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서는 문 밖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마슈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귓가 근처에서 말하고 있는데 미동도 없는 게, 간밤에 애를 쓰긴 했는지 완전히 곯아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마스터는 마스터지. 영령씩이나 되는 남자가 고작 그거 같다가 엄살 부리는 꼴은 못 보는 성격의 랜서는 아처의 어깨를 몇 번 흔들다가 이내 손을 들었다.
철썩철썩, 요령 좋은 손바닥이 침대 위에 누운 남자의 볼을 두어번 후려쳤다. 그 충격에 드디어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올린 남자는 윽, 하고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두통의 이유를 짐작하는 랜서는 혀를 쯧쯧 차며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게 어제 엄청나게 마셔대더라니.”
평소라면 니나 잘하라는 식으로 신랄한 반격이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쳐는 아직도 잠이 덜 깬 얼굴로 멍하니 눈만 끔벅이고 있을 뿐이었다. 칼데아에서는 물론이고 이전의 기억을 통틀어서도 본 적이 없는 얼간이같은 표정이라, 랜서는 순간 어떤 가정이 불쑥 떠올랐다.
혹시 어제 내가 마력을 지나치게 끌어가버린 건가?
접촉해서 마력회로나 확인해볼까 하고 상체를 가까이 붙이고 손을 이마로 뻗었다. 그러나 아처는 마력회로의 스파크가 아닌 이불 밖으로 노출된 랜서의 상체에 반응하며 찬물 맞은 고양이처럼 앉은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랜서는 자신의 손길에 격렬하게 거부반응을 보이는 아처의 모습을 요상하게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팔을 거두었다.
“일어났으면 슬슬 나가보지 그래? 마스터가 애타게 찾고 있던데.”
상체를 일으켠 김에 쭈욱 기지개를 펴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전날 밤의 격렬한 운동은 신체에 나른한 근육통을 남겼다. 젖꼭지가 욱씬거리고 엉덩이가 좀 아리긴 해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처는 랜서가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불을 붙일 때까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자유롭게 풀어헤쳐진 푸른 머리칼 사이 흰 등에 남겨진 잇자국이나 엉덩이에 우악스레 남겨진 손자국 등을 천천히 눈으로 흩었다.
부스스한 흰색 머리칼 밑의 눈을 몇 번 끔벅거리자 점차 눈빛에 이성이 침착하게 자리잡기 시작한다.
‘무슨..?’
자신의 방, 자신의 침상 위에 누워 알몸으로 자신을 깨운 랜서. 천둥의 신이 망치로 정수리를 연신 두들겨대는 듯한 두통과 달리 묘하게 개운한 몸 상태. 당연하지만 본인도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고 시트는 수상한 액체로 축축해져 있는데, 그것이 랜서의 허벅지 사이에 말라붙은 것과 같은 성분이라는 것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확실했다. 무엇보다 자신 앞에서 무방비하게 알몸을 드러내고도 몸을 가릴 생각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마치,
‘설마...?’
내가 그와 간밤에 선을 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랜서. 어젯밤엔 대체..”
사실에 입각한 추론이지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거대한 진실의 파편에 상황에 아쳐는 허스키한 말의 조각을 간신히 하나씩 뱉어냈다. 랜서를 부르자 침대 옆에 서서 몸을 풀던 그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게 느껴졌지만 아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차마 그를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었다.
저 흰 피부에 새겨진 정사의 흔적이 아주 난리도 아니라, 저것을 남긴 것이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어떤 미치광이가 사람을 저렇게까지 물고 씹었냐고 혀를 찼을 것이다..
그러나 랜서는 아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툭 내뱉었다. 영향력으로 따지면 머릿속에 수류탄을 하나 까 넣은 것과 비슷한 충격량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이름으로는 안 부르기로 한 거냐?”
“뭐?”
“어제, 앞으로는 이름으로 부르겠다며. 뭐 잘만 부르더만. 쿠 훌린, 쿠 훌린 하고.”
“......!?”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어 랜서를 바라보았다. 간밤에 자신은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소릴 지껄인건가!?
당황스러움이 지나쳐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뭐.. 무슨.. 따위의 소리만 더듬더듬 중얼거리고 있자니 남은 담배 연기를 훅 내뱉고 남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끈 랜서가 다시 침상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의 안색을 살피듯 빤히 이쪽을 살피는 창병의 얼굴은 익숙하지만,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는 익숙치 않았다. 그는 훗, 하고 웃더니 오른손으로 아쳐의 등을 팡! 하고 크게 쳤다. 손바닥에 공기를 넣었는지 전해지는 충격보다는 큰 소리가 났다.
“어제 한 얘기 때문에 그러냐? 걱정 마, 아주 좋았으니까!”
“좋, 좋았다고..!?”
“그래. 엉덩이랑 허리가 좀 쑤시긴 하지만 뭐, 뒤로 해서 그렇게 느끼기 쉽지 않은데.. 제법이드만?”
적나라한 단어에 아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얼굴만 시뻘겋게 물들인 채 랜서가 한 말만 입으로 중얼거렸다. 좋았다니.. 그럼 간밤에 자신은 랜서를 충분히 만족시켰다는,
‘아니, 이게 아니지!’
왜 갑자기 기둥서방같은 마인드가 되어버린 건가!
애초에 자신이 그와 섹스했다고 해서 꼭 그가 좋, 좋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이왕이면.’
좋아해주는 쪽이 물론 좋을 테지만. 일부러 의식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던 어떤 생각의 실마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희고 단정한 이마와 곧은 콧날. 짙은 푸른색 눈썹 아래 루비보다 붉고 투명한 눈동자가 지척이었다. 능글맞게 웃고 있지만 저 얼굴이 어젯밤엔 만족스럽게 일그러졌을거라고 생각하니 그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아쳐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의아한지 랜서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이야? 잠깐. 설마, 너.”
“왜 그러지?”
“어젯 밤, 기억 안 나냐?”
아처는 그 말에 유연히 반응하지 못하고 멈칫, 숨을 삼켰다.
뭐라고 해야 하지. 기억은 안 나지만 좋았다? 드문드문 기억이 없다..? 그가 고민한 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랜서는 아쳐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랬군.”
“잠깐만, 랜, 쿠 훌린!”
황급히 그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누군가가 머리를 맥주병으로 내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시야가 핑글 돌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손으로 이마를 짚는 사이 마력으로 푸른 갑주를 소환한 랜서가 손을 뒤로 모아 머리칼을 정리했다. 달칵 소리와 함께 평소처럼 한데 묶은 머리를 한 채로, 랜서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아, 아까 내가 말했던건 잊어 주라.”
“뭐? 무슨 소리를..!”
벌떡 일어난 아쳐가 알몸으로 뛰쳐나오기 전에 랜서는 가볍게 출입문 버튼을 터치해 밖으로 걸어나갔다. 복도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반대편 귀를 통해 모래처럼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아쳐는 이게 꿈이라면 지금 당장 깨어나고 싶다는 얼굴로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눈을 뜨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놀람의 연속이었지만 지금처럼 박탈감이 느껴지는 상황이 닥칠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자신은 간밤에 무슨 짓을 한 건가?
무슨 짓을 했길래 아일랜드의 대영웅과 밤을 보내고 그 기억을 어디에 버려두었단 말인가.
방금 전만 해도 어젯밤의 기억이 없는 게 안타까운 정도였지만, 이제는 그 기억이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너무 아침드라마 도입부처럼 시작하는것같군요,,,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정도는 전체공개해도 되겠죠?(흠티콘
7월 오락관에 나갈것 같아서 티스토리에는 중반까지 공개될 예정이고 제목은 바뀔지도모릅니다..
재미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랜서가 아쳐의 목에 양 팔을 걸고 살짝 끌어당겼다. 그는 조금 당황하나 싶더니 순순히 랜서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앞으로 숙여 입술을 겹쳤다. 콧날을 살짝 옆으로 틀고는 자연스럽게 혀를 안으로 집어넣어 진하게 키스를 하는데, 랜서는 아쳐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다가 어어하는 순간 페이스를 빼앗겨 혀끝이 얼얼할 정도로 잔뜩 빨리고 깨물렸다.
근육으로 꽉 찬 몸뚱이와 달리 입술과 혀는 매끈하고 부드럽다. 천천히 떨어진 입술이 침으로 젖어 혀로 그것을 낼름 햩은 랜서는 다시 아쳐에게 입술을 부딪혔다. 퍽, 하고 꽤 큰 소리가 나며 아쳐의 뒤통수가 벽에 부딪혔지만 둘 다 신경도 쓰지 않고 헐떡이며 혀와 입술을 문질렀다.
웃을 때마다 드러나 처음 볼 때부터 신경쓰였던 송곳니는 생각보다 뾰족했다. 일부러 혀를 내어 입천장을 간질이다 혓바닥 옆구리가 화끈해지고 비릿한 맛이 입안을 감돌 때까지도 정신없이 랜서의 입술을 물고 빨던 궁병은 살짝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물리는 랜서를 얼떨떨하게 쳐다보다 왼손을 들어 입가를 닦았다. 붉은 기가 진하게 묻어나오는걸 보면 상처가 상당히 크게 난 모양이었다.
“안 아프냐?”
피 맛이 비린지 입술을 우물대던 랜서가 조용히 묻자 궁병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상처를 자각하고 나서야 통증이 느껴졌는데, 랜서의 입술이 침으로 번들거리는걸 눈으로 확인한 순간 통증은 아스팔트 위의 알코올처럼 싹 사라졌다. 고개를 숙이고 랜서의 허리 뒤로 손을 가져가 자신 쪽으로 바짝 당겨온 아쳐는 여유로운 얼굴로 자신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는 푸른 창병의 제스처에 한쪽 눈썹을 휙 들어올렸다. 설마 이제 와서 물러나겠다는-
“뭐지?”
“아니, 여기서 할 거면 옷부터 벗고 싶은데?”
그제서야 아쳐는 자신이 랜서의 옷을 쥐어 짤 정도로 강하게 움켜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에서 힘을 풀었다.
실수했군. 난생 처음 섹스하는 애송이처럼 굴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아쳐의 낯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섹스할 생각 만반인 아일랜드의 빛의 왕자는 구겨진 티셔츠 밑단을 손으로 몇 번 만지작거리다 그대로 위로 들어올려 훌렁 벗어제낀다.
“무슨..!”
방금 전만큼은 아니지만 궁병의 평정심이 달고나처럼 파사삭 부서지기엔 충분한 충격이었다. 예상보다 피부가 희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처럼 미끈한 피부에 탄탄하게 자리잡은 근육은 문학가처럼 유려하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저 어깨에 늘어진 푸른 머리카락까지 완벽했고... 그를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정도가 그의 최선이었다.
“왜 그래?”
“응?”
그러나 정신없이 자신의 벗은 몸을 바라보는 궁병의 정신머리를 다시 붙잡은 것도 눈 앞의 창병이었다.
그는 티셔츠에서 한쪽 팔과 고개를 빼낸 자신과 달리 두 손 놓고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아쳐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설마 옷까지 직접 벗겨달라는건 아니겠지?
“지금 안 하려고?”
“설마 여기서 하잔 말인가?”
“벽도 있고 지붕도 있고, 거기에 목격자도 없는데 뭐가 문제야?”
현관을 코앞에 둔 거실 통로에서 옷을 벗으며 하는 말 치고는 제법 논리적이라 얼핏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린다. 순간 설득되버릴 뻔한 궁병은 고개를 휙휙 저어 잡념을 털어내고 단호한 얼굴로 벨트를 쥔 창병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고대인의 감각에야 어떨지 몰라도, 일단 이 집에 왔으니 내 고집을 따라줬으면 좋겠군.”
“흐음.”
랜서는 귀찮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자신의 손목을 쥐고 앞장서 걷는 아쳐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쪽 팔엔 벗다 만 흰 티셔츠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나무로 된 계단을 올라 짧은 복도를 지나자 나오는 첫번째 문 앞에서 멈춰선 궁병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낮게 중얼거렸다.
“여기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문을 열자 저택의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문과 더블 사이즈의 침대가 보였다.
침대 아래 낡은 러그는 깨끗했지만 그뿐이었다. 휑한 방 안에 있는 것은 오직 침대뿐으로 생활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 예상대로 삭막한 방인데.”
“수면은 필요 없으니 사용한 적은 없다. 방이 많아서 하나 받았을 뿐이지.”
사실 소파에서 랜서와 아쳐가 거사를 치렀다고 오해한 린이 부랴부랴 마련해준 방이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번 고개를 휘 둘러보는 것으로 방구경은 끝났고, 마력의 흔적이나 함정으로 생각되는 장치도 없다. 아쳐 녀석이 손수 뜬 털실 목도리 같은게 걸려 있어도 놀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볼 게 없는 것도 의외였다.
랜서는 푹신한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아 흰티를 마저 벗어 바닥에 대충 떨어뜨렸다. 현관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따라붙던 시선이 자신의 벗은 상체어림을 흩는 것을 눈치챈 그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전투나 섹스나, 막상 본게임에 들어갈 때까지는 뒤로 빼다 갑자기 치고 나오는게 스타일이 똑같다.
“뭐야, 설마 직접 벗기고 싶었냐?”
“..그것도 좋지.”
나름대로 농지거리랍시고 던진 말에 아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허리를 숙여 랜서의 티를 주워들었다. 가볍게 삭삭 접어 적당한 곳에 옷을 치워둔 아쳐는 입고 있던 검은 셔츠를 벗으며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왠지 떨떠름한 표정의 창병이 피식 웃고 있었다. 눈으로 묻자 랜서는 설레설레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어째 한마디도 안 지나 싶어서 말이야..”
“언쟁을 벌일 마음은 없었다만.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불쾌했나?”
“그런 건 아니고.”
이쪽이 먼저 한 말인데 새삼 기분이 나쁠 것도 없다. 대신 상의를 벗은 채 침대에 앉은 궁병의 분위기가 쓸데없이 진지해서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랜서는 자신의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할 지 몰랐지만, 친구네 생일파티에 초대받아 갔더니 자신만 청바지 차림인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턱시도에 드레스를 입고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면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
그냥 가볍게 섹스하러 온 건데 이 그윽한 분위기는 대체 뭐지..? 랜서가 입을 여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자 궁병은 천천히 팔을 뻗어 랜서의 팔뚝 위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가만히 있었더니 바짝 다가와 어깨 위쪽까지 부드럽게 매만졌다.
엉덩이도 가슴도 아니고 팔은 대체 왜 만지작대는 건지. 새삼 반응하기 어색해 궁병의 팔에 시선을 고정했다.
팔뚝이 생각보다 두껍다. 잘 익은 빵 껍질처럼 구릿빛 피부에 두툼한 근육의 모양이 창을 쓰는 자신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주로 무기를 쥐고 내지르는 자신과 달리 사람만한 장궁의 현을 쥐고 잡아당기는 것은 어깨와 팔꿈치 사이의 근육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그런 것치고는 어깨에서 이어지는 등근육도 제법이었다. 그러고 보니 궁병 주제에 검도 곧잘 썼었지..
섹스를 앞두고 태평한 생각이라고 할 수 도 있겠지만 랜서는 아쳐의 몸에 집중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하품이 나와버릴지도 모른다.. 이대로 팔뚝만 만지작거리게 두면 되는 건가? 그냥 아까처럼 입부터 부딪혀볼까? 정말 미안하지만 섹스하기 전에 이렇게 경건하게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는 문화는 어디 건지 모르겠고, 그에겐 적응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랜서의 반듯한 쇄골 위를 손가락으로 죽 미끄러뜨리며 부드럽군. 하고 중얼거린 아쳐의 목소리에 목덜미에 닭살이 돋고야 말았다.
랜서는 자신의 쇄골을 만지작대는 아쳐의 손목을 텁 붙잡고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아쳐의 얼굴에 으르렁댔다.
“뭘 하는 건데?”
“음? 전희에는 익숙하지 않은 건가?”
살짝 눈웃음을 치고는 콧날을 문질러 입술이 마주닿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아쳐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랜서는 히익 하고 기겁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상체를 쭉 뒤로 뺐다. 결과적으로 침대에 풀썩 눕게 되었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그냥 아까처럼 하면 안 돼겠냐!? 애를 만드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전희야!”
아쳐가 말하는 게 뭔지는 안다. 자신도 여자를 안을 때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함께 기분이 좋아질 수 있도록 이런저런 노력도 많이 기울인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대가 그 별종 아쳐 아닌가!?
진짜 단순히 박거나 박히거나 싸고 싶어서 온 건데 이렇게 나올 줄이야?
그러나 뜨악한 표정의 랜서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아쳐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랜서의 입술에 진하게 입을 맞췄다. 랜서는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곤 자신을 살피는 아쳐를 마주 노려보며 순순히 입을 벌려 혀를 내밀었다. 질척하게 점막과 혀가 비벼지는 감촉이 적나라했다. 키스는 속도광이 모는 오픈카 수준인데 왜 섹스는 스쿨존처럼 하려고 하는지 진짜 모르겠다.
“그런 취향이라면 맞춰주지 못할 건 없지만, 나는 그런 아까운 짓을 하고싶지는 않다.”
“켁.. 좀 맞춰주면 거기가 식기라도 해?”
“먼저 하자고 온 건 네 쪽이니 침대 위에선 내쪽에 맞춰주는게 균형이 맞겠지.”
“이봐요, 형씨.”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랜서. 재촉받는것도 나름대로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만! 마음대로 하쇼!”
무슨 언변이 이 따위야!
순식간에 하고 싶어 안달난 영령으로 자신을 매도하는-사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궁병의 말에 랜서는 항복하듯 외치고 양 팔을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무장 해제의 뜻이 퍽 마음에 드는지 큭큭 웃던 아쳐는 랜서의 바지에 손가락을 걸고 그대로 밑으로 끌어당겼다. 허리를 들어올려 바지를 벗기기 쉽게 도운 랜서는 아쳐가 바지를 침대 바닥에 휙 내던지는걸 곁눈질로 확인하고는 씩 웃었다. 혹시라도 무릎 끓고 바지를 개기 시작하면 그냥 뒤통수를 부수고 교회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운이 좋은 녀석이다.
“끄응..”
입에서 탄식 비슷한 소리가 새어나온다. 마주댄 입술에서부터 턱끝, 쇄골까지 내려간 입술이 가슴 어림을 맴돌고 있었고 큼직하고 뜨끈한 손바닥은 무릎과 허벅지를 더듬더듬 문질렀다. 가슴에 닿는 뜨끈한 숨결이 기분나쁜건 아니었지만, 은근슬쩍 엉덩이를 주무르려다 마는 손길은 역시 조금 신경쓰였다. 랜서는 눈을 감고 눈썹을 팍 일그러뜨렸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뼈가 붙고 살이 붙어 어쩌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만들어냈다.
‘이 새끼.. 혹시 처음은 아니겠지?’
생긴 것만 보면 양팔에 미인을 두셋씩 끼고 후려댔을것처럼 생겼으면서 설마 경험이 없다거나?
애송이처럼 키스하다 피를 보거나 어설프게 간을 보는 손장난도 경험이 없어서 허둥대고 있는 거였나.. 랜서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아쳐의 움직임은 느릿했다. 어찌 보면 최선을 다해 만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해 우물쭈물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녀석도 할 맘은 있는것 같은데..
짠하다.
랜서는 어른이었고, 아쳐를 탓하는 대신 자신의 행운 랭크를 탓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자신의 매력에 대해서는 티끌의 의심도 없다는 점이 정말로 어른스러운 점이었다.
“아-쳐.”
“음?”
“남자랑 해본 적은 있냐?”
“......”
정답이구만. 저 녀석 성깔에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지금이라도 엎어버릴까? 하지만 남자가 처음이라는 녀석 뒤를 그렇게 정성껏 공략하고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강하게 끝까지 치닫고 싶을 뿐이다.
랜서는 벗은 다리를 들어올려 아쳐의 허리에 감고 바짝 당겼다. 흡, 하고 숨막히는 소리와 함께 두둑한 고간이 꾹 문질러져 랜서는 퍽 안심했다.
일단 물건의 질량이 보통 이상이라는 점이 마음에 쏙 든다.
“어쨌든 네가 넣는 쪽이면 어렵지도 않거든? 내가 엉덩이를 내준다는데 뭘 그렇게 염불을 외고 있냐.”
“엉덩, 아니 그게 아니라 랜서,”
“재촉해서 될 일이면 재촉해야지. 안 그래?”
이를 드러내며 씩 웃자 아쳐의 얼굴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어라, 이 녀석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가? 쪽팔린건 알고 있다 이거야?
“미안하다.”
“그래, 미안.. 엥?”
“확실히, 너무 이쪽 생각만 한 모양이군.”
영문 모를 소릴 중얼거린 아쳐의 손가락이 엉덩이 윗 부분, 침대에서 살짝 떠오른 공간을 파고들어 엉덩이 골 위쪽을 문지르다 밑으로 미끄러졌다. 살덩이를 가르듯 엉덩이를 움켜쥐는 손이 제법 거칠어서 랜서는 윽, 하고 방심한 채 짧게 소리를 냈다.
“최선을 다해보겠다.”
“그, 그래..”
교회 앞에서 맞붙었을때도 이런 얼굴은 아니었던것 같은데. 랜서는 어쩐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쳐가 평소대로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면 빌딩에서 발을 헛디뎠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랜서의 감시를 게으르게 방치하고 린이 어지럽힌 저택의 지하실을 청소하는 중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슬슬 이상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청소에 집중하고 있는데도 한 시간에 세 번 꼴로 창병을 감시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오른다는 건 다분히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거기에 창병을 막상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있다고 해서 그 충동이 급격히 사그라드는 건 아니다. 전투의 고양감과도 비슷한 긴장감이 아쳐의 머리 한구석을 자꾸만 잡아채고 있었으니까.
처음엔 성배가 의도한 전투유지시스템의 일종인줄 알았지만.. 배불리 밥을 먹고 무방비 상태로 널부러진 창병을 공격할 의지가 들지 않았을 때부터 그게 아니라는걸 대충 깨닫고 있었다.
딱 봐도 수상쩍거나 의심스러운 마도구 등은 건드리지 않은 채 바닥과 책장 사이사이의 먼지를 쓸어내고 대걸레로 마무리를 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꽤 흘렀다. 애초에 사람 혼자서는 청소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고, 끝내 청소를 끝냈다는 것만으로 이 영령의 살림 랭크를 얼추 유추해볼 수 있을 정도다.
양동이에 든 시커먼 물과 대걸래를 들고 지하실을 올라와 회색이었던 대걸레가 뽀얗게 될 때까지 문질러 빨아 말리고 양동이도 헹궈 엎어두었다.
“후우..”
육체적으로 피곤함을 느끼지는 않지만, 청소를 마무리하고 숨을 내뱉으며 긴장을 푸는 것은 일종의 버릇이다.
그때 타이밍 좋게도 현관의 벨이 울렸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옅은 기척. 아마 린이 말했던 택배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한 아쳐는 천천히 걸어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태연히 서있는 창병을 보곤 그대로 다시 문을 닫는다. 경첩이 부서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렸지만 아쳐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문 너머에서 어슴푸레하게 느껴지는 마력의 감각을 느끼고 독을 씹는 것처럼 이를 악물었다.
“......”
차라리 창병의 환상이라도 봤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난데없이 본인이 튀어나오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어어이! 사람 면전에 대고 문을 닫다니 너무한거 아냐!?”
“..분명 당분간 못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걱정 마셔! 오늘은 감시가 없거든!”
랜서의 말에 아쳐는 더 반박할 거리도 없어 순순히 그를 집안으로 들였다.
일단 감시가 없다는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쳐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단지 그가 놀란 것은 자신이 권하지 않았는데도 랜서가 이곳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음? 오늘도 아가씨는 없는 건가~”
“린은 따로 약속이 있다. 올 때마다 엇갈리는것도 대단하군. 과연 행운 랭크 E는 허명이 아닌가..”
“어이, 네가 그렇게 말 할 처지냐?”
투덜거리면서도 자연스레 식탁으로 향하는 랜서의 뒤를 쫓는다. 그는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대충 봐서는 술과 담배가 담긴 것 같았다. 영령이면서도 가볍게 손댈 수 있는 향락은 제대로 취하고 있단 말이지.. 그것도 딱 자신이 즐기고 싶은 만큼만 절제해서.
“그래서, 정말로 여기에는 왠일이지? 미안하지만 식사는 준비되지 않았다.”
“엥? 밥 때문에 온 건 아닌데?”
“안주도 없다.”
단호한 아쳐의 말에 랜서의 어깨가 축 처진다. 아쳐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 아마 랜서는 감시가 없다는 사실에 기분이 꽤 좋아진 모양이다.
술과 맛있는 안주가 떠올라 습관적으로 여길 찾아온 거겠지. 이 정도면 파블로프의 개라고 불러도 반박할 말이 없겠지만, 진짜로 이걸 입 밖에 꺼냈다간 게이볼그에 심장이 꿰뚫리는 것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창병은 식탁에 봉지를 내려놓고서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음? 의아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으나 뒤에 있는 것은 현관 뿐이다. 나가서 안주거리라도 사오려는 건가. 길을 비켜주기 위해 몸을 옆으로 틀어 벽에 등을 가볍게 붙이자 랜서의 팔이 턱, 하니 벽을 짚었다.
벽과 랜서 사이에 갖힌 상황, 아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가까이 다가온 쿠훌린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팔짱을 풀지 않은 채라 얇은 티 한장을 사이에 두고 랜서의 가슴이 팔 위로 꾸욱 눌렸다.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
가까이 다가와 눈길만 빤히 주는 그의 행동에 심장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펄떡펄떡 뛰어대고, 순식간에 수십개의 생각이 피어올랐다가 꺼졌다. 팔에 닿는 감촉과 그딴 감각에 집중하는 자신에 대한 환멸감이 번갈아가며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컴퓨터로 치면 블루스크린쯤 되는 상태거나, 어쩌면 주마등과도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쳐는 랜서가 이대로 창을 내찔러도 제대로 피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바짝 다가온 남자의 기척에 집중했다. 얕은 숨결이 자신의 코끝에 와 닿고 있다는 사실에 아쳐의 머리 한구석이 다시 과부하 걸린 엔진처럼 삐그덕 거릴 때까지 랜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자신의 얼굴어림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슨 용건이지, 랜서.”
“아니, 아무래도 말로 전하는건 영.. 재주가 없어서.”
설마, 들킨 건가!?
순식간에 심장이 내려앉은 아쳐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랜서의 행동이 먼저 이루어졌다.
쪽, 하고 가볍게 아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 가볍게 빨아올린 랜서는 얼음기둥처럼 딱딱하게 굳은 아쳐를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까짓거, 섹스가 하고 싶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냐!”
*
창병이, 그러니까 눈앞의 푸른 랜서가.
아일랜드의 빛의 왕자라고 불리는 그 대영웅이, 인과역전의 마창 게이볼그의 주인이자 마경의 여왕 스카사하에게 무력을 사사받고 죽음의 여신인 모리안마저 탐냈다고 하는 남자가..
“어이? 왜 대답이 없냐?”
입을 맞췄다.
아쳐는 자신도 모르게 왼손으로 입술 위를 텁 막고 자신의 눈 앞에서 손을 살랑살랑 움직이는 랜서를 피해 순식간에 멀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남에게 입을 맞출 수가 있단 말인가!?
고대의 켈트라는 곳은 원래 이렇게 문란한 곳인가?(정답이다) 아무리 여러 명의 여자를 거친 남자라 해도 함부로 외간남자에게 입을 맞추면서 섹스를 말하고 있다니!?
아쳐의 머릿속이 폭발하기 직전의 간헐천처럼 과열되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닌 랜서는 훗, 하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 모습은 자신과 달리 자못 여유로워서 아쳐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쪽은 저 창병의 돌발행동에 엉망진창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저 녀석은..
“어떻게라니, 그야 네놈 행동을 보면 뻔하지!”
“뻔하다고..?”
“그래. 일하는 데까지 만나러 와서 약속 잡고 밥해주고 도시락까지 싸서 들려주는데.. 그걸 이쪽이 못 알아차린다고 생각했냐?”
“......”
랜서는 말문이 막힌 듯한 아쳐의 얼굴을 보며 상대방의 속셈을 모조리 간파한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아쳐는 쿠훌린이 열거한 사실과 섹스와 연관성을 이리저리 짜맞추다 어떤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확 붉혔다.
그러니까, 저 창병은 지금 내가 호감을 가지고 본인에게 집적거리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창병이 저렇게 여유롭게 재밌다는 듯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지금 이쪽은 일방적으로 그에게 플러팅을 걸고 있던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큭.”
아니라고 딱 잘라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부정하기에는 애써 외면해왔던 그동안의 이상행동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순순히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자존심이 묘하게 상했다. 뭣보다 처음에는 정말로 그를 감시하기 위해 밥을 미끼로 끌어들인 것 아닌가!?
아쳐가 고민한 시간은 꽤 길었고, 랜서는 별로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심드렁한 기색으로 골반 위에 가볍게 손을 걸치고는 중얼거렸다.
“뭐야, 안 꼴리냐? 그럼 그냥 가고.”
“무슨 소리지.”
“아니 뭐, 이쪽이 하고 싶다고 너도 타이밍 좋게 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바쁘면 다음에 오지 뭐.”
그리고는 진짜로 돌아갈 것처럼 식탁으로 돌아가 가져온 봉지를 집어들었다. 아쳐는 봉지를 쥔 랜서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고 그를 붙잡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참고로 세상에서 제일 단호한 표정이었다.
“걱정 마라, 나는 늘 하고 싶었다!”
“헤에.. 오늘따라 맘에 드는 말만 하네, 형씨.”
“......”
아쳐는 장난감을 발견한 늑대처럼 웃는 랜서를 바라보며 잠시 자신의 입을 꿰메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했다.
봄이 되면 제일 잘 나가는건 생화보다는 다육식물이나 작은 화분종류다. 값도 저렴한데다 약간의 공간만 있다면 이 푸릇한 연두색 이파리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관리까지 쉽다. 뭐, 몇년동안이나 화분을 키워 더 큰 화분으로 분갈이를 하는 손님은 의외로 별로 없다고 하지만.
랜서는 양 손에 큼직한 양동이를 들고 꽃입 바깥의 화분 거치대 앞에 쪼그려앉았다. 양동이 안에는 한손에 들릴 만큼 작은 화분들이 빽빽히 들이차 있었다. 이번에 새로 들여온 모종을 작은 화분에 심고 물을 흠뻑 먹을 수 있도록 양동이에 통째로 담가 두었는데, 이렇게 하면 이 주 정도는 물을 주지 않아도 이파리가 마르지 않는다.
한 손에 마른걸레를 들고 물기를 닦으며 작은 화분들을 죽 진열했다.
가게의 분위기가 단번에 화사해져서, 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번쯤 돌아볼수밖에 없는 봄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흐뭇하게 웃으며 으쌰,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으로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오, 무슨 일이야 아가씨?”
근방 중년 여성들의 하트를 백발백중으로 꿰뚫었다는 상큼한 미소!
금눈돔 매출 180%상승의 주역이 반갑게 맞이한 것은 머리 한쪽에 리본을 맨 소녀였다.
사쿠라는 반갑게 마주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그 옆의 서번트-라이더-는 가볍게 눈을 깜빡이고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안녕하세요, 랜서 씨. 화분이 예쁘네요.”
“그렇지? 역시 봄이니까.”
하하호호 웃으며 덕담과 날씨 이야기로 분위기를 푼 사쿠라는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보통 이 정도에서 그럼 다음에 뵈요~ 하고 지나가고는 했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린의 부탁으로 이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랜서 씨..”
“응?”
이야기를 마치고 자연스레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랜서를 급히 불러세운 사쿠라는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1초, 2초.. 자신을 불러놓고 아무 말이 없는 사쿠라를 바라보는 랜서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언니 도와줘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남자와 남자의, 아니 서번트와 서번트 사이의 연애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면서 끼어드는 것이 좋을까!? 자기도 모르게 맘속으로 린을 부르짖은 사쿠라는 구회 말 2루 아웃의 구원투수처럼 옆으로 슥 나선 라이더를 감동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요즘 많이 바쁜가 보군요, 랜서.”
“응?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흐음. 한참동안 아쳐와 붙어다니지 않았나요? 요즘은 또 그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죠.”
라이더 나이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쥔 사쿠라는 엥? 그래? 하고 심드렁하게 뒷통수를 긁는 랜서를 몰래 살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린에게 들었던 아쳐의 상태와는 다르게 이쪽은 전혀 데미지가 없어 보였다..
“이쪽에 일이 좀 생겨서 말야, 애초에 저녁도 아쳐 녀석이 멋대로 하기 시작한 거고.”
“일?”
“멋대로?”
랜서의 말에 사쿠라와 라이더는 동시에 반문했다. 난데없이 두 미녀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랜서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어깨를 으쓱 올렸다. 자신에게 워낙 마스터 복이 없어놔서 그런가, 이 두 콤비는 유독 귀엽다.
‘뭐, 감시하는 눈길에 대해서 벌써 말 할 필요는 없겠지.’
저쪽은 감시라든가 하는 별 문제는 없는 것 같고, 이쪽도 피해를 봤다기엔 우습다. 랜서는 사쿠라 쪽으로 상체를 살짝 숙이며 말을 받았다.
“그래. 멋대로지. 갑자기 와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더니, 그 뒤로 시간 날 때마다 약속을 잡아댔거든.”
“아쳐 씨가요?”
“그래. 딱히 이유가 있어서 그 녀석하고 붙어다닌건 아니니까..”
“그, 그럼 순전히 아쳐 씨가 일방적으로 랜서 씨에게 접근했다는 건가요..?”
사쿠라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절박해졌다. 랜서는 어라, 하는 얼굴로 슬쩍 상체를 뒤로 뺐다. 어째 지금 말하는 어감이 좀 묘하지 않은가? 거기다 아가씨의 뭔가를 건드린 느낌이..?
사쿠라는 한숨을 내쉬며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는 시늉을 하며 어깨를 떨었다.
“아쳐 씨.. 불쌍해..”
“사쿠라..”
“어이, 갑자기 뭐야.”
왜 갑자기 그 뻔뻔한 궁병 녀석이 불쌍하다는 결론에 도착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때 랜서의 당황 따위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상냥하게 사쿠라의 어깨를 도닥이던 라이더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런데.. 꼭 아쳐의 요청 때문이라기엔 랜서 당신도 순순히 그와 어울리지 않았나요?”
“그 녀석 밥 맛있거든.”
“밥...”
“정말로 그 이유 뿐이에요..?”
사쿠라가 어쩐지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묻는다. 솔직히, 어째서 자신이 아쳐와의 만남에 대해 추궁을 받고 있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 바이올렛 콤비는 대체 언제부터 궁병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 녀석의 마스터는 어쩌고?
랜서는 아까부터 이 두 주종과 대화의 핀트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은데 하고 수상쩍어 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아니 뭐, 외롭다고도 했고.. 밥은 1인분을 만드나 2인분을 만드나 비슷하다고도..”
랜서가 변명처럼 늘여놓는 말에 사쿠라와 라이더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시선에 발끈한 랜서가 어이, 하고 눈살을 찌푸리자 라이더는 안경을 고쳐쓰며 툭 내뱉었다.
“아쳐도 정말 대단하군요. 이런 둔감해빠진 남자에게 작업을 걸다니.”
“이런 게 전쟁에서 피어나는 사랑인 걸까?”
“엥?”
라이더의 입에서 나온 무시무시한 말을 가볍게 긍정하는 사쿠라를 본 랜서는 차원과 자신이 격리되는 끔찍한 기분의 말단을 맛보고 말았다. 지금까지 말이 엇나간 건 모두 지금을 위한 추진력이었던가?
랜서는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으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작업.. 자악업..?”
“자각도 없었던 모양이군요.. 아아, 안타깝게도.”
“뭐야 그 눈! 절대 그런 거 아니니까 당장 시선 치워!”
랜서는 목뒤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는 느낌에 진저리를 쳤다. 아무리 마술사라지만 상상력이 어마어마하잖아 이 아가씨! 대체 세상을 어떤 채널로 바라보고 있는거야!?
“너무 자신만의 망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세상을 좀 객관적으로 판단하라고, 아가씨. 아쳐 녀석이 대체 뭣 때문에 나한테,”
“플러팅.”
“아니라니까!?”
사쿠라는 한 팔을 옆구리에, 그리고 한 팔은 쭉 뻗어 쿠훌린에게 손가락을 뻗어 외쳤다. 방금 전의 그 소녀는 대체 어딜 간 거냐 싶은 변화였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요! 거의 매일같이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후식을 준비하고, 뒷처리까지 해내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인줄 알아요!?”
“큭, 나, 나도 설겆이 정도는 한다고!”
“그렇게 접근한게 아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도 작업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어요?”
사쿠라의 말에 랜서는 말문이 막혔다.
어느새 그들에게 설득당하고 만 것인가?
갑자기 가게에 찾아와 말을 걸거나.. 외롭다면서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거나 밥을 먹이고 설거지거리엔 손도 못 대게 하던 아쳐의 모습이 거품처럼 퐁퐁 떠올랐다. 새, 생각해보니 정도 이상으로 친밀하게 굴지 않았나? 아니 확실히 그랬다..
“서, 설마.. 그 자식..”
억지로 받아들인 현실의 무게에 랜서가 휘청이는 사이 라이더가 라스트 펀치를 날렸다.
“린도 세이버도 시로도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을 본인만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나랑 자고 싶었던 건가!?”
“네?”
본래 영령이랑 영웅. 그리고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는 법이다.
평화로운 일상도 일상이지만 본래 그들이 속한 곳은 전장이었고, 아마 그쪽이 더 익숙한 영령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스터의 허락도 없이 이곳저곳에 싸움을 걸고 다닐 수는 없겠지, 그 궁병은. 비뚤어진 녀석이지만 나름대로 마스터를 챙기는 것 같았고.
들끓는 고양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섹스라면 환영이다. 아쳐 그 자식이라면 적어도 하고 싶은 만큼은 잔뜩 할 수 있을 테니까.
“하~ 진작 말할 것이지.”
“저기, 랜서 씨..”
“사쿠라, 쉿..”
마스터도 없이 남아 막돼먹은 미각치 수녀 밑에서 데굴데굴 굴려지며 의도치 않게 금욕하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한다면야 여자쪽이 환영이지만 남자 쪽 경험도 없는건 아니니 저쪽도 할 맘이 있다면 굳이 사양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랜서는 어쩐지 복잡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쿠라와 라이더에게 가볍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는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갔다.
식사와 마찬가지로, 원하면 취할 수는 있지만 없어도 생존에 해를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단순히 잠에 빠지는 순간을 만끽하고 싶어서, 혹은 마력을 온존하기 위해 수면을 취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제대로 된 마스터에게서 마력을 공급받고 있는 아쳐에게는 해당하는 바가 없었다.
즉 밤새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샐러리맨처럼 초췌한 궁병의 얼굴은 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었다.
“밤새 덜그럭거리던 소리가 이거였냐.”
“그렇지. 괜찮으면 점심으로 좀 싸가겠나.”
“그럼 고맙고.”
“그리고 아침도 먹고 가라.”
랜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 앉았다. 과장 않고 쌀 한말은 통째로 쏟아부은 것처럼 큼직한 쟁반 다섯개에 빼곡하게 탑을 이뤄 쌓인 주먹밥은 백여개가 넘어 보였다.
“주먹밥은 연어마요, 청어알, 멸치, 매실, 닦고기중에 어떤 걸로?”
“골라야 돼?”
종류별로 하나씩 먹으면 되지 않나? 랜서가 그렇게 묻자 아쳐는 뭐, 그렇다면.. 하고 중얼거리더니 찬장을 뒤적여 큼직한 국수그릇을 꺼내들었다.
거기에 미리 끓여두고 한 김 식힌 주전자를 기울여 미지근한 녹차를 적당히 따른 뒤, 겉을 노릇하게 구운 주먹밥 다섯개를 통째로 집어넣고는 그 위에 김가루와 참깨, 매콤한 후리카게를 왕창 뿌렸다.
“자. 맛있게 먹어라.”
“잘먹겠습니다!”
평범한 오차즈케였지만 사이즈가 괴상하다. 남자의 요리도 정도가 있지, 큼직한 그릇에 가득 담긴 탄수화물은 통짜 바베큐와는 다른 박력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랜서는 이걸 다 먹을 수 없다는 걱정이나 싫은 기색 없이 숟가락을 들어올렸다. 그 세이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쿠훌린도 꽤나 대식가인 데다가, 아쳐의 요리는 왠만하면 맛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랜서가 와구와구 밥을 먹는 사이 아쳐는 마지막 주먹밥에 김을 붙여 마무리하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한 요리로 머릿속을 정리한다는게 그만 집에 남아있던 쌀을 몽땅 탕진하고 말았다. 오늘 상점가에서 쇼핑할 목록에 쌀 10kg 짜리 포대를 추가한 아쳐는 미리 준비한 도시락통에 주먹밥을 차곡차곡 집어넣기 시작했다. 칸 한 쪽에는 무친 무말랭이와 냉장고에서 차가워진 라따뚜이에 소세지를 추가한 반찬, 그리고 잘게 자른 매실장아찌를 참기름으로 양념한 것을 같이 올리고 은박지로 양념이 넘치지 않도록 꼼꼼하게 칸을 만들었다.
랜서는 아침부터 밥을 배불리 먹어 기분이 한껏 좋아진 얼굴로 주먹밥이 열 개 정도 든 거대한 도시락을 받아들였다.
아쳐는 내심 아침과 같은 메뉴라 걱정하고 있었지만 랜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도시락의 내용물보다는 아쳐의 분위기다. 도시락을 건네주는 아쳐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뭐랄까, 말 한마디 없이도 초조한 분위기 같은게 이쪽까지 전해져오고 있다고 해야 하나..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어나 볼까 하던 랜서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삼키고 어깨를 으쓱 올렸다. 전날 자신이 한 말을 생각하면 아쳐가 저렇게 날이 선 것도 이해할만 했다. 랜서 자신을 향한 감시의 눈길이 린이나 아쳐에게까지 번질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겠지. 현재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언제 상황이 반전할지 모르는 일이다.
“아, 맞다. 아쳐.”
“뭐지?”
“당분간 저녁식사 초대에는 못 올 것 같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뭐?”
뜬금없는 말이었던지 아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워낙에 비꼬는 표정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렇게 작게 놀란 모습도 꽤나 귀하다. 뭐, 굳이 이런 걸 볼거리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말야.
“너야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그 아가씨에게 감시의 눈길이 옮겨붙기라도 하면 미안하잖냐. 안 그래도 거의 매일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데.”
“아니.. 그건.”
“그동안은 딱히 해를 끼치지 않으면 두고볼까 했는데, 슬슬 거슬리기도 하고?”
“..내가 도울 일은?”
“됐어됐어, 나중에 필요하면 요청하지.”
그렇게 말하지만 애초에 아쳐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 랜서는 다음에 가져다주겠다며 도시락통을 들어올리곤 가벼운 발걸음으로 토오사카저를 떠났다.
때문에 랜서는, 자신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아쳐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라고 하지만, 방법은 딱히 없단 말이지.’
파하, 하는 싶은 숨과 함께 희뿌연 담배연기를 내뱉은 랜서는 잔잔한 수면 위로 평화롭게 떠있는 낚시찌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카아시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반쯤 먹은 도시락의 뚜껑을 탁 덮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라기보단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아카아시가 도시락을 덮자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맞은편에 앉아, 빵 봉지를 손으로 꾸욱 쥐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할 말을 고르는 듯하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악력에 무참히 뭉개지는 야키소바빵의 안위에 잠시 묵념한 뒤, 가볍게 보쿠토를 재촉했다.
“무슨 고민이 있으신데요?”
“그게, 그..”
보쿠토는 한참동안이나 로딩바가 버벅이듯 같은 소리를 입밖으로 더듬더듬 내보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다시한번 재촉하는 대신 도시락 뚜껑에 시선을 고정했다.
먹으면서 듣는다고 할 껄 그랬나. 어쩌면 저 도시락을 마저 먹기 전에 점심시간이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쿠로오가 말야.”
“네코마의 쿠로오씨 말이죠.”
“응! 그래, 그러니까 쿠로오한테.. 애인이 생긴 것 같아.”
컵라면에 물을 붓고 먹을만하게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지난 뒤, 드디어 보쿠토의 입에서 본론이 튀어나왔다. 아카아시는 그렇군요. 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 움직였다.
핸섬한 얼굴이라고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못생긴 얼굴은 아닌데다, 운동부 주장에 키도 크고 성격도 모나지 않은 남자였다.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고, 한창 배구에 집중할 줄 알았던 그가 애인을 만들었다는 것이 조금 놀라울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보쿠토 씨가 이렇게 고민이 있다는 말까지 쓰지 않겠지.
“그리고요?”
“음, 그리고. 이건 추측인데, 아, 하지만 거의 맞을꺼야..”
보쿠토는 뭔가 하기 어려운 말을 하듯 뒷머리를 거칠게 긁적이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돼! 너니까 믿고 말하는거야! 하고 아카아시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아카아시가 당연합니다.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자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닥거렸다.
“그런데 쿠로오의 애인, 남자인것 같아.”
이건 좀 예상치못한 말이긴 했다. 아카아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 그렇군요. 라고 작게 대답했다. 그리고 보쿠토의 입에서 더이상 아무말도 나오지 않자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그게 끝입니까?”
“어..? 남자랑 사귄다니까, 안 놀래?”
“요즘 세상에 그럴 수도 있지요. 사귀는 대상이 유부남이나 살인자만 아니라면야.”
아카아시는 그렇게 쿨하게 답하곤 도시락 뚜껑을 다시 달칵 열었다.
뭐, 친한 친구가 게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랄수도 있겠죠. 아카아시는 며칠간 영 집중하지 못하던 보쿠토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보쿠토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채였다.
“그렇지만! 쿠로오, 내가 고백했을 땐 남자라서 안된다고 거절했다고!”
“....네?”
오늘 보쿠토가 내뱉은 문장 중에 제일 놀라운 것이었다. 기어코 보쿠토의 주먹에 야키소바 빵이 제 형체를 잃고 처참하게 뭉개지는 것을 확인한 아카아시는 살짝 말을 더듬고 말았다.
“웃으면서, 연애대상으로 못 봐줘서 미안하다고, 친구로 지내자고 했단 말야!”
“그, 그랬군요.”
“그래서 참았다고! 좋아하지만 억지로 날 좋아해달라고 강요할 순 없는 거잖아!!”
“그렇지요.”
보쿠토는 입술을 깨물며 그렇게 외쳤고,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박력에 밀려 반사적으로 단답형의 대답만 내뱉었다. 아니 뭐, 나중에 저도 몰랐던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될 수도 있고, 우연히 다른 남자에게 반하게 될 수도 있죠. 보쿠토씨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된 건 안타깝지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틀려! 나랑 약속했다고, 남자를 연애대상으로 볼 수 있게 되면! 나랑 연해하기로!”
“그런 말도 안돼는 약속을..”
그렇게 말한 아카아시는 중간에 입을 다물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고백하시면서 우셨어요?”
“......!?”
벌침보다 날카로운 아카아시의 목소리에 보쿠토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떠올랐다. 보쿠토는 빵봉지를 툭 떨구고는 손을 마구 흔들며 부정했다.
“아, 안울었어! 처음엔 안 울었다고!”
“거절당하고 우셨군요.”
“그, 그건..!”
보쿠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아카아시는 어떻게 된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젓고 말았다. 하지만 쿠로오씨는 그냥 우는 보쿠토씨를 달래려고 그런식으로 말한 거에요. 라는 잔인한 말을 내뱉기에 아카아시는 자신의 에이스이자 후쿠로다니의 주장인 보쿠토를 꽤 아끼는 편이었다.
“방금 전에..”
“으, 응?”
“쿠로오씨가 남자랑 사귀는게 확실한 건 아니라고 그러셨죠.”
“맞아!! 확실한건 아냐! 그냥 내 추측이니까 어쩌면 내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고!”
보쿠토는 바뀐 주제가 마음에 드는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시계를 힐끔 곁눈질로 살폈다. 이야기는 길어질 예감이고 점심시간은 야속하게도 줄어들기만 하고 만다.
“그럼, 어떻게 알았는지부터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그건 말이지..”
* * *
카라스노 알지?
응, 거기. 이번 골든위크 합숙때 온 네코마의 숙적이라는 그 학교 있잖아. 쓰레기장의 결전이랬던가. 그 중에 있는 거 같아.. 쿠로오 남자친구.
그리고! 음, 아마도 후배일껄? 그러니까 1학년이나 2학년!
“정확한데요 어째.. 휴대폰이라도 훔쳐보신겁니까?”
“아니, 그, 쿠로오가 잠깐 맡아달라고 한 거니까!”
보쿠토씨의 주장에 의하면 화면이 켜진채로 내밀었기에 얼결에 대화 내용을 보게 되었을 뿐이며 대화 내용이 궁금해 화면을 위로 살짝 올린 것은 불가항력이라는 것이다. 그걸 훔쳐봤다고 하는 겁니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는 물었다.
“그래서.. 목격해버린 대화 내용이 어땠는데요?”
아카아시의 물음에 보쿠토는 눈에 띌 정도로 안색이 흐려졌다. 마치 스파이크를 세번 연속으로 블락당해 좌절할 때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그냥, 내용은 평범했어.. 연습 끝나고 뭐 케이크였나 간식 먹을거라고.. 그리고 블로킹에대해서 조금 얘기하다가 여름방학 합숙 기대되지 않냐는 얘기 조금.”
“내용은 그게 다에요?”
말하지 않는 내용이 있는 것 같은데요. 아카아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깍지를 꼈다. 말을 잇는 보쿠토의 상태가 데친 시금치처럼 축 처지기 시작하는게, 이어 나올 내용이 꽤나 중요한 모앙이었다.
“내용은 그게 다였는데.. 그 녀석 말이야.”
“그 녀석?”
“쿠로오랑 문자 하던 녀석!! 발신인 이름에 이모티콘만 들어있었다고!”
오. 이름이 아니라 뭐 하트라도 달아놓은 걸까.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이렇게 풀죽어 있을만한 이유를 알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번호부에 이름이 아닌 이모티콘을 달아놓을 정도면 애인이 아니더라도, 보통 친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녀석이 말끝마다 하트를 붙이는데.. 쿠로오는 또 엄청나게 귀여운 말투로! 답장하고!”
누가 하트를 붙여요? 누가 귀여운 말투를 쓴다고요? 아카아시는 새끼손가락으로 시원하게 귀를 파고싶은 마음을 억눌러야했다. 잘못 들었나.
“나랑 문자할때도 정말 기분 좋을때 가끔만 그런 말투로 보내주는데..”
보쿠토의 말에 따르면 그 자(?)와 대화하는 쿠로오는 시종일관 우와아앙~ 이러던가 잘시간 지나버렸네☆ 잘자아아(′3') 하는 식으로 귀엽기 그지없었다고 하는데,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조금만 더 제정신이 아니었다면 꿈을 꾼거겠죠, 하고 단답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 쿠로오씨가 문자로 여고생 말투를 쓰고 있다고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젠장, 부러워! 안경 이모티콘 자식..!”
“..안경.”
..저기 보쿠토씨. 카라스노에 안경을 낀 사람은 한명뿐입니다.
* * *
“안녕하십니까! 올해 여름합숙에 참가하게 된 카라스노입니다!”
아아. 쳐다보고 있어. 쳐다보고 있잖아.
공을 벽에 던지며 워밍업을 하던 보쿠토의 눈이 카라스노의 1학년에게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카아시는 반복해서 당부한 문장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명심하세요 보쿠토씨.’
‘뭔데?’
‘애인이란건 모두 저희의 추측일 뿐이고, 그저 엄청 친한 후배일수도 있다는 사실을요.’
‘그렇지만..!’
‘안 그래도 눈치빠른 쿠로오씨인데, 보쿠토씨가 그 안경군에게 묘하게 반응하면 뭔가 눈치채버릴수도 있잖습니까.’
‘확실히.. 알았어! 모른 채 하고 있을테니까.’
보쿠토씨 차라리 눈을 감고 계세요. 보쿠토의 이글이글한 시선을 알아차린 안경군이 신경쓰이는지 보쿠토를 슬쩍 바라보았다. 아카아시가 속으로 조마조마한 사이 체육관 입구에서 쿠로오가 웃으며 나타났고, 다행히 보쿠토의 시선은 곧장 그리로 쏠렸다.
“소개 다 했으면 워밍업부터 하라고?”
“아아. 고마워.”
쿠로오씨의 도움으로 카라스노는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고 다른 학교와 섞여 워밍업을 하기 시작했다. 쿠로오씨는 카라스노의 주장 옆에서 계속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대화하면서 작게 웃거나 혹은 보쿠토씨와 눈을 마주치곤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거나 했다.
아직도 쳐다보고 계신겁니까..
“하아..”
아카아시는 자신이 보쿠토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보쿠토는 아주 놀랍게도, 안경군의 첫 등장을 제외하고는 전혀 신경을 쓰고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이랄지 당연하달지 보쿠토씨는 연습시합에도 최선을 다했고, 배구 외엔 단 한가지에만 주의를 할애했다.
별 것 아니었다. 보쿠토씨가 스파이크를 성공시키고 크게 외치면, 옆 코트에서 쿠로오씨가 한마디씩 하고 보쿠토씨는 그런 쿠로오씨에게 눈을 마주치고 한번 씨익 웃어주는 정도였다. 연습이라고는 하지만 시합 중간에 보쿠토씨의 주의가 코트 밖으로 빠져나간다는 것 자체가 아카아시에겐 신기한 일이었다.
보쿠토씨가 쿠로오씨를 좋아해서, 그래서 최대한의 신경을 쏟고 있구나. 미리 듣지 않았더라면 영영 모르고 지나쳤을 정도로 보쿠토 코타로의 짝사랑은 의외로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보쿠토 씨라면 무조건 좋아한다고 들이대어버릴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아카아시는 곧 짝사랑의 상대인 쿠로오씨를 떠올리고는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이런 짝사랑의 방식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쿠로오씨이기 때문인 것 같다는, 어떤 근거도 없는 확신이 생겼다.
보쿠토는 쿠로오를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은 그걸 알고 있다. 아카아시의 안에서 보쿠토의 사랑을 어떻게든 응원해주고 결실에 도움을 주고싶다는 의무감 비슷한것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해버리는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 * *
“뭔가 카라스노~ 힘이 넘치네!”
“그러게 말야. 저 꼬마 녀석, 그렇게 플라잉을 하고도 아직도 점프력이..”
정규 연습시합 일정이 끝나면, 남은 것은 나머지 연습을 하는 선수들 뿐이다. 쿠로오는 유독 체력이 약한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츠키시마를 발견하곤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 나 자연스럽게 버림받았어..? 타올로 땀을 채 닦기도 전에 쿠로오 곁으로 걸어왔던 보쿠토가 충격 받은 얼굴로 그런 쿠로오의 등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카아시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스파팟 움직였다.
곧 아카아시가 내린 선택은, 자신도 슬쩍 츠키시마의 곁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었다.
“여, 체력 좀 더 길러야겠는데, 츳키 군?”
“하아, 하아..”
“저 꼬맹이는 아직도 팔팔하잖아?”
“저 녀석과는 비교하지 말아주시죠..”
쿠로오는 자연스레 자신이 마시고 있던 물병을 내밀었고, 츠키시마는 그것을 받아들이려 손을 내밀었다.
보쿠토 씨,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 같네요. 아카아시는 그리 생각하며 불쑥 자신이 들고 있던 병을 내밀었다.
“피곤하시면, 저희 팀 프로틴 드셔보시겠습니까. 안 마신 새것입니다만.”
“어라어라? 아카아시 네가 왠일로?”
“아.. 하지만 이거.”
“받아둬~ 후쿠로다니가 먹는 프로틴 비싸고 맛있기로 유명하다고?”
“그냥 드세요. 사실 속이 안 좋아서 지금 먹으면 체할 것 같거든요.”
“감사합니다.”
예의바르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츠키시마는 병뚜껑을 열어 천천히 프로틴음료를 마시기 시작했다. 보통 텁텁하거나 요상한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미숫가루 맛과 비슷한 것이 맛도 괜찮았다.
금새 한통을 비워낸 그가 병을 되돌려주며 인사를 하고 먼저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보쿠토는 그제서야 스스슥 쿠로오 옆으로 다가와 쿠로오에게 물었다.
“카라스노의 1학년 MB맞지?”
“아아. 맞아.”
“키 크네~ 얼굴은 아직 소년인데!”
푸핫, 쿠로오는 보쿠토의 말에 바람 빠지는듯한 웃음소리를 터뜨리고 말았다. 소년이라, 말끝마다 하트를 붙이는 소년!
제 웃음을 보쿠토가 이상하게 쳐다보자 쿠로오는 얼른 변명을 덧붙였다.
“츳키, 그 녀석은 소년이 아니라 청년이지, 청년.”
“청년? 그럼 난!? 역시 어른인가!”
쿠로오는 대뜸 그렇게 물어오는 보쿠토의 얼굴에 씨익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흠, 보쿠토 넌.. 어린이?”
“뭐! 내가 어린이면 쿠로오 넌!”
“나는 어른이지요~”
여느때와 같은 느물느물한 말에도, 보쿠토는 어쩐지 정말 기분이 상한 기색이었다. 쿠로오가 어라, 하고 눈을 깜빡이는 사이 보쿠토의 얼굴엔 평소와 같은 장난기가 담겨, 방심한 쿠로오의 배에 바디어택을 먹였다.
“크어억!!”
“봐라! 이것이 어린이의 힘이다!!”
“오옷..! 저렇게 깔끔한 인사이드태클이라니!!”
“토라..”
보쿠토와 쿠로오는 낄낄 웃으며 체육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쿠로오의 대퇴부와 어깨를 손으로 꽉 짓누른 보쿠토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헤이헤이헤이! 하고 일어나려는 쿠로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어른이라면 힘으로 빠져나가보시지~”
“우와아.. 힘만 센 어린이입니까, 보쿠토 군?”
“이의있소! 적어도 청년으로 랭크업 시켜달라고!”
주장 둘의 체통도 체면도 없는 장난질에 체육관의 다른 학교들은 그러려니 하는 모양새였다. 카라스노의 몇몇만이 익숙하지 않다는 얼굴로 하하.. 어색하게 웃을 뿐이다.
한참동안 보쿠토의 태클에서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쓰던 쿠로오가 이내 추욱 늘어지고, 그래 너 청년 해. 라는 쿠로오의 말에 보쿠토가 양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이겼다!!”
쿠로오는 흐늘흐늘 손을 들어올렸고, 보쿠토는 쿠로오의 손을 잡아당겨 일으켜세웠다.
“보쿠토 청년, 힘이 아주 좋은데..?”
“헤이헤이헤이!! 나는 에이스니까 당연하지!!”
아뇨.. 아무리 봐도 보쿠토 상 방금 츠키시마군에게 졌어요. 졌다구요.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이 튀어나가려는 자신의 입을 꾹 닫았다.
* * *대망의 진실편* * *
‘아악..! 보쿠토 그 자식이 여고생 말투놀이 따위를 하는 바람에!!’
쿠로오 테츠로는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침대에 놓인 휴대폰에서 반짝반짝 답장이 왔다는 표시가 나고 있었지만, 잠시 본인 내면의 괴로움에 심취한 쿠로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절망과 수치의 몸짓으로 감정을 조금 털어낸 쿠로오가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휴대폰에 슬쩍 손을 가져갔다.
졸려서 몽롱한 때에 둘과 한꺼번에 문자를 하면 안 되었다.
보쿠토에게 보낼 문장을 츳키시마에게, 그리고 츳키시마에게 보낼 문자를 보쿠토에게 각각 바꾸어 보내버렸는데, 내용은 둘 다 이만 잘 자라는 내용이었지만 문자의 온도가 확연하게 달랐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상대방의 반응도..
츠키시마 [잠들기 전엔 성격이 바뀌시는 타입이신가요.]
보쿠토 [뭐야 테츠 싸늘해 너! 일단 잘 자!! >ω</]
“크어억...”
부끄러워!! 지금 당장 폭발해라 지구!!
절망은 짧았다. 쿠로오는 심호흡을 하고는 이 어색하고 민망한 상황에서 탈피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쿠로오의 손가락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츳키 너 문자 너무 차갑다고? 그 대신 쿠로오씨가 힘낸 거랍니다?]
[그동안 별 이야기 없으셨잖아요.]
[기다렸답니다.. 얼른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를..(´;ω;`)ウゥゥ]
[그 말은 제가 문자보내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계속 이런 식으로 문자를 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어라 들켜버렸다냥(´ ▽`).。o♪ ♥✿ ♪.]
[그만둬주세요.. 자꾸 현실의 쿠로오씨가 떠올라서 괴롭네요.]
“큭..”
쿠로오는 청산가리를 삼키는 심정으로 휴대폰을 부여잡았다. 나도 힘들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온 이상 쿠로오는 민망함을 무릅써야만 했다. 한껏 귀여움을 뽐낸 여고생 이모티콘을 팍팍 써가며 문자하는 것에서 묘한 희열이 느껴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하다냐!(*` Д´)/ 그거 차별이라구요!]
[하아.. 알겠습니다. 어떤 문자를 원하시는지 말해보시면 최대한 수용해볼께요.]
쿠로오는 뜨거운 눈물을 주륵 흘렸다.
드디어..! 쿠로오가 원하는 대답을 끌어냈다.
의외로 순순히 이렇게 말해오는게, 정말 쿠로오 자신의 저 이모티콘을 보기가 얼마나 괴로우면 저러나 싶었다.
쿠로오는 한껏 귀여운 말투로 적당히 오타내기, 이모티콘쓰기, 가끔 어미를 냐로 바꾸기 따위의 규칙을 열거했다. 츳키시마는 해당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했고 결국 타협한 것이,
아마 더이상 문자가 오지는 않을 것이다. 쿠로오는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아 침대옆에 내려두고,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새벽 한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쿠로오는 입가에 피식 웃음을 걸고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처음 실수했을 땐 드래곤볼을 모아 지구멸망을 시켜달라고 하고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어째 괜찮게 해결된 것 같았다. 쿠로오는 내일 어떤 문자를 보낼지 미리 생각해두며 눈을 감았다.
츠키시마도 하도 웃어 약간 저린 입가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막 전등불을 끈 참이었다.
* * *
그 둘은 하루도 빼먹지 않고 문자를 주고받았다. 쿠로오는 이 귀여운 말투가 꽤나 중독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츳키뿐만 아니라 보쿠토와 문자할때도 가끔 저장해둔 이모티콘이 튀어나가는 바람에 수습에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런데 정말 꾸준하시네요 그 말투♡]
[호에에에~?(⋈◍>◡<◍)。✧♡]
[귀여운건 이모티콘이지 쿠로오씨가 아니라구요♡]
탈의실에서 휴대폰을 확인하던 쿠로오의 입가에 푸흡, 웃겨 죽겠다는 표정이 떠올랐다가 금새 사라졌다. 츳키녀석과 문자할 때마다 웃겨서 실실 웃고 있고 있는 것을 부원들에게 들킨지도 꽤나 되었다. 여자친구가 생겼나봐! 하고 수근거리던 부원들은 이내 츳키의 하트범벅 문자를 보고는 배를 부여잡고 웃다가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다음날 토라의 문자는
[주장, 저희 프로틴 조금만 더 맛있는걸로 바꿔주세요(´;ω;`)]
였고 쿠로오는 수업 중에 웃다가 교실에서 쫓겨날뻔 했다.
* * *
그리하여 상황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친한 후배의 하트붙은 문자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해버린 쿠로오가 남자를 연애대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보쿠토는 과연 남자로써 쿠로오의 첫 연애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카라스노 최연소 청년은 과연 쿠로오의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연애사업을 도우며 현자타임을 맞을 때는 언제일 것인가..
또 제멋대로 길어지려고해서 어설프게 잘랐습니다 흑흑 나름대로 보쿠로데이 연성..! 그렇지만 썸은 츳키랑 타는 쿠로오...!!
아쳐가 랜서를 감시하기 시작한 지도 거의 한달이 되어가고, 랜서는 이제 토오사카 저에서 저녁밥을 먹는 날보다 먹지 않는 날이 적어질 정도로 궁병의 저녁밥에 익숙해졌다.
린과 시로를 비롯한 다른 마스터들과 서번트들이 절찬리 오해를 해 준 덕분에 그 둘을 방해하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원거리에서 랜서를 감시하고 또 가까이에서 저녁을 먹으며 관찰하기 시작했음에도 딱히 수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 정도다. 어느 날은 크게 마음을 먹고 어디서부터 마력을 공급받고 있느냐 물었더니 나도 모른다, 라는 심플한 대답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 랜서의 대답이니만큼 거짓은 없을 테지만 그런 맥빠지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처음 랜서를 감시하기 시작할 때의 초조함은 없었다.
‘이대로 랜서가 돌발행동하지 않도록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 하다는 건가.’
팔짱을 끼고 나름대로 고민해보지만 워낙 가진 정보가 적다. 애초에 랜서를 감시해야겠다는 충동도 어느날 갑자기 불쑥 튀어오른 것 아니었던가.
느긋하게 낚싯대를 드리우는 랜서의 뒷모습을 약 7km거리의 바깥에서 지켜보던 아쳐는 시간을 확인하고 빌딩을 가볍게 박찼다. 오늘의 저녁은 닭다리살 오븐 구이로, 슈퍼마켓의 4시 타임세일에 맞춰 가지 않으면 메인 메뉴를 준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단 몇초 차이로, 아쳐는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아쳐가 서 있던 빌딩을 바라보는 랜서를 놓쳤다.
*
닭 허벅지살을 뼈에서 분리하고 칼집을 내어 우유에 재워둔다. 소금과 후추를 뿌려 간을 한 뒤 녹말가루를 묻히고 은박지로 감싼 뒤 낮은 온도에서 오래도록 익히면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닭고기가 완성된다.
곁들일 소스를 두어가지 준비하고, 야채를 크게 썰어 토마토 소스에 볶아 양식풍의 반찬을 만드는 아쳐의 손놀림은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영령이 되어도 퇴색되지 않는 그의 요리의 재능은 그야말로 완벽해서, 그가 대충 소금을 집어 넣고 도마에 남은 양념장을 대충 털어넣어도 완성된 요리의 맛은 깊은 풍미와 음식에 대한 절도가 있었다.
요리에 쓰인 도마와 그릇들을 미리 설겆이해 두고 새우가 듬뿍 든 에스닉한 스타일의 샐러드를 준비하고 있던 아쳐는 시간 맞춰 현관벨을 누르는 랜서를 맞이하러 현관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알록달록한 하와이안 셔츠를 걸친 랜서에게서 담배 냄새가 훅 풍긴다. 아쳐는 여, 하고 가볍게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랜서의 앞을 팔로 가로막았다.
“응?”
“담배 냄새가 난다. 달리기라도 해서 냄새를 빼고 와.”
“뭐어? 뭐 그렇게까지..!”
“이 집은 린이 사는 곳이다. 안 그래도 담배 냄새는 쉽게 빠지지 않는데, 랜서 넌 설마 혼자 사는 여자아이의 집에 담배냄새를 묻힐 셈인가?”
아쳐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점이 하나 없었다. 랜서는 쳇, 하고 혀를 차더니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가 금새 다시 돌아왔다. 잠시 영체화라도 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이 근방을 달려서 냄새를 뺀 건지는 모르지만 아쳐는 결과에 만족하기로 했다.
식사를 마친 랜서는 평소처럼 잘 먹었다며 배를 두드리더니 지친 듯이 거실의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제는 아주 제 집마냥 자연스럽다. 아쳐는 직접 만든 브레드푸딩을 접시에 담아 가져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식사를 하고 바로 드러눕지 말아라.”
“켁, 잔소리 하는 엄마같다는 소리 자주 듣지 너?”
“글쎄? 금시초문인데.”
태연한 얼굴로 코웃음을 치는 아쳐를 올려다보던 랜서가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으쌰 일어났다. 손으로 뒷목을 주무르는게 정말로 뭔가 피곤해 보인다.
서번트인 저 창병이 체력적으로 피로감을 느낄 리는 없을텐데..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순식간에 아쳐의 눈매가 바짝 곤두섰다.
“뭐, 너에게라면 말해도 되겠지.”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고쳐앉은 랜서는 제 앞에 놓인 빵을 건드리지도 않고 턱을 괴고 팔꿈치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아쳐는 신경쓰지 않는 척 스푼으로 막 오븐에서 나온 푸딩의 배를 갈랐다. 표면에 뿌려진 땅콩 크럼블 아래로 커스터드 크림과 빵, 럼레이즌이 듬뿍 들어 있었다. 만족스러운 눈으로 제대로 구워진 브레드푸딩을 한번 확인한 아쳐는 그것을 큼직하게 스푼으로 들어올렸다. 딱 그 때였다. 랜서는 꽁치구이가 맛있었다와 비슷한 어조로 툭 내뱉었다.
“요즘 감시당하고 있어.”
쨍그랑.
손에서 스푼이 미끄러지고 순식간에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아쳐의 정신력은 제 할일을 다 해냈다.
그의 피부색이 조금만 더 희었더라면 순식간에 시커매진 안색이 도드라졌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랜서는 지근거리의 마초를 그리 자세히 관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쳐는 그 말만 내뱉고 침묵하는 랜서를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둔 채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그보다 지금 이 사실을 나에게 말하는 이유는..!?
이유를 듣기 전에는 살려놓겠다는 뜻인가..?
순식간에 수만가지의 가능성과 선택지가 머릿속을 희뿌옇게 채웠다가 가라앉았다. 느껴지는 살기는 없다. 간신히 태연을 가장하고 랜서를 올려보자 그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역시.. 너도 알고 있었냐.”
“...? 무슨 소리지?”
아쳐는 자세를 고쳐앉으며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예상하던 최악의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아닌 제 3자가 랜서를 감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순식간에 불쾌감이 스물스물 피어올라 아쳐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랜서의 시선에 금새 표정을 정리하고 잡생각을 털어낸다. 상식적으로 그런 감시자를 자신이 놓치고 있을리 없으니 랜서가 말하는 감시자는 아마 자신이 맞을 것이다.
‘설마 알아차렸을줄은 몰랐지만.’
*
아쳐 녀석, 모르던 소식을 들은 것 치곤 제법 침착한 기색이었다. 짐작하고 있던 건가.. 궁병 클래스 보정인지 원거리 탐지 능력은 자신보다 뛰어난 모양이었다.
사실 그가 감시의 시선을 알아차린 건 랜서 클래스 보정보다는 본인의 감에 의한게 컸기 때문에 비교대상은 아니었지만.
“자랑은 아니지만 워낙 험하게 자라서 말야, 그런 식의 시선에는 꽤 익숙하거든.”
“호오..”
언제부터인가 혼자 있을 때면 뒤통수를 살살 간질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 했다. 확신하지 못하는 건 랜서 본인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약한 느낌이라, 처음 몇번은 그저 착각인가 하고 넘겼기 때문이다.
아쳐는 뭔가 계산이라도 하듯 진중한 얼굴로 눈을 몇번 깜빡이다가 물었다.
“착각이 아니라고 확신한 이유가 있나?”
“그런 건 딱히 없어. 그냥 그 수상한 느낌이 계속되니까 대충 알아차린 거지.”
착각인가, 하고 넘기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그게 일주일 열흘이 되면 확신이 된다.
특히 정기적으로 머무르는 아르바이트 가게나 낚시터 쪽에서는 시선이 더 노골적이다. 그런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본인의 행적이 노출된 것 같다는게 쿠훌린의 주장이었다.
“짐작가는 쪽이라도?”
아쳐는 테이블 가운데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스푼을-방금 손에서 놓친 것이다.- 다시 제 앞에 똑바로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랜서를 바라보았다. 역시 여난의 남자, 세계에서 한 손에 꼽히는 미모와 전투력을 가진 여자들 사이에서 할렘을 구사한 남자다운 평정심이었다.
랜서는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목을 뒤로 젖혀 거하게 하품을 했다.
“전~혀 모르겠는데?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 것 같긴 한데, 이상하게 너랑 있으면 감시의 눈길이 없어지는 느낌이란 말이지.”
“콜록, 콜록쿨럭, 쿨럭..!!!!”
그 말에 아쳐는 심근경색이 온 사람처럼 가슴을 부여잡고 거세게 기침을 했다.
이건 위험하다, 정답에 거의 근접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랜서가 붉은 창을 내지르며 범인은 너였냐! 라고 외치는 건 아닐까 싶어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아무래도 네가 아쳐 클래스라는것 까지 아는 것 같단 말야.. 거 참. 만만하게 보인건가.”
“큼, 뭐라고?”
“섣부르게 나섰다가는 궁병의 시야에서 못 벗어날 거 아냐. 뭐, 너무 긴장하지 마라, 지금은 시선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 헛수고야.”
랜서는 그렇게 말하곤 숟가락으로 푸딩을 푹 퍼서 한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달고 따끈하고 부드러워서 추운 겨울날 이런 걸 먹어버렸다간 일주일동안 다른 건 아무것도 못 먹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랜서가 푸딩에 열중하는 사이 아쳐는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저 창병은.. 무려 5km가 넘는 거리에서의 내 감시를 알아차린데다가 내가 주변에 있을 때는 감시가 없다는 사실까지 깨달아놓고서 감시자가 나란걸 특정하지 못한 상황인건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머리가 좋은 것과 머리를 잘 쓰는 것은 약간 다른 문제고.. 저 창병은 자기 자신의 보전이나 이득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걸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타입의 성격이었다.
애초에 육안으로도 확인하기 어려운 먼 거리에서의 감시를 알아차린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상황 아닌가?
고민하는 것처럼 한참동안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던 아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감시당하고 있는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겠나?”
“아, 시도해봤는데 영 가물가물 하더라고. 그런데 이거 맛있다? 좀 달긴 해도!”
“원래 달게 먹는 디저트다. 차를 내왔으니 같이 먹어라.”
아쳐는 여러가지 의미가 섞인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쿠훌린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리고는 시침을 뚝 떼고는 어렵사리 고민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어쌔신의 기척 차단인가?”
“아니면 내가 감지하지도 못할 장거리에서의 감시나, 아니면 사역마같은 걸 쓰고 있을 지도 모르지.”
“마술협회를 염두에 두고 있나?”
“교회까지도. 뭐, 알겠지만 지금 상황이 여러모로 수상하잖냐. 성배전쟁이 끝나도 서번트가 그대로 현계해 남은 상황은 처음이라고 하니까.”
“흐음.”
설마 그런 쪽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을 줄이야..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이미 아쳐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상태였다. 랜서는 디저트 그릇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은 뒤 그대로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그러니까 신세 좀 지자!”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
“생각해보라고, 어디서 누가 보고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단 말이다. 덕분에 낚시도 공치고 젠장.. 아무튼 아가씨는 없다고 들었으니까 하루 신세진다?”
저 창병이라면 감시의 눈길이 있든 말든 신경쓰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후.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이..
‘......’
망상으로 도피해봤자 현실을 깨닫고 나면 비참할 뿐이다.
살짝 자괴감을 느낀 아쳐는 술도 마시지 않고 그대로 드러누워 푸 하고 잠들어버린 쿠훌린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거실의 불을 끄고 담요를 가져와 위에 덮어주었다.
그에게 딱히 필요는 없겠지만 하와이안 셔츠를 대충 입은 남자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아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당장이라도 랜서의 감시를 철회하고 모른 척 시침을 떼야 하나? 그러나 타이밍 좋게도 아쳐에게 말한 뒤로 뚝 끊긴 시선을 랜서가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일곱살이라도 두 사건의 연관성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아쳐는 자신이 랜서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꼭 숨겨야 하나 하는 데까지 사고가 미쳤다.
어차피 아군도 뭣도 아닌 상황인데, 한때 적이었던 서번트를 감시하는 게 문제될 일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이유를 듣고 깔끔하게 납득해버릴지도 모른다.
“흐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더이상 랜서를 저녁식사에 초대할 명분이 없다.
불현듯 떠오른 문장에 아쳐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정의되지 않은, 이불 아래 놓인 콩처럼 은근하게 머리 한구석을 찌르던 위화감을 막상 찾아내고 보니 어이없을 정도로 초라했기 때문이다.
고작 이것 때문에 그렇게 초조해 했었단 말인가. 그런 거라면 해결은 간단하다.
랜서의 감시를 중단하면 된다.
애초에 랜서가 마스터의 마력공급 없이 현계하고 있는 특이상황 때문에 감시하기로 결심했을 뿐이니 그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아쳐도 딱히 그를 감시할 이유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교회 밖으로 나온 랜서를 멀리서 감시하고, 랜서가 교회로 돌아가면 장을 보고 식사를 준비하거나 집안일을 한다.
아쳐의 일과는 여전했지만, 평소와 달라진 점이라면 역시 랜서와 좀 더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쳐 나름대로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서번트들-이 볼 때는 당연히 갑작스레 가까워진 둘의 사이가 의아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게 그 아쳐와 랜서 아니었던가. 바로 직전의 성배전쟁에서 둘은 정면승부를 두번 이상 겨뤘던 앙숙이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텐데..
시로의 생각은 거기에서 끊겼다. 적당히 가까워지자 먼저 아는 척을 해 준 랜서 덕분이다.
“여, 꼬맹이!”
“안녕, 랜서. 오늘도 성실하네.”
“오늘도 애늙은이 같은 소릴 하는구만. 찬거리 사러 왔냐?”
“오늘은 돼지고기를 살 예정이라, 다른 용건.”
“호오?”
생선을 사러 왔다면 그것도 놀라웠을 테지만-이미 세이버의 마스터는 이틀 연속으로 생선을 사 갔다.- 다른 용건이라니?
몇 번 저녁밥을 얻어먹고 신세를 진 덕분인지 상당히 거리감이 줄어든 상태지만, 그렇다고 거리낌 없이 다가와 친한 척 할 녀석은 아니었다.
랜서가 팡팡 내리친 어깨를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내던 시로는 주변에 다른 손님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랜서. 혹시 오늘 저녁 시간 괜찮아?”
“흠? 선약이 있는데.”
“후지 누나가 좋은 청주가 들어왔다고.. 응?”
“타이가 누님이? 아~ 그때 얘기한 그 술인가, 아까운데.”
“서, 선약이 있다고!?”
시로는 태연히 나온 랜서의 말에 솔직히 깜짝 놀랐다. 선약, 그것도 저녁 약속? 그런 평범한 사람같은 말을 하다니? 랜서는 시로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시로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얼굴을 바짝 가져다댔다.
“뭐냐, 그 반응? 어째 내가 선약이 있을 리가 없다는 얼굴인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라?”
“제대로 인생을 즐기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어.”
“......”
조금 놀려주려고 했는데 나온 말이 이렇게 진지하다 못해 김빠지는 대답을 하다니. 랜서는 심드렁한 얼굴로 시로의 어깨에 걸쳤던 팔을 들어올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런 고로, 타이가 누님이랑은 따로 날을 잡을 테니까 그렇게 전해달라고.”
“어, 응..”
돌아선 채 손만 흔들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랜서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로는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 순간 누구와 한 약속인지 물어볼 뻔 했다.
‘일반인이려나? 아니면 역시 서번트..?’
하지만 역시 너무 캐묻는 것 같으니까 묻지 않는게 좋겠지.. 시로는 후지 누나에게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다 맞은편에서 오는 인영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어깨를 부딪혔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전봇대나 바윗덩이에 부딪힌 것 같은 충격이었지만, 시로는 얼른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 죄송..”
합니다.. 라고 마저 나오려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짙은 갈색 피부와 이마를 멀끔하게 드러내고 넘긴 은발, 그리고 사나운 분위기를 한껏 내리누르는 안경을 쓴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린의 서번트, 아쳐.
아쳐는 시로를 한번 슬쩍 쳐다보고는 그대로 그를 지나쳤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아쳐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은 시로는 쾌활하게 한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아쳐를 반기는 랜서의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둘, 저렇게 친했던가?
“여어! 여기까지 왠일이야?”
“저녁 식사의 준비다.”
“그거라면 그냥 나에게 부탁하면 됐잖아?”
“글쎄.. 아직 정해진 게 없어서. 점원의 추천을 받아 볼까.”
“흠. 그럼 고등어 어때? 수입이긴 하지만 질이 좋거든. 뭣보다 맛있고!”
“염장된 고등어인가? 좋아. 이걸로 하지.”
“그럼 이건 내가 계산할 테니까!”
어째 둘의 대화에 남들을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생략된 것 같은건 기분 탓인가. 랜서가 잽싸게 포장한 고등어를 아쳐에게 넘겨주자 아쳐는 음.. 하고 목을 울리더니 입을 열었다.
“생선구이로 하려면 시간을 맞춰야겠군. 퇴근은 언제지?”
“어? 글쎄, 딱히 별다른 일이 없으면 평소랑 같은데.”
“그런가. 그럼 그때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두지.”
“헤에, 고맙다 아쳐!”
랜서가 웃으며 아쳐의 어깨에 팔을 걸치자 아쳐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치웠다. 그리곤 시로가 있는 쪽을 힐끔 돌아본다 싶더니 온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멀어졌다. 시로는 그 광경을 보다 랜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설마..
“저녁 약속이라는게.. 설마 저 녀석이랑?”
“응? 뭐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자주 만나는 거야..?”
“그렇지 뭐, 저 궁병 녀석도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태연하게 빙글빙글 웃는 랜서의 모습에는 다른 꿍꿍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연어 호일구이가 궁금해서 우리 집에 대뜸 쳐들어 온 것처럼 그저 밥이 맛있어서 저 영령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소리인데..
“그릇이 달라..”
“응? 갑자기 뭔 소리냐?”
조금 친해졌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언제는 성격이 마음에 안 든다더니!?
역시 대영웅의 사고방식은 모르겠어! 문화가 달라! 시로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
“시로, 너도 봤어!?”
“토오사카 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국그릇을 하나씩 앞에 놓는 시로의 말에 린은 으으 하고 양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알다마다! 최근 저 둘의 데이트 장소로 집을 빌려주고 있는 건 나란 말이야!
그런 둘을 바라보던 세이버도 눈을 반짝 빛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상점가에서 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시로.”
“세이버 너도?”
“네. 때는 사흘 전, 시로의 심부름으로 식초를 사러 슈퍼마켓에 간 날이었죠.”
“미안. 식초는 찔끔찔끔 쓰다 보니 언제 떨어졌는지 모르게 다 써버려서..”
“그런 사족은 됐어! 그보다 둘이 함께 슈퍼마켓에 있었어?”
세이버의 말에 린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며 외쳤다. 세이버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이 한개의 쇼핑 카트를 밀고 있었습니다. 맥주와 저녁으로 먹을 식재료를 사고 있던 것 같습니다만.”
“우와아..”
린이 게이 부부.. 하고 중얼거리자 시로는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거렸다.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지만 부부라니.
“많이 친해진 것 같지만, 부부까지는 아니지 않을까? 하하, 설마. 그 둘인데..”
“아냐, 그게 아냐..!”
린이 주먹으로 식탁을 가볍게 탕 내리치자 시로가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로 린을 쳐다보았다. 자식도 아니도 소환한 영령의 교제관계에 참견하는 못난 마스터는 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태클을 걸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일까..
식탁에 얼굴을 박은 채 스산하게 입을 여는 린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흘려듣고 말았을 정도로 가늘게 흘러나왔다.
“며칠 전에 말이야..”
“응. 도쿄 쪽에 볼일이 있다고 학교를 결석했을 때?”
“맞아. 그 때. 아침 첫차를 타고 도착했는데 이미 등교시간도 애매하게 지났겠다, 그냥 집에 가서 쉬자 하고 집으로 갔단 말이지..”
혹시 시간이 된다면 바로 학교로 등교하기 위해 교복까지 챙겼지만 중간에 기차가 연착되면서 시간이 애매하게 틀어져버렸다.
어정쩡한 시간대라 교복을 입은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일탈한 느낌을 만끽하며 가볍게 집으로 돌아온 그녀였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토오사카 저로 향하는 길은 한산하다. 그도 그럴게 이 길의 끝에 있는 것은 그녀의 집 뿐이라, 여기까지 올라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니까. 그래서 설마 이런 아침에 그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사람이라면 랜서를 말하는 겁니까, 린?”
“그래, 맞아..”
여어 아가씨, 오랜만이야. 하고 가볍게 인사하는 랜서는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린에게 손을 흔들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린을 지나쳐 내리막길을 경쾌하게 내려가는 뒷모습. 그러니 랜서가 온 방향은 토오사카 저택이 있던 방향이라는 뜻이다.
린의 말이 이어질수록 시로의 얼굴이 설마, 하는 기색으로 물들었다.
“그대로 달려가서 문을 열고 집으로 뛰어들어갔더니..”
“가, 갔더니..?”
“아쳐가 봉지에 맥주캔을 잔뜩 모아두고 청소를 하고 있더라고.”
숨을 헉헉 몰아쉬는 린을 바라보는 아쳐의 얼굴은 태연했다. 오히려 대체 무슨 일인가 린? 하고 되묻기까지 하는데 린은 거기에 대고 그걸 몰라서 물어!? 하며 버럭 외치려다가 간신히 진정했다.
“그, 그냥, 헉, 집 주인으로써 물어보는, 허억, 건데, 말이야, 아쳐.”
“뭔지는 모르겠지만 급한 일이 아니라면 숨을 좀 고르는게..”
“랜서랑, 헉, 잤어..?”
린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미 어떤 대답이 올 지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서번트가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해 주길 바랬다!
그러나 그녀의 서번트는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얼굴로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서..?”
“소파에서 재웠는데.. 걱정 마라. 청소는 깨끗히 해 두었으니까.”
린의 목이 녹슨 로봇처럼 끼긱, 옆으로 돌았다.
아버지 대부터 십년도 더 애용하던 소파는 간밤에 건장한 남자 둘이서 뒹굴었던 흔적이라곤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은 상태다. 오히려 평소 이상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여전히 철저한 아쳐의 청소 솜씨에 다시금 놀라버렸다..
그러나 린은 이제 평소처럼 태연하게 저 소파에 앉아 홍차의 맛을 음미하는 행동 따위는 하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린은 느릿하게 어깨를 바로세우고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중얼거렸다.
“휴.. 아냐.. 그래, 일반인을 끌어들이는 것 보단 낫다고 생각해.”
“노, 놀랍군요. 설마 둘이 함께 밤을 보내는 사이였을 줄이야.”
적나라한 세이버의 말에 시로와 린이 동시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으으.. 하며 손부채질을 했다. 이 중에서 제일 소녀같은 생김새인 주제에 세이버는 그저 놀라기만 했다는 듯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다.
“어쩐지 의외네.. 하하, 하..”
“더 짜증이 나는건 그런 와중에도 아쳐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이거야.. 랜서를 만나기 시작한것만 빼면 평소랑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걸!”
“그렇지만 랜서와 만나면서 사람이 확 바뀐다던가 하는게 더 무섭지 않아?”
“웃. 그러고 보니..”
랜서 앞에서만 다정하게 구는 아쳐를 상상한 린이 소름끼친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앞으로 랜서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 지 모르겠어.”
“글쎄, 그냥 평소대로 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쳐가 딱히 랜서에 대해 린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지..”
하긴. 린은 아쳐를 처음 소환하던 때를 떠올렸다.
령주로 묶인 계약임에도 아쳐는 이름을 교환하기를 원했다. 고지식하고 요령 없는 영령이라고 생각했었지. 만약 아쳐가 랜서와 정말로 깊은 관계가 되었다면 마스터인 자신에게도 분명 말을 하고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할 것.. 거기까지 생각을 진행시킨 린은 목덜미에 오스스 돋는 소름에 다시 식탁 위로 무너져내렸다.
“그럼 뭐야, 둘은 그냥 육체관계 뿐이라 이거야!? 더 민망하잖아..!”
“왜 갑자기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린. 밥이 식습니다.”
*
린이 어떤 치명적인 오해를 하든 말든 아쳐는 아주 당당했다. 부끄럽게 숨길 일도 쑥쓰럽게 어물쩍 넘길 일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랜서를 거두어 밥을 해 먹이는 것은 본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 린이 어째서 랜서를 집에까지 끌여들이는지 이유를 묻는다면 솔직히 대답해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린은 나름대로 이유를 파악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쳐에게 더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고, 그저 다음날 랜서가 방문할 예정이라 말하면 자리를 피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히 약속을 잡거나 외출을 해버렸다.
오죽하면 랜서가 여기에 올 때마다 그 아가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린은 토오사카가의 당주니까. 평범한 학생보다는 바쁘게 살고 있지.”
“그래도, 여기 그 아가씨네 집 아냐? 집 주인을 한번도 못 봤다는건 역시 이상하잖아!”
“어쩌면 일부러 너를 피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그것도 나름대로 억울한데!?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랜서는 그렇게 외치며 아쳐가 접시에 예쁘게 깎아온 사과조각을 맨손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옆에 가지런히 놓인 포크가 안쓰러울 정도라 아쳐는 그 광경을 보고 도구를 이용하라며 타박했지만 랜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늘의 반찬은 당면을 넣은 고기야채조림과 직접 튀긴 크로켓, 그리고 수제 피클을 포함한 반찬 몇 가지였다. 운동부 고등학생이나 먹을 헤비한 식단이었지만 랜서는 부담스러운 기색도 없이 음식을 맛있게 먹어치웠다.
“그래서, 아가씨는 내일도 외출인가?”
“내일도가 아니라 이번주 내내 집을 비운다.”
정확히는 시계탑의 호출이었지만, 자세한 것까지 이야기해 줄 필요는 없겠지. 담백한 아쳐의 대답에 랜서는 자리를 고쳐앉고 한 손으로 술을 들이키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오, 그럼 내일모레 한잔 어때? 술은 내가 사 올 테니까!”
“식사에 곁들이는 정도라면 나쁘지 않지.”
“아니, 그거 말고! 제대로 안주를 만들어서 마셔보자 이거지! 크.. 그때 꼬맹이 녀석이 만들어준 안주가 괜찮았는데, 좀 만들어달라 그럴까?”
“......”
랜서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아쳐의 자존심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스크래치가 나고 말았다. 내 요리를 먹고 있으면서 지금 그 에미야 시로의 요리를 맛있다고 칭찬했단 말인가..?
아쳐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랜서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내가 내일 꼬맹이에게 부탁을 해 볼 테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아쳐가 드물게 랜서의 말허리를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겉보기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위험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안주는 이쪽에서 전부 준비하지. 세이버의 마스터에게 부탁할 필요는 없다.”
“엥, 아니 그래도.”
“먹고 싶은게 있다면 지금 말하는게 좋을 거다, 랜서.”
“뭐어..”
랜서는 어쩐지 민망한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지뢰를 밟았나? 생각해보니 요리사-이미 랜서 안에서 아쳐의 이미지는 이렇게 고정되어버렸다.- 앞에서 다른 사람의 요리를 칭찬하는 건 매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괜찮잖아? 네 요리는 다 맛있으니까.”
“크흠, 흠.”
랜서가 사과를 볼에 가득 집어넣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소리에 아쳐는 급히 입가를 가리고 기침을 했다.
아쳐는 그간 랜서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들, 혹은 딱히 알고 싶지 않았지만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을 곱씹으며 평소처럼 랜서의 주변을 감시하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아쳐의 눈가가 가느스름해지고 입술이 언짢게 삐뚜름해졌다.
세이버의 마스터.
랜서를 감시하다 보면 그도 몇번이나 덩달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낚시터로 랜서를 만나러 오기도 하고, 오며가며 상점가에서 알바하던 랜서를 지나치기도 하는데 오늘은 생선을 사기 위해서 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랜서와 몇마디 이야기를 하는 듯 하더니 평소처럼 생선을 사는 게 아니라 어깨를 몇 대 얻어맞고는 그대로 자리를 이동했다. 오며가며 인사를 할 정도로 친해진 건가.
상점가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시로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눈길은 금새 거두어졌다. 원래 목표인 생선가게 종업원을 감시하는데에도 시간이 모자란 상태였다.
‘흐음.’
그나저나 의외로 에미야 시로와 사이가 좋다는 사실이 놀랍다.
창병 쪽에서야 그를 꺼릴 이유가 없지만 반대편은 상대방에게 한번 살해당했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아무리 집 안에 세이버가 있다곤 하지만 몇번씩이나 랜서를 집 안으로 들여 저녁밥을 해 먹이다니? 좋게 말해 간이 부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배알도 없는 놈이다.
속으로 세이버의 마스터에 대해 혹평을 날리던 아쳐는 생선가게 지붕 밖으로 나와 갑자기 이곳저곳을 둘려보기 시작하는 랜서의 행동에 숨을 죽이고 자세를 낮췄다.
자신을 눈치챘을거라고는 생각치 않지만 그 랜서를 상대하는데 방심할 필요는 없겠지.
그 상태에서 바로 영체 상태로 변한 뒤 바닥을 박차고 미리 봐두었던 B포인트의 빌딩으로 이동했다.
랜서는 심드렁하게 목 뒤를 쓸어올리더니 오수를 쫓는 것처럼 쭈욱 기지개를 펴고 하품을 한다. 단순한 기지개로 보이지만 아니다. 아쳐의 시선을 느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팔다리의 근육을 잔뜩 긴장시키는 듯 했다.
하긴, 오랫동안 전투 비슷한 소요도 없었으니 몸이 찌뿌둥하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평소 그가 입던 평상복보다 품이 넉넉한 윗옷을 걸쳤지만 아쳐는 그의 몸매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비단 그의 상상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몇 번이나 목격한 그의 전투복장 때문이었다.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한 타이트한 복장, 마른 뼈대에 흑표범처럼 날렵하게 붙은 근육.
전 세계의 고명한 영령 중에서도 민첩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의 스피드는 특히 유명했는데, 공격과 방어는 물론이고 적과의 간격까지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기량은 다대일의 난투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고 들었다.
쿨란의 맹견이라는 이명을 가졌지만 그의 몸은 대형 고양이과의 맹수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탄력적이었다. 전투광임에도 키에 비해 마른 몸인 것은 그의 전투 스타일 덕분인가.. 아니면 단지 체질일지도 모른다. 상당히 대식가로 보였는데 생전 그의 고향에선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던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의 생전은 기원전에 가까운 과거에 활동하던 무대는 아일랜드다.
기사왕의 말을 들어보면 랜서의 생전에도 식량 사정이 그렇게 풍족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깨에 비해 가는 편인 허리는 장창을 다루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말랐기 때문이라는..
‘메뉴는 고기 위주로 해야겠군.’
단지 기지개를 켜는 창병을 보며 제멋대로 내달린 사고가 마침내 종착지에 도달해 내일 저녁 메뉴를 정해버렸다. 기름진 돼지고기쪽이 좋겠지. 양도 많고 맛도 좋은데다가 값도 소고기에 비해 저렴하다.
함께 곁들일 제철야채를 뭘로 할지 고민하는 사이 랜서는 두 명의 손님을 더 응대했다. 송곳니를 보이며 특유의 세일즈 미소를 짓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아쳐는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랜서가 민간인에게 위협을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쳐는 랜서에게서 시선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
사실 다음날 저녁 메뉴보다 급한 건 오늘의 메뉴다.
간만에 린이 집에서 저녁을 먹는 데다가 다음날 랜서를 토오사카 저택에 초대해야 하기 때문에, 그 허락을 받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힘을 줘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모처럼 금눈돔이라는 고급 재료도 샀겠다, 아쳐는 랜서의 감시를 일찍 중단하고 부엌에 서서 팔을 걷어부쳤다.
일단 도미 서덜을 손질해 핏기를 다시 한번 확실히 제거하고 소금을 뿌려둔다. 옆에 먹기 좋게 손질된 살점에도 소금을 뿌려두고 냄비에 먼저 물을 올렸다.
끓는 물에 참나물을 살짝 데친 뒤 채에 나물을 받쳐 놓는다. 이어 같은 물에 도미서덜을 살짝 데치고 다시 그것을 찬물로 씻어내는 과정으로 비린내를 제거하고, 다시 물을 받아 끓이는 사이 국에 들어갈 야채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메인 재료가 화려한만큼 야채는 냉장고에 잠들어있던 것들을 해치울 예정이었다.
오래된 버섯과 먹다 남아 흰 부분만 남은 대파를 큼직하게 썰고 끓기 시작한 냄비에 도미 머리와 다시마를 넣어둔 뒤, 팔팔 끓기 전에 사이드 반찬을 급히 만들어두었다. 두부 반모에 빻은 깨와 다진 마늘, 된장 약간을 넣고 으깬 뒤 처음에 데쳐 적당히 식은 참나물과 함께 무쳐내는걸로 간단히 완성이다. 그리고 전날 만들어둔 튀긴가지 초절임도 적당히 덜어두고..
국의 밑준비와 반찬을 하나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릇을 씻어 올려두면서 슬쩍 냄비를 확인하니 거품이 제법 올라왔다. 다시마를 건지고 거품을 걷어낸 뒤 다진마늘과 채 썬 생강, 다시국물과 간장을 조금 넣고 불을 중불로 줄여 계속 가열했다. 십분쯤 끓인 뒤 야채를 넣고 린이 올 때까지 마저 끓이면 완성이었다.
이제 메인 요리다. 메인이라곤 하지만 손질한 재료를 찜기에 넣고 찌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별로 부담스러울 것도 없었다.
소금간만 해둔 도미살과 남은 두부 한 토막, 그리고 국에 넣고 남은 버섯을 큼직하게 썬 것을 오목한 그릇에 담고 위에 청주를 살짝 뿌린 뒤 찜기에 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찜기에 생선을 넣고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던 아쳐는 찬장을 뒤져 알록달록한 도자기 찻잔을 하나 꺼냈다.
“기왕 찜기를 꺼냈으니 이거라도 해 볼까.”
나름 힘을 주긴 했지만 요리에 화사함이 부족하다. 한창 때의 소녀인 린에게는 아무래도 점수가 떨어질 것 같다고나 할까. 물과 청주, 맑은다시장국과 끓고 있는 도미국 약간으로 육수를 만든 뒤 계란을 풀어 넣고 차완무시 위에 올릴 고명을 준비했다.
“다녀왔습니다~”
마침 타이밍 좋게도 린이 돌아왔는지 성큼성큼 부엌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라? 오늘 무슨 날이야?”
“별일 아니다. 그보다 식탁에 올 때에는 손을,”
“알았어, 알았어. 일단 외투는 벗고 올께.”
그리고 손을 씻고 식탁에 앉은 린은 거하게 차려진 식탁을 맞이하고는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도미찜에 차완무시, 진하게 우러난 맑은 도미국에 제철나물.. 고급 일식집을 차려도 손색이 없는 비쥬얼과 맛이었다. 그냥 평범한 저녁이라고 치기엔 지나치게 뛰어나다고나 할까..
“노, 놀랐어 아쳐. 양식뿐만 아니라 일식에도 일가견이 있구나..”
부드러운 도미 살점을 입에 넣은 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나 순순히 제 서번트의 실력을 칭찬하는 린의 눈동자에 살짝 경계심이 담긴 것은, 그녀의 서번트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호락호락이라보단 은근히 짠돌이라, 필요한 일이 없다면 이런 사치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갑자기 이런 호화스런 상차림을 받으면 대체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진다니까.
끊임없이 젓가락을 움직이면서도 아쳐의 속셈을 파헤치려는 눈초리를 하는 린의 기색을 알아챈 아쳐는 피식 웃으며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보다, 맛은 어떻지? 간을 일부러 소금으로만 약하게 했는데 싱겁지는 않은가?”
“응? 아냐, 딱 좋아! 도미살도 부드럽고 두부도 향긋하고.. 국도 담백하고 비린내도 없어서 맛있는걸.”
“그렇군.”
“그리고 이 반찬도 중화풍 느낌이라 맛있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아쳐는 이어 린에게 내일 저녁의 스케쥴을 물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린은 순순히 다시 대답을 해주었다.
“내일은 에미야네 집에서 저녁 약속이 있어.”
“그런가. 그럼 괜찮다면 내일 손님을 한 명 초대해도 되겠나.”
린의 젓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초대? 설마 이 토오사카 저에? 마술사가 부재중인 마술사의 공방에 다른 손님을 들이겠다는 말이야? 그러나 아쳐의 무례함을 따지기에는 아쳐가 이렇게 본인의 허락까지 맡아 초대한다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컸다.
생각해보면 지하로 내려가는 문은 숨겨져 있는 데다가 지상층은 단순히 거주공간을 뿐이니까 오픈해도 별 상관은 없지만..
“그러니까, 저녁을 여기서 먹겠다는 소리야?”
“맞다. 저녁밥을 해 주기로 약속한 자가 있어서.”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으음..”
린은 젓가락을 식탁에 쨍강 떨어뜨릴 기세로 놀라 외쳤다.
지금 설마 마스터를 내쫓고 오붓하게 데이트라도 하겠다는거야!? 굳이 자신이 밖으로 외출하는 날을 골라 그 사람을 초대했다는 건 애초에 그 저녁식사에 자신을 포함시킬 계획이 없었다는 것 아닌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아쳐를 바라보며 대답을 종용했다.
아쳐는 그 강렬한 눈빛이 부담스럽지도 않은지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랜서다.”
“..네?”
린의 입이 헤 벌어졌다. 랜... 랜서.. 설마 외국인인가요?
“외국인..도 틀린 말은 아니군. 네가 아는 그 푸른 창병이 맞다.”
“어.. 응? 네?”
“왜 그러지?”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굳은 토오사카의 앞에서 태연하게 반문하는 아쳐의 얼굴에 린은 어쩐지 몸에 힘이 쭉 빠져버리는 느낌이었다. 에미야 군이야 워낙에 별 생각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설마 아쳐까지..?
**
그리고 다음날, 토오사카 저택의 정문을 바라보는 랜서의 표정은 애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린이 느낀 정신적 충격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성배전쟁 당시에도 들어가보지 못한 적진에 지금 와서야 들어가다니, 그것도 그 붉은 궁병의 초대에 의해서 말이지.
‘대체 무슨 꿍꿍이지?’
궁금하지만 이렇게 머리를 쓰는 건 취향에 안 맞는다. 차라리 독이 든 차라도 내오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치고박고 싸우면 되겠는데 문 너머로 솔솔 풍겨오는 기름진 냄새는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설마 진짜로 저녁밥을 차리고 있는 건가.’
그 궁병이? 아니면 설마 그 아가씨가?
후자라면 기꺼이 저녁식사에 응한 보람이 있을 텐데 말이지~
문앞에 서서 뜸을 들이고 있는다 해도 갑자기 무슨 수가 생기는건 아니다. 랜서는 잠기지 않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 현관을 두드렸다.
“시간 맞춰 왔군.”
문이 열리고 부비트랩 대신 뻔뻔한 궁병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어.. 하고 떨떠름한 얼굴로 한 손을 들어올려 인사하자 그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아 집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따라오라는 제스처라 랜서는 신발을 벗고 느릿하게 그 뒤를 쫓았다. 고풍스러운 서양식 저택의 내부는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저녁은 네가 만든 거냐?”
“그렇다만.. 문제라도 있나?”
“그런 건 아니지만..”
진짜로 이 녀석과 단둘이 오붓하게 저녁식사를 해야 하는 건가..?
기척으로 눈치채긴 했지만 그 아가씨는 자리를 비운 듯,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2인분이 다였다. 된장 소스를 발라 구운 돼지고기와 생선이 들어간 맑은 국에 반찬도 세가지나 되는 푸짐한 상이었다. 일단 겉보기로는 합격이지만 과연 맛은 어떨런지.
수상하지만 이미 초대를 받아 식탁을 앞에 둔 상황이다.
밥을 앞에 두고 미적거리는 성격이 아니라 어색하게 식탁에 앉은 랜서는 경계심이 가신 태연한 얼굴로 잘 먹겠습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곤 그 맞은편에서 구운 돼지고기 위에 흑후추를 뿌리는 궁병의 태연한 얼굴을 잠시 빤히 쳐다본 랜서는 먼저 국그릇을 들어 한모금 맛을 봤다. 거의 동시에 랜서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다시마와 야채, 도미뼈와 살점이 하루동안 푹 우러난 깊은 풍미..!
“뭐야, 이거! 맛있어! 어제 사간 그 도미냐!?”
“물론이다.”
눈을 빛낸 랜서는 젓가락을 고쳐잡고 돼지고기를 공격적으로 공략하게 시작했다. 아쳐는 어쩐지 뿌듯한 얼굴로 젓가락을 차분히 움직였다.
“이것도 맛있잖아! 뭐야, 아쳐 너 제법이다!?”
“훗.”
“이건 돼지 아냐? 왜 이렇게 부드럽지?”
“전날 돼지고기를 두들겨 양념에 재워둔 거다. 된장에 들어간 효소가 고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지.”
“심지어 이 해초같은 것도 맛있어! 살짝 매콤해서 고기랑 먹으니까 끝없이 들어가잖아!?”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군.”
랜서는 어쩐지 억울해졌다. 이렇게 괜찮은 식사를 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맥주라도 사 오는 건데! 이런 밥에 술이 없다니 서운할 정도였다.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운 랜서가 아쉽게 젓가락을 내려놓자 아쳐는 주걱을 들고 물었다.
“더 먹을 건가?”
“...음!”
순순히 밥그릇을 내민 랜서는 다시 담긴 밥과 식탁에 남은 반찬들을 깔끔히 먹어치우고는 부른 배를 두들겼다.
그 사이 식탁을 깨끗히 치운 궁병은 제대로 된 포트에 홍차를 내와 랜서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랜서의 물음에 아쳐는 당황하지 않고 당당히 대답했다. 이미 그에게서 나올 질문을 오십여가지정도 상정하여 답변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그야 물론 혼자 먹는 식사가 적적하기 때문이지.”
“어.. 그러니까 외롭다고?”
“그렇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린이 없는 날엔 이곳에서 저녁을 먹어줬으면 좋겠군.”
“......”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 영령은.. 미간에 잉크로 거짓말을 하는 중입니다, 라고 써놓기라도 한 것처럼 뻔뻔한 얼굴이었다. 랜서는 짜게 식은 눈으로 아쳐를 쳐다보았지만 아쳐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단독행동 스킬을 가진 아쳐 클래스의 영령이 빈말이라 해도 혼자라서 외롭다고 지껄이는 꼴을 보다니 이번 성배전쟁은 정말 어떻게 된 건가 싶다.
“뭐, 이유를 말하기 싫으면 됐다. 어쨌든 이런 밥이라면 내가 이익이지. 언제든 불러만 달라고.”
하지만 랜서는 아쳐의 대답에 납득하지 않으면서도 더 캐묻지 않고 대충 넘겼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그리고 설마 정말로 먹을 걸로 회유하는 게 이렇게 잘 먹히게 될 줄은 몰랐다.. 고 생각한 아쳐는 씩 웃으며 승리감을 만끽했다.
랜서는 그 맞은편에서 이틀 뒤의 식사를 기대하며 마주 웃었다. 동상이몽이라는 한자성어를 그대로 붙여넣기한 듯한 토오사카저의 식탁이었다.