛내며 종이 봉투를 책상위에 올려두고 쿠로오의 자리를 기웃거렸으나 곧장 점심을 먹으러 간건지 짐을 푼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쳇. 조금만 더 기다렸다 갈껄. 그럼 같이 점심 먹을 수 있었을텐데. 어쩐지 아쉬워져 보쿠토는 사무실 밖 복도 자판기에서 콜라 한캔을 뽑았다. 한번에 반정도를 비우고 책상에 앉아 남은 핫도그를 우물거리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며 쿠로오가 들어오더니 보쿠토와 눈이 마주쳤다. 보쿠토는 입 안에 든 음식을 생각치도 못하고 버럭 외쳤다. “쿠뤄!!” “윽, 더러우니까 먹던 건 삼키고 말해.” 흥. 꼭 정보 3팀 츠키시마처럼 이야기하네. 보쿠토는 쿠로오와 친한 그 요원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대로 씹지 않은 음식을 목으로 꿀떡 넘기고 콜라를 마저 마시자 쿠로오가 아 죽겠다 소릴 내며 자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셔츠 손목 단추를 플어 소매를 접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점심을 먹으러 간게 아니라 팀장님에게 보고를 하러 간 모양이었다. “이번 일, 많이 힘들었어?” “응? 아아, 일 자체는 일찍 끝났는데 어제 잠을 거의 못잤거든.” 보쿠토는 쿠로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분명 어제 삼십분 이상 숨소리가 균일해진걸 확인하고 나도 잤는데? 쿠로오는 보쿠토의 얼굴을 보며 그 특유의 성질 나빠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 한쪽으로 치켜 올라간, 그 악당 웃음. 보쿠토의 머릿속에서 붉은 색의 경종이 울렸다. 살고 싶으면 도망쳐! 하고 본능이 버튼을 연타하는 느낌이었다. 보쿠토는 애써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받았다. “잠, 잠자리가 안 좋았나봐..?” “내가 원체 예민하잖냐.” 쿠로오는 씩 웃으며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고 보쿠토의 책상으로 걸어왔다. 보쿠토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꿀꺽 움직였다. 설마, 아니, 아니겠지. 안 들켰을꺼야. 아카아시가 제대로 숨겨 준건데! “아카아시랑 이야기는 끝냈고.” 아, 아카아시이-!!!! 이 배신자!! 보쿠토의 얼굴이 헬쓱해졌다. 손에 들고 있던 핫도그를 툭 떨어뜨린 것과 동시에, 쿠로오의 가방에서 그의 집에 설치했던 도청기가 와르르 쏟아졌다. “이야기 좀 할까, 부엉이씨..?” 눈꼬리를 곱게 접어 웃는 그 얼굴은, 평소에 비하면 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순해 보였으나 그 얼굴을 바라본 보쿠토의 목덜미엔 소름이 돋았다. 으아, 쿠로오 진짜 화 났어! “그, 쿠로오! 마피아가, 너 방심할 때 튀어나오면 내가 지켜줘야 하니까,” “네, 네. 진정하고 사람 말을 하세요.” “잘못했어요..” 쿠로오는 두 눈을 점으로 만들고는 텅 빈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보쿠토를 내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 며칠 멀쩡히 길을 가다 넘어지질 않나 대화를 하면 핀트가 나간 대답을 하질 않나 머릿속 나사 어딘가가 풀려있다 싶더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쿠로오는 뒷목을 쓸며 볼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보쿠토가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나사빠진 얼간이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는지, 모르면 바보 아닌가. 그녀와 한창 분위기 좋을 때 들이닥쳐선 억지로 키스하고 흥분한 성기를 감출 생각도 없이 제 배에 비벼대던 그 때 이후부터였다. 혹시 날 보고 꼴리나? 하고 잠시나마 자아도취에 빠지기엔 쿠로오는 보쿠토와 지낸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보쿠토는 13번가에서 제일 잘나가는 남창이 마음먹고 꼬시려고 해도 무의식중에 철벽을 칠 정도로 극성 헤테로였다. 그러니까- 쿠로오가 알기로는. 쿠로오는 숨을 들이마쉬고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가 어깨를 움찔 떨며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하는게 꼭 얼굴을 덤불에 파묻으려는 타조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 얼간이 부엉이 같으니. “일어나, 나가자.” “어, 어디 가는데?” “펍에.” 엥? 아직 근무시간인데? 보쿠토는 먹던 핫도그와 봉지를 휴지통에 밀어넣고 어벙하게 되물었다. “그럼 맨정신으로 왜 이러는지 얘기해주려고?” “.......” 입을 합죽이처럼 다문 보쿠토는 또 자리를 옮기자는 말엔 순순히 응하며 주섬주섬 휴대폰과 지갑을 챙기기 시작했다. 쿠로오는 제 생각에 빠져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는 부엉이를 뒤에 달고 사무실을 빠져나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안에는 저 보쿠토를 정상화시켜놓으라는 엄명을 내린 팀장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에어컨이 빵빵했던 건물의 문을 열고 나가자 오존층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마냥 자비없는 직사광선이 쨍하니 내리쬐고 있었다. 쿠로오는 보쿠토에게 술을 먹여 거나하게 취하게 만든 뒤 숨기고 있던 것을 모두 토해내게 만들 예정이었으므로 주머니를 뒤져 자신의 차 키를 꺼냈다. “내 차 타고가자.” “어, 어.” 아직도 도청기를 싸그리 반납당한 충격에서 못 벗어난 건가? 쿠로오는 제 차로 가자는 말에 뭐가 떠오른건지 갑자기 부산스러워지는 보쿠토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오늘은 맘껏 취하셔. 끝까지 책임져줄 테니까.” “책임져준다고?” “아아. 그러니까 머리 풀고 마셔도 된다고.”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운전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옆좌석에 앉아 조용히 안전벨트를 매는 보쿠토의 얼굴은 왠지 또 시뻘겋게 상기된 채였다. 나 또 무슨 말을 잘못한건데. ♢ 대낮부터 문을 여는 주점을 찾기란 힘든 일이었다. 쿠로오는 그들이 자주 가는 주점이 적어도 다섯시는 지나야 문을 여는 곳이란걸 알고 있었고, 도시 외곽을 거의 돌다시피 해서야 맥주를 파는 낡은 펍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쿠로오는 슬슬 차를 운전하는 동안 한마디도 않고 있던 보쿠토를 의아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평소라면 차 안에서 심심하다고 귀찮도록 말을 글 녀석이, 오늘은 조수석의 콘솔박스를 슬쩍 열어보며 “여기 콘돔 있어?” 라고 물어보곤 잠잠 무소식이었다. 별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는데, 충격 먹은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떠는 게 꼭 저는 아닌 것 같은 반응이었다. 얼씨구. 지는 콘솔박스에 뭐 안 가지고 다니는 것처럼. 자기는 박스에 콘돔이며 젤이며 잔뜩 넣어가지고 다닌다고 뻐기던 보쿠토를 기억하는 쿠로오로썬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왜 네가 내 도덕적 해이에 대해 비난하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지 설명해줄 부엉이? “자, 마시자.” 쿠로오는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보쿠토의 잔에 툭 부딪히곤 잔을 들어올렸다. 보쿠토가 마지 못해 잔을 들어올리고는, 주저하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꿀꺽꿀꺽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보는 사람이 다 갈증이 날 정도로 시원하게 마시는 소리에 쿠로오는 목을 축이곤 서비스로 놓여진 팝콘을 입에 물었다. 오늘은 취해선 안되는 날이었다. “한잔 더 마실래?” “어엉..” 쿠로오는 손을 들어 보쿠토 대신 주문을 넣고는, 메뉴판 제일 위에 쓰인 과카몰레 나쵸를 함께 주문했다. 보쿠토는 두번째 맥주잔이 제 앞에 놓일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쿠로오는 느긋하게 맥주를 마시며 보쿠토를 재촉하지 않았다. 한 세잔쯤 들어가면 알아서 입이 열리겠지. 쿠로오는 요즘 근황이나 예전에 봤던 영화 이야기 따위를 늘어놓으며 보쿠토의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정확히 보쿠토가 맥주 두 잔과 마가리따 한 병을 비운 뒤에 스톨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보쿠토에게 시선을 힐끔 던졌다. 적당히 술기운이 오르는지 양 볼이 슬쩍 벌게진 채였다. “그래서, 요즘 뭐가 문제야?” “으음..” 보쿠토는 손으로 요란하게 세워올린 머리를 한번 스윽 쓸고는, 눈가를 좁혔다. 입은 아직도 꾹 다물린 채였다. “조금 서운하네.” “응, 뭐? 왜, 너는 왜??” “나름대로 너랑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친구가 고민도 털어놓지 못할 정도로 내가 형편없는 녀석인가 싶어서.” 그런 거 아냐! 보쿠토는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쿠로오의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음. 좋아. 적당히 횡설수설하군.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우울한 표정으로 맥주를 꼴깍 삼켰다. 아직도 한 잔째인 맥주는 이제 김이 거의 다 빠져나가 밍밍한 맛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조금 민감한 그런, 문제라서.” “심각한 문제인가봐.”“아니, 응, 그게..” 진짜 무슨 일이지? 쿠로오는 보쿠토가 이렇게 뭔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CIA견습으로 들어왔을 시절 호기심에 전기총을 집에 들고 갔다가 박살을 내 돌아온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알던 것들을 좀 모르는 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응, 그리고?” “아- 진짜 말하기 조금 그래! 미안 쿠로오! 얼른 정리할 테니까!” 보쿠토는 두 눈을 질끈 감은채 스톨 위를 주먹으로 약하레 내리쳤다. 제법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누구 맘대로? 쿠로오는 눈썹을 누그려 웃으며 점원을 불렀다. 데킬라, 한병 주시고 잔은 두 개 주세요. “너무 급하게 얘기하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정리해서 말해봐.” 레몬조각과 소금, 그리고 작은 잔 두개가 엎어져 나온 것은 금방이었다. 쿠로오는 보쿠토 앞에 한 잔, 제 앞에 한 잔을 따라놓고서는 먼저 데킬라를 한 잔 들이키고 레몬 조각을 입에 물었다. 시큼한 레몬즙이 입에 화악 퍼지자 손등 위에 소금을 톡톡 뿌려 혀로 햩는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보쿠토와 눈이 마주쳤다. 씩 웃어주자 이내 데킬라를 쭉 들이키곤 소금도 먹지 않고 물부터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솔직히 너도, 네가 요즘 제정신이 아닌 건 알지?” “그건-” “아니, 네가 우리 집에 도청기를 깐 걸로 갔다가 비난하려고 하는건 아니야.”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고는 최대한 상냥한 표정으로 싱긋 웃어보였다. 보쿠토가 술이 깬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망할 새끼.. “나는 네 파트너잖아. 네가 이런 식으로 방황하면 나도 신경을 쓰지 않을수가 없고..” “으응...” “그리고 넌 내 제일 소중한 친구니까.” 훗, 석양이 지는 배경을 등으로 맞으며 할 법한 느끼한 소리에 크게 뜨인 보쿠토의 눈동자가 너울거렸다. 크윽, 쿠로오..! 그래, 마셔 마셔. 쿠로오는 독한 데킬라를 두 잔 더 보쿠토에게 먹였다. 보쿠토의 얼굴은 이제 누가 봐도 주정뱅이라고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술기운에 푹 절어 있었다. 푸하, 하고 술냄새 푹푹 나는 숨을 내뱉는 보쿠토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며 고개를 기울였다. 말 해 말 하라고. 네가 왜 이 따위로 얼간이처럼 구는지 알아야 이 형님이 어떻게든 해줄 거 아니냐. 쿠로오는 보쿠토가 이렇게 심각하게 방황할 정도로 고민에 빠진 것을 보는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끔 보면 생각없이 사는 녀석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보쿠토는 고민이 없는 녀석이 아니라 고민에 잠겼다가 다시 빠져나오는 것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른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런 녀석이 일주일이 넘도록 골골대고 있다는 건, ‘진짜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거라면 왠만하면 다 들어줘야겠다. 그렇게 결심한지 채 일분도 지나지 않아서, 보쿠토는 쿠로오의 다정한 토닥거림에 감동이라도 받은 것처럼 입술을 우물거렸다. “쿠로오, 있잖아 나 사실.” “오야, 천천히 얘기해봐.” “나 요즘 네 생각하면서 자위해!” 저기. 탱그랑, 하고 카운터 안쪽에서 얼음 집게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 하나 없이 대낮부터 들이닥친 손님의 수치를 모르는 외침에 가게 주인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사실, 어제도! 너 샤워할 때 흥분해서 한 번, 읍!” “그렇게 자세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어!” 쿠로오는 기겁하며 보쿠토의 입을 틀어막았다. 보쿠토는 제 입술 위를 덮은 쿠로오의 손바닥을 낼름 햩고는, 기겁해서 손을 떼어내는 쿠로오의 손목을 제 손으로 꽈악 잡아챘다. 술김에 벌갰던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새빨개진 얼굴의 보쿠토가 눈을 부릅뜬 채 쿠로오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쿠로오, 나랑 섹스 한번만 해 보자.” 데엥- 하고 종말의 BGM비슷한 것이 하고 쿠로오 내면에서 귓가로 울려퍼졌다. 20톤 트럭이 고가도로에서 전복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소음이었다. 당황해 뻣뻣하게 굳은 입술을 억지로 달싹거렸다. “...뭐?” “나랑, 해..” 보쿠토는 말없이 쿠로오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잡아당겨 쿠로오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고, 등 뒤를 단단하게 껴안았다. “.....뭐?” 쿠로오의 황망한 목소리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極上 - 上 - 下 - 極下
이 글은 위처럼 총 네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릅님의 極上편을 먼저 읽고 와주세요!!
[보쿠로아카] 전략적 우위 下 (0) | 2016.0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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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수x쿠로오] for. 스뤀님 (0) | 2016.07.31 |
[보쿠로아카] 전략적 우위 中 (0) | 2016.07.30 |
[보쿠로아카] 전략적 우위 上 (0) | 2016.07.24 |
[보쿠로] 에어기어 AU 조각글2 (for. 보당님 (0) | 2016.07.10 |
보쿠토x모브녀 묘사가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모브남x쿠로오 묘사가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 클알못주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라며, 정장 입어야 되냐?
어렵게 물어본 쿠로오의 말에 보쿠토는 체육관 천장이 떠나가라 웃다가 쿠로오에게 엉덩이가 걷어차였다. 격식 있는 자리도 아니고 그냥 또래 애들 모이는 자리니까 아무거나 입고 와도 된다고 말했지만 쿠로오는 도무지 옷을 고를수가 없었다.
억울한 일이지만 파트너란 소리를 듣고 나선 평소엔 잘만 입고 다니던 티셔츠며 바지가 다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교복 아니면 체육복이나 유니폼만 입고 있는데 옷을 살 시간이 있어야지. 결국 한시간을 넘도록 고심해 검은 반팔티에 검은 긴바지라는 꽤 답답한 옷차림을 선택한 쿠로오는 건물 입구에 도착해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여기 클럽 아냐? 보쿠토, 우리 미성년자라고.”
“오늘은 영업 안 해. 우리가 전세냈거든.”
아무리 봐도 영업 하는거 같은데!? 쿠로오는 표정을 숨기는 일에 능숙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편이었으나 지금 이 상황에선 얼빠진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쿠로오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보쿠토는 쿠로오의 손목을 쥐고 당당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문지기처럼 입구를 지키턴 남자들도 미성년자인게 확실한 둘이 들어가도 별말 않는걸 보니 정말 영업을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는데..
‘뭐야 이게.’
양쪽으로 열리는 문 뒤로는 꽤 넓고 단이 낮은 계단이 있었다. 양 옆으로 갈라져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은 톤이 낮은 붉은색이었고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꼭 핏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2층으로 끌려 올라가니 복도에 서서 서성거리는 몇몇 녀석들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 남자 가릴것 없이 섞여있었고 그 나잇대도 제각각이었으나 공통점은 존재했다. 모두 외모가 보통이 아닐 정도로 준수했고 옷차림도 쿠로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요란했다.
“저기, 혹시 파트너..”
“비켜, 비켜.”
보쿠토와 쿠로오가 2층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몇몇 여자애들이 눈을 반짝이며 앞으로 나섰다. 당황해 혀뿌리가 얼어붙은 쿠로오와 달리 보쿠토는 익숙하단 듯 손을 홱홱 저어 여자애들을 뿌리치고는 왼쪽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아래와 마찬가지로 문지기들은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고 보쿠토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여기가 진짜라는 듯 드러난 문 안은, 묘한 향기가 났다. 허브 같기도 아로마 같기도 했지만 조금 은밀한 느낌이다.
“보쿠토.”
쿠로오는 입 안으로 보쿠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들리지 않는것 같았다. 이름을 목 안으로 꿀꺽 삼키는데 꼭 그걸 알아차린 것처럼 보쿠토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곤 쿠로오의 귀에 입술을 대고 작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상한거 들었을수도 있으니까, 음료수 함부로 먹지 마. 얘긴 해 두겠지만 장난기 많은 녀석들이 있어서.”
이상한거 뭐!? 라고 채 묻기도 전에 쿠로오는 화끈거리는 시선을 밑으로 내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둘 곳이 없었다. 고개를 들면 바로 헐벗다시피 해선 화려한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샴페인 잔을 담은 쟁반을 들고 또각또각 걷고 있었고.. 잠깐만, 저 분이 웨이트리스였어!? EDM음악이 귀를 먹먹하게 울리고 화려한 조명이 공간을 채웠다. 넓은 거실처럼 카펫이 깔린 공간은 어둑했고, 중간중간 놓여진 탁자와 소파엔 옷도 벗지 않고 아랫도리를 드러낸 두 남자와 그런 남자의 성기에 맨발을 올린 여자가 술잔을 들고 낄낄거렸다. 너무 낯설어서 겁이 더럭 날 정도인데, 보쿠토는 이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성큼 걸었다. 그 등에 거의 붙다시피 해 걷다보니 아는 녀석들을 만난 듯, 보쿠토의 손이 번쩍 치켜 올라갔다.
“보쿠토 간만이다?”
“헤이헤이, 오랜만!”
“네 파트너야? 흠.. 분위기 좋은데? 어디 에이전시에 있어?”
“아아, 쿠로오는 모델이 아니고 내가 데려온 녀석이야! 운동하는 녀석이니까 약은 먹이지 마!”
“야. 보쿠토.”
“쿠로오, 대충 즐기고 있어!”
“얌마!”
“몸 좋다 너. 파트너 없으면 나랑 놀래?”
보쿠토는 긴 생머리 여자와 반갑게 인사하더니 능숙하게 여자의 허리를 휘어잡고는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보쿠토의 뒤에서 팔을 뻗던 쿠로오의 손이 허공에 멈칫 굳었다. 빈 소파에 여자를 눕히다시피 하더니 여자의 치맛속으로 보쿠토의 손이 파고드는걸 본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욕을 중얼거렸다.
시발.
쿠로오는 짜증스레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제 옆구리를 찌르며 붙어오는 여자에게 적당히 둘러대곤 자리를 피했다. 발목까지 올 정도로 푹신한 카페트 때문에 성큼성큼 걸을 수도 없었다.
아무리 저랑 붙어먹는다고 해도, 처음에 막나가는 척을 좀 했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곳에 자신을 떡하니 버리고 가버릴수가 있단 말인가. 쿠로오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주류를 홀짝이는 사람들도 빈 접시를 옮기던 웨이터의 머리채를 잡아 자기 바지춤으로 이끄는 사람들도 모두 수치심이란걸 어머님 뱃속에 놔두고 온 것처럼 굴기 시작하는 아주 이상한 공간이었다. 심지어 그 보쿠토조차.
어제까지만 해도 속 뻔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와 섹스하고 나서부턴 점점 보쿠토를 알 수가 없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쿠로오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보쿠토가 자신을 이리 데려온 건 그냥 편하기 때문이겠지. 이런 곳에 데리고 와도 별 말 않고 그냥 알아서 놀다 갈 녀석이라고 생각한.. 그런 거.
잠시나마 파트너란 소리에 들떴던 자신이 얼간이처럼 느껴졌다.
커다란 고무나무 화분 옆으로 피한 쿠로오는 남자여자 구분 없이 뒤엉키기 시작하는 소파에서 눈을 떼어 억지로 눈앞의 이파리에 고정시켰다.
그러나 보쿠토의 흐릿한 머리카락이 소파 너머로 언뜻 비칠때는 저도 모르게 그리로 눈이 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알아주지도 않는데 여기 있다고 스스로 사슬에 목을 맨 개나 다름이 없다. 얼마나 웃긴 꼴인지.
쿠로오는 보쿠토의 말마따나 약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음료수를 거절하고 두 팔로 가슴 앞에 단단히 팔짱을 꼈다.
“어라, 저 아가씨가 왠일로 이 파티에 왔대?”
“아가씨? 아~ 아미 말이지? 그야 뭐 보쿠토 때문이겠지.”
“어라? 설마 그 소문 진짜야?”
“진짜니까 저러고 있겠지..”
재잘대는 목소리에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스치듯 지나가는 이야기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질보다 양이라고, 지나가는 사람 열이 있으면 그중 셋은 보쿠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화제 만발이구만.
어디인지 모를 정부 각료의 막내딸과 보쿠토네와 연관된 무슨 해운업체가 어쩌구 저쩌구.. 학교공부도 딱 필요한 데까지만 처리하고 신문도 읽지 않는 고등학생인 쿠로오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약혼 하는걸까?”
“아미쪽이 아무래도 처지는데.. 재임기간 4년 안에 꽉 잡으려들지 않겠어?”
“아하, 그래서 저렇게 몸이 달았구나아..”
물론, 쿠로오도 약혼이란 단어 정도는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그녀들을 향해 한발작 내딛었다가, 입만 벙긋대고 다시 천천히 손을 내렸다. 방금 그 말이 사실이냐고 물어서 뭐하게. 쿠로오는 멍하니 소파를 쳐다보다,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선 자신을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는 보쿠토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
제 표정을 뭘로 생각한건지, 벙긋 웃더니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오라는 양 손짓을 한다. 보쿠토의 가슴께에 새하얀 여자의 무릎이 봉긋 솟아 있었다.
가슴 한쪽이 콱 막혀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쿠로오는 제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냥 여느때와 같은 미소로 보이기만을 바라며 뒤를 돌았다.
한참 걸어 계단이 나오길래 올랐다. 윗층의 상황도 아랫층과 별다를 바 없었고, 쿠로오는 창을 마주보고 기둥에 기대어 섰다.
여자랑 자는 녀석이란거 알고 있었고, 보쿠토는 게이도 아니고, 나랑 섹스하는 것도 그저 편해서 그럴 뿐이란걸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어쩌면, 이라고 생각했던 게..
“그 녀석이 바보같은게 하루이틀인가..”
쿠로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곳에 도착한지 고작 삼십분이나 지났나 싶은데 로드워크를 세시간은 뛴 것처럼 피곤해졌다.
쿠로오에겐 운동부 남고생 특유의 활기가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은 보여주기 위한 근육과 달리 꽤나 야생의 것 같은 냄새가 났고 파티에 온 상류층의 자제들은 보는 눈이 있었다.
적당히 놀게 생긴 야살스런 얼굴에 탄탄한 몸뚱아리, 몇몇 사람들이 쿠로오를 발견하고 집적댔으나 쿠로오는 그저 고개를 흔드는 것만으로 가볍게 그들을 떼어냈고 그들은 꽤 선선히 그러마 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매너는 있어서 다행이네.
삼십분이나 혹은 한시간쯤 되었을까,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발바닥이 불편해 발을 꼬물거리는데 허리춤이 선뜩했다.
아차 하는 순간 왠 남자가 쿠로오의 허리를 휘어잡고는 벽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두꺼운 팔이었다.
“헉..!?”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데. 너 여자 취향은 아니지?”
제기랄. 쿠로오는 저보다 몸통 하나는 더 붙여놓은 듯한 두툼한 살집의 남자에게 보이지 않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쿠로오의 귓가 바로 옆에서 울렸다. 그럼 키가 못해도 2M는 된다는 소린데.. 리에프보다 큰 사람은 처음이었다.
손을 들어올려 허리를 감싼 남자의 손을 손가락 하나하나 떼어내고 있자니 가슴속에서 천불이 솟을 정도로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일행이 있어서요.”
“한시간동안 방치하는 파트너? 버리지 그래. 누구랑 같이 온 줄은 몰라도 모델이라면 나한테 자라 보여서 나쁠 건 없어.”
귓가에 대고 느물대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저절로 소름이 끼쳤다. 쿠로오가 저도 모르게 남자의 가슴을 뒤로 밀치자 그는 쿠로오가 자길 밀치는걸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쿠로오의 팔꿈치를 꽉 쥐고는 오히려 쿠로오의 팔을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현역 운동부 주전인 쿠로오마저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남자의 두툼한 손바닥이 쿠로오의 엉덩이를 쥐고 콱 비틀어 올리자, 그제서야 급해진 쿠로오는 기겁하며 남자의 품에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미친, 누가 좀, 도와줘!
“아, 아카아시!!”
필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얼핏 아카아시를 닮은 사람을 발견해 소리쳤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었는데 카펫을 밟고 가까이 다가온 인영이 정말 그 아카아시인걸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아시는 엉망인 저의 얼굴을 보곤 무어라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뻐끔거리더니 이내 남자의 손을 떼어내고 쿠로오의 허리에 제 손을 대신 감았다. 하아하하.. 쿠로오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카아시의 어깨를 주춤 팔로 감싸 안았다.
“여기 있었군요.”
“기다렸..잖냐. 하하.”
“룸에서 기다리라고 했더니. 정말이지.. 오랜만입니다. 카부토 씨.”
“뭐야. 모델인 줄 알았는데 네 쪽에서 데려온 녀석?”
“그렇습니다. 알다시피 약은 하면 안되는 사람이거든요. 실례하겠습니다.”
“아쉽네. 뭐, 다음에 질리면 이리로 보내든가.”
쿠로오는 등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저 남자가 하는 말이, 사람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제 밑으로 쥐락펴락하는 짐승보다 못하게 보는 저 눈이 진짜라는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쿠로오는 제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눈치가 비상한 편이었고,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 곳은 정말 말도 안되는 곳이었다.
“일단 이리로.”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손목을 잡고는 어딘가로 이끌었다. 무광으로 된 검은 문 앞에서 쿠로오는 잠시 멈칫했으나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턱하니 내뱉었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이 있었던건지 테이블 위는 먹다 남긴 안주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여유를 조금 되찾은 쿠로오는 알 굵은 체리 한알을 입에 던져넣고는 으적 씹으며 허리에 긴장을 풀었다. 몸뚱이가 푹신한 소파로 푹 꺼져들었다.
“물 드시겠어요?”
“아아.. 고마워.”
아카아시가 건네준 물은 미지근했지만 오히려 마시기 편했다. 레몬맛이 살짝 나는 물을 꿀꺽 삼키자 꼭 이야기를 시작해보라는 얼굴로 맞은편에 앉은 아카아시가 눈을 마주쳐왔다.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것은 그쪽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지만, 선배가 보쿠토 씨가 데려온 파트너입니까?”
“당분간 그 또라이 부엉이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파티라고 데려온 게 이딴 곳인 줄 알았으면 두들겨 팼을 테니까.”
“...선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요?”
“그래.. 하. 생각할수록 짜증나네.”
쿠로오는 그리 투덜거리며 아예 과일접시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그릇에 담긴 포도알을 껍질째 씹었다. 생각해보니 저녁도 못 먹고 와서 망부석처럼 서 있기밖에 안 했다.
재밌는 곳이라더니 그게 누구 기준으로 재밌다는건지 알만 했다. 아직까지 딱히 보쿠토 외의 사람과는 섹스하고 싶지 않은 쿠로오로써는 재미도 적응도 어려운 파티였다.
이곳에 들어와서야 긴장이 풀린 듯 보이는 쿠로오를 빤히 쳐다본 아카아시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 바짝 굳어 긴장한 채 절박하게 제 이름을 부르던 모습이나 배고픈지 과일을 끊임없이 집어먹는 모습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반응이었다. 아카아시는 테이블 밑의 벨을 눌러 웨이트리스를 호출했다.
“..알겠습니다. 조금 뒤에 무사히 집에 보내드릴테니까. 일단 식사 하시겠어요?”
“어라, 여기 배달도 돼?”
배달도 되긴 하지만 주방에 주문하는 편이 낫습니다.
벨을 누른지 1분도 되지 않아 문이 달칵 열리곤 예의 그 남사스러운 차림의 웨이트리스가 부르셨나요? 하고 물어온다. 아카아시는 쿠로오에게 먹고싶은 음식을 물었으나, 설마 그 입에서 꽁치구이라는 음식이 튀어나올지는 몰랐다.
“그럼 꽁치구이 백반을.. 재료가 있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횟감용 꽁치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여자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그제서야 쿠로오의 나직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아카아시는 쿠로오가 내내 말이 없던 것이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어쩐지 즐거워졌다.
그 쿠로오 테츠로가 긴장이라니. 확실히, 이런 곳이 아니었다면 전국대회 결승전에서나 볼 수 있을만한 얼굴이겠지.
아카아시는 다시 자리를 고쳐앉았다. 그리고 아마도 보쿠토 선배에 대한 것을 물어보려고 했었다. 쿠로오 선배를 데려온 그 분은 지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계신답니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쿠로오의 목소리가 반박자 빨랐다.
“아카아시, 물어볼 게 있는데.”
“..네. 뭐죠?”
“보쿠토 녀석, 약혼녀가 있었냐?”
턱을 괴고 시선을 엉뚱한 데에 고정시킨 채,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물어온 말이었지만 아카아시는 그를 네트 너머에서 2년 이상 마주한 자신의 감을 믿었다.
저 문장에 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묵직한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잤구나, 두 사람.
육감과도 같은 깨달음이었다.
보쿠토 선배가 아무나 이런 파티에 데려오진 않았을 테니까. 그럼 요즘 선배가 스테디하게 만나고 있던 게 쿠로오 선배였다는 뜻이다.
뭐에요, 선배. 보쿠토 선배랑 섹스하고 다닐 정도면서 고작 이런데에 놀라시다니. 짖궂게 놀려주고 싶었지만 아카아시는 그 대신 쿠로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선택했다.
“있습니다.”
“흐응..”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그 눈동자가 금새 복잡하게 가라앉는걸 볼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쿠로오가 좋아할 만한 말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집안에서 일방적으로 정해진 사이에요.”
“......”
“원래, 이쪽은 결혼을 비즈니스로 생각하니까요. 아마 보쿠토 선배도..”
아카아시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말이 많았다. 쿠로오는 제가 그를 위로하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어느새 평소의 그 여유로운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왜 웃는 겁니까.”
“아니 왠지~ 상냥해서 반해버릴 것 같다 싶어서?”
“네네. 제가 상냥한건 하루이틀일이 아니니까요.”
“푸핫, 방금 내 대사 표절한거야!?”
“아닙니다.”
“아니라고? 흐음?”
씩 웃으며 저를 올려보는 그 표정은 평소처럼 느물느물했다. 아카아시는 그 변화에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주먹을 꽈악 쥐었다. 저도 모르게 그 제멋대로 뻗친 머리 위를 쓰다듬을 뻔 했기 때문이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어려워! 아카아시 잘생겼어!! 근데 어려워ㅠㅠㅠ!!!!!!!!!!
후엥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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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0ㅠ AT탄 쿠로오 넘나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오만번째 햩는중..
앞내용? 과는 딱히 이어지지 않습니다.
귀찮다며 오기 싫어하는 켄마를 살살 달래어 데려오다보니 살짝 늦고 말았다.
건설사의 도산으로 짓다 말아 철골이 드러난 빌딩과 버려진 건축장비가 남은 공사터가 바로 후쿠로다니의 에어리어다. 그 맞은편의 12층건물 옥상이 바로 배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명당터였는데, 네코마의 팀원들 사이 자연스레 서있던 아카아시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에게 뭔가를 물어볼 틈도 없이 배틀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날카롭게 울렸다.
동시에 가벼운 가스를 넣은 벌룬이 허공 위로 둥실 떠올랐고, 보쿠토는 어떤 도발에 걸려들었는지 몰라도 잔뜩 열이 받은 상태였다.
“너흰 나설 필요 없어! 나 혼자 나간다!”
그렇게 외친 보쿠토는 팀원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배틀 에어리어로 뛰쳐나갔다. 엄청난 자신감이네. 아무리 무명이라지만 B클래스에서 3번 이상의 승리를 거머쥔 팀인데.
혹자는 근거 없는 오만함이라 생각할만한 행동일지라도 그 주체가 굉음의 왕, 오버로드를 가는 보쿠토라면 정당성을 가진다. 실제로 5:1이라는 유리한 상황이 닥쳤음에도 상대팀은 보쿠토의 흉흉한 기세에 당황하기 시작했으니까.
공사장의 사나운 기류를 타고 벌룬은 이미 까마득한 하늘 위로 솟구친 상태였다. 쿠로오는 검지손가락에 침을 묻혀 얼굴 옆으로 들어올리고 바람을 가늠했다. 네코마의 에어리어만큼은 아니라도 나름 익숙한 후쿠로다니 팀의 배틀 에어리어인만큼 어느정도 벌룬의 움직임이 예상되었다.
“벌룬이 다시 밑으로 내려오기까지는 약 삼십분.. 정도인가.”
“그 안에 결판을 내려다보네.”
풍선을 먼저 잡거나 팬서를, 혹은 팬서로 의심되는 라이더를 전투불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보쿠토가 선택한 전략은 후자인 모양으로, 발밑에서부터 사나운 섀도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런 보쿠토를 바라본 쿠로오의 기색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뭐야 저거.”
“뭐가 말입니까?”
“누굴 바보로 알아?”
그 말과 함께 쿠로오는 하,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볼 것도 없다는 투였다.
“왠일로 우릴 배틀에 초대했나 했더니, 저런 런을 보여주려고 했단 말이지.”
쿠로오는 짜증스럽게 이를 악물었다. 프리러닝을 가자는 말에도 우물쭈물하며 자리를 피한 지 벌써 2주일 째였다. 처음 일주일째엔 그러려니 했으나, 그 일수가 열흘이 지나가자 슬슬 쿠로오도 보쿠토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라도 달리지 않으면 다리에 가시가 돋힌다고 하는 저 AT바보가 왠일인가 싶었더랬다.
물론 쿠로오 본인에게 오지 않고 혼자 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 재미없잖아?’
물론 하늘을 나는 건 즐겁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보쿠토와 쿠로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트릭을, 노력을, 시간을 쌓아 팀원들과 함께 눈앞의 벽을 부수고 한단계 더 성장하고- 그리고 함께 나는 그 짜릿한 감각을.. 보쿠토와 자신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녀석도 나도, 혼자 나는게 좋다면 팀따위 만들지 않고 혼자 달리고 있었겠지.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잔뜩 걱정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적어도 두 다리 멀쩡하게 잘 있는거 보니 됐어, 난 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줄 알았지 뭡니까~”
리에프, 저런 런은 보고 있어봤자 도움도 안 되니까 가서 트릭 연습이나 하자.
손을 절레절레 흔든 쿠로오는 바닥에 AT를 가볍게 스쳐 칙, 하는 소음을 만들어 내고는 빙글 뒤로 돌았다. 아카아시의 입이 열린건 쿠로오의 등이 여지없이 돌아선 순간이었다.
“쿠로오 씨는 저게 멀쩡한 상태로 보입니까?”
“.....”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보쿠토의 두 팔 두 다리는 멀쩡했다. 보쿠토의 퇴화는 그의 런이 얼마나 호쾌한지, 패도적인지 아는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변화였다. 적어도 보쿠토 하나를 두고 셋이 덤벼 간신히 버티는 저 팀이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평소의 보쿠토의 런이 맹금의 날갯짓처럼 파워풀했다면 지금은 비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볼품이 없었다. 점프의 비거리도 눈에 띄일만큼 줄어 마치 날지 못하는 새가 바닥에서 홰를 치는 것 같다. 그 꼴을 보던 쿠로오가 말꼬리를 길게 잡아끌며 물었다.
“달리기 전에 술이라도 마셨어?”
“설마요. 보쿠토 씨가 막나가긴 해도 원칙은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그럼 술대신 약이라도 했다는 건가?
쿠로오는 눈살을 찌푸리며 안력을 돋궈 보쿠토의 AT를 확인했다. 심지어 보쿠토는 연습용 AT도 아니고 제대로 그의 레갈리아를 착용한 상태였다. 착지 엉망, 런의 완급도 엉망, 점프할때 지나치게 무릎에 무리를 주고 있고.. 저런 식으로 하다간 AT에 무리는 물론이고 몸이 먼저 망가져버릴 것이다.
“..그럼 대체 왜 저렇게 달리는 건데?”
보쿠토의 AT가 난간과 벽을 디딜때마다 얼핏 보이는 작은 스파크를 보며 쿠로오가 낮게 물었다. 켄마는 이미 배틀에 흥미를 잃은 듯 난간에 앉아 폰을 보며 다리를 흔들거리고 있었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이미 이야기가 되었다고 들었는데요.”
“무슨 이야기?”
“툴 토웉 투에서 조율자를 내어주지 않은지 3주째입니다.”
아카아시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쿠로오를 빤히 바라보는 눈길엔 얼핏 책망의 기색이 옅게 내려앉아 있었다. 조율자가 없다고? 쿠로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레갈리아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무슨 소리야 그게?”
“조율 건,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그날은 프리러닝이 아닌 트릭의 연습을 위해 모인 날이었다.
AT를 타고 제대로 트릭을 쓰기 위해선 먼저 AT를 신지 않은 채 몸에 트릭을 익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완벽한 자세를 익힌 뒤에야 AT를 신고 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는 법을 모르는 AT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까지 위협하는 흉기가 되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AT만 벗겨놓으면 집중력을 극도로 상실해버리는 리에프를 제외하곤 네코마의 팀원들은 이런 기본 연습을 꾸준하게 하는 편이었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트릭을 전개하는 것이 장점인 팀이었으니까.
네코마 팀의 주된 연습장소는 하천 다리 밑의 방둑이었다. 공간이 넓었지만 주민들의 산책로로 쓰기엔 음침하고 지저분해 인적도 드문 곳이다. 수건을 어깨에 걸고 발을 사선으로 기울어진 방둑에 걸어 허벅지 안쪽을 쭈욱 늘리던 쿠로오는 뒤에서 슬금 다가와 말을 거는 보쿠토를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쿠로오, 있잖아..”
“싫어.”
“에엑!? 듣지도 않고!?”
“조율해달라는 거잖냐.”
쿠로오의 말에 보쿠토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 위아래로 한번 움직였다.
몇주 전 리에프에게 조율해주던 장면을 목격하고 나선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그리 물어왔으므로 쿠로오가 보쿠토의 용건을 넘겨짚은건 그닥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왜 맨날 거절해? 쿠로오 넌 내가 싫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애초에 내가 하는 조율은 그냥, 그.. 임시방편이라고. 넌 제대로 된 조율자도 있는게 그러냐.”
심드렁하게 말하며 방둑 한켠에 놓인 아이스박스에 다가가자 그 옆에 주저앉아 있던 야쿠가 드링크병을 하나 가볍게 던진다. 그걸 받아들고 한모금 마실 때까지 쫓아온 보쿠토는 필사적으로 변명거릴 떠올리는지 끙끙대다 번쩍 외쳤다.
“조율자가 없어질수도 있지!”
“조율자가 야생동물이냐? 그리고 난 레갈리아를 타는 사람의 몸은 몰라.”
“어라.. 그말 좀 야하다.”
“어쨌든 힘들어~ 자꾸 조르지 마.”
쿠로오는 거의 빈 드링크 통을 가볍게 흔들어보곤 그리 말을 뱉었다. 리에프의 경우야 워낙에 초보인데다 이쪽이 가르치는 입장이다 보니 런의 스타일이 비슷해서 그럭저럭 조율하는거지, 이미 완성된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데다 그 무시무시한 굉음의 레갈리아를 자유자재로 쓰는 보쿠토의 몸을 아마추어인 자신이 어떻게 조율한다는건가.
이쪽이 편하니 자꾸 부탁해온다는건 알겠는데, 슬슬 쿠로오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묘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거다. 자신을 동등한 라이더로 보고 있다면 저리 쉽게 조율해달라는 부탁이 나오지도 않겠지.. 싶은.
“어떻게 해도 안되겠어?”
“절대 안됩니다.”
보쿠토의 말에 쿠로오는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평소보다 더 나긋나긋한 대답이었지만 역시 대장 부엉이, 뭔가 촉이 오는지 움찔 어깨를 떨고는 고개를 푹 숙인다.
그리곤 알았어.. 라곤 시무룩하게 대답하고는 이내 아카아시가 연습하는 쪽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어라어라. 부엉이 풀죽음 모드? 쿠로오는 그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 수건을 내려놓고는 다시 연습용 AT를 신고 벽을 박차올랐다.
그 뒤로 열흘째, 달리러 가자는 쿠로오의 문자에도 보쿠토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
“자세히 말해봐. 조율자를 안 내어주다니!? 완전 중립을 표방하는 팀이잖아, 거긴!”
“최근 도쿄 서부에서 급성장하는 슬리핑 포레스트라는 팀 들어보셨습니까?”
“.. 소문만 들었어. ‘왕’급의 라이더가 몇명씩이나 모여있다고. 과장이 심한 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팀이 ‘툴 토웉 투’를 흡수해버렸습니다. 현재 계약의 왕은 슬리핑 포레스트의 팀원이죠.”
아카아시의 말에 쿠로오 뿐만 아니라 야쿠와 켄마마저 얼빠진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만큼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심각하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리에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불쑥 물었다.
“계약의 왕이 누군데여?”
“궁금하면 좀 찾아봐! ‘툴 토울 투’의 리더야!”
쿠로오보다 야쿠가 한박자 빨리 리에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입안으로 툴톨투..? 라고 중얼거리는걸 보니 그새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 같았다. 학교 성적이 괜찮은걸 보면 머리는 나쁘지 않을텐데, 리에프는 유독 저가 신경쓰지 않는 것에는 무관심했다.
“그래서 슬리핑 포레스트 외의 다른 팀에겐 조율을 제공하지 않겠다?”
“일반 AT에대한 수리와 개조 등은 예전과 같이 제공됩니다. 다만,”
레갈리아를 쓰는 자는 직접 그 힘을 증명하러 오라- 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왕이라는 이름을 단지 2년이 되어가는 보쿠토 앞에 찾아오지 못할 망정 스스로 심사대에 오르라고? AT가 저꼴이 되도록 버티는 이유는 충분히 알만했다. 다만..
“저 녀석, 왜 나한테는 이런 얘기를 입도 벙긋 안한건데!?”
“그건 모르겠네요.”
담담한 아카아시의 목소리에 쿠로오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 때, 원래 정해진 조율자가 없어졌으니 도와달라고 그렇게만 얘기했어도 보쿠토의 말을 농담처럼 들어넘기진 않았을텐데.
그러고 보니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자꾸 귀찮게 하지 말라며 보쿠토를 쫓아낸 뒤였다. 보쿠토가 런을 거절하기 시작한 것이.
쿠로오는 진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바닥과 난간을 박차고 그대로 위로 점프했다. 맞은편 건물옥상의 DJ가 깜짝 놀라 나동그라진 의자 옆에 가볍게 착지해 후쿠로다니의 리더 대신 타임아웃을 요청하는데, 명백히 다른 팀원의 개입인데도 팀 후쿠로다니의 라이더들은 그러려니 하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막 받아들여지던 타임아웃에 반발한 것은 상대팀이었다.
“우리가 왜 그 타임아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뭐?”
“애초에 D클래스 이상의 배틀에선 타임아웃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실례 아냐?”
“무슨! 5대 1로 붙어놓고 양심도 없네!?”
그들의 말마따나 배틀 중간에 타임아웃을 요청하는 전례가 없긴 하지만 애초에 5:1로 배틀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저쪽이 한발 신세를 지고 들어가는 건데, 뻔뻔하게도 정론은 내세운다. 쿠로오가 왈칵 섀도우를 피워올리자 가로등 위에서 쿠로오를 내려다보던 보쿠토가 외쳤다.
“끼어들지 마, 쿠로오!”
“네 상태를 봐! 고집부릴 때야!?”
“그러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쿠로오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고갤 올리자 보쿠토가 그 시선을 피하듯 눈을 정면에 고정했다. 삐졌냐? 삐졌어?
필사적으로 제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하는걸 보니 저 서운하다고 저러고 있는게 맞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런 보쿠토를 쳐다보던 쿠로오가 아카아시! 하고 그를 소리내어 불렀다. 혼자서 가능하겠어?
그 한마디로 쿠로오의 의도를 알아챈 그는 상대팀을 빤히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아뇨, 셋은 몰라도 다섯은 힘들어요.”
“켄마, 도와줘.”
“귀찮고..”
“평소 신세진게 있잖냐. 그냥 아카아시 보조 정도만.”
쿠로오의 말에 켄마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타임아웃이 안 된다면, 원래 멤버가 배틀에 참여하는것 정도는 괜찮겠지?
팬서를 제외한 나머지 포지션의 뱃지들을 살피지도 않고 아무거나 낚아챈 쿠로오가 고개를 좌우로 우득 움직여 몸을 풀었다.
[네코마&후쿠로다니 연합이 배틀에 참전! 전 송곳니의 왕! 도쿄의 대장 고양이! 지지부진하던 배틀을 단번에 끝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상대팀에선 그제서야 타임아웃을 받아들이겠다고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아카아시의 AT에서 서서히 끓어오르는 열기가 상승기류를 만들어 그의 코트가 살아있는 것처럼 펄럭이기 시작했다. 보쿠토는 제멋대로 배틀에 난입한 셋을 보며 방방 뛰었다.
“뭐야! 내가 혼자 처리한다고 했잖아! 쿠로오 넌 우리 팀도 아닌데!”
“네네~ 네코마&후쿠로다니 연합입니다~”
“갑니다, 켄마 씨.”
가타부타 별 말도 없이 아카아시는 AT를 회전력으로 인한 상승기류를 타고 곧장 상대팀에게 도약해갔다. 그 뒤로 켄마가 말없이 송곳니를 쏘아보내자 아카아시의 트릭 뒤로 뜨거워진 공기가 송곳니에 휘감겼다. 점프한 아카아시의 발밑으로 날카롭게 쏘아진 송곳니에 팀의 대형이 뿔뿔히 흩어지고, 올빼미의 발톱이 날카롭게 허공을 할퀴었다. 대인공격력으로 따지면 상위권인 플레임 로드와 블러디 로드의 실력자가 본격적으로 사냥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둘을 보던 쿠로오는 무얼 하고 있었는가 하면은..
“왜 쫓아오는데!”
“넌 왜 도망가는데!?”
저를 보고 도망치기 시작하는 보쿠토의 뒤를 쫓고 있었다.
물론 평소라면 모를까 상태가 엉망인 보쿠토가 쿠로오를 뿌리치는건 요원한 일이었다. 벽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라 보쿠토의 앞길에 사뿐히 착지한 쿠로오를 피해 보쿠토가 옆으로 진로를 틀었다. 하지만 착지와 동시에 자세를 낮춰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덮쳐오는 쿠로오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함께 나동그라졌다.
평소라면 자세가 흐트러지지도 않았을 보쿠토는 쿠로오가 태클한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쿠로오를 껴안고 바닥을 굴렀다.
“잡았, 다!!”
“으아악!”
데굴데굴 구르다 기세를 줄여 멈추자 보쿠토의 위로 올라탄 쿠로오가 어질어질한지 머리를 좌우로 털었다. 간신히 옆으로 눈을 굴려 지척의 헐거운 난간을 발견한 보쿠토가 저도 모르게 와락 상체를 일으키는데, 어느새 보쿠토의 배 위로 올라탄 쿠로오가 보쿠토의 머리 위로 무언가를 덥썩 씌워버렸다.
“....?”
보쿠토가 제 눈을 가린 천을 손으로 내려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이거, 아까 쿠로오가 입고 있던 티셔츠 같다..?
“쿠, 쿠로오!!”
“왜?”
슬며시 티셔츠 사이로 눈을 빼내니 상의를 시원하게 벗어버린 쿠로오가 씩 웃으며 장갑을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있었다.
쿠, 쿠로오가 벗고, 내 위에 올라탔어..! 눈알이 핑핑 돌 정도로 머리에 열이 올랐다. 보쿠토가 양손을 들어올려 티셔츠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고 버럭 외쳤다.
“하, 하지 마!”
“오야? 이거 신선한 기분인데. 걱정 마. 기분 좋게 해줄께~”
그렇게 조율해달라 노래를 불러댄 주제에 막상 실전에 돌입하니 겁탈당하기 직전의 여자애처럼 벌벌 떠는게 웃겨 쿠로오가 피식 웃었다. 이미 관중의 관심은 일방적으로 아카아시와 켄마가 리드하는 배틀이 아니라 둘에게 모여진 상태였다.
게, 게이 섹스다! 조율이거든 병신아! 큰소리로 외치지 마!
보쿠토는 양 손으로 쥐어진 티셔츠 안에서도 뻐끔거렸다. 쿠로오 냄새 나잖아 제기랄! 보쿠토는 혹여나 티셔츠가 찢어지기라도 할까봐 손에 힘을 빼버릴 수밖에 없었다. 대신 제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 쿠로오의 손목을 턱 잡아 꾹 눌렀다. 조율을 못 받았다 한들 그 힘이 어딜 가는건 아니라 쿠로오도 인상을 쓰며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니까 조율하지 마!”
“억지 쓰지 마시죠~ 아무리 너라도 그 몸상태로 레갈리아는 못 써.”
“네가, 싫어하는데 억지로 조율받을 생각 없다고..!”
“어라? 내가 싫어하는걸 어떻게 알았지? 대장 부엉이 독심술도 쓴답니까?”
쿠로오의 짖궂은 말에 보쿠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로 조율자가 없어졌다는걸 알면 쿠로오는 분명 저를 그냥 두고보지 못할테지. 그 사실을 말했다면 좀 더 일찍 쿠로오에게 조율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쓸데없는 제 자존심이지만 보쿠토는 쿠로오에게 동정받고 싶지 않았다. 그냥 무릎 작살나서 죽고 말래. 차라리 몸이 망가질 때까지 달릴지언정 쿠로오에게 구차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쿠로오는 상냥하니까. 지나치게.
***
“난 진짜 괜찮아. 하지 마.”
축 처진 목소리로 그리 말해봤자 별로 설득력은 없지만, 쿠로오는 꽤나 고집스레 조율을 거부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내가 못미더워?”
“그건 절대 아냐!”
“그럼 왜? 먼저 조율 이야기를 꺼냈던건 너잖냐.”
쿠로오의 말에 보쿠토는 쿠로오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쭉 빼버렸다. 티셔츠로도 채 가려지지 않는 새빨간 귓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고집스레 얼굴을 가린 채였다.
“..네가 좋아서 조율해줬으면 싶어서.”
“뭐?”
“억지로 해주는게 아니라, 네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해줬으면 싶어서..”
“으음.. 그럼 지금 집중해줄테니까 일단 옷부터,”
“싫다고 했잖아..”
보쿠토가 입으로 웅얼거리며 그렇게 말하는데, 목소리가 먹먹한 것이 꼭 우는 것 같았다. 너 울어!? 쿠로오가 어이없는 말투로 물으며 보쿠토의 얼굴을 들어올리는데, 보쿠토가 양 손으로 쿠로오의 티셔츠를 제 얼굴에 묻고 고집스럽게 떼어내지 않았다. 손에 닿는 티셔츠가 축축해진걸 보니 진짜로 우는것 같아 쿠로오는 어이가 없었다.
“왜 울고 난리야!?”
“쿠로오 네가 싫다며! 나도 너 억지로 이러는거 싫거든!!”
“그건 네가..!”
쿠로오의 목소리가 커지자 보쿠토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이내 훌쩍훌쩍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한다. 관중석의 열기는 그 어느때보다 뜨거워진 채로 팝콘을 들고 둘을 쳐다보는 시선이 열렬했다. 헐 왕이 운다. 헐 대박. 오버로드가 울어! 미친 진짜야?
맞은편 건물에서 평소보다 격하게 트릭을 쓰던 아카아시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이곳을 쳐다보기까지 하니 유큐브 조회수가 와르르 올라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것만 같다.
와 씨. 이녀석 우니까 진짜 내가 못된 짓 하는것 같잖아.
쿠로오의 볼에 식은땀 한방울이 맺힌다. 쿠로오는 한숨을 푹 내쉬곤 조심스레 보쿠토의 볼을 톡톡 두들겼다.
보쿠토가 자기를 동등한 라이더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그저 저 혼자 그에 비하면 격이 떨어진다고 못난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보쿠토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사실 제 열등감이 쿡쿡 찔렸기 때문이다. 보쿠토의 숙여진 얼굴을 제 정면으로 바로 들어올린 쿠로오는 조용조용 속삭였다.
“그럼 다시 부탁해. 조율해줬으면 좋겠어?”
그런 쿠로오의 목소리에 보쿠토가 고개를 저을 수 있을리 없다. 천천히 고개가 끄덕이자 쿠로오는 씩 웃으며 보쿠토의 손에서 제 티셔츠를 살살 빼냈다.
“왜?”
보쿠토의 옆으로 눈물에 엉망으로 젖은 티셔츠를 툭 던지자 보쿠토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바닥에 구멍이라도 낼 기세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눈물은 멎은것 같지만 눈가는 아직 벌건 채였다.
“내 런을.. 가장 잘 아는건 쿠로오 너잖아..”
“응 그래서?”
“그러니까 네가 조율해줘.”
“정답.”
쿠로오는 고갤 숙여 보쿠토의 호흡을 빨아들였다. 입술은 아주 천천히 겹쳐졌다.
***
쿠로오는 눈을 감았다. 존재하는 모든 감각을 눈 앞의 보쿠토에게 쏟아부어야 했다.
“걸리적거리니까 옷 벗어.”
“으, 으응!!”
이마를 맞댄 채 보쿠토가 부산스레 상의를 벗어던지는 동안 그의 소리를 들었다. 쿠로오의 손이 보쿠토의 볼에서부터 목, 쇄골, 등과 가슴 위로 천천히 미끄러져내렸다. 탄탄하게 짜인 근육 아래에서 혈관이 맥박치는 감각, 관절이 움직이며 내는 진동, 소리, 귀가 아닌 전신으로 진동을 자각해 받아들이는 쿠로오에게 그 손끝은 일개 단말이 아닌 감각기관과도 같았다.
‘심장이 빨리 뛰네.’
전투의 영향 탓인지 보쿠토의 박자가 빠르다. 쿠로오는 거슬릴 정도로 거세게 뛰는 심장 덕분에 다른 잡스러운 소리가 먹히자 인상을 쓰고 몸을 내렸다. 보쿠토의 가슴을 뒤로 밀어 눕히곤 보쿠토의 가슴 위로 귀를 대고 가만히 소리에 집중했다.
“헉..!”
갑자기 뒤로 밀리자 놀랐는지 보쿠토의 입에서 숨이 터져나온다. 이내 쿠로오는 바깥으로 분산되는 집중력마저 모두 보쿠토의 내면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엉킨 리듬을 하나씩 풀어가야 한단 말이지. 한숨부터 터져나올 것 같은 몸상태였다. 쿠로오는 천천히 손가락을 올려 보쿠토의 삼각근 아랫부분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뼈와 근육 사이의 지점을 정확히 자극하자 흐름이 원활하지 않던 곳의 소리가 달라졌다. 쿠로오는 상체를 아예 보쿠토에게 붙이다시피 밀착했다. 보쿠토의 어깨와 목 사이로 얼굴을 묻고 벗은 가슴이 맞닿았다. 쿵쿵 뛰는 박동에 화답하듯 쿠로오의 리듬이 보쿠토에게 녹아든다.
겨드랑이부터 팔꿈치까지의 어느 부분을 꾸욱 눌러 미끄러지자 보쿠토가 앓는 소리를 내며 작게 쿠로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주춤 손을 들어올려 쿠로오의 등을 꼬옥 껴안았다.
등 뒤에서까지 보쿠토의 소리에 먹혀들어가, 마치 온 몸이 물에 잠긴 것처럼 보쿠토의 기색에 녹아드는 것 같다.
보쿠토의 가슴 위로 양 손을 올린 쿠로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치워. 방해돼.”
“엇, 그래? 이러면 내 소리가 더 잘 들리지 않아?”
“.....”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물으려던 쿠로오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저 녀석, 제대로 된 전속 조율사가 있었지 참.
순간적으로 얼굴도 모르는 조율사를 꼬옥 껴안고 있었을 보쿠토를 상상하자 기분이 요상해졌다. 쿠로오는 상체를 들어올려 얼빠진 보쿠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따콩 때려 딱밤을 먹이고는 으르렁거렸다.
“잡담하지 말고 집중해.”
“나 엄청 집중하고 있어.”
말이나 못하면. 쿠로오는 속으로 혀를 차며 보쿠토의 무릎 아래를 꾸욱 눌렀다. 몸을 뒤로 옮겨 허벅지에 귀를 대고 숙여진 쿠로오의 마른 등을 보쿠토의 눈이 햩듯이 담았다.
지금의 조율은 그저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배틀하는 도중 잠시 응급처치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건 알지만.
두 눈을 형형하게 뜨고는 그 등위로 자신의 손바닥을 미끄러뜨려 끌어안는다.
곧,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할꺼야. 네 전신의 맥박이 나와 함께 뛰도록.
보쿠토와 연락이 되지 않아서 무슨일인가 싶던 와중에 팀 후쿠로다니와 다른 팀의 앰블럼 배틀이 열린다는 사실을 파츠워우 홈페이지에서 접한 쿠로오.
그리고 끙끙 앓는 보쿠토를 보다 못해 쿠로오를 비롯한 네코마팀을 배틀 특등석에 초대한건 아카아시.
왕의 배틀을 보고 싶다고 광광 울어서 어쩔 수 없이 쿠로오가 후쿠로다니의 에어리어오 오게 만든 건 리에프.
쿠로오한테 조율을 거절당하고 나서 쿠로오가 내 망가진 몸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살짝 궁금했던 보쿠토.
[보쿠로아카] 전략적 우위 中 (0) | 2016.0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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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는 두툼한 양모 담요를 얻어 작은 불이 타는 화덕 옆자리에 잠자리를 잡았다.
그동안의 여독이 풀릴 만큼 단잠을 자고 일어나자 어느새 몸단장까지 마친 쿠로오가 보쿠토를 깨웠다.
“집 뒤켠으로 가면 개울이 있어. 씻고 오지 그래, 기사님?”
“흐아암.. 보쿠토로 됐다니까.”
늘어지게 하품을 한 보쿠토는 쿠로오가 말한 대로 집 뒤켠으로 이동했다.
“호오.. 이건 또.”
아침의 숲은 밤의 숲과는 달리 굉장히 낭만적이었다. 풀잎에 맺힌 이슬은 요정처럼 빛났고 산새들의 지저귐과 작은 개울 흐르는 소리, 그리고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작은 오두막. 확실히 이런 곳이라면 마을에서 떨어져 살만 하겠어. 세수를 하고 머리까지 감았는데 그제서야 제가 수건이며 뭐며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물을 뚝뚝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자 쿠로오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수건을 던졌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네.”
“하하! 그런 소리는 자주 듣지!”
“칭찬이 아닐텐데?”
식탁엔 어제 먹다 남은 스튜에 물을 더 넣고 끓여 스프처럼 묽어진 것과 흰빵, 그리고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가 차려져 있었다.
고기잖아! 스프는 밋밋했지만 염장한 고기와 함께 먹으니 맛이 좋았다. 보쿠토는 간만에 먹는 부드러운 흰 빵을 우물우물 씹어삼키며 남자의 얼굴을 힐끔 눈에 담았다. 조용조용 빵을 뜯어먹는 자세는 귀족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절도와 기품이 넘쳤다.
“뭔가 할 말이라도?”
눈을 음식에 고정하고 있던 것 같은데, 시선을 알아차렸나? 보쿠토는 당황해서 괜히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 아니. 그냥 오늘 가는 길이 걱정돼어서.”
“그거라면 걱정 마. 길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오오. 그거 믿음직스럽네!”
식사를 마치고 쿠로오가 그릇을 정리하고 짐을 챙기는 동안 보쿠토는 가지고 다니는 손칼로 대충 면도를 했다. 손가락으로 턱을 쓸자 매끈한 감촉에 괜히 전의가 불탄다. 좋아! 이쪽은 준비 만반이라고!
갑옷을 챙겨입고 망토를 걸치자 쿠로오는 붉은 외투를 걸치고 등에 비스듬히 가죽가방을 매었다.
“그거, 숲에 입고 가도 괜찮겠어?”
“응?”
“그 외투 말이야. 비싸보이는데..”
“아아. 걱정 마. 어차피 하나뿐인 외투고, 이럴 때 입지 않으면 언제 입겠어.”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슬리퍼를 벗고 갈색의 가죽 부츠를 신었다. 문단속도 하지 않고 대충 집의 문을 닫아두고 나오는데, 보쿠토는 그걸 보고 괜찮을까 싶었지만 이런 깊은 숲속까지 사람이 올 일이 있을까 싶어 그냥 놔두었다.
“갈까?”
“오옷! 좋아!”
보쿠토의 예상대로 점점 흐릿해지던 오솔길은, 그들이 집을 출발한지 한시간쯤 되자 완전히 흔적이 끊겼다. 길이 나있지 않은 곳을 걷자 몇배로 힘이 드는 느낌이었다.
‘덤불이라도 좀 치면서 걸으면..’
보쿠토가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빼들었다. 스릉하고 날카로운 소리에 쿠로오의 귀가 쫑긋 움직이며 날카롭게 뒤를 돌았다.
“무슨 짓...!?”
“응? 나는 그냥 덤불을 좀 치려고..”
쿠로오는 눈썹을 와락 찌푸리며 비웃듯이 입을 열었다. 괜히 그 얼굴에 보쿠토의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그래서 내 뒤에서 휙휙 칼질을 하겠다?”
“아.. 헉! 미안해! 절대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그럼 내가 앞에 가서 덤불을 칠테니까..!”
확실히 이건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 생각해보니 행군을 할때도 덤불을 치는 건 맨 앞의 녀석이 하는 일이었던가! 보쿠토가 허둥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쿠로오는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올리며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됐네요. 도련님. 그냥 내가 가는 길로만 잘 따라와. 그러고 그런 장검으로 풀 치는거 아냐. 금새 녹슬어 버릴껄?”
또 이름을 부르지 않네. 보쿠토의 볼이 불퉁해졌으나 지은 죄가 있어 뭐라 말도 못했다.
작은 소란 끝에 쿠로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주의 깊게 쿠로오가 발을 디딘 곳으로 움직이자 신기하게 몸이 별로 힘들지 않았다. 봄은 모든 식물들이 기지개를 편다. 이것은 숲속의 식물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뿌리를 아래로 둔 식물들이 위로 줄기를 활짝 뻗으면 잘못해서 뿌리를 밞거나 해서 걷는데 상당히 어려운게 숲길이었는데. 쿠로오는 마치 두서없이 자란 이 덤불들의 안쪽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굉장하네. 아까보다 훨씬 편해졌어.”
“흐응.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여서는 해결하지 못할 일도 있답니다.”
“확실히 그렇군..”
쿠로오 덕분에 걸음걸이에 훨씬 여유가 생긴 덕분에 보쿠토는 그에게 이것 저것 대화를 시도했다. 얼핏 상냥한 성격인데 그는 절대로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대답은 꽤나 상냥해서 대화하기에 나쁜 상대는 아니었다.
“나이가 어떻게 돼?”
“도련님은?”
“보쿠토라고 부르라니까. 나는 스물 세살이야.”
“엑. 그렇게 어리.. 어려 보이는데?”
보쿠토는 내심 쿠로오의 나이가 자신과 비슷할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는 상당히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면도를 해서 그런가? 동안이란 소리에 헤벌쭉 벌어진 얼굴로 보쿠토가 되물었다.
“헤이, 나 진짜 어려 보여?”
“어.. 음.. 다시 보니 제 나이 같아 보이기도 하네.”
“쿠로오는? 나랑 동갑? 아니면 위?”
“동갑.. 이라고 해둘까나.”
“엑. 그게 뭐야?”
“하하. 농담이야. 방년 스물 셋이랍니다.”
그들은 대화를 하다가, 말거리가 끊기면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걸었다. 어느새 해가 중천으로 떠올랐고, 보쿠토가 허리에 매단 물주머니를 세번정도 열어 목을 축였을 때 쿠로오가 살짝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 그럼 여기서 잠깐 쉬었다가 갈까?”
“좋아. 성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이제 금방이야.”
고개를 드니 확실히 성의 지붕이 굉장히 가까워져 있었다. 이 정도라면 수도 외곽성벽에서 광장 중앙의 시계탑까지 거리 정도일까. 허나 그 사이에 놓인 것이 탁 트이고 정리된 도로가 아니라 빽빽한 수해였던 고로 그 둘은 적당한 곳에 주섬주섬 자리를 폈다. 저리 가까워 보이지만 아마 한시간은 더 걸어야 할 것이다.
쿠로오는 가방을 열어 기름종이에 싼 차가운 햄과 겉이 단단한 흰 빵, 그리고 치즈 한덩어리를 꺼냈다. 빵을 반으로 쪼개 햄과 치즈를 끼워넣자 훌륭한 샌드위치가 되었다. 보쿠토는 와구와구 빵을 먹어치우고 입가에 남은 고소한 치즈를 삭 햩았다. 쫄깃하고 선명한 상아색 치즈는 끝맛까지 환상적이었다. 분명 이것도 어느정도 가격이 나가는 식재료일 것이 틀림없다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좋은 것만 먹어온 귀족자제인 보쿠토는 생각했다.
“조금만 마셔.”
쿠로오가 건낸 손바닥보다 작은 가죽 물병을 받아 기울이자 알싸한 알콜향이 풍겼다. 달콤하면서 쌉쓰름한 향기에 슬쩍 병을 기울여 한모금 마시자 목줄기가 짜르르 울릴 정도로 독했지만 맛이 좋았다.
“오! 이거 좋은데!”
“독한 녀석이니까 입가심만 해.”
쿠로오는 이런 곳에서 취하면 버리고 갈꺼에요~ 라고 이죽거렸고 제 주량을 아는 보쿠토는 입맛을 다시며 술병을 다시 쿠로오에게 내밀었다.
그는 두모금 정도 술을 삼킨 뒤 술병을 다시 품에 넣고, 보쿠토가 건네주는 물을 마셨다.
묵직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갑옷의 무게는 익숙했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보쿠토는 어깨와 목을 움직여 대충 스트레칭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갈까나?”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쿠로오는 붉은 외투에 나뭇잎 몇장이 붙었다. 보쿠토는 그 나뭇잎을 정리해 주다가 제 망토나 잘 챙기라는 핀잔을 들었다.
“이제 금방이야.”
“아아. 알고 있어.”
보쿠토는 긴장하며 검의 손잡이를 한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장막처럼 펼쳐져 있던 숲이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낡은 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까악- 까악-
성의 첨탑은 까마귀들의 차지가 된 건지 검은 깃털이 지저분하게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다. 구름 한점 없는 날씨인데도 울려 퍼지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괜히 음산했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여기까지 도움을 받았지만 마법사를 무찌르는 데까지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보쿠토는 쿠로오를 두고 성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무가 아닌 쇠로 만들어진 문은 보쿠토의 키를 훌쩍 넘는 크기였고 녹이 슬었지만 아직 단단했다. 건틀렛을 낀 손으로 문을 두드리자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쾅쾅쾅!
“문을 열어라!”
쾅쾅!
“이 봐! 안에 있는거 다 알고 왔어!!”
“그래봤자 잠긴 문이 풀리진 않을 텐데..?”
한참 뒤에서 보쿠토가 뭘 하려는지 보고 있던 쿠로오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보쿠토는 그렇지만.. 하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순순히 문을 열어주진 않겠지?”
“아니, 내 말은 안에 아무도 없으니까 문을 열어줄 수 없다는 뜻이었어.”
“안에 아무도 없다고!?”
쿠로오의 말에 보쿠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럼 마법사는!? 난 마을 사람들의 부탁을 받고 온건데!?
보쿠토의 옆으로 걸어온 쿠로오는 품 안에서 커다란 놋쇠 열쇠를 꺼냈다. 그 열쇠를 문의 열쇠구멍에 넣고 가볍게 돌리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열렸다.
“에..?”
“자. 이제 말 해도 돼.”
쿠로오는 두 팔로 문을 활짝 열었다. 보쿠토는 정말 아무도 없는지 생활의 흔적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성 안을 쳐다보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쿠로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이 성에서 마법사에게 할 말이란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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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넘죠아ㅠ0ㅠ
뒷내용은 201609냥온, 201701 대운동회때 가져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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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피드백 감사합니다:D!
[URYYYY-!!!! 파츠 워우 B클래스 디스크!! 잘 왔다 멍청이들-!! 오늘 밤, 도쿄 동부의 강자! 네코마에게 도전장을 내민 건 하이웨이 캐논-!!!]
팀 네코마의 배틀 에어리어는 네코마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다섯개의 낙차있는 건물이다.
건물과 건물의 사이가 멀고 발디딤으로 쓸만한 장소가 제한되어있으며 옥상 위도 장애물로 가득 찬, 처음 에어리어를 접한 팀에겐 상당히 까다롭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네코마에겐 익숙한만큼 쉬운 전장이겠지만. 하지만 그런 에어리어에 도전장을 내민 팀도 상당히 유명한 팀이었다.
하이웨이 캐논볼, 도로주행을 즐기는 스피드형 팀이다.
토너먼트에서의 부상 뒤 처음 복귀하는 쿠로오를 노린 앰블럼 배틀로, 세력의 균형이 완벽하게 나뉜 도쿄에서의 간만의 큼직한 배틀이었고, 당연히 전국의 관심이 쏠려 플러그맨의 중계 하에 딥넷에서 배틀이 중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변의 건물로 조그만 화면이 아닌 이 두 눈으로 직접 상위 클래스 라이더의 러닝을 확인해두려는 스톰 라이더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리더의 부상 직후를 노리다니, 계획적이네.”
“전략이지. 몸 상태가 정말 안 좋았다면 리더가 나서진 않을거야. 저 팀엔 ‘전’ 송곳니가 있으니까.”
“하이웨이 캐논도 만만한 팀이 아닌데?”
“그러니까 그 쪽은 네코마팀과는 타입이 다르다니까? 스피드형 캐논볼 팀이잖아, 이쪽은 디스크에선 단 한번도 패배한 적 없는 B클래스라고?”
그 ‘네코마’의 시합인데다, 스피드로는 근방에서 따라올 팀이 없다는 유명 팀의 배틀이었다. 주변에서 난다긴다하는 라이더들이 배틀 에어리어가 잘 보이는 곳에 하나둘씩 자리를 잡아 주변 건물의 옥상이 제법 빼곡해지기 시작했다. 서로 두 팀의 전력을 평가하는 라이더에, 승패를 두고 돈을 거는 라이더, 캠코더를 설치하고 휴대폰으로 각 팀원들의 기록을 리드하는 라이더까지 도쿄 동부권의 라이더들의 모든 신경이 이 배틀에 몰려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네코마 고등학교의 정면, 배틀 에어리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제일가는 명당자리엔 이미 먼저 온 손님이 있었고 그 어떤 라이더들도 그곳에 다가가지 않았다.
“보쿠토씨, 다리 좀 그만 떠세요.”
“으으. 아카아시!”
현재 8개의 길을 가는 8인의 왕중 하나, 굉음의 왕 보쿠토 코타로. 도쿄 동부의 초강자인 그가 있는 곳에 함부로 다가갈 라이더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렇게 살벌하게 섀도우를 피워내니까 아무도 오지 않잖아요.”
“초조한데 어떻게 해!”
초일류급 라이더인 보쿠토가 자신의 배틀도 아닌 남의 배틀에서 신경쇠약에 걸린 것처럼 떠는 이유는 간단했다.
네코마의 리더인 쿠로오 테츠로에게 부상을 입힌것이 바로 본인이었으니까. 라이더를 떠나 서로 절친한 친구사이인 둘이라도 글램 스케일 토너먼트에선 사정 봐주지 않고 싸우는 적이다. 바로 그 배틀에서 보쿠토는 자신의 레갈리아로 쿠로오의 공격을 받아쳐, 라이더에겐 목숨과도 같은 A.T.는 물론이고 전치 4주에 달하는 부상까지 입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보쿠토가 A.T.를 신은 쿠로오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새끼손가락보다 더 작게 보이는 쿠로오의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보쿠토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러그맨의 해설이 매끄럽게 밤하늘을 울렸다.
[파츠 워우 B클래스 디스크! 모르는 얼간이들을 위해 다시 한번 설명한다! 에어리어 안에서 임시로 각 팀의 진지를 정해 디스크를 해당 편의 진지에 가져갈 때마다 1점을 얻어 10점을 먼저 얻으면 승리하는 방식! 단, 디스크를 가져갈 수 있는건 ‘홀더’라는 포지션의 멤버 뿐이며, 상대팀은 ‘현재’ 디스크를 가진 디스크 키퍼만을 공격할 수 있다!]
위험해. 위험해. 쿠로오 부상에서 완치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대쉬도 허들도 아닌 디스크라니!
“완전히 노려지고 있을 거 아냐..!”
보쿠토의 목소리와 함께 배틀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밤하늘을 가르고 울린다.
그 신호와 함께 두 진영의 라이더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켄마가 디스크를 가진 채로 달리기 시작했고 곧 세명의 라이더들이 동시에 켄마를 압박해왔다. 더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은 켄마의 별명이 뭔지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러닝이 막힌 켄마는 디스크를 날려 자신의 머리 위를 날던 쿠로오에게 패스했다. 그러자 마치 그것만을 노린 것처럼 모든 멤버가 쿠로오에게 총 공격을 시도했다.
[하이웨이 캐논-!! 총 공격!! 그러나 이건 비겁한 게 아니라 전략이다!]
“뭐, 흔한 전략이네. 디스크 키퍼를 하나씩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거.”
“먹힐까?”
“나 돈 걸었단 말야-”
라이더들의 평가가 어떻게 엇갈리든, 그 총 공격을 기다렸다는 듯 웃은 쿠로오의 러닝엔 거침이 없었다.
나쁘지 않은 스피드네. 쿠로오는 작게 휘파람을 불며 벽을 박차고 허공에 몸을 띄웠다. 그런데 나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닌가 싶고?
동시에 뻗어오는 하이웨이 캐논 팀의 손아귀에서 마치 순식간에 사라지듯 쿠로오의 몸이 움직였다. 팔을 가볍게 상체를 뒤로 튕겨 피하고, 그 안으로 파고들어 옷깃 하나 스치지 않고 유연하게 빠져나간다. 그림자조차 남지 않는 그의 트릭이 순식간에 다섯명을 제쳤다.
“빠르잖아!?”
“말도 안 돼! 하이웨이 캐논은 최고속도만 200km/hr에 달하는 팀이라고!”
라이더들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떠올랐다. 도심 러닝을 주로 하는 네코마 팀이라고 하지만 스피드로는 전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팀을 일방적으로 따돌리다니!?
[FUCK-!! 시청자들과 관람객, 그리고 상대팀을 우롱하는 ‘대장 고양이’의 러닝! 직선 스피드로는 앞설지 몰라도 온몸의 탄력을 이용한 턴 스피드로는 한수 아래DAA-!!!]
어디로 빠져나갈지 예측이 불가능한 쿠로오의 ‘턴’은 그를 대장 고양이라는 별명을 줄 정도로 유명한 그의 장기 중 하나였다.
유유히 그들 사이를 빠져나간 쿠로오는 다시 포위망을 벗어난 켄마에게 디스크를 넘기고, 첫 1점은 네코마의 여유로운 득점으로 시작했다. 플러그맨의 입담이 제대로 터지기 시작한 것은 딱 그때부터였다.
* * *
10-3, 네코마 팀의 압도적인 우세로 배틀은 종결되었다. 초조한 얼굴로 배틀을 지켜보던 보쿠토의 걱정이 무안할 정도로 깔끔하게 끝난 시합에 보쿠토의 기세가 한층 차분해졌다. 그러나 쿠로오를 내려보는 보쿠토의 초조한 표정에는 불안함이 성에처럼 끼어 있었다.
부상 뒤 AT를 문제없이 타는 쿠로오의 모습을 보고 안심했지만, 쿠로오가 A.T.를 신고 자신을 대면하게 되면.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혀버렸는데.
‘날 피하진 않을까..?’
글램 스케일 토너먼트 이후 하루에 수십번도 더 머리를 채운 질문에 보쿠토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보쿠토는 제가 입힌 부상에 대해 쿠로오에게 사과조차 할 수 없었다. 쿠로오는 토너먼트에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고, 그런 쿠로오를 봐주며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만만한 라이더가 아니었다. 그때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보쿠토는 망설이지 않고 굉음을 쓴다. 그리고 똑같이 시합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어라? 보쿠토, 너 와 있었냐?”
어느새 제 앞의 건물 난간에 사뿐히 착지하는 쿠로오를 발견한 보쿠토가 장대비를 맞은 부엉이처럼 펄쩍 튀어올랐다. 분명 방금 전까지 저 밑에 있었는데 대체 어느새!?
“뭐야. 새대가리 아니랄까봐 월 라이드가 내 특기인것도 까먹었어?”
“새대가리라니 말이 심하잖아! 방금 전까지 저기 있었으면서!!”
“넋을 대체 어디다 빼두고 다니는 거냐? 온다고 말을 했으면 특등석에서 보게 해줬을텐데. 아, 아카아시 오랜만이다.”
난간 위에 쭈그려 앉은 쿠로오가 피식 웃으며 아카아시에게 손을 흔들었다.
할 말이 많지만 말을 못 하겠다는 얼굴로 우물쭈물 쿠로오를 쳐다보는 보쿠토를 한번, 그런 기색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척 하는 대장 고양이를 한번 쳐다본 아카아시가 하..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녕하십니까.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아아. 멀쩡해. 아까 라이딩을 봤을 꺼 아냐.”
“보쿠토씨가 많이 걱정했거든요.”
“아~ 그거야 뭐. 매일같이 병원에 출석도장을 찍었으니까, 잘 알고 있지요.”
그렇게 키득거린 쿠로오가 비죽 웃으며 보쿠토를 힐끔 쳐다봤다. 보쿠토는 아직도 뭐 마려운 새처럼 쿠로오의 행동 하나하나에 과민반응을 하며 놀라고 있었다.
딱 봐도 미안함이 철철 흘러내리는 얼굴이라 슬슬 그만 놀려도 되겠다 싶은 쿠로오가 본론을 먼저 꺼냈다.
“아 맞다. 보낸 파츠들은 잘 받았어.”
“오우! 그래!? 거, 다, 다행이네!! 그럼 지금 이 A.T.도..?”
바뀐 대화 주제가 마음에 드는지 보쿠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쿠로오가 신은 A.T.를 갸웃거리며 자신이 가져온 부품이 들어갔냐는 소리에 쿠로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제스처에 설레던 보쿠토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아니, 이건 원래 가지고 있던 예비 A.T.고 그 부품은 다른데 쓸 껀데.”
“..‘송곳니’를 만드려고?”
파드득대던 보쿠토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네코마 팀의 리더와 전 송곳니의 왕 켄마가 절친한 친구 사이라는 사실은 라이더들 사이에서 비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쿠로오가 기를 쓰고 파츠들을 긁어 모으는 것이 켄마에게 새로운 송곳니의 레갈리아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는 걸 아는 사람은 별 없었다. 보쿠토는 그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고, 그 성격으로 미루어 볼 수 있듯 그 사실을 별로 반기지 않았다.
순식간에 사나워진 보쿠토의 표정에도 쿠로오는 입꼬리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서, 보쿠토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 파츠들은 내가 널 위해서 가져온 것들이야. 송곳니가 아니라.”
“송곳니가 아니라 켄마. 그리고 누가 네가 가져온 거 안 쓴다 그랬냐. 네가 가져온 버그럼으로 새롭게 A.T. 를 짜올리고 있단 말야. 미세조정까지 하려면 아직 일주일은 걸려.”
A.T.의 모터이자 바퀴, 핵심 부품인 버그럼으로 완전히 다른 AT를 만든다는 쿠로오의 말에 보쿠토의 얼굴에 방긋 자신만만한 미소가 지어졌다.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헤이헤이헤이-! 그 부품 진짜 쩔지!? 구하느라 고생했다고!?”
“그렇죠. 엄청 고생하셨죠.(개발팀이)”
“오 그래? 역시 굉음의 왕~ 부엉이 대장~ 오빠 멋져~”
“으-하하하!!!”
쿠로오의 성의없는 호응에도 보쿠토의 코는 하늘을 향해 위로 쭉쭉 올라가고만 있었다. 아아.. 아카아시는 하늘 위 멀게 뜬 달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럼 일주일 뒤에 한번 달릴까!? A.T.를 새로 완성하면 말야!”
“호~? 그거 괜찮지. 그럼 다음주 수요일 어때?”
순식간에 약속을 정한 뒤 쿠로오가 아카아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도 올래? 그렇게 묻는 쿠로오의 물음에 아카아시는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 뒤’라면 보쿠토의 굉음의 레갈리아가 새로운 부품을 정비해 완성되는 날짜다. 그 누구도 아닌 네코마의 쿠로오 테츠로에게 새로운 레갈리아를 선보인다는데 눈치없이 끼어들 수는 없었다.
“저는 선약이 있어서요. 두분 재미난 라이딩 되시길.”
* * *
새로운 A.T.를 타는 것은 새로운 차를 운전하게 된 것 이상으로 새롭다. 쿠로오는 고글에 가려지지 않아 노출된 볼로 세차게 와닿는 바람을 느끼며 가볍게 점프해 건물 위를 날았다. 예전 A.T.에게 미안하지만.. 대체 어떤 부품을 구해다 준 건지 보쿠토의 조력으로 새롭께 짜올린 A.T.는 마치 자신만을 위한 것처럼 딱 맞았다.
수직으로 가파른 벽 위에 가볍게 착지한 쿠로오의 신형이 중력을 거스르고 멈칫 벽에 달라붙듯 수평으로 미끄러졌다. 가이아 로드, 양 바퀴의 회전력에 불균형을 강제로 일으켜 순간적으로 마찰계수를 높이는 기술이었다.
“헤이헤이, 컨디션이 괜찮은가본데!?”
“아아, 누구 덕분에!”
보쿠토가 난간을 디디고 달을 가리듯 크게 점프했다. 관성을 무시하듯 완만한 원을 그리며 떨어져내린 보쿠토의 뒤를 따라 마치 제트기의 연료분사흔적과도 같은 희미한 연기가 남았다.
쿠로오의 앞으로 착지한 보쿠토가 제 앞을 따르라는 듯 망설임없이 점프해 건물을 뛰어넘었다. 그 화려한 러닝 뒤로 쿠로오의 차분한 런이 제 흔적을 덧씌웠다.
“그런데 오늘은 어디로 가는 건데?”
“아아, 이번에 새로 확장된 에어리어! 새로운 A.T.를 탔으니 새로운 길을 달려봐야지!”
마치 아이처럼 신난 그 목소리에 쿠로오가 씩 웃으며 고글을 살짝 위로 들어올렸다.
보쿠토가 향한 곳은 이 근방에서 제일 높은 빌딩의 옥상이었다. 빌딩 층수만 50층, 코타로 그룹이었나 하는 재벌그룹의 빌딩이라 주변엔 발디딤으로 쓸만한 다른 고층건물도 없어 사실 라이딩을 하기엔 그닥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런 빌딩에서 할만한 거라곤.. 월 라이드? 벽타기하려고 설마 여기까지 왔단 말야?
와이어에서 사뿐히 내려앉은 쿠로오는 제 밑으로 보이는 야경을 보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안 그래도 엉망진창으로 뻗친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엉키고 난리가 아니었다.
앞서 옥상에 도착한 보쿠토는 씩 웃으며 쿠로오를 돌아보았다. 배틀에 진입할때나 보이던 그 얼굴이었다.
저 녀석이 그렇게 벽타기를 좋아하던가.. 하고 생각하던 중,
키이잉- 하고 귀로는 들리지도 않는 낮은 초저음의 진동이 쿠로오의 볼을 간질였다.
세찬 바람결에 그것을 감지한 것은 쿠로오가 그 진동에 뼈아프게 당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반보 물러난 쿠로오를 알아챈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어느새 보쿠토의 레갈리아가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너랑 배틀한 뒤로 나도 나름대로 레갈리아를 업그레이드 해 봤거든!?”
“호오..”
“그러니까, 이걸 보여주는 건 네가 처음이야!”
끼익, 하고 한 발로 난간을 세게 밀어 자신의 몸을 활대처럼 긴장시킨 보쿠토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화살이 쏘아지듯 보쿠토의 신형이 위로 튕겨올랐다. 건물 옥상에 매달린 컨트롤 타워의 꼭대기였다.
“보쿠토!?”
한계까지 치솟았던 보쿠토의 신형이 자연스레 아래로 떨어져내린다. 쿠로오가 고글을 턱밑으로 끌어당겨 벗고는 다급하게 보쿠토의 이름을 외쳤다. 웅웅, 잔뜩 긴장한 굉음의 레갈리아가 이내 한계까지 들이마신 공기를 압축해-
굉음의 오버로드가 펼쳐진다. 굉음의 왕이라 불리는 보쿠토 코타로의 트릭이 허공에 거대한 초임계유체의 소용돌이를 피운다. 고도로 압축되어 녹아든 공기가 밤하늘에 농도가 다른 태풍을 소환했다.
그 위로 점프한 보쿠토가 아직도 바짝 얼어있는 쿠로오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날자, 쿠로오.”
그 말에 쿠로오의 몸이 반사적으로 밤하늘을 디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벽’이, 쿠로오의 A.T.에 가벼운 반발력을 선사했다.
이곳에 내가 탈 수 있는 벽이 있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태풍의 눈처럼 원형으로 뿜어진 보쿠토의 ‘기류’가- 하늘에 길을 만들었다.
쿠로오의 눈이 감기고 대신 피부가, 감각이, 그동안 갈고 닦아온 트릭이 쿠로오의 몸을 대신 움직였다.
A.T.와 머리가 닿을 정도로 뒤로 잔뜩 허리를 휘어 긴장한 쿠로오의 몸이 단번에 쭉 튕겨 미끄러진다. 가볍게 발끝을 디디고, 관성에 몸을 맡기고, 그리고 그보다 더 강한 중력에 거슬러 어깨를 튼다. 그의 전신에, 시간이 켜켜히 쌓여 완성된 그의 고도로 정밀한 런은 보쿠토의 길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날았다.
“굉장해..!”
기류의 안이 아닌 위를 타고 미끄러지는 보쿠토의 입에서 끓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내가 만든 ‘길’로 쿠로오가 날고 있어.
아랫배가 꽈악 조여들 정도로 짜릿짜릿했다. 하, 하고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린 보쿠토가 상체를 숙이고 무게 중심을 뒤로 밀어 백덤블링하듯 기류 속으로 파고들었다. 보쿠토의 레갈리아가 다시 한번 울기 시작했다.
자신의 런에 취한 듯 반쯤 감긴 쿠로오의 눈이 몽롱했다. 엄청난 집중력. 보쿠토는 이 쿠로오의 트릭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수십, 수백번이나 같이 달렸던 그 트릭. 보쿠토는 쿠로오의 런 사이로 가볍게 파고들어 쿠로오와 겹칠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트릭을 끼워넣었다. 쿠로오의 시선이 저와 마주치고, 그가 씩 웃으며 보쿠토의 어깨를 가볍게 박차고 몸을 틀었다. 쿠로오의 섀도우가 절로 피어올라 보쿠토의 섀도우, 날개와 엉켜들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과 보쿠토의 레갈리아의 굉음의 귀를 울려서, 마치 밤하늘이 아닌 우주에 몸을 맡긴 것처럼 황홀해진다. 쿠로오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 저기 사람 아냐?”
“건물 위에?”
“아니.. 잘못 봤나? 하늘에 떠 있던 것 같은데..”
“피곤한가보네~”
짧은 비행이 끝났다.
카드득, 하고 벽에 미끄러지듯 흡착해 그대로 박차고 뛰어오른 보쿠토가 개방된 건물의 옥상에 착지했다. 그 옆으로 가볍게 착지한 쿠로오가 쓰러질 듯 휘청이며 상체를 푹 숙였다가 다시 일으켜세웠다.
멍하니 뒤를 돌아 저들이 뛰어내린 고층 빌딩의 옥상을 바라본 쿠로오가, 말도 안된다는 듯 허.. 하고 멍하니 웃었다.
“진짜 날았잖아..”
“어때? 최고지?”
두 팔을 양 허리에 올린 채, 자신만만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 보쿠토의 얼굴에 쿠로오는 평소처럼 농담을 칠 여유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하늘에서의 그 러닝, 트릭, 그리고 황홀하도록 전신을 전율시킨 그 스릴이- 고작 바람을 타고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발을 디뎠을 때의 그 무모한 발돋움을 떠올리자 저절로 온몸이 저릿하게 울렸다.
“응, 진짜, 최고였어.”
그 전율 때문에 나는 스톰 라이더가 된 거겠지.
멍하니 고개를 들어올려 빌딩 꼭대기를 쳐다본 쿠로오가 보쿠토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쿠로오씨는 언제나 솔직하잖아요?”
“아.. 응. 응.”
어째 평상시보다 더 얼빠진 대답이었지만 쿠로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늘어뜨렸다. 평소와 같은 성격 나쁜 웃음이 아니라, 정말 즐거워서 못 견디겠다는 웃음이.. 처음 보는 얼굴 같아서.
보쿠토는 멍하니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쿠로오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졌을 때에야 간신히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쿠로오와 같이 달릴 때랑 비슷한 기분. 어째 고양되기 시작한 가슴 위를 꾹 누르며, 보쿠토는 다시 쿠로오의 뒤에서 A.T.의 휠을 공회전시켰다.
카가각-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쿠로오의 주위가 단번에 보쿠토에게 향했다.
“몸 제대로 풀었으면, 다시 달릴까?”
보쿠토의 말에 쿠로오는 어째 감상에 빠질 시간도 주지 않는다며 투덜거리고는 곧장 보쿠토의 뒤를 따랐다.
곧 두 밤의 포식자가 하늘 위로 자신의 트릭을 새긴다.
평소와 같은 밤이었다.
썰로 풀땐 그냥 달렸다< 이러면 되는데 묘사 시발..이네여....(마른세수
역시 책은 무리고 보고싶은 장면 써봤어요ㅜㅜㅜㅜㅠㅠㅠㅠ 근본업는 에어기어 au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ㄴㅣ다ㅠㅠ♡
+ 앞부분 살짝 수정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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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약이라곤 씹사약밖에 없다는 크로스오버... 너무 맛잇네여...(냠냠념념
요즘 쿠로오, 뭔가 변했어. 본인도 모르는 작은 변화를 어찌 눈치챘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은 없다.
쿠로른 전력 60분 변화, 변질
받아든 수건으로 턱아래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고 보쿠토는 슬쩍 쿠로오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또다. 피식 웃는 쿠로오의 시선은 손에 쥔 휴대전화에 고정되어 있었다.
흐으음?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갸웃 기울였다. 연습 중 휴대전화를 많이 만지는 편이라 물으면 보쿠토의 대답은 아니오, 다. 아예 탈의실 캐비닛에 휴대전화까지 처박아놓는 편이고 그건 쿠로오도 마찬가지다. 아니, 분명 마찬가지인 줄 알았는데..
“주장, 이번엔 우리 팀이 스코어야.”
요즘 휴대전화 자주 만지네?
네 학교, 아니 다섯학교가 합세한 이번 합동연습은 네 팀이 게임을 할 동안 다른 한 학교는 그 학교들의 스코어나 주변정리를 돕는 식이다. 보쿠토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팔 위에 입고 있던 조끼를 벗었다.
“카라스노는 또 페널티~?”
“상대할땐 묘하게 까다롭지만 결정적인 뭔가는 없는 느낌이지?”
코트 위를 양보하고 수분보충을 하면서 코트의 네트를 점검한다. 패배한 팀이 플라잉 코트로 체육관을 반 정도 돌았을 때 쯤이었다. 보쿠토는 옆에서 들려오는 부원들의 목소리를 다른 쪽 귓구멍으로 질질 흘리면서 쿠로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쿠로오가 재미난 농담을 듣기라도 한 건지 입을 벌리고 고개를 젖혀 크게 웃고 있었다.
쿠로오 변했어. 웃는 모습도, 뭔가 예전하고 달라.
보쿠토는 제 옆에서 카라스노의 벌칙을 구경하던 아카아시의 팔을 툭 쳤다. 저기 있잖아.
“요새 쿠로오 뭔가 변하지 않았어?”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엑, 그래??”
그렇게 크게 놀라놓고서는,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데요? 라고 묻는 아카아시의 물음에는 그냥.. 이것저것 바뀌었잖아? 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소리밖엔 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자주 만지고, 자주 웃고, 그리고 웃는 모습이 예전하고 묘하게 달라졌는데. 그걸 또 어떻게 달라졌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고 말이지.
*
모처럼 연습이 없는 주말에 보쿠토는 꽤 이른 시각부터 집을 나섰다. 집에서 삼십분 거리, 도쿄역에 가까운 커다란 메가플렉스 쇼핑몰이 새로 생겼는데 스포츠웨어 가게들이 아울렛처럼 크게 입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덕이었다. 부원 몇몇과 함께 새 배구화를 보러 갈 생각에 잔뜩 들뜬 보쿠토는 문득 가보고 괜찮으면 쿠로오와 다시 오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런데 왜 오늘이 아니라 다음이지?
반사적으로 떠오른 질문에는 곧 자연스레 그 대답이 뒤따랐다.
그야, 내가 리드하는 편이 멋지니까?
어째서 쿠로오에게 멋지게 보여야 하는지- 라던가, 그런 의문은 채 머릿속에 떠오를 새가 없었다. 거기 괜찮은 식당도 있으려나? 어느새 쿠로오와 거기 가서 밥도 먹고 쇼핑도 하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만 몽실몽실 떠올랐다.
약속장소에 제일 먼저 도착해 있던 것은 아카아시였다. 코노하와 와시오는 약속시간에 조금 늦었고 대신 그 둘이 밥을 사기로 했다. 어차피 점심시간이 되려면 두시간도 더 남았고, 신발을 둘러볼 시간은 충분했기 때문에 보쿠토는 제법 느긋한 걸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식스 여기 들어가볼까?”
“20%할인중이래. 가보자!”
어차피 최신 디자인은 할인품목 제외 아닌가? 보쿠토는 현재 자신의 배구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
들어가보지 뭐. 가게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보쿠토가 입구에 커다랗게 걸린 거울에 시선을 슥 옮긴 순간이었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에서 홱 하고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급히 뒤를 돌아보는 보쿠토의 행동에 아카아시가 저도 모르게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깜짝 놀랐잖아요. 뭡니까?”
“저거 쿠로오 아냐?”
“예?”
“맞는 것 같아.”
안 들어오고 뭐 하냐며 가게 안에서 저를 돌아보는 코노하에게 뭐라 얘기할 틈도 없이 보쿠토는 쌩하니 달려나갔다. 미처 아카아시가 아닌 것 같은데요! 라던가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라고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운동화, 보고 계세요.”
저 녀석 어디 가냐는 표정으로 보쿠토의 등을 쳐다보던 코노하에게 대충 그렇게 말하고는 아카아시는 벌써 저 멀리 뛰쳐나간 보쿠토의 뒤를 따랐다. 그 걸음걸이마다 진한 한숨이 묻어나오는 것만 같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쿠토의 입가엔 히죽 웃음이 걸렸다. 거 봐! 역시 쿠로오 맞잖아?
저 비죽비죽한 머리도 그렇고, 뭣보다 내가 쿠로오를 못 알아볼 리 없지!
쿠로오는 기둥에 등을 기대어 서 있었는데, 하필 보쿠토에게 등을 보인 위치였다. 일부러 뛰던 발걸음을 멈추고 흠흠 숨을 가다듬은 보쿠토는 이내 여! 하고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쿠로오!”
너는 웃을까? 아니면 놀랄까? 어떻게 주말까지 얼굴을 보냐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을까? 곧 볼 표정인데 그 얼굴을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것만으로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걸렸다.
제 목소리를 들은 건지 어깨가 움찔 하며 쿠로오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사실 그리 천천히 돌린건 아닌 것 같은데. 분명 쿠로오는 평범하게 뒤를 돌아보았을 뿐인데.
마치 네트 너머로 스파이크의 궤적을 쫓을 때처럼 쿠로오의 머리카락 하나 하나가 선명하게 박혀들어왔다.
늘 반쯤 내리깐 채였던 눈꺼풀이 곱게도 접혔다. 블로킹에 성공한 뒤에 좋다고 웃던 그 입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입술이 꽃잎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제 눈 깜빡이는 것도 잊고 보쿠토는 멍하니 그런 쿠로오의 얼굴에 넋을 빼앗겼다.
와.
이건.
쿠로오는 이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키세?”
처음 듣는 이름과 함께 뒤를 돌아본 쿠로오의 표정이 금새 당혹감에 물들었다. 마치 방금 전의 웃음이 착각인것만 같아서 보쿠토는 손등으로 눈꺼풀을 비볐다.
어라. 내가 뭔가 잘못 봤나. 이거 아무리 봐도 평소의 쿠로오인데.
“보쿠토? 뭐야 너였냐. 여긴 왠일이래?”
“아, 부원들하고 신발보러 왔는데 네가 있길래. 혼자야?”
“여길 혼자 왔겠냐~”
“쿠로씨 지금 훌륭하게 혼자 아닙니까? 그렇게 부끄러워 할 것 없는데~”
“진짜야. 아쉽지만 선약이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 올린 쿠로오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뭐야. 내가 반갑지도 않은가? 괜히 툴툴대고 싶은 마음에 입술을 비죽 내미는데 쿠로오의 뒷통수 옆으로 왠 처음 보는 남자의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쿠로오와 마주보고 있던 탓에 그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보쿠토는 스냅백에 선글라스까지 챙겨쓴 그 남자가 렌즈 너머로 자신에게 찡긋 윙크를 하는 것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곧 그 표정은 남자가 두 손으로 쿠로오의 눈을 가리고 그 귓가에 속삭이는 걸 본 순간 딱딱하게 굳고 말았지만.
“누구게요?”
“풋, 재밌습니까? 키세 군?”
쿠로오는 그 장난이 익숙한지 손을 올려 눈을 가린 손을 떼려고 하지도 않고 피식 웃었다.
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입매와 턱선이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수려한 남자였다. 모자 아래로 비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은 심지어 반짝이는 금발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키도 쿠로오보다 약간 더 크고... 무, 물론 나도 아직 성장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남자는 쿠로오의 귓가에 키득거린 웃음을 남기곤 다시 보쿠토와 눈을 마주쳐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안녕하심까, 키세 료타라고 함다. 쿠로상 친구?”
“어어. 나는 보쿠토 코타로. 쿠로오, 여기는..”
“쿠로상 친구면 3학년이시겠네여! 혹시 배구 하심까?”
“응. 맞는데-”
“내가 말했잖아. 늘 연습 같이한다는 타교의.”
“아아! 그 에이스 스파이커! 얘기 많이 들었슴다!”
쿠로오가 내 얘기를 했다고? 괜히 그 한마디에 보쿠토의 입가가 헤실 풀어졌다.
남자는 꽤 호들갑스럽게 보쿠토와 악수까지 끝내고는 쿠로오의 어깨에 제 팔을 걸쳤다. 어깨동무라도 하는 과장된 동작에 쿠로오가 아 무겁다니까, 짜증을 내면서도 그의 팔을 치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뭐, 그럼 다음 연습때 보자. 먼저 간다.”
“어, 응? 갈꺼야?”
“너도 일행 있잖아?”
나 그 일행 버리고 너한테 온건데. 보쿠토가 망연한 표정으로 가볍게 말하는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그, 그런데 누구야? 그.. 키세라고 했던가? 친구?”
친구냐는 물음에 남자의 입가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빡칠 정도로 잘생겨서 괜히 속이 안 좋았다. 뒤로 타박, 하고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보쿠토는 돌아보지 않고서도 그게 아카아시의 발소리란걸 알아챘다.
“친한 후배야. 어라? 아카아시도 있었네.”
“안녕하세요.”
“쿠로상, 지금 안 가면 늦겠슴다.”
“아. 이런. 벌써 시간이.. 그럼 너희도 재밌게 놀아. 간다?”
남자의 재촉에 쿠로오는 휴대폰 액정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봐요. 가볍게 대답하는 아카아시와 달리 보쿠토는 조금 넋을 뺀 것처럼 손을 마주 흔들었다.
가죠. 아카아시가 가볍게 돌아섰지만 보쿠토는 그 자리에 누군가 시멘트를 부어두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쿠로오의 어깨를 두르던 남자는 그 둘이 손가락만하게 작아졌을 때 어깨를 풀고 쿠로오의 손을 잡았다. 어깨를 닿을 것처럼 가까이 한 채, 쿠로오는 얌전히 그의 손에 제 손을 마주잡고 걸었다. 보쿠토는 쿠로오의 손을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다. 배구연습에 거칠어진 손등과 길쭉한 손가락. 손톱은 늘 짧고 손등엔 보기 좋게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저도 쿠로오의 손을 저것처럼 마주잡아본 적은 없었다.
“안 갑니까? 선배들이 기다려요.”
쿠로오가 변한 건 저 사람 때문일까. 그 문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선득해졌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어쩐지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울렁거려서, 그리고 방금 전 본 쿠로오의 웃는 모습이 어째선지 지워지질 않아서.
보쿠토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더랜다.
평소랑 똑같이 웃는 쿠로오인데 보쿠토만 그게 변했다고 느꼈으면 그건 쿠로오가 아니라 보쿠토가 변한 건데..
라는 식으로 쓰려고 했는데 아 보쿠토 side너무어렵당..(이라고 삿된 변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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