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 보쿠토 x 갬블러 쿠로오
※ 조직폭력배의 묘사는 상상에 기반한 것으로 폭력 등이 상당부분 미화될 수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꽤 쌀쌀하네.’
얇은 외투를 여미며 쿠로오는 싸늘한 추위에 눈살을 찌푸렸다. 적도에 가까운 도시라 한겨울이 되어도 온도가 영상 십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건만은, 평생을 이 도시에서 살아온 쿠로오에게 있어 그 정도의 온도는 혹독한 추위나 다름없었다.
푸엣취, 하고 작게 재채기를 한 쿠로오는 소름이 돋는지 양 팔을 손으로 문지르며 슬쩍 겨드랑이께에 얌전히 숨겨진 나이프를 확인하고 속으로 안도했다.
자신의 것과 미묘하게 박자가 어긋나는 발자국이 뒤를 꾸준히 밟고 있다.
도박판에서 적당히 감을 살리고 땄던 칩을 죄다 허공에 뿌리고 오는 길이었다. 수확이라곤 고작 페르난도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던져준 이백 달러정도일까, 천불짜리 칩 오십개를 가지고 있던 것에 비하면 푼돈인데 제길, 설마 그거 먹었다고 쫓아오는 건 아니겠지.
불길하게도 오늘따라 대로변엔 사람이 없었다. 그 흔한 길바닥의 노숙자들조차 보이지 않고, 뒤를 밟는 발자국은 점점 대담해지고 있었다.
‘젠장, 젠장.’
쿠로오의 등 뒤로 차가운 식은땀이 맺혔다. 맞은편에서 험악한 인상의 덩치가 쿠로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원래 가려던 길이었다는 듯 자연스레 발걸음을 꺾어 골목으로 파고든 쿠로오의 걸음이 멈칫했다.
당했다. 짧은 골목 앞으로 높이가 2미터는 되는 벽이 개미 한마리 빠져나갈 틈 없이 웅장하게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쿠로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뒤에서 여러개의 발자국이 일시에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쿠로오는 지금만큼 베개 아래 두고 온 베레타가 절실해진 적이 없었다.
카지노에 총기 반입이 금지되지만 않았어도, 젠장!
이를 질끈 깨문 쿠로오는 천천히 양 팔을 들어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뒤를 돌았다.
아아 역시나.. 쿠로오를 위협하듯 선 것은 방금 전의 그 덩치와 제대로 각잡힌 정장을 입은 남자 둘까지 총 셋이었다.
어디지? 바로 저번에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 마피아? 아니면 카르텔? 눈동자를 돌돌 굴린 쿠로오는 양복입은 남자가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 순간 발작적으로 외쳤다. 남자가 입을 연 것과 거의 동시였다.
“지갑, 지갑은 뒷주머니에 있어요! 현금으로 이백불!”
“네가 그 쿠로오란 녀석이냐?”
하지만 돌아온 것은 자비없이 주머니를 뒤지는 손길 대신 굵직한 목소리다. 쿠로오는 아 망했다, 싶은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카지노에서 왔구나!
쿠로오는 필사적으로 오늘 제가 놀았던 도박장의 원 주인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냈다.
부엉이회. 본명은 후쿠로우다니라는 이름이었지만 그 혀 꼬이는 이름보단 간단한 별명으로 더 잘 불리는 곳이었다. 본토 흑사회의 한 분파인데, 요 몇 년간 시칠리아의 전통있는 마약쟁이들과 전쟁을 치뤘다. 모를 리가 없지. 아주 살벌하게 치고 박아준 덕분에 도시 밖을 떠날 때를 놓쳐 몇 년을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한쪽이 흑사회라 해도 이름없는 분파에, 상대는 200년 역사의 거대 조직이었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몇년간의 끈질긴 전쟁의 결과는 놀랍게도 코로나 우니타-시칠리아 마피아의 한 줄기였다-의 완패였다. 시칠리아의 갱들은 흩어져 다른 중소 조직들에게 야금야금 먹혔고, 부엉이회도 조직의 보스를 갈아치우는 등 꽤 큰 진통이 있었다고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양호했다.
부엉이회는 코로나가 관리하던 도시의 노른자위 세력을 쏙쏙 골라먹고 무섭게 세력을 굳혀 이제는 시카고 갱과 콜롬비아 카르텔, 러시아의 레드 마피아 계열인 레온 코프네츠키와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한 세력으로 발돋움했다.
그럼 이 사람들은, 부엉이회에서 온 사람들일까 아니면 그 밑에서 도박장을 관리하는 중견 조직원들일 것일까. 궁금해서 입이 바짝바짝 말랐지만 죽고 싶진 않으니 함부로 질문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 쿠로오는 안대로 눈이 가려진 채 양 팔을 떡대에게 잡혀 차의 뒷자석에 구겨지듯 내팽개쳐졌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닌가.’
쿠로오는 차 안에서 찬찬히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었다. 일단 두들겨 맞고 팔다리가 묶인 채 트렁크에 갖히지 않은 것만으로 상황은 희망적이었다.
어림잡아 도시를 삼십분쯤 달렸을까.. 적당히 도시 외곽에 도착했겠다 싶은 순간 차의 속도가 느릿하게 변해 서행하기 시작했다. 삐빅 하는 전자음과 두런거리는 말소리를 들어보면 누군가의 사유지에 들어선 것 같았다.
마침내 천천히 굴러가던 차가 멈추고, 자동차의 문이 달칵 열리며 곧 쿠로오의 팔이 우악스럽게 끌려나갔다. 안대 안에서 인상을 팍 썼지만 입은 꾹 다문다. 시야가 가려져 발밑에 무언가 장애물이 있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하지만 쿠로오의 팔을 잡아 끄는 남자는 그런 쿠로오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어딘가로 이동했다.
‘직선, 아니 약간 사선으로 열둘.. 열 세걸음 뒤의 엘레베이터.. 그리고 2층 위로.’
콧잔등까지 단단히 가려져 바닥의 무늬도 보이지 않건만 쿠로오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마침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쿠로오는 목적지로 느껴지는 어떤 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
‘......’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복도의 찬 공기와는 다른 묘하게 따뜻한 온도에, 빨래 세제보다 더 자연스러운 어떤 향긋한 향기, 딱딱하지 않고 푹신한 바닥. 그리고 어떤 존재감이 있었다.
쿠로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엉거주춤 몸을 사렸다.
‘무서운데..’
아~ 주 감이 좋지 않았다.
쿠로오의 발걸음이 멈추자 쿠로오를 이리로 데려온 남자는, 의자에 쿠로오를 거의 끌어다시피 앉히고 그대로 방문을 열어 문을 나섰다. 뭐, 뭐야? 갑자기 왜 나가? 여긴 대체 어딘데!?
당황한 쿠로오는 어쩔 줄 모르면서도 안대를 벗을 수 없었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느껴지는 ‘상대방’ 이, 안대를 벗어도 좋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왜 안대를 벗지 않죠?”
상대방의 목소리는 의외로 어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정중하다. 쿠로오는 당황으로 한박자 느려진 대답을 어색하게 내뱉었다.
“..안대를 벗어도 되는 건가, 해서요.”
“편한대로 하세요.”
흔쾌히 나온 승낙의 말에 쿠로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안대를 끌어내렸다.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정면의 남자였다. 생각보다 남자와의 거리는 멀었는데, 쿠로오의 맞은편에 있는 꽤 넓은 책상과 뒤로 앉아 있었다.
짧은 곱슬머리에 푸른 눈, 귀공자처럼 흰 피부.
순식간에 남자의 정체를 유추한 쿠로오는 속으로 침음성을 삼키며 즉시 눈을 내리깔았다.
식은땀이 맺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듣던데로 신중한 성격인 모양이군요. 저는 아카아시 케이지라고합니다.”
“아, 예. 쿠로오 테츠로입니다.”
제길, 내 착각이길 바랬는데!!
쿠로오는 속으로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대체 뭣 때문에 부엉이회의 이인자가 자기 앞에 나선단 말인가. 고작 이백달러로 이런 시련을 겪기엔 인생이 너무 잔혹하지 않은가.
아직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는데 과민반응이다 싶을수도 있지만, 이 도시에서 근 이십년을 살아온 쿠로오로써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호환 마마나 노상강도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이 도시에서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돈이면 돈, 주먹이면 주먹, 권력이면 권력. 총이 곧 법인 그들에서 사람 한 명이 가지는 값어치란 비슷한 무게의 돼지고기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부엉이회는 최근까지 시칠리아와 전쟁을 했고.. 뒷골목에 사는 쿠로오는 총알이 사람 몸에 박히는 소리와 사람 무게의 고깃덩이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는 질리도록 많이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게 다 저 미끈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지휘한 일이었다.
“갑작스레 이쪽으로 부르게 되어 놀랄거라 생각했는데, 꽤 침착하시군요.”
“예? 아뇨, 아니요.. 정말 놀랐습니다.”
고개를 흠칫 들어올리며 말을 잇자 아카아시가 관심 없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고맙게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밤이 늦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그 말이 어찌나 반갑던지 하마터면 감사합니다! 하고 외칠 뻔 했다. 본론으로 들어가 이만 죽어주시죠 같은 말만 나오지 않는다면, 쿠로오로써는 이 상황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다음에 나올 말이 어느 정도 예상되기도 하고.
‘아마, 스카우트 같은 거겠지.’
도박사에게 조직이 원하는 건 사실 하나 뿐이다. 적당히 도박판에 바람을 넣고, 바깥으로 나가는 돈을 최대한 줄이는 것. 그 과정에서 카지노 차원의 조작이 가해졌다간 도시 전체에서 지탄을 받을 테니 실력이 좋은 갬블러를 이용해 칩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고작 도박장 관리를 부엉이회 이인자가 직접 하는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순식간에 머리를 회전시킨 쿠로오가 방금 전보다 여유가 생긴 얼굴로 약하게 숨을 내쉬었다.
스카우트가 들어오면 일단 죄송하다고 머리박아 사죄한 다음에, 내 특이한 버릇 때문에 칩을 오래 가지고 있지 못한다고 말하자. 어차피 주 무대는 인터넷상의 카지노이기 때문에 여차하면 손가락 하나.. 아니 두 개 정도는 내놓고 가도..
“당신이 가르쳐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죄송.. 네?”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올리며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쿠로오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서랍 안에서 빳빳한 종이 한장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리고 연한 노랑빛의 서류봉투를 그 위에 겹쳤다.
“쿠로오 테츠로 21세.. 오년 전부터 카지노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고요.”
“......”
“듣자 하니 실력은 괜찮은데 다른 조직 아래 들어가지 않았더군요.”
“아니, 그, 저는.. 블랙 캣인데요..?”
그 짧은 단어 하나에 쿠로오가 하고 싶은 말이 함축되어 있었다. 제대로 칩을 지켜내지도 못하는 도박사에게 대체 뭘 배운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런 쿠로오를 꿰뚫어보듯 아카아시의 푸른 눈이 지긋이 그를 응시한다.
“과거도 깨끗하고, 두말하지 않겠습니다. 업계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지요.”
가벼운 손짓에 쿠로오 앞의 응접실 테이블 위로 노란 서류봉투가 툭 떨어졌다.
쿠로오는 감히 그 봉투 안을 꺼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그러니까... 도박꾼으로써 바람잡이를 하라는게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치라고? 후진 양성을 하라는 뜻인가? 아니 그런 일을 뜬금없이 외부인에게 맡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 않다. 마피아와 이렇게 얼렁뚱땅 엮이게 되다니, 쉽게 승낙했다가는 뼈저리게 후회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쿠로오는 최대한 부드럽게 거절의 말을 꺼냈다.
“실례지만, 부엉이 회에는 저보다 훨씬 실력 좋은 분들이 많지 않은가요? 제가 누굴 가르치거나 도박으로 먹고 살 정도는 아닌지라..”
“오늘 첫번째 판의 뿔테 안경 대머리, 그리고 세번째 판의 붉은머리 남자. 둘 다 부엉이회 아래의 도박꾼들입니다만. 그 두 사람 모두 당신의 실력을 인정하더군요.”
‘젠장할.’
아카아시가 말하는 저 두 사람 다 기억이 난다. 어쩐지 실력이 범상치 않더라니, 둘 다 프로였을 줄이야. 쿠로오 자신이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지라 한쪽은 폴드와 올인으로 살살 흔들어 털어먹고 한쪽은 A, 2, 3, 6을 쥔 상태에서 블러핑으로 넘어뜨렸다.
반쯤은 운이었는데, 그때 땄던 칩의 무게가 이렇게 되돌아오다니.
이쯤 되니 더 거절하기도 무서워졌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 도시를 무사히 뜨려면 부엉이회와의 연줄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쿠로오가 고민한 시간은 짧지 않았지만 그 시간동안 아카아시는 재촉 한번 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기다렸다.
“제가 가르칠 사람은 몇 명입니까?”
“한명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 원하시죠?”
“배울 사람은 아예 포커를 모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룰부터 가르쳐서, 적당히 속임수를 파악하고 족보를 아는 수준이면 됩니다.”
“......?”
쿠로오는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건 그냥 일반인 교양수준 아닌가?
그런 걸 왜 부엉이회의 이인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서서,
‘헉.’
잠깐만. 저 사람이 나섰다는 건.. 그 학생이란게..?
“서, 설마..”
갑자기 안색이 퍼렇게 질린 쿠로오의 얼굴을 본 아카아시는 훗, 하고 웃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당신, 처음부터 생각한 거지만 정말 눈치가 빠르군요.”
“설마.. 제가 가르칠 사람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아카아시의 구둣발 소리가 천둥보다 더 크게 들렸다. 곧 쿠로오가 앉은 카펫 위로 이동하며 자박거리는 아카아시의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와 쿠로오 맞은편 소파에 깊게 등을 묻고 앉는 푹신한 사운드를 마지막으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스에게 고작 카드놀음이나 가르치면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나대기 시작하는 쓰레기들이 많았죠.”
“.......”
“어설프게 이쪽 물을 먹어서 아주 건방져서..”
“그, 그렇군요.”
“실력이 좋으면서도 이쪽에 발 들이지 않은 도박꾼을 찾기 꽤 어려웠습니다만..”
비취빛 눈동자에 비친 스산한 살기에 쿠로오는 속으로 와들와들 떨며 주기도문을 읊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말은 살려주세요 대신 보기 좋게 혀로 잘 굴린 단어뿐이었다.
“맡겨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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